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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성전의 잘못된 자들(마태복음21:14-17)

예루살렘은 고도였습니다. 사무엘하5:5을 보면 “헤브론에서 칠년 육 개월 동안 유다를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 삼십 삼년 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더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주전1010년에 왕이 됩니다. 다윗은 헤브론에서 7년 6개월이니까 1017년에 예루살렘으로 왕도를 옮깁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고도였습니다. 물론 포로생활 70년이 있긴 하지만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왕도였습니다.

예루살렘은 이름도 많습니다. 모리아(창22:3), 여부스(수18:28), 시온(왕하19:21), 살렘(시76:2), 아리엘(시29:1), 헵시바(사62:4), 다윗의 성(삼하5:7), 하나님의 도성(시46:4), 여호와의 성읍(사60:14), 여호와의 산(사30;29),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의 시온(사60:14), 만군의 여호와의 산(슥8:3), 거룩한 성(시48:2, 계11:2), 영원한 하늘의 집(계22:19), 소돔과 고모라(사1:10), 의의 성읍(사:26), 하나님 편에서 나의 성읍(사45:13), 나의 성산(사11:9).

이랬던 예루살렘이 점점 그 기능을 잃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성읍이 자신의 주인을 몰라보았습니다. 그 안에 잘못된 사람들이 살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언제부터인가 그 성읍에 세속화된 사람들, 인본주의자들이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 자신의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부를 축적하는 권세를 잃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섬겨왔던 하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그만큼 그들은 영적으로 무뢰한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도 예수님의 긍휼을 받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소경과 저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모두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의 기득권자들은 그것이 싫었습니다. 성전을 정화하는 것도 싫었습니다. 병고쳐주는 것도 싫고, 어린아이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것도 싫었습니다. 그들은 싫은 것을 넘어서 예수님께 대하여 분노가 치밀었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그래서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뇨?”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을 책망했습니다. 성경의 예언을 이루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시8:2을 보면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오늘날의 교회들은 어떤가? 정의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공공연히 공공의 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아니라는데 일부 교회는 맞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로 인해서 심각한 오류에 빠졌습니다. 일부교회들에 의해서 한국의 교회들은 도매금으로 공공의 적이 되어버렸습니다. 교회의 간판을 걸었고, 하는 일들이 교회와 유사해서 교회로 사람들이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만일에 교회라면,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에 많이 있고, 이런 사람들이 교회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에, 교회가 공공의 적이 된 것입니다.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그러면서도 교회행세는 꼭 하는 사람들은 교회의 적이기도 하고, 사회의 공공의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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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루살렘성전을 숙정하시는 예수님(마태복음21:12-17)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여러 번 오르셨습니다. 소년시절에 성전에서 선생들과 질의응답을 하셨습니다(눅2:46). 이외에도 여러 번 성전에 가셨습니다(막11:27-33, 12:35-44, 49, 요5:14-47, 7:14-28, 10:23-38, 18:20, 2:19,20, 마21:14).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실 때마다 속이 상하셨습니다. 그곳에서 순례 객들을 위해 돈을 바꾸어주고 제사에 쓸 비둘기를 파는 상인들을 발견하 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외정에 들어가셨습니다. 이곳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정말 슬픈 광경을 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성전이 더렵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전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말씀을 듣는 곳이 아니라 시장이 되었습니다. 성전 안에서 돈벌이가 잘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소와 양을 팔고 있었습니다.

유월절을 지키려고 도처에서 온 순례자들로 성전은 만원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소나 양이나 비둘기를 사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정가보다 훨씬 비싼 고가를 지불하고 제물을 샀습니다. 예배자는 제물을 가지고 성전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 허락을 얻어야 했습니다. 상인들과 제사장들이 짜고 못 들어가게 한 것입니다. 그 대가로 상인들은 제사장들에게 뇌물을 지불했습니다. 왜냐하면 상인들은 제사장들에게 이권을 얻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 돈은 제사장 안나스와 교활한 제사장 가야바의 돈궤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므로 상인들과 제사장은 몹쓸 관계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실 때 물건을 사는 사람들과 파는 사람들의 소동을 들으셨습니다. 거기에 동물의 시끄러운 소리와 오물과 악취가 났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돈 바꾸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성전에서 외국 돈은 세금으로 바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반 세겔의 성전세는 유대의 돈으로 지불해야 했습니다(출30:13). 역시 문제가 있는 거래였습니다.

