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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성전 파괴에 대한 예고(마태복음24:1-2)
예수님의 여섯 번의 대 강화는 다름과 같습니다.
첫 번째 대 강화: 5:2-7:29 산상설교
두 번째 대 강화: 10:5-42 갈릴리
세 번째 대 강화: 13:1-58 갈릴리 바닷가
네 번째 대 강화: 18:1-35 가버나움에서
다섯 번째 대 강화: 23:1-39 예루살렘성전에서
여섯 번째 대 강화: 24:1-25;46 감람산 강화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이스라엘에 있어서 세 번째 성전이었습니다. 처음의 성전은 솔로몬 성전입니다. 솔로몬의 재위5년째(주전975년)에 시공하여 7년간의 공사를 끝낸 끝에 주전 968년에 준공했습니다(왕상6:37-38). 그러나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두 번째 성전은 스룹바벨 성전입니다. 유대가 바벨론에 포로가 된지 70년 만에 돌아옵니다. 주전535년에 성전재건공사를 시작하여 중단되었다가 주전 516년에 준공되었습니다. 주전169년 수리아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의해 더럽혀졌습니다. 성전의 번제단 자리에 제우스신상을 세웠습니다. 마카비에 의해 정화했지만, 주전63년에 로마의 폼페이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세 번째 성전은 헤롯이 건축했습니다. 그의 재위18년째인 주전20년경 건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헤롯은 18개월 만에 15층 규모로 개축하고, 주전9년경 완성했습니다. 거기에 성전 뜰, 성전 담, 성전 문 등 외곽을 매우 아름답고 화려하게 꾸몄습니다. 이 공사는 주후 64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1000명의 제사장들과 2,0000명이 동원되는 대역사였습니다. 건축에 사용된 대리석만 해도 90-120cm나 되는 규모였습니다. 로마의 하드리아누스는 파괴된 성전 터에 로마식 신전을 세웠으며, 7세기경에는 이슬람사원이 세워졌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나오게 된 시기는 우리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의 유월절 속죄양이 되기 며칠 전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의도를 전혀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헤롯성전의 규모를 그들은 보고 놀랐습니다. ‘그 웅장함이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의 심중에는 이미 멸망될 성전이었습니다.
아무리 교회가 아름답고 웅장해도 그것은 건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거기에 초점을 맞추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건물에 초점을 맞춥니다. 건물의 크기로 목사를 평가합니다. 건물이 크면 목사는 훌륭하게 되어 있습니다. 건물이 작으면 목사는 하찮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의 뜻대로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심판의 대상입니다. 천년된 건물이라도.
각종 재난이 엄습하나 끝은 아님 (0) | 2010.07.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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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심판예고(마태복음23:37-39)
누가복음2장에 나오는 아우구스투스는 시리아속주인 유대에 대한 정책을 탄력적으로 하려고 했습니다. 당시 시리아 속주는 헬레니즘 세계였습니다. 그러나 유대는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였습니다. 즉 다신교사회와 일신교사회가 같이 공존하였습니다. 그때에 수도 로마에도 유대인을 위한 회당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유대 지방에도 다신교 민족을 위한 신전이 있어도 좋지 않겠느냐고 로마인들은 생각했습니다. 로마의 유대에 대한 정책은 주전63년에 예루살렘을 정복한 폼페이우스나 주전48년에 로마의 패권을 확립하기 위해 애쓴 카이사르도 유대를 속주화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로마의 패권을 인정하는 동맹관계로 로마의 우방이 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로마의 폴로루스((Gessius Florus)총독은 유대의 14대총독입니다. 주후66년 6월에 플로루스가 유대의 체납된 속주세 대신 예루살렘 성전에서 금화17달란트를 몰수했습니다. 이로 인해서 유대에서 반란이 일어납니다. 67년 5월에 Nero는 베스파시안으로 하여금 6,0000명을 예루살렘에 투입했습니다. 70년8월10일에 예루살렘이 함락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예언한 대로였습니다.
