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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스데반(사도행전7:54-60)

예수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여러분 부형들이여!’라고 시작한 스데반의 설교는 메소포티미아에서 부름을 받은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최근에 이르기까지 유대인들의 허점과 배역함을 조목조목 지적했습니다. 따라서 늦게나마 그들은 가슴을 치며 통곡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찌할고’(행2:37)하면서 스데반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지를 않았습니다. 회개대신 패역을 선택했습니다. 그들은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렸습니다. ‘마음에 찔리다’는 말은 양심을 건드리는 말이 아닙니다. ‘양심에 찔렸다’는 말은 잘못을 뉘우쳤다는 말이지만, 여기에서 ‘찔려’는 그런 뜻이 전혀 아닙니다. 찔려 dieprivonto/‘디에프리온토’는 diaprivw/디아프리오(조각조각 톱질하다)의 수동태 복수동사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마음이 조각조각 톱질을 당했다’입니다. 자신들의 마음을 극도의 분노로 몰았습니다. 그러한 그들이기 때문에 자신들을 성령에 맡기지 않았습니다. 회개대신 이를 갈았습니다. 스데반의 설교가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두 죽일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음에 찔려 이를 갈았다는 것은 몹시 분노하여 절대로 가만둘 수 없다는 표현입니다. 이것이 패역한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영접할 기회를 영원히 놓쳐버리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저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할 때에도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쳐다보니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인자(예수님)가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사람들에게 외쳤습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이때의 군중들의 반응은 성난 이리떼였습니다. 스데반의 말을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았습니다. 모두 스데반에게 달려들었습니다. 예루살렘 성 밖으로 내쳤습니다. 그리고 돌로 쳤습니다. 스데반을 죽이려고 증인을 섰던 사람들이 옷을 벗어서 사울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스데반은 성난 이리떼들에게 무차별 돌로 침을 당했습니다.

스데반은 예수님을 인자라 불렀습니다.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다고 했습니다.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는 것은 이전의 예루살렘 성전예식을 벗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주께서 스데반을 시인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얼굴이 천사처럼 빛났다고 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유대인들은 마귀였습니다.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표적수사였고, 기획재판이었습니다. 이미 스데반은 죽어야 할 재판이었습니다.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으로 구성된 산헤드린은 예수님도 죽였습니다. 새롭게 시작한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눈에는 가시였습니다. 자기들의 교권을 튼튼히 하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이 자기들의 교권에 도전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스데반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마움과 귀에 할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들이 하는 짓만 옳은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순교를 당하면서도 스데반은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말라고 간구했습니다. 순교자 스데반은 집사로 임명을 받고, 충성하다가 설교자로 순교했습니다. 그들은 스데반의 죽음으로 교회가 끝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겉잡을 수 없는 선교의 확장에 돌입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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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배역했던 이스라엘(사도행전7:51-53)

이스라엘의 6일 전쟁(Six-Day War)이라 불리는 제3차 중동전쟁은 1967년 1967년6월5일-1967년6월10일 이스라엘과 아랍연합(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사이에 발생하여 6일 만에 종결된 전쟁입니다. 한마디로 이 전쟁은 말이 되지 않는 전쟁입니다. 6월5일/이스라엘의 이집트 공격, 6월6일/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장악, 6월7일/통곡의 벽(Waling Wall)과 성지(聖地) 예루살렘을 점령, 6월8일/이스라엘의 이집트군 완전 격멸(시나이반도 점령), 6월9일/이스라엘 골란고원(Golan heights)점령, 6월10일/전쟁 종료 6일 만에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전쟁결과 이스라엘 참전군 26만4000명 중 사상자 779명,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및 다른 아랍국가 참전군 30만 명중 사상자 2만 명입니다.

