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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람의 모습인가?(로마서8:2-16)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죄 있는 사람과 똑같은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육신에 이 세상 사람들의 모든 죄를 지게 하셨습니다. 히브리서4:14을 보면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사람과 똑같은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이럼으로 해서 역사이래로 하나님의 의도를 모르는 사람들이 수없이 오해하고 공격을 했습니다. 똑같은 사람이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십니다. 그러나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물고기를 잡으려고 조그마한 여울을 막았습니다. 여울에는 물이 없어졌습니다. 물기가 점점 사라지자 한 떼의 개미가 그 여울을 가로질러서 대이동을 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막았던 여울을 터버렸습니다. 그러나 개미들은 계속 여울을 가로질러서 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직은 먼거리라고 하지만 그대로 있다가는 많은 개미들이 몰살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개미에게 빨리 피해라 그렇지 않으면 몰살당한다고 말해봤자 구원의 길은 요원합니다. 이 위험한 사실을 개미에게 알리려면 사람이 개미가 되어서야 비로소 의사전달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구원의 소식을 알려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든 죄를 다 지고 가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게 하신 것입니다. 죄를 처리하기 위해서입니다. 죄를 처리하기 위해서 아들이신 분을 사람처럼 육신을 입고 죄있는(aJmartiva"/하마르티아스) 모양으로 보내셨습니다. 그 이유는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사람이 절대적으로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러하심은 율법의 요구를 이루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율법의 요구는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레위기19:18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신명기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미가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마태복음22:35- 40 35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가복음12:28-34 28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저희의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대답 잘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32 서기관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34 예수께서 그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누가복음10:25-28 25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율법의 요구는 완전한 인간이 되어라입니다. 네 현재의 모습이 완전치 못하다. 그런 모습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율법의 요구를 들어야 하며, 그 요구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율법대로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율법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율법에 부족한 것은 전혀 없습니다.

 

로마서7:12,14 12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율법은 어느모로 보나 완벽합니다. 그러나 율법은 인간에게 적용합니다. 인간의 죄악된 본성의 육신에 적용해야 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씻어도 씻어도 씻기지 않는 인간의 죄악된 본성에 율법을 적용해야 합니다. 이것이 율법을 무력하게 한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결코 율법에 순종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죄악된 본성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정죄하시고 벌하신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육신입니다. 죄없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육신을 우리의 죄를 씌워서 벌하신 것입니다. 죄를 정하사katakrivnw/katakrînokata;/katâ(-에 대하여)krivnwkrîno(심판하다)의 합성어로 ~에 불리한 판결을 내리다, 유죄 선고하다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모습을 입게 하셔서 그에게 모두 죄를 씌우신 것입니다. 그의 백성들을 위하여.

 

 

 

 

 

And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로마서8:2-16)

 

하나님은 한분이시자 위가 셋입니다. 영이신 성부가 무한 영원불변하시고, 영이신 성자가 무한 영원불변하시며, 영이신 성령이 무한 영원불변하십니다. 그렇지만 삼위로 계신다하여 세 하나님이 아니고 한 하나님이십니다. 흔히 존재론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를 말합니다. 존재론적 삼위일체는 하나님께서 본질적으로 어떤 분이신가를 말하고 경륜적 삼위일체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피조물에 대한 관계에서 어떤 분이신가를 말합니다.

창세기1:2절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을 하나님과 함께 일하시는 모습으로 묘사했습니다.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이사야63:10절을 보면 성령을 인격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으므로

 

또한 메시야가 성령을 가리켜 자기를 보내신 것으로 말씀했습니다.

 

이사야48:16 내가 처음부터 그것을 비밀히 말하지 아니하였나니 그 말이 있을 때부터 내가 거기 있었노라 하셨느니라 이제는 주 여호와께서 나와 그 신을 보내셨느니라

이사야61:1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이사야 선지자는 성령에 대하여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사야63:9-10 9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 사랑과 그 긍휼로 그들을 구속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 10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

 

우리들은 성부하나님 성자하나님이신 예수님께 많이 치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을 성부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그 구원을 성자하나님께서 이루시며, 성령하나님께서 그 구원을 개인들에게 적용하십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으로 동일시되어 있습니다. 아나니아가 “성령을 속인” 것은 “하나님을 속인” 것이었습니다. .

