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령의 특수사역/죄를 판결하심(로마서8:12-17)

 

노아시대 때 사람들은 홍수로 인해서 세상이 멸망할 것이라고 외쳤지만 듣지 않았습니다. 노아가 120년간이나 방주를 만들면서 외쳤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홍수의 기미가 손끝만큼도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심판이라는 말 홍수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니므롯 시대 때 사람들은 탑을 세우지 말라는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홍수심판의 교훈을 조상들로부터 많이 들었을 텐데도 전혀 듣지 않았습니다. my-way를 연거푸 외쳤습니다. 그들은 지엄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괜찮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습니다. 그들에게 내린 심판은 언어혼잡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이 죄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는 것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이 신비하고 그의 독특한 사역이 세상으로부터 죄에 대한 모든 핑계거리를 제거해 버렸기 때문에(요15:22,24) 그들은 그가 떠나시면 그들의 양심이 누그러질 것으로 기대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진실은 정반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떠나면 성령님이 오셔서 인간들에게 가장 커다란 죄 즉 그리스도를 거부한 죄에 대해 책망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빛을 거부하고 자신의 죄가 드러나는 것을 피하려고 하여도 도망칠 길이 전혀 없습니다. 웨스코트(Wescott)는 “ 따라서 기록된 말씀과 선포된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성령은 인자에 대한 불신의 사실로부터 출발하셔서 그것을 통하여 죄가 무엇인지를 폭로하신다. 이렇게 하여 홀로 서 있는 인간의 상태가 드러나며 그는 변명의 여지가 없어진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복음이 방송을 통해서 문서를 통해서 사람을 통해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함에도 믿지 않는 것은 그 마음이 강퍅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성령께서는 죄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십니다. 이 책망으로 인하여 돌이키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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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성령의 특수사역/죄를 깨닫게 하심(로마서8:12-17)

 

사람들에게 당신이 죄인이라고 하면 두 가지의 반응이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당연하게 수긍합니다. “! 저는 죄인입니다.” 하지만 비그리스도인들은 명예훼손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은 절대로 범법자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죄를 한번도 짓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질문자가 할말이 없습니다. 죄인이 아니라고 하는데 어떻게 그러한 사람에게 당신이 죄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절대로 죄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대한 성령의 사역은 죄를 깨닫게 하시는 일입니다. 세상사람이라 함은 사탄에게 속해 있는 사람입니다(고후4:4). 성령은 인간의 양심 (20:27)을 통해서 성경, 경험과 같은 수단을 통하여 계시에 의해 죄인이 눈을 뜨게 하여 그의 죄와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상태를 깨닫도록 힘쓰십니다. 만일 인간이 이러한 성령의 깨닫게 하심을 거부한다면 그들의 양심이 화인을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디모데전서4:2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로마서서1:28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상실한’/ajdovkimon/adôkimon고전헬라어 문헌에서 검증을 받지 못한, 존경을 받지 못한뜻으로 사용했습니다. 따라서 성령의 자각케하심을 거부하면 하늘의 소리를 더 이상 듣지 못할 위험에 처합니다. 노아시대의 비극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사람들은 고의적인 죄악으로 인하여 완전히 타락하고 타락하였습니다(6:5,6:3). 이같은 엄숙한 경고는 완악한 사람이 더이상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지점이 있다는 것을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혜로우신 권고가 지속적이고 사랑으로 인한 것이긴 하지만, 이러한 것이 결국에는 멈추고 인간은 그의 죄악된 반항이 낳은 필연적인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다. 성령께서 불신자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해 주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최후의 수단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자신의 영감에 의해 기록된 이 무기는 바울에 의해 성령의 검이라고 묘사되었습니다. 이 양날 선 검으로서 성령은 인간의 영혼과 양심의 내적 근원까지 면밀히 조사하십니다.

