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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이유(마태복음17:14-20)
예수님을 비롯해서 세 제자가 9제자에게 이르렀을 때입니다. 한 사람이 성급하게 예수님께 무릎을 꿇고 간청했습니다. 그 사람은 간질병을 앓는 아이의 아버지였습니다. 수시로 간질병을 앓기 때문에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넘어졌습니다. 이 사람이 아홉 제자들에게 고쳐달라고 했으나 고치지를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시자 퉁명스럽게 당신의 제자들이 고치지 못하더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패역한 세대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사람의 아들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우리는 어째서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그 이유를 예수님은 믿음이 적은 연고라고 하셨습니다. 만일에 겨자씨 한 알의 믿음이 있으면 못할 것이 없으리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대를 패역한 세대라고 하셨습니다. 언뜻 들으면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 같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을 책망하신다면 이 세대를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을 주님께서 책망하셨습니까?
먼저 주님의 치료능력을 믿지 못하는 그의 아버지입니다. 마가복음9:22-24을 보면 “22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24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주님을 믿지 못하고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주님께 맞지 않습니다. 곧바로 ‘도와주소서’라고 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서기관들입니다. 병행구절인 마가복음9:14을 보면 서기관들이 제자들이 고치지 못하니까 고소해 했습니다. 서기관이라면 적어도 제자들과 합심해서 기도하여 고쳐주소서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했고, 고치지 못하니까 ‘거참 고소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들에게만 관심이 있는 일반 백성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이야 아프던 말던 나의 일이 아니면,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는 그들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전심으로 믿음을 가지고 구하지 못한 제자들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믿음이 적다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적은가? 한 겨자씨만큼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적다는 것은 양(量)이 아니라 질(質)입니다. 제자들은 전혀 믿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능력이 나타나지 않은 것입니다. 믿음이 전혀 없었다는 것은 불신입니다. 주님의 능력을 의심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믿음은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어떤 행위가 아니라 주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마음입니다. 살아 있는 믿음은 우선 하나님을 확신합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충분히 해주시리라는 확신없이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산이 제거되어야 한다면 산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산이 깎여져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결과에 따라서 역사가 판가름 납니다. 믿음은 주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성전세를 내시는 예수님 (0) | 2010.05.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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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왜 또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0) | 2010.05.17 |
왕을 배반한 종교지도자들 (0) | 2010.05.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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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도 (0) | 2010.05.11 |
왕을 배반한 종교지도자들(마태복음17:9-13)
여론을 호도하는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입니다. ‘호도(糊塗)’라는 말은 ‘풀을 바른다’는 뜻입니다. 즉 명확하게 결말을 내지 않고 일시적으로 감추거나 흐지부지 덮어 버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특히 일부 언론사들이 이런 일들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말하지 않고, 심하게 왜곡해서 신문이나 방송에 내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실을 왜곡한 사건을 그대로 믿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양심을 돈이나 권력에 팔기 때문에 제대로 보도하지 않고 왜곡되게 보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의 서기관들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야가 아닌 증거로 엘리야가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약속되어 있었습니다. 말라기4:5절과 6절을 보면
5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분명히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기관들은 엘리야가 먼저 오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디셉사람 엘리야를 기다렸습니다. 제자들마저 그러한 생각에 젖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베드로를 통해서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고백했습니다(마16:16). 그러나 제자들마저 엘리야가 오지 않았음에 갈등을 했을 것입니다. 엘리야가 와서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의 말이 맞다고 했습니다. 즉 엘리야가 먼저오고, 다음으로 메시야가 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연 엘리야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요1:19,21 19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거가 이러하니라 21또 묻되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야냐 가로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마11:10,14 10기록된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14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찐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눅1:17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예수님은 그 엘리야가 왔는데 사람들이 임의로 대우했다는 것입니다. 그제서야 그 엘리야가 세례요한임을 알았습니다. 엘리야는 문자적인 엘리야가 아니라 상징적으로 세례요한에게서 성취된 것임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의 예언대로 오셨고, 성경대로 사셨으며, 성경의 예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아무리 사단이 훼방하고 호도해도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시려고 성경대로 오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전혀 오차가 없었습니다.