예수님은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자들의 의자를 엎으시고, 그 일에 종사하는 모든 매매자들을 쫓아내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 제사장들이 강도짓을 했습니다. 허가 내놓고 사람들을 강탈했습니다. 하나님을 속이고 기만했습니다. 성전은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들을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습니다. 시장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실제 성전의 주인이신 분이 분노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이와 유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가게를 가진 사람들은 사람들이 많은 교회에 등록합니다. 무엇을 하려고 해도 역시 사람이 많은 곳에 가서 등록합니다. 사람이 적은 교회에는 가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보고 교회에 등록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예배의 처소로 생각하지 않고, 장사 속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장사하는 장소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교회답게 하지 않는 치졸한 생각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 헌신하는 곳이고, 성도들의 교제의 장이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입니다.

And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예수님(마태복음21:1-11)

예수님의 일행이 예루살렘에 가까워졌을 때, 주님께서 두 제자에게 벳바게 맞은편 마을에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 마을에 매여 있는 나귀와 새끼나귀를 끌고 오라고 했습니다. 왜 가져 가냐고 하면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그것을 끌고 왔습니다. 제자들이 나귀위에 겉옷을 폈습니다. 예수께서 타셨습니다. 무리들은 길에 겉옷을 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베어서 길에 폈습니다. 따르는 무리들이 소리를 지르기도 했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고 찬송을 불렀습니다. 이로 인해서 예루살렘 온성이 소동했습니다. 사람들이 무리들에게 물었습니다. 이에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고 했습니다.

스가랴9:9을 보면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역사적으로 수없이 배반했어도 이스라엘을 시온의 딸(@/YxiAtB'), 예루살렘의 딸(!Il'v;Wry] tB')이라 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아들을 죽이려고 해도 내 백성이라 하셨습니다. 내 백성, 내 아들이 아니라고(호1:9) 말씀하실 때도 있었습니다. 다시는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실 때도 있었습니다(호1:6). 내가 이스라엘을 꺾을 것이라고 말씀하실 때도 있었습니다(호1:4).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딸이라 부르실 때에는 이스라엘을 지극히 사랑할 때의 표현입니다. 그렇게 귀한 딸들이 크게 기뻐하고, 크게 소리를 지르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왕이 임하신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임하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 나의 왕이 임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왜 그가 오심을 사람들은 대망해야 합니까? 그는 공의로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겸손하셔서 나귀를 타시는데 그것도 작은 나귀새끼를 타십니다. 왜 나귀새끼를 타는 것이 겸손입니까? 세상 사람들은 이동할 때 말을 탔습니다(슥9:6,20). 그러나 주님은 나귀를 타셨습니다. 나귀는 고대 사회에서 부와 권세를 나타내는 말과 달리, 겸손함과 나약함을 상징합니다. 이 예언대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에 나귀를 타고서 입성하셨습니다. 그래서 메시야는 겸손하신 분입니다.

그의 통치방식은 무력이 아니라 평화의 정책입니다. 그는 말을 끊고, 화살을 끊습니다. 병거를 제거합니다. 온갖 전쟁무기를 제거하시는 통치방식입니다. 즉 복음이 가는 곳마다 전쟁은 없습니다. 그의 나라는 평화의 나라요, 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통치방식을 표방하는 말씀입니다. 바다에서 바다까지 즉 먼 곳까지 그의 통치는 임하겠고, 전하는 메시지는 화평인데, 그 화평은 실재인 화평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를 방해하지 못합니다. 그의 오심도, 그의 가심도 방해하지 못합니다. 그는 자의로 오시고, 아버지의 보내심에 순종하심으로 오십니다. 그는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해서 오십니다. 우리가 그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그의 사랑을 입었습니다. 그의 은혜를 입는 자마다 그의 통치를 받고, 그의 사랑을 입는 자마다 그의 나라의 백성이요, 자녀입니다. 눌린 자, 억울한 자, 힘없는 자를 구분하지 않고 구원하십니다. 우리가 그 안에 있습니다.

