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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복을 입지 않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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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판받는 불신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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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대인들은 버리고, 이방인들은 머리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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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유대인들
  5. 2010.06.22
    직분이 아니라 믿는 사람이 구원
  6. 2010.06.21
    성전의 주인을 몰라본 종들
  7. 2010.06.20
    믿음과 기도
  8. 2010.06.19
    저주 받은 무화과나무

예복을 입지 않은 자(마태복음22:11-14)

서양에서는 잔치 집에 가려면 반드시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옛날에 왕들은 성대한 연회를 베풀 때 성대하게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초청한 사람들이 다 모였을 즈음 주인이 연회장에 모인 손님들을 보러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잔치자리에 왕이 모습을 나타내기 전에 손님들이 다 모여야 합니다. 각각 자기 자리를 잡고 앉아 있어야 했습니다. 왕이 잔치에 나와서 잔치에 합당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보고 놀란 것은 당연합니다.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은 아무리 가난하더라도 예복을 입고 오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입니다. 잔치가 벌어지는 곳에서 왕의 잔치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위해 옷을 빌려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왕이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보고 놀란 것은 의외의 일이 아닙니다. 예복을 입지 않은 것은 왕을 무시하였던 처사이기 때문입니다. 거지들도 왕의 잔치에 참여할 때는 귀족들이 입는 존귀한 예복을 입었습니다. 근동에서는 예복을 준비해 놓은 커다란 의상실을 갖고 있는 것이 부의 상징이었습니다(욥27:16). 옷들은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특히 다른 사람이 입고 있던 옷을 받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존경의 표시였습니다. 왕들은 자신들이 입고 있던 옷을 줌으로써 자신 이 매우 관대하고 아량이 있는 사람임을 드러냈습니다(창45:22, 삼상18:4, 에6:8).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왜 그 잔치자리에 불려갔다가 쫓겨날 뿐만 아니라 바깥 어두운 곳에 내어던져졌는가? 이 사람은 ‘왜 예복을 입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변명할 말이 없었습니다. 왕이 모두 준비해놓은 옷을 입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10절의 ‘악한 자’보다 너 나쁜 상태로 되어버렸습니다. 7절의 ‘진멸 당하고 불사름 당한 동네’와 같게 되었습니다. 왕의 초청을 거절한 사람과 같은 처지가 된 것입니다. 이 예복은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왕의 아들을 위한 혼인잔치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은 것인데 곧 믿음입니다. 복음을 믿은 믿음입니다.

주님은 잘못된 예루살렘의 실세들을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지만 택함을 받은 자는 적다’. 이 세상의 현재 인구가 약63억 명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모두 복음은 들었습니다. 선교, 신문, 방송을 통해서 전 세계는 복음을 들었습니다. 들을 수 있습니다. 복음은 어떤 방법으로든 많은 사람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잡하고 듣기는 하지만, 복음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우리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상황입니다. 복음을 듣는 자들에 비해 너무나 소수만 주님의 나라에 갑니다. 우리 역시 ‘악한 자’(10절)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택하심을 입었습니다. 그리하여 의의 옷을 입어(욥29:14) 죄를 용서함 받았습니다. 옛 생활도 청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로 옷 입었습니다(갈3:27). 오늘 날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복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은 악한 자들이었는데 그리스도예수의 은혜로 예복을 입은 것입니다. 우리는 자격이 없는 자들인데 자격증을 주님이 주셨기 때문입니다.