이 무기의 효능은 오순절의 베드로의 설교로서 증명됩니다. 그의 말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받은 사람들이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고소하는 이들을 책망하기 위하여 성경말씀을 사용할 때도 같은 반응입니다. 누가는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희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7:54)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죄를 깨닫게 하시는 두드러진 가르침은 만찬 때 하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는 보혜사 성령에 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kosmos) 책망하시리라”(16:8). 우리는 성령이 책망하시는 멧세지의 내용을 살펴볼 때 예수님의 말씀의 중요성을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성령께서 인간에게 지식적 논쟁으로써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양심에 의해 깨닫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죄 없으심을 주장하실 때에도 같은 말씀을 사용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8:46). 성령의 사역은 다양합니다. 그 중에도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자각하게 하여 그리스도예수를 믿게 하십니다.

And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 곧 열방을 쫓아내시고 이스라엘을 속박에서 건져 내신 사실을 이스라엘로 하여금 잊지 않도록 명하셨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 사실을 기억할 수 있었다. 회심자의 이전의 이름이 회심 후에도 계속 붙어 다니는 것은 이것에서 유래한다. 지금은 세리가 아니지만 마태는 세리마태로 불리고, 또 시몬은 문둥이 시몬이라 불린다.

                                    Paul Bay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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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부모는 자기가 젊었을 때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을 거역했기 때문에 이제는 자기 자식들이 자기를 불순종하고 거역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따라서 부모가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그가 이전에 다른 사람에게 범한 죄를, 이제는 다른 사람이 그에게 범한 죄를 범하게 함으로써 징계하신다.

Richard Greenh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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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가 불안한 사람들

창세기50:15-21 2021.4.25

 

화해(和解, conciliation)는 소송에 갈음하는 분쟁해결제도로 당사자가 상호 양보하여 그들 사이에 일어난 다툼을 그만둘 것을 약정함으로 성립되는 계약입니다. 서로 싸움하던 것을 멈추고 서로 가지고 있던 안 좋은 감정을 풀어 없애는 것이 화해입니다. 그러나 화해는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확실하게 해야 합니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용서를 빌지 않고, 제3자나 언론에 화해했다고 하는 것은 화해가 아닙니다. 피해자가 납득할 만큼 충분하게 용서를 빌어야 하고 그에 따른 보상을 해야 진정한 화해입니다. 또한 왜구처럼 화해해서는 안 됩니다. 독일과 이탈리아와 더불어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왜구는 미국에만 잘못했다고 했습니다. Asia 사람들에게는 잘못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이 소련과 중공을 견제하기 위하여 전초병으로 왜구를 전방에 세웠습니다. 그리하여 Asia의 여러 국가에게 악독하고 잔인하며 추악한 짓들을 했어도 전범재판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기고만장한 왜구는 Asia에서 고개를 뻣뻣이 들고 지랄발광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왜구는 Asia인들에게 입힌 악독한 피해보상을 충분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도 늘 잘못했다고 빌어야 합니다. 지금이라도 우리나라에서 요구하는 배상액과 보상을 충분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잘못된 교과서를 고치고, 전범의 뼈 조각이 합사된 야스쿠니인가 개스쿠니인가를 폭파해야 합니다. 이어서 매일 총리와 천황이라는 자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우리나라를 향하여 잘못했다고 99번씩 엎드려 절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화해를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셉의 형들에게 있어서 도단사건(37:18-28)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우리가 왜 그랬을까? 뼈저리게 후회한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사랑하고 사랑하는 동생을 노예로 팔았다는 것이 매우 후회가 되었습니다. 총리가 된 동생의 현재 돌봄을 받고 있을수록 더욱 후회가 되었습니다. 그때 우리들이 동생에게 엎드리게 된다는 꿈 때문에 동생을 팔았다는 것이 지금생각해보니 너무나도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밤마다 악몽을 꾸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난 뒤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요셉이 가만두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 앞에 납작 엎드리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래서 한사람을 요셉에게 대표자로 파견합니다. 아마도 이 대표자는 베냐민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 야곱의 명령을 상기하게 했습니다.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다 하라 하셨나니 당신의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의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라는 말을 전하라고 했습니다. 형들은 형제라는 사이를 벗어나서 주종관계로 요셉을 대하겠다고 했습니다. 용서만 해주신다면.