사도행전5:3-4 3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성령은 구약의 여호와로 동일시되었습니다. 이사야 6장 9-10절에서 여호와가 말씀하셨다고 이사야가 말한 것을 바울은 성령이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이사야6:9-10 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사도행전28:25-27 25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26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27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

시편 95:7-11절에서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말씀으로 말하고 있는 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성령이 말씀 하신 것으로 말했습니다(히 3:7-9).

시편95:7-11 7 대저 저는 우리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 손의 양이라 너희가 오늘날 그 음성 듣기를 원하노라 8 이르시기를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 맛사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하게 말찌어다 9 그 때에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며 나를 탐지하고 나의 행사를 보았도다 10 내가 사십년을 그 세대로 인하여 근심하여 이르기를 저희는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도를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 11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히브리서3:7-9 7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8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9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성령께서는 신적 속성들을 가지고 계십니다. 영원하시고, 어디에나 계시며, 전능하시고, 전지하시며, 주권적이십니다. 성령은 아버지께로부터 오시고, 아버지와 아들에 의해 보냄을 받으셨습니다. 따라서 성령께서는 신적인 일들을 하십니다. 창조하시고, 사람을 중생케 하시며, 부활케 하시고,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신적 권세를 행사하십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마리아가 동정녀 수태를 하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사역 기간과 특별히 그의 죽음의 순간에 그를 기름 부으시고 능력 있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성경기록자로 하여금 감동케 하셨습니다.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정죄하십니다.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오도록 초청하십니다. 교회를 세우십니다. 성도들에게 오시어 내주하십니다. 세례를 베풀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얻게 하십니다. 죄를 이기게 하십니다. 의의 일을 하게 하십니다.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게 하십니다. 성도들로 하여금 예수를 주로 시인케 하십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섬기게 하십니다. 따라서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성령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은 아버지께서 작정하시고 예수님께서 이루시고, 성령께서 구원을 적용시키는 삼위하나님의 일이십니다. 누구도 할 수 없는 일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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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인간 본성에서 해방됨(로마서8:3-16)

 

3 육신으로 말미암아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5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6 육신의 생각은영의 생각은

7 육신의 생각은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9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너희가 육신에영에 있나니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10 영은 의를 인하여

 

