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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22.09.05
    실재론

▮실존주의實存主義 existentialism 인간의 선택이 인간의 실존을 구성한다는 점을 강조했던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유행한 일군의 철학. 실존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신념 체계에 있어서 일치하지 않았으나, 자기 자신의 행위를 통해 자신을 정의해 나가는 개별적 책임과 관련하는 자유, 불안, 그리고 인간이 처한 상황의 부조리함을 강조하는 공통적 경향을 가지고 있다. 실존주의는 19세기의 사상가 쇠엔 키에르케고어와 프리드리히 니체에게 영감을 받았지만, 이 두 철학자는 실존주의로 통하는 것을 별로 지지하지 않았을 것이다. 실존주의에는 무신론적 형태(장 폴 사르트르, 알베르 카뮈)와 종교적 형태(마틴 부버, 가브리엘-오노레 마르셀)가 있지만, 실존주의라고 하면 대중들의 마음에는 무신론적인 것으로 비춰진다.

참고문헌

철학의 즐거움/Fujisawa Konoske

100인의 철학자 사전/Philip Stokes 

서양철학사/박해용

인물중심의 철학사/김흥호

3분 철학/Shinya Oshiro

철학․변증학 용어사전/C. Stephen Evans

101가지 철학개념/Kelly James Clark, Richard Lints, James K. A. Sm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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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마가복음1:35-39

 

Russian-Ukraine War 20222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사건입니다. 21세기 유럽 대륙에서 처음으로 발생한 대규모 전면전입니다. 푸틴의 야욕으로 인해서 우크라이나에 약 600만 명이 피난했습니다. 우크라이나인 약 10만 명이 사망했습니다. 부상자가 약 10만 명입니다. 사망자들과 부상자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2022년 현재 전 세계 물가가 폭등했습니다. 전 세계 식량 위기가 발생했습니다. 이것이 불안한 국제상황입니다.

2022년 국내상황은 제가 말 안 해도 우리가 잘 압니다. 엄청 뛰어나고 명석하다고 하는 자가 대통령이 되다 보니 모든 것을 지혜롭게 대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국민은 모두 답답합니다. 불안불안합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 태어나 철이 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고 질문합니다. 착하게 살아야 한다. 나를 비워야 한다. 베풀어야 한다. 그러나 나 아닌 다른 사람이 착하지 않습니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비우지 않기 때문에 그런 말들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Russian-Ukraine War 을 멈추게 할 나라가 없습니다. 모두 푸틴의 형편만 바라보고 있을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른 새벽에 베드로의 집에서 나와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한적한 곳 곧 광야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은 온 갈릴리 백성들이 환영하게 되자 즉시 한적한 곳 곧 광야로 나가셨습니다. 사단이 주님을 기적만 행하는 Messiah로 만들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즉시 처음에 사단과 싸우시던 광야로 다시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기도를 통해서 다시 사단의 유혹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아직 어두운 새벽에 나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마음을 쏟으시며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감사기도였을 것입니다. 이제 시작한 갈릴리 대사역에 필요한 힘과 능력 주시기를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한편 베드로는 일어나보니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은 부지런히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찾은 목적은 지극히 세상적입니다. 그를 다시 가버나움으로 모시고자 함이었습니다. 그곳에는 가버나움의 큰 무리가 베드로의 집 앞에 모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찾은 제자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이 사실을 예수님께 알려 드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뜻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도 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수님과 생각이 달랐습니다. 자신들의 터전인 가버나움에 예수님이 오래 계시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의 사역 곧 그의 전도 여행에 제자들을 함께 데리고 계속 다니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주님은 죄인의 구원과 그들의 생활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널리 선포하는 일에 역점을 두셨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구원에 대한 여러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후세계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두 자신들은 자신 있다는 것입니다. 현재도 영혼 불멸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영혼불멸을 믿는 사람들도 엉터리입니다. 자신의 알량한 행위가 자신을 틀림없이 구원할 거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피에 근거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을 전파하는 일을 강조하셨습니다. 전도하심이 목적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자신 구주로서 하늘로부터 이 땅에 내려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섞여 사는 갈릴리까지 가셔서 전도하시고 귀신들을 내어 쫓으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38절에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는 말씀은 사람에 대한 구원의 message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나사렛이나 가버나움에서 오셨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나는 하늘에서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여 왔다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1:1-4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그 일을 하시려고 오신 예수님께서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제자들에게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받으실 때 기도하셨습니다(3:21). 열두 제자를 택하시기 전에 기도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이적을 베풀 때와 베푸신 후에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중요한 질문을 하시고자 할 때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없이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는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기도는 성도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합니다. 기도는 성도에게 있어서 매우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날 기도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면서도 기도를 차일피일 미룹니다. 기도에 매력을 느끼면서도 기도를 싫어합니다. 기도는 해야만 하는데 하고 싶은데, 뭔지 모르게 우리와 실제로 기도하는 것 사이에는 거리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 사이에 우리는 기도하지 않는 고통을 체험합니다. 무엇이 우리를 기도하지 못하도록 막는지 우리는 분명히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해야 할 일들과 가정사들 때문에 분주하게 생활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바쁘다고 해서 먹지 않거나 잠자지 않거나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못하는 데에는 더 깊고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실제로 기도를 막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현대인들에게 거의 보편적인 생각입니다. 기도하기 위해 기도에 관한 모든 것을 먼저 완전히 알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실제로 기도할 수 있으려면 먼저 우리의 삶이 멋지게 조율되어야 하고, 기도하는 법에 대해 더 많이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기도에 따르는 여러가지 문제들을 연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유창하게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구비되고 채워져야만 기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은 부질없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영원의 이편에서는 순수한 것들과 불순한 것들을 나누지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도한다고 해서 세금을 부과하거나 어떤 짐을 우리에게 메우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이중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용납하실 만큼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꼭 현명하거나 순수하거나 믿음이 충만하거나 어떤 것을 갖추고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을 뿐만 아니라 은혜로 살아가며 또한 은혜로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은 어린아이들이 부모님께 나아오는 것과 유사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무조건 맹렬하게 요구합니다. 우리는 그들의 요구가 이기적이거나 저속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동기가 어찌 되었건 그들이 우리에게 나아온다는 그 자체입니다. 기도의 문제도 그러합니다. 우리가 올바르게 기도하기 위해서 가져야 할 순수한 동기를 충분히 갖고 있지 않다거나 충분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 모든 사실을 제쳐 두고 기도를 시작해야 합니다. 실제로 기도하는 바로 그 행위 속에서, 즉 하나님과의 친밀하고 끊임없는 상호작용 속에서 이 문제들이 때가 되면 해결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 주십니다. 또 우리의 기도를 있는 그대로 들어 주십니다. 어린아이가 나쁜 그림을 그릴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는 나쁜 기도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단순하게 해야 합니다. 단순한 기도는 우리의 있는 그대로를 숨김없이 하나님께 내놓는 기도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열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옳고 그른 것을 가려내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런 가식 없이 우리의 관심을 나누고 간청할 뿐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직장동료나 이웃 사람들로 인해서 얼마나 마음이 상했는지 하나님께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또는 좋은 날씨나 먹을 양식과 건강 따위를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순한 기도는 그 초점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의 필요와 욕구와 관심이 우리의 기도를 지배합니다. 우리의 기도에는 수많은 교만, 자만, 허영, 가식, 등 전반적으로 이기주의가 가득 차 있습니다. 거기에는 아량도 있고, 관대함도 있으며, 이타심 그리고 보편적인 호의도 있습니다. 그래도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실수를 저지릅니다. 그리고 죄를 지으면서 삽니다. 그러다가 종종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일어서서 다시 시작합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다시 하나님을 따르려고 애씁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시 우리의 교만함과 방종함에 굴복하고 맙니다. 이런 일이 반복됩니다. 그러나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다시 자백하고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단순한 기도는 때때로 다시 시작하는 기도입니다. 단순한 기도는 성경에 나오는 기도 중에서 가장 흔한 기도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영웅들 가운데 고상하거나 아량이 넓은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 옛날 목이 곧은 백성들에 대하여 하나님께 불평하던 모세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주께서 어찌하여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나로 주의 목전 에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나로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이 모든 백성을 내가 잉태하였나이까 내가 어찌 그들을 생산하였기에 주께서 나더러 양육하는 아비가 젖 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 주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가라 하시나이까”(11:11-12). 또 자기를 대머리라고 놀린 아이들에 대한 엘리사를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엘리사가 돌이켜 저희를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콤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에 사십이 명을 찢었더라”(왕하2:24).

