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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법이 나를 사로잡는 모순(로마서7:18-25)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인간의 죄는 막연한 관념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람들 중 일부만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닙니다. 혹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악한 사람들만 죄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일본의 아베를 보면 그는 명실공이 일본의 최고권력자입니다. 그런 그가 일본의 정의를 세우고, 주변국에 공의를 시행합니까? 아닙니다. 세계제2차대전에서 패한 것을 앙갚음하기 위해서 발버둥을 치고 있습니다.
창세기3:1-6절의 사건은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실제의 사건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이후에 일어나는 일들도 실제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의 활동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첫 번째 창조때와 달라졌습니다. 사람이 타락하자 이 세상이 변했습니다. 따라서 사람의 타락은 인간의 역사를 악한 방향으로 기울어지게 했습니다. 악한 것은 무엇입니까? 사람을 죽이는 일들입니다. 공의와 정의를 빙자하여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런 악들은 인간의 타락의 결과로 오늘도 과거에도 세상 곳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최초 조상인 아담은 법률적 도덕적 무죄성을 잃어버렸습니다. 본래의 의를 상실하였습니다. 무죄성과 의를 상실하지 않았다면 이 세상은 악이 없는 세상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하는 아름다운 세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죄로 말미암아 사람은 죄책을 느껴야 했습니다. 죄로 세상이 온통 더러워졌습니다. 문제는 아담의 눈이 밝아졌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눈이 밝아졌다’(창3:7)는 사실입니다. 눈이 밝아졌다는 사실은 좋은 징조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전의 선함은 하나의 추억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불순종의 사실은 곧 죄책에 대한 의식으로 변한 것입니다. 죄책은 신체적인 벌거벗음에 대하여 상대방 앞에서 수치심을 느꼈습니다. 죄책으로 인하여 도저히 벌거벗음을 감당하지 못하고 당혹감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수치심은 상대방 앞에서 신체적인 벌거벗음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것에 대한 내면적 벌거벗음의 반영입니다. 벌거벗음 그 자체는 부끄러워 할 것이 못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타락하기 전에는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 했기” (창2:25) 때문입니다. 그런데 타락 후에 상대방 앞에서 양심상 수치심을 느낀 것입니다.
우리의 최초 조상들의 죄는 일련의 범죄들로 즉각 뒤이어졌습니다. 사람이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섬기라고 하는 사단의 요구에 귀를 기울인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되 자기 좋을 대로 결정해버렸습니다. 그리고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비난했습니다. 하와가 뱀을 비난합니다. 계속해서 핑계를 대고 또 핑계합니다. 자신들의 잘못이 있음은 시인하지 않고 자신의 잘못을 다른 것에 돌립니다. 죄가 사람을 포로로 잡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 스스로 수양이니, 구원이니 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여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들이 100% 타락하지 않고, 타락하지 않은 몇%가 있을 것이라고 했지만, 역시 어불성설입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타락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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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능한 인간(로마서7:18-25)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바울사도는 내속 곧 육신에 선한 것이 살고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자신이 인식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바울사도가 항상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선이었습니다. 그런데 선을 행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물론 여기에서 선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선입니다. 인간의 보기에 좋은 선은 하나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합니다. 바울사도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선을 하고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현재 원하고 원하는 선을 행치 않는 반면에 악은 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악은 이 세상에서의 각종 악들이겠지만, 선으로 곱게 포장된 이 세상의 선들도 포함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보시기에 좋지 않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사도의 원래의 마음은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원치 않는 그것을 행하는 자는 따로 있었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죄였습니다. 