11 살리신 이의 영이그의 영으로

12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15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8장에서는 육신과 영이 반복되고 계속되고 있습니다. 과연 육신과 영은 무엇인가? 육신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고 있는 몸인가? 몸이라면 왜 몸을 따로 말했을까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10). 이에 대하여 William Barclay는 이렇게 서술했습니다. 바울사도가 두 단어 (savrx/sârx/사르크스)과 영(pneu'ma/pneȗma/프뉴마)을 어떻게 이해하고 기록했는지를 알기 전에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savrx/sârx/사르크스)은 문자적으로는 육()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이 단어를 자신만의 방법으로 사용했습니다. 로마서2:28에서는 문자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바울사도는 육의 할례에 관하여 언급했는데 단순한 육체적 할례를 의미합니다. 또한 여러 번 반복하여 그는 카타 싸르카(kata; savrka)를 많이 사용하는데 이것은 문자 그대로는 육을 따라서라는 의미입니다. 이 귀절은 사물을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로써 바울은 아브라함이 카타 싸르카육을 따라 우리의 조상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인간적인 관점에서라는 뜻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카타 싸르카육을 따라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했습니다(1:3). 곧 예수님은 그의 족보상 인간적인 면으로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카타 싸르카의 친척이라고 말합니다(9:3). 그것은 인간적인 친척관계나 인간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유대인은 바울사도의 친척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이 카타 싸르카라는 말을 쓸 때 그것은 그가 인간적인 입장에서 사물을 본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바울사도가 육(savrx/sârx/사르크스)의 독자적인 용법이 있습니다. 그가 크리스천에 관해 말할 때 우리가 육 안에(ejn sarkiv/엔 사르키) 있었던 때에 관해 말합니다(7:5). 크리스천의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 반()하여 육을 따라 사는 사람들에 관해 언급했습니다(8:4-5). 육 안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8:8). 그는 육의 생각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 원수가 된다고 했습니다(8:6,8). 사도바울은 육을 따라 삶에 관해 언급했습니다(8:12). 그의 크리스천 친구들에게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다.”(8:9)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바울사도는 육이라는 용어를 단순히 우리가 알고 있는 살과 피라고 할 때 쓰는 육이라는 의미로만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사도는 육이라는 단어를 인간성의 모든 弱點(약점)無能(무능)無力(무력)을 의미하여 사용했습니다. 죄와 시험에 유약한 인간본성을 육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인간본성 중 죄 에게 기회와 교두보를 허락하는 부분을 육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님과 동떨어진 죄악스러운 인간본성을 육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사람을 하나님 대신에 이 세상에 애착을 갖게 하는 모든 것을 육이라고 말합니다. 육을 따라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과 사랑으로 지배되는 생활을 하는 대신에 죄 많은 인간본성의 명령과 욕망으로 지배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싸르크에 의해 지배되는 생을 사는 사람의 삶을 생각할 때 순전히 성적이고 육적인 죄악만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적인 죄악이라고 부르는 것만을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갈라디아서5:19-21에서 육체의 일을 나열했을 때 그는 육적이고 성적인 죄악을 포함하였습니다. 우상숭배, 증오, 분노, 분쟁, 이단, 시기, 살인 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있어서 육이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입니다. 육이란 죄와 약함과 무력과 좌절감의 인간본성입니다. 육이란 인간이 하나님과 그리스도 없이 있는 인간의 상태입니다.

(pneu'ma/pneȗma)이란 구약적배경이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이 단어는 루아흐(j"Wr/rūah)입니다. 루아흐는 영이란 뜻만이 아닙니다. 바람이란 뜻도 있습니다. 루아흐는 항상 능력, 즉 강한 바람의 능력 같은 능력의 개념이 있습니다. 구약에 있어서 루아흐는 항상 인간적인 것 이상의 무엇과 인간에게서 유래되지 않은 것과 인간 권한 내에 속하지 아니한 그 무엇의 개념이 있었습니다. 바울사도에게는 영이 하나님의 능력을 대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크리스천이 되기 전에는 자기 자신의 죄악스러운 인간본성의 손에 매달려 있었을 때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율법은 오직 그가 죄를 짓게끔 감동시킨 것밖에 안 되고, 그런 상태에서 더욱 더 나빠졌고 패배하고 절망한 사람이었다고 술회했습니다. 하지만 크리스천이 되었을 때는 그의 생활 속으로 하나님의 영의 불길 같은 능력이 들어왔습니다. 이럼으로 해서 그의 생애에는 자기의 능력이 아닌 다른 능력이 있고, 패배가 아니라 승리의 삶으로 돌입했다고 했습니다. 바울사도는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범죄 했다고 말합니다. 바울사도가 말하고 있는 것은 連帶意識(연대의식)입니다. 유대인의 연대의식이 거의 문자 그대로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범죄 했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류가 그 죄에 관련되어 있으며 그 결과로 사망이 왔다는 것이 연대의식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는 다른 면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는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그는 완전히 그리고 진실로 인간본성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가 인간으로 살았을 때 죄 없이 사셨습니다. 그는 죄를 물리치셨습니다. 그가 죄를 정죄하셨습니다. 그 안에서 죄는 정복당하고 패배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에게 완전한 순종과 하나님의 율법의 완전한 완성의 삶을 가져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온전한 인간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아담과 하나였던 것과 꼭 같이 이제 우리는 그와 하나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아담의 죄에 관련된 것 같이 우리는 이제 예수의 완전성에 연합되어 있습니다. 인류가 아담 안에서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 같이 그의 안에서 인류는 하나님의 법을 완성하였습니다. 인류가 아담 안에서 하나님께 치명적인 불순종을 했듯이 그 안에서는 인류는 하나님께 완전한 순종을 했습니다. 인간은 전에 아담의 죄에 가담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안의 선에 참여하였으므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바울이 말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에게는 이해하기에 아무리 어려울지라도 그에게 있어서 또 이 말을 들은 사람들에게는 이 말은 아주 수긍이 가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 때문에 크리스천에게는 더 이상 육과, 죄악스러움과, 무능한 인간 본성으로 지배되지 않는 삶의 걸길 열린 것입니다. 그 삶이란 그 능력의 영과 인간을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닌 다른 능력으로 채우시는 하나님의 영에 의해 지배되는 삶을 말합니다. 과거에 대한 형별은 사라지고 미래를 위한 힘이 약속되었습니다.