 

이러한 자기중심적 기도의 한복판에는 사람들의 가장 고상하고 숭고한 기도 내용도 있습니다. 불순종하고 완고한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모세가 하나님께 중보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32:32). 엘리사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수넴 여인여인에게 돌이 되면 네가 아들을 안으리라“(왕하4:16). 시편 기자는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119:97)라고 했습니다. 단순한 기도에는 좋은 것, 나쁜 것 그리고 흉한 것 모두가 섞여 있습니다. 기도는 일반적인 사람들이 일상적인 문제를 가지고 사랑하는 아버지 앞에 아뢰는 것입니다. 그 기도에는 가식이 조금도 없습니다. 실제 우리의 모습보다 더 거룩하고, 더 순결하고, 더 성스러운 체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자세로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 마음을 쏟아 놓읍시다(요일3:20). 어쩌면 기도는 항상 초보적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기도를 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John Dalrymple 존 달림플우리는 이런 기도 이상은 드릴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런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는 부족함과 필요를 넘어설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기본적인 기도를 멸시하고 싶은 유혹이 있습니다. 보다 성숙한 기도를 드리겠다는 소망으로 단순한 기도를 건너뛰려고 합니다. 그들은 수없이 많은 이기적인 요구의 기도를 경멸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적 생활에 있어서 기도는, 그것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중심적인 기도를 뛰어넘는 길은 그것을 피해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것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단순한 기도를 뛰어넘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십중팔구 그들은 거의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기도에 대해서 논의해 본 적이 거의 없는 사람들일 가능성이 큽니다. 진심으로 기도할 때 우리의 마음 상태는 온전히 드러나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있는 곳에서 기도를 시작해야 합니다. 기도는 이론으로 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우리가 있는 곳에서 바로 시작해야 합니다. 가정과 직장에서, 이웃 사람들과 친구들과 더불어 시작하면 됩니다. 이것을 우리가 가볍게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가는 데 있어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가장 심오한 진리가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상적인 삶 속에서 복을 주신다고 믿는 것이 바로 기도의 재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처소로 들어오신다고 믿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그런 기도를 멸시해 버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여기서 내게 복을 주실 수 없다.”고 우리는 신음합니다. 내가 졸업하면, 내가 이 일을 끝내면내가 CEO가 되면. 하나님께서 내게 복을 주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실 수 있는 장소는 우리가 있는 바로 그 장소뿐입니다. 그곳이 바로 우리가 있는 유일한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불붙는 떨기나무 앞에 있었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모세가 자신이 거룩한 곳에 서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현재 있는 곳이 거룩한 땅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곳이 직장이든 가정이든 동료, 친구, 가족 그 누구와 함께 있는 그곳이 바로 기도를 배우는 곳입니다. 가장 자연스럽고 단순하게 일상의 경험들을 기도하려면 매일매일의 생활에서 일어나는 평범한 사건들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때로는 밤잠을 못 잘 만큼 엄청난 시련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과 함께 걸으며 우리의 상처와 고통과 실망을 느끼며, “왜 접니까? 왜 제가 이 아픔을 당해야 합니까?" 이렇게 좌절과 슬픔과 분노에 대하여 호소하는 것이 단순한 기도의 언어이기도 합니다.

길을 잃고 상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동행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이웃 사람이 무심코 내뱉는 한마디가 우리 속에 있는 분노, 시기, 두려움 따위의 감정을 모두 폭발시키기도 합니다. 그때 우리는 솔직하고 정직하게 그 일을 하나님께 말씀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감정 뒤에 숨어 있는 상처를 치료해 달라고 요청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자유로이 불평도 하고 따지기도 하고 외치기도 해야 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20:7). 예레미야의 기도입니다. Clive Staples Lewis우리 안에 있어야 할 것이 아 니라 우리 안에 있는 바로 그것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삶의 자질구레한 것들은 기도의 올바른 내용이 아니라고 하는 속임수를 믿어선 안 됩니다. 우리는 기도가 숭고하고 이 세상 것이 아닌 활동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믿지 마십시오. 기도할 때는 하나님에 관해서만 하나님께 말해야 한다고 배웠는지도 모른다. 그 결과 우리는 일상의 체험들이 올바른 기도를 방해하고 주의를 산만하게 한다고 쉽게 단정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영성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예수님께서는 냄새 나는 마구간에서 태어나셔서 피와 땀과 눈물로 이 땅 위를 다니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한시도 벗어남이 없이 살아가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일상적인 생활들에 관해서 하나님과 끊임없이 대화해야 합니다. 단지 하나님께 이야기해야 합니다. 자유롭고 숨김없이 상처를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의 슬픔을 나누고 기쁨을 나누어야 합니다. 어린아이들이 부모에게 올 때 그러하듯이 하나님도 사랑과 긍휼로 우리의 말을 들어 주십니다. 우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측량할 수 없는 귀중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단지 기도하는 것만으로도 기도를 배울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입니다.

