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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고난과 장래의 영광(로마서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RomaNero황제로부터 시작된 박해는 향후 250년간 엄청난 성도들을 살해하거나 괴롭혔습니다. 갖은 방법으로 고문하고 이유없이 살해했습니다. Roma내에 전염병이 돈다든지, 지진이 일어난다든지, 어떤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모두 그리스도인들 때문이라고 죄를 뒤집어씌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널리널리 퍼져나갔습니다. Eusebius의 교회사를 보면 Tiberius는 빌라도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보고를 받았습니다. 고대 국가 통치자들의 관습에 따르면 어떤 일이든 기이한 일은 빠짐없이 황제에게 보고하게 되어있었습니다. 따라서 유대총독이었던 본디오 빌라도는 주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일과 그 후에 교회에서 일어났던 자세한 상황을 Tiberius황제에게 빠짐없이 보고했습니다. 빌라도는 이 보고서에서 그리스도에 관한 여러 기적들을 자신이 조사하여 확인하였으며, 또 그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였으므로 대다수의 백성들이 그를 하나님으로 믿고 있다고 보고했습니다. Tiberius는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까하고 일단 원로원에 맡겼습니다. 그러나 원로원은 표면적으로는 자기들이 그 문제를 먼저 심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로원의 투표와 포고에 의하지 않고는 어떤 사람도 신으로 추대될 수 없다는 고대 로마법에 따라 이 제안을 거부했다고 합니다. 사실 Roma인 중에서 그리스도 같은 인물이 나와도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벼락 천불나는 기적을 베풀면서 황제와 원로원을 위협하면 몰라도 속국인 유대인을 신으로 삼는다는 것은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는 문제였습니다. 그리하여 Roma원로원은 예수님을 배격하였습니다. 그러나 Tiberius황제는 예수그리스도의 교리를 대적하는 비합리적인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고 Tertulliān이 증언했습니다. Tertulliān은 로마법을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여러 면에서 탁월했습니다. 특히 로마의 저명인사들에게 잘 알려졌던 사람입니다. 따라서 Tiberius가 다스리던 시기에 그리스도의 이름은 전 세계에 퍼져나갔습니다. 팔레스틴으로부터 전파된 교리를 접한 Tiberius는 그 교리를 흡족히 여겼으므로 어떻게 할까하고 원로원과 의논했습니다. 그러나 원로원은 자기들이 그 법안을 제안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것을 거부해버렸습니다. 그러나 Tiberius는 그리스도인을 비난하는 사람을 죽이겠다고 제국의 모든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이처럼 거룩한 섭리로 인해 그의 마음에 복음이 주입되었기 때문에 복음은 처음부터 그다지 제한을 받지 않고 전 세계로 전파될 수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끊임없이 환난과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의 편지를 받는 교회도 그러한 환란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기꺼이 고난을 당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는 모든 교인 개개인이 스스로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받는 고난은 개개의 신자에게 있어서 매우 다양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체험이 꼭 초대교회의 순교자들이나 중세시대의 순교자들과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 있어서는 어떤 신자가 주일에 불필요한 일을 하지 않겠다고 해서 그의 직장을 잃는 수도 있습니다. 또는 부정한 사업상의 거래에 동참하도록 유혹을 받았을 때 안 된다고 말하면 직장에서 쫓겨납니다. 다에시(IS)의 치하에서는 지금도 순교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는 예가 많습니다. 이것이 고난입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그리스도와 더불어 우리가 새 이름(3:12)과 금 면류관( 4:4, 14:14)을 유업으로 얻는다고 했습니다. 그와 함께 우리는 왕 노릇할 것입니다(20:4). 우리가 장차 유업으로 얻을 이 미래의 복은 우리의 영혼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몸에도 관계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고난은 장차의 영광과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고난을 달게 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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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고난과 장래의 영광(로마서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사람들의 마음은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본인만 자신의 마음을 압니다. 그것도 제한적으로만 압니다. 따라서 타인이 내 마음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이중인격자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예를 들면 하나님을 내심(內心)으로 섬기지 않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信賴)해야 하는데 그렇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을 전심(全心)으로 섬겨야 하는데 자기들 마음대로입니다. 신앙생활을 하고 싶으면 하고, 하지 않고 싶으면 바로 그만 둡니다. 그러면서도 외적으로는 누구못지 않게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철저하게 위장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고난이 오면 바로 변해버립니다.

