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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 두 사도/다대오
  2. 2018.04.06
    열 두 사도/안드레
  3. 2018.03.27
    복음의 세계화
  4. 2018.03.24
    특별한 경계

열 두 사도/다대오(사도행전28:30-31)

 

다대오는 사도였지만 성경에서 역시 많은 정보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면 다대오에 대해서

마태복음10:3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마가복음3:18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안인 시몬이며

누가복음6:16 및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및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

사도행전1:13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요한복음14:22 가룟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다대오/Qaddai'o"/Thaddaȋos에 대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세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과(KJV의 마10:3에는 "다대오라는 별명을 가진 렙베오”라고 했다) 질문을 한 적이 있는 것과 예수께 몇 마디의 질문을 한 것이 전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열 두 사도 중의 하나입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사랑스러움과 온유한 기질이라는 것입니다. 다대오는 열 둘 중에 가장 막내였습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것들은 자기 자신을 정의합니다. 자기자신을 현재의 모습으로 규정지으며, 자기 자신과 그 외의 모든 것 사이를 구별해주는 속성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성경역시 자기를 정의하고 현재의 모습으로 규정지으며 다른 모든 글들과 자기 자신을 구별해주는 속성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는 과정의 처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성경적 신앙은 언제나 책을 믿는 신앙이었습니다(Robert L. Raymond 2004, 107).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자신의 교회를 위해 장차 있을 모든 복음전파를 위한 원천과 기준, 즉 사도의 직무가 될 공식적인 권위체계를 세우셨습니다. 주님은 사도들이 말하고 기록할 말씀들을 인정해주셨습니다.

사람들은 눈으로 크다 작다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눈으로만 보고 인지한 것이지, 그 이상의 것들로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눈은 극히 제한적입니다. 볼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크다 작다는 표현은 단지 어떤 像(상)에 대한 것만 인지한 것이지, 그 외의 것에 대한 認知(인지)는 제외 된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에 대해서는 많은 정보가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도들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성경 몇 줄 정도밖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사도들을 선택하실 때 주님께서는 기도하신 후에 선택하셨습니다. 후세의 우리들은 이러한 것을 충분히 감안해야 합니다.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지 말고, 보이지 않는 것들이 많음을 우리들은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사도들은 최선을 다해서 주님의 사명을 감당했음을 인지해야 합니다. 인명사전에 기록되지 않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교회는 오늘까지 유지되었습니다. 유명한 사람들은 그 일부분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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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두 사도/안드레(사도행전28:30-31)

 

안드레/!Andreva"/Andêas는 ‘남자다운’이란 뜻입니다. 안드레는 베드로의 형제로 어부였습니다. 벳새다 사람이었습니다(마4:18, 눅6:14, 요1:44). 안드레는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요1:40). 안드레는 본래 세례요한의 제자였으나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안드레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확신하고 시몬 베드로를 예수님께로 인도했습니다(요1:41,42). 안드레는 갈릴리 해변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마4:18,19). 안드레는 군중들 중에서 오병이어를 가진 아이를 예수님께 소개하였습니다(요6:8,9). 안드레는 예수님을 뵙고자 하는 헬라인의 청을 예수님께 전하였습니다(요12:20,23). 안드레는 예수님의 열 두 사도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마10:2, 막3:16). 안드레는 예수님께서 감람산에서 강론하실 때, 성전의 멸망과 주의 재림이 어느 때에 일어날 것인지를 물었던 네 제자들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막13:3,4). 안드레는 오순절에 다락방에 모여 함께 기도했습니다(행11:12-14). 전승에 의하면 안드레는 스구디아 지방에서 복음을 증거했으며, 아가야에서 순교하였습니다. 그가 X자로 된 십자가에서 처형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그러한 모양의 십자가를 안드레의 십자가라 부르고 있습니다.

성실한 인도자였던 킴 볼((Edward Kimball)은 보스턴의 젊은 신발 판매인 무디(Dwight L. Moody)에게 그리스도를 영접하도록 설득하였을 때, 그의 영향력이 얼마나 될지 몰랐습니다. 안드레는 자기형제 베드로를 주님께 인도했던 사람입니다. 안드레는 자기 형제 베드로의 탁월함 때문에 제2의 베드로가 되려는 어떠한 열망도 품지 않았습니다. 대대로 벳새다에 살았던 어부(요한복음1:44)인 안드레는 당시의 어부들만큼 거칠고 굳세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형제 베드로가 결혼하기 전까지 두 사람은 같은 집에서 살았습니다. 두 사람은 바다에서 물고기를 함께 잡았습니다. 복음서에서 안드레에 관한 언급이 드물긴 하지만, 그가 주님과 특별히 친밀하였고, 겸손하고 헌신적이며 변함없는 그리스도의 제자였습니다. 베드로의 동생이었던 걸로 믿어지는 안드레는 그의 아버지의 이름으로 소개되는 것이 아니라 이를테면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에서처럼 그 형의 이름을 빌어 소개됩니다. 아마도 그의 아버 지 요한은 이 두 사람이 예수의 제자가 되었던 당시 죽고 없었던 것 같습니다. 요한은 벳새다를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라고 언급하는 자리에서 독특한 순서로 기록합니다(요1:44). 동생이 먼저 나오고, 그보다 연상이 더 훨씬 더 중요한 형이 나중에 나옵니다. 그 이유는 예수가 직분을 수행하기 전, 그러니까 사도들이 기름부음을 받고 또한 베드로가 그분을 뵙기 이전의 시기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엔 유일하게 안드레만 제자였습니다. 아직 베드로는 등장하지 않는 시기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사도들을 선택하는 시기에 이르면 베드로가 제자들 명단 중에서 맨 앞에 나오고 이어 그의 헌신적인 형제 안드레가 두 번째로 나옵니다. 안드레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베드로보다 먼저 주님을 알았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존귀하게 여기시는 사람을 우리도 존경해야 합니다.