And

그리스도예수 대속으로 인한 은혜(로마서8:1-11)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2 이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기 때문이다 3 율법이 육체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었던 그것을 하나님께서 하셨으니, 곧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체의 모양으로 보내 속죄제물로 삼으셔서, 그 육체 안에서 죄를 심판하신 것이다. 4 이는 육체를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성취되게 하려는 것이다. 5 육체를 따라 사는 자는 육체의 일을 생각하나, 성령을 따라 사는 자는 성령의 일을 생각한다. 6 육체의 생각은 사망이나, 성령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다. 7 육체의 생각은 하나님께 원수가 되니, 그것은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지 않을 뿐 아니라 복종할 수도 없다. 8 육체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9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너희 안에 계시면 너희는육체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10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임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산 것이다.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이 너희 안에 계시면, 그리스도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분께서 너희 안에 계시는 그분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이다.

 

바울사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심판이 없다고 했습니다. 2절로 넘어가면서 왜냐하면(ga;r)이라는 접속사를 사용합니다. 왜 정죄함이 없느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한 가지 법으로 다른 법이 폐지된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었으며,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이라고 칭했습니다. 이것은 의미가 깊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생활 입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살게 됩니다.

 

로마서6:8,10,13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10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이것의 끝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생명의 창조자인 성령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 생명을 누린다는 것입니다(Lenski). 생명이 있다는 것은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생명의 원리가 사망의 규칙을 극복하고 참다운 생명을 꽃피우기 위해서는 성령의 간섭이 필요합니다. 우리를 구속하는 법은 있지만 우리가 그 법의 구속력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은 그 본질상 모든 것에 생명을 부여하십니다. 또한 육체적이고 영적인 생명을 피조물에게 부여하십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은 하나님의 자녀의 마음과 생활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강력하고 효과적인 활동입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였다는 것은 죄와 사망의 법(7:23,25)의 정반대입니다. 죄의 법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과 꼭 같이 생명의 성령의 법이나 또는 지배하는 요소는 생명에 이르게 합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은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즉 그의 대속의 공로에 근거하고 그와 연합하는 생동하는 힘에 의하여 이 일을 이룹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88항을 보면

 

그리스도께서는 값을 치루고 구속하신 모든 사람들에게 바로 그 구속을 확실하고도 효과 있게 적용하시고 전달해 주신다. 그들을 위하여 대언하시고, 말씀으로 그리고 말씀을 통해서 그들에게 구원의 비밀들을 계시하신다. 그의 성령에 의하여 효과적으로 그들을 설복하여 믿고 순종케 하며 그들의 심령을 그의 말씀과 성령으로 주관하신다. 그리고 그들의 모든 원수들을 그의 전능하신 능력과 지혜로 물리치시되 그의 기이하고 측량할 수 없는 섭리에 가장 부합되는 방법으로 하신다.

