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새벽강해'에 해당되는 글 26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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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출애굽기37:17-24)
성소에 놓을 등대는 精金/정금 한 달란트를 쳐서 만들었습니다. 등대 가운데 한 줄기가 있고, 양편에 각각 3가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가지가 모두 등잔은 살구꽃 형상입니다. 등대는 성막에 있어서 가장 화려하게 꾸며진 성물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등대는 純金/순금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세 가지가 양쪽에서 각각 위로 향하도록 되어 있는 6개의 곧은 지주로 되어 있었습니다. 등대는 아침저녁으로 손질되어야 했습니다. 또 전부를 한꺼번에 끄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정기적으로 순수한 감람유로 채웠습니다.
여호와는 모세에게 성소에 일곱 등불을 떠받치는 등대/hr:/nm]/mĕnȏrāh를 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일곱 등불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완전한 주권을 상징합니다. 일곱 등잔불의 빛은 항상 불타야 합니다. 아침 저녁으로(까지) 정리해야 합니다. 이 등불이 꺼지지 않기 위해서 제사장들은 항상 신경을 써야 했습니다. 등대에 쓰는 기름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감람열매를 찧어 낸 순결한 기름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등불을 정리하는 동안 수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의 기도를 상징하는 향을 불살라야 했습니다(출30:7-8).
사무엘하21:17(왕상11:36)에서 다윗의 죽음은 이스라엘의 등불이 꺼짐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을 복된 상태로 인도하는 유일한 자로 간주되었습니다. 다윗은 고백하기를 여호와는 그의 등불(삼하22:29)이라 했습니다. 여호와는 흑암에서 그의 길을 비추이십니다(요3:20-21). 우리를 축복의 상태로 이끄신 분이십니다(잠13:9, 욥29:3).
하나님의 지도자들은 자기 백성을 제사장 민족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모든 민족들을 예배로 하나님께 인도해야 합니다. 스가랴4장을 보면 그치지 않고 계속 기름(성령)을 공급 받는 등대(즉 구약교회)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의 상징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빛이라는 것입니다(마5:14). 그래서 우리들의 등불은 항상 타고 있어야 합니다(눅12:35, 빌2:15). 계속 사람들 앞에 비추어야 합니다(마5:16). 그리하여 불경건한 자를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복된 기대와 예비의 상태에 있게 해야 합니다.
신약성경에서도 등대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등대에서는 빛이 나옵니다. 빛은 생명입니다. 빛이 없으면 생명이 없습니다. 빛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과 누구든지 관계가 없으면 죽음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등대처럼 빛을 발해야 합니다. 빛을 발하지 않는 등대는 있으나마나한 등대입니다. 바다의 등대도 빛을 발해야 제 기능을 다하는 것입니다. 성소의 등대도 타올라야 합니다. 타오르지 않으면 기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등대가 계속 타도록 손질을 해야 합니다. 꺼지지 않도록 기름을 공급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입니다.
떡상(출애굽기37:10-16)
Hollywood에서 가끔 배우들과 영화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아침 식사를 나누는 모임이 있습니다. 한 번은 미국의 최고 미인 열 명중의 한 사람인 여배우가 등단했습니다. 이 여자가 마이크 앞에 나오자 박수가 요란했습니다. 그때 그녀는 대뜸 “여러분! 나는 지금 사랑에 빠졌습니다!”라고 말하자 누군가가 “도대체 그 행운을 잡은 사나이가 누굽니까?” 여자는 거침없이 대답했습니다. “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나는 그분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영화도 그만두려고 합니다.” 그 여자는 자신의 말처럼 할리우드를 떠났습니다. 후에 목사의 아내가 되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념하였습니다. 그 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누군가가 그에게 질문했습니다. “당신은 할리우드의 명예와 부를 물리치고 예수님을 택하신 일에 전혀 후회가 없습니까?” 그녀는 “할리우드의 스타나 영국 여왕의 자리도 지금의 저와는 바꿀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저에게 이처럼 귀하신 분이십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결코 예수그리스도를 안 사람은 그를 떠날 수가 없습니다.
브살렐이 떡상을 만들었습니다. 조각목으로 가로100cm, 세로50cm, 높이75cm로 만들었습니다. 정금으로 떡상을 쌌습니다. 돌아가며 금테를 둘렀습니다. 그리고 떡상에 놓는 각종 기구를 만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하셨습니다. 또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떡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으로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먹어야 사람이 영생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소에는 항상 생명의 떡인 말씀이 진설되어 있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하늘로서 내려온 생명의 떡을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예수님을 한 위인처럼 생각합니다. 좋은 말씀과 모범으로 산 사람으로만 여깁니다. 생명을 주시는 영생하게 하시는 분으로는 여기지 않습니다. 이것이 사람들의 실수입니다. 예수님을 인간으로는 여기지만 생명을 주시는 떡으로는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생명의 길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생명의 낙원이 들어가지 못하고 사전에 이탈해버립니다. 오늘 우리들은 생명의 떡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의뢰해야 합니다. 떡이 되신 생명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생명의 떡이신 하나님의 말씀에서 떨어지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들의 살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생명의 떡을 우리가 먹을 때 비로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살아있음을 감사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안에서 항상 떡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입니다.
