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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명으로 인하여 죄로 심히 죄 되게 함(로마서7:13)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함이니라

사람들은 금지된 것에 대해서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것을 탐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내 것이 있는데 다른 사람의 것을 넘보는 못된 습성, 이것이 죄로부터 출발합니다.

John Murray는 사람이 타락한 결과를 이렇게 서술합니다. 인간의 내부적 혁명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주체적 상태로 내부적 혁명의 중심축은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변화된 태도였습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이 모든 것은 사람의 정신적 태도에 근본적인 변화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애초 사람은 하나님의 현존하심을 나타내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창조된 원래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 최상의 기쁨을 누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죄를 짓자 사람은 하나님의 낯을 피했습니다. 성벽과 느낌과 감정의 새로운 복합체가 사람의 마음과 뜻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는 수치와 두려움을 경험했는데, 그것은 우리에게 범죄 한 양심과 빛으로부터 도망치려는 시도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서의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 대한 그의 관계를 변화시켰습니다. 하나님은 존재와 본성과 성품과 내적 (intradivine) 관계에 있어서 불변하십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불변이십니다. 이러한 변화는 가변성(可變性)이 아닙니다. 그 자신의 불변의 완전성의 필연적인 표현입니다. 그것은 그의 불변의 성품에 반하는 것에 대한 불가결한 반응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불화의 원인은 사람의 잘못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불화는 일방적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불화는 창세기3:9 이후로 여러 가지 형태를 띠고 등장합니다. 이전에는 모든 면에서 호의와 화평과 조화의 증거들이 있었습니다. 질책과 불쾌의 기미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불화의 기미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의 범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전혀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암시조차 되지 않았던 하나님의 성품이 등장합니다. 노여움, 질책, 응보, 저주, 정죄 등입니다(창3:16-17,23). 죄는 우리의 정신적 태도와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도 분열을 초래하며 영향을 미쳤습니다. 죄는 우리를 하나님의 호의로부터 분리시킵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습니다.

죄는 우주적인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죄는 사람의 마음의 영적 영역에서의 사건입니다. 죄는 영에서 발생하여 영에 존재합니다. 그것은 육체적 세계에서의 혼돈이 아닙니다. 육체적 상태의 불균형도 아닙니다. 그것은 영의 영역에서의 움직임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육체적이고 비영적인 것에 철저하게 영향을 미칩니다. 죄는 우주적 관련성을 갖고 있습니다(창3:17,롬8:20, 22).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된 화해가 최후의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피조물은 부패에의 속박으로부터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의 자유 안으로 구출되지 못합니다.

죄는 인간가족에 있어서의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죄는 아담이 졌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하와와 아담이 죄를 졌습니다. 그러나 죄는 인류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것은 인류라는 유기체전체에 영향을 미쳐 왔습니다. 따라서 공동체적인 부패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까지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직접적으로는 아담의 가족사의 전개에서 죄악들의 목록이 나옵니다. 시기, 악의, 증오, 살인, 일부다처제, 폭력. 등입니다.

죄는 사람 자신의 구성에 있어서 분열을 초래케 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은 피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장수함에도 불구하고 필경은 죽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경고가 성취되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죄의 대가는 죽음이라는 것을 사람마다 입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망의 진정한 원인은 죄입니다. 죄는 인간에게 심각한 특성을 드러냅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그 계명을 범하도록 합니다. 따라서 율법이 죄를 낳는다는 역설적인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가 사람을 기만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기만합니까? 죄는 사람이 만족을 죄 가운데서 찾을 것이라고 기만합니다. 사람들은 죄를 짓고서는 핑계를 댑니다. 술김에 죄를 졌다는 것입니다. 또 죄를 짓고서는 도피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죄에게 기만을 당하는 것입니다. 즉 죄가 거룩하고 공정한 선한 율법을 취하여 악의 목적을 충족시키는 목적으로 비틀어버립니다. 죄의 끔찍한 면은 죄가 좋고 훌륭하며 아름다운 것들을 악의 무기로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죄의 하는 짓이 그렇습니다. 죄는 사랑의 사랑스러움을 정욕으로 바꾸어버립니다. 죄는 명예로운 것을 금전과 권력을 위한 욕심으로 바꾸어버립니다.