 

고 했습니다.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삼위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 따라 행하셨습니다. 즉 구약의 예언을 모두 성취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셨습니다.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 시키신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기 위하여 자신을 화목제물로 단번에 드림으로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셨습니다. 즉 우리를 값 주고 사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십자가 사역으로 속죄를 성취하셨습니다. 또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라는 승리의 외침을 통해서 주님께서 그렇게 다 이루셨음을 나타내셨습니다.

And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한 은혜(로마서8:1)

 

베드로후서2:1거짓 선생들 곧 자기들을 사신(ajgoravsanta/ 아고라산타) 주를(despovthn/데스포텐)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슷로 취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해도 구원을 잃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인터넷에 떠도는 말들도 얼마든지 성도가 구원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말합니다. 한 번 그리스도예수님에 의해서 구속함을 받았던 자들이라 할지라도 멸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은 자들의 구원을 전혀 틀림없이 가져다주거나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의 말대로라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본질적으로 구원의 효력을 갖지 못함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그리스도를 믿을 수가 없게 됩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말하려는 의도는 그리스도의 구세주 되심의 역할을 여기에서 그리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통치의 창조주가 되심을 언급한 것입니다. 거짓 선생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소유하신 그들의 창조의 주와 통치의 주가 되심을 부인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은 전 인류에게 제각기 동시적임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위해 죽으신 자들이 멸망할 수 있음을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아도 충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십자가 사역의 범위는 이따금씩 보편적 속성을 나타내는 용어들이 속죄와 관련해서 시용되지만 이 용어들이 보편속죄의 교리를 확립해 주는 것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친히 자신을 속전으로 주시사 우리를 모든 죄악에서 확실하게 건져내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속죄는 그의 백성들에게 절대적으로 효력 있는 대속입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의 믿음을 할 수만 있으면 사탄이 흔들려고 합니다. 이렇게 흔들고 저렇게 흔들려고 합니다. 즉 세상 사람들을 통해서 흔듭니다. 교회도 아닌 교회같은 단체를 통해서 흔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교회내부에서 신자들을 통해서 흔들려고 합니다. 그래서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 합니다. 그들이 말할 때, ! 그럴 수도 있을거야.라고 긍정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구원은 잃어지지 않는 구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한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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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심판을 받지 않는다(로마서8:1)

 

결코 없나니 그러므로 이제 정죄함이 자들에게는 안에 있는 그리스도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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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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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tavkr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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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없나니

그러므로

이제

정죄함이

자들

에게는

안에

있는

그리스도

예수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말은 종말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사실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하는 사림이 있을까요? 어떤 종교가 이렇게 말하며,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이렇게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있는 사람들은 결코 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주장을 사도바울이 여러 곳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1:16-17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3:21-24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5:1,2,6-8, 15-21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16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17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찌니라

창세기5장을 보면 당시 사람의 평균 수명이 930세였습니다. 930년이라는 말은 1085년으로 고려의 선종 시대입니다. 10854월에 義天商船(상선)을 타고 송나라에 갔었습니다. 따라서 930세를 살았다면 고려 선종을 거쳐 고려가 멸망하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조선의 개국을 보았을 것입니다. 조선이 멸망하고 일제의 잔인함도 보았을 것이며, 해방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두루 세상을 살았을 것입니다. 므두셀라는 969세까지 살았으니까 훨씬 전의 사람입니다. 그들의 수명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1000살에 거의 육박했으니 말입니다. 요즘 100살을 살면 장수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장수한 나이의 10배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 세상에 현재 없습니다. 즉 아무리 장수해도 죽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사도가 말하기를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인간이 괜찮아서일까요? 사람이 잘나서일까요? 무수한 은하계 가운데 겨우 지구의 위성인 달에 대해서도 완전히 알지 못하는 유한한 인간들이 정말 잘 났을까요?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And

율법으로는 안 되는 우리의 구원(로마서7:1-25)

 