37절을 보면 하나님의 예루살렘에 대한 과거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하든지 예루살렘을 살리려고 많은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이방인들 편에서 생각하면 너무나 편애하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보내서 그들의 파멸을 예방하려 했습니다. 선견자들을 보냈습니다. 하나님의 대제사장들을 보냈습니다. 이 일을 수없이 반복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번번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났습니다.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선견자들을 죽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계속 그런 일을 반복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에서 이제는 손을 떼겠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즉 손을 떼신다는 것은 거기에서 떠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떠나시면 저들 혼자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떠나시면 사람에게서 아무것도 아닙니다. 너희 집이 황폐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메시야를 영원히 볼 수 없었습니다. 이미 메시야를 보고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모른다는 것은 대단히 슬픈 일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부지런히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전하는 복음을 받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류의 살 길, 사람의 살길을 알려주는데도 믿지 않습니다. 종교편향이라고 하기나 하고, 종교는 자유라고 하고, 왜 당신의 종교를 남에게 강요하느냐 합니다. 복음을 믿는 우리들이 생각할 때에 대단히 슬픈 일입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사는 길을 알려주시는데도 그것을 믿지 않는다면 그보다 더 참혹한 일은 없습니다. 그들이 자랑하던 예루살렘성전이 주후 70년에 파괴되어 지금까지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믿지 않고 죽으면 영원히 파멸됩니다.
격변의 시대가 오나 끝은 아님 (0) | 2010.07.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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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돕는 사람들을 죽인 사람들(마태복음23:29-36)
그들(바리새인들)은 선지자들의 무덤을 단장했습니다. 그리고 비석들을 아름답게 꾸몄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하는 말들이 악어의 눈물이었습니다. 우리들이 만일에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선지자들을 죽이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 했습니다(29-30절). 유대인들은 구약역사를 보면 수없이 많은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애를 먹였습니다. 엘리야, 엘리사, 예레미야, 스가랴 등 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선지자에 대하여 반 게메렌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선지자들은 신정정치의 공무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그들이 들은 바를 말이나 상징으로 공포함으로써 선지자의 역할을 감당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의 특별한 필요를 채우기 위해 보내어진 하나님의 사자였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뚜렷한 소명을 받은 하나님의 대언자였다. 선지자는 이스라엘인이었고, 주의 부르심을 받았고, 성령의 권능을 입었으며, 하나님의 대언자로 역할을 하였고, 그의 권위는 주의 이름으로 말하는데 있었고, 하나님의 백성의 선한 목자였으며, 표징으로 그의 메시지의 진정성을 입증하였다. 선지자들은 종종 선지적 비평과 옛 계시에 대한 해석과 새 계시로 동시대인들의 기대를 산산이 부셨다. 그래서 새 계시가 주는 충격이 너무 커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거부하기도 했다. 선지자들은 선지자의 개인적 특성, 당시의 상황, 백성들의 필요, 계시 내용 등에 따라 달랐다. 각 선지자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 증언하도록 성령에 의해 강권되었다. 선지자들의 메시지는 이스라엘을 살리는데 있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선지자들의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구약성경의 전체를 말씀하십니다.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까지의 피를 말씀했습니다(창4:8/역대하24:20-22). 예수님은 히브리성경 원전의 순서대로 창세기(아벨)를 말씀하고, 역대기(스가랴)를 말씀하셨습니다. 즉 구약시대 전체에 걸쳐서 이스라엘의 죄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죽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조상과 같이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 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조상보다 더 했습니다. 주님과 제자들을 더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박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독사의 자식들, 뱀의 새끼들이라 했습니다. 즉 마귀의 새끼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조상들이 미처 채우지 못했던 악행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의 미래가 100% 좋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의 한 대로 받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를 상대로 핍박하고, 교회를 상대로 사기를 치는 사람들, 주님의 성도들을 죽이는 사람들 결코 심판으로 인해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는 대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하찮게 여기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비웃는 그대로, 그리고 피해를 주는 그대로 주님께서 갚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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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마태복음23:27-28)
이스라엘은 유월절에는 각 지방에서 순례객들이 많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일 년 삼차 정하신 곳에서 여호와 앞에 보여야 했습니다. 신명기16:16을 보면 “너희 중 모든 남자는 일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그때에는 각 지방에서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기 때문에 무덤들을 새로 단장했습니다. 그 이유는 시체로 인해서 사람들이 부정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민수기19:16을 보면 “누구든지 들에서 칼에 죽이운 자나 시체나 사람의 뼈나 무덤을 만졌으면 칠일 동안 부정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순례자들이 시체나 인간의 뼈에 무의식적으로 접촉함으로 인해서 불결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풍상에 빛이 바래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무덤에 회칠을 해야 했습니다. “여기는 무덤이요”라고 표시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칠한 무덤이라고 말하는 것은 겉과 속이 판이하게 다른 것입니다. 무덤의 겉은 흰색으로 칠해져 있지만, 그 안에는 죽은 자들의 뼈와 더러운 먼지들로 가득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회칠한 무덤이라고 했습니다.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더럽다는 것입니다.