그 죄가 원하는 선을 행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내 안에 두 마음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두 마음은 동료가 아닙니다. 친구는 더욱 아닙니다. 철천지원수입니다. 그래서 이 두마음은 항상 상반하게 행동합니다. 선을 행하려고 하면 바로 막아버립니다. 그래서 선을 행하지 못하게 합니다. 바울사도의 속사람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한 행동을 하고 싶은데, 옛사람이 자꾸 방해를 하는 것입니다. 옛사람과 새사람이 늘 다투고 있었습니다. 결국 바울사도는 중간에서 하는 말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가 얼마나 사람을 괴롭히는가? 유럽은 제2차세계대전이 끝났지만 철저하게 심판을 했습니다. 아직까지도 전범들을 찾아서 전범재판소에 앉힙니다. 철저하게 심판을 합니다. 그러나 Asia권에서는 일본을 심판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의 비호아래 일본은 지금까지 어떤 심판도 받지 않았습니다. 당시 히로히또를 비롯해서 전범들을 가차 없이 처단해야 했습니다. 그래야 동아시아의 정세가 시끄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일본은 항복문서에 조인만 하고 심판은 아주 미세하게 받았을 뿐입니다. 유럽에서는 전범ㆍ반인도자들을 처벌하기 위하여 1945년 11월 20일 독일의 뉘른베르크에 국제전범재판소를 설치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과정에서 자행한 독일의 주요 전쟁범죄자들을 처벌하기 위한 재판소입니다. 이에 앞서 연합국은 1943년의 모스크바선언에서 1945년의 포츠담선언에 이르는 일련의 선언을 통해 나치에 대한 전범재판을 천명했었습니다. 이를 기초로 1945년 8월 8일 미국, 영국, 프랑스, 쏘련 4개국은 <유럽추축국주요전쟁범죄인의 소추 및 처벌에 관한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전범재판의 설치가 구체화되었습니다. 이 협정은 “특정의 지역에 한정되지 않는 범죄를 저지른 전쟁범죄인을 대상으로 하고, 주요 전쟁범죄인의 심리를 규정하였습니다. 재판에 회부되는 범죄는 ① 평화에 대한 죄 ② 전쟁법규 위반죄 ③ 인도에 관한 죄 등이었습니다. 히틀러의 수족 괴링을 비롯하여 24명의 주요 전범피고인에 대해 재판이 행해졌습니다. 뉘른베르크 국제전범재판에서는 전쟁범죄 및 인도에 대한 죄가 큰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도쿄 국제전범재판은 포츠담선언에 기초하여 1946년 1월 연합국 최고사령관의 특별명령으로 도쿄에 설치되었습니다. 일본점령연합군 총사령부는 1945년 9월 11일부터 전쟁범죄 용의자의 체포를 개시하여 진주만 공격 당시의 내각각료(A급 전범), 필리핀 파견군 관계자(B급 전범), 일본 본토의 포로수용소 관계자(C급 전범) 등 39명(이중 2명 자살)에 대해 체포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실제 재판에 회부된 자는 28명뿐이었습니다. 재판은 1946년 5월 3일 개정되어 1948년 4월 16일 끝났습니다. 원고는 일본의 항복문서에 서명한 9개국 즉 미국ㆍ영국ㆍ중국ㆍ소련ㆍ오스트레일리아ㆍ캐나다ㆍ프랑스ㆍ네덜란드ㆍ뉴질랜드와 인도ㆍ필리핀 등 11개국이었습니다. 개정일수 416일, 증인 546명에 이르는 재판이 진행되었습니다. 재판 결과 28명 중 1명은 발광, 2명은 자살하고, 나머지 25명에 대해 1948년 11월 12일 오스트레일리아 대표인 웨브 재판장이 판결을 내렸습니다. 도조 히데끼 등 7명에 교수형, 종신형 16명, 금고 20년 1명, 금고 7년 1명이었습니다. 죄상으로 제시된 것은 침략전쟁의 죄, 잔학행위의 발령ㆍ수수ㆍ허가ㆍ고의 또는 부주의에 의한 방지의 태만 등이었습니다. 전쟁범죄에 대한 재판으로서는 뉘른베르크재판과 더불어 역사상 최초의 것으로서 문제점이 많았습니다. 여기에는 한국침략과 학살 등 관련자는 처벌을 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일본은 어떤 심판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일본으로 인하여 피해를 본 Asia의 피해보상을 어떤 것으로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사과다운 사과를 공식적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기고만장한 일본은 戰爭前전쟁전의 세대를 정치권에 보냈습니다. 이들은 극우주의자로서 전쟁을 지지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이들을 밀어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전쟁을 할 수 없는 나라가 이제는 전쟁을 할 수 있는 법안을 마련했습니다. 안보법안, 비밀법 등 집단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는 법률정비를 모두 마무리했습니다. 전후 70년 만에 다시 ‘전쟁할 수 있는 국가’를 만든 것입니다. 일본 참의원은 집단자위권 등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11개 안보 관련 법률 제·개정안을 19일 새벽 본회의에서 가결했습니다. 지각있는 일본사람들이 막으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죄는 이렇게 눈덩이처럼 불어나 잘못된 사람들을 숙주로 사용하여 이 세상에서 그 세력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악합니다. 그러면서도 무능합니다. 아무리 전쟁법을 통과하고 별짓을 다한다하더라도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면에서 사람은 무능하되 한없이 무능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자신들의 마음 하나 다스릴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야 하고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무능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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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율배반적인 인간의 마음(로마서7:18-19)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인간은 육신을 입었습니다. 육신을 입었다는 것은 육신에 필요한 것을 채워주어야 합니다. 배고플 때는 먹어야 합니다.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옷을 입어야 합니다. 피곤하면 쉬어야 하고, 눈이 감기면 잠을 자야 합니다. 이것이 육신을 입은 사람들이 할 일입니다. 그러나 천사들은 우리같이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영이기 때문에 인간처럼 필요한 것들이 필요가 없습니다.