And

심판받는 불신자들(마태복음22:1-10)

예수님은 이제 그들의 불신과 아울러 이스라엘 전체의 불신을 왕의 초청의 비유를 들어서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은 마치 자신의 아들을 위한 혼인잔치를 베푼 어떤 왕과 같다고 했습니다. 왕은 아들을 위해서 혼인잔치를 준비했습니다. 이 혼인잔치는 왕이 베풀었습니다. 왕은 그의 종들로 하여금 잔치에 오도록 초청장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 그 잔치에 가기를 싫어했습니다. 그러나 왕은 기분 나빠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찬을 준비했습니다. 이번에는 다른 종들을 보냈습니다. 잔치를 위해서 소를 잡았습니다. 살진 짐승들을 잡았습니다. 잔치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다 갖추었습니다. 그리고 혼인잔치에 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밭으로, 어떤 사람들은 장사하러 나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집에 있었던 어떤 사람들은 왕이 보낸 종들을 잡아 능욕했습니다. 그리고 죽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은 크게 대노했습니다. 그리하여 군대를 보냈습니다. 자기종들을 죽인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살라버렸습니다. 왕은 아들을 위한 혼인잔치를 준비했으나 청한 사람들이 자격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잔치에 청하라고 했습니다. 이에 종들이 나가서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데려오니 잔치자리가 가득 찼습니다.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왜 왕이 잔치에 오지 않는다고 사람을 죽입니까? 오기 싫으면 그만인데 왜 억지로라도 끌고 오라고 합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이야기입니다.

왕이 나온 것은 이스라엘전체를 놓고서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예수그리스도를 위해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면 반드시 와야 합니다. 이 잔치는 먹고 마시고 하는 잔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로 구원의 잔치입니다. 오지 않으면 영원한 흑암에 떨어지는 필수적인 잔치입니다. 그런데 오지 않았습니다. 즉 이스라엘의 과거(구약시대, 예수님당시)가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선민사상은 강조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도무지 믿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종들을 능욕하고 잡아 죽였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주후 70년에 이스라엘을 진멸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은 사거리로 보냈습니다. 사거리는 어디입니까? 로마제국입니다. 길을 잘 내는 로마제국을 말합니다. 즉 이제는 유대 밖으로 복음이 나가는 것을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스라엘은 도무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에 상당한 벌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베푼 혜택을 모두 거두어들이겠다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선택받은 사람은 오히려 버려지고, 버려진 사람이 선택을 받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우리들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심층 생각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배척했던 그리스도예수를 순전히 주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아무렇게나해서 받은 것이 아닙니다. 왕이신 예수님의 배려로 받은 것입니다.

And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마태복음21:33-46)

선민사상은 이스라엘의 대단한 자랑이었습니다. 많은 민족 중에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선민사상이 왜 나온지를 몰랐습니다. 아주 적고 못났기 때문에, 하나님이 선택하심은 몰랐습니다. 만일에 하나님께서 똑똑하고 잘난 민족들을 썼다면 이스라엘은 명함도 내밀지 못했을 것입니다. 힛타이트, 이집트, 앗시리아, 메소포타미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등 무수한 우수하다고 하는 민족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민사상을 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선민사상은 그런 의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들과 유대의 장로들에게 시편122:22을 인용해서 말씀하십니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베드로전서2:6을 보면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라고 했고, 로마서9:33은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라고 했으며, 2:7을 보면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라고 했습니다. 이사야28:16에도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메시야사상을 엉뚱한 쪽으로 풀었습니다. 다윗같이 당당한 모습의 왕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로마황제보다 더 위풍당당한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엉뚱하게 메시야가 나타났습니다. 목수의 아들이 메시야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은 대단히 기분이 안 좋았습니다. 메시야라면 메시야답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순전히 그들 기준에 의해서 메시야의 잣대를 들이댄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진정한 돌’ 즉 ‘그리스도’를 배척했습니다. 과거 다윗은 항상 사울왕에 의해 비천한 취급을 받았습니다. 늘 쫓겨 다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쫓겨 다니는 다윗이 하나님의 나라에 왕이 되었습니다. 이 배경이 시편118:22의 배경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진정한 메시야이신 그리스도를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건축자들인 이스라엘이 그 ‘돌’을 버렸습니다. 왜냐하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퉁이’가 ‘건축자들의 버린 돌’을 ‘기초석’을 삼았습니다. 모퉁이는 이방인들이며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유대의 기독교인들입니다. 성경에서는 항상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리스도에 의해서 되풀이되고 종결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자들은 누구나 그 돌을 기초석으로 삼고 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그리스도를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이 그 돌을 기초로 삼았습니다. 그 돌은 심판의 돌이며, 은혜의 돌입니다. 그 돌을 믿는 자만 삽니다.

