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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3.06
    그리스도예수 대속으로 인한 은혜
  2. 2021.03.01
    찬송 아닌 노래가 찬송가속에
  3. 2021.02.27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한 은혜
  4. 2021.02.23
    결코 심판 받지 않는다.
  5. 2021.02.13
    우리 중에 계시는 하나님 2
  6. 2021.02.12
    율법으로는 안 되는 우리의 구원
  7. 2021.02.10
    곤고한 인간
  8. 2021.02.08
    핍박자는 심판 받는다.

그리스도예수 대속으로 인한 은혜(로마서8:1-11)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2 이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기 때문이다 3 율법이 육체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었던 그것을 하나님께서 하셨으니, 곧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체의 모양으로 보내 속죄제물로 삼으셔서, 그 육체 안에서 죄를 심판하신 것이다. 4 이는 육체를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성취되게 하려는 것이다. 5 육체를 따라 사는 자는 육체의 일을 생각하나, 성령을 따라 사는 자는 성령의 일을 생각한다. 6 육체의 생각은 사망이나, 성령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다. 7 육체의 생각은 하나님께 원수가 되니, 그것은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지 않을 뿐 아니라 복종할 수도 없다. 8 육체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9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너희 안에 계시면 너희는육체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10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임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산 것이다.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이 너희 안에 계시면, 그리스도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분께서 너희 안에 계시는 그분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이다.

 

바울사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심판이 없다고 했습니다. 2절로 넘어가면서 왜냐하면(ga;r)이라는 접속사를 사용합니다. 왜 정죄함이 없느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한 가지 법으로 다른 법이 폐지된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었으며,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이라고 칭했습니다. 이것은 의미가 깊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생활 입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살게 됩니다.

 

로마서6:8,10,13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10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이것의 끝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생명의 창조자인 성령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 생명을 누린다는 것입니다(Lenski). 생명이 있다는 것은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생명의 원리가 사망의 규칙을 극복하고 참다운 생명을 꽃피우기 위해서는 성령의 간섭이 필요합니다. 우리를 구속하는 법은 있지만 우리가 그 법의 구속력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은 그 본질상 모든 것에 생명을 부여하십니다. 또한 육체적이고 영적인 생명을 피조물에게 부여하십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은 하나님의 자녀의 마음과 생활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강력하고 효과적인 활동입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였다는 것은 죄와 사망의 법(7:23,25)의 정반대입니다. 죄의 법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과 꼭 같이 생명의 성령의 법이나 또는 지배하는 요소는 생명에 이르게 합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은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즉 그의 대속의 공로에 근거하고 그와 연합하는 생동하는 힘에 의하여 이 일을 이룹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88항을 보면

 

그리스도께서는 값을 치루고 구속하신 모든 사람들에게 바로 그 구속을 확실하고도 효과 있게 적용하시고 전달해 주신다. 그들을 위하여 대언하시고, 말씀으로 그리고 말씀을 통해서 그들에게 구원의 비밀들을 계시하신다. 그의 성령에 의하여 효과적으로 그들을 설복하여 믿고 순종케 하며 그들의 심령을 그의 말씀과 성령으로 주관하신다. 그리고 그들의 모든 원수들을 그의 전능하신 능력과 지혜로 물리치시되 그의 기이하고 측량할 수 없는 섭리에 가장 부합되는 방법으로 하신다.

 

고 했습니다.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삼위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 따라 행하셨습니다. 즉 구약의 예언을 모두 성취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셨습니다.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 시키신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기 위하여 자신을 화목제물로 단번에 드림으로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셨습니다. 즉 우리를 값 주고 사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십자가 사역으로 속죄를 성취하셨습니다. 또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라는 승리의 외침을 통해서 주님께서 그렇게 다 이루셨음을 나타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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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582장 ‘어둔 밤 마음에 잠겨’, 이것도 찬송인가? 

찬송가 582장 ‘어둔 밤 마음에 잠겨’, 이것도 찬송인가?

[최덕성 칼럼] 나라 사랑 담은 민중예찬가일 뿐

▲582장 ‘어둔 밤 마음에 잠겨’. ⓒ찬송가 캡처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위협 때문에 홀로 집에서 지내는 동안 <찬송가>(한국찬송가공회, 2006)에 담긴 노래들을 열심히 불렀다. 성경을 통독하듯 찬송가를 큰 목소리로 통송했다. 찬송은 언제나 나에게 은혜 충만을 선물한다.

나는 오래 전부터 예배 때 부르는 회중 찬송으로 합당하지 않은 곡이 <찬송가>에 수록되어 있다고 생각해 왔다. 한국 진보계 기독교인들이 즐겨 부르는 ‘어둔 밤 마음에 잠겨(찬송가 582장)’이다. 성공회 성가집에도 수록되어 있다(568장).

이 노래는 찬송, 찬송가가 아니다. 찬송가 책에 담길 조건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교회가 예배 중에 부를 회중 <찬송가>의 곡 선택을 정치적으로 하거나 탈기독교적 신학의 영향을 받아 선정하는 한국교회의 부정적인 단면을 보여준다.

코로나 바이러스 위협 때문에 교회가 예배를 자유롭게 드리지 못하는 이 마당에 무슨 지엽적이고 부차적인 ‘찬송가 타령’이냐고 질책할 분이 있을 법하다. 예배가 자유롭지 않은 상황이기에, 찬송가를 통송하는 특별한 경험을 하고 또 독자들과 나눌 교회, 예배, 찬송, 신앙고백에 관련된 한 꼭지의 글을 쓰고 있음을 밝혀 둔다.

1. 김재준의 시 ‘어둔 밤 마음에 잠겨’

김재준 목사(1901-1987)가 작사하고 이동훈 선생이 곡을 붙인 이 노래는 암울한 군사 독재정권 치하에서 역사의식을 가진 젊은이들에게 새 날에 대한 희망을 가지도록 했다. 한국 진보계 기독교권의 큰 사랑을 받아 왔다. 한국 <찬송가>에 수록된 노래들 가운데서 진보계 개신교 정체성을 가장 확실하게 드러내는 곡이다.

1절

어둔 밤 마음에 잠겨 역사에 어둠 짙었을 때에

계명성 동쪽에 밝아 이 나라 여명이 왔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빛 속에 새롭다

이 빛 삶 속에 얽혀 이 땅에 생명 탑 놓아 간다

2절

옥토에 뿌리는 깊어 하늘로 줄기 가지 솟을 때

가지 잎 억만을 헤어 그 열매 만민이 산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일꾼을 부른다

하늘 씨앗이 되어 역사의 생명을 이어가리

3절

맑은 샘 줄기 용솟아 거치른 땅에 흘러 적실 때

기름진 푸른 벌판이 눈앞에 활짝 트인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새 하늘 새 땅아

길이 꺼지지 않는 인류의 횃불 되어 타거라

작사자 김재준은 한국의 대표 진보 신학자이다. 1940년 조선총독부 울타리 안에서 신사참배, 우상숭배를 마다하지 않고 충량유의한 황국(皇國)의 ‘교회사(敎誨師) 양성’이라는 목표로 시작한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교)와 1953년 독립한 한국기독교장로회를 이끈 동력이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를 반대하는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 제자 문익환, 서남동, 안병무 등 민중신학자들을 길러냈다.