안드레는 예수의 첫 번째 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전에는 세례 요한의 제자였습니다. 성경에서 맨 처음 안드레를 보게 되는 곳은 그가 살았던 갈릴리가 아닙니다. 요단 건너편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목에서 3km지역입니다. 갈릴리에서 베다니는 약90km정도 떨어진 지역입니다. 세례요한은 거기서 설교를 하고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구약성경의 예언을 탐닉하던 유대인 안드레가 거기서 예수님의 외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안드레는 요단강 계곡의 하류에서 일어난 새로운 운동의 소식을 듣고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안드레는 광야의 엄한 설교자로부터 시몬과 빌립과 함께 그들에겐 친숙한 율법학자의 가르침과는 아주 딴판인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당시 유대 회당의 가르침은 냉혹하고 형식적이며 생명감이 없었습니다. 종교적인 성격이 거의 없었습니다. 안드레에게 있어서 이와 같은 형식주의는 가슴에 와 닿지 않았습니다. 이때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그에게 들렸습니다. 세례요한은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사정없이 쳐서 외쳤습니다. 그들에게 충격을 주면서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외식하는 자들과 위선자들에게 준열한 질타를 퍼부었습니다. 자기보다 더 크신 분이 곧 오시리라는 요한의 말에 진리를 열심히 추구하는 젊은 안드레는 감화를 받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고 외치며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그리스도께서 곧 오시리라는 것을 전파하였습니다. 만약 안드레가 하나님을 향한 열성을 품지 않았더라면 그가 요한의 엄격한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리하여 안드레는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안드레는 항상 베드로의 그늘에 있었습니다. 서신서도 한권 남기지 않았습니다. 어떤 교회의 설립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열성적인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베드로나 요한이나 야고보처럼 두드러지지는 않았으나 소박한 마음이나 동정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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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세계화(사도행전28:30-31)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바울사도는 Roma에 도착하는 즉시 재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두 해나 걸려서 재판을 받은 듯 합니다. 두 해란 Ramsay에 의하면 고소자들이 자기들의 고소를 진술해야 하는 법정기간인 18개월도 포함된 기간이라고 주석했습니다. 그 사이에 바울사도는 셋집에 있었습니다. 특이한 것은 다른 곳에 갈 수는 없었지만, 오는 사람들을 모두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때 바울은 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사도는 몸이 감옥에 있었지만, 복음은 감옥에 있지 않았습니다.

주후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은 예수님의 예언대로 파괴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것을 어떤 성도들은 심히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성소의 휘장은 오늘날의 curtain처럼 얇은 것이 아닙니다. 약30cm의 두께였습니다. 그것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다는 것은 이제는 누구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루살렘의 헤롯성전이 파괴되어야 했습니다. 헤롯성전이 파괴되고 난 후에 1세기의 랍비들은 마지막 10년까지 유대교를 다시 조직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면서 랍비들은 ‘나사렛 사람들’을 배제하고자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예배에 공식적으로 공식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게 만드는 저주를 회당기도에 삽입시켰습니다. 그만큼 교회는 위기에 처해있었습니다. 교회는 애초부터 유대인들과 Roma인들의 이중적인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사도적 메시지는 점점 커가기만 했고, 확장되어가기만 했습니다. 그리하여 주후 100년이 되었을 때, 기독교는 小Asia, Syria, Macedonia, Greece, Roma 시에 등장했습니다. 마치 화살에 끈을 달아서 금을 그은 것 같았습니다. 지중해 동쪽해안의 작은 지역, 그것도 나사렛이라는 알아주지 않는 지역에서 시작된 종교는 전 세계를 급속도로 복음화시켰습니다. 1600년에 걸쳐서 유럽 온 대륙에 퍼진 복음은 곧 아메리카로 건너갔습니다. 그리고 불과 300년에 걸쳐서 미국을 변화시켰습니다. 19세기에 비로소 복음이 아시아에 전해졌습니다. 현재는 미국과 한국에서 복음을 전세계에 전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거침없이 진군했습니다. 복음은 마치 미사일처럼 날아서 가기도 했고, 저돌적인 탱크처럼 험지에도 거침없이 진군했습니다. 왜 이렇게 복음이 거침없이 진군했습니까? 종말이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가 종말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마지막 심판을 향해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심판 날에 멸망하지 말고 구원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 때는 종교도 필요 없고, 선행도 필요 없으며,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는 재물 또한 필요없습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이외에는 어떤 것도 필요 없습니다. 그것이 복음 안에 모두 들어있습니다. 복음은 곧 영생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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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외적인 감각 주변에는 강력한 파수꾼을 세워두어라. 그 주변에는 사탄이 자리를 잡고 눈과 귀를 곤두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William Gur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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