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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따른 결과(마태복음19:27-30)
사람의 욕구는 대체적으로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누리기를 원합니다. 천국에서의 누림은 이 세상이 끝나고의 누림이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천국의 누림이 이 세상이 끝나지 않고, 그대로 연결이 되었다면, 많은 사람들이 내세에 큰 관심을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의 누림은 이 세상이 끝난 뒤에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자청년에게 하신 ‘재물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면 하늘의 보화가 있을 것’이라는 말씀에 대해 베드로가 질문합니다.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실상 제자들은 자신의 모든 것들을 버리고 주님을 좇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어떤 보상이 있을것인가를 물어본 것입니다.
주님의 대답은 매우 위로가 되는 대답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 경고가 따랐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아직 불완전하지만 그들이희생했으며 그로 인해서 보상받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명백하게 열 두 사도에게 약속하셨습니다(가룟유다는 제외).
그 약속은 무엇입니까? 세상이 새롭게 되어 즉 “새 하늘과 새땅”이 도래할 때에 열 두 사도의 지위에 속한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약속은 ‘인자가 자기 나라의 보좌에 앉을 때’입니다. 제자들이 보상을 받는 시기는 그리스도께서재림하시는 날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생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주의 이 충성스런 제자들은 “100배”를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마13:8). 주님을 섬기고 주님께 은혜 받는 것은, 내세에 뿐만 아니라 이생에서도 여러 배를 받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버리면 받는다는 말이 어떤 것입니까? 이전 것을 버렸을 때 주님은 새로운 것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영생을 상속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경고를 하셨습니다. 30절을 보면 영생을 얻을 자, 복을 받을 자가 뒤바뀐다는 것입니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다’고 하셨습니다. Calvin은 이 말씀을 주님께서 하신 이유는 육신의 태만을 제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그럴 경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죄된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전에는 내가 잘했는데’하고 추억의 믿음을 회상은 하면서 오늘의 형편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영생 즉 구원은 하나님의 소관인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어떤 행위도 영생에 이르는 구원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물임을 하시라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항상 긴장하며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할 때에 이전의 신앙만 우려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현재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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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와 천국과의 관계(마태복음19:23-26)
부자청년은 주님의 말씀에 심히 근심하므로 떠나갔습니다. 그 뒤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전혀 못들어간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어렵다(duskovlw")고 했습니다. 어렵다는 말은 “곤란하다”는 뜻입니다. 마치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보다 쉽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재물의 위험성이 얼마나 영원을 망치며, 영혼을 망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재물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망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 사실입니다. 재물과 하나님의 나라는 양립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구원받을 확률이 거의 없을 거라고 말하자, 주님은 하나님으로서는 능히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부자도 얼마든지 구원받을 수 있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아라마대 요셉, 니고데모, 나사로, 삭개오, 마태 같은 사람 등이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구원을 받았습니다.