 

 

And

이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번 한것이라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 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누가복음2:1-12

And

율법이 이르매 내가 죽었다(로마서7:8-12)

 

9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10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11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흔히 우리는 어떤 사람들을 가리켜서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이라고 말을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소위 선한 사람들만 모여 있다고 가정했을 때 과연 문제가 없을까요? 아주 어린아이가 무죄지역이라고 하는 곳에서 그야말로 인간들의 언어대로 죄 없이 길렀다고 가정해봅시다. 과연 그 어린아이가 장성하면 전혀 죄하고 관련 없는 행동을 할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죄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스로 자생합니다. 사람의 속에 죄의 씨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법 없이도 산다고 하는 사람의 마음속에도 역시 죽을죄가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곧 ‘법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을 때’ 죄에 대하여 확실한 인식이 없는 상황에서 안전함을 느꼈던 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때는 언제냐? 율법의 완전한 뜻(함축적)의 의미가 의식 속에 깊이 새겨져 있지 않았던 때입니다. 율법으로 인한 짐이 없었을 때입니다. 그런 때에는 바울사도 자신이 도덕적으로 완전한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적으로 건실한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흔히 마음을 비우라고 하는데 실제적으로 마음이 비워집니까? 절대적으로 마음이 비워지지 않습니다. 언제 마음이 비워집니까? 자신의 죽음이 임박할 때입니다. 이때는 모든 것을 놓아야 하기 때문에 강제적으로 마음이 비워지는 것입니다. 그전에는 절대적으로 마음이 비워지지 않습니다. 근본 죄 속에서 잉태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다툼이 어디로부터입니까? 죄로부터입니다.

바울사도는 계명이 이르매/ejlqouvsh" de; th'" ejntolh'"/엘쏘우세스 데 테스 엔톨레스/(그) 계명이 오매. 율법이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 오자 내가 전혀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사람에게 무엇을 요구합니까?

마가복음12:29-31 29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율법은 항상 완전함을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셨습니까? 10계명입니다. 하나님 사랑하기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라고 하셨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 인간이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접하는 사람치고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는 죽은 사람입니다. 바울사도가 죽은 때가 언제입니까? 율법을 깨달았을 때입니다. 자기가 온전한 사람이 아닌 줄을 율법을 받고 깨달았습니다. 내가 죽어야 할 죄인임을 율법이 왔을 때 비로소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자꾸 ‘율법이 우리를 죽인다. 율법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라고 말을 하니까 계명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율법에 대해서 계속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계명의 목적은 영생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태초부터 참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레18:5)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자신 스스로를 의롭게 여기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열심히 노력하면 영생을 취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사상은 유대인들에게 팽배했습니다. 그러나 생명에 이르게 할 의도였던 바로 그 계명이 실제로는 사망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그러면 율법에 잘못이 있었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율법을 보면 율법은 사람들을 바르게 살게 합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뜻대로 살게 하려고 진작시키도록 노력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 선하심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과거나 현재에도 항상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한 것입니다. 이토록 사람들에게 유익한 율법이 사람을 거룩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 것은 율법 자체가 아닙니다. 계명은 결코 어느 누구를 죽이거나 상하게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바로 죄입니다. 사람이 회심하기 이전의 상태에서 하나님의 법에 대한 엄격한 복종에 따라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도록 기만한 것은 바로 죄였습니다. 사람이 제 아무리 힘쓰고 애쓸지라도 그는 결코 정말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상태를 이룰 수가 결코 없습니다.

무엇을 외워서 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몸과 마음을 수련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몸은 사람이 닦을 수 있어도 마음은 절대로 닦지 못합니다.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예레미야13:23) 영생은 예수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And

계명으로 말미암아 각양 탐심을 이루었다는 말(로마서7:8-12)

 

오늘날은 사람들이 각박해 질대로 각박해졌습니다. 물론 예전에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전보다 더 각박해진 것 같습니다. 자신에게 조금만 피해가 돌아갈 양이면 금방 반응을 합니다. 그 반응하는 도가 지나칠 정도로 빠릅니다. 그로 인해서 다투다가 사람을 다치게 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죽이기도 합니다. 분명히 대가성 뇌물로 주는 돈임을 아는데 자신은 들키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소위 검은 돈을 받습니다. 국회의원이면 품위를 지켜야 합니다. 법을 만드는 기관 즉 立法機關이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품위를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밝은 대낮에 직장인 국회의 일을 하지 않고 불륜을 저지르는 행태를 하는 아주 나쁜 사람도 있습니다. 도저히 사람들이 용서를 할 수 없다는 반응입니다. 이토록 죄는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사람들을 무차별 공격하고 있습니다. 죄는 염치도 없습니다. 죄는 어디고간에, 죄는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고 간에 죄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죄 없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만일에 죄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악은 죄와 육신의 부패가 원인입니다.