인터넷설교신문에서 따온 이야기입니다. 젊은 부부가 귀농을 했습니다. 농사를 지어 그것을 가공하여 부가가치를 높이기로 했습니다. 그들이 선택한 작물은 참깨였습니다. 신통치는 않았지만 참깨를 어느 정도 수확하였습니다. 그들은 그 참깨로 100% 진짜 참기름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진짜 참기름을 만들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부부는 그 참기름이 잘 팔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얼마 후에 손님이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이유인즉슨, 그 참기름이 진짜 참기름이라는 걸 믿지만 그 참기름 맛이 입맛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가짜 참기름 맛에 길들여진 입맛 탓에 정작 진짜 참기름이 맛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참깨농사를 직접 지어 진짜 참기름을 만들어 팔겠다는 부부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착향제와 조미료를 가미한 강력한 가짜 참기름의 강력한 맛은 본래 참기름의 맛을 잠식하였습니다. 사람들의 입맛이 가짜에 중독된 것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신앙생활 한다는 것이 정말 쉽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의 장애물과 훼방이 수없이 앞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못된 새가 와서 깃들이거나 잘못된 누룩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신앙을 잘못된 방향으로 발효시키고 잘못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율법에 종속되어 있지 않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4)는 사실을 바울은 1절 하반절에서 증명합니다. 율법은 어떤 사람에게 오직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만 법적 구속력을 미친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혼인법(2-3)을 예로 들어 이것을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결론을 끌어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음은 세례와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現在化(현재화)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현재화된 것입니다. 로마서6:3-6을 보면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고 고린도전서10:16-17을 보면

16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17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

 

라고 했습니다. 즉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의 죽음으로 되었습니다. 이로써 그들은 율법에 대해서는 죽어서 율법의 효력 영역으로부터 벗어난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힘으로 삶을 규정하는 한 율법은 계명에 복종하게 하는 대신에 바로 정욕과 범죄에로 誤導(오도)하며 정욕과 범죄는 죄와 죽음으로 인도합니다(7-11). 율법이 그 영향력을 상실한 곳에서 하나님의 영이 작용하셔서 속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게 합니다.

 

율법과 죄의 관계는 바울사도가 3:20, 5:13, 7:5에서 서술했습니다. 그러나 7-13절에서 상세하게 기술합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선한계명입니다(10,12). 그러나 율법이 인간에게 긋는 경계선은 인간에게 矛盾(모순)犯法(범법)觸發(촉발)시킵니다. 즉 죄는 하나님께 반항하는 숨은 적대감으로서 알려지지 아니한 채 사람 속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계명을 통하여 깨어나 작용을 하게 됩니다(8-9). 율법과 그 작용을 왜곡시켜서 죽음을 가져오는 연장으로 바꾸어버립니다(10-11). 그러나 바로 이 점에서 율법은 하나님이 지정해 주신 목표에 도달하는데 그것은 죄의 치명적 성격을 백일하에 드러냅니다(13). 바울은 이것을 탐내지 말라는 계명을 들어서 확실하게 설명합니다(7-8). 이렇게 함에 있어서 바울은 일인칭 단수 어법의 형식으로써 특별히 자기 자신의 경험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아담의 역사를 모형으로 하여 각 사람이 율법과 미주치는 것을 서술합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이 율법과 이렇게 마주침은 주관적으로 전적으로 달리 체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바울은 빌립보서3:3-9에서 자기 자신의 실례를 들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7:7-13절이 율법과 결부된 인간의 역사를 묘사했다면, 14-20절과 21-24절은 율법 아래 있는 인간의 삶을 서술합니다. 14절은 근본문제를 지적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의 실제적 의도를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신령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율법은 하나님께 근원을 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율법 아래 있는 인간, 곧 화자인 는 이것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육적이어서 죄에 팔렸기 때문입니다. 15-17절과 18-20절은 하나의 병행적 사상구조에서 이 분열의 결과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율법이 명하는 바를 하고자 하며, 선과 구원과 생명을 이루고자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自我(자아)는 실제로는 하나님께 맞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맞추어져 있고, 죄에 지배를 받기 때문에 그 자아는 오직 파멸과 죽음을 일으키면서도 실제로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실정은 단지 개개의 過誤(과오)에서 그리고 계명을 지킬 수 없는 무능력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경건한 사람이 겉모양으로 율법을 성취하는 것처럼 보이는 곳에서도 역시 그 사람은 그의 목표에서 빗나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에게 사로잡힌 그의 자아는 하나님께 이르는 길을 그에게 왜곡시키고 그를 죄의 꼭두각시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21-23절은 구원받지 못한 인간의 분열, 즉 그가 그 아래 서 있는 불가피한 율법(21)을 다시 한 번 개진합니다. 속사람 즉 그가 본래적으로 그러해야만 할 그 인간과 그의 마음, 즉 그의 속생각과 감정은 하나님의 율법에 기꺼이 찬동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의 지체 즉 구체적으로 영위되는 삶의 실존에서는, 죄가 지배하고 律法惡用합니다. 그에게는 죽음에 떨어진 이 현존(24)으로부터 구출을 갈구하는 부르짖음이 있을 따름입니다. 25절 상반절은 한 쪽에 이 구조 절규와 다른 한 쪽에 구원에 대한 간략한 감사를 대칭시킵니다. 이 감사는 8장에서 근거가 제시됩니다. 25절 하반절은 다시 한 번 21-23절을 요약합니다. 그렇지만 역점은 약간 다른 곳에 놓습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면서도 말입니다. 7-25절의 전체 단락에서 바울은 구원받지 못한 인간의 목소리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그런데 이 구원받지 못한 인간은 그리스도를 만나고 하나님의 영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그의 상황을 명백하게 인식하며 서술할 수 있습니다. 이 단락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로서도 여전히 죄인인 그리스도인의 목소리를 듣는다고 생각하는 주석가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8장에서 성령 안에서 사는 삶에 관하여 말하는 바에 비추어 볼 때에 이런 주석가들의 주장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주장에서 옳은 점은 그리스도인도 역시 그리스도와 맺은 결속으로부터 떨어져 나와서 다시금 죄의 지배 아래 빠지는 위협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독일성서공회해설성경).