18세기 모라비아운동의 갱신에 있어서 중심인물인 루터파 귀족 진젠도르프 (Count Von Zinzendorf/1700-1760)는 10세 때 할레에 있는 프랑케 문법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거기에서 다섯 명의 크리스찬 소년들과 함께 겨자씨단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전 인류를 사랑하고 복음을 전파하기로 맹세했습니다. 진젠도르프는 비텐베르그대학과 유트레히트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였고 1721 년에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1719년 유럽여행을 하던 중 뒤셀도르프(Dusseldorf) 화랑에서 한 그림을 보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도메니코 페티(Domenico Feti)의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인데 가시관을 쓴 그리스도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그림 아래에는 “너 위하여 이 모든것을 주는데 너는나 위하여 무엇을 주느냐?”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가 그의 생애를 작센 주를 위해 바치기보다는 그리스도를 위해 바치기로 한 시기가 바로 그때였습니다. 1722년에 그는 베르델스도르프(Berthelsdorf)에 있는 그의 토지에 모라비아교도 피난민들을 정착시켰습니다. 그리고 곧 전 세계적인 복음전파를 추구하는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유럽과 영국, 미국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생각으로는 구원을 받을만한 사람이 얼마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바늘귀 같은 구원의 문을 통과하는 부자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사실은 구원을 받을만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구원을 받았습니다. 즉 우리가 주님을 믿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셔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부자들은 돈을 관리하느라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끔도 꾸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생동안 돈을 찾느라, 못 믿습니다. 일생동안 돈에 얽매어서 주님을 영접할 기회가 없습니다. 재물은 천국에 가는데 훼방1호입니다. 오늘도 이 세상에 그러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재물은 곧 멸망의 선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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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물과 천국과의 관계(마태복음19:16-22)
재물과 천국과의 관계는 깊은 관계일 수도 있으나 의외로 요원한 관계일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를 소유한 많은 사람들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돈에 매수되어 크리스천이라고 할지라도 제대로 된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봐도 더욱 그렇습니다. 전 현직 대통령이 장로의 무거운 직분을 지녔음에도 전혀 기독교의 냄새가 나지 않음은 물론이거니와 정부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입으로는 크리스천이라고 하면서도, 기독교의 냄새는커녕, 오히려 기독교에 많은 피해를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청문회를 하면서, 크리스천의 무거운 직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비리와 부패에 얼룩지고, 그것을 전혀 개의치 않고, 부끄러워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음을 우리들이 실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로 온 어떤 사람은 좀 달랐습니다. 마태는 ‘어떤 사람’이라고 표현했고, 마가는 ‘한 사람’으로 표현했지만(막10:17), 누가는 이 사람을 ‘관원’으로 표현했습니다(눅18:18). 요새로 말하면 공무원인데, 현재의 공무원과는 신분이 다릅니다. 2000년 전의 관원은 권세의 첫 번째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이 주님께 와서 물은 것이 무엇입니까?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습니까?’였습니다(tiv ajgaqo;n poihvsw i{na scw zwh;n' aijwvnion). 말하는 것으로 보아 괜찮은 사람입니다. 영생에 관심을 보인 것은 물론이고, 영생을 얻는 법을 물은 것으로 봐서 성실하게 세상을 산 것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은 외외였습니다.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였습니다. 여기에는 ‘만일 네가 하나님께만 속한 선하다는 칭호를 나에게 줌으로써, 내 속에서 인간의 본성보다 더욱 고귀한 어떤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너는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의 뜻이 숨어 잠재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 영생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은 어떤 계명들이냐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이에 이러한 계명들은 모두 지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그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네 모든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을 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가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후에 나를 좇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사람이 재물이 많은 고로 근심하며 갔다고 했습니다.
사실 재물의 힘이란 대단합니다.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일을 서슴지 않습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것에서 많이 넘어집니다. 돈에 관한한 목을 맵니다. 수십억 내지 수백 억 원의 재산을 가지고 있어도 불법적인 일들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 범죄 하기 쉽습니다. 오늘날 많은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특히 관료들은 정상적으로 돈을 번 사람들은 아마도 얼마 없으리라고 추정합니다. 투기와 비리 부패 등 정상적인 방법이 아닌 방법으로 돈을 번 크리스천들이 많다는 것이 아이러니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러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 반대로 행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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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에 대한 사람들의 견해(마태복음19:13-15)
아이들에 대한 국가나 사회들의 편견은 예나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습니다. 동물들은 제 새끼를 아주 귀하게 여기는데, 사람이 되어가지고 제 아이들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갖은 학대를 합니다. 어린아이들을 유괴의 대상으로 삼기도 합니다.