이후로 지구촌은 이스라엘의 정신을 본받고자 애를 썼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이스라엘의 정신을 본받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교회 밖에서 이스라엘의 정신을 본받자고 한다면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교회가 현재의 이스라엘을 본받자고 한다면 틀린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스라엘은 사람들이 본받을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모세시대 이후로 그들은 교만했습니다(목이 곧고). 여호와의 신앙을 철저하게 거부했습니다(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 항상 성령에 맞섰습니다(항상 성령을 거스려). 선지자들을 핍박했습니다. 의인들을 죽였습니다. 살인자들이었습니다. 율법을 전혀 지키지 않았습니다. 광야시대, 가나안정복시대, 왕정시대, 포로 귀환시대, 예수님시대를 막론하고 불순종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이스라엘을 본받을 것이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수많은 것들이 들어와 있습니다. 교회가 肥大(비대)해지다보니까 기업경영이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교회가 경쟁을 하다보니까 弱肉强食(약육강식)이 비일비재합니다. 이로 인해서 교회에 양극화현상이 뚜렷합니다. 교회의 양극화현상은 어떤 결과가 나타납니까? 복음이 복음답게 전해지지 않습니다. 약한 교회에서 애써 복음을 전하려고 할 때 경제력이 탄탄한 교회에서 훼방을 놓습니다. ‘저 교회보다 우리교회는 주는 것이 많아’라는 선물공세에서부터 시작해서 각종 불합리한 일들이 자행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교회가 혹시 이스라엘처럼 배역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그들도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긴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배역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하면서 혹시 스데반 같은 성도를 돌로 치지 않을까 생각해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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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의도를 모르는 이스라엘(사도행전7:44-53)

교회를 건물로 보는 사람과 하나님의 처소인 그리스도인의 몸으로 보는 사람에 따라서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뭐라고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척도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교회는 이스라엘 회중이 곧 교회였습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이 예배했던 장소는 성막과 성전(솔로몬)이었습니다. 신약시대에도 교회는 역시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었습니다.

마태복음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태복음18: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사도행전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야고보서1: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로마서1:5 또 저의 교회에게도 문안하라 나의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저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익은 열매니라

이상의 교회라고 하는 곳이 전부 건물을 지칭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건물은 예배처소일뿐입니다. 그러나 건물자체가 교회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라는 단어자체를 심히 혼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백억원내지 수천억원을 들여서 교회라는 건물에 천문학적인 돈을 쏟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이랗게 생각할 때 교회의 본질은 증발합니다. 그리고 본질이 아닌 엉뚱한 것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데반과 변론하고 있는 이스라엘이 그렇습니다. 광야에 있을 때에 성소가 있었습니다. 그 성소는 모세가 받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할 때에 가나안을 점령했습니다. 이스라엘과 함께 했던 언약궤는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에 입성하여 다윗 때까지 있었습니다. 다윗은 성전을 세우기 원했지만, 솔로몬이 성전을 세웠습니다. 이때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거할 처소가 어디냐’는 것입니다.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계실 곳이 어디냐는 것입니다.

이제 스데반은 이스라엘을 책망합니다. 그들은 목이 곧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마음과 귀가 열려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성령을 거스렸습니다. 조상들과 똑같이 선지자들을 핍박했습니다. 의인들을 못살게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자기고집에 얽매여 성도들을 잡아 죽였습니다. 그들은 과거나 현재나 조금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조상들이 하던 대로 잘못된 것들을 답습했습니다. 가장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야 할 사람들이 추악하게 배역했습니다. 스데반이 그들의 잘못을 제대로 지적했습니다. ‘너희조상과 같이 너희도 똑같구나.’ 성도들은 하나님의 의도를 항상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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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노예가 되고자 한 이스라엘(사도행전7:39-43)


‘복에 겨워서’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힘이 들어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을 때, 복에 겨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있는 것들을 다 가지고도 감당하지 못한 사람을 빗대서 하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실제로 많이 있습니다. 우리들 주위에도 있고,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도 있으며, 어디를 가나 이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러한 백성이었습니다. 430년을 이집트의 종살이를 면하게 하여 새로운 나라를 주시려는 과정에서 훈련을 견디지 못하고 제멋대로 행동을 했습니다. 그들은 모세에게 복종하고 싶은 마음이 추호에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제의를 거절했고, 모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항상 애굽을 향하고 있었습니다(출16:3).