위 시의 3절은 문익환 목사(1918-1994)가 지었다고 한다. 문익환은 구약신학자이며 한국 천주교와 개신교의 ‘공동번역성경’ 책임자로 활동했다. 1989년 대한민국 실정법을 어기고 방북해 김일성을 면담하고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와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2. 문성모의 범주착각 오류

독일에서 예배학과 음악학을 전공한 문성모 박사는 김재준의 위 노랫말을 치하한다. “장공 김재준의 찬송 시에 대한 신학적 이해: 어둔 밤 마음에 잠겨 가사를 중심으로(<기독교사상>, 2017.3.)”라는 글에서, 위 시에는 그의 신학사상이 함축적으로 엑기스처럼 담겨 있다고 주장한다. 아주 훌륭한 찬송임을 전제로 하는 말처럼 보인다.

문성모에 따르면, 위 노래는 김재준의 수평적 사랑을 통한 수직적 하나님 사랑의 정신을 나타낸다. ‘민족’과 ‘교회’는 김재준 신학사상의 두 축이다. 이 둘은 하나이며, 영원한 순례를 위한 동반자이다. “위를 향하여 끝없이 열려 있는 길을 가는 순례의 사상”, “긍정을 향한 끝없는 변혁” 사상을 담고 있다.

문성모는 서울장신대학교 총장, 한국교회음악작곡가협회 이사장을 역임했다. 그는 교회음악 전문가다운 비평적 논의 대신, 김재준 삶의 족적을 위 노래 말에 대입하여 탁월성을 뒷받침하려고 시도한다.

위 ‘찬송 시’가 찬송다운 조건을 갖추고 있는지,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인지, 회중찬송으로 적합한지, 이 찬송의 대상이 누구인지는 다루지 않는다. 언급하지도 않는다.

문성모의 논증과 추리는 범주착각의 오류(category mistake)를 범한다. 특정인의 훌륭한 삶과 사상이 그 사람이 남긴 작품의 탁월성을 반드시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김재준의 삶과 자유주의 또는 진보적 신학사상이 훌륭하다고 할지라도, 그가 쓴 위 ‘찬송 시’가 반드시 훌륭한 찬송가이며 예배 시간에 부르기에 합당한 회중 찬송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지나친다. 찬송, 찬솧가, <찬송가> 책에 담길 조건을 가지고 있지 않다.

범주착각의 오류는 동일한 범주에 속하지 않는 것들을 같은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여기는 오류이다. 동일한 범주에 속하지 않는 것을 그렇다고 가정하고, 같은 범주에 속하는 것을 그렇지 않다고 여기는 오류이다.

“신부님이 에이즈에 걸렸겠어?” “저렇게 돈 많은 사람이 고작 만년필 한 개를 훔쳤겠어?”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착한 사람이 절대로 그런 일을 저질렀을 리가 없어.” “예쁜 버섯에 독이 들어 있을 리 만무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는가?” “월북자가 지은 동요는 악하다” 식의 논증이다. 김재준의 노래 글의 가치를 그의 삶과 사상에서 찾으면 오류 판단을 할 수 있다.

김재준의 삶과 사상의 위대성은 별도 논의가 필요한 주제이다. 이 글이 지적하는 것은 김재준의 삶이나 신학의 탁월성 여부가 아니다. 문성모의 추론과 접근 방법이 오판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이다. 주장과 근거가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특정 작품의 위대성과 작가의 삶과 사상의 위대성은 서로 연관되어 있지만, 별개의 사안이다.

중요한 것은 위 '찬송 시'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신앙고백을 담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3. 찬송, 찬송가의 조건

‘어둔 밤 마음에 잠겨’, 이것도 찬송인가? 이 곡의 가사는 찬송이나 찬송가다운 조건을 갖추고 있지 않다. 하나님께 올리는 ‘찬송(hymn)’이 아니다. 신앙고백과 기도를 담은 ‘찬송가(hymnal songs)’도 아니다.

교회, 신앙실천, 선교의 책임 등을 노래하는 복음송도 아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로 시작하는 애국가 정도의 고백도 담고 있지 않다. 따라서 <찬송가>에 포함되거나 회중찬송으로 부르기에 합당하지 않다.

‘찬송’은 삼위일체 하나님께 올리는 찬미의 노래이다. 하나님께 올리는 직접적 찬미이다. 오로지 하나님과 그의 이름을 높여 드리는 영혼의 노래이다. 대부분 <찬송가> 앞부분에 배치되어 있다.

‘찬송가’는 신앙고백과 기도를 담은 노래이다. 하나님 말씀인 성경과 기독교 교리에 부합하고 충실한 내용을 담고 있다. <찬송가>에는 성경적, 교리적, 신학적 검증 과정을 거쳐 확인된 것들이 수록된다.

개혁신학 전통의 유산 가운데 하나는 시편에 곡을 붙인 ‘시편 찬송’이다. 존 칼빈 시대의 제네바 지역 개혁교회가 불렀던 시편 찬송은 당대의 곡을 붙인 것이다. 그 중 하나가 ‘제네바 시편송(Genevan Psalter)’이다. 중세 동안 교회가 불러 온 ‘그레고리안 챈트’의 음조와 비슷한 멜로디를 수반하고 있다.

필자는 한국의 장로교회에서 자라나 영국 국교회(성공회), 루터파 교회, 침례교회, 오순절교회, 동방정교회 예배 음악을 두루 접했다. 흑인영가와 트로트를 연상시키는 기도원의 뽕짝조 예배 음악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음악을 접했다. 필자는 종종 복음송(gospel songs)을 즐겨 부른다. 6세기 만들어진 ‘그레고리안 챈트’도 즐겨 듣는다. 시편에 곡을 붙여 찬송하는 ‘시편 찬송’을 존중한다.

복음성가로 일컬어지는 현대 교회음악(CCM)은 신학적 검증이 필요하다. 찬송, 찬송가의 멜로디는 진리와 고백을 담는 그릇이고 다소간 당대 문화의 변화를 따르므로,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기 마련이다.

현대 교회 음악 가운데는 신비주의와 뉴에이지 운동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은 곡들이 있다. 필자는 드럼, 기타, 피아노, 키보드 등을 일시에 사용하여 예배 참석자들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고 감성에 호소하는 음악(音惡)에 거부감을 느낀다.