위선자들은 기만과 악의로 가득 차 있으면서 겉으로는 거짓치장을 멋지게 합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알아채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바리새인들더라 말하기를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인다 하셨습니다. 실제는 의인이 아닌데 의인(divkaioi)인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겉으로 봐서는 완전히 파악할 수 없습니다. 겉으로는 의인인 것처럼 보이나 안으로는 악행을 일삼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불법이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괴리감이 있는 그들의 행동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외모로 판단했다가 큰 낭패를 당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누구보다 더 지킬 것 같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사람들입니다.
외식(uJpokrithv")이라는 말은 ‘사칭하는 자’라는 뜻도 있고, ‘위선자’라는 뜻도 있으며, ‘불신앙자’라는 뜻도 있습니다. ‘세계에 있는 모든 위선자 중 90%가 예루살렘에 있다’라는 랍비의 말이 있습니다. 위선은 유대교에서 비난 받았던 중요한 죄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특히 바리새인들은 자주 위선적인 처신을 하였으므로 책망을 받았다. 바리새인들은 마치 무대공연자의 연기와도 같은 지극히 고의적인 기만술책을 썼습니다.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이 자주 범하는 죄 중의 하나가 이중인격입니다. 교회에서의 모습과 교회 밖에서의 모습이 다릅니다. 이것은 중직일수록 더 높습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고 사람만을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고 영으로 계시는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은 결과로 발생된 잘못된 것입니다. 이들은 이로 인해서 70년경에 철저하게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품으려고 했지만, 그들은 철저하게 배척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가지고 안과 밖이 달라서는 안 됩니다. 위선은 영을 속이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심판예고 (0) | 2010.07.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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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경된 인도자들 (0) | 2010.07.11 |
의식과 형식에 매인 바리새인들(마태복음23:25-26)
이규태의 한국인의 의식구조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국의 학교에서 선생님이 “알았습니까”하고 물으면 비록 모르더라도 “예”하고 전원일치해서 대답한다. 왜냐하면 전원일치하여 알았다고 대꾸하는 것이 알았습니까 하고 묻는 선생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이같이 선생님의 명분, 학생으로서의 당위, 그리고 모두가 알 것이라는 지배적인 추세 때문에 모른다는 본심을 희생시킨다. 여기서 ‘모른다’고 사실을 말하는 독립적 언행은 용납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국인은 의존적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미학교의 어린이들은모르는 것이 있으면 민망스러울 정도로 완고하게 모른다고 버틴다.
여러 사람이 함께 식당에 들어가 메뉴를 선택할 때, 어느 한두 사람이 선택한 메뉴가 반드시 내가 꼭 먹고 싶은 것이 아니더라도 대개는 그에 휩쓸려 “나도, 나도”하며 동일화하는 다중에 휩쓸라는 습성이 있다.
또한 일상의 교제나 직장생활에 있어서도 이 같은 겉과 얼굴과 속이 다른 이중성으로 공적얼굴과 사적얼굴을 잘 배려함으로써 인간관계를 부드럽게 조종 해 나간다. 예로 만나기 싫은 사람을 오래 만에 길가다 만났다 하자. 속으로는 에이하고, 빨리 가버리라고 속 얼굴은 찡그리면서 겉으로는 “반갑다. 일새 꼭 한 잔 하자”고 겉 얼굴은 웃는다. 외래자나 집을 찾아온 손님에게는 막중하고 과분하게 가계를 희생하면서까지 환대한다. 그 환대 때문에 몇 달 동안 조의조식(租衣租食)을 한다는 건 다반사다.