왜 이러한 행동을 했습니까? 인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시내산에 들어간 모세가 40일간을 보이지 않자 모든 것이 틀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는 아론에게 그들이 섬길 신을 만들라고 위협했습니다. 모세는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만든 우상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습니다. 너무나 대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만든 우상에게 제사했습니다. 그리고 기뻐했습니다. 정말로 배은망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스데반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부터 바벨론 포로기까지 구약시대 전 기간에 걸쳐 우상숭배의 역사를 열거했습니다. 스데반은 아모스5:25-27을 인용했습니다.

25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사십년 동안 광야에서 희생과 소제물을 내게 드렸느냐 26 너희가 너희 왕 식굿과 너희 우상 기윤 곧 너희가 너희를 위하여 만들어서 신으로 삼은 별 형상을 지고 가리라 27 내가 너희를 다메섹 밖으로 사로잡혀 가게 하리라 이는 만군의 하나님이라 일컫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은 남북왕국 시대 말기에 예루살렘까지 우상숭배가 창궐했습니다. 하늘군대와 별 숭배는 광야시대부터 행하여져 익숙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시대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광야시대부터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반역심을 품은 것입니다. 그 근거가 ‘너희가 사십년 동안 광야에서 희생과 소제물을 내게 드렸느냐’입니다. ‘안 드렸다’는 질문입니다.

비단 이러한 마음은 이스라엘뿐이 아닐 것입니다.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배반하고 있습니다. 아담에서(죄에서) 태어나 그리스도(구원)로 살아가야 하는데, 역시 아담으로(죄로) 끝내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께 대한 지식도 없을 뿐만 아니라 알아도 배역하는 마음만 가득합니다. 그러나 선택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까지는 선택할 수 없습니다. 예수를 죽이고, 사도들을 죽이고, 스데반을 죽이는 일은 자유였지만, 낙원을 선택할 수는 없었습니다. 죽을 때까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배반했던 유대인들처럼 사는 사람들은 낙원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반역심은 그 자신을 멸망시키는 첩경입니다. 그 자신을 영원히 매장시키는 지름길입니다. 유대인들은 스데반을 죽였습니다. 그 자신들은 더 참혹한 죽임을 당합니다. 지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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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교회(사도행전7:38)

시내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및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생명의 도를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스데반의 변증은 계속되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말하던 천사와 함께 광야교회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광야교회(th'/ ejkklhsiva/ th'/ ejrhvmw/)에서 생명의 말씀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우리(이스라엘)에게 주었다고 했습니다.

‘교회’라는 말을 사람들이 많이 쓰고 있습니다. 정통교회에서 교회라고 하고, 이단들도 자신들을 교회라고 하며, 로마-카톨릭도 자신들의 소집장소를 교회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십자가만 걸려 있으면 무조건 교회라고 말합니다. 과연 십자가만 걸어놓고, 성경을 사용하기만 하면 교회일까? 영어 church는 헬라어kuriakov"(퀴리아코스)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이 말은 “주께 속하였음”을 뜻합니다. 헬라어 to; kuriako;n(토 퀴리아콘)은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드리기 위하여 모이는 장소를 지칭했습니다. 이후에 주님의 ‘신령한 건물’인 신자들 자신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의미가 변화하면서 church는 영어성경에서 ‘퀴리아코스’에 대한 번역보다ejkklhsiva(에클레시아)에 대한 번역어로 쓰였습니다. 습관적으로 번역가들은 에클레시아를 church로 번역했습니다. 이로서 영어성경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묘사하는 성경의 풍성한 의미를 놓쳤습니다.

