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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과 그리스도인(로마서7:1-6)
1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줄 알지 못하느냐 2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3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찌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찌니라
유대인과 율법, 율법과 유대인. 이 둘은 떼려야 뗄 수 없었던 관계였었던 것 같습니다. 그만큼 율법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생명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신 이후로는 율법이 자리를 예수님께 내주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도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로마서7장에는 novmo" /법이라는 단어가 모두 23번이나 나옵니다. 거의 매절에서 율법이 나옵니다. 노모스/율법은 고전헬라어 문헌에서는 네모(nevmw/할당하다, 분배하다, 지정하다)에서 유래했습니다. 본래 ‘타당하거나 올바른 것, 어떤 자에게 할당된 것’이란 의미였습니다. 즉 노모스는 모든 종류의 ‘인정되거나 기존한 규범, 규정, 질서, 관습, 관용법, 전통’ 등 폭넓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노모스는 본래 종교적이었습니다. 제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헬라사람들은 모든 소유는 신들로부터 온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신들이 우주의 질서와 인간관계의 질서를 유지해 준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법이 신과 관련된다는 보편적 확신이 전 역사를 걸쳐 발견되었습니다. 법의 순수한 인간적 측면이 강조되었던 시대에도 잠재의식적으로 지속되었었습니다. 정치적 영역에서 노모스는 도시국가의 가장 본질적 특징, 곧 사법상의 규범, 법적 관습, 토지법으로 생각했습니다. 주전 5-6세기 경부터 노모스는 복수 로모이(법률)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거기서 ‘성문법, 헌법, 국가의 강제법’이란 의미를 지녔습니다.
법이라는 단어는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구약의 율법을 포함하는 일반법을 의미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특히 로마서7:1-6에는 혼인과 관련된 법이 언급되었습니다. 기혼녀가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남편에게 매이지만, 남편이 죽은 후에는 남편에게서 자유하게 된다는 법입니다. 로마서7:21에서는 조금 더 일반적인 의미로 이 단어가 사용되어 어떤 법칙(원칙)을 말했습니다. 선을 행하기 원하는 사람에게 악이 함께 있다는 법칙입니다. 이외에 로마서 7장에서 법이라는 단어는 주로 율법을 지시하기 위하여 사용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율법적인 문제에 많이 부딪힙니다. 사실 우리들의 구원은 미련해보이지만(고1:25), 미련하지 않습니다. 쉽게 얻은 구원 같지만, 결코 쉽지 않은 구원입니다(마18:24). 그런데도 사람들의 심리는 묘합니다. 어렵게 얻은 것을 좋아하는 심리가 있습니다. 소위 신의 직능이라고 불리는 직능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경쟁을 뚫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 직능이 각광을 받습니다. 예로 각종 고시나 아나운서 등입니다. 평범하게 몇10대 1의 경쟁률은 사람들이 인정을 별로 하지 않습니다.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단계를 만들어놓고서 각 단계마다 철저하게 엄격한 법을 만들어 놓고, 그야말로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도록 만들어놓았는데도 목표를 달성했다면 굉장히 좋아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렵고 힘든 단계를 밟아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단번에 100%가 없습니다. 각 단계마다의 성취율이 있기 때문에 오늘은 0.1%. 내일은 0.5%로 긴 행보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은 단번에 도달하는 구원입니다. 이 단계를 지났으니, 5%, 저것을 했으니 7%가 아닙니다. 그러나 아직도 성도들과 일부 목회자들은 율법적인 것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에 익숙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사람들은 율법을 좋아합니다. 즉 어렵게 얻은 것을 값지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큰일인 것입니다. 이러다가는 말씀은 사라지고 서푼가치도 없는 행위가 교회의 상좌를 차지할까봐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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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부류의 인간(로마서6:15-23)