젊은이들은 현대교회 음악과 함께 춤추며 노래한다. 춤추며 찬양하는 것은 바람직한가?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떠나 홍해를 건넌 뒤 구원받은 기쁨을 억제하지 못하여 춤추며 찬양했다. 여러 가지 악기 연주와 함께 큰 소리로 찬양했다.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북치고 춤추며 그를 찬미하며, 현금을 뜯고 피리를 불며 찬미하여라(시 150:3-4)”.

출애굽 당시의 찬양 춤은 하나님께 감사를 표하는 몸동작이었다. 이스라엘 회중이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을 기쁨에 충만하여 몸과 입술로 찬미를 올린 것이다.

신약성경은 악기 연주와 춤을 병행하는 찬양이나 예배의 모범을 보여주지 않는다. 중세기 말 타볼파나 종교개혁자 츠빙글리의 견해를 가진 교회들은 춤은커녕 예배 중 악기를 사용하는 것도 금한다.

신약성경에 그러한 모범이 없으며, 그렇게 하라고 하는 적극적인 가르침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신약성경은 찬송을 지속적으로 하라고 가르친다.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전 14:15)”.

오늘날의 교회 안의 젊은이들은 음악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감동을 받은 수단으로 여기는 경향을 보인다. 음악은 영적 감동을 이끌어내는 수단인가? 악기 연주, 노래, 춤을 이용하여 인위적으로 감정을 고조시키고 기쁨이나 격앙된 감정에 도달하게 하려는 시도는 환영할 만하지 않다.

교회 음악에서조차 우리는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전 14:40)”는 가르침에 따름이 바람직하다.

4. <찬송가>, 회중 찬송 모음집

우리가 예배 때 사용하는 <찬송가>(Hymn Book)는 찬송, 찬송가, 복음송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세기 수도사 끌레르보의 베르나르(1091-1153)가 작곡한 ‘구주를 생각만 해도(85장)’ 등 3곡을 포함하여 영국의 복음주의 운동, 미국의 부흥운동, 오순절주의의 영향을 받은 노래들을 수록하고 있다.

<찬송가>는 예배 시간에 하나님께 올리는 한국교회의 회중 찬송 모음집이다. 개인의 삶이나 민중신학, 해방신학, 자유주의 신학 등을 선전하는 노래집이 아니다. 민중예찬 또는 인본주의 신념을 노래하거나 인간을 칭송하는 노래집이 아니다. 인간, 위인, 왕, 황제, 민중, 민족, 나라 따위를 찬양하는 노래 책이 아니다.

구약성경은 ‘찬송’을 151회, 신약성경은 48회 언급한다. 예외 없이 하나님을 찬송의 대상으로 삼는다. 어거스틴은 시편 148편을 주석하면서 찬송을 정의하기를 “찬송이란 곧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이다. 만일 하나님이 없이 다른 무엇을 찬양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찬송이라고 할 수 없다”고 했다.

톨레도 공의회(633)는 “찬송은 세 가지 요소 곧 노래, 높임, 하나님이 포함되어 있다”고 정의했다. 이러한 조건을 갖춘 찬송을 부를 때 하나님은 그 찬송을 기쁘게 받는다고 했다.

5. 우미유가바

김재준의 ‘어둔 밤 마음에 잠겨’는 일제 말기 한국교회들이 매 주일 예배 중에 불렀던 ‘우미유가바(うみゆかば)’를 떠올리게 한다. 1937년 작곡된 일제의 국민계몽용 ‘애국송’이라는 일본 가곡이다. ‘천황’을 위해 죽음을 마다하지 않으며,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겠다는 노래이다.

“바다에 나간다면 나의 시체는 바다에 띄우고, 산에 나간다면 초원에 버린다. 아무튼 천황 가까이에서 죽는다. 뒤는 돌아보지 않겠다”.

海行かば水み漬づく屍かばね山行かば草むす屍大君の辺へにこそ死なめ顧みはせじ.

한국교회는 일제 말기 여러 해 동안 나라의 임금, 곧 일왕을 위하여 목숨을 초개 같이 버리겠다고 ‘찬송’했다. 교회가 주일 예배 중에 ‘우미유가바’라는 이름의 ‘애국송’을 합창했다.

한국교회 예배당에서 우미유가바가 합창되는 동안, 조선의 젊은이들은 악랄한 일제의 ‘대동아 전선’으로 끌려갔다. 날아오는 총알의 방탄막이가 되었다. 가미가제 자살특공대원들은 이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비장한 마음으로 비행기를 몰고 진주만을 공격했다. ‘어둔 밤 마음에 잠겨’와 ‘우미유가바’는 모두 하나님께 올리는 찬송이 아니라, 국민계몽용 애국송이다.

<찬송가>에 수록되는 찬송, 찬송가, 복음송은 신학적 검증을 거친 것들이다. 김재준의 ‘어둔 밤 마음에 잠겨’는 이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예장 합동 제73회 총회는 1988년 이 곡(통일찬송가 261)을 교단 산하 교회들이 부르지 않도록 했다.

2008년, <찬송가> 편집 위원회가 예장 합동과 예장 통합 인사들의 이의제기를 무시하고 이 곡을 또 다시 찬송가에 수록했다. 찬불가를 작곡한 나운영 장로의 곡은 삭제하고, 찬송 또는 찬송가의 조건을 전혀 갖추지 않은 김재준의 위 노래 글을 담아 발행했다. 진실성과 정직성에 반하는 정략적이고 정치적인 결정이었다.

6. 금주가

찬송가답지 않다는 이유로 후대의 <찬송가> 편집에서 탈락된 곡들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금주가(1917)’이다. 이것은 황국국민 계몽용 노래이며, 조선 젊은이 선도용 노래였다. 기독교 사회운동 맥락에서 만들어졌다.

이 노래의 작시-작곡자 임배세는 이화여자전문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한 감리교인이다. 이 노래는 1923년 청년찬송가, 1931년 신정찬송가, 그리고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가 합동으로 만든 합동찬송가(1949)에 포함되었다가, 1963년에 출간된 개편찬송가에 포함되지 않았다.

한국에 온 초기 선교사들은 당시 조선 사회의 뿌리 깊은 조상신 숭배, 악습, 허례허식, 축첩, 음주, 흡연 등의 폐해를 고치려고 청빈, 금연, 금주 등을 강조했다.

일제 치하 기독교 절제 운동은 나라를 잃은 슬픔을 가진 젊은이들이 자포자기하고 향락적인 문화에 빠져드는 것을 방지하려는 동기로 예배, 주일성수, 효도, 순결, 근면, 정직, 술-도박-아편 금지 등을 생활강령으로 제시했다.

국민계몽용으로 만들어진 금주가가 찬송가에 포함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마지막 절에는 ‘천부(heavenly father)’와 ‘국가’를 언급한다. 전자는 창조자 하나님이고 후자는 일제(日帝)를 지칭하는 듯 하다.