 

Closing 청교도 William Gurnal은 어린아이가 우는 것과 새로운 피조물이 기도하는 것은 똑같다. 어린아이는 우는 법을 누구에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알게 된다. 어린아이는 울면서 세상에 태어난다. 마찬가지로 기도도 그 양식이나 규칙을 배우는 것이 아니다. 새 생명의 원리 자체로부터 자동적으로 흘러나오는 것이다. 기도는 유한한 우리가 무한한 하나님께 채워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And

찾아온 사람들을 고치신 예수님

마가복음1:32-34

 

대학병원이나 대형병원의 응급실은 흡사 전쟁터와 같습니다. 각종 사고 난 사람들이나 병으로 위독한 환자들이 모여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그들을 치료하려고 매우 분주하게 움직입니다. 응급실은 첨단장비들과 우수한 인력들이 항상 대기하고 있습니다. 응급요원들이 응급처치해서 각 과에 보내어 생명을 연장하게 합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다 생명을 연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응급실에서 또는 수술실에서, 치료실에서 유명을 달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병원에서 치료하지 못하는 것은 의술의 부족이 아닙니다. 인간의 한계 때문입니다. 현재까지의 의술이 병에 따라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것은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생명을 연장하려고 생명공학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이 생명을 연장하려고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적이 일어나야만 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상상의 기적만 생각합니다. 기적은 이 세상에서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기적을 모두 기록하지는 않았습니다. 사복음서에는 예수그리스도께서 베푸신 각각 다른 기적이 35회가량 기록되어 있습니다(20/18/20/28). 마태복음에만도 주님께서 기적을 행하셨던 상황을 12번이나 암시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기적들은 수많은 기적 중에서 기록자 자신의 저술 동기에 적합한 것만을 일부 선정하여 기록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일일이 기록했다면 기적만 따로 기록한 책이 별도로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만큼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이 많다는 말씀입니다.

 

말라기4:6을 보면

 

개역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바른성경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 자녀의 마음을 아버지에게 돌이킬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와서 이 땅을 진멸함으로 칠 것이다.

 

구약성경의 마지막 말씀은 저주, 멸망 !reje/hērēm입니다. 여기에서 저주는 우리가 보통 생각하고 있는 저주가 아닙니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고 있는 저주는 신명기28:20입니다.

 

신명기28:20 네가 악을 행하여 그를 잊으므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여호와께서 저주와 공구와 견책을 내리사 망하며 속히 파멸케 하실 것이며

 

신명기28:20의 저주 hr:aem]/mĕ’ērâ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고 있는 저주입니다. 하지만 말라기4:6의 저주는 다른 뜻이 있습니다. 저주를 헤렘으로 기록했습니다. 헤렘은 금지라는 뜻입니다. 여호수아6:16-19을 보면

 

16 일곱번째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외치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 17 이 성과 그 가운데 모든 물건은 여호와께 바치되 기생 라합과 무릇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살리라 이는 그가 우리의 보낸 사자를 숨겼음이니라 18 너희는 바칠 물건을 스스로 삼가라 너희가 그것을 바친 후에 그 바친 어느 것이든지 취하면 이스라엘 진으로 바침이 되어 화를 당케 할까 두려워하노라 19 은금과 동철 기구들은 다 여호와께 구별될 것이니 그것을 여호와의 곳간에 들일찌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첫 성인 여리고를 주시면서 이스라엘에게 신신당부하십니다. 절대로 가나안의 모든 재물을 착복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착복했습니다. 그 결과 조그만 아이 성에서 크게 패하게 됩니다. 이유는 아간이 하나님의 곳간에 넣어야 할 재물에 손을 댄 것입니다. 이것을 헤렘을 범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것을 착복했다.”입니다.

 

말라기4:6의 저주가 곧 헤렘입니다. 여기에서는 하나님께서 복을 금지하셨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올 엘리야 곧 세례요한이 선포한 메시지를 믿지 않으면 복을 금지하신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막으시기에 저주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침묵의 400년이 지난 후 예수그리스도의 족보가 나옵니다.

 

마태복음1:1 다윗과 아브라함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신약성경을 첫 번째로 열면서 예수그리스도를 소개합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저주를 선포하였는데, 신약성경 초입에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저주와 그리스도. 어떤 관계입니까?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의 저주를 해제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의 저주를 없애십니다. 저주란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이 불순종하여 생긴 결과입니다.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3:10). 누구든지에 모든 사람이 포함됩니다. 모든 사람이 저주 아래 있습니다. 저주 아래 있다는 말은 죽어야 하고, 죽는다는 말은 영원한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계산하기에 따라 영원한 죽음을 맞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성경대로, 약속된 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 저주를 폐기하고 인간을 죽음에서 구해내시려고 오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여자의 후손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우리를 저주에서 구원해 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 율법 아래 오셨다는 사실이 기적입니다. Campbell Morgan유대인의 계통에서는 도저히 그런 분이 나올 수 없다. 그는 그 계통을 완성하시고 또 그것을 바꾸기 위해서 오셨다. 그래서 만왕의 왕으로 오셨지만, 그의 이름은 예수라고 불렸다. 왜냐하면, 그 왕국은 죄로 인해 해체되어 붕괴하였으며, 국토는 유린당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로부터 구원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했다.”이것이 기적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기적을 바라지만, 기적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기적이 일어나도 자연 현상으로 설명하려고 매우 노력해 왔습니다. 홍해가 갈라졌다고 해도 많은 사람이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홍해라는 이름은 #Ws !y: /yâm sûp입니다. 갈대 바다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얕은 갈대 바다를 건넜기 때문에 기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어떤 바다라도 바닷가에는 갈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건넌 홍해는 넓고 깊은 바다였습니다. 만일에 갈대숲의 바다라면 어떻게 이스라엘은 건너고, 말을 탄 애굽 군인들이 수장되었을까요? 이럼에도 아직 그것을 규명해보겠다고 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경에는 초자연적인 기적들이 두루두루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혜택을 받은 사람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래도 현대인들은 성경의 기적을 역사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성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홍해가 갈라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요단강이 갈라질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일들입니다. 그러므로 fact인데 fiction으로 생각합니다. 육안으로만 세상을 헤아리기 때문입니다. 육안이 아닌 영안으로 봐야 제대로 보입니다.