그러하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 수 있습니까? 무엇으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고난 당 할 때입니다. 그리스도를 인해서 고난 당 할 때 성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16:24)고 하셨습니다. 고난 없는 신앙생활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무엇을 느낍니까? 그리스도예수님께서 당한 고통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10:22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요한복음15:1821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20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21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니라

사도행전9:4-5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고린도후서1:5,10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갈라디아서 6: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빌립보서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베드로전서4:1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사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무엇도 할 수 없습니다. 어떤 것도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덧붙일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를 위해 기꺼이 고난당함으로 우리는 구주에게 가까이 나아가게 됩니다. 따라서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사람들이나 신약시대의 성도들이나 모든 시대의 성도들이 극히 심한 고난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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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고난과 장래의 영광(로마서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사도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면 하나님의 후사라 했습니다. 후사klhronovmo"/kllēronômos란 상속자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상속자라는 뜻입니다. 어떤 후사입니까? 유명한 왕이나 권력자가 준 상속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sugklhronovmo"/suingkllēronômos 입니다. 함께한 후사라는 것은 공동상속자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인데 그리스도와 공동상속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아야 할 상속자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와 공동후사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유산을 받았다면, 반드시 그에게 유산을 증여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이 언약자가 누구인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 언약자는 하나님이시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주된 후사라는 것입니다. 이 언약자께서 우리를 그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통상 유산을 받음에 있어서 많은 것이 유언자의 성격에 따라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유언자가 누구인가를 먼저 파악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상속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나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이렇게 유언자에 대해서 질문합니다. 유언자는 어떤 사람인가? 그 유언자는 언제 죽었는가? 그 유언자는 부자였는가? 아니면 가난했는가? 그 유언자는 괜찮은 사람이었는가? 아니면 좋지 않은 사람이었는가? 왜 이렇게 질문합니까? 나에게 어떤 유산이 남겨졌는가를 알아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빚만 잔뜩 상속한 경우라면 유산을 받은 사람이 힘들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 세상에서의 유언자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유언을 받는 자도 죽습니다. 따라서 세상적인 유산은 심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가지고 있는 것이 다 소모되면 상속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말하는 언약자는 영원에서 영원까지의 언약자이십니다. 따라서 그의 자녀 된 우리의 유업은 부족하지 않습니다. 절대로 줄어들지도 않는 유업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부유하신 분입니다. 모든 금과 은이 그의 것이고(2:8), 삼림의 짐승들과 모든 언덕에서 자라고 있는 생축이 다 그의 것입니다(50:10). 그의 부요하심은 측량할 수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매우 관대하십니다. 그가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모든 것을 기꺼이 우리에게 주시기도 하십니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은 유언장의 약정에 대해 만족하지 않습니다. 유언장에 적혀있는 자신의 분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매우 공명정대하십니다. 철저하게 규약에 공정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후사(유업)를 매우 흡족하게 생각합니다.

 

And

성령의 특수사역/심판하심(로마서8:12-17)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여러 번 크게 심판하셨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을 때, 인간과 사탄을 함께 심판했습니다. 인간은 이로써 죽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탄은 여인의 후손이 오셔서 아주 영원히 멸망시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후로 인간은 계속 죄가 넘쳐나서 노아시대 때 온 세상을 물로 심판하셨습니다. 온 세상에 노아의 가족 여덟 명만 남기고 물로 세상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my-way를 외쳤습니다. 바벨탑을 쌓으면서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천체를 관찰하고 일월성신을 섬기며 얼마든지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권자를 세우고 하나님 배반의 공사를 착수했습니다. 착착 계획대로 탑을 세웠습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때가지 그 일은 계속되었습니다. 강력한 주권자로 인해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도 잘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언어를 혼잡케 하시는 심판으로 말미암아 그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얼마 지나서 다시 사람들은 패괴와 패역 쪽으로 기울어졌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아드마와 스보임이 그런 성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저히 눈뜨고 볼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유황과 불을 비 같이 퍼부으셨습니다.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습니다. 그 후에는 여러 곳에서 부분적인 심판의 경고를 부여하시고 계십니다. 4년경에 유대 땅 베들레헴에 다윗의 후손이자 여인의 후손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사탄을 심판하셨습니다. 사탄의 나라를 뿌리 채 드러내셨습니다.

죄악으로 온통 범벅이 된 인간이 성령에 의해 책망 받는 것 중에 심판이 있습니다. 예수님에 의하면 이 세상의 왕이 심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언급되는 심판은 미래의 종말론적 대 심판이 아닙니다. 십자가 위에서 사탄의 역사적인 패배입니다. 사탄의 칭호들이 아무리 과장되어 있고, 그의 사악한 계획이 아무리 지독하다 하더라도 사탄의 권세는 이미 무너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귀신의 두목인 사탄의 나라를 완전히 파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사역에 대해 말씀하실 때 십자가가 아직 미래의 일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이미 이루어진 사실로 받아들이셨습니다(말씀하셨다). 성령님은 사탄의 심판에 관한 사실에 대해서 뿐 아니라 그들이 계속 사탄의 권세 아래 있을 것을 선택할 경우 그들이 처할 운명에 대해서도 사람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이 책망을 듣지 않는 사람은 영원한 죽음을 죽습니다. 확실히. 그가 누구이건 간에.