언약궤(출애굽기37:1-9)
브살렐이 조각목으로 궤를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시하신 “궤”였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언약궤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 가운데 계신다는 보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말해왔습니다.
세계의 中心은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의 中心은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의 中心은 성전입니다. 성전의 中心은 지성소입니다. 지성소의 中心은 법궤입니다. 법궤의 중심은 십계명입니다.
법궤는 많은 이름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1.법궤(레16;2) 2.궤(출25;10,14,15, 신10;1,2,3, 수3;15, 왕상8;9) 3.증거궤(출26:33,34, 30;6, 39;35, 40:3) 4. 하나님의 궤(삼상3:3, 수3:13) 5.여호와의 궤(삼상6:1, 수3:13, 4:5) 6.거룩한 궤(대하35:3) 7.권능의 궤(시132;8) 8.이스라엘 신의 궤(삼상5:7) 9.여호와의 언약궤(민10:33) 10.나무궤(신10;1)3. 법궤 속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는 십계명과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만나 항아리가 들어있다고 생각합니다. 히브리서 9:3-4에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라고 해서 우리가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성소 안에는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었습니다. 이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이 기록된 두 돌판이 들어있었습니다. 그 안에 “ejn h|/”의 ejn‘엔’ 은 꼭 “안에”라는 뜻만 있는 것이 아니고 “곁에”라는 뜻도 있습니다. 따라서 “그 곁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가 있었다고 해야 합니다. 열왕기상8:9;역대하 5:10에는 그 궤안에 모세가 호렙산에서 넣은 두 돌판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 것도 없으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여호와께서 저희와 언약을 세우실 때에 모세가 호렙에서 그 안에 넣은 것이더라(왕상8:9)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것도 없으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나온 후 여호와께서 저희와 언약을 세우실 때에 모세가 호렙에서 그 안에 넣은 것이더라(대하5:10)
언약궤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표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시는 표준이었습니다. 언약궤위에는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세키나”가 머물러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막의 감격적인 진리를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인간이 지킬 수 없는 파괴된 율법과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진노 사이에 어린양의 피가 중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은 항상 언약궤를 어깨에 메고 다녀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상징적으로 이스라엘과 같이 있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언약궤를 그들 가운데 두게 하셨습니다. 물론 성소에 있었지만 그들과 함께 하시게 하였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교회에는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우리에게 바라시는 소원입니다.
등대 (0) | 2011.12.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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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상 (0) | 2011.11.29 |
휘장 (0) | 2011.11.25 |
길은 오직 하나님께 (0) | 2011.11.22 |
성막을 고정하기 위한 띠 (0) | 2011.11.21 |
휘장(출애굽기36:35-38)
성소에는 두 휘장이 있었습니다. 한 휘장은 성소로 들어가는 휘장입니다. 다른 하나는 지성소로 들어가는 휘장입니다. 지성소의 휘장은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이곳은 아무나 드러가지 못하도록 두꺼운 휘장으로 가로막혀 있었습니다. 죄로 인해서 장치된 만들어진 것입니다.
26:31-33절을 보면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세마포)로 짜서 장(휘장) tk,r<P 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 위에 그룹들을 정교하게 수를 놓아야 했고(31), 금갈고리로 네 기둥위에 드리워(걸어)야 했습니다. 그 네 기둥을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싸야 했습니다(32). 그 휘장을 갈고리 안에 걸어 놓은 후에 증거궤를 그 휘장안에 비로소 들여놓아야 했습니다. 그 “포레케트”가 성소vd<Qoh'/haqhōdesh/‘하코데쉬’와 지성소vd<q? vd<q?h'/haqōdesh qōdesh/하코데쉬 코데쉬를 구별했습니다. 안쪽의 방 곧 지성소에는 은총의 보좌가 있는 방이었습니다. 이 휘장의 역할은 성소와 지성소를 구별힙니다. 성소와 지성소를 구별하여 철저하게 하나님의 거룩성을 인간에게 알리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만일에 인간들이 범죄하지 않았다면 이러한 구별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만나는 관계가 어려워졌습니다. 힘들어졌습니다. 어떠한 사람들은 영원히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죄는 인간들을 하나님과 분리했습니다. 죄는 인간들을 얽매어 놓았습니다. 사망이라는 것에 얽매이게 했습니다. 이 땅의 것에 얽매이게 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할 수만 있으면 떨어져 살게 했습니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들을 분리시켰습니다. 두꺼운 휘장(15cm)이 하나님과 인간들을 분리시켰습니다. 성경에서 강조하는 점은, 죄란 매우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죄의 영향은 여러 가지 면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죄는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칩니다. 죄는 또한 죄를 지은 자신에게도 영향을 미칩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칩니다. 죄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가지고 있던 관계에 직접적인 변화를 초래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친밀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순종하였습니다. 그러나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막혀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하여진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여자의 후손을 보내어서 다시 회복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셨을 때 휘장이 찢어진 이유가 바로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휘장이 찢어짐으로 하나님께 가는 길이 회복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것도 바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가없는 사랑과 은혜입니다. 자신의 아들을 죽기까지 내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소의 휘장은 오랫동안 사람들을 격리시켰습니다. 인간의 죄로 인해서 격리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휘장을 찢은 것입니다. 인간의 편에서는 도저히 찢지 못할 휘장을, 그러나 찢어져야 할 사랑을 예수님이 찢은 것입니다.