 

32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33 온 동네가 문 앞에 모였더라 34 예수께서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어 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시니라

 

저물어 해 질 때에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왜 해가 떠 있을 때 좀 더 일찍 나와서 고침을 받지 않았습니까? 병자들의 상황은 일각이 여삼추였습니다. 그런데 저물어 해 질 때에야 나왔습니다. 그 이유는 이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21). 오늘날로 말하면 토요일 오후 해 질 때입니다. 해가 지면 안식일이 종료됩니다. 히브리어 표현에 따르면 두 종류의 저녁이 있습니다. 출애굽기12:6의 원문을 보면, 해질 때를 히브리인들은 두 저녁 사이라고 읽습니다. 일몰과 어두움 사이로, 빛이 아직 있는 상태의 그 중간 시간을 가리킵니다. 안식일이 끝나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의 입장은 안식일을 범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귀신 축출이나 병을 치료하시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으셨습니다.

복음서에 제시된 구체적인 기적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수많은 기적 중 지극히 제한 된 몇몇 예일 뿐입니다.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 자, 온 동네, 각색 병든 많은 사람, 많은 귀신 등과 같은 표현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이 얼마나 많고 다양하였는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기적을 얼마나 폭넓게 행하셨는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병든 자, 다음에 바로 귀신들린 자가 덧붙여 기록되었습니다. 귀신은 들리지 않았으나 육체적으로 병든 자들과 육체적으로는 병들지 않았으나 귀신이 들린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괴로움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다 고쳐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병 고치는 능력은 결코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찾아온 사람들 모두 고쳐주셨습니다. 이병은 되고, 저 병은 안 되고가 없었습니다. 모두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동정의 손길은 결코 중단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실 때 귀신이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하고 소리쳤습니다. 귀신들의 그 소리에 재갈을 물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귀신들을 꾸짖으시고 더 이 일에 대해 말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어 이 세상에 어떻게 오셨습니까? 정말 귀하게 오셨습니다. 그런데 귀신들이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을 망치려 했습니다. 아직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시지 않으려고 하셨는데 이 귀신은 그것을 까발리고자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수난과 부활을 통하여 자신에게 속한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반대하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너무나 빨리 메시야로 알려지면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귀신들을 꾸짖으신 것입니다.

 

아테네인들이 델피의 신전에서 신탁을 받고자 했습니다. “아테네에서 누가 제일 지혜로운 사람인가?”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신탁을 하는 무녀 PhythiaSwkravth"라고 했습니다. 이 말이 아테네에 두루 퍼졌습니다. Swkravth"는 이상했습니다. 자신이 생각할 때 자신은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에서 지혜롭다 한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서 물었습니다. 찾아서 물어보고 시험해보니 엉터리라고 생각했습니다. Swkravth"자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테네의 소위 지성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알지도 못하면서 지성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無知라고 합니다. 난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는 것을 아는데, 저들은 아는 것이 없는데도 지혜롭다고 스스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기적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無知입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무지의 지입니다. 병을 치료받은 사람이 있는데. 귀신들림에서 자유로워진 사람이 있는데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무지의 지입니다. 예수님께 왜 사람들이 모였습니까? 예수님께서 무엇인가 할 수 있는 것을 사람들이 알았기 때문입니다. 기다리고 있다가 안식일이 끝나자마자 바로 찾아왔던 것입니다. 기적을 베푸시는 예수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Closing 제가 만든 것은 제가 고칠 수 있습니다. 제가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들은 하나님께서 고치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선장이신 예수님께서는 주무시다가 풍파를 안정시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배는 가장 안전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면 어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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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이 본 아들의 영광

마태복음17:1-8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놀라운 일 들 중 한 사건은 예수님의 변형 사건입니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제자들이 듣고 엎드리어 심히 두려워하니 예수께서 나아와 저희에게 손을 대시며 가라사대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 하신대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사도요한에게 예수님의 변형 사건은 큰 인상을 주었습니다. 요한은 요한복음1:14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은 예수님의 변형 사건을 보면서 동시에 하나님 아들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들의 영광을 생각할 때 몇 가지의 진리가 있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1:14) 라고 요한이 말한 이유입니다. 그것은 단지 이 땅에 있는 사람의 영광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영광이었습니다. 며칠 전에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16:13) 고 질문하셨습니다. 그는 많은 답변을 들으셨습니다.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이었으며 예수님 또한 슬픔의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례요한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보다도 요한과 예수님은 정반대의 인물이었습니다. 요한은 사람들과 떨어져서 살았으나, 예수님은 무리와 어울려 살았습니다. 요한은 나실인(6/1:15)이었기에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였으나 예수님은 결혼 잔치 집에 가셔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얼마나 예수님의 인격에 대하여 오해를 하고 있었는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또 질문하시기를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5)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16)라고 하였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지 아니하셨습니다. 일주일이 지나서야 그의 영광을 보여 주셨습니다. 제자들의 신앙고백에도 불구하고 일주일 동안 그 증거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한참이 지나서야 비로소 영광 가운데 계신 예수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이 책(요한복음)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없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20:30,31). 하나님께서는 사도 요한을 택하여 성령의 감동으로 요한복음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복음서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예수님께 붙여진 이름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10:36). “나는 선한 목자다”(11). “내가 문이니”(9).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6:35), 그리고 내가 참 포도나무요”(15:1)라고 말씀하셨습니 다. 주님의 영광과 신성은 그의 행하신 기적 속에서도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은 요한복음 2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주님이 결혼잔치에 가셔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셨다는 내용입니다. 요한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이렇게 덧붙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 을 나타내시매”(1) 주님의 이름과 기적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아들이시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에서부터 하나님께서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3:17). 변화 산에서 하나님께서는 다시 말씀하여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17:5)고 하셨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다시 하늘로부터 그의 아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12:27~30).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았을 때에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17:4)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이 말을 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17:5)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우선권을 드린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것은 절대적인 우선권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가장 첫 번째 자리에 오르게 하였으나, 모세와 엘리야를 예수님과 같은 수준에 놓았습니다. 모세는 율법을 대표합니다. 엘리야는 예언자를 대표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과 예언을 성취하셨습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 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1:1,2).