And

예루살렘에서의 예수님(마태복음21장-23장)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고난주간은 이때부터입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이 자신의 죽음을 알고 그 길을 가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만일에 있다면 피하지 못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예수님의 죽음은 예수님 혼자밖에 모릅니다. 어느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제자들에게 예고를 세 번이나 했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내다보시며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약 1주일간 머무시며 활동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십자가를 지시고 예루살렘을 떠나십니다. 21장에서 23장까지는 벳바게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출발하신 사건에서부터 마지막 주간의 첫 며칠 동안 있었던 예수님의 활동과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은 이때 주로 성전에서 활동하셨습니다. 유대지도자들과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활동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야다’하는 사실은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이 기록했습니다. 세례요한이 외쳤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했기 때문에 예수님과 부딪혔습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예수님을 신성모독으로 십자가형을 빌라도에게 주문한 것입니다. 참 기가 막힌 일입니다.

마태는 예루살렘에서의 예수님의 행적을 순서대로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왕이신 예수께서 예루살렘성전에서 어떻게 하셨는지를 선택의 원리에 의해서 기록했습니다.

1. 왕의 공적인 등장 21:1-17

󰊱 예루살렘에 들어가심 1-11

󰊲 성전을 청소하심 12-17

2. 왕에 대한 존경 21:18-22:46

󰊱 열매 없는 무화과 21:18-22

󰊲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도전 21:23-22:14

①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질문 21:23-27

② 두 아들의 비유21:28-32

③ 포도원 주인의 비유 21:33-46

④ 결혼잔치에 대한 비유 22:1-14

󰊳 바리새인과 헤롯당에게 답변 22:15-22

󰊴 사두개인들에게 답변 22:23-33

󰊵 바리새인들에게 답변 22:34-46

① 가장 큰 계명 22:34-40

② 다윗의 아들 22:41-46

And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마태복음20:2934)

주님의 일행이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좇았습니다. 마태는 이 무리들을 큰 무리라 했습니다. 무리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기고 있었습니다. 그때 소경 둘이 길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이들은 주님이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주님과 무리들이 가까이 오자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이들은 앞을 볼 수가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어디 계시는지 정확히 측정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큰소리로 자신의 의사표시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무리들은 잠잠하라고 제지했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이 지체하지 않기 위해서 그랬을 것입니다. 더구나 이스라엘에서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함부로 쓰지 않아야 하는데 소경들이 외쳤기 때문에 제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소경들은 더욱 소리를 질렀습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라”는 것입니다. 역시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했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이 마물러 서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부른 이유를 물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그들은 바로 대답했습니다. 눈뜨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눈을 만지심으로 그들의 눈은 고쳐졌습니다. 그들은 무리들과 함께 예수를 좇았습니다.

소경들은 주님께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호소했습니다. ‘불쌍히 여기소서’ /ejlevhson은 ‘자비를 베풀다’/ejleevw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인간은 항상 비참합니다. 그러므로 ‘엘레에오’는 인간의 비참한 현실에 하나님의 자비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인격을 통해 자신의 권위를 증명하는 자유하게 하는 사건입니다. 그럴 때에 치유의 사역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불치병에 걸린 사람 또는 귀신들린 사람들이 주로 주님께 간구하고 외쳤습니다(마15:22,17:15).