1절

금수강산 내 동포여 술을 입에 대지 마라

건강지력 손상하니 천치될까 늘 두렵다

2절

팽가망신 될 독주는 빛을 내서 마시면서

자녀교육 위하여는 일전 한 푼 안 쓰려네

3절

전국 술값 다 합하여 곳곳마다 학교 세워

자녀 수양 늘 시키면 동서 문명 잘 빛내리

4절

천부 주신 네 재능과 부모님께 받은 귀태

술의 독기 받지 말고 국가 위해 일할지라

후렴

아! 마시지 마라 그 술,

아! 보지도 마라 그 술

조선 사회 복 받기는 금주함에 있느니라

한국교회 최초의 <찬양가>(1894) 제4장은 ‘하나님 찬미(讚美主帝)’이다. 이것의 노랫말은 당시 기독인들의 신앙이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이었음을 보여준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다른 복음이 없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찬미가>(1905) 제14장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말으고 달토록 하나님이 보호하사’로 시작한다. 오늘날 대한민국 애국가이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전능자의 보호를 소망하는 믿음을 담고 있다.

위 두 곡조차 찬송 또는 찬송가의 조건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후대에 발간된 찬송가에서 제외되었다.

7. 맺으면서

김재준의 시 ‘어둔 밤 마음에 잠겨’는 민족 사랑과 나라 사랑의 마음을 담은 민중예찬가이다.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을 칭송한다. 하나님을 찬송하거나 이와 관련된 신앙고백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 따라서 하나님께 올리는 예배 찬송으로 합당하지 않다.

오해 없기를 바란다. 나는 위 ‘찬송 시’가 함량미달이거나 수준이 낮다고 폄하하고 있지 않다. 찬송가의 조건을 갖추지 않았으므로, <찬송가>에 수록함은 부당하다는 말을 하고 있다.

예배 중에 회중이 이 민중예찬가를 합창함은 하나님에 대한 불경이며, 신성모독이다.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한국교회가 지속적으로 개혁하며 더욱 순전한 신앙, 진실된 마음, 그리고 하나님께 합당한 찬송, 찬송가를 열심히 정성을 다하여 부르기를 희망한다.

차제에 덧붙여 세 가지를 지적하련다. 첫째, 찬송 또는 찬송가의 불명확한 한국어 표현이다. 예컨대 ‘되다(become, be done)’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되다’는 이루어진다, 만들어지다, 어떤 상태에 이르다, 결과가 생기다, 하게 되다, 변하다, 성취되다, 구성되다, 무엇에 이르다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왕 되신 주 다 찬양하여라(24)’, ‘찬양하라 복되신 구세주 예수(31)’, ‘내 진정 사모하는 친구가 되시는(88)’, ‘신랑 되신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173)’,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315)’, ‘십자가 군병 되어서 예수를 따를 때(353)’, ‘나의 생명되신 주(380)’, ‘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508)’, ‘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569)’, ‘진리와 생명 되신 주(630)’ 등이다.

아래처럼 고치면 명료한 신앙고백 찬송으로 바뀐다. ‘왕이신 주께 다 찬양하여라’, ‘찬양하라 복이신 구세주 예수’, ‘내 진정 사모하는 친구이신 주’, ‘신랑이신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내 주 예수 주님을 참 사랑하고’, ‘십자가 군병으로서 예수를 따를 때’, ‘나의 생명이신 주’, ‘우리가 지금은 나그네이지만’, ‘선한 목자 예수 우리 주’, ‘진리와 생명이신 주’ 등이다.

둘째, 잘 불려지지 않는 찬송들은 조속히 제외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구두희 장로의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559장)’, 남궁억의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580장)’ 등은 애송되고 있으나, 대부분의 한국인 작사 작곡 찬송들은 환영을 받지 못하는 듯 하다.

필자가 잘 아는 몇 분의 이름이 작사자로 올려져 있으나, 사실과 다른 듯하다. 그들은 문학적 소양이나 시감을 가진 분들이 아니다.

셋째, 저작권에 관한 의문이다. 찬송의 가사와 곡의 저작권은 법의 보호를 받는다. 우리는 교회가 예배 시간에 부르는 찬송 시와 멜로디에 대한 저작권료를 지불해야 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지적재산권은 대부분 찬송 가사와 곡을 담아 최초로 출판한 회사가 가지고 있다. 이 찬송들을 연주한 영상물을 유튜브에 게재하면 저작권 침해라는 통보가 온다. 사용료가 얼마인가 하는 것보다, 내가 타인의 저작권을 침해했다는 사실에 마음이 편하지 않다.

한국교회가 애창하는 찬송들의 원 저작권과 저작권료에 대한 한국찬송가공회의 대책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최덕성 박사 (브레드유니버시티 대표. 현 브니엘신학교 총장)

설교신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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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한 은혜(로마서8:1)

 

베드로후서2:1거짓 선생들 곧 자기들을 사신(ajgoravsanta/ 아고라산타) 주를(despovthn/데스포텐)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슷로 취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해도 구원을 잃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인터넷에 떠도는 말들도 얼마든지 성도가 구원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말합니다. 한 번 그리스도예수님에 의해서 구속함을 받았던 자들이라 할지라도 멸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은 자들의 구원을 전혀 틀림없이 가져다주거나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의 말대로라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본질적으로 구원의 효력을 갖지 못함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그리스도를 믿을 수가 없게 됩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말하려는 의도는 그리스도의 구세주 되심의 역할을 여기에서 그리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통치의 창조주가 되심을 언급한 것입니다. 거짓 선생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소유하신 그들의 창조의 주와 통치의 주가 되심을 부인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은 전 인류에게 제각기 동시적임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위해 죽으신 자들이 멸망할 수 있음을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아도 충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십자가 사역의 범위는 이따금씩 보편적 속성을 나타내는 용어들이 속죄와 관련해서 시용되지만 이 용어들이 보편속죄의 교리를 확립해 주는 것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친히 자신을 속전으로 주시사 우리를 모든 죄악에서 확실하게 건져내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속죄는 그의 백성들에게 절대적으로 효력 있는 대속입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의 믿음을 할 수만 있으면 사탄이 흔들려고 합니다. 이렇게 흔들고 저렇게 흔들려고 합니다. 즉 세상 사람들을 통해서 흔듭니다. 교회도 아닌 교회같은 단체를 통해서 흔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교회내부에서 신자들을 통해서 흔들려고 합니다. 그래서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 합니다. 그들이 말할 때, ! 그럴 수도 있을거야.라고 긍정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구원은 잃어지지 않는 구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한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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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결코 심판을 받지 않는다(로마서8:1)

 

결코 없나니 그러므로 이제 정죄함이 자들에게는 안에 있는 그리스도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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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없나니

그러므로

이제

정죄함이

자들

에게는

안에

있는

그리스도

예수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말은 종말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사실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하는 사림이 있을까요? 어떤 종교가 이렇게 말하며,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이렇게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있는 사람들은 결코 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주장을 사도바울이 여러 곳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1:16-17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3:21-24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5:1,2,6-8, 15-21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16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17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찌니라