우리는 베드로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에게 단지 우선순위와 두드러진 자리를 제공하지 말고, 절대적인,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러한 자리를 드리도록 해야 합니다. 요한은 아들의 영광을 강조하였는데 그 이유는 예수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Son of God)은 히브리적 배경에서 하나님 자체 또는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로 이해하였습니다. 예수님과 동시대에 살았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할 때 이를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 또는 하나님 자체라고 주장하는 것과 동일하게 간주했습니다. 예수님의 칭호로서 하나님의 아들은 절대적으로 삼위일체인 성부와 성령과 성자 예수님은 그 권위와 영광이 동등하며, 동일한 영원성을 지니며, 동질적이라는 사실을 동시대는 물론 오고 오는 세대에 증거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이 변형하셨을 때 그것은 영광이 비추이는 곳에 들어가셔서 빛을 반사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영광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변형되사/metemorfwvqh는 다른 형상으로 바꾸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변형기사는 인지 가능한 변화의 실례였습니다. 지상적 형태에서 천상적 형태로 변형한 이 기적은 옷의 광채로 나타났습니다. 이 변형은 헬라적 의미의 변신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변형되었다는 말은 종말론적 사상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새 세대에 의인에게 약속된 일이 이미 이 세상에서 예수님에게 일어났습니다. 그의 가장 친밀한 제자들 앞에서 예수님의 인간적 외모가 일순간에 변모된 세계에서의 천상적 존재의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이것은 종말론적 실재에 대한 예견이자 보증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인자로서 궁극적 구원의 소망을 명백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통한 길의 목적이 위대한 성취자의 영광이라는 것을 깨달아야만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범죄 하였을 때, “이가봇이라는 이름을 사무엘상 4:21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의미는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는 것이었습니다. 후에 이스라엘은 성전을 건축하였고 솔로몬은 이 성전을 봉헌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그 안에 가득하였습니다(왕상8). 그러나 그 백성이 다시 범죄 했습니다.

에스겔을 읽어보면 하나님의 영광이 이미 떠나버린 성전을 바라보는 에스겔의 모습을 발 견할 수 있습니다.

 

8:1-4 제 육년 유월 오일에 나는 집에 앉았고 유다 장로들은 내 앞에 앉았는데 주 여호와의 권능이 거기서 내게 임하기로 내가 보니 불같은 형상이 있어 그 허리 이하 모양은 불같고 허리 이상은 광채가 나서 단 쇠 같은데 그가 손 같은 것을 펴서 내 머리털 한 모숨을 잡으며 주의 신이 나를 들어 천지 사이로 올리시고 하나님의 이상 가운데 나를 이끌어 예루살렘으로 가서 안뜰로 들어가는 북향한 문에 이르시니 거기는 투기의 우상 곧 투기를 격발케 하는 우상의 자리가 있는 곳이라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거기 있는데 내가 들에서 보던 이상과 같더라

 

9:1-4 그가 또 큰 소리로 내 귀에 외쳐 가라사대 이 성읍을 관할하는 자들로 각기 살륙하는 기계를 손에 들고 나아오게 하라 하시더라 내가 본즉 여섯 사람이 북향한 윗문 길로 좇아오는데 각 사람의 손에 살륙하는 기계를 잡았고 그 중에 한 사람은 가는 베옷을 입고 허리에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찼더라 그들이 들어 와서 놋 제단 곁에 서더라 그룹에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올라 성전 문지방에 이르더니 여호와께서 그 가는 베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을 불러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 하시고

 

10:1-7,18 이에 내가 보니 그룹들 머리 위 궁창에 남보석 같은 것이 나타나는데 보좌 형상 같더라 하나님이 가는 베옷 입은 사람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그룹 밑 바퀴 사이로 들어가서 그 속에서 숯불을 두 손에 가득히 움켜 가지고 성읍 위에 흩으라 하시매 그가 내 목전에 들어가더라 그 사람이 들어갈 때에 그룹들은 성전 우편에 섰고 구름은 안 뜰에 가득하며 여호와의 영광이 그룹에서 올라 성전 문지방에 임하니 구름이 성전에 가득하며 여호와의 영화로운 광채가 뜰에 가득하였고 그룹들의 날개 소리는 바깥 뜰까지 들리는데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음성 같더라 하나님이 가는 베옷 입은 자에게 명하시기를 바퀴 사이 곧 그룹들 사이에서 불을 취하라 하셨으므로 그가 들어가 바퀴 옆에 서매 한 그룹이 그룹들 사이에서 손을 내밀어 그 그룹들 사이에 있는 불을 취하여 가는 베옷 입은 자의 손에 주매 그가 받아가지고 나가는데 18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을 떠나서 그룹들 위에 머무르니

 

11:22-25 때에 그룹들이 날개를 드는데 바퀴도 그 곁에 있고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도 그 위에 덮였더니 여호와의 영광이 성읍 중에서부터 올라가서 성읍 동편 산에 머물고 주의 신이 나를 들어 하나님의 신의 이상 중에 데리고 갈대아에 있는 사로잡힌 자 중에 이르시더니 내가 보는 이상이 나를 떠난지라 내가 사로잡힌 자들에게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신 모든 일로 고하니라

 

이 영광은 이 땅에 되돌아오지 않다가 예수님의 탄생하심에서 영광이 다시 나타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이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성령이 오시지 아니하였더라면 예수님의 변형은 단지 역사적 사실이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령이 오순절에 강림하셔서 믿는 자들 속에 충만하게 거하시므로 오늘날에도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17장에 나오는 우리 주님의 중보 기도를 볼 수 있습니다. 이 기도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도 적어도 여덟 번이나 언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를 시작하십니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시옵소서”(1). 기도의 후반부에 이르러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22).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영광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세주로서 신뢰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이것의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트럭을 운전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시험공부를 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웃을 방문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전화를 걸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고린도전서1031절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우리가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하여 그의 영광을 우리와 더불어 나누어 주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아들의 영광을 기억하였고 기록하였습니다.