원래 사람은 올바르게 창조되었습니다. 올바르게 창조되었다는 것은 죄 없이 사람이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죄 없이 창조된 사람은 의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았습니다. 성경이 규정하고 있는 가장 완전한 상태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골로새서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그런데 사람이 사단으로부터 죽을 제안을 받았습니다. 사람은 사단의 제안을 받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사단의 유혹을 받을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사단이 만든 세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사단의 제안을 받았습니다. 사단의 제안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이의를 제기한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음입니다. 이것이 곧 죄입니다. 사단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 인간의 죄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형벌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John Murray에 의하면 죄는 사람의 타락 이전에 우주에 현존하고 있었습니다. 영인 사단이 사람이 타락하기 전에 이미 타락했습니다. 사단은 악의 왕국의 우두머리입니다. 죄는 경험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죄와 악은 인간의 삶과 경험의 영역 밖에 존재합니다. 우리 세상에 죄가 있다는 것은 사단과 귀신이 실재하며 활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배후에 영적인 존재가 실재하고 있습니다. 사단은 이 세상의 신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는 죄가 가득합니다. 사단은 공중의 권세 잡은 왕입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최대의 적은 눈에 보이는 적대세력이 아닙니다. 악이 보이는 배후에는 마귀와 그의 하수인들이 교묘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아주 교활하고 정밀하게 활동합니다. 언제나 악의에 찬 의도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늘 죄를 선동합니다. 죄 된 일들을 끊임없이 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기준에서 나는 죄없다하는 사람들은 아주 교만한 사람입니다. 자신들의 수행과 수양으로 죄가 없어졌다고 하는 자들은 더 교만한 자들입니다.

이런 죄들도 정죄하는 법이 없으면 무의미합니다. 그래서 국가마다 정죄하는 법률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계명이 있었습니다. 율법이 탐내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으면 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을 것입니다. 계명은 두 돌판에 기록되었습니다. 첫 번째 돌판은 1계명에서 4계명이 기록되었습니다. 두 번째 돌판에는 5계명에서 10계명까지 기록되었습니다. 첫 번째 돌판은 하나님께요, 두 번째 돌판은 사람에게입니다. 우리들은 내가 가진 것 말고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탐합니다. 탐한다는 것은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임을 자각하고 소유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룬 것입니다. 로마서5:12절을 보면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가 인간 세상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모든 인간들에게 사망을 초래했습니다. 죄는 곧 하나님의 율법에 저항합니다. 죄는 인간에게 사망의 통치를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5:13-14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그러나 죄가 씌워지는 것은 사람이 율법을 통해서 그것이 죄임을 알 때입니다. 따라서 율법은 사람들을 영적으로 죽이는 것이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율법은 사람들을 영적으로 죽입니다. 율법이 없다면 영혼을 죽일 힘이 없기 때문에 죄는 죽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서 죄는 율법이 들어와서 죽일 기회를 제공해주기를 기다립니다. 곧 계명이 탐심을 드러나게 한 것입니다. 드러나게 할뿐만 아니라 계명이 탐심을 자극한 것입니다. 인간은 금하는 것을 더 하고 싶어합니다.

 

And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를 알지만(로마서7:8-12)

 