육신을 입은 인간들은 이처럼 육신을 위해서 할 일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육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이 있습니다. 사람의 영혼은 두 군데에 속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지옥입니다. 물론 지옥도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곳입니다. 영생을 얻었느냐? 영생을 얻지 못했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의 사람, 세상의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영생을 얻었든, 얻지 못했든지 둘 다 이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거듭난 영혼이나, 거듭나지 않은 영혼일지라도 우리의 육신을 통제한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애초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을 때는 완전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언약을 파기하였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6장1항을 보면
우리의 시조들은 사단의 간계와 시험에 유혹을 받아 금지된 실과를 먹음으로 범죄하였다. 이것이 그들의 죄이며 하나님께서는 그의 지혜롭고 거룩한 계획을 따라 기쁘게 허용하셨는데 이는 그것을 명령하시어 그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기로 이미 계획하셨기 때문이다.
사람의 타락으로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그 죄는 곧바로 전염되었습니다. 곧바로 상속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상속이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상속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죄는 상속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죄인입니다. 죄인의 마음속에는 항상 죄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원하는 선을 행하려 하는데 이것을 원천봉쇄하고자 하는 죄는 무단침입자입니다. 이 무단 침입자가 바로 나 자신입니다. 이것이 성도들의 dilemma입니다. 사도바울조차 자신을 완전히 타락한 것으로 정죄하고 있습니다. 죄 때문에 심히 고민하는 것을 보면 죄는 예나지금이나 사람들이 늘 주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본성은 결코 선하지 않습니다. 18절과 19절을 통해서 인간의 연약성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전 과정에서 죄와 싸운다고 봐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인간이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어떤 상급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 자신의 공력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은혜이지, 아래로부터의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과거나 현재를 통틀어서 누가 죄 없다고 단언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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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인식하는 사람들과 인식하지 못한 사람들(로마서7:15-17)
15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16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17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에 거하는 죄’ hJ oijkou'sa ejn ejmoi; aJmartiva/헤 오이코우사 엔 에모이 하마르티아/내 속에서 살고(현재형분사) 있는 죄. 이것은 참으로 심오한 말입니다. 심오하면서도 슬픈 일입니다. 이 세상에는 죄를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과 죄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죄를 인식하지 못한 사람들은 죄라는 것이 밖에서 들어온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내부에 죄가 숨어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살동안 죄를 지은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왜냐하면 죄가 사람들을 속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죄는 우리에게 사단과 귀신들이 실재하며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력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력들이 인간을 잡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악을 보이지 않는 악의 영들이 사람을 통해서 조종합니다. 