고대에는 어린이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어린이들의 지위는 부모나 노인들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이 자기들의 의견을 자유스럽게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부모들은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쳐야’(잠22:6)했는데, 그 “행할 길”은 어린이들로 하여금 부모와 노인들을 존경하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젊은 어른들조차도 노인들의 말씀을 거역할 수 없었습니다. 예를 들면 엘리후가 욥과 그의 친구들에게 말할 때에 조심스럽게 말하기를 “나는 연소하고당신들은 연로하므로 참고 나의 의견을 감히 진술치 못하였노라”(욥32:6)고 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 사람들이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예수님의 안수하심을 바라며 주님께 나왔습니다. 이것을 제자들이 꾸짖었습니다. 칼빈은 이 구절을 이렇게 주석했습니다. ‘그들을 주님께 데려왔을 때 주님은 그들을 친절과 사랑으로 영접하셨으며 엄숙한 축복의 의식으로 그들을 아버지께 성별시키셨다. 우리는 이 어린이들을 데리고 왔던 자들의 목적을 알아야 하겠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부어주실 성령의 능력을 갖고 계신다는 사실을 이들이 마음속으로 확신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자기 자녀들을 주님께 드린다는 것은 무의미한 행위였을 것이다. …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머리 위에 면류관이 씌워져 있었더라면 사실을 사실대로 기꺼이 즐겁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진정한 직무가 무엇인지 아직까지 알지 뭇하고 있었다. 예수께서 어린이들을 영접하시는 것은 그의 위엄을 고려할 때 옳지 않은 일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그들은 지극히 높으신 선지자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가 어린이들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즉 제자들은 그들이 육신의 생각대로 그리스도를 평가하여 잘 못 판단하였다.’
예수님은 오히려 제자들을 꾸짖었습니다. 어린아이들을 주님께 오는 것을 결단토 막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이렇게 순수한 자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아직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정확하게 몰랐을 수도 있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들이나 성도들 모두 예수님의 정확한 의도를 모르는 것 같습니다. 교회건물을 교회로 아는 목사들이 많은 이 시대에 과연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까요? 교만의 술과 우월감의 술에 잔뜩 취해 있는 그들에게 어린아이 같은 믿음을 찾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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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신에 대한 주님의 명령(마태복음19:10-12)
예수님의 이혼에 대한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차라리 혼인을 하지 않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를 물었습니다. 독신생활을 하는 것이 훨씬 낫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혼인을 해서 산다는 것은 여러 어려움을 수반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독신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독신으로 사는 사람들은 타고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날 때부터 성불구자인 사람이 있고, 사람이 스스로 만든 성불구자도 있으며, 천국을 위해서 스스로 성불구자가 된 사람도 있다고 했습니다(1012절).
당시 쿰란공동체는 한 여자와의 교제를 통하여 부정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결혼을 포기하였습니다. 철저하게 계급적인 공동체로 구성되어 있으며, 不淨을 피하기 위해서 결혼을 포기한 것입니다. 오늘날 이 본을 로마 카톨릭이 가지고 있습니다. 사제와 수녀들은 결혼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들은 독신생활을 해야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더 좋은 조건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독신생활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어떤 특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더 높은 경지에 가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에 그렇게 생각한다면 성경과 맞지 않는 생각입니다. 따라서 제도화된 독신생활은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결과입니다. 성경은 결혼생활을 지지합니다(창1:27,28, 2;24, 9:7, 24:67, 시127:3,4 128:3,8, 요2:1-11, 엡5:22-33, 딤전5:14).