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삯과 은사, 사망과 영생의 대조. 동서고금을 통해서 이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많은 사람들이 연구하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연구하고 노력했다고 그 결과를 내놓았습니다. 각종 종교들입니다. 사람이 신을 만들과 신과 합력하여 영생할 수 있다는 합리적인 이론을 만들었습니다. 물론 이 이론은 잘 먹혀들어갔습니다. 그래서 무당들이 생겼습니다. 박수들이 생겼습니다. 종교시조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 가지 것들로 각색(脚色)하고 꾸미고 덧붙였습니다. 그리고 신이라고 하는 것들 즉 보여서 섬길 것들을 만들어 세웠습니다. 그 모양은 갖가지였습니다. 금수와 벌레현상, 인간의 모양, 심지어 무생물과 살아있는 나무의 형상 등 가지가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20:4-5 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이미 귀를 막은 사람들은 제멋대로 움직였습니다. 깎아 만들고 부어 만들고 좀 괴상하게 생긴 것들을 옛날부터 지금까지 섬기고 있습니다. 그것들이 영생을 주고, 현 생애를 주관한다면서 말입니다. 황당한 주장일 뿐만 아니라 엄청나게 사람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실체도 없고, 허상인 거짓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6:39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죄의 삯’ ta; ga;r ojywvnia th'" aJmartiva"/타 가르 옵소니아 테스 하마르티아스/(그) 보수 (그) 죄의/이란 ‘죄에 대하여 지불된 삯’입니다. 하나님의 은사는 사람에게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입니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병이 들어서 죽고, 사고가 나서, 또 여러 가지 형태의 죽음을 우리들은 매일 접합니다. 그러나 보통은 사람들이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이 생과 마감을 하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 육체적인 사망입니다. 영적인 사망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영원한 사망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죄의 대가’로 이어지는 사망입니다. 모든 형태의 사망은 죄인이 그의 죄로써 얻는 것입니다. 반대로 영생은 선물입니다. 선물이라는 것은 값없이 무료로 주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에 의해서 죄인에게 얻어지는 것입니다.
당시에 삯이라는 단어는 군사용어였습니다. 사병들이 사령관에 의해서 지급받는 급료였습니다. 즉 죄는 이 삯을 지급하는 죄의 사령관에 의해서 받는 급료 곧 사망이라는 것입니다. 두 부류의 인간들 곧 영생(永生)으로 가느냐? 영멸(永滅)로 가느냐는 것은 본인의 순종여하에 달여 있습니다. 요한복음3:16-18절을 보면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이라 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하나님의 아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영생으로, 믿지 않는 자는 영원한 죽음으로 갑니다. 누구든 불문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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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과거와 현재(로마서6:15-23)
15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8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20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21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왼쪽 항은 우리들의 과거의 상황입니다. 오른쪽은 우리들의 현재상황입니다. 판이한 대조이며, 상반된 대조이기도 합니다. 물론 아직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왼쪽 항에 속해 있습니다. 정치를 논하며, 경제를 논하고, 알 수 없는 우주를 논하며 연구할지라도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항상 왼쪽 항에 속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무서운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을 한다하더라도 어떤 직에 있을지라도 예수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왼쪽 항에 속해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평등한 사회입니까? ‘소득양극화’란 사회의 빈익빈 부 익부 현상이 심화되어 소득분포가 양극단으로 쏠리며 중간소득계층이 해체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우리는 외환위기 이후 심화된 경기침체와 경제성장률 저하 및 실업률 증가 등으로 인해 소득양극화가 급격히 촉발되었습니다. 2007년 초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전국의 가구 소득은 전년보다 5.1%증가해 2년 만에 가장 큰 폭으로 늘었다고 하지만 계층별 소득격차는 통계작성이 시작된 2003년 이후 최대로 벌어졌습니다. 중간층이 줄어들고 상위층과 하위 층의 규모가 늘어나는 전형적인 소득양극화 현상이 가속되고 있습니다. 해마다 국회의원이나 국무위원들은 수 십 억원 내지 수조원의 재산이 있음을 고지합니다. 과연 그들이 국민의 재산이나 국민의 생활을 진실로 진정으로 생각하고 있을까요? 과연 그럴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라는 생각이 왜 드는지 모르겠습니다. 