사람을 죽이는 일, 사람들을 이간질하는 죄로부터 상상이 가지 않을 수많은 죄들을 인간이 짓고 있습니다. 국가라는 변명, 민족이라는 변명, 종교적인 핑계, 자신들의 가치관이라는 변명으로 일관하면서 사람을 죽이고 속이며 여러 가지의 유형으로 사람들을 학대합니다. 그러나 죄를 인식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렇게 나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죄가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에게는 죄라는 것이 전혀 없다고 말을 합니다. 문제는 죄를 인식하고 하나님앞에 나아가야 하는데 자신들은 죄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떤 계기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전도하고 선교하며 불쌍한 영혼들을 위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유기는 그대로 방치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들이 천국에 가든지, 지옥에 가든지 상관하지 않는 것은 유기입니다. 그들은 죄인식을 하지 않습니다. 아니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두절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이것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들은 오늘도 직장에서, 사업장에서, 해외에서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받은 사람들이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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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에 살고 있는 죄(로마서7:15-17)
15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16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17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점점 세상은 道德律廢棄論도덕률폐기론/이 익어가고 있습니다. 고대 Greece의 철학자 Heraclitus는 “누구도 똑같은 강을 두 번 건널 수 없다. 왜냐하면 항상 새로운 물이 흘러오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세상의 모든 것은 항상 변화하는 상태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후에 Greece의 사상가 Cratylus는 “똑같은 강을 한번이라도 건넌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강은 물론이고 그 밖의 모든 것이 ‘동일성’(sameness)이나 불변의 본질을 갖고 있지 않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사람은 모든 것이 변한다고 확신한 나머지 자기가 존재하는지에 대해서조차 명확하게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견해가 윤리의 영역에 적용되면, 불변의 도덕법칙은 존재할 수 없으며 모든 윤리적 가치는 상황에 따라 변화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벤담(Jeremy Bentham/1748-1832)은 누구든지 결국에는 최대다수의 최대 행복을 낳기 위해 행동해야 한다는 원리를 정립했는데 이것이 ‘공리주의적 계산’(utilitarian calculus)입니다. 벤담은 이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말을, 최대한도로 많은 쾌락과 최소한도로 적은 고통이라는 양적인 의미로 이해하였습니다. 따라서 벤담은 쾌락주의를 토대로 공리주의를 주창한 것입니다.
현 세계의 일부 사상적 흐름들은 비율법적인 도덕의 확산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이와 맞물려 자신들에게 유리하면 소수자보호라는 명목하에 도덕률을 즉각 폐기하고 있습니다. 에이어(A. J. Ayer/1910- 1970)는 모든 윤리적 진술은 정서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모든 윤리적 진술은 사실상 감정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예로 “살인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은 결국 “나는 살인을 싫어한다”거나 “나는 살인이 잘못이라고 느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엇을 말하고자 함입니까? 윤리적인 진술은 우리의 ‘주관적 감정’ (subjective feeligs)에서 우러난 충고일 따름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명령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따라서 어디서든지 모든 사람들에게 구속력을 발휘할 수 있는 객관적인 도덕법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015년 2월 26일 간통죄가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역사적인 판결이 선고되었습니다. 국가가 법률로써 간통을 처벌하는 것은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형법 제241조(간통)은 제정 된지 62년 만에 효력을 잃었습니다. <형법 제241조(간통)>은 ① 배우자가 있는 자가 간통한 때에는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그와 상간한 자도 같다. ② 전항의 죄는 배우자의 고소가 있어야 논한다. 단, 배우자가 간통을 종용 또는 유서한 때에는 고소할 수 없다. 고 했습니다.
헌법재판소가 간통죄(姦通罪)에 대해 위헌(違憲) 결정을 내린 것은 성(性)에 대한 국민들의 의식변화와 개인 사생활을 형사 처벌하는 것이 더 이상 사회현실에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2008년 헌재가 합헌 결정을 내릴 때는 개인의 성적 자기 결정권보다는 선량한 성도덕과 혼인·가족제도 유지에 무게를 두었습니다. 그런데 7년 만에 다수의견이 소수의견으로, 소수의견이 다수의견으로 바뀌었습니다.