바리새인들은 어느 것 하나 쓸모 있는 것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거의 버려야 할 것들만 잔뜩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랍비들이 율법위에 여러 가지 규정을 덧붙였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손을 씻는 것입니다.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장로들의 유전으로 법제화를 만들어놓았습니다. 손을 씻는 양과 질, 물 붓는 방법, 그것을 도와주는 사람, 손의 자세 등을 규정해놓았습니다. 이런 의식을 하면서 그들은 자랑했고,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으면 힐난했습니다. 그들은 음식을 먹을 때 대접을 깨끗이 닦았습니다. 이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더러운 그릇에 음식을 먹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이 책망하셨습니까? 그릇은 깨끗하지만, 그 안에 담겨지는 음식은 탐욕과 방탕의 음식이라는 것입니다. 부정부패비리로 얻은 음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그것을 고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대접은 따라서 깨끗해진다는 것입니다.
최근 나라를 위해 일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의 청문회를 보면서 우리들은 심한 배신감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거의 신자들입니다. 그런데 비리와 부패가 없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한국의 기독교를 이 사람들이 망치고 있습니다. 한국의 기독교를 이 사람들이 속한 교회들이 파괴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3:17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파괴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들을 돕는 사람들을 죽인 사람들 (0) | 2010.07.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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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와 인과 믿음을 저버린 바리새인들(마태복음23:23-24)
이번에도 예수님은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들은 철저한 위선자였습니다. 돈의 액수가 작은 것들은 법을 만들어서라도 십일조로 냈습니다. 레위기27:30을 보면 “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이라고 했습니다. 땅의 소산 중에서 십일조를 낼 경우에는 땅의 곡식, 실과의 십분 일을 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박하, 회향, 근채’ 같은 작은 채소들의 십일조는 만들어서라도 냈습니다.
주님께서 이들을 책망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의와 인과 신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도 못하면서 저들이 만든 규례는 융통성 없이 지켰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요구하는 훨씬 중요한 것은 소홀히 취급했습니다. 즉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킨다는 말, 율법의 중요하지 않은 것은 철저하게 지키고, 큼직큼직한 율법, 꼭 지켜야 할 율법은 지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용산에 있는 신용산교회에서 용산참사로 희생된 고 이상림 집사는 이 교회를 15년 간 다녔습니다. 보통 교인의 부음을 들으면 담임목사나 부목사가 교인들과 함께 유가족을 찾아가 예배하며 위로합니다. 하지만 이상림 집사 유가족이 다니던 교회는 참사 8개월이 지나도록 찾아오지도 않고, 위로예배를 하지도 않았습니다. 신용산교회에서 이상림집사의 장례식장을 찾아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교회주보에도 그 내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까? 용산에 재개발 바람이 불면서 신용산교회의 이춘우 장로가 재개발조합장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원로장로가 재개발 사업을 지휘하는 조합장이라는 사실입니다. 한 교회에서 예배하고 동네 이웃으로 지내온 사람이 세입자들을 쫓아내기 위해 폭력과 폭언을 일삼는 용역 직원들을 고용하고, 그들 뒤에 숨어서 대화에 나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는 이 눈치를 보느라고 한 사람도 장례식장에 나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용산교회의 표어는 ‘거룩, 부흥 그리고 나눔’이라고 합니다. 신용산교회는 교회나 선교 단체 17곳을 지원하고 해외 선교사도 21명이나 후원한다고 하며, 정기적으로 이웃을 초청해 잔치를 벌이기도 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한 교회를 다니면서 이해관계 때문에 적을 만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국 성도들이 의와 신과 인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본질에서 벗어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밖으로 잘 한다고 하더라도 안에서 잘 하지 못하면, 곧 교회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해관계를 떠나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것은 교회사에 꾸준히 있어왔고, 앞으로도 계속 발생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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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경된 인도자인 바리새인들(마태복음23:16-22)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맹세를 시정코자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성전으로 맹세하면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했습니다. 어떤 일을 할 때 성전으로 맹세하면 그맹세한 것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성전 안에 있는 금(재물)으로 맹세하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16절). 또한 제단으로 맹세하면 역시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제단 위에 있는 예물(재물)로 맹세하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했습니다(17절). 이들의 잘못은 성전과 성전 안에 있는 예물, 제단과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나누어서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에 그들을 소경이라 했고, 어리석은 사람(mwrov")고 했습니다. 그들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재물로 맹세하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많은 사람들이 따랐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무조건 옳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생각은 뻔합니다. 