창세기5장을 보면 당시 사람의 평균 수명이 930세였습니다. 930년이라는 말은 1085년으로 고려의 선종 시대입니다. 10854월에 義天商船(상선)을 타고 송나라에 갔었습니다. 따라서 930세를 살았다면 고려 선종을 거쳐 고려가 멸망하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조선의 개국을 보았을 것입니다. 조선이 멸망하고 일제의 잔인함도 보았을 것이며, 해방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두루 세상을 살았을 것입니다. 므두셀라는 969세까지 살았으니까 훨씬 전의 사람입니다. 그들의 수명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1000살에 거의 육박했으니 말입니다. 요즘 100살을 살면 장수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장수한 나이의 10배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 세상에 현재 없습니다. 즉 아무리 장수해도 죽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사도가 말하기를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인간이 괜찮아서일까요? 사람이 잘나서일까요? 무수한 은하계 가운데 겨우 지구의 위성인 달에 대해서도 완전히 알지 못하는 유한한 인간들이 정말 잘 났을까요?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And

우리 중에 계시는 하나님

에스겔1:1-14

 

 

프랑스의 철학자 ‘Descartes’는 인식론자입니다. ‘인식론/Erkenntnistheorie’이란 사람의 앎을 근거로 모든 문제를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일단 모든 것을 나 자신이 인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Descartes의 “나는 생각(의심)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말은 자신 이외에는 모든 것을 의심한다는 것입니다. Descartes는 “나”라는 것을 항상 강조하고 있습니다. 의심의 철학자이기도 한 그는 먼저 모든 것을 인식할 “나”를 확실하게 세웁니다. 왜냐하면 어떤 것을 분명히 알고 깨닫기 위해서는 의심할 수 없는 “나”를 먼저 확실하게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은 의심할 수 있어도 “나”라는 실존을 의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없고는 다른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은 “내가 인식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Descartes(1596-1650) 이전의 철학자들은 그래도 하나님을 인정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연히 계시고”였습니다. 그런데 ‘Descartes’가 이것을 깼습니다. 합리론자요, 경험주의자인 Descartes는 “하나님도 내가 인식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인식을 해야 하나님도 존재하는 것이지, 내가 인식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Descartes의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현 세상에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어리석다고 비웃습니다. 오늘 말씀 1절에서 3절을 보면

 

1제 삼십년 사월 오일에 내가 그발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더니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을 내게 보이시니 2여호야긴 왕의 사로잡힌 지 오년 그 달 오일이라 3갈대아 땅 그발강 가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

 

오늘 첫 번째로

 

I. 그발 강가에 나타나신 하나님(1-3).

 

사람들은 지식(knowledge)을 재산이라고 합니다. 지식은 부가가치를 창출하기 때문입니다. 지식은 경제력의 디딤돌이기 때문입니다. 지식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살면서 얻어지기도 하고, 배워서 얻어지기도 합니다. 지식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줍니다. 이러한 지식을 어떤 사람에게서 습득했느냐에 따라 지식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안중근의사를 일본인들은 terrorist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안중근의사를 한국 사람들은 독립투사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같은 한국인이면서, 안중근의사를 terrorist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일본을 사모하는 못된 친일파들입니다. 따라서 한국인이지만, 친일파들에게 안중근의사에 대해서 배운 사람하고, 애국지사들에게서 배운 것하고는 아주 다릅니다. 어떤 것이 제대로 된 지식입니까? 안중근의사를 애국지사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지식이 제대로 된 지식일 것입니다.

 

Greece 수학자 Archimedes는 지레 기구를 사용하면서 ‘내가 설 수 있는 한 지점(pou' stw')을 달라 그리하면 내가 세상을 움직일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은 지식과 의미를 위해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지구 외계 기점 (extracosmic base)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의 말씀을 주셨을 때, 단순히 자신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훨씬 많은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점(pou' stw') 혹은 우리의 지식요구와 인격의 중요성요구 모두를 입증해주는 기반을 주셨습니다.

 

모든 사물들에 대한 포괄적인 지식이 어딘가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떠한 지식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인식론적인 원리입니다. 이는 모든 지식들이 풀릴 수 없을 만큼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모든 것들을 철저하게 조사할 수 없습니다. 우주에 있는 자료를 우리가 어떻게 조사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최근까지 모든 철학사(哲學史)는, 다른 외부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하여 우주의 충분한 어떤 선택된 특별한 것들을 “조사하고” 이러한 특수성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반 개념들을 발견하기 위한 인간의 합리적인 노력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사람들은 지식에 도달하기를 시도해 왔습니다. 합리주의나 경험주의와 같은 인식론적 방법을 통해서 지식에 대한 자신들의 요구를 옹호하려 했습니다.