교육이란 어떤 것에 대하여 모르는 사람에게 잘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전까지는 잘 몰랐던 것을 교육을 받아서 잘 알게 됩니다. 그래서 바른 교육이 꾸준히 전개되어야 하며, 바른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참 교육 참 교육 하지만 말로만 참교육을 하는 교육당국입니다. 이를테면 역사를 왜곡한다는 것은 바른 역사를 비틀어서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곡된 역사를 배우게 되면 왜곡된 것이 머리에 각인이 되어버립니다. 요즘 박근령의 망언에 우리나라사람들이 매우 분노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틈만 나면 역사왜곡을 하며 오만잡것들을 합사한 것들에게 절을 하는 일본의 총리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같이 아시아에서 흉폭하고 잔인한 일을 저지르고도 전혀 반성하는 기미가 없습니다. 그런 중에 박근령이 미친 말을 한 것입니다. 아베나 박근령이나 역사왜곡에 대해서 전혀 생각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러한 말들을 듣고서 교육이 이루어진다면 아주 잘못된 생각과 행동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극우주의자와 태평양전쟁의 주범들의 후손이라고 하는 작자들이 태평양전쟁이 잘못되었노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르게 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더구나 생명에 관한 일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을 때 사람들은 생명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하물며 영원한 생명에 관한 일들은 더욱 소중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교육에 찌들면 그 생각을 바꾼다는 것이 정말 어렵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자신의 고집대로 갑니다. 그러다가 망합니다. 국민들이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한 4대강 공사를 이명박이란 어리석은 사람이 어기고 공사를 끝끝내 했습니다. 국민들은 4대강공사를 하면 우리나라에 심각한 경제난과 강이 죽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기고 어기며 어기고 공사를 했습니다. 공식적으로 들어간 돈만 22조원입니다. 이 돈은 한 노동자 1000만년에 해당하는 연봉입니다. 2015년도 우리나라 예산이 306조원입니다. 4대강은 단 1%도 쓸모없는 공사입니다. 그런 곳에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 부었습니다. 그런데 이명박이란 자가 어기고 공사를 한 4대강의 혜택을 받았습니까? 전혀 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피해만 막심하게 입었을 뿐입니다. 끝내는 4대강의 댐을 파괴해야 할 것입니다. 이토록 고집 세게 한 결과 국민들에게 엄청난 손해와 피해를 주었을 뿐입니다. 이것이 바르지 못한 것이고 고집을 세운 결과입니다.

바울사도는 첫걸음마를 하고 있는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성도들에게 바르게 알려주려고 무진 애를 쓴 것입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전통, 전통 하면서 자신들의 교리를 바꾸지 않으려 했습니다. 바울사도의 변()이 무엇입니까? 율법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법입니다. 그러므로 잘못될 수가 없습니다. 율법의 기능은 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율법은 죄의 근본적인 것을 다루지 않습니다. 율법은 죄의 존재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율법이 죄를 정합니다. 죄는 율법이 없다면 죽은 것입니다. 죄는 율법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습니다. 율법에 의해 어떤 일이 죄로 정해지기 전에는 사람은 그것이 죄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율법은 기한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입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매년 대속죄일에 하나님께 희생제를 드렸습니다(9:24-26).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가 일 년간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고 사람들의 어떠한 행위로 인해서 죄를 용서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희생양의 죽음으로 용서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을 지켜서 용서함을 받는 것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율법은 다만 사람으로 하여금 이것이 죄고, 저것이 죄다라고 알려주는 것뿐입니다. 희생양으로 인한 속죄가 언제 끝났습니까?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입니다. 이제 다시는 희생양으로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함 받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모형의 희생양의 원형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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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ma 교회(로마서7:1-6)

 

우리는 오늘날의 교회를 보고 성경에 나와 있는 교회를 유추합니다. 그러면 틀린 것입니다. 2세기경에는 로마의 도시에서 그리스도교회가 확고하게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전도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순절에 로마에서 예루살렘에서 은혜를 받았던 성도들이 아직 교회를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Roma교회가 큰 교회로 알고 모든 것을 적용한다면 문제가 붙습니다. 바울사도가 로마서를 보낼 때 이렇게 보냅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3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6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7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다른 서신들처럼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갈라디아 여러 교회에게가 아니고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라고 했습니다. 바울서신을 받았던 당시의 Roma교회는 예배나 모임을 위해 넓은 장소가 아직 마련되지 않았던 때입니다. 당시의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유대인 구역이나 작은 구역의 가정교회로 모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다른 지역의 교회들처럼 바울의 편지를 돌려볼 수 없었습니다. 이런 가정교회는 안전지대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당시 Roma는 신이 하도 많아서 발에 걸릴 정도라고 했습니다. 오늘날의 일본도 귀신에 걸려서 다니지 못할 정도입니다. 따라서 로마에서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여러 가지의 장애물이 산적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중에 바울서신을 낭독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편지를 읽고서 토론했을 것입니다. 토론자들은 바울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 또 모르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의아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의 말을 듣고서 바울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복음에 대해서 구원에 대해서 확실하게는 몰랐을 것입니다. 오순절에 막 태동한 교회이기에 유대교와 상당히 혼동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에 목숨을 건 바울사도는 Roma에 있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나온 지 2000년이 훨씬 넘었지만 아직까지도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종교가 다르고 언어가 다르며 인종이 다른 것도 문제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은 복음에 대해서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마귀는 결코 최종목적지인 멸망의 길로 치닫고 있지만 끝까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할 것입니다. 오늘도 방해하고 내일도 훼방하며, 앞으로도 계속 훼방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일을 염두에 두고 임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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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稱義)의 열매(로마서7:1-6)