주님 왜 또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0) | 2010.05.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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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이유 (0) | 2010.05.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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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신분을 제자들에게 보이심(마태복음17:1-8)
힘을 실감나게 묘사한 것이 암행어사 출도입니다. 암행어사는 조선시대 왕명을 받고 비밀리에 지방을 순행하면서 악정(惡政)을 규명하고 민정을 살핀 임시관직입니다. 암행어사의 임명과 임무는 일체 비밀에 붙여졌습니다. 국왕이 직접 임명하여 봉서(封書)·사목(事目)·마패·유척(鍮尺) 등을 수여했습니다. 그런데, 숭례문을 나서야 봉서를 뜯어보게 되었습니다. 봉서에는 누구를 무슨 도의 암행어사로 삼는다는 신분표시와 임무의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암행어사는 미복(微服)으로 암행하여 수령의 행적과 백성의 억울한 사정 등 민정을 자세히 살펴, 필요할 경우 출도(出道:露蹤)하여 그 신분을 밝혔습니다. 수령의 잘못이 밝혀지면 그 죄질에 따라 관인을 빼앗고 봉고파직하여 직무 집행을 정지시키고, 임시로 형옥(刑獄)을 심리하여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었습니다.
제자도를 가르치신(16:23-28)후 엿새가 지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요한,야고보 세 제자만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어떤 산인지는 확실치 않습니다(1절). 세 제자들 앞에서 갑자기 예수님이 변형되셨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습니다. 옷도 그랬습니다. 빛과 같이 하얘졌습니다(2절).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습니다. 저희들이 예수님과 더불어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한 모습이 제자들에게 보였습니다(3절). 그때 베드로가 자신도 모르게 말했습니다. 초막 셋을 지어서 각각 모시겠다는 것입니다(4절). 베드로가 그렇게 말할 때에 하늘의 구름 속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6절). 이에 제자들이 심히 두려워하며 엎드렸습니다(6절). 예수님이 그들을 보고 두려워말라고 하셔서 일어나보니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7절). 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주셨습니까? 예수님의 정체성을 그들에게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16:28의 ‘인자가 자기 왕권을 차지하고 오는 것을 볼 사람들도 있다’는 구절의 설명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를 만난 것은 구약성경의 대표자들을 만난 것입니다. 율법의 대표자인 모세, 선지자의 대표자인 엘리야이기 때문입니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제자들에게 구름 속에서 말씀했습니다. “너희들은 오직 그리스도로만 만족하고 그만 따르라”는 뉘앙스의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오직 그리스도만 믿고 의존해야 함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의 정권은 로마황제가 가지고 있었습니다. 총독인 빌라도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분봉 왕 들에게 권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변형된 예수님을 본 제자들은 예수님이 실제적인 왕권을 가지고 있었음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이들은 주님의 왕권을 실제로 본 사람들이기 때문에 후에 그들은 최선을 다해서 주님을 섬길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이 실제 왕입니다.
실패한 이유 (0) | 2010.05.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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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도 (0) | 2010.05.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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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신앙고백 (0) | 2010.05.09 |
제자도(마태복음16:24-28)
어떤 단체든지 정관이 있습니다. 여러 사람들을 통솔하려면 규칙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 규칙대로 움직이려 합니다. 왜냐하면 규칙에 그 단체에 필요한 요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더러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는 사형수들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따르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각오만 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죽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 즉 자기와의 싸움은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요소입니다. 수많은 일들을 자기와의 싸움에서 처리해야 합니다. 수많은 요소들이 자기와의 싸움에서 신앙으로 나아가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이 어렵습니다. 자기부인, 즉 자기와의 싸움에서 패배하면 가벼운 십자가조차도 지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순교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생명에 대한 원리를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생명의 원리는 자신의 목숨을 어떻게 귀하게 여기느냐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목숨을 아주 귀하게 여깁니다. 이 목숨을 위해서 사람들은 거의 일생을 바칩니다. 왜냐하면 생명이 떨어지면 모두 끝나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위해서 사람들은 한 없이 비겁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생명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산다는 것입니다. 목숨을 귀한 줄 알면 버리라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역설적인 말씀을 하십니까?