And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유대인들(마태복음21:33-46)

예수님은 그들에게 또 다른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집주인에 대한 말입니다. 이제는 아들이 아니고 집주인에게 포도원을 빌려서 가꾸는 소작인들을 들어서 말씀했습니다. 집주인은 완벽한 포도원을 만들었습니다. 도둑들이나 맹수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포도원을 산울로 둘렀습니다. 거기에 포도즙을 짜는 구유를 만들었습니다. 또한 도둑들을 지키기 위해 망대까지 지었습니다. 그리고 포도원주인은 소작인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습니다. 열매를 거둘 때가 되었습니다. 포도원주인은 자기의 종들을 보내어 그 수확물을 받으러 소작인들에게 보냈습니다. 그런데 소작인들이 종들을 잡아서 하나는 심히 때렸습니다. 하나는 죽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는 돌로 쳤습니다. 그럼에도 포도원주인은 그들에게 기회를 주었습니다. 어떤 무력도 그들에게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한 번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냈습니다. 그러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다 잡아서 죽였습니다. 그러나 역시 주인은 무력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후에 포도원주인은 아들을 보냈습니다. 아들을 보내면서 저희들이 내 아들은 죽이지 않을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했습니다. 내 아들은 저희들이 공경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예 아들까지 잡아 죽였습니다. 저 아들만 죽이면 상속자가 없어지니 아들을 죽이고 그 밭을 차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아들을 죽여서 포도원 밭에 던져버렸습니다. 이 비유를 그들에게 말하고 후에 주인이 왔을 때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들은 대답했습니다.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다른 사람에게 세로 줄 것이라’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그들의 결국을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21:18-21). 순종치 않은 큰 아들에 대한 비유를 베풀었습니다(21:28-32). 이제는 나쁜 소작인들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다 한 가지 말씀입니다.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말하며, 특히 종교지도자들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두 아들에서 큰 아들은 이스라엘을 말하고, 작은 아들은 이방인들을 말합니다. 또는 큰 아들은 예루살렘의 실세들이고 작은 아들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멸시를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포도원주인의 비유에서, 포도원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소작인들은 유대인들입니다. 종들은 과거에 보내신 무수한 선지자들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매 맞고 죽임을 당한 선지자들입니다. 그리고 아들은 누구입니까?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사명을 모두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 사명이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사명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사명을 이용해서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될 때 원래의 목적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인정을 하지 않으십니다. 실제로는 잘 나간다 해도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결과가 됩니다. 촛대를 옮겨버리고, 모든 것을 철저하게 파괴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사람들은 심층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야 합니다.

And

직분이 아니라 믿는 사람이 구원(마태복음21:28-32)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허울뿐인 종교인들에게 말을 합니다. 두 아들의 비유로 그들의 실체를 드러냅니다. 한 포도원주인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두 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말합니다. 먼저 맏아들에게 일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 아들은 가겠다고 하고 가지 않았습니다. 포도원주인은 둘째아들에게 가서 일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싫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후에 뉘우치고 가서 일했습니다. 이 상황을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말합니다. 누가 아비의 뜻대로 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들은 서슴없이 대답합니다. ‘작은 아들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정곡을 찌릅니다. 그들에게 엄청난 말을 합니다. 세리들과 창기들이 그들보다 먼저 천국에 가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근거로 세례요한의 말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리와 창기들은 오히려 믿었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이 말을 듣고 대단히 화가 났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그들에게 이런 말을 하셨습니까?