국민들의 실업률은 천정부지로 뛰고 있는데 밥그릇싸움 하는 국회의원들을 우리가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안다는 것,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등을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내놓을 수 있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곁에 있는 어려움조차 조금도 해결하지 못하는 우리들, 하나님 앞에 내놓을 것이 없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짐을 벗겨 주셨습니다. 무거운 멍에를 대신 져주셨습니다. 감사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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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우리들(로마서6:15-23)
15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8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20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21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전에는 너희들이 지독한 주인인 죄의 종이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종이라는 개념은 여러모로 풀 수 있습니다. 권력은 하늘같습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어떤 것을 거절하거나 거부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목숨을 걸지 않은 이상 거절할 수 없는 것이 권력입니다. 살아있는 권력을 건드렸다가는 살아남지 못합니다. 그러면 권력이 왜 두려운 것입니까? 생사여탈권을 쥐고서 그것을 휘두르기 때문입니다. 죄가 그렇습니다. 죄가 살아있는 권력보다 더 무서운 주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는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죄의 종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느냐? 너희에게 전하여준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회라면 언제나 선포되는 복음은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이 세상에서 가르치는 지혜와 지식들은 어디까지나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을 때에 영향력을 미칠 뿐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아닙니다. 오는 세상에까지 영향력을 끼칩니다. 왜냐하면 죄의 종들을 해방시키기 때문입니다. 어떤 종교를 가졌든지, 어떤 사람이든지 간에 복음을 받아들이면 복음은 사람을 꿰뚫어버립니다.
히브리서4:12-13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복음은 사람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합니다. 혼(yuchv/프쉬케)과 영(pneu'ma/프뉴마/영)과 관절(aJrmov"/하르모스)과 골수(muelov"/뮈엘로스)를 찌르고 쪼개는 일을 어떤 것도 어떤 종교도 이렇게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성경만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 복음을 받아 들이냐는 것입니다. 현재 복음을 전파하고 있는 방송국이 많습니다. 복음의 인터넷매체도 많습니다. 신문도 많습니다. 하루에도 수없이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받아 들이냐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심히 굽어지고 비뚤어져서 여간해서는 사람들이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멸망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받아들이면 되는데 세상의 학문과 세상의 지혜가 그 말씀을 가로막습니다. 그런 중에도 복음은 사람에게 자꾸 가까이 다가갑니다. 다가가서 사람을 구원합니다. 다가가는 매체는 사람입니다. 받아들인 말씀으로 인하여 사람이 영원히 멸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감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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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에 이르는 순종의 종(로마서6:15-23)
면역성이 있다는 것은 어떤 개체가 면역을 가지고 있는 성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죄는 죄인을 자기의 종으로 만들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예로 어떤 사람이 처음 거짓말을 했을 때, 자학하면서 공포를 느낍니다. 그러나 두 번째 거짓말을 할 때는 첫 번째보다 덜 양심의 가책을 가집니다. 세 번째 거짓말에 가서는 아주 자연스럽습니다. 마침내 거짓을 말하는 죄가 그를 꼼짝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여타 다른 죄들에 있어서도 인간들은 이와 같기 때문에 죄 가운데 살아가며 그것의 종노릇을 하고야 맙니다. 죄에 이미 면역이 된 인간은 자신이 죄를 짓고 있는지, 짓고 있는지조차 모릅니다.
즉 사람은 어떤 주인에게 속하느냐에 따라서 센 주인을 섬기게 되어 있습니다. 즉 자신에게 있어서 죄가 그 자신을 잡고 있으면 죄의 종으로 전락되고 맙니다.