이 세상은 예수님에게 적대적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그의 추종자들을 편안하게 해주지 않습니다. 1세기부터 시작된 로마의 박해는 1차 박해(64-96년), 2차박해(98-249년), 3차 박해(249-313년),기간에 엄청난 성도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이후로도 현재까지 엄청난 사람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순교당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이 세상의 방식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권력이 성도들을 죽인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이러한 각오와 신앙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각오와 신앙을 예수님이 요구하십니까? 생명 때문입니다.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부인하고 즉 이 세상의 삶에서 탈피한 성경중심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풍속과 삶을 좇아가는 것은 곧 생명을 영원히 포기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 영원한 삶은 아예 기대를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심판의 왕권을 가지고 사람들을 심판할 때 자기를 부인하지 않은 사람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역설적인 구원에 대해서 심층 생각해야 하며, 구원을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왕을 배반한 종교지도자들 (0) | 2010.05.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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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무슨 말씀입니까? (0) | 2010.05.10 |
베드로의 신앙고백 (0) | 2010.05.09 |
잘못된 교훈들 (0) | 2010.05.08 |
주님 무슨 말씀입니까?(마태복음16:21-28/21-23)
제자들은 기분들이 좋았습니다. 자신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새로운 교회를 세우게 한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바라던 메시야가 바로 자신들의 스승이라고 생각하니 정말 좋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이시며, 만왕의 왕이신 분께서 자신들의 스승이라고 하니 생각만 해도 좋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죽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은 후, 죽임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3일 후에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정말 기가 막혔습니다. 하루 안에 천국과 지옥을 갔다 온 것과 같았습니다. 왜 꼭 그래야만 하실까? 능력이 없으면 말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만한 능력이면 어떤 것도, 누구도 당해내지 못할 텐데 꼭 그래야만 할까? 제자들은 저마다 깊이 생각했습니다.
아무래도 베드로는 내가 나서야겠다고 생각한 결과, 주님께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렸습니다. 결코 그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주님께 고했습니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베드로를 칭찬했던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사탄이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아마도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수난을 당해야 한다고 했는데 베드로는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베드로를 심히 책망했습니다. 베드로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주님의 하시는 일을 베드로가 강하게 막은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베드로가 주님을 실족하게 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이라 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로마카톨릭이 생각하는 베드로와는 너무나 다릅니다.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부르시는 주님의 말씀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왜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까? 왜 하늘의 보좌를 비워놓고서 이 땅에 들어오셨습니까? 하나님은 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까? 그것은 마귀를, 사탄의 나라를 폭파하고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망을 죽이고,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이스라엘에 제사제도가 생겼습니다. 속죄제를 모형적으로 드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이 일을 막은 것입니다. 왜 막았습니까?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람의 일, 즉 인정을 생각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프로젝트를 막은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진로를 스승과 제자라는 인정으로 막은 것입니다. 실상은 베드로가 한 것이 아니라 사탄이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베드로를 이용하려 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에서 항상 하나님의 생각을 우선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베드로처럼 되기가 쉽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들이 구원의 문을 닫게 해서는 안 되며, 사람들을 구원받지 못하게 하면 그 일이 곧 사탄의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신분을 제자들에게 보이심 (0) | 2010.05.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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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도 (0) | 2010.05.11 |
베드로의 신앙고백 (0) | 2010.05.09 |
잘못된 교훈들 (0) | 2010.05.08 |
표적보이시기를 거절하신 예수님 (0) | 2010.05.07 |
베드로의 신앙고백(마태복음16:13-20)
가이샤라 빌립보(Kaisavreia Fivlippo")의 이름을 가진 도시가 팔레스타인에 두 개 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데가볼리 지방의 중심부에 있는 도시 중 하나로, 다메섹 남서쪽 약 80㎞ 지점, 헬몬 남쪽의 경사가 심하고 경치가 좋은 산간 지방입니다. 알렉산더 이후 헬라 사람들이 이 지역으로 모여 들었을 때 그들은 그곳을 전과 같이 신성시하여 그 판(Pan)을 위하여 사당을 세우고 그것을 파네이온(Paneion)이라 불렀으며, 그 지역을 파네아스(Paneas)라고 했습니다. 헤롯1세는 그 당시의 유대인과 로마인을 달래는 이중정책을 하고, 그는 아우구스투스(Augustus)가 이 도시를 자기의 영지로 준 사실을 기념하여 로마와 아우구스투스를 위한 성전을 지었습니다. 분봉왕 빌립은 황제의 영광을 기리며, 이 성읍을 더욱 아름답게 단장하고 해안 지역의 가이사랴와 구별하기 위해 빌립보를 덧붙였습니다. 그 후 아그립바Ⅱ세가 이곳은 네로를 경하하는 의미에서 이곳을 ‘네로니아스’(Neronias)라 호칭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로 인식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시중에 떠돌아다니는 예수님에 대한 인식을 물은 것입니다. 제자들이 대답하기를 어떤 사람들은 세례요한,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 어떤 사람들은 선지자 중의 한 선지자라고 인식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들은 누구로 인식하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su; ei oJ Cristov", oJ uiJo;" tou' qeou' tou' zw'nto").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예수께서 이 반석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교황주의자들처럼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이 반석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신약성경은 베드로 한 사람에게 교회의 기초를 놓지 않습니다. 사도들 전체가 교회의 토대입니다. 그들의 개인적인 특성 때문에 세우신 것이 아니라 그들 전체를 선택하시고 신앙과 진리를 가르치셔서 교회의 교사들로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처럼 자신의 인격의 토대위에 교회를 세우십니다. 이 토대는 예수님과 사도들의 권위 있는 가르침으로서 표현되었습니다. 또한 주님의 교회는 베드로처럼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는 사람들로 구성됩니다.