히브리사람들의 순종을 나타내는 말은 ‘내가 여기 있나이다’(ynIn]hi/Here l am, sir)입니다. ‘아버지여 가겠소이다’가 바로 순종을 나타내는 히브리식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대답만 그렇게 했습니다. 실제로는 가지 않았습니다. 둘째 아들은 ‘싫습니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조금 있다 뉘우치고 갔습니다. 여기에서 첫째 아들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즉 예루살렘성전의 實勢들이었습니다. 둘째아들은 당시 유대에서 죄인취급을 받았던 로마의 앞잡이들 세리였고, 창기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유대사회에서 사람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이들이 천국에 먼저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면전에서 그들을 깎아내려 하나님의 일을 말로만 한다고 하면서 온갖 비리를 저지르고 있는 그들을 더 이상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가장 깨끗하고 거룩해야 함에도 탐욕스러웠고, 교만했으며, 잔인성은 말할 것도 없으며, 온갖 못된 짓을 다 저지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가장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들의 이것을 아는 사람들은 유대사회에서 얼마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이 세리 같고 창기와 같게 여겼습니다.

오늘날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나라나 교회 또는 어떤 단체의 높은 지위에 있으면 괜찮은 사람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교회에 이러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신이 교회의 어떤 직분을 받으면 직분자체가 자신을 보호하고 구원하는 줄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에서 간섭할 것이나 안할 것이나 다하며,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런 사람들 때문에 교회가 힘이 듭니다. 이들은 자신이 왜 세워진지를 모르고 교회를 이용해서 자신의 이익을 잡으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교회를 위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를 대적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And

성전의 주인을 몰라본 종들(마태복음21:23-27)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들어가서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러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알려져서 그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가? 그리고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는가?’ 이들은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것이 못마땅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들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답을 하면 나도 너희에게 답변을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그 질문인즉 ‘요한의 세례는 어디서 왔다고 생각하는가? 하늘에서 왔는가? 사람에게서 왔는가?’ 예수님의 질문에 그들은 서로 의논을 했습니다. 자칫하면 올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늘로서 왔다고 하면 왜 세례요한을 믿지 않았을 것이냐고, 예수님이 말할 것이고, 만일 사람에게서 그의 권세가 나왔다고 하면 백성들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기 때문에 백성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할 수없이 그들은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나도 너희들이 물은 질문을 답할 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신앙은 소경만도 못했습니다. 문둥병환자보다 못했습니다.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검증하고도 남았습니다. 예수님의 이적과 기사를 보면 얼마든지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아차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잘못된 신앙과 자신들의 기득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습니다. 누구도 자신들의 밥그릇에 손을 대지 못하게 했습니다. 갈릴리에서부터 비밀요원들을 예수님이 주변에 배치해놓고 수시로 보고를 받으면서 예수님의 행적 하나하나를 조사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빨리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적으로 간주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검증하려고 진실성문제에 도전해보았지만 허사였습니다. 그 문제에 실패하자 이제는 예수님의 소명과 위임문제를 들고 나왔습니다. 즉 자신들과 같이 제사장은 위임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나 제사장은 스스로 될 수 없다는 논리를 편 것입니다. 성경을 근거로 해서. 시편110:4을 보면,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자신들은 이러한 근거로 성경에 의해서 대제사장의 위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은 대제사장의 직무가 성경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모두 로마정부로부터 돈을 받고 샀습니다.

오늘날도 교회의 주인이 주님이 아닌 것 같은 착각이 많이 듭니다. 주님은 종으로 되고, 교회의 실세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실제의 주인 같습니다. 사실은 주님이 모든 교회의 주인인데, 주님이 종처럼 된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2000년 전의 예루살렘지도자들과 똑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교회가 교회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교회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대형교회 하나가 수많은 중소형 교회를 파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예수님의 참된 교회라고 말합니다. 성경적인 교회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사랑받는 교회라고 말합니다. 실은 자신들이 주인행세를 하면서.