합리주의자들은 모든 지식이 先驗的인 진리들로부터 시작한다고 주장합니다. 그 진리들로부터 연역적인 과정을 통해 또 다른 진리들이 이끌어진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러한 연역적인 방법을 통해 확실한 지식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준이 되는 선험적인 개념에 논리의 법칙, 우리들 자신의 정신상태, 객관적인 진리의 존재 등이 포함된다 하더라도, 그렇게 되지는 않습니다. 프레임(Frame)은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우리가 그러한 선험적인 개념으로부터 연역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분명히 우리는 그것들로부터 인간지식의 전체구조를 이끌어낼 수 없으며, 의미 있는 철학을 형성할 만큼의 충분한 지식조차도 추론해낼 수 없다. 홀로 떨어져서는 어떠한 것도 논리의 법칙으로부터 따라 나오지 않으며, 아마 더 많은 논리의 법칙들만 따라 나올 것이다. 우리의 정신 상태에 관한 또 다른 명제들 이외에는 어떠한 것도 우리의 정신 상태에 관한 명제들로부터 따라 나오지 않는다. “객관적인 진리들이 존재 한다’라는 진술로부터는 어떠한 구체적인 것도 나오지 않는다. 우리에게 어떠한 구체적인 것도 말해 주지 않는 진술은 의미 있는 진술이 아니다. 이와 같이 만약 우리가 조사했던 얼마간의 명제들에 지식이 제한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만 알게 될 것이지, 실재하는 세계에 대해서는 알지 못할 것인데 이는 우리의 정신 상태가 종종 우리를 속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합리주의는 우리들을 Platon이나 Descartes가 꿈꿨던 확실성에 놓아두는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세계에 대한 어떠한 지식도 얻지 못하게 되는 상태에 놓아두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계신다. 안 계신다.” 논쟁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계시기 때문입니다. 계시면서도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실 뿐입니다. 그렇다고 전혀 하나님은 나타나시지 않으셨는가? 그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창조와 섭리를 통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에녹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창조세계와 인간세상 안에 항상 계셨습니다. 지금도 계십니다. 신자나 불신자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도 활동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거의 죽어가고 있을 때에 호렙산에 나타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절체절명의 위기인 홍해 앞에 있을 때,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지구에 있다는 것으로도 믿을 수 있습니다. 만일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달이나 火星이나 木星이나, 金星이나 다른 별들도 똑같이 大氣圈이 있어야 합니다. 지구와 똑같은 대기권이 있어야 합니다. 아니면 하늘 전체가 대기에 가득 쌓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유독 우리들이 사는 지구에만 대기권이 있습니까? 약 1000km의 두께를 가진 대기권은 지구의 생명체가 사는 데 필요한 역할을 합니다. 태양이나 외계에서 지구로 들어오는 해로운 빛을 흡수합니다. 운석이 충돌하는 것을 막아 줍니다. 지구의 열의 일부를 흡수하여 지구를 보온합니다. 동식물이 호흡하는 데 필요한 기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 이런 대기가 화성에는 없습니까? 왜 달에는 없으며 다른 별들에는 없습니까? 왜 유독 지구에만 이것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예루살렘에 계십니까? 유대 땅에 계십니까? 이스라엘이 대대로 살던 유대 땅에만 하나님은 계십니까?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하늘아래 첫 번째 성소였던 예루살렘이 아니었습니다. 에스겔이 사로잡혀 간곳 바벨론이었습니다. 바벨론에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곳은 이스라엘의 포로들의 노역 장소였습니다. 예루살렘과는 전혀 다른 곳이었습니다. 그곳 고통의 장소에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교회가 크고 화려해야 하나님이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만 하나님이 계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곳에 임재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에 나타나십니까? 그를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십니다. 에녹을 보거나(창5:21-24), 노아를 보면(창6:9-13)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에게 나타나십니다. 온유한 자 즉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자에게 나타나십니다(시25:9).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알고자 애쓰는 사람에게 나타나십니다(잠23:19). 남에게 친절을 베푸는 자에게 하나님은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은 또한 어디에 나타나십니까? 성도들이 고통 하는 곳에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사람들이 고통 받는 것을 보지 못하십니다. 그래서 반드시 나타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고통의 장소에, 이삭이 고통당할 때 하나님은 나타나셨습니다. 히스기야가 앗수르의 산헤립에게 고통당할 때 나타나셨습니다. 제자들이 풍랑에 휩쓸릴 때에 나타나셨습니다. 베드로가 잡힌 감옥에 주의 사자를 보내어 베드로를 구출해주셨습니다. 밧모섬에 있는 요한에게 하늘을 열어주셨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이 말씀을 보면서, 들으면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교회는 예루살렘교회처럼 웅장하지도 않습니다. 서울의 교회들처럼 화려하지도 않습니다. 웅장과 화려함과는 거리가 아주 먼 교회입니다. 마치 그발 강가의 에스겔이 있는 곳과 흡사합니다. 그래서 희망이 있습니다. 또한 우리들이 심하게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또한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고통의 현장에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만 하나님을 의지할 뿐입니다.

 

그러나 모든 조건이 완전하게 구비되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모두 허사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면, 아무런 역사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그의 역사하심을 간절히 바라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를 전적으로 의지하고, 그를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고통의 현장에 반드시 임하실 것을 믿으시고 그를 전심으로 찾고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영혼은 상한 심령입니다. 꺼져가는 심지입니다.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영혼입니다. 우리의 고통의 현장에 하나님은 함께 하십니다. 우리의 우는 현장에 하나님은 같이 계십니다. 누구도 나의 사정을 몰라 정말 답답할 때에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실망하지 말고 우리는 앞으로 전진 해야 합니다. 늘 우리 곁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잊지 않고 좌절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들은 항상 백만장자와 동업한다는 생각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발 강가에 나타나신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에스겔에게 나타나셨습니까? 4절에서 14절을 읽어보면

 

4내가 보니 북방에서부터 폭풍과 큰 구름이 오는데 그 속에서 불이 번쩍번쩍하여 빛이 그 사면에 비취며 그 불 가운데 단쇠 같은 것이 나타나 보이고 5그 속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그 모양이 이러하니 사람의 형상이라 6각각 네 얼굴과 네 날개가 있고 7그 다리는 곧고 그 발바닥은 송아지 발바닥 같고 마광한 구리 같이 빛나며 8그 사면 날개 밑에는 각각 사람의 손이 있더라 그 네 생물의 얼굴과 날개가 이러하니 9날개는 다 서로 연하였으며 행할 때에는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 10그 얼굴들의 모양은 넷의 앞은 사람의 얼굴이요 넷의 우편은 사자의 얼굴이요 넷의 좌편은 소의 얼굴이요 넷의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니 11그 얼굴은 이러하며 그 날개는 들어 펴서 각기 둘씩 서로 연하였고 또 둘은 몸을 가리웠으며 12신이 어느 편으로 가려면 그 생물들이 그대로 가되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 13또 생물의 모양은 숯불과 횃불 모양 같은데 그 불이 그 생물 사이에서 오르락 내리락 하며 그 불은 광채가 있고 그 가운데서는 번개가 나며 14그 생물의 왕래가 번개 같이 빠르더라

 

오늘 두 번째로

 

II. 교회를 심판하시는 하나님(4-14)

 

에스겔이 그발 강가에서 본 모습이 무엇입니까? 지상에 없는 이상한 형체입니다. 네 생물을 보았습니다. 폭풍과 큰 구름이 밀려오는 속에 불이 번쩍번쩍했습니다. 빛이 사면에 비치고, 그 불 가운데에 벌겋게 달구어진 쇠 같은 것이 나타났습니다. 그 속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났습니다. 네 생물의 형상(겔1:5,8)을 에스겔이 보았는데, 기묘한 모습이었습니다. 사람의 형상이었습니다(5). 네 얼굴과 네 날개를 가졌습니다(6). 다리는 구부러지지 않았고 곧았습니다. 발바닥은 송아지 발바닥 같았습니다(7). 날개 밑에는 사람의 손이 있었습니다(8). 날개들은 모두 연결되었습니다(9절). 네 생물들은 앞으로 곧게 갔습니다(9). 얼굴들은 사방을 바라보았습니다. 앞은 사람의 얼굴이었습니다.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었습니다. 넷의 오른쪽은 사자의 얼굴이었으며, 왼쪽은 소의 얼굴이었습니다(10). 날개들은 둘씩 연결되었고, 둘로는 몸을 가렸습니다(11). 날개는 신이 가고자 하는 대로 곧게 갔습니다(12). 생물의 모양은 숯불과도 같고 횃불과도 같았는데 그 불이 그 생물 사이에서 오르락내리락했습니다(13). 네 생물의 빠르기가 빛의 속도였습니다(14). 네 생물은 사도요한도 밧모섬에서 보았습니다(계4:8, 5:6,8,14, 6:1,6, 7:11, 14:3, 15:7, 19:4).