주님께서 ‘민망히 여겼다’는 ‘splagcnivzomai/스플랑크니조마이는’는 주님의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는 태도를 말하는 단어입니다. 한 문둥병 환자가 드리는 청원(막1:41), 목자 없는 양 같은 사람들(막6:34,14:14,8:2, 마15:32), 예수님에게 고침을 간청한 두 눈 먼 사람(마20:34), 독자를 잃고 울고 있는 나인성 과부(눅7:13)의 사례 등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들을 하면서 많은 벽에 부딪힐 수 있습니다. 여기의 소경은 예수님이 어디쯤 오시는지 측정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많은 무리들의 제지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굴하지 않고, 주님께 더욱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결국 주님은 그들의 청구함을 들으셨습니다. 즉 주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으려면 많은 인내함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들으시는데 거기까지의 장애물이 있습니다. 그 장애물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간의 장애무르 경제적인 장애물, 사람들의 장애물, 지적인 장애물들이 우리의 신앙을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주님께서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까지 가야합니다. 이것을 우리들이 극복해야 합니다.

And

예수님의 길과 마음을 모르는 제자들(마태복음20:20-28)

同床異夢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같은 잠자리에서 다른 꿈을 꾼다는 뜻의 故事成語입니다. 서로 같은 처지에 있으면서도 그 생각이나 이상이 다르거나 겉으로는 함께 행동하면서도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갖는 것을 말합니다.

20절을 보면 ‘그때에’ 세베대의 아내 즉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주님 앞에 나서서 절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구하냐고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그녀가 구하는 것은 야고보와 요한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님의 우편에 하나는 주님의 좌편에 앉게 명하기를 구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듣고, 자신의 길을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너희들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저희들(야고보와 요한)이 마실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과연 그들이 예수님께서 마신 잔을 마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좌우편에 앉는 것은 자신의 소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소관인데,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얻을 것이라 하셨습니다(20-23).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열 제자가 야고보와 요한에게 대하여 분히 여겼습니다. 예수님께서 개입하셔야 될 것 같아서 주님은 그들을 집합시켰습니다. 너희들은 이방인의 집권자처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권세로 자신들의 서열을 정해서 그 권세를 부리려고 하지만, 너희들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정말 크고자 하면, 너희를 섬겨야 할 것이고, 최고가 되려고 하는 자는 나머지 제자들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이 세상에 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을 섬기러 왔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대속이 되기 위해서 왔다고 하셨습니다(24-28).

세베대의 어머니는 신앙이 좋았습니다. 베드로처럼 그의 두 아들이 주님의 제자였기 때문입니다. 제자이면서 임원이었습니다. 베드로와 더불어 중요한 곳엔반드시 참석한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인사 청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예수님의 예루살렘의 길이 어떤 길인지를 몰랐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이나 무리들은 예수님의 예루살렘向을 심히 오해하였습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이정도의 능력을 행한다면 이스라엘의 왕으로 모자람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과거 선지자들 중에 이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충분히 왕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 그들은 이번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예사로운 일이 아님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인사 청탁을 한 것이고, 그것을 알았던 열 제자 역시 그에 동참하고자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무슨 잔인지도 모르고 마신다고 하여, 너희들은 도저히 못 마실 것이라고 하다가, 과연 너희들이 마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순교를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크고자 하면 섬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역설적이라는 것입니다. 섬기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법칙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크고자 하면 반드시 성도들을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And

세 번째 수난을 예고하심(마태복음20:17-19)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고 하시면서 열 두 제자에게 긴히 할 말이 있다고 따로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굉장히 중요하다 싶어서 따로 집합한 제자들은 또 어이없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인즉 주님께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재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죽이기로 결안 한다는 것입니다(18절).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 넘겨준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방인들은 곧 로마인들을 말합니다. 그러면 그들이 주님을 능욕한다는 말씀입니다.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박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 삼일에 살아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예언은 16:21을 보면 가이사라 빌립보에서 첫 번째 예고를 하셨습니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두 번째는 변화산상에서 내려오신 후 갈릴리에서 예고를 하셨습니다(17:22-23).