 

이 말을 들은 요셉은 기가 막혔습니다. 자신은 분명히 용서했는데, 형들의 죄를 완전히 용서한 점을 분명하게 확신시켜 주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요셉이 가슴아파했던 것은 자기로서는 마음을 다 털어놓았습니다. 45:1-15을 보면

 

1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에게 자기를 알리니 때에 그와 함께한 자가 없었더라 2 요셉이 방성대곡하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3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능히 대답하지 못하는지라 4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가로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6 이 땅에 이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년은 기경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찌라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9 당신들은 속히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고하기를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에 하나님이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셨으니 내게로 지체말고 내려오사 10 아버지의 아들들과 아버지의 손자들과 아버지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고센 땅에 있어서 나와 가깝게 하소서 11 흉년이 아직 다섯해가 있으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봉양하리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속과 아버지의 모든 소속이 결핍할까 하나이다 하더라 하소서 12 당신들의 눈과 내 아우 베냐민의 눈이 보는바 당신들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은 내 입이라 13 당신들은 나의 애굽에서의 영화와 당신들의 본 모든 것을 다 내 아버지께 고하고 속히 모시고 내려오소서 하며 14 자기 아우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우니 베냐민도 요셉의 목을 안고 우니라 15 요셉이 또 형들과 입맞추며 안고 우니 형들이 그제야 요셉과 말하니라

 

형들은 여전히 자기를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요셉은 그들에게 말합니다. 요셉이 자기의 정체를 밝혔을 때의 말을 되풀이합니다(45:7-8).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이끄셔서 모든 악을 좋게 바꾸셨는데, 내가 어떻게 주제넘게 하나님을 대신하여 재판관과 복수할 자 노릇 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눈여겨 볼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백성뿐만 아니라 애굽 사람들까지 보살피셨다고 말합니다.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함이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형들과 형들의 자녀들을 부양하겠다고 간곡한 말로 그들을 위로했습니다.

 

요셉은 그들에게 두려워말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요셉을 동생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통치자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들의 주가 아니라 형들로 여기며 간곡한 말로 그들을 위로했습니다.

 

성도여러분! 15-18절을 보면 형들의 죄책을 볼 수 있습니다. 그에 대해서 요셉이 그들을 위로하는 모습을 19-21절에 볼 수 있습니다. 형들은 미래가 불안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염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들을 계속돌보겠다고 했습니다. 형들은 아직 도단사건의 죄의식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지 않았습니다(15-17). 요셉이 그 문제가 해결되었음을 보증했습니다. 하지만 형들은 그 보증이 여전히 유효한지를 자신하지 못했습니다. 형들은 불안했습니다. 과거의 죄책이 이렇게 자신들을 괴롭힐 줄은 몰랐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진공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전제하는 믿음입니다. 율법의 요구가 무엇입니까? 죄를 지으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로마서6:23을 보면 죄에 대한 대가 즉 보수가 나옵니다. 죄에 대한 보수는 죽음이라고 했습니다. 원래 삯/ojywvnia이란 군인들의 급여였습니다. 죄가 봉급을 지불한다는 점입니다. 죄가 지불하고 제공하는 생계(subsistence)는 죽음이라는 말입니다. 죄의 삯은 죄가, 죄를 위하여 군사적인 임무를 수행한 자들에게 지불하는 식량입니다. 생명을 위해 지급된 식량들이 받아보니 죽음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는 속이는 것입니다. 죄는 생명을 약속하면서 결과는 죽음을 줍니다. 문제는 죄의 삯이 한번만 지급되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죽음을 급료로 지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선물이 있는데 예수 우리주안에 있는 영생이라고 했습니다.