And

믿음과 기도(마태복음21:20-22)

마태는 무화과나무가 언제 죽었는지를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왕되심, 우주의 창조주 되심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가는 이 기적의 상황을 자세히 말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11:20-25을 보면

20 저희가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보고 21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2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때로부터 언제 죽었는지는 모르지만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말라서 죽었습니다. 그래서 지나가다가 베드로가 물었습니다. 주님께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죽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동문서답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보다 더한 일도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즉 산더러 바다에 들어가라 하면 그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무엇이고 기도하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여기라 하셨습니다. 그대로 될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다윗, 그리고 선지자들 등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믿음 있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살다가 그 지방 사람들의 우상에 빠져버렸습니다. 빠지되 깊이 빠져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을 보내 교육을 시켰으나 듣지 않았습니다. 여러 나라들을 통해서 징계도 했습니다. 그러나 듣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포로의 상태로 전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듣지 않았습니다. 아예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내려오셔서 말씀을 해도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무화과나무를 말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이스라엘을 닮아서는 안 되었습니다. 왜 닮지 않아야 합니까?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실패를 했기 때문에 그들을 닮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기도의 응답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기도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다음에는 하나님의 뜻에 일치해야 합니다. 즉 기도하되, 믿음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뜻에 맞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기도하면 산을 바다로 던질 수 있다는 기도는 역사에 우리들의 삶에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이 땅에 나타내야 합니다. 이것을 하는 능력은 믿음입니다. 믿음의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과 협력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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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 받은 무화과나무(마태복음21:18-19)

17절을 보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베다니로 가셨습니다. 베다니(Bhqaniva)는 ‘베트 아니야’ 즉 ‘가난하고 고통 받는 자들의 집’을 의미합니다. 예루살렘 동쪽 3㎞의 지점에 위치한 마을이며, 감람산의 동쪽 경사면에 위치해 있습니다. 베다니에는 마르다와 마리아와 나사로가 살았습니다(요11:1,2), 나병환자 시몬의 집이 있는 곳입니다(마26:6, 막14:3). 예수님께서는 베다니를 자주 방문 하셨으며 잠시 유하기도 하셨습니다(마21:17, 눅10:38-40, 요11:1,2, 12:1).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곳입니다(요11:42).

예수님이 베다니에서 이른 아침 성으로 들어오실 때 무척 시장하셨습니다. 그때 길가에 무화과나무가 있기에 그리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잎만 있었습니다. 아무리 열매를 찾으려 해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무화과나무에게 말씀했습니다. “너는 이제부터 영원토록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그러자 무화과나무가 곧 말랐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을 마가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막11:12-14).

12이튿날 저희가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13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14예수께서 나무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마가의 기록에 의하면 무화과의 때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너무하신 것이 아니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이 그러셨을까? 예수님도 시장하셔서 공연한 화풀이를 하셨는가? 아닙니다. 중동지방에서는 무화과를 거두어들일 때가 6월입니다. 무화과나무 저주사건이 일어난 때는 4월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마가가 말한 ‘때’는 수확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수확기 이전에도 무화과나무는 열려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나무는 없었습니다. 잎만 무성했습니다. 무엇을 시사하고 있습니까?

무화과나무는 잎사귀가 무성하면 반드시 열매가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열매가 없었습니다. 즉 잘못 자란 무화과나무입니다. 실패한 무화과나무였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셔서 말라죽게 하셨습니까? 이것은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보여주시는 performance였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만 생각합니다. 심판하시는 주님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심판주이십니다. 긍휼의 주님, 사랑의 주님이시지만 심판하시는 주님입니다. 과거의 예루살렘을 하나님이 품으시기 위해서 엄청난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만한 일을 하지 않습니다. 선지자를 죽이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종교적으로는 열심이었습니다. 필요 없는 계명을 만들어놓고 잔뜩 지키고자 애를 썼습니다. 잎만 무성했던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고자 하셨습니다. 오늘의 우리들도 잎만 무성한 신앙생활은 안 됩니다. 열매가 있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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