떡상 (0) | 2011.11.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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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궤 (0) | 2011.11.27 |
길은 오직 하나님께 (0) | 2011.11.22 |
성막을 고정하기 위한 띠 (0) | 2011.11.21 |
성막을 세우기 위한 널판 (0) | 2011.11.18 |
길은 오직 하나님께
미가1:1
몇 년 전에 우리나라 아이들의 주관적 행복감을 조사했습니다.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행복감 성적이 71.6점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최하위였습니다. 1위는 그리스였습니다. 114.2점으로 우리나라보다 40점 이상이나 높았습니다. 주관적 행복감은 건강 만족도, 학교생활 만족도, 주관적 행복도로 조사했습니다. 이에 비해 학업열망, 교육 참여 등 교육열의는 2위였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부모나 사회의 요구에 따라 거의 맹목적으로 학업성취를 높여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아이들은 건강이나 취미활동 등은 아예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현재 느끼고 있는 생활만족도는 거의 zero입니다. 우리나라사람들이 현재보다 수입은 배나 많아야 합니다. 그리고 지출은 배나 줄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휘발유 값이 최소한 1000원은 인하해야 합니다. 통신비도 현재보다 1/3수준이어야 합니다. 그 외 생활지출비 등이 역시 1/2로 줄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꿈이 요원하기만 합니다. 즉 밝은 미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700년 전인 유대에 미가시대도 그랬습니다. 양상은 다르지만 혼란의 시대였습니다. 정치지도자와 하나님과 소통이 없었습니다. 정치하는 사람들과 백성들이 소통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유다와 예루살렘이 혼란했습니다. 1절 상반절을 보면
유다 열 왕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I. 어두운 세상 안에 서 있는 우리들(1a).
Greece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깜깜한 밤에 소경이 등불을 들고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사실 소경은 등불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가다가 다른 사람하고 부딪히면 괴롭습니다. 그러므로 소경이 등불을 켜고 길을 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불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 불이 간다.’라고 광고하는 불입니다. 그런데, 얼마를 가다가 어떤 사람과 부딪혔습니다. 이 때 소경이 자신 있게 한마디 합니다. “여보시오, 눈이 없소? 이 등불이 보이지도 않소?” 그 때 맞은 편 사람이 말했습니다. “당신이 등을 가지고 있는 줄은 몰라도 불이 꺼졌소.”
오늘 이 시대가 그렇습니다. 이 소경의 모습이 우리들의 시대와 大同小異합니다. 아주 어두운 시대입니다. 자신의 불들은 이미 꺼진지 오래인데, 문제가 생기다보니 다른 사람들이 잘못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잘못해서 현재 이런 꼴이라는 것입니다.
현재 이 나라는 좌파와 우파로 나뉘어 있다고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좌파는 반드시 척결해야 한다고 강우파정책을 쓰고 있습니다. 좌파를 먼저 척결해야 경제가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미가시대 역시 혼란의 시대였습니다. 미가는 유다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선지자입니다. 요담 왕은 선한 왕이었으나 우상을 섬겼습니다(왕하15:32-36). 아하스 왕은 우상숭배에 친앗수르정책자였습니다(왕하16:1-16). 히스기야 왕은 반앗수르정책을 편 왕이었습니다(왕하18:1-7).
겉으로 보기에는 괜찮은 왕들이었습니다. 이목구비 번듯하고 왕다운 면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상을 미치도록 섬겼습니다. 여호와를 섬기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의 마음을 읽지 못했습니다. 요담과 아하스가 그랬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인기가 있었습니다. 우상을 섬기던 자들과, 여호와를 싫어하는 국제주의자들이었는데 인기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은 절대로 국제사회에 얼굴을 들이밀지 말라고 했습니다. 국제화를 아예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왕들이 국제사회에 얼굴을 들이밀었습니다.