 

법은 사람을 어느 정도 통제는 할 수 있어도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법을 지킨다는 것은 자발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법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법은 그 많은 법을 지켜야만 정의로운 자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많은 법을 지킬 자는 한 명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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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고한 인간(로마서7:18-25)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아마도 이 말은 생각 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할 법한 말입니다. 정말! 내 자신이 그래? 그것밖에 안 돼?라는 말입니다. 곤고한 사람이라는 말은 비참한 사람입니다. 육신적인 생활상에서 비참한 사람이 아니라 영적인 면에서 비참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비참한가?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입니다. 여기서의 죽음이란 이 세상에서의 숨끊어짐만의 죽음이 아닙니다. 영원한 죽음이란 이세상+다음세상에서의 죽음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믿든지, 믿지 않든지 이 죽음은 필연코 어떤 사람들에게 적용이 됩니다. 그 사람들이 자신의 종교를 가졌다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다 하면 홀연히 임합니다. 필연코 임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를 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미래의 세상이 없을 것 같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우연히 Big-Bang에 의해서 저절로 생겨난 것 같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면 가끔씩 자신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신다면 믿겠는데 그렇지 않으시고 다만 성경으로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니까 전혀 믿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필연코 그 말씀들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신들의 비참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신의 곤고함을 인지해야 합니다. 바울사도가 Roma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를 쓸때는 57년이나 58년도로 추정합니다. 바울사도가 그의 제3차 전도여행을 끝마칠 때쯤입니다. 바울사도가 예수그리스도를 만난 직후가 아닙니다. 점점 원숙해진 때입니다. 순교의 날이 그렇게 많은 날이 남지 않은 때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만난 이후로 줄곧 여생을 주님과 함께 했었던 사도입니다. 그가 ‘오호라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고 탄식했습니다. 이 상황을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대입시키면 정말 심각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비참한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알지 못하고 능력이 없는 대상들에게 우리들을 맡겨야 할까요? 절대로 그럴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영원히 멸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사람이라고 하면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원히 멸망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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