 

Closing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 안에서 하나님이 영광스럽게 되기 위하여, 우리의 삶을 통해서 그의 영광이 빛나도록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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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1.1,2, 로마서9:25,26

 

 

Roma는 서양을 대표하는 제국이었습니다. 원래 Roma는 지금의 Roma 중심부에서 시작된 작은 도시국가(polis)였습니다. 하지만 차츰 주변 국가들을 정복하기 시작하면서 세력을 넓혔습니다. 서쪽으로는 영국, 동쪽으로는 Turkey를 넘어 중동 지역까지, 남쪽으로는 Africa Sahara 지역까지, 북쪽으로는 북유럽 대부분을 정복하여 대제국을 건설했습니다. 그래서 무적(invincibilit) Roma라고 했습니다. 그러한 Roma가 주전 326-284년까지 상당히 고전한 상대가 있었습니다. 산악지방의 Samnium 족입니다. 이들은 Italy 중부에서 남부에 걸친 산악지대에 거주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수도가 확실한 통일국가도 아니었습니다. 독자적인 문명도 없었습니다. 당시에도 그다지 이름도 알려지지 않았던 족속이었습니다.

326년 로마는 Samnium족과의 전쟁을 시작한지 5년 후에 Samnium족에게 패배했습니다. 새로 얻은 로마의 영토를 포기하고 Samnium족의 영향권을 존중한다는 내용의 강화조약을 맺습니다. 이 강화조약은 5년간 계속되다가 최종적으로는 306년에 Samnium족을 패배시키고 로마의 영향력 아래 두게 됩니다. Roma는 이런 상대쯤은 간단히 정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Roma는 뜻밖에 애를 먹었습니다. 그렇게 대치하다가 5년째 된 주전 321년에 로마는 Samnium족에게 패하여 항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굴욕을 로마는 철저하게 가슴 깊이 새겨두었다가 주전 284년에 설욕을 했습니다. 로마는 Samnium족에게 패할 때 자신들의 정체를 다시 한 번 돌아보았습니다. 왜 우리가 패했을까? 돌아본 다음에 철저한 대책을 세웠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정체를 알아야 합니다. 내가 누구냐? 현재 위치가 어디이며. 무엇을 하는 사람이며, 나는 어디에 속했는지를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아담이 범죄 함으로 사람은 영적인 죽음과 육체적으로 죽게 되었습니다. 영적 죽음은 아담이 반역하여 하나님과 단절되었을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육체적 생명은 930년간 지속되었지만, 그의 마음에 하나님을 상실하므로 영적 죽음은 이미 아담의 삶에서 실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박탈인 죽음을 죄에 대한 벌로 정하셨습니다. 사람의 죽음은 필연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 죽음에서 사람을 구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레위기1:1-2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생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찌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나올 때 완전히 들떠 있었습니다. 눈만 뜨면 강제노역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젠 그 힘든 노역을 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얼마 가지 않았습니다. 기쁨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불평으로 변했습니다. 그들의 탈출의 길은 마냥 영광의 길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홍해를 기적으로 건넌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이 무엇인가를 실감 나게 했습니다. 어려움은 홍해를 건넌 지 며칠 되지 않아 일어났습니다. 이들이 걸어가는 길은 태양이 이글거리는 광야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투덜거리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사랑으로 감싸 안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독수리 날개로 업어 시내산으로 인도하셨습니다(19:4).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끌어내신 것은 이스라엘의 조상에게 약속하셨던 그 언약의 성취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망나니 같은 이스라엘을 교육시키려 하셨습니다. 아직은 어리광을 부릴 나이지만, 하나님은 이들을 가나안 땅에 사는 대적들을 이길 수 있는 강한 군대로 키우려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가기 위해서 그들이 살아가야 할 율법을 수여 받습니다.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기 위한 각종 제사 규례도 받습니다. 제사 제도는 죄를 지은 인간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기 위해 제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기에 부정한 것이나 죄는 열납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수없이 백성들에게 성결의 삶을 요구하셨습니다. “나 여호와는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하라.” 거룩은 하나님의 속성이었습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trademark였습니다. 죄인인 인간이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희생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1-16)을 말씀하시고 거기에 따르는 하나님 앞에서의 거룩한 삶을(17-27) 명령하셨습니다. 우리는 희생 제사를 왜 하나님께서 말씀하실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짐승의 희생 제사는 모형(type)입니다. 원형(antitype)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입니다. 사람은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나아가려면 죄 없는 어떤 대상이 죽어야 했습니다. 그 대상은 모형인 짐승이었습니다. 모형인 짐승이 죄인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원형이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불러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할 장막을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장막 역시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죄 없는 어린양이 사람들을 위해서 죽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 땅에 세울 장막의 모형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늘에 있는 장막을 본뜬 것이었습니다. 이 지상의 장막이 모형임을 들어 하늘의 장막을 참 장막이라고 했습니다(8:2), 하늘의 장막이 원형antitype이라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지상의 장막에서 드려진 제사는 예표적이고 종말론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옛 언약 아래서 드려지는 제사로는 섬기는 자의 양심을 온전케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9:9). 그런데도 이 제사제도는 그리스도가 오셔서 구속사역을 완성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9:10).

성막은 이토록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교제하기 위한 장소입니다. 죄인인 백성이 이 성막을 통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아무나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백성을 대표할 제사장을 세우셨습니다. 오직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 차례 속죄일에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성막 제도를 통해서 점차 진정한 영적 예배가 무엇인가를 배워갔습니다.

사도요한은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모습을 표현하기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임마누엘, 장막을 치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독자)의 영광이요 진리가 충만하더라(1:14).라고 했습니다. 구약의 성막은 곧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매년 드리는 속죄일의 희생 제사를 그리스도의 영원한 제사의 한 모형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레위기의 제사제도를 통해 죄인 된 인간이 하나님께 죄 용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죄를 지었을 때 혹은 감사할 이유가 있을 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각종 제사제도를 설정하셨습니다. 그 제사가 다섯 가지 제사 형태입니다. 왜 하나님은 제사 제도를 통해서만 그 길을 열어놓으셨습니까? 그것은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그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은 자만이 하나님께 열납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속된 것과 거룩한 것을 구별하여 가르치셨습니다. 거기에는 먹는 음식과 성생활까지도 적용되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이 레위기뿐만 아니라 성경 전반에 걸쳐 나타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세상)에서 구원받은 자들입니다. 구원을 위해 노력하며 사는 삶이 아니라 구원 이후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할 존재들입니다. 물론 신약 시대에도 같은 명령이 하달되었습니다. 레위기는 그 거룩함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책입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성막을 건축하라고 하셨습니다(25:8-9).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모양대로 장막을 짓고 기구들도 그 모양을 따라 지을지니라(25:8,9)

 

그들 중에 (그리고)내가거할 성소를 나를 위하여 (그리고)그들을 시켜 짓되

.!k;/tB] yTin]k'v;w] vD:q]mi yli Wc[;w]

성막은 모세가 고안해서 지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백성들 스스로 고안해서 지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을 이렇게 저렇게 짓도록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견본 대로 지었습니다. 그 지침이 아주 세밀하였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그 원래의 모습을 거의 비슷하게 재현할 수 있었습니다.