재물에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위선적입니까? 재물에 눈이 어두워있기 때문입니다. Cavin은 위선이란 실리추구와 깊은 연관이 있다고 했습니다. 통속적인 미신은 대개 목사들의 허욕과 탐욕으로 양육된다고 했습니다. 목회를 하면서도 곁길로 가려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거짓을 말합니다. 성경이 아닌 것을 가르치고 성경이 아닌 것을 말하며, 오직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모든 것을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타락한 예배를 교회 안에 끌어들입니다. 과거 Roman Catholic의 교황제도가 그랬습니다. 재물만 생각했기 때문에 수많은 방법을 통해 숱한 미신이 양산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이나 제단보다는 성전의 금이나 성스런 제물을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무엇이 본질인지를 몰랐습니다. 구약시대에 성전은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성전이 중요한 곳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5:33-37) 예수님은 절대 맹세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늘로도, 땅으로도, 예루살렘으로도, 머리로도 절대로 맹세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맹세를 했습니다. 그리고 성전이나 제단은 하찮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성전이나 제단위의 제물은 귀하게 여겼습니다. 이들에게서 어떤 느낌을 받습니까? 돈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물질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물질이 없으면 단 하루도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물질은 더러우면서 또한 필요하기에 어쩔 수 없이 소유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물질에 대해서 탄력적이어야 합니다. 물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본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아니면, 아닌 것입니다. 아닌 것을 합리화시켜 기정사실처럼 믿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곧 법이기 때문입니다.
의식주의자들 (0) | 2010.07.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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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경된 인도자인 바리새인들 (0) | 2010.07.10 |
사람들을 지옥으로 보내는 사람들 (0) | 2010.07.09 |
심판의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 (0) | 2010.07.06 |
소경된 인도자인 바리새인들(마태복음23:16-22)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맹세를 시정코자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성전으로 맹세하면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했습니다. 어떤 일을 할 때 성전으로 맹세하면 그맹세한 것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성전 안에 있는 금(재물)으로 맹세하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16절). 또한 제단으로 맹세하면 역시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제단 위에 있는 예물(재물)로 맹세하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했습니다(17절). 이들의 잘못은 성전과 성전 안에 있는 예물, 제단과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나누어서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에 그들을 소경이라 했고, 어리석은 사람(mwrov")고 했습니다. 그들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재물로 맹세하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많은 사람들이 따랐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무조건 옳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생각은 뻔합니다. 재물에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위선적입니까? 재물에 눈이 어두워있기 때문입니다. Cavin은 위선이란 실리추구와 깊은 연관이 있다고 했습니다. 통속적인 미신은 대개 목사들의 허욕과 탐욕으로 양육된다고 했습니다. 목회를 하면서도 곁길로 가려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거짓을 말합니다. 성경이 아닌 것을 가르치고 성경이 아닌 것을 말하며, 오직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모든 것을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타락한 예배를 교회 안에 끌어들입니다. 과거 Roman Catholic의 교황제도가 그랬습니다. 재물만 생각했기 때문에 수많은 방법을 통해 숱한 미신이 양산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이나 제단보다는 성전의 금이나 성스런 제물을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무엇이 본질인지를 몰랐습니다. 구약시대에 성전은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성전이 중요한 곳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5:33-37) 예수님은 절대 맹세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늘로도, 땅으로도, 예루살렘으로도, 머리로도 절대로 맹세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맹세를 했습니다. 그리고 성전이나 제단은 하찮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성전이나 제단위의 제물은 귀하게 여겼습니다. 이들에게서 어떤 느낌을 받습니까? 돈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물질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물질이 없으면 단 하루도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물질은 더러우면서 또한 필요하기에 어쩔 수 없이 소유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물질에 대해서 탄력적이어야 합니다. 물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본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아니면, 아닌 것입니다. 아닌 것을 합리화시켜 기정사실처럼 믿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곧 법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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