 

복음은 사람을 구원하는 복음입니다. 구원은 무엇보다도 죄의 더러움과 권능 그리고 죄책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심판에서 살 길입니다. 좋은 것일 뿐만 아니라 필수 불가결합니다. 복음은, 하나님을 상실하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상실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상실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한 죄인들을 위한 필수 불가결한 메시지입니다. 믿음과 회개의 요구에 복음만이 그 유일한 대책입니다. 따라서 복음을 거절한다는 것은 알량한 지식 때문에 자신을 영원한 죽음으로 걸어가는 무모한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 야곱이 살아 있을 때는 요셉의 복수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죽자 이제 요셉의 복수가 있을 것이라는 죄책감이 엄습했습니다. 사람들은 죄를 지으면 그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 사람들이 죄책으로 번민합니까?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한속도 시속 90km의 카메라 앞에서 속도를 줄이지 않고 100km나 110km이상을 달렸다면 속도제한을 위반했으니 그에 상당한 범칙금을 내라고 통보가 올 것입니다. 돈으로 막아야 합니다. 속도제한은 돈으로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을 위반한 사람들은 복음으로 막아야 합니다.

 

이 세상의 심판과 정죄의 사역이 없다면, 값없고 주권적인 은혜의 복음이 필요가 없습니다. 굳이 우리가 죄인이라고 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심판이 없다면. 심판이 없다면 이 세상에서의 삶으로 끝이 난다면 굳이 어렵게 살 필요가 없습니다. 굳이 교회설립이 필요 없고 나아가 예수그리스도도 믿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심판이 없다면. 그런데 심판과 정죄의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심판과 정죄가 있기 때문에 죄를 자각해야 하고 은혜의 복음에 호소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죄인 된 우리들을 복음은 값없는 초청을 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초청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자신의 미래를 불안해하면서도 안심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관습적으로 자신들이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리가 와서 사람들을 자유케 하려고 해도 듣지 않습니다. 그들 조상을 쭉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어김없이 아담의 자손인데 듣지 않습니다.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바벨탑을 쌓고 못된 것을 섬겼었던 자손들인데 듣지 않습니다.

 

교회라고 다 하나님의 뜻대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상당히 많은 교회들이 인간의 행위와 하나님의 행위가 합해져서 구원받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윤리를 이야기하고 윤리구원을 설파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무서운 구원론이고 잘못된 구원론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을 때 가장 먼저 한 행동이 무엇입니까?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두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부르셨을 때 그들의 행동은 나무 뒤에 숨은 것입니다. 인간편의 어떤 행위도 자신을 스스로 구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어떻게 하셨습니까?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는 것은 짐승이 죽어야 했습니다. 그 짐승은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어떤 action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었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사람들에게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큰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행위의 구원이 기준은 없습니다. 내가 무릎으로 걸어서 세계 일주를 한다고 해도 그것으로 구원할 수 없습니다. 내가 평생을 남을 위해 봉사를 한다고 하더라도 나 하나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구원의 기준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대도 사람들이 구원할 수 있다고 믿고 있으니 이 얼마나 한심한 일입니까?

사실 인간들의 범죄로 인해서 이 세상은 엄청난 변화가 있었습니다. 인간타락의 직접적 결과들은 먼저 인간 내부적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내부적 혁명의 중심축은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변화된 태도였습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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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것은 사람의 정신적 태도에 근본적인 변화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현존을 나타내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창조된 원래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 최상의 기쁨을 누렸을 것입니다. 죄지은 사람은 하나님의 낯을 피합니다. 성벽과 느낌과 감정의 새로운 복합체가 사람의 마음과 뜻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는 수치와 두려움을 경험했는데, 그것은 우리에게 범죄 한 양심과 빛으로부터 도망치려는 시도를 계속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서의 혁명입니다. 죄는 우리의 정신적 태도와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도 분열을 초래하며 영향을 미쳤습니다. 죄는 우리를 하나님의 호의로부터 분리시키며,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습니다.