성소는 지극히 거룩한 장소입니다. 하나님께서 백성 중에 거하실 때 바로 이 성소에 임재하셨습니다(25:81). 그래서 그곳의 거룩함을 더럽히면 안 되었습니다.

성소로 들어가는 문이 있었습니다. 이 문은 오직 동쪽으로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길도 오직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할 문이요 길입니다.

문을 통과하면 놋제단이 있습니다(27:1-8). 성막 안뜰에 있는 놋으로 만든 단으로 제물을 태우는 곳입니다. 단 네 모퉁이에는 뿔을 만들었습니다. 희생동물의 네 다리를 묶기 위해서 만들었습니다. 이 번제단의 뿔을 잡으면 죽을 죄인이라도 살 수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물두멍입니다(30:18). 이곳은 손과 발을 씻는 곳입니다. 더러움을 씻어 정결하게 되어야 함을 상징합니다. 물두멍에 대한 규례는 유대인들이 행했던 손을 씻는 관습이 발달하게 된 기초가 되었습니다.

첫째 휘장을 지나서 진설병 상이 있습니다(25:23-30). 이 상위에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위하여 모두 열두 개의 떡 과자가 놓여있습니다. 매주 한 번씩 갈아놓았습니다. 이 상은 성도와 깊은 교제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상징합니다. 이 상의 위치는 천막 첫째 방의 북쪽 편이었습니다.

첫째 방에 금등대가 있었습니다(25:31-40). 이는 성막에서 가장 화려하게 꾸며진 성물입니다. 이 등대는 아침저녁으로 손질하고 또 전부를 한꺼번에 끄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정기적으로 순수한 감람유로 채웠습니다. 등대 전체를 34kg의 순금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등대는 성소의 남쪽에 있었습니다. 일곱 등불은 세상의 빛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성소의 서쪽 편에 분향단이 있습니다(30:1-10). 금향단은 기도의 상징이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향기로운 향을 이 단에서 살랐습니다(8:3,4). 매년 한 번씩 이 분향단의 뿔에 피를 발라 거룩하게 했습니다.

성막의 문을 지나. 첫째 휘장을 지나서 둘째 휘장을 지나면 그 안에 언약궤가 놓여있습니다(25:1-22). 이는 성막에서 가장 중요한 성물입니다. 언약궤 속에는 몇 가지가 들어 있었는데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십계명이 새겨진 두 돌판입니다. 이 언약궤의 뚜껑은 정금으로 만들어졌으며 속죄소라고 칭했습니다. 언약궤의 상단에는 금으로 된 두 그룹이 서 있었습니다. 유대력으로 매년 710(9-10)에 속죄일 동안에 대제사장이 언약궤가 놓여진 지성소에 들어가 이스라엘의 죄를 위하여 피를 뿌리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언약궤 위에는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이 머물러 있었습니다.

 

성막은 과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만나기 위한 장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성막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직접적으로 만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이 속죄일에 번제와 속죄제를 드림으로 이곳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성막의 목적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의 상징이요.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과 만나는 장소였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목적은 성도들인 하나님과 함께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과 교제하시기 위해서 성막이 존재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왜 사망으로부터 구원하셨습니까(6:7)?

 

하나님께서는 역적 짓을 한 인류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들이 반역하였지만 버리지 않기로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반역한 인류를 다시 자기의 백성으로 돌이키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해서 아담의 범죄를 없었던 일로 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구원 작정을 세우셨습니다. 그것을 첫 인류와 후손들에게 알리셨습니다. 곧 구원자와 구원의 방식을 미리 알리셨습니다. 이 방식으로 인류가 자포자기하여 범죄를 가중하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반역한 인류에게 구원자를 약속하심으로 범죄로 인해 멸망으로만 가지 않도록 밝히셨습니다. 또 하나님의 백성으로 돌아오도록 할 것을 밝히셨습니다. 그리하여 절망과 좌절 가운데서 자지러져서 인류가 소실되지 않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류를 심판하여 죄의 귀결이 죽음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형집행이 아니라 집행을 유예하여 사람들로 자녀들을 낳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구원할 구원자를 보내기로 약속하셨습니다. 구원자가 여인의 씨로 나고, 아브라함의 씨로 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사탄의 계교대로 인간이 사라지고 창조가 해체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타락한 인류지만 다시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셈의 후손 중 아브라함을 구원사역의 동역자로 부르셨습니다. 구원계획이 아브라함의 가정에 국한하여 시행되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구원자가 될 것임을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구속주의 조상으로 세우심으로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세상 구원의 방식이 속죄 제사의 방식에 의해서 이루어질 것임을 실물로 교훈하셨습니다. 아담에게는 인류의 구원이 사탄을 깨트림으로 될 것을 선포하셨는데, 아브라함에게는 속죄제사의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이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그들과 언약을 맺어 자기의 백성 삼으시고 그 백성에게서 구원이 구체화될 것임을 보이기로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음으로 모든 인류가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돌아갈 것을 예시하셨습니다. 이때 이스라엘은 세계의 모든 종족을 대표하였습니다. 이렇게 인류의 대표와 언약을 맺어 언약 당사자들을 자기의 백성 삼으심으로 모든 인류가 다시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될 것임을 보이신 것입니다.