구약교회를 보면 창세기3:15에서 하나님은 뱀이 흙을 먹을 것이며, 인류와 투쟁하나 결국 상하게 될 것이라고 선고합니다. 이래서 창세기3:15을 원시복음(protoevangelion) 또는 최초의 복음이라고 합니다.점점인간의 죄가 만연되고 증가하더라도 자신의 피조물들에 대해 길이 참으시고 인내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하나님께서는 창세기와 족장들과 언약을 맺으심으로서 교회를 드러내셨습니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의 백성을 카할(lh;q;)에다(hd:[e)로 묘사했습니다.카할(qahal/출12:6)은 ‘부르다’는 ‘콜(l/q/qol)에서 유래한 말로 ‘회중’을 의미합니다. 에다(edah/출12:6, 민12:6)는 ‘지정하다’의 ‘야아드’(d['y:)/yaad)에서 유래한 말로 ‘회중’을 의미합니다.‘카할’은 백성을 그들의 집단적인 자격으로 지시하고 일정한 목적을 위해서 모인 이스라엘 백성의 총회를 말합니다. 구약의 교회나 신악의 교회나 모두 하나님의 백성을 말합니다. 그러나 구약의 교회는 한정적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신약의 교회는 그 범위가 이방으로까지 확대되었습니다.

And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사도행전7:37)

 

사도행전7:37이스라엘 자손을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신18:15)

신명기 18:15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찌니라

사도행전3:22-23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 모든 말씀을 들을 것이라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 하였고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는 심오한 말입니다. Cavin은 ‘한 선지자’라는 표현이 대치법(enallage/단수로 복수를 나타내고 현재로 과거를 나타내는 표현법)으로써 많은 선지자들을 나타내는 데에 사용되고 있는 것이라 했으며, 혹자들은 ‘한 선지자’를 ‘여호수아’나 ‘예레미야’로 한정시키는 것은 어리석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로는 계속적으로 교회의 통치를 다루고 있고, 하나님께서 잠시 동안 행하실 것들을 말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표현을 그리스도께만 적용하는 것도 올바르지 못하다고 했습니다. ‘…와 같은’으로 번역된 불변화사는 항상 동등을 나타내지는 않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많은 선지자들이 모세와 같지는 않았으나,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에 계속적으로 선생들을 보내셔서 모세가 행한 것과 같은 일을 수행하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 증거를 그리스도께 적용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행3:23). 이것은 하나님의 다른 종들을 배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것은 동시에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은총을 경고하기 위함이라 했습니다. 베드로가 그리스도와 관련시켜서 매우 적절하게 해석했다 했습니다(Calvin, 2003, 427-429).

Keil & Delitzsch는 모세가 말한 약속은 어떤 특정한 선지자를 말하거나 직접 배타적으로 메시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선지자를 보내는 것을 다룬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로는 거짓선지자와 참선지자를 뒤에서 말하기 때문에 특정한 선지자를 언급하지 않는 것이라 했습니다. 언제든지 백성들이 모세와 같은 하나님과의 중재가 필요하다면 하나님은 한 선지자를 보내시리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약속된 선지자는 모세를 닯게 되고 그가 여호와와 그 백성간에 중개자 역할을 하여 주님의 말씀이나 뜻을 알게 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메시야를 배타하는 약속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메시야에 대한 기대가 모세와 그의 시대의 이스라엘에는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며, 실제적으로 여자의 자손에 대한 약속과 야곱의 실로(Shiloh)에 관한 예언에서 표현되었기 때문입니다. O. V. Gerlach에 의하면 완전하고 진실한 선지자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며, 창세기3:15에 나온 여자의 자손 중에 나온 그를 가리킨다고 했습니다.예언의 성격이 응집되고 완성된 그리스도는 포함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선지자 중의 선지자가 야곱을 원상대로 놓을 것이라 했습니다(Keil & Delitzsch, 1992, 188-189).

Matthew Henry는 이스라엘의 여러 세대동안 일어날 예언자들의 계승에 대한 약속이라고 했습니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반면 선지자들은 사람들의 실수를 책망하고 자기들의 의무를 상기시켜주며 다가올 일들을 예언하며 심판을 경고하고 위로하는 선지자들이라 했습니다. 이런선지자들을 가짐으로써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 복술을 사용할 필요가 없고, 요귀와 통하여 점치는 자들에게 문의할 필요도 없다고 했습니다. 나아가서 ‘한 선지자’는 메시아이신 우리 주 예수께 적용된다고 했습니다(Matthew Henry, 1982, 252).