엡5:22-33 22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 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 24 …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찌니라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26 … 27 … 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찌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29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30 … 31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찌니 32 이 비밀이 크도다 … 33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혼을 금지하기 위해서 독신생활을 장려하는 것은 아닙니다. 결혼할 필요를 느끼지 않고, 그 대신 주님을 위해서 평생을 봉사할 사람들만 독신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결혼을 금하는 것이 가장 불행한 것으로 보셨습니다. 그래서 결혼금지를 허락지 아니하셨습니다. 바울과 같이 평생 독신으로 지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같이 결혼을 하여 아내를 데리고 다닐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쿰란 공동체나 로마-카톨릭의 독신생활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생활입니다. 주안에서 결혼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결혼하지 않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지만 제도화로서 결혼을 금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자의적인 금욕생활이나 독신생활이 자랑거리일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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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에 대한 주님의 명령(마태복음19:3-9)
바리새인들 정확히 말하면 마귀의 사주를 받고 있었던 자들이 주님을 시험코자 했습니다. 사람이 어떤 일들로 인해서 그 아내와 이혼하는 것이 합당하느냐는 것입니다(3절).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원래 남자와 여자를 만들었다. 그래서 사람(남자)이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한다. 이들은 한 몸이 되었다. 이런 것을 너희들이 읽지 못했느냐? 그러므로 이제 그들(남자와 여자)는 둘이라는 개념이 사라졌다. 한 몸(sa;rx miva)이다. 따라서 이들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이다. 사람이 이혼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4-6절)이에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끌어왔습니다. ‘모세는 이혼할 때에 이혼증서를 주어 이혼하라고 하셨습니까?’ 예수님의 대답은 모세가 너희들의 완악함을 인해서 이혼증서를 주라고 한 것이지 본래 의도는 그렇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혼에 대한 불문율이 9절에 있습니다.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없이 아내를 내어버리면 안 되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도 간음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나라의 이혼율이 세계1위라고 합니다. 내려잡아도 3위 이내의 ranking입니다. 좋은 것은 1위를 차지하지 못하고 나쁜 것들만 자꾸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 이혼에 대해서 질문을 했을 때 바른 의도로 질문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시험코자(peiravzw)함이었습니다. 좋은 의도로 가르침을 받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자신들이 이혼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과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생각하고 너무나 차이가 났기 때문입니다.
신명기24:1을 보면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 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낼 것이요” 이혼을 하고자 할 때 수치스런 일이 있으면 이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수치스런 일’(rb;D: tw"r][,)에 대해서 유대인들의 해석이 분분했습니다. 엄격한 바리새학파인 샴마이학파는 모세가 말한 ‘수치스러운 일’은 간음을 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샴마이학파들은 간음 이외에는 이혼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자유로운 학파인 힐렐학파는 모세의 율법을 확대해석했습니다. ‘수치스런 일’을 아내가 밥을 태워도 수치스런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다른 여자보다 못생겨도 수치스런 일이기 때문에 이혼의 조건이 성립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가르침들을 받았지만, 유대인들은 힐렐학파의 해석을 많이 따랐습니다.
오늘날 이혼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례입니다. 주님의 말씀처럼 간음한 이외에는 이혼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이혼율이 세계1위입니다. 물론 여권신장도 있겠지만, 문제는 이혼사유가 거의 돈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부생활 때문입니다. 간음한 이외는 드뭅니다. 이로써 파생되는 문제들은 많습니다. 특히 가정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이혼으로 인해서 많은 자녀들이 가정이 없이 자라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회문제가 된지는 오래전부터입니다. 사람들의 욕심으로 인해서, 잘못된 성문화와, 잘못된 가족문화로 인해서 이 사회가 심히 병들어가고 있는 상태입니다. 주님은 이혼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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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지방의 사역(마태복음19:1-2)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떠났습니다. 요단강건너 유대지경의 땅에 이르렀습니다. 이제부터 베뢰아 사역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곧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에서도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의 공생애동안 세 번 이상 유대인 명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한 사실을 전했습니다(요2:13, 5:1, 7:10).
요2:13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요5: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요7:10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비밀히 하시니라
요한과 달리 공관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의 공생애기간 중 단 한 번 예루살렘을 방문한 사실만 전했습니다(마20:17, 막10:1, 눅9:51).
마20:17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 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막10:1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강 건너편으로 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다시 전례대로 가르치시더니
눅9:51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마가요한은 예수님께서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까지의 여정 중에 있었던 일을 10장 한 장에 수록했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무려 아홉 장을 할애하였습니다(9:1-18:3). 반면에 마태는 두 장(마19~20)만 기록했습니다.