왕이 국제주의자이고, 우상을 섬기다보니 사회의 곳곳이 엉망이었습니다. 극악한 사회범죄가 그칠 날이 없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살리는 것이 아니고 강대국들이 자신들을 살린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번영케 하는 것이 아니라, 바알과 아스다롯이 번영케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왕은 강대국들의 사신을 극진히 대접했고, 강대국들의 우상을 수입했습니다. 그들의 종교제도를 본떠서 그대로 하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속에서 이미 멀리 떠났습니다. 우상의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제사장들보다 계급이 높았습니다. 우상의 제사장들이 대접을 잘 받았습니다.
상황이 이러다보니 유다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무시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무시하니까 종교적인 생명력이 사라졌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모두 다 하나님의 길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을 떠남으로서 죄를 저질렀습니다. 하나님을 진노케 했습니다. 이들의 죄는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는 죄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추악한 죄를 저지르는 죄였습니다. 하나님의 직원들이 하나님의 길을 몽땅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길을 버리면서도 안전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모시고 섬길 때 안전한 나라였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절대로 안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하나님을 떠나고도 안전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왕과 왕족들이 강대국들과 친하니까(Friendly) 걱정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왕이 강대국의 Friendly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안위는 걱정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이스라엘이 그 어느 때보다 안전하다고 가르쳤습니다. 무조건 복되다고 광고했습니다. 바알과 아스다롯이 우리에게 비를 주고 풍년이 들게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거짓자들은 입만 열면 평강이었습니다. 입만 열면 ‘복되다’였습니다. 왕이 하나님을 떠나도 평강,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도 평강,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떠나도 평강이었습니다. 잘못된 신앙이 이들을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Micah 때의 유대 지도자들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택하여, 여호와의 백성으로 삼으셨고, 예루살렘에 그의 성전을 세우셨기 때문에, 그들은 어떤 재앙도 당하지 않을 것이며, 절대로 안전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실은 없고 외형만 있었던 그들이 절대 안전을 철썩 같이 믿고 있었습니다.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이런 때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런 혼란의 시대에 무엇을 보아야 합니까? 빛을 보아야 합니다. 칠흑같이 어두움에서도 우리는 빛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떠나면 가장 심각한 문제가 도래합니다. 사회정의에 무관심해버립니다. 교회 안에 거룩함(聖)과 속됨(俗)이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그로인해 교회와 국가와 사회는 더 이상 소망이 없습니다. 총체적으로 부패하게 됩니다. 결국 그 국가와 사회는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 죄를 정화하기 위해서 Micah를 보낸 것입니다. Micah는 총체적으로 죄 속에 파묻힌 이스라엘과 유다를 구하기 위해서는 예수그리스도가 와야 한다는 해결책을 제시합니다(미5:4).
성도여러분!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Friendly가 아닙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Friendly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상의 Friendly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Friendly여야 합니다. 잘못했을 때는 하나님께 회개해야 합니다. 잘못된 신앙을 소유하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과감히 주님 앞에 회개하고 다시 출발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들이 온전해집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앞날이 밝습니다. 어둠속에서도 빛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회에 내 신앙이 젖어있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안전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휘둘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들에게 미래가 있고, 미래가 밝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우리를 힘들게 하고, 우리를 괴롭혀도 정말 우리들은 하나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영역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늘 하나님의 지역 안에서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언제나 하나님 안에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기를 바랍니다.
오늘 두 번 째로
II. 이 세상 안에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1a).
Moresheth 사람 Micah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 곧 Samaria와 Jerusalem에 관한 묵시라.
미가는 Moresheth사람입니다. Moresheth은 그다지 유명한 지역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에서 약 백리 떨어진 지역입니다. 이 Micah에게 보여준 환상은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한 미래였습니다. Micah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환상은 심판의 환상이었습니다. Samaria를 심판하시는 말씀입니다(미1:2-7). Jerusalem을 심판하시는 말씀입니다(1:8-16). Samaria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입니다. Jerusalem은 남왕국 유다의 수도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전체를 심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Micah를 통하여 이스라엘과 유다를 심판하신다고 통지를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인데 가만두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방의 백성들이 와서 짓밟아도 침묵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기도해도 안 들으시고, 모른 체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왜 그들을 심판하십니까? 한 군데도 성한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까 말한 대로 최고 통치자는 하나님의 Friendly가 아니고 강대국의 Friendly였습니다. 왕족들은 왕의 Friendly였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우상의 Friendly였습니다. 백성들도 하나님의 Friendly가 아니고 우상들의 열혈 Friendly였습니다. 이러다보니 이들이 심판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런 상황인데 거짓자들은 사람들에게 거짓희망을 불어넣었습니다. ‘걱정 없다’, ‘염려하지 마라’ ‘잘 될 것이다’ ‘절대로 우리는 망하지 않는다’ 우리를 좋아하는 Friendly들이 그렇게 많은데 어떻게 망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말들이 먹혀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은 자격증이 있는 선지자라는 것입니다. 누가보아도 예루살렘의 선지자의 말이 맞겠지, 이름도 없는 Moresheth 출신 선지자가 맞겠냐는 것입니다. 서울에, 또는 대도시 그리고 이름 있는 목사가 그래도 낫지, 시골교회의 목사, 개척교회의 목사, 소형교회의 목사가 낫겠느냐는 것입니다. 사람의 인지도를 보라는 것입니다. 방송설교 팡팡 나오고, 부흥회를 수백 번 인도한 목사인데, 까불지 말라는 것입니다. 같은 복을 빌어도 훨씬 낫다는 것입니다. 급이 낮아도 새카만데 저런게 목사냐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생각에 목사들이 급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신 양 말하고 생각하며, 자신들을 높입니다.