22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23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

세 번째 예언은 바로 본문 20:17-19입니다. 이곳은 여리고를 지나서 예루살렘에 가시는 노정에서였습니다.

17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 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18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19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하리니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예수님이 수난을 당하신다고 말씀할 때마다 제자들은 몹시 싫었습니다. 또 그 말씀한다고 했을 것입니다. 이만큼 죽음은 사람들에게 혐오감이요, 공포였습니다. 아직은 제자들이 주님의 참뜻을 몰랐기 때문에 주님께서 수난을 당한다고만 하면 싫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멀리를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인간은 모태에서 나올 때 그의 자연적 상태에 있어서 도덕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성질과 성격에서 오염되어 있습니다. 인간존재의 모든 부분이 즉 지성, 의지, 감성, 감정, 양심, 몸 등이 죄로 감염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포함해서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 많은 사람들의 죄를 예수님이 해결하러 오신 것입니다. 그 방법이 수난을 당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비록 몰랐지만, 예수님은 그 일을 기필코 하셔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단은 예수님을 완전히 죽일 수 없었습니다. 겨우 발꿈치를 상하게 할 뿐이었습니다. 죽으신지 사흘 만에 부활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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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나라에 대한 봉사의 자세(마태복음20:1-16)

1절에 주님의 통상적인 ‘천국은 마치 같으니…’라고 하면서 시작합니다. 천국은 마치 무엇과 같으냐?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과 같다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입니까? 집주인은 품꾼들과 하루에 한 데나리온씩 주기를 약속했습니다. 이른 아침 즉 오전 6시에 나가서 포도원에 품꾼을 들여보냈습니다(2절). 집주인은 또 제삼시(오전9시)에 나가보니 장터에 놀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도 가서 일하라고 했습니다. 그 대가를 주겠다고 했습니다(3,4절). 집주인은 계속 제육시(정오)에도, 제구시(오후3시)에도 나가서 놀고 있는 사람들에게 일을 하라고 했습니다(5절). 심지어 제십일시(오후5시)에도 놀고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품꾼으로 쓰는 사람들이 없다고 했습니다. 집주인은 저희들도 포도원에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날이 저물었습니다. 품삯을 계산할 때가 온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나중 온 자로부터 임금을 지급했습니다. 그런데 단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먼저 온 사람은 뛸 듯이 기뻤습니다.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었다면, 자신은 12시간을 일했으니, 12데나리온을 받을 줄로 알았습니다. 오전 아홉시에 온 사람들은 9데니리온, 정오에 온 사람들은 6데나리온을 받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딸랑 한 데나리온이었습니다.

이에 집주인은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애초에 그들에게 약속하기를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정한 품삯을 제대로 주었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온 사람의 품삯은 형평성을 따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온 사람에게 긍휼을 베푼 것이기 때문입니다.

16절을 보면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되리라”하셨습니다. 19:30도 “그러나 먼저 된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될자가 많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비유는 구원에 관한 문제는 아닙니다. 봉사에 관한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은 일찍 부름을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늦게 부름을 받았습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이생의 보상을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먼저 부름을 받은 사람이 더합니다. 늦게 부름을 받은 사람도 똑같이 하나님께서 대하시는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긴다는 사실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그에 상당하는 보상을 해주셨음에도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Luther도 한 데나리온의 보상을 받았습니다. Augustine도 한 데나리온의 보상을 받았습니다. Calvin도 한 데나리온의 보상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봉사할 기회가 왔을 때 하나님께 열심히 해야 합니다. 자칫하면 주님의 선택하심에서 제외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주님의 포도원으로 불렀을 때에 성실하게 봉사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 신경을 쓰지 말고, 오직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일을 우리가 성실히 하고, 우리의 성실함에 따른 보상을 기대해야 합니다. 보상을 받을 자격마저 박탈되는 상황에 가지 않아야 합니다. 모세도 한 컵, 여호수아도 한 컵, 다윗도 한 컵이었음을 상기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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