And

성령의 특수사역/의인되게 하심(로마서8:12-17)

 

고린도후서5:21을 보면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 못하신 자(예수)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셨다. 왜 그랬을까? 우리로 하여금 저(예수)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다. 사도 바울은 이 구절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칭의를 위하여 하신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께서 죄가 없다고 여기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주님으로 죄를 삼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에 죄인 취급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죄가 있었다면 죄인들을 대신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없었기 때문에 주님에게 죄를 전가시키신 것입니다. 율법시대에 흠 없는 희생이 요구되었던 것은 시사 하는 바가 큽니다. 항상 죄를 담당하실 자는 죄가 없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흠 없는 짐승을 죄 많은 인간을 대신하여 죽인 것입니다.

히브리서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 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성령이 인간에게 책망하시는 것이 있는데 의에 대한 것입니다. 의롭지 못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께 인간을 화목 시키기 위해서 늘 염려하시며 사람들에게 길을 열어놓고 활동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에 내가 아버지께로 간다고 하셨습니다. 이후에는 보혜사이신 성령님께서 구원의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승천과 성령의 책망하시는 message는 뚜렷하게 연결됩니다. “선을 행하는 것”, “용인된 표준에 일치하는 것등으로 표현되는 의에 대한 세속적 관점과는 대조적으로 의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은 그리스도입니다. 의는 사람들 가운데서 티 없이 사셨던 그리스도 안에 구현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죄의 유전이나 세상에 물든 오욕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비스런 구원의 섭리 가운데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로 가시는 것이 의에 대한 성령의 책망하시는 사역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것으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에 자신의 인을 치셨습니다. 이것을 확증하시면서 성령께서는 두 가지 일을 하러 오셨습니다. 한편으로는 그는 인간의 의를 죽은 것으로 폭로하시면서 다른 한편으로 참된 의가 발견될 수 있는 곳을 나타내 보이십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의로써 세상을 책망하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그것을 누릴 수 있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이라면 성령의 책망을 들어야 합니다.

 

And

령의 특수사역/죄를 판결하심(로마서8:12-17)

 

노아시대 때 사람들은 홍수로 인해서 세상이 멸망할 것이라고 외쳤지만 듣지 않았습니다. 노아가 120년간이나 방주를 만들면서 외쳤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홍수의 기미가 손끝만큼도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심판이라는 말 홍수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니므롯 시대 때 사람들은 탑을 세우지 말라는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홍수심판의 교훈을 조상들로부터 많이 들었을 텐데도 전혀 듣지 않았습니다. my-way를 연거푸 외쳤습니다. 그들은 지엄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괜찮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습니다. 그들에게 내린 심판은 언어혼잡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이 죄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는 것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이 신비하고 그의 독특한 사역이 세상으로부터 죄에 대한 모든 핑계거리를 제거해 버렸기 때문에(요15:22,24) 그들은 그가 떠나시면 그들의 양심이 누그러질 것으로 기대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진실은 정반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떠나면 성령님이 오셔서 인간들에게 가장 커다란 죄 즉 그리스도를 거부한 죄에 대해 책망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빛을 거부하고 자신의 죄가 드러나는 것을 피하려고 하여도 도망칠 길이 전혀 없습니다. 웨스코트(Wescott)는 “ 따라서 기록된 말씀과 선포된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성령은 인자에 대한 불신의 사실로부터 출발하셔서 그것을 통하여 죄가 무엇인지를 폭로하신다. 이렇게 하여 홀로 서 있는 인간의 상태가 드러나며 그는 변명의 여지가 없어진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복음이 방송을 통해서 문서를 통해서 사람을 통해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함에도 믿지 않는 것은 그 마음이 강퍅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성령께서는 죄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십니다. 이 책망으로 인하여 돌이키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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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특수사역/죄를 깨닫게 하심(로마서8:12-17)

 