‘인지도’란 어떤 사람이나 물건을 알아보는 정도입니다. 과연 사람의 인지도를 얼마나 바르게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습니까? 사람의 인지도를 어떻게 측정합니까? 신문과 방송이 측정합니다. 과연 신문과 방송이 정확하게 사람을 검증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유명한 목회자들 한 순간에 무너지는 것을 우리들이 보고 있습니다. 유명한 사람들이 범죄에 연루되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법무부 장관을 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위장전입을 했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을 했습니다. 국토해양부장관을 하겠다는 사람이 부동산 투기를 해서 엄청난 차익을 챙겼습니다. 이것이 인지도입니다. 그래서 인지도란 믿을 것이 못됩니다.
미가는 Moresheth 사람이라 했습니다. 즉 인지도가 없는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미가에게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셨습니다. 환상을 보게 하셨습니다. “미가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예루살렘에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해서 말씀이 오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모하는 자에게 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이 살아 있는 자에게 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에게 옵니다. 미가는 예루살렘에서 100리나 떨어진 이름 없는 선지자입니다. 이 이름 없는 선지자에게 이스라엘 전체를 심판하신다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어야 합니까? 믿지 말아야 합니까? 믿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인증했기 때문입니다.
참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는 자들은 입만 열면 “축복”입니다. 그래서 “신년대축복성회, 축복교회, 축복기도회”등입니다. 입만 열면 ‘잘 될거야’, 입만 열면 ‘평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들과 종들은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죽인다고 하신다’입니다. 그러니 인기가 없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성도들이 적은 것은 당연합니다. 이왕이면 교회가 긍정적이어야지 맨 날 “하나님이 너희들 가만 안 둔다”고 하니, 교회를 가면 답답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Micah 역시 긍정적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답답한 사람이었습니다. 긍정적인 사람이 아니고 부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혼란의 시대에 말 한 마디라도 긍정적이어야지, 부정적으로 하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Micah의 예언은 부정적이었습니다. 선지자들은 모두 부정적으로 예언을 했습니다. 예로 북왕국 이스라엘의 오므리와 아합은 북왕국 이스라엘을 탄탄대로에 올려놓을 일을 했습니다. 이들이 얼마나 유명한지, 근동에서 오므리 왕은 팔레스타인을 ‘오므리의 집’이라고 할 만큼 유명했습니다. 모압과의 전쟁에서 외교적으로 탁월하게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13절의 짧은 사적만 할애했습니다(왕상16:16-28). 아합은 시리아와의 전투에서 대승을 했지만, 성경은 이 부분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부정적으로 표현합니다. 참으로 능력 있는 통치자였지만(오므리의 행한 …권세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왕상16:27), 그는 사악한 통치자라고 성경에 기록되었습니다.
왕상16:25 오므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더욱 악하게 행하여,
왕상16:26 …그가…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발케 하였더라,
미가 6:16 너희가 오므리의 율례와 아합 집의 모든 행위를 지키고 그들의 꾀를 좇으니….
성경과 선지자들은 오므리와 아합을 죽어야 할 자, 벌을 받아야 할 자로 묘사했습니다. 사람들은 원래 죄인이기 때문에, 늘 책망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기자들이며, 선지자이며, 선견자들의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부정적으로 말합니다. 아담의 타락이후로 ‘너희들은 이 세상의 사람들과 같이 살지 마’입니다. ‘너희들이 이대로라면 가만두지 않겠다’입니다. 사실 우리들은 부정적인 말을 싫어합니다. 이왕이면 하나님께서 위로하는 말씀, 격려하는 말씀만을 듣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들을 격려하는 것보다 살길을 택하시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부정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창세기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3:16-24 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20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22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 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성도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의도를 모른다면, 하나님의 뜻과는 다른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시려고 부정적으로 말씀하시는데, 이것을 왜곡하여 엉뚱하게 해석하면, 하나님의 의도와 우리와는 전연 무관한 관계로 발전하고 맙니다. 왜 부정적으로 이름 없었던 모레셋의 작은 선지자 미가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까?