죄의 노예에서 ‘노예’란 개념은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피상적인 종이 아닙니다. 오늘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직장에 속해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낮에는 즉 정해진 시간에는 직장에서 일합니다. 이 일은 하기 싫어도 합니다. 돈 때문입니다. 살아가는데 필요한 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입니다. 돈이 필요 없으면 굳이 직장에 예속되지 않습니다. 어쨌든 직장에 근무하다가 근무시간이 끝나면 내 시간으로 돌아옵니다. 이 시간은 직장에 예속된 시간이 아닙니다. 내 시간으로 얼마든지 다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당시의 종은 24시간 중 단 일초라도 자기시간은 없었습니다. 노예에게 지위란 전혀 없었습니다. 종의 시간은 주인의 독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두 주인을 섬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랬던 그들에게 바울사도는 말했습니다. 이제는 너희가 과거에 섬겼던 주인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 그러니 새 주인에게 순종해야 하지 않겠는가? ‘과거에 순종했던 지독한 죄를 주인으로 삼든지, 아니면 영생에 이르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든지 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바울사도의 이 말은 죄를 주인으로 삼으면 멸망이라는 말이고, 순종의 종으로 즉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면 의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밖에는 다른 주인을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 생의 일부는 하나님께, 다른 일부는 이 세상에게 바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전부 아니면 안 됩니다. 크리스천이 자기 생의 얼마만큼은 하나님 없이 살게 하려하는 것은 진정한 그리스도인 아닙니다. 바울사도가 계속 로마서에서 논증하고 있는 것은 죄가 사람에게서 왕노릇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필경은 사망에 이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15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그리스도인은 엄한 율법아래 있(엄하면서도 구원할 수 없는)지 않고 은혜아래 있다. 그래서 너희들은 진정한 자유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 자유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란 방종하라는 자유가 아니라 너희를 살리는 자유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함부로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것에 걸려있습니다. ‘나는 구원받았다. 그러므로 이런 죄쯤 짓는다고 해서 뭐 어쩔라고…’하면서 말입니다. 죄의 폭군휘하에서 벗어났다 할지라도 얼마든지 그 안에 다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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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죄 aJmartiva/hamartîa 는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에서 표적(과녁)을 벗어나는 것 또는 목표를 이루지 못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aJmartiva는 윤리적, 지적, 법률적으로 모두에 사용되었습니다. 그 범위는 단순한 잘못에서 중죄까지 모든 그릇된 행위를 표현했습니다. LXX역본에서 aJmartiva 는 taF;j'/hathâ’t(과오, 죄), @/[;/ʽâôn(옳은 길에서 의식적으로 이탈하는 죄), [v'P,/phesha’(반역) 등을 번역했습니다. 죄란 그 뿌리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전 生涯(생애)를 간섭합니다. ‘주관 한다’ kuvrio"/kûirios는 ‘주인이 되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죄가 사람을 영생하지 못하게 하고 바르게 살지 못하게 하며, 하나님과 불편한 관계를 늘 조성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럼에도 바울사도가 로마교회에게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죄가 사람(너희를)의 주인이 될 수 없는 이유를 말합니다. 너희가 율법아래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십계명을 비롯해서 이스라엘 백성 전반을 규정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거룩하게 구별하고자 세우셨습니다. 율법은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많은 일들을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수시로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요구했습니다. 사람들을 비난하고 저주했으며, 심판까지 했습니다. 그렇게 많은 것들을 했으면서도 율법은 정작 사람이 가장 필요했던 것은 하지 못했습니다. 즉 율법은 사람을 멸망에서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어느 나라고 간에 범죄자들은 수없이 많습니다. 잔악한 살인죄로부터 각종 경범죄까지 헤아릴 수없이 많습니다. 사실 헌법이 그렇게 많은 조와 항목이 필요 없습니다. 죄를 짓지 않는다면. 그런데 범죄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매일같이 저질러지고 있습니다. 법조항이 수없이 많은데 그 이상 죄는 저질러지고 있습니다.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조항이 많이 있어도 죄는 사라지지 않고 사람은 계속 멸망당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죄를 처벌할 조항이 없으면 세상은 온통 난리일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은 죄를 없이 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죄를 처벌은 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그렇게는 할 수 없었습니다. 언제인가는 죄인들을 완전히 용서할 하나님의 은혜가 이 땅에 와야 했습니다. 그 사이에는 모형으로 원형을 대신해야 했습니다. 모형은 각종제사였습니다. 원형은 예수그리스도입니다. 로마서8:1-3절을 보면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율법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보내셔서 율법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이루신 것입니다.