 

죄로 인해서 우주적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죄는 사람의 마음의 영적 영역에서의 사건입니다. 죄는 영에서 발생하여 영에 존재합니다. 죄는 육체적 세계에서의 혼돈이 아니며, 육체적상태의 불균형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의 영역에서의 움직임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육체적이고 비영적인 것에 철저하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죄는 우주적 관련성을 갖고 있습니다.

 

창세기3:17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까지 땅은 계속 파괴되어 갈 것입니다.

 

죄는 인간 가족에게 있어서의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죄는 아담에게만이 아니라 온 인류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것은 인류라는 유기체 전체에 영향을 미쳐 왔습니다. 따라서 공동체적 부패가 존재합니다. 그 직접적인 결과는 아담의 가족사의 전개에서 죄악들의 목록입니다. 시기, 악의, 증오, 살인, 일부다처제, 폭력이 가인 때부터 지금까지 쉬지 않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죄는 사람자신의 구성에 있어서의 분열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창세기5장에서 공시되고 있습니다. 사람의 장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경고가 성취되는 것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죄의 삯은 죽음이라는 것을 우리는 늘 입증하고 있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왜 미래에 대해서 불안했습니까? 아버지 야곱이 있을 때는 울타리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그 울타리가 없어지니까 요셉의 복수가 시작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었습니다. 교회에 발을 들여놓고서도 자신이 구원받았는지, 못 받았는지를 혼동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옛날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서 사역을 할 때 설교말미에 꼭 구원받을 사람은 손을 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선교사가 물어볼 때마다 손을 들었습니다. 그러면 다시 상담하고 또 상담하고는 했습니다. 왜 계속 손을 듭니까?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미래가 불안한 것입니다.

로마서3:10을 보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온 인류를 통틀어 과거현재미래를 막론하고, 한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단 한 명도 없다는 말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은 곧 로마서3:23로 이어집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을 뵈워야 하는데 뵐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의인도 아니고 죄를 범한 사람들입니다. 죄의 대가는 무엇입니까? 로마서6:23을 보면 죽음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죽어야 합니다. 여기서의 죽음은 영원한 죽음입니다. 사람은 한번 죽을 수 있고, 두 번 죽을 수 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육신의 죽음으로 영혼이 떠나가는 것입니다. 두 번 죽는 것은 영혼과 육신이 살아났다가 영원히 죽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죽음이라고 했을 때는 영원한 끝없는 죽음을 말합니다. 생각해보면 아찔합니다. 지옥은 로맨틱한 곳이 아닙니다. 불가마같이 사람이 건강을 위해서 견딜만한 곳이 아닙니다. 혹독한 추위와 쇠를 녹이는 불이 공존하면서도 죽지 못하는 곳이 지옥입니다. 영하100°영상1500°가 공존하고 있으면서도 죽지 못하고 고통만 당하는 곳이 지옥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인간들이 죽어가고 있는 모습을 차마 보시지 못하셨습니다. 로마서5:8을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를 위한 죽으심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3:16을 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으로 나타내셨습니다. 누구든지 저 곧 보내지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영원한 멸망이 없고 대신 영원히 살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1:12을 보면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리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하나도 없다. 우리는 죄인이다. 죄인은 죽어야 한다. 죽어도 영원히 죽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리하여 우리 죄를 대신하여 예수님께서 죽으셨다. 이것을 믿는 사람은 구원을 얻는다. 것입니다. 이렇게 은혜롭고 간단한 것을 몰라서 지옥에 가야겠다고 하고, 어디에도 없는 극락에 가야겠다고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한번 구원을 받으면 다시는 잃지 않는 구원입니다. 오늘 구원받았다가 내일 모레 글피에 잃어지는 구원이 아닙니다. 요한일서5:13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들에게는 영생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계2:7).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계2:11).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새 이름을 기록한 흰 돌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계2:17). 새벽별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계2:28). 흰옷을 입히고 생명책에서 지우지 않으시고 천사들과 아버지 앞에서 시인하겠다고 하셨습니다(계3:5).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계3:12).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더불어 같이 먹을 것이라 하셨습니다(계3:21).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불안해합니다. 내가 어떤 종교를 믿었는데 죽었을 때 자동으로 지옥에 가게 된다고 했을 때,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그를 보낸 사람들은 그가 극락에 있을 줄 알았는데. 죽은 자가 말도 못합니다. 사람이 죽어서 귀신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절대 그럴 리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천국에 갈 확신이 없다면 빨리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요셉이 불안해서 떨고 있는 형들에게 말합니다. 당신과 당신들의 자녀를 돌보겠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한번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한 사람들은 영생한다고. 그러므로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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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특수 사역(로마서8:12-17)