여호야김이 유다 왕이었을 때의 일입니다. 제사장들과 거짓선지자들은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예레미야의 입에서 하나님의 심판의 말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한 마디도 그들이 원하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입만 열면 ‘심판’이었습니다. 늘 부정적으로 말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바벨론에 항복하라는 것입니다(렘27:6-11). 그러니 왕이며 방백들, 신하들이 좋아할 리 없었습니다. 적국과 목숨을 걸어서라도 싸워야 하지, 어떻게 항복을 할 수 있느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삯군목자들이 긍정적이었습니다. 예레미야28:1-4절을 보면 거짓자 하나냐가 예례미야에 맞서서 유다 왕과 신하들에게 말합니다.
1 이 해, 유다 왕 시드기야의 즉위한지 오래지 않은 해 곧 사년 오월에 기브온 앗술의 아들 선지자 하나냐가 여호와의 집에서 제사장들과 모든 백성 앞에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2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여 가라사대 내가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꺾었느니라 3 내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이곳에서 바벨론으로 옮겨간 여호와의 집 모든 기구를 두 해가 차기 전에 다시 이곳으로 가져오게 하겠고 4 내가 또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니야와 바벨론으로 간 유다 모든 포로를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니 이는 내가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꺾을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는지라
듣는 입장에서는 예레미야의 말보다 하나냐의 말이 훨씬 좋습니다. 품위가 있고 격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은 변개할 수 없습니다. 하나냐의 긍정적인 말은 거짓말입니다. 예레미야의 부정적인 말이 진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과 사마리아 사람들을 부정적으로 보셨기 때문입니다. ‘너희들을 죽이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냐가 예레미야의 목에 있었던 멍에를 부러뜨리자 하나님께서는 쇠멍에를 대신 주셨습니다. 그리고 거짓을 말했던 하나냐를 그 해에 죽였습니다.
성도여러분! 신앙은 긍정이 아니고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축복축복만을 외치는 사람들은 결코 성경의 진실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주의해야 합니다. 성경은 축복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죄도 말하고 심판도 말합니다. 예레미야의 편에 있었던 예루살렘의 장로들은 예레미야를 변호했습니다. 예레미야의 말이 맞다는 것입니다. 바베론에 항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장로들은 그 근거로 미가의 사역을 언급했습니다. 예레미야26:18을 보면
유다 왕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가 유다 모든 백성에게 예언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시온은 밭 같이 경작함을 당하며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며 이 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들 같이 되리라 하였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니 예레미야를 죽이면 하나님의 재앙이 곧바로 임할 것이라 했습니다. 미가의 이 말에 히스기야는 크게 회개를 했습니다. 미가의 사역을 통해서 히스기야는 회개하고 또 근신했습니다. 그로 인해서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 때 예루살렘을 남겨주셨습니다. 그럼에도 히스기야가 죽자 유다의 통치자들이 하나님께 바로 등을 돌렸습니다. 그래서 미가도 바벨론에 의해서 유다와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이라 했습니다. 미가의 말대로, 예레미야의 말대로, 이사야의 말대로, 선지자들의 말대로 유다와 예루살렘이 주전586년에 망했습니다.
성도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우리가 연구하고 믿는 성경은 다른 세계로부터 온 말씀(A Word from Another World)입니다. 다른 세계로부터 온 말씀에 대해서 우리는 만족해야 합니다. 성경은 과학자들이 쓸데없는 연구를 하고 있는 우주밖으로부터 온 말씀입니다. 우주를 초월해서 우리에게 왔습니다. 성경은 전적으로 인간에 의해 기록되었음에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항상 견지해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대할 때 항상 수납적인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우리는 듣는다는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믿지 않을 때, 문제가 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제하고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믿을 때 우리들의 신앙은 곤두박질합니다. 오늘의 이 나라 상황은 어떻습니까? 미가의 시대 곧 유다와 예루살렘이 망해가는 시대와 똑같습니다. 나라의 통치자가 치명적인 도덕적 결함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어느 교회의 목사도 그것을 지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서 평강을 외치고 있습니다. 국무위원 중에 단 한 사람도 깨끗한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 범법자들입니다. 병역문제, 부동산문제, 자녀문제, 위장전입 등의 전과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서 무엇을 기대합니까? 평강입니까? 안전입니까? 우리들의 경제 살리기입니까?