 

에스겔이 어떤 이상(ha;r]m'/mar’âh)을 보았는데, 영광스러운 모습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천사들을 상징으로 본 것입니다. 네 생물은 각 분야의 대표입니다. 사람의 얼굴은 사람의 대표입니다. 사자의 얼굴은 짐승의 대표입니다. 소의 얼굴은 가축의 대표요 독수리의 얼굴은 날짐승의 대표입니다. 사면으로 향하여 있는 것은 이 세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고자 하는 대로 그대로 가는 것은 절대순종을 말합니다. 생물의 왕래가 신속하다는 것은 신속하게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곧은 다리 송아지 발바닥 같다고 하는 것은 명령받은 일을 반드시 관철한다는 뜻입니다. 에스겔이 이러한 모습을 이상으로 본 것입니다. 포로로 끌려온 피곤한 노역장에서 영광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얼마나 에스겔의 마음이 흡족했겠습니까?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영광스런 하나님의 상징된 모습을 보면서도 에스겔은 하나도 기쁘지 않았습니다. 에스겔에게 보여진 이상은 유대를 심판하시는 모양이었기 때문입니다.

 

4절을 보면 “내가 보니 북방에서부터 폭풍과 큰 구름이 오는데”라고 했습니다. 이 모습이 유대에 심판을 가져온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집은 모악산 남서쪽에서 비가 들어올 때 틀림없이 비가 옵니다. 모악산 남서쪽 말고 다른 쪽에 검은 구름이 아무리 많이 끼어도 비는 오지 않습니다. 모악산 남서쪽에서 들어와야 정확하게 비가 옵니다. 성경에서의 북방은 이스라엘을 심판하기 위해서 언급하는 쪽입니다. 이스라엘이 불순종할 때 북방의 나라를 동원해서 심판하셨습니다. 수리아, 앗수르, 바벨론입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보이신 기묘한 이상은 유다에게 심판을 행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불순종했습니다. 가나안 땅은 순종해야 사는 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해야 사는 땅이었습니다. 불순종하면 쫓겨나야 할 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수많은 사람들을 동원해서 800년간이나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때그때 먹어버렸습니다. 귀로 듣고 흘려버렸습니다.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하는데도, 도무지 듣지 않았습니다. 결국 유다는 망하게 되어 바벨론에 70년간 포로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거짓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묵살했습니다. 거짓선지자들의 말을 믿은 왕족들과, 일부 잘못된 사람들은 그 말을 믿고 바벨론에게 대적할 음모를 꾸몄습니다. 항상 거짓자들은 좋은 말만 합니다. ‘평강, 평강’만을 외칩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거짓자들은 ‘평강’을 말했습니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거짓 소망을 주었습니다. 왕족들과 귀족들이 듣기 좋은 말만 했습니다. 금방 바벨론에서 풀려날 것이라 했습니다. 이들은 거짓자들의 말만 믿고,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죄를 져서 70년이 지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을 심판하신다는 표징을 에스겔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순종([m'v;/shâmaʽ)이란 듣고, 경청하여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신명기28:1-2절을 보면 “1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2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이 말씀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를 믿으면 복 받는다.”입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습니다. “순종하면”입니다. “지켜 행하면”입니다. 회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회원의 의무를 다하라는 것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그 땅에 들어가서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새로운 세계가 열립니다. 그러나 그의 계명을 순종해야 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이지, “예수를 믿으면”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기에 우리들이 실패합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순종을 첫째로 삼아야 합니다. 순종을 연기해서도 안 됩니다. 바로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의 모양만 내서도 안 됩니다. 온전히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할까 말까 망설여서도 안 됩니다. 바로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하는 걸음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순종해야 합니다.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들이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肯定과 믿음을 혼동하는 것입니다. 肯定이란 事物의 一般的 關係를 나타내고 判斷의 對象에 積極的 態度를 取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들을 肯定的思考로 보는 개념입니다. 참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심판하신다고 했습니다. 듣는 자들의 입장에서는 부정적인 말입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겠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거짓선지자들은 평강의 하나님께서 평강을 말하라고 했어’ 듣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긍정적입니다. 누가 들어도 거짓선지자의 말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따릅니다. 긍정적사고의 결과는 믿음과는 무관합니다.

율곡 이이는 삼사나 춘추관에서 관직을 거쳐 1581년 이후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 이조판서, 병조판서를 잇달아 맡았습니다. 이이는 선조에게 많은 개혁안을 올렸습니다. 그중 만언봉사와 시무육조(任賢能, 養軍民, 足財用, 固번병, 비전마, 명교화)가 대표적입니다. 시무육조에 10만 양병설이 들어 있었습니다. 왜구의 침략에 대비해 10만 명의 병사를 길러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당쟁 때문에 무시당합니다. 이이는 서인에 속했습니다. 그러나 동인의 반대로 10만양병설은 무시당해버렸습니다. 누가 봐도 이이의 사고는 부정적입니다. 긍정적사고 ‘좋게좋게 더 좋게’가 아닙니다. 결국에 임진왜란으로 인해서 조선은 일본에 대패합니다.

 

삶을 긍정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곳에 나타나십니까? 고통의 현장에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자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는 사람에게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자들에게 복을 주십니까?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에게 복을 주십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무조건 복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에게 복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 계속해서 순종하여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And

율법으로는 안 되는 우리의 구원(로마서7:1-25)

 

인터넷설교신문에서 따온 이야기입니다. 젊은 부부가 귀농을 했습니다. 농사를 지어 그것을 가공하여 부가가치를 높이기로 했습니다. 그들이 선택한 작물은 참깨였습니다. 신통치는 않았지만 참깨를 어느 정도 수확하였습니다. 그들은 그 참깨로 100% 진짜 참기름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진짜 참기름을 만들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부부는 그 참기름이 잘 팔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얼마 후에 손님이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이유인즉슨, 그 참기름이 진짜 참기름이라는 걸 믿지만 그 참기름 맛이 입맛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가짜 참기름 맛에 길들여진 입맛 탓에 정작 진짜 참기름이 맛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참깨농사를 직접 지어 진짜 참기름을 만들어 팔겠다는 부부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착향제와 조미료를 가미한 강력한 가짜 참기름의 강력한 맛은 본래 참기름의 맛을 잠식하였습니다. 사람들의 입맛이 가짜에 중독된 것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신앙생활 한다는 것이 정말 쉽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의 장애물과 훼방이 수없이 앞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못된 새가 와서 깃들이거나 잘못된 누룩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신앙을 잘못된 방향으로 발효시키고 잘못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율법에 종속되어 있지 않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4)는 사실을 바울은 1절 하반절에서 증명합니다. 율법은 어떤 사람에게 오직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만 법적 구속력을 미친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혼인법(2-3)을 예로 들어 이것을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결론을 끌어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음은 세례와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現在化(현재화)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현재화된 것입니다. 로마서6:3-6을 보면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고 고린도전서10:16-17을 보면

16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17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

 

라고 했습니다. 즉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의 죽음으로 되었습니다. 이로써 그들은 율법에 대해서는 죽어서 율법의 효력 영역으로부터 벗어난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힘으로 삶을 규정하는 한 율법은 계명에 복종하게 하는 대신에 바로 정욕과 범죄에로 誤導(오도)하며 정욕과 범죄는 죄와 죽음으로 인도합니다(7-11). 율법이 그 영향력을 상실한 곳에서 하나님의 영이 작용하셔서 속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게 합니다.