 

바울사도는 5장에서 그리스도인의 화평에 대하여 설명했습니다. 6장에서는 성도의 거룩함에 대하여 설파했습니다. 7장에 들어와서는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영광스러운 자유를 추가합니다. 사도바울이 그렇게도 유대인들에게 율법의 예속에서 벗어났다고 설파하였지만, 그들의 귀는 이미 굳게 닫혀버렸습니다. 그리하여 7장에서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환원(還元)하면 사도바울은 의롭게 된 그리스도인의 성화를 설명하면서 6장에서 죄의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었습니다. 7장에서는 율법의 문제를 다룹니다. 이 단락에서는 성화(聖化)의 과정을 설명합니다. 그러나 성화의 과정에는 고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성화의 과정에서 율법과 육신의 문제에 반드시 부딪혀 싸우게 됩니다. 예를 들면 운전 중에 신호를 어기게 되면 범법(犯法)한 것입니다. 하지만 다행이랄까 교통경찰에게 적발되지는 않았습니다. 곧 범과금을 물지는 않았지만 법은 어긴 것입니다. 우리 일상에서 이런 일들은 비일비재합니다. 그러나 교통경찰에게 적발되지 않았다고 하지만, 법을 어긴 것은 사실입니다. 당연히 심적으로 갈등하기 마련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를 누리기란 상당히 어려운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성화(sanctification)의 과정을 말하기 위하여 율법에서의 자유에 관한 문제를 언급하였습니다. 즉 법의 유효성을 말합니다. 율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에 대해서 율법은 아무런 제재를 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실제적인 예를 2절과 3절에서 제시합니다.

2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3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찌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그리고 그것을 4절에서 6절까지 적용합니다.

 

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찌니라

 

법은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법이 추상같다하더라도 죽은 사람을 어떻게 할 수는 없습니다. 즉 법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사람이 살아 있을 동안만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의 영향력을 설명하기 위하여 부부관계에서 이루어진 법을 예로 듭니다(2~3). 여기에서 첫째로 문제시하는 것은 기혼녀의 남편과의 관계입니다(2). 기혼녀는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남편에게 매입니다(2). 그러나 남편 사후에는 남편에게 매이는 법에서 벗어납니다(2). 그녀는 남편의 법에서 자유합니다 둘째로 문제시되는 것은 기혼녀의 다른 남자와의 관계입니다(3). 기혼녀는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가지면 간음입니다(3). 그러나 남편 사후에는 다른 남자와 재혼하는 것이 가능합니다(3). 그녀는 남편의 법에서 자유 합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은 예증으로 법이 영향력을 발휘하는 경우와 발휘할 수 없는 경우를 설명한다.

 

여자: 남편생전- 법에 속박-다른 남자-간음

여자: 남편사후- 법에 자유-다른 남자-재혼

 

사람이 습관화가 되면 고치기가 상당히 어려운 법입니다. 쇼생크탈출에서 레드는 감옥 에서 무려 40년을 보냈습니다. 가석방을 그렇게 바라고 바랐지만 막상 밖으로 나와 보니까 적응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전의 사람들처럼 자살을 택하려다가 앤디 와의 약속이 생각나서 약속장소를 찾아나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은혜인 율법에서 자유함을 적응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꾸 바울사도가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의 귀는 어두워졌습니다. 자신들이 믿고 따르는 것들이 거짓 것이고 헛것인데 마치 진실인 것처럼 생각하고 믿고 있습니다. 의롭다하심의 열매는 하나님을 믿고 거룩하여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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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아 행복한 사람이여!(시1:1-6)

일정 : 2020년 11월28일(토) 오전10시-13시

방식 : 화상예배

장소 : Kt 텔레캅사옥 14층 대강당

       서울 특별시 구로구 가마산로291 kt 텔렐캅빌딩

강사 : 신동필목사(KT 고문목사/생명줄교회)

말씀선포: 하나님의 은혜(고전15:10)

 

전주에서는 남전주청사CS4층에서 화상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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