 

성경은 주로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성령의 사역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세상에 대해서도 성령의 사역이 있음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맥락 속에서 세상이란 말이 여러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유의해야 합니다.

oijkoumevnh/oikoumêne : 사람이 사는 세상(21:26).

kovsmo"/kôsmos :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세상(3:16) 즉 인류라는 의미이거나 사탄에 의해 조직화되고 통제되는 악한 인류라는 의미의 조직화된 실체로서의 세상.

gh'/gȇ : 인류 또는 땅.

이 지구상에 있는 세상 즉 물질적 창조의 일부라는 의미에서의 세상이 있습니다. 지구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 즉 일반적인 사람들을 세상이라고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세상의 임금이라 일컬어지는 사탄의 지배를 당하고 있는,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사람을 포함하는 사물의 조직 또는 제도를 묘사할 때도 세상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천지창조의 역사에 삼위의 하나님이 관계하신다는 사실은 히브리어 복수 명사 엘로힘즉 하나님과 일인칭 복수 명사로 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1: 26)에 암시되어 있습니다. 이러함은 성경 전체를 통하여 두드러지게 나타나있습니다. 창조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1:2). 영감을 받은 성서기자들은 이 극적인 구절들에서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성령께서 어머니 같은 관심과 목적 있는 사랑으로 태고의 혼돈을 덮어서그것을 질서의 우주로 변형시키셨다는 것을 암시했습니다. 성령은 그 위에 사람이 살고 언젠가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실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시편기자는 이 땅의 감각적 생명에 관하여, 성령이 생명을 주시는 분일 뿐 아니라 생명을 유지케 하시는 분임을 암시했습니다(104:29-30).

따라서 성령님은 그 속에 놀랍게 편재하고 있는 이 물질계의 창조에만 관

계하신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창조에도 관계하셨습니다. 성령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그 육신만 만드신 것이 아니라 이성도 만드셨으며 동시에 불멸의 영혼도 함께 만드셨습니다. 엘리후에 의하면, “사람의 속에는 심령이 있고 전능자의 기운이 사람에게 총명을 주시나니”(32:8)라고 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항상 우리 안에 내주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지배하시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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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로마서8:12-17) 

 

우리가 성령의 지배를 받고 산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 말입니까? 사실 우리는 성령에 대해서 아주 많이 들었습니다. 옛날 부흥회 때는 으레 성령 집회 같았습니다. 그러다보니 문제는 성령님을 너무나 소홀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j"Wr/rūah와 헬라어 pneu'ma/pneȗma는 성경 속에서 문자적으로든 비유적으로든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주님께서 바람(pneu'ma)이 임의로 불매라고 말씀하실 때는 바람을 의미하였습니다. 또한 어떤 불가시적 능력 또는 영혼 및 천사들과 같은 비물질적이고 불가시적인 주체를 의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 자신 곧 영(Spirit)으로 불리어졌습니다. 그 본질이 비물질적 · 지성적 존재로서 표현되는 분을 적절하게 표현했습니다. 삼위일체의 제삼위격이 성부와 성자와 같이 탁월성의 방식에 따라 성령으로 불리어졌습니다. 그 이유는 그분은 하나님의 능력 또는 권능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권능을 직접적으로 행사하는 인격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둘째는 삼위일체의 다른 위격들과의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부와 성자라는 말이 관계를 표현하는 말들이기 때문입니다. 영이라는 말도 똑같이 이해되어야 합니다. 성자는 하나님의 계시자 또는 형상으로서 말씀으로 불립니다. 제삼위격은 하나님의 숨 또는 능력으로서 영(Spirit)으로 불립니다. 제삼위격은 또한 그분의 본질과 활동을 지적하기 위해 특별히 성령(Holy Spirit)으로 불립니다. 그분은 그분 자신의 본질상 절대적으로 거룩하십니다. 모든 피조물의 거룩의 원인이십니다. 또한 성령님은 진리의 영, 지혜의 영, 평강의 영, 사랑의 영 그리고 영광의 영으로 불리기도 합니다(Charles Hodge, 2002, 643).