헬라에서 은혜 cavri"/châris는 Homer 이래 ‘사람들 중에 복리를 가져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카리스/은혜’는 바울의 중심개념으로 인사말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카리스’는 사람의 구원사건입니다. ‘카리스’의 기본적인 사상은 값없이 주시는 것입니다. ‘카리스’는 십자가에서 구체화되었습니다(갈2:21). 그리고 은혜는 복음으로 선포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은혜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죄인들에게 나타납니다(롬3:23-24). 그러므로 은혜는 구원의 전부입니다(고후6:1). 모든 신자들이 은혜를 받았습니다(고전1:4). 그리스도 안에서 구체화된 ‘은혜로만’ 구원을 얻습니다. 따라서 신자들은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지, 어떤 사람들의 공덕이나 본인들의 행위로 구원받지 않습니다(롬3:24). 이것은 구원의 방법으로서 율법을 배제하는 것입니다(롬4:16). 하나님의 은혜는 칭의(의롭다 하심)의 기반이었습니다(롬5:20-21). 그래서 은혜는 어떤 의미에서 일종의 상태입니다(갈 5:2). 또한 은혜는 항상 선물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선물이지, 어떤 대가가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는 충분합니다(고전1:29). 그러므로 죄가 우리들을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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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신학과 바른 신앙(로마서6:12-14)
성도들은 신학이라는 말을 하면 좋은 의미로 받아들이지만, 더러 좋지 않은 의미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신학이라고 하면 학문이라는 것을 생각하기 때문에 신학을 좋게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신학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좋지 않은 반응입니다. 넓은 의미로서 신학은 기독교 신앙의 행위, 내용 및 그 함축하는 바에 대한 知的省察(지적성찰)입니다. 신학은 특정한 역사적, 문화적 상황 속에서 신앙에 관하여 서술합니다. 따라서 신학은 상황적 학문입니다. 신학의 이러한 상황적 성질 때문에 신학은 지속적인 과업을 제시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삼위의 하나님에 대한 근본적인 신앙고백과 헌신은 불변합니다. 하지만 이 신앙고백의 현장인 이 세상은 엄청나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신학은 각 세대의, 각양의 문화적 배경 속에 있는 교회를 섬깁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교회의 신조를 성찰하도록 도우는 것이 신학입니다. 당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역에 임하는 현장인 이 세상에 그 신앙고백을 적용하도록 도움으로써 교회를 섬기는 것이 신학입니다. 그러므로 신학 따로, 신앙 따로는 없습니다. 신학은 성경적인 복음, 교회의 유산 그리고 현대 세계의 사상 형태라는 세 가지 축을 중심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곧 신학이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예수님에 대한 불변하는 고백을 적절히 표현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학은 항상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이라는 성경의 이중적 진리를 균형 있게 표현하기를 추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대하여 초월자로서 관계를 맺으십니다. 초월해 계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과 분리되어 스스로 자족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주 위에 계시며 우주 저 너머로부터 이 세상에 오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대하여 내재자로서 관계를 맺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피조 세계에 존재해 계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우주 안에 활동적으로 존재하십니다. 세계와 인간사 양자의 운영 과정에 관여하십니다. 성경이 하나님을 이 세상 너머에 계신 초월자이며 동시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내재자로서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각 시대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이해를 묘사할 때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이라는 이중적 진리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두 가지 모두를 인정하는 창조적 긴장과 균형의 방법을 찾아야 했습니다. 두 가지 진리 모두를 균형 있게 수용해야 신학과 이성 혹은 문화의 관계가 적절히 수립됩니다. 이 둘 사이의 균형이 상실되면 심각한 신학적 문제들이 튀어나와 혼란스럽데 합니다. 초월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문화적 상황과의 관련성을 잃게 됩니다. 내재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어떤 특정의 문화에만 얽매이는 신학이 되고 맙니다.