성도여러분! 형통만이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는 아닙니다. 긍정만이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잘되게 하기 위해서 때로는 긍정으로, 때로는 부정으로, 때로는 자비로, 때로는 심판을 사용하십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마음을,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알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의 손길은 사울이나 다른 사람들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경우에도 인간에게 미치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손길은 욥과 에브라임의 경우에서 보는 것처럼, 인간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경우에도 인간을 치는 야속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외적인 자비나 비참만 보고 사랑이나 미움을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일은 의로운 자에게나 불의한 자에게나,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깨끗한 자에게나 불결한 자에게나 다 똑같이 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형통의 태양은 과수원의 과일나무만 비추는 것이 아닙니다. 광야의 가시나무 위에도 내려쬡니다. 고난의 눈보라는 광야나 언덕의 불모지에만 몰아치는 것이 아닙니다. 잘 가꾸어진 정원에도 몰아칩니다. 아합과 요시야의 종말이 아주 상황이 비슷했습니다.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이 동시에 임했습니다. 건강, 재산, 명예, 고난, 질병, 손해는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차별없이 주어집니다. 모세는 불평한 대가로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나발은 아브라함 못지않은 부자였습니다. 아히도벨은 솔로몬만큼 지혜로웠습니다. 도엑은 사울만큼 영화를 누렸습니다. 요셉은 바로와 함께 권세를 향유하였습니다. 이 모든 사람들 중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사람들은 의문만 잔뜩 지고 있다가 이 세상을 끝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 때라도 길을 하나님께서 찾습니다. 성경에서 그 길을 찾습니다.
언약궤 (0) | 2011.11.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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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장 (0) | 2011.11.25 |
성막을 고정하기 위한 띠 (0) | 2011.11.21 |
성막을 세우기 위한 널판 (0) | 2011.11.18 |
성막의 지붕 (0) | 2011.11.17 |
성막을 고정하기 위한 띠(출애굽기36:31-34)
이 구절도 출애굽기26:26-29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성소의 건축반은 이 설계
도에 의해서 만들었습니다.
26너는 조각목으로 띠를 만들찌니 성막 이편 널판을 위하여 다섯이요 27성막 저편 널판을 위하여 다섯이요 성막 뒤 곧 서편 널판을 위하여 다섯이며 28널판 가운데 있는 중간 띠는 이 끝에서 저 끝에 미치게 하고 29그 널판들을 금으로 싸고 그 널판들의 띠를 꿸 금고리를 만들고 그 띠를 금으로 싸라
성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언약궤입니다. 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시려고 성막을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무엇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성막의 덮개도 중요하고, 휘장도 중요합니다. 성막을 위한 널판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막의 널판을 고정하기 위한 띠도 중요합니다. 어쩌면 별로 성막에서 비중을 차지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띠”는 중요합니다. 성막의 널판을 고정시키는 핀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는 여러 일꾼들이 있습니다. 디모데후서2:20-21을 보면
20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21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큰 집에는 여러 그릇이 있다고 했습니다. 금그릇이 있습니다. 은그릇이 있습니다. 나무 그릇도 있습니다. 질그릇도 있습니다. 귀하게 쓰는 그릇이 있습니다. 천하게 쓰는 그릇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 쓰임 받는 그릇들입니다. 모두 쓰인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귀하다고 하더라도 쓰임을 받지 아니하면 그것은 박물관용입니다. 그릇이 박물관에 있으려고 만들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릇의 용도는 반드시 무엇이 담아져야 합니다. 쓰임을 받아야 합니다.
띠는 성막을 형성하게 한 널판들을 지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띠”가 없다면 성막의 널판들이 바르게 고정되지 못합니다. 뒤틀리고 제멋대로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띠”가 있어서 바르게 고정할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에서 작은 교회들을 별로 중요하지 않게 생각합니다. 서울의 대형교회에 비하면 규모가 작다는 것입니다. 그들에 비하면 우리들은 별로 볼품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가 있음으로 해서 교회는 더욱 튼튼해져갑니다. 우리교회가 있음으로 해서 한국의 교회가 더욱 견고해져가야 합니다. 내가 이 교회에 있음으로 인해서 우리교회가 더욱 견고해져가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나’라는 존재는 중요합니다. 나의 위치가 중요합니다. 마치 어느 곳에 “띠”를 하지 않으면 그 성막은 이내 곧 무너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내 위치에서 교회를 받치고 있지 않으면 교회는 점점 힘이 듭니다. 그러나 내가 받치고 있을 때 교회는 힘이 있고 견고하여갑니다.
휘장 (0) | 2011.11.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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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오직 하나님께 (0) | 2011.11.22 |
성막을 세우기 위한 널판 (0) | 2011.11.18 |
성막의 지붕 (0) | 2011.11.17 |
성막 (0) | 2011.11.16 |
성막을 세우기 위한 널판(출애굽기36:20-30)
이 본문도 26:15-30의 하나님의 지시사항에 대한 시행입니다. 하나님께서 설계하신 내용대로 만든 것입니다. “그가 또 조각목으로 성막에 널판들을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널판은 “아카시아 나무”였습니다. 각 판은 10규빗X1.5규빗이었습니다(16). 모든 널판들은 그것들을 세우기 위하여 두 촉씩(끼우게)을 내야 했습니다. 성막의 다른 판들을 연결하는 끼우게였습니다. 그래야 판들이 견고하게 붙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막을 만들되 南便을 위하여 20개의 널판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20개의 널판을 세우기 위하여 은 받침 40개를 만들었습니다. 그 촉을 위한 받침들을 만들어 널판의 끼우게에 맞추어서 만들었습니다. 그 널판들을 북편을 위해서도 똑같이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성막이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성막을 위한 받침도 만들었습니다. 은 받침 40개를 만들었습니다. 받침의 모형은 없었습니다. 다만 은 받침은 매 받침마다 은 한달란트로 만들었습니다(38:27). 서편(성막 뒤)으로 널판 여섯을 만들었습니다. 성막의 두 모퉁이 편을 위해서 널판 둘을 만들었습니다. 조각목으로 띠를 만들되 금으로 쌌습니다. 널판도 모두 금으로 쌌습니다.