그리스도인의 삶과 행위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John Murray어떻게 성령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고 지도하는가? 질문합니다. 그리고 전제하기를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행위에 유일하고 무오한 법칙임과 동시에 믿음에도 유일하고 무오한 법칙이라는 것입니다. 이 기본적인 전제를 보완하는 것이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행위의 완전하고 충족한 법칙이라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추론되는 결과는 우리가 성령의 새로운 계시들을 기대하거나 의존하거나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계시와 영감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과는 다른 상황에 있다는 것입니다.

 

계시의 시대에서는 성령의 새로운 계시들이 때를 따라 이주 다양한 상황에서 여러 가지 목적으로 주어졌습니다. 이러한 계시들은 그것들을 받는 사람들에게 직접적이고 초자연적인 전언을 통하여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성령이 어떤 방식의 직접적인 작용과 암시에 의해 우리를 인도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도에 있어서 성령의 작용을, 우리가 인도받아야 하는 수단으로 적절하게 간주될 수 있는 다양한 요소들로부터 분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는 성령의 작용을, 성령이 우리에게 준 무오하고 충족한 행위의 법칙으로부터 분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식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처한 모든 상황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삶을 둘러싼 모든 일들과 환경에 이런 저런 방식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강조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무도덕의 상황 또는 우리에게 있어서 무도덕의 상황에 결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는 모든 것에 두루 미치며, 하나님께서 성경 안에서 그의 뜻에 대해 우리에게 주신 계시는 우려의 모든 상황에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의 이해와 적용에 있어서 지도와 인도를 받으려면 우리는 성령을 의지해야 하며, 말씀을 우리의 각각의 상황에 효과적으로 적용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성령이 필요하다는 것을 끊임없이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경우에 성령의 역할은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조명해 주는 것이며, 우리에게 그 뜻을 행할 의욕과 힘을 나눠주는 것입니다(John Murray, 2000, 186-188).

하나님의 아들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못하도록 하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세상의 자녀들로부터 구별되는 가장 확실한 표지는 하니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중생하여 정결함과 거룩함에 이르는 것입니다. 영적인 사람들이란 하나님께서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다스리시는 자들이요, 자신들의 충동에 근거하여 이성에 순종하는 자들이 아닙니다(John Calvin, 1980, 243).

결국 성도와 죄인과의 차이는 성도는 성령을 소유하고 있지만, 죄인은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지배를 받고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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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로마서8:1-2)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죽음이란 영혼과 육신의 분리입니다. 죽음이란 살아있었던 상태에서 모든 것이 정지되는 것입니다. 죽음은 이 세상과의 분리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통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합니다. 만일에 모든 것이 끝난다면 이 세상에서 무슨 짓을 해서라도 잘살고 싶어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죽은 이후가 더 무서운 상황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성취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서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골로새서1:21-22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히브리서2:9-10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깐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하나님)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히브리서2: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 외에도 성경은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와 깊은 연관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예수님의 죽음은 사적인 죽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소위 말해서 각 종교의 교주들은 죽었습니다. 그들은 그냥 그뿐입니다. 그 이상 어떤 영향력이 없습니다. 스스로도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자명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배제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예수그리스도의 죽음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아무리 부인하려해도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원히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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