바른 신학과 바른 신앙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말씀대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한다는 것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삶을 사는 것은 죄의 삶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삶의 과정에서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그 선한 싸움의 1차적인 장소는 우리 자신입니다. 자신과의 싸움은 죄부터 해방된 피조물의 의무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이 의무를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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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적인 신앙이 아닌 실제적인 신앙(로마서6:12-14)
11절을 보면 ‘성도들은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성도들은 구원받은 이후에는 다시는 죄를 짓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를 못합니다. 이미 우리는 구원을 받았지만, 이루어야 할 구원이 있습니다. 즉 성도들은 ‘이미와 아직’/Already~not yet 사이에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이미 받은 구원이지만, 이루어야 할 구원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미 거룩함을 받았지만(確定的 聖化), 계속해서 거룩해져야 합니다(漸進的 聖化). 그래서 바울서신과 야고보서신을 같이 끼고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확정적 성화 우리가 믿는 신앙은 감정적인 체험이 아닙니다. 성도들은 아무리 놀라운 경험을 했을지라도 그것을 즐기라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은 앞으로 더 나아가 이 세상의 공격을 막아내야 합니다.
보통 성화라고 하면 신자가 마음, 뜻, 의지, 행위가 점진적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뜻과 그리스도의 형상에 일치됨으로써 죽어서 육체 없는 영혼이 거룩함 속에서 완전하게 되고 마찬가지로 부활에서 그의 몸이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으로 화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변화와 일치화의 과정에 ‘성화’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성경적입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성화를 가리키는 가장 특징적인 용어들이 과정이 아니라 단번의 확정적이라는(definitive) 사실입니다. 우리는 부르심, 중생, 칭의, 양자됨을 반복할 필요가 없는 단번에 성취된 하나님의 행위라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본질상 확정적입니다. 이것을 확정적인 성화라고 합니다. 신약성경의 상당한 부분이 이 성화를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선자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고전1:2) 하나님의 교회라고 말합니다. 또한 고린도전서6:11에서 그들이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것을 그들에게 상기시켰습니다. 바울이 그들의 성화를 효과적 부르심, 성도라는 그들의 정체성, 중생, 칭의와 等値(등치)시키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2:21에서는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이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에서, ‘거룩하고’라는 용어가 ‘확정적인 성화’입니다. 에베소서5:25-26에서는 바울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라고 했을 때, 여기서 성화는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함’이라는 의미로 설명했습니다. 바울이 이런 구절에서 말하고자 한 요지는 신자들은 ‘거룩하게 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성화’라는 명사도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살전4:7),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sanctification)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이를 위하여 우리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살후2:13,14).라는 용어들이 이미 신자들은 거룩해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화에 관한 용어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초에 일어나는 어떤 결정적인 행위,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유효하게 부름 받은 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그들의 정체성의 특징을 이루는 어떤 결정적인 행위를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성화를 점진적인 역사(投事)라는 관점에서만 생각하는 것은 성경적 방식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 성화는 무엇입니까? 로마서 6:1-7:6에서 이것을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6: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10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 12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14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15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8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20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21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7:1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줄 알지 못하느냐 2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3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찌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찌니라