왜 이렇게 각 저자들이 똑같은 사건을 다르게 기록했습니까? 성경의 저자는 여러 가지 원리에 의해서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즉 ‘선택의 원리, 강조의 원리, 배열의 원리, 해석의 원리’입니다. 선택의 원리는 저자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취사선택해서 기록했습니다. 당시에 일어난 모든 일을 기록하지 않은 것입니다. 강조의 원리는 저자가 어떤 특정한 면을 부각시켜 그 일의 중요성을 강조하려고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건이 있어도 유독 어떤 사건을 강조하여 후세사람들에게 교훈을 주려고 한 것입니다. 배열의 원리는 성경은 대체적으로 연대기에 기초해서 기록하는데, 때에 따라서는 특별한 배열방식을 취한 것입니다. 이럴 경우에는 연대성을 초월합니다. 중요한 사건순서대로 배열하는 방식입니다. 해석의 원리는 자주 반복되고 성경을 해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말씀은 역시 부각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마태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은 사역지를 갈릴리에서 유대로 향하시는데, 그 사이에 있는 베뢰아에서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치셨습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사람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사람들을 고치러 오셨습니다. 소외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 구원하고자 오셨습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주님은 은혜를 베푸십니다.
독신에 대한 주님의 명령 (0) | 2010.06.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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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에 대한 주님의 명령 (0) | 2010.05.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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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는 곳 (0) | 2010.05.23 |
용서받은 자가 용서하지 않는다면(마태복음18:23-35)
예수님은 천국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천국은 그 종들과 계산하려 하는 어떤 왕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 임금에게 1,0000달란트 빚진 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갚을 돈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왕은 그 사람의 몸과 처와 자식들을 팔아서라도 갚으라고 했습니다. 이에 빚진 자는 애걸복걸했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꼭 갚겠다고 헸습니다. 이를 본 왕은 그 빚진 자가 불쌍해보였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갚을 것 같이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모든 빚을 탕감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 100데나리온의 빚을 진 자가 있었습니다. 탕감 받은 사람이 그 사람을 만나서 목을 잡고 당장 갚으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에게 빚진 자 역시 참고 기다리면 꼭 갚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빚을 갚지 않는다고 그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이것을 옆에서 본 관리들이 심히 민망하게 여겼습니다. ‘저는 1,0000달란트를 탕감 받았는데 겨우 100데나리온의 빚을 진 사람에게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하고 빚을 탕감해준 주인에게 찾아가 그 사실을 모두 알려주었습니다. 주인은 그 사실을 조사한 후에 심히 괘씸했습니다. 당장 저를 잡아왔습니다. 그리고 심리했습니다. 나는 네가 불쌍해서 그 많은 빚(1,0000달란트)을 탕감해주었거늘 겨우 100데나리온의 빚을 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기지 않았느냐고 하면서 주인이 즉시 이 사람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결국 그 사람은 그 빚을 갚을 때까지 갇혀 있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형제를 중심으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달란트는 헬라의 화폐입니다. 당시 금 한 달란트의 무게는 약 30.4kg입니다. 1달란트는 약6000데나리온입니다. 1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따라서 1데나리온은 노동자의 20년의 품삯입니다. 1,0000달란트는 노동자의 20,0000년의 품삯입니다. 이렇게 거금의 빚을 탕감 받고도 겨우 100데나리온(석 달 열흘치의 임금)의 빚을 진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빚진 것과 우리가 하나님께 빚진 것은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에게 빚진 것을 용서해 주신다면 우리는 이웃이 우리에게 빚진 것을 용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들에게 잠재해있는 미움이란 그러한 것들을 잊어버리려 합니다. 일부러 잊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마땅히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형제들을 용서한다면 세상이 변화될 것입니다. 하지만 역으로 하나도 용서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무질서한 세상이 될 것입니다. 사람이 용서하기는 어려우나 성도들이라면 반드시 용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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