F. F. Bruce는 모세의 말이 일차적으로 하나님께서 자기의 뜻을 그의 백성들에게 알리실 목적으로 제정하신 한 방도로서 이스라엘의 선지자제도를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시대 이전까지 이 예언은 특별한 한 선지자 즉 모세가 행하였듯이 선지자의 완전한 중보적 역할을 감당하는 제이의 모세를 가리키는 예언으로 해석해왔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인들, 에비온파 사이 정통유대인들은 메시아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의 모습으로 묘사되었다는 것입니다(F. F. Bruce, 1986, 117-118).

하나님의 뜻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밝히 계시해줄 한 선지자로, 이 선지자는 모세와의 연관성 속에 율법해석의 권위와 정통성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선지자는 궁극적으로는 온 인류의 대속자로 오시사 하나님의 구원섭리를 십자가 죽음으로서 이루신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말한다고 했습니다(가스펠서브, 2005, 651).

Edward J. Young은 이스라엘은 새 땅에 들어가기 전에 그곳의 가증한 행위들을 가르칠 사람들에 관하여 경고를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가증한 행위들을 피하기 위해 여호와의 말씀을 들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스스로는 죄악 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알아서 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기관을 선물로 주신다고 했습니다. 왜 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선지자가 필요합니까? 그들이 가야 할 땅은 각종 미신들이 횡행하고 있었습니다. 가나안족속들은 스스로의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가증해졌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 그들의 마술과 점술을 듣는다면 출애굽을 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선지자를 일으키신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만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일으키실 선지자는 이스라엘 사람이어야 했고, 모세와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세 같은 선지자라는 것은 모세가 하나님을 대표하는 중보자이듯 그 선지자도 또한 그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에는 두 종류의 중보자가 있었습니다. 제사장과 선지자였습니다. ‘선지자 하나’(aybin:/nâbîy’/나비)는 단수입니다. 단수명사라고 해서 구약시대의 어떤 개인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무리도 아닙니다. 즉 선지제도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제도가 이스라엘에게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가 순전히 이스라엘의 과거에만 적용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신명기 18장의 이 말씀은 신약성경인 요한복음5:45-47, 5:43, 요한복음12:48,49, 마태복음17:5, 사도행전3:22,23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신명기18장은 이중의 예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말씀을 선포할 一群(일군)의 선지자들의 선지기관이 있을 것이다’와 한분의 위대한 선지자가 나타나실 것이며, 그분이 홀로 모세와 같은데, 모세와 비견될 수 있는 분으로 곧 메시야라는 것입니다(Edward J. Young, 1981. 153-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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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굽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사도행전7:30-36)

인간(아담)의 범죄로 인해서 인간이 에덴에서 쫓겨났습니다. 한 부류(가인)는 에덴 동편 놋 땅으로(창4:16), 에덴동산에서(아담) 쫓겨났습니다. 한동안 이들의 후손은 만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몇 백 년이 지나자 이들의 후손들이 만났습니다. 급기야 하나님의 아들들이(셋의 후손들)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서로 만나서 혼인을 했습니다(창6;2). 결국 경건한 셋의 후손들과 경건치 않은 가인의 후손들이 섞였습니다. 이 가운데서 엄청난 죄가 발생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6:5).도저히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될 상황이었습니다. 심판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몰로 온 세상을 쓸어버렸습니다. 이때 지구를 위해서 노아를 택하셨습니다. 이후로 셈으로 이어져 아브라함, 이삭, 야곱, 유다로 이스라엘의 족보가 이어집니다.

모래알 같이 많은 사람 중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메소포타미아에서 선택하셨습니다. 이미 사람들이 악해서 온 세상을 심판했지만, 심판 후에도 또 악했습니다. 물로 심판할 때 노아의 식구 여덟이 있었지만, 그 가운데에 이미 아담이 상속해준 죄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심판으로는 인간의 죄를 해결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선택하셔서 이 세상을 구원하실 근거를 마련하시기로 했습니다. 아브라함에서 그리스도예수까지의 사이에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존재케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원시키고자 하셨습니다. 이미 미디안에 보내서 낮아질대로 낮아진 모세에게 어느 날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모세는 그의 120년 생애를 첫째 40년은 애굽의 궁중에서 보냈습니다. 둘째 40년은 미디안에서 보냈습니다. 셋째 40년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냅니다.