사도바울은 성도의 변화가 가져오는 결정적인 간격을 부각시켰습니다. 죽음은 죄 가운데서 죄의 종으로서 봉사하는 것입니다(6, 16, 17, 20절). 죄는 우리의 죽을 몸에서 우리를 지배합니다(12절). 순종은 죄의 사욕에 드려집니다(12절). 우리는 우리의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주며 종으로서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르고 맙니다(13, 19절). 우리는 의에 대해서 자유롭습니다(20절). 죄는 우리를 주관하고 우리는 법아래 있습니다(14절). 죄에 대해 죽음은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혀서 죄의 몸이 멸하여 우리가 다시는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않는 것입니다(6절). 우리는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7절).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입니다(10,11절). 죄는 더 이상 우리의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며 우리를 주관하지 못합니다(12,14절).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며 우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 의의 종이 되고 거룩함에 이릅니다(13, 19절). 우리는 은혜 아래 있습니다(14절). 우리는 기독교적 가르침의 모범을 마음으로 순종합니다(17절). 그 열매는 거룩함에 이르는 것이요 그 마지막은 영생입니다(22절). 이러한 대비는 결정적인 변화를 증거합니다. 그것은 삶과 행위의 모든 측면에서 나타납니다. 도덕적이고 영적인 삶을 평가하는 모든 척도에 절대적인 차별이 존재합니다. 이것은 은혜의 규정들의 지배하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에게 죄의 능력과 죄에의 종사(從事)와의 결정적이고 확정적인 단절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점진적 성화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가져오는 죄와의 확정적인 단절과 성령 안에서의 새 생명에 대한 강조는 죄가 점점 더 멸해지고 거룩함에의 일치가 점진적으로 획득되는 금욕과 성화 과정의 여지를 남겨 놓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로마서 6장은 다른 어떤 곳보다도 죄의 권능과 더러움으로부터의 결정적인 옮김을 강조하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로마서에서 바울은 內住(내주)하는 죄로 인해 계속 일어나는 갈등을 말했습니다.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롬7:14)라고 스스로를 고발했습니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7:23, 24), “내 자신이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7:25). 로마서 6장에서도 우리는 죄의 잠식에 끊임없이 깨어 있을 필요함을 권면합니다. 사도요한은 신자의 성화의 확정적 성격을 매우 강조했습니다. 요한의 용어들은 너무 강렬해서 우리는 그것들을 신약 성경의 다른 곳에서의 가르침 또 그리스도인의 체험의 명백한 사실들과 조화시키기에 이주 커다란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 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요일3:9).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 하지 아니하나니 범죄 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요일3:6). 그런데 또한 요한은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1:8). 그는 신자가 죄 없이 완전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신자 안에 여전히 내재하는 죄와 신자가 아직 정해진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현세에서의 신자의 상태는 정적인 현상(status quo)유지의 상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보의 상태 즉 성격상 소극적이고 적극적인 측면 모두를 포함하는 진보의 상태라는 것을 보여 주는 증거입니다. 그것은 금욕과 성화 양자를 포괄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은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8:13).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이 두 구절들은 죄에 대한 단번의 죽음과 그로 인한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생명의 영역으로의 이전이 강조되고 있는 문맥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6장은 확정적 성화를 강조하는 장입니다. ‘너희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8:13에서 바울은 신자들을 향해 말하면서 몸의 행실을 죽이는데 신자들 자신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이미 죄의 몸이 멸하여졌다고 말했었기 때문에 더욱더 주목되는 말입니다(롬6:6). 이 활동은 성령의 힘과 은혜 안에서만 수행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신자들이 참여해야 하는 활동입니다. 죽이는 것과 다름없는 격렬한 활동입니다. 금욕과 淨火(정화)의 과정은 신자에게 여전히 붙어 있는 죄 및 더러움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의 목표는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의 제거입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직 이루어야 할 구원이 하나님나라에 갈 때까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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