사람들에게 당신이 죄인이라고 하면 두 가지의 반응이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당연하게 수긍합니다. “! 저는 죄인입니다.” 하지만 비그리스도인들은 명예훼손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은 절대로 범법자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죄를 한번도 짓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질문자가 할말이 없습니다. 죄인이 아니라고 하는데 어떻게 그러한 사람에게 당신이 죄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절대로 죄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대한 성령의 사역은 죄를 깨닫게 하시는 일입니다. 세상사람이라 함은 사탄에게 속해 있는 사람입니다(고후4:4). 성령은 인간의 양심 (20:27)을 통해서 성경, 경험과 같은 수단을 통하여 계시에 의해 죄인이 눈을 뜨게 하여 그의 죄와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상태를 깨닫도록 힘쓰십니다. 만일 인간이 이러한 성령의 깨닫게 하심을 거부한다면 그들의 양심이 화인을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디모데전서4:2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로마서서1:28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상실한’/ajdovkimon/adôkimon고전헬라어 문헌에서 검증을 받지 못한, 존경을 받지 못한뜻으로 사용했습니다. 따라서 성령의 자각케하심을 거부하면 하늘의 소리를 더 이상 듣지 못할 위험에 처합니다. 노아시대의 비극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사람들은 고의적인 죄악으로 인하여 완전히 타락하고 타락하였습니다(6:5,6:3). 이같은 엄숙한 경고는 완악한 사람이 더이상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지점이 있다는 것을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혜로우신 권고가 지속적이고 사랑으로 인한 것이긴 하지만, 이러한 것이 결국에는 멈추고 인간은 그의 죄악된 반항이 낳은 필연적인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다. 성령께서 불신자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해 주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최후의 수단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자신의 영감에 의해 기록된 이 무기는 바울에 의해 성령의 검이라고 묘사되었습니다. 이 양날 선 검으로서 성령은 인간의 영혼과 양심의 내적 근원까지 면밀히 조사하십니다.

이 무기의 효능은 오순절의 베드로의 설교로서 증명됩니다. 그의 말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받은 사람들이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고소하는 이들을 책망하기 위하여 성경말씀을 사용할 때도 같은 반응입니다. 누가는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희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7:54)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죄를 깨닫게 하시는 두드러진 가르침은 만찬 때 하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는 보혜사 성령에 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kosmos) 책망하시리라”(16:8). 우리는 성령이 책망하시는 멧세지의 내용을 살펴볼 때 예수님의 말씀의 중요성을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성령께서 인간에게 지식적 논쟁으로써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양심에 의해 깨닫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죄 없으심을 주장하실 때에도 같은 말씀을 사용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8:46). 성령의 사역은 다양합니다. 그 중에도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자각하게 하여 그리스도예수를 믿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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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특수 사역(로마서8:12-17)

 

성경은 주로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성령의 사역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세상에 대해서도 성령의 사역이 있음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맥락 속에서 세상이란 말이 여러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유의해야 합니다.

oijkoumevnh/oikoumêne : 사람이 사는 세상(21:26).

kovsmo"/kôsmos :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세상(3:16) 즉 인류라는 의미이거나 사탄에 의해 조직화되고 통제되는 악한 인류라는 의미의 조직화된 실체로서의 세상.

gh'/gȇ : 인류 또는 땅.

이 지구상에 있는 세상 즉 물질적 창조의 일부라는 의미에서의 세상이 있습니다. 지구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 즉 일반적인 사람들을 세상이라고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세상의 임금이라 일컬어지는 사탄의 지배를 당하고 있는,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사람을 포함하는 사물의 조직 또는 제도를 묘사할 때도 세상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천지창조의 역사에 삼위의 하나님이 관계하신다는 사실은 히브리어 복수 명사 엘로힘즉 하나님과 일인칭 복수 명사로 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1: 26)에 암시되어 있습니다. 이러함은 성경 전체를 통하여 두드러지게 나타나있습니다. 창조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1:2). 영감을 받은 성서기자들은 이 극적인 구절들에서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성령께서 어머니 같은 관심과 목적 있는 사랑으로 태고의 혼돈을 덮어서그것을 질서의 우주로 변형시키셨다는 것을 암시했습니다. 성령은 그 위에 사람이 살고 언젠가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실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시편기자는 이 땅의 감각적 생명에 관하여, 성령이 생명을 주시는 분일 뿐 아니라 생명을 유지케 하시는 분임을 암시했습니다(104:29-30).

따라서 성령님은 그 속에 놀랍게 편재하고 있는 이 물질계의 창조에만 관

계하신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창조에도 관계하셨습니다. 성령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그 육신만 만드신 것이 아니라 이성도 만드셨으며 동시에 불멸의 영혼도 함께 만드셨습니다. 엘리후에 의하면, “사람의 속에는 심령이 있고 전능자의 기운이 사람에게 총명을 주시나니”(32:8)라고 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항상 우리 안에 내주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지배하시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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