 

율법과 죄의 관계는 바울사도가 3:20, 5:13, 7:5에서 서술했습니다. 그러나 7-13절에서 상세하게 기술합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선한계명입니다(10,12). 그러나 율법이 인간에게 긋는 경계선은 인간에게 矛盾(모순)犯法(범법)觸發(촉발)시킵니다. 즉 죄는 하나님께 반항하는 숨은 적대감으로서 알려지지 아니한 채 사람 속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계명을 통하여 깨어나 작용을 하게 됩니다(8-9). 율법과 그 작용을 왜곡시켜서 죽음을 가져오는 연장으로 바꾸어버립니다(10-11). 그러나 바로 이 점에서 율법은 하나님이 지정해 주신 목표에 도달하는데 그것은 죄의 치명적 성격을 백일하에 드러냅니다(13). 바울은 이것을 탐내지 말라는 계명을 들어서 확실하게 설명합니다(7-8). 이렇게 함에 있어서 바울은 일인칭 단수 어법의 형식으로써 특별히 자기 자신의 경험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아담의 역사를 모형으로 하여 각 사람이 율법과 미주치는 것을 서술합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이 율법과 이렇게 마주침은 주관적으로 전적으로 달리 체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바울은 빌립보서3:3-9에서 자기 자신의 실례를 들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7:7-13절이 율법과 결부된 인간의 역사를 묘사했다면, 14-20절과 21-24절은 율법 아래 있는 인간의 삶을 서술합니다. 14절은 근본문제를 지적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의 실제적 의도를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신령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율법은 하나님께 근원을 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율법 아래 있는 인간, 곧 화자인 는 이것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육적이어서 죄에 팔렸기 때문입니다. 15-17절과 18-20절은 하나의 병행적 사상구조에서 이 분열의 결과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율법이 명하는 바를 하고자 하며, 선과 구원과 생명을 이루고자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自我(자아)는 실제로는 하나님께 맞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맞추어져 있고, 죄에 지배를 받기 때문에 그 자아는 오직 파멸과 죽음을 일으키면서도 실제로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실정은 단지 개개의 過誤(과오)에서 그리고 계명을 지킬 수 없는 무능력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경건한 사람이 겉모양으로 율법을 성취하는 것처럼 보이는 곳에서도 역시 그 사람은 그의 목표에서 빗나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에게 사로잡힌 그의 자아는 하나님께 이르는 길을 그에게 왜곡시키고 그를 죄의 꼭두각시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21-23절은 구원받지 못한 인간의 분열, 즉 그가 그 아래 서 있는 불가피한 율법(21)을 다시 한 번 개진합니다. 속사람 즉 그가 본래적으로 그러해야만 할 그 인간과 그의 마음, 즉 그의 속생각과 감정은 하나님의 율법에 기꺼이 찬동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의 지체 즉 구체적으로 영위되는 삶의 실존에서는, 죄가 지배하고 律法惡用합니다. 그에게는 죽음에 떨어진 이 현존(24)으로부터 구출을 갈구하는 부르짖음이 있을 따름입니다. 25절 상반절은 한 쪽에 이 구조 절규와 다른 한 쪽에 구원에 대한 간략한 감사를 대칭시킵니다. 이 감사는 8장에서 근거가 제시됩니다. 25절 하반절은 다시 한 번 21-23절을 요약합니다. 그렇지만 역점은 약간 다른 곳에 놓습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면서도 말입니다. 7-25절의 전체 단락에서 바울은 구원받지 못한 인간의 목소리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그런데 이 구원받지 못한 인간은 그리스도를 만나고 하나님의 영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그의 상황을 명백하게 인식하며 서술할 수 있습니다. 이 단락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로서도 여전히 죄인인 그리스도인의 목소리를 듣는다고 생각하는 주석가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8장에서 성령 안에서 사는 삶에 관하여 말하는 바에 비추어 볼 때에 이런 주석가들의 주장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주장에서 옳은 점은 그리스도인도 역시 그리스도와 맺은 결속으로부터 떨어져 나와서 다시금 죄의 지배 아래 빠지는 위협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독일성서공회해설성경).

 

법은 사람을 어느 정도 통제는 할 수 있어도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법을 지킨다는 것은 자발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법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법은 그 많은 법을 지켜야만 정의로운 자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많은 법을 지킬 자는 한 명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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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고한 인간(로마서7:18-25)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아마도 이 말은 생각 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할 법한 말입니다. 정말! 내 자신이 그래? 그것밖에 안 돼?라는 말입니다. 곤고한 사람이라는 말은 비참한 사람입니다. 육신적인 생활상에서 비참한 사람이 아니라 영적인 면에서 비참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비참한가?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입니다. 여기서의 죽음이란 이 세상에서의 숨끊어짐만의 죽음이 아닙니다. 영원한 죽음이란 이세상+다음세상에서의 죽음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믿든지, 믿지 않든지 이 죽음은 필연코 어떤 사람들에게 적용이 됩니다. 그 사람들이 자신의 종교를 가졌다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다 하면 홀연히 임합니다. 필연코 임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를 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미래의 세상이 없을 것 같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우연히 Big-Bang에 의해서 저절로 생겨난 것 같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면 가끔씩 자신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신다면 믿겠는데 그렇지 않으시고 다만 성경으로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니까 전혀 믿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필연코 그 말씀들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신들의 비참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신의 곤고함을 인지해야 합니다. 바울사도가 Roma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를 쓸때는 57년이나 58년도로 추정합니다. 바울사도가 그의 제3차 전도여행을 끝마칠 때쯤입니다. 바울사도가 예수그리스도를 만난 직후가 아닙니다. 점점 원숙해진 때입니다. 순교의 날이 그렇게 많은 날이 남지 않은 때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만난 이후로 줄곧 여생을 주님과 함께 했었던 사도입니다. 그가 ‘오호라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고 탄식했습니다. 이 상황을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대입시키면 정말 심각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비참한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알지 못하고 능력이 없는 대상들에게 우리들을 맡겨야 할까요? 절대로 그럴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영원히 멸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사람이라고 하면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원히 멸망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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핍박자의 삶을 사는 사람은 결국 자기도 피흘리는 죽음을 맛보게 되는 법이다.

​  John Pen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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