성막이 가지는 상징은 무엇일까요? 이 지상에 하나님의 장막을 두시려는 목적은 그의 백성들을 사랑하심입니다. 성막은 하늘에 있는 원형을 본떴습니다. 그래서 성막은 중요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세밀하게 지침을 주셨습니다. 히브리서에는 이 제사제도가 그리스도가 속죄의 사역을 완성하실 때까지 계속될 것이라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의 장막의 평면도를 설명하면서 장막의 의미를 말했습니다. 히브리서9:1-10을 보면
1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 2예비한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이는 성소라 일컫고 3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4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5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 6 이 모든 것을 이같이 예비하였으니 제사장들이 항상 첫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를 행하고 7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년 일차씩 들어가되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 피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 8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9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10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이스라엘은 이 성막을 통해서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복잡한 예배의식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점차 영적인 예배가 무엇인지를 알아갔습니다. 우리는 성막의 본질을 관찰해야 합니다. 예배의 본질도 이해해야 합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예배를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합니다. 예배는 전심을 통해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는 성막이 필요 없었습니다. 모두 인간들을 위한 것들입니다. 우리들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길은 오직 하나님께 (0) | 2011.11.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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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을 고정하기 위한 띠 (0) | 2011.11.21 |
성막의 지붕 (0) | 2011.11.17 |
성막 (0) | 2011.11.16 |
넘치는 물질 (0) | 2011.11.15 |
성막의 지붕(출애굽기36:14-19)
출애굽기26:7-14에서는 성막의 지붕을 위한 명령이 나옵니다. 여기에서는 그에 대한 시행입니다.
7그 성막을 덮는 막 곧 앙장을 염소털로 만들되 열 한 폭을 만들찌며 8각 폭의 장은 삼십 규빗, 광은 사 규빗으로 열 한 폭의 장단을 같게 하고 9그 앙장 다섯 폭을 서로 연하며 또 여섯 폭을 서로 연하고 그 여섯째 폭 절반은 성막 전면에 접어 드리우고 10앙장을 연락할 말폭 가에 고 오십을 달며 다른 연락할 말폭 가에도 고 오십을 달고 11놋 갈고리 오십을 만들고 그 갈고리로 그 고를 꿰어 연합하여 한 막이 되게 하고 12그 막 곧 앙장의 나머지 그 반 폭은 성막 뒤에 드리우고 13막 곧 앙장의 길이의 남은 것은 이편에 한 규빗, 저편에 한 규빗씩 성막 좌우 양편에 덮어 드리우고 14붉은 물들인 수양의 가죽으로 막의 덮개를 만들고 해달의 가죽으로 그 웃덮개를 만들찌니라
“성막을 덮는 막”(앙장)은 염소털로 만들었습니다. 열 한 폭으로 만들었습니다(7). 각 폭의 길이는 30규빗(12.6m), 넓이는 4규빗(1.7m)로서 11폭의 장단을 같게 만들었습니다(8). 성막을 덮는 것은 습기나 비바람을 대비함입니다. 성막은 이중으로 만들었습니다. 수양의 가죽을 붉게 물들였습니다. 장막의 외부는 세련되지 않았으며 허술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내부는 아름다웠습니다. 어떻게 보면 외부나 내부나 이방인들의 신전에 비하면 허술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허술한데 있지 않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성소를 범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사람은 위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만 위대하십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위대하십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속성 중 가장 근본적인 것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하나님은 물질로 구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물질적인 특성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가장 분명하게 말해 주는 구절은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요한복은4:24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이러한 사실은 또한 예수님께서 자신의 보이지 않음에 대해 말씀하신 여러 구절들에도 암시되어 있습니다(요1:18; 딤전1:17;6:15-16). 하나님의 영성(Spirituality)의 한 가지 결과는 하나님께서는 육체와 관련된 어떤 제한도 받지 않으십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하나님은 특정한 지리적인, 즉 공간적인 위치에 제한을 받지 아니하십니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성막을 만들라고 한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같이 하시고자 함이었습니다. 이스라엘과 같이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로 하여금 성소를 만들게 하셨습니다. 오늘날 교회를 세우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자 함이십니다. 우리를 부르셔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려고 교회로 부르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교회는 그의 예비처소입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지상의 처소입니다.
성막을 고정하기 위한 띠 (0) | 2011.11.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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