미국은 동성애결혼을 지지했습니다. 법적으로 동성애결혼을 통과시켰습니다. 우리나라도 어떤 사람은 동성애결혼을 합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간통죄가 왜 存置(존치)했었습니까? 가족을 보호하고 힘이 있는 몹쓸 자들을 제어하려 한 것입니다. 그런데 합법화시켰습니다. 性的趣向/성적취향에 따라 멋대로 살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가정이 깨지건 억울한 사람이 죽든 말든 생각할 바 아니라는 것입니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의 공리주의가 안고 있는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공리주의에서는 목적달성에 필요한 어떠한 수단이든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시킨다는 점입니다. 공리주의의 주장대로라면 1800만 명을 학살한 스탈린의 행위가 공산주의적인 유토피아의 실현이라는 관점에서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히로히토의 아시아 침략도 그들대로의 못된 정당성이 있는데 공리주의 원칙대로라면 어떻게 그들의 추악한 죄악상을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떳떳하게 그것을 말하고 사과한마디 하지 않고 있습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죄는 자기의 지배영역 내에서는 철저하게 파괴합니다. 죄는 사람을 타락시키고 짐승으로 만듭니다. 죄인도 인간의 형상을 가지고 있지만 죄는 사람을 동물로 전락시키고 야수적인 본성으로 전락시킵니다. 죄는 사람을 더럽혀서 거의 인간답지 않는 존재로 전락시킵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 안에 있지, 우리 밖에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회를 탈 때마다 튀어나와 우리를 못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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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은 우리가 네 가지 법속에서 갈등하고 있다고 주석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법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법만이 법으로 불리는 이유가 당연한 것은 우리의 삶이 바르게 형성되게 하는 의의 법칙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세상에는 많은 법과 가르침이 있기는 합니다. 헌법을 비롯해서 관습법 등 수많은 법들이 존재합니다. 수많은 가르침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 법들과 가르침은 이 세상에 존재 할때만 필요하거나 필요하지 않은 것이지, 궁극적인
바울사도는 이 법에다 마음의 법을 덧붙였다는 것입니다. 이 마음의 법이란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코자 하는 충성스런 마음의 준비를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준봉(遵奉)하는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되는 것으로 죄의 법(law of sin)이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이 죄의 법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뿐만 아니라 거듭난 사람의 육신 안에서 불법이 행사하는 세력을 뜻합니다. 어쩌면 이 법은 불법이기에 법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법은 폭군의 법도이기 때문입니다. 폭군이고 불법으로 모든 일을 저지르기 때문에 법으로 인정하기 싫은 것은 人之常情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간악하고 포악할지라도 여전히 법이라고 부릅니다.
이 죄의 법에다 바울사도는 ‘지체 속에 있는 법’을 相應상응시켰습니다. 이 법은 바로 그의 지체 안에 있는 탐심입니다. 그는 탐심과 불법사이에 존재하기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사람 안에는 복잡한 법들이 있습니다. 이 복잡한 법들이 우리 생활과 얽혀 있습니다. 어떤 때는 이 법이 어떤 때는 저 법을 적용코자 합니다. 참 편리한 우리들의 법입니다. 그것이 곧 변명입니다. 때로는 우리 안에 포악한 법을 발견하게 됩니다. 더구나 그것이 선한 것을 행하려고 힘쓰는 동안에 발견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법을 거슬리고 반대하는 악한 성향이 우리들의 골수에 깊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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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광복절전후해서 과거 일본의 행적에 대해서 Asia에서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오만 잡것들을 합사한 것들에 참배를 하는가? 과거사에 대해서 책임자가 통렬하게 사과를 하는가? 등입니다. 특히 이번에는 광복70주년이기 때문에 그 도가 더 했습니다. 몇 달 전부터 소위 일본의 총리라는 작자가 담화를 한다고 야단을 떨어서 내심 Asia의 여러 나라에서는 사뭇 기대하고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역시 아베였습니다.