둘째 40년이었을 때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정말 기이한 것은 떨기나무가 불에 타고 있으면서 쓰러지지 않은 것입니다. 결국 가까이 간 모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겠다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신음하고 고통하는 소리를 듣고 구원하려 왔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설득당하여 애굽에 가게 되었습니다. 스데반은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세웠느냐고 거절하던 그를’ 이제는 지도자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그의 인도로 이스라엘은 애굽을 나왔습니다. 홍해를 건넜습니다. 광야에서 40년간을 표적과 기사를 보였습니다.

우리들은 참으로 연약합니다. 많은 위험 속에 있는 노출되어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러한 우리를 주님께서는 부르셨습니다. 부르신 우리들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 없는 천사를 시켜서 복음을 전하지 않게 하시고, 죄인인 우리들을 불러서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왜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까?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살리시고 복을 주시기 위해서 복음을 만방에 전하게 하십니다. 스데반도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순교를 했습니다. 우리에게까지 온 복음은 큰 대가를 치르고 도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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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굽인이 아니라 히브리인(사도행전7:23-29)


모세는 여태까지 자신이 애굽의 왕자인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차기 왕의 수업에 열중했습니다. 애굽의 모든 문물을 습득했습니다. 이집트의 학술에 능통했고, 말과 하는 행동이 애굽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이집트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자신은 이집트사람들이 그렇게 박해하고 증오하는 히브리인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모세는 심히 갈등했습니다. 40이 된 그는 자신의 백성을 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자손들이 노역현장에서 고생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습니다. 모세는 날마다 노역현장에 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한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집트의 감독자가 히브리사람을 괴롭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모세는 그 이집트인을 죽였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의 백성을 돌볼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손을 빌어서 구원하여 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사람들은 모세에게 냉냉했습니다. 모세의 마음을 전혀 멀라주었습니다.


이집트인을 죽이고 난 이튿날이었습니다. 다시 노역장에 나간 모세에게 히브리사람들끼리 다투었습니다. 모세는 동족을 위하는 마음으로 나아가 그들을 서로 화해시키려 했습니다. 형제들끼리 왜 다투느냐고 했습니다. 그러자 전혀 뜻밖의 상황에 돌입하게 만들었습니다. 너를 우리의 재판장으로 세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어제 이집트인을 죽인 것 같이 이번에는 나를 죽이려하느냐고 말했습니다. 결국 모세는 살인자라는 사실이 밝혀져 미디안으로 도망을 가야 했습니다. 모세는 왕자에서 죄인으로 떨어졌습니다. 차기 이집트의 실권자가 평민으로 전락했습니다. 미디안은 광야입니다. 미디안은 애굽의 생활과는 판이한 곳입니다. 메마른 곳입니다. 미디안에 아무런 연고도 없습니다. 무작정 탈출한 곳이 미디안이었습니다. 모세는 드디어 고난의 신학원에 입학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배우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고난을 받을 뿐이었습니다. 고난이 모세를 성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미디안에서 한 일이 무엇입니까? 모세는 미디안에서 제사장의 딸 십보라와 결혼을 했습니다. 거기에서 게르솜이란 아들을 낳았습니다. 모세는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드로의 양무리를 기른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시내산을 바라보며 애굽의 히브리민족을 생각하는 일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쉬워하는 일뿐이었습니다. 그 외에 도망자로서 그가 할 일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매일매일을 보냈습니다. 그러기를 40년이었습니다. 그는 점점 무력해졌습니다. 갈수록 동족에 대한 그리움은 있었지만 무력한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모세는 미디안의 신학원에 입학한 줄을 몰랐습니다. 총장이신 하나님께서 학점을 체크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부를 날이 있음을 전혀 몰랐습니다. 십보라와 그저 그렇게 사는 것이 인생일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있는 자리에서 갖은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지키고 있다는 것을 늘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늘 우리를 하감하시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늘 하나님이 동행하고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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