시내산 언약은 모세를 중보자로 하여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언약입니다. 율법과 할례를 언약 집행의 증표로 갖습니다. 이때 모세가 중보자로 세워졌어도 그는 참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예표(typus) 노릇을 하였습니다. 이 언약은 율법을 지켜 구원에 이를 것으로 선포했지만, 율법은 지킬 수 없었습니다. 구약의 제사는 속죄를 완전하게 이룰 수 없었습니다. 율법과 제사 제도의 설립은 율법의 완성자와 구속주를 바라게 하기 위해서 도입되었습니다. 죄의식을 증가시키고 율법 준수의 불가능을 더욱 고조시켜 그리스도를 열망하게 하기 위해서 언약체결로 율법을 세우셨습니다. 시내산 언약도 구원은 장차 오실 구속주를 믿음으로 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세워졌습니다. 그러므로 구약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모든 복들은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과 영생을 예표 함이었습니다.

 

Closing 하나님은 그리스도로 인류와 새 언약을 체결하심으로 구원협약을 완전히 구현하기로 하셨습니다. 이렇게 언약을 체결하심으로 세상을 완전히 구원하실 것을 모든 백성으로 알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로 의가 세워지고 죄과가 제거되므로 타락한 인류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됩니다. 이 언약으로 하나님이 저들의 하나님 되시므로 첫 언약 상태로 돌아갑니다. 이렇게 은혜로 세상을 구원하여 자기 백성으로 회복하시려고 하나님은 타락 이후 역사 내내 죄와 투쟁해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죄를 억제함으로 인류가 보존되어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조건은 제사였습니다. 구약에서는 주로 회중예배에 강조점을 두었습니다. 회중예배에서는 의식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예배란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길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예배를 드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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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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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재론實在論 realism 인간의 인식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재적 존재가 있다는 믿음. 실재론에는 여러 유형이 있는데, 이론의 범위 및 반실재론적 입장과 대조되는 범위에 따라서 그 유형이 달라진다. 반실재론의 한 유형으로는 관념론이 있다. 반실재론자들은 조지 버클리와 같이 “존재하는 것은 지각된 것이다”esse est percipi라고 주장할 것이다. 따라서 지각되지 않는다면 물리적 대상들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하지만 버클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는 점에서 실재론자의 한 유형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즉 버클리 는 주장하기를, 하나님은 언제나 대상들을 지각하며 현존하시기에, 인간에게 지각되지 않은 존재자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근거가 되신다). 현대 세계에서 인기 있는 반실재론의 한 형태는 다음과 같다. 세계 내 대상에 대해 참인 명제는 그 대상을 이해하기 위해 사용하는 인간의 개념에 의존한다. 따라서 세계에 대해 참인 것은 우리 인간이 세계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에 어느 정도 의존한다. 실재론(그리고 그 경쟁상대인 반실재론)은 구체적인 영역에 따라 제한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쿼크 입자와 같이 관찰 불가능한 과학상의 실체들에 대해서는 실재론자이면서, 집합이나 수(數)와 같은 실체 추상적인 논리상의 실체들에 대해서는 반실재론자일 수도 있다.

실재론 반실재론 Realism/Anti-Realism

실재론은 마음 바깥에 다양하게 있는 보편자들, 선함, 아름다움(원자와 같이) 과학에서 관측 불가능한 것들, 수, 혹은 세계 그 자체'의 존재에 대한 형이상학적 이론이다. 반실재론은 정신을 넘어서는 extramental 어떤 사물의 존재나 세계 그 자체의 존재를 부인하는 형이상학적 이론이다. 도덕적 실재론자는 선함이라는 것이 인간의 태도나 바람, 정서 또는 신념과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도덕적 반실재론자는 선함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하고, 선함이란 단순히 인간의 선호나 감정을 표현한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실재론/반실재론은 대개 주제에 따라 달라진다. 예로 과학에서 관측 불가능한 것에 대해서는 실재론자이지만, 선함에 대해서는 반 실재론자일 수 있다. 몇몇 소수의 저명한 포괄적 반실재론자들, 즉 인간의 신념과 독립적인 세계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다. 칸트의 추종자들은 인간의 개념이나 언어적 구조와 독립적인 세계를 생각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칸트의 주장들은 인식론적인 것이었기에 “반실재론자”라는 말은 칸트에게 적절하지 않다. 철학 외부에서는, 실재론과 반실재론이란 용어가 종종 부정확하게 사용된다. 정신 바깥에 무언가가 존재하느냐에 대한 형이상학적 주장이 아니라 오히려 정신 바깥에 존재하는 다양한 실재에 접근하는 것에 대한 인식론적 주장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 그러한 경우 실재론은 지나친 낙관주의, 즉 종종 소박실재론/naïve realism으로 묘사되는 고전적인 토대론자들의 인식 이론과 혼동된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실재론은 실재를 있는 그대로 (인간의 믿음과 독립적인) 물 자체로 볼 수 있는 신의 시점(인간의 개별성과 유한성을 초월하는 관점)에 도달하길 갈망한다. 그러나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은, 정신 외부의 존재에 대한 실재론의 주장은 어떤 특정한 인식 이론을 포함하지 않으며, 모든 실재론자가 소박 실재론자는 아니라는 점이다. 실제로 아주 소수의 현대 철학자들만이 비철학적 반실재론(인식론적 반실재론자들이 거부하는 인식 이론을 옹호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오히려 대부분은, 정신 외부의 실재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실재들에 우리가 접근하는 것은 어려우며, 문화적 특수성과 지각의 지평 등에 의해 조건 지어져 있음을 인정할 것이다. 신학은 실재론/반실재론 논쟁과 이해관계가 있다. 정통 기독교 신학이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초월을 주장한다고 가정할 때, 초월은 종종 형이상학적 측면에서 실재론과 관련된다. 그러나 정신 바깥에 있는 신적 실재의 구조에 접근하는 것과 관련하여 소박실재론적 설명이 반드시 수반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후기자유주의 신학은 초월적인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존재론적 주장을 계속 유지하겠지만, 하나님에 대한 인식론적 접근은 모두 공동체의 해석 구조communal constructions에 의해 매개된다고 주장한다. 또한 신학을 종교적인 실천으로 축소하여, 신학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제거하는(대개 비트겐슈타인에게서 영향을 받은) 더 급진적인 (즉, 형이상학적) 반 실재론 신학도 있다.

 

참고문헌

철학의 즐거움/Fujisawa Konoske

100인의 철학자 사전/Philip Stokes

서양철학사/박해용

인물중심의 철학사/김흥호

3분 철학/Shinya Oshiro

철학․변증학 용어사전/C. Stephen Evans

101가지 철학개념/Kelly James Clark, Richard Lints, James K. A. Sm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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