아베/Shinzō Abe는 2006-2007년까지 제90대 일본총리로 재임했습니다. 그러다가 2012년 12월 26일 제96대 총리로 다시 재임되었습니다. 아베의 문제는 외할아버지가 A급 전범이었던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라는 것입니다. 유럽 같았다면 벌써 사형을 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Asia입니다. 아베가 Asia국가들을 물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담화 아닌 담화를 발표한 것입니다.
아베 신조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70주년을 맞아 발표한 담화에서 과거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명시적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쫄개였던 스가역시 핑계를 대기를 일본이 제국주의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일본인·중국인들이 과거 전쟁에서 고통을 겪었다는 점을 언급하는 등 과거 총리들이 발표했던 담화와는 판이한 양상을 보였습니다. 일본이 식민지지배를 아니할 수 없다는 이유 아닌 이유가 “세계 공황이 발생하고 각국이 식민지 경제 블록화를 추진하자 일본경제는 커다란 타격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일본의 고립이 심화되고 외교적·경제적으로 침체되자 힘의 행사를 통해서 이를 해결하고자 시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제가 나아가야 할 진로를 잘못 선택해서 전쟁으로의 길을 걸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전후 50주년에 발표된 무라야마(村山) 담화, 전후 60주년에 발표된 고이즈미(小泉) 담화에서 일본이 제국주의의 길을 걷게 된 이유를 별도로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즉 일제의 과거행태를 정당화하려는 일본 극우주의자들의 역사적 시각을 반영한 것입니다. 아베의 핑계 인즉 일제의 당시 경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제국주의의 길, 전쟁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는 말따구가 지들도 300여만 명이나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약자는 밟고 강자에게는 한 없이 약한 소인배인 아베는 중국인의 피해를 별도로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인에 대한 말은 고난이라는 말로 대신했습니다. 또한 전후 일관되게 평화와 번영을 위해 힘써 왔다는 것입니다. 아베는 제2차 세계 대전기간 중 강제노역을 당했던 중국 노동자들에게 사과하고 보상금을 제공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인 피해자들에게는 사과나 보상금 제공의사가 없다는 것을 이미 밝혔습니다. 또한 자신들이 이렇게 함으로써 아프리카나 여타 저개발국가에게 희망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침략해줌으로 인해서 침략 받은 나라가 근대화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엄청난 인명을 무자비하게 살상하고서도 사과나 용서를 바라지 않고 오히려 그 못된 짓을 정당화하는 비겁하고 치사하며 졸렬하고 쪼잔한 자입니다. 그러면서도 Asia의 국가들과 함께 나가고 싶어합니다. 얼마나 잘못된 것입니까? 일본은 독일의 Willy Brandt 총리를 본받아야 합니다. 자신의 죄가 아닌데 마치 자신이 지은 것처럼 무릎을 꿇은 독일의 총리를 본받아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이웃국가로 사이좋게 지낼 수 있습니까?
14절을 보면 ‘율법은 신령한 줄을 안다’ 그런데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다’고 말합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15~17절). 사도바울은 자신의 행위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한다” 자신의 행위가 모순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않고 오히려 미워하는 것을 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했습니다. 그럼에도 모순적인 모습을 만들어내는 행위자가 누구인지 밝혔습니다.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아(identity)를 규명해야 합니다. 우리는 중생한 종합적 인격체입니다. 그러나 내 속에 거하는 죄는 우리의 영혼 안에 아직도 남아 있는 우리 심령의 약한 본성입니다. 이것은 나의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전체적 자아로서 내가 없애고자 노력하는 타락한 본성입니다.
우리 중에 누가 ‘나는 완전한 그리스도인이다’고 말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실패하고 싶지 않은데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넘어지고 싶지 않았는데 넘어졌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육신이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육신이 연약함으로 경건한 자가 원하는 바 선을 행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르게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바르게 서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넘어집니다. 방황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상태는 제로(zero)여야 하는데, 원치 않는 악으로 기울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주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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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변함없으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올해에도 역시 함께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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