교회는 죄를 묶거나 풀어주는 일을 합니다. 이 일들은 지상의 세대전체에 걸쳐 지속될 것이며, 주님은 이 일들을 위하여 자신의 공동체를 세우십니다. 로마 카톨릭처럼 세속권과 영적인 권한을 가지고, 사람을 탄압하고 죽이라고 권세를 준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로마카톨릭을 위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전혀 아닙니다. 주님은 주님자신의 토대위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제자도 (0) | 2010.05.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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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무슨 말씀입니까? (0) | 2010.05.10 |
잘못된 교훈들 (0) | 2010.05.08 |
표적보이시기를 거절하신 예수님 (0) | 2010.05.07 |
4000명을 먹이신 예수님 (0) | 2010.05.05 |
잘못된 교훈들(마태복음16:5-12)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6절). 이들의 누룩은 어떤 누룩입니까? 이들의 누룩은 하나님의 말씀과는 정반대되는 인본주의적인 교훈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의 교훈(누룩) : 바리새인들은 형식적인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가 아니라 자신들로부터의 신앙이 출발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힘으로 얻는 의를 강조했습니다. 이들은 모세율법 외에도 각종 구전 전승을 정경과 동일하게 취급하여 권위 있고, 영감 된 것으로 인정하였습니다.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주권은 상충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이들은 당시 민중들의 존경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민중과 밀착된 그들의 잘못된 교리는 그리스도의 비판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이상하리만치 율법에 집착했습니다. 이들의 교훈은 신학적인 면보다 윤리적인 면이 강했습니다. 대체적으로 인본주의자들의 교리가 윤리적인 것들을 강조합니다. 이들이 그랬습니다.
사두개인의 교훈(누룩) : 바리새인에 비해서 사두개인들은 자진해서 헬라의 문화를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이들은 민족의 자유를 위한 마카비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제사장을 돕는 종교적인 관리이면서도 철저하게 비종교적이었습니다. 바리새인에 비해서 수가 적었지만 영향력이 컸고 부유했습니다. 이들은 산헤드린을 어느 정도 지배했으며, 합리적인 생각을 했습니다. 부활도 믿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세족주의자들이었습니다. 모세오경만을 정경으로 인정했으며, 나머지 전승문서들의 권위는 부인했습니다. 내세, 부활, 영적인 세계,천사와 마귀들의 존재를 믿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현실주의자였기 때문에 경건한 마음도 없었고,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사람의 교훈을 받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나쁜 일일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쁜 사람들의 교훈을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누룩은 사람을 실속 없이 팽창시킵니다. 하나님이보실 때 견고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당시 교회 안에서 포악스럽게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율법과 선지자들을 가르치되 자기들의 그릇된 교리를 섞어 가르쳤습니다. 건전하고 온전한 것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백성들의 존경과 신망을 받았습니다. 문제가 이것입니다. 사람들의 인기가 진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름 있는 목회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은 과거에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경계해야 할 누룩이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슬프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다워야 하는데 오히려 세상 사람들보다 더한다면 그는 이미 끝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빙자해서, 성경을 빙자해서 자신의 일신을 위해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들처럼 인본주의적인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배척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 무슨 말씀입니까? (0) | 2010.05.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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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신앙고백 (0) | 2010.05.09 |
표적보이시기를 거절하신 예수님 (0) | 2010.05.07 |
4000명을 먹이신 예수님 (0) | 2010.05.05 |
갈릴리호수가에서의 치료 (0) | 2010.05.04 |
표적보이시기를 거절하신 예수님(마태복음16:1-4)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끈질기게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지난번에 예수님께 표적을 보여 달라고 했다가 거절을 당하자(마12:38-40), 이번에 재차 그 문제를 들고 나왔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나 선지라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표적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기적과 이적과 표적을 보여주었는데도 이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표적을 보이라고 요구하신 것입니다(1절).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표적을 보여주시기를 거절하셨습니다. 그들이 최소한 하루의 일기는 예측하면서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고 하시면서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2-4).
마태복음12:38-40의 상황과 비슷한 것 같지만, 실상은 많이 다릅니다. 그때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질문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이 같이 질문한 것입니다.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은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노선이 전혀 다릅니다. 예로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믿었지만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내세를 믿었지만, 사두개인들은 내세를 믿지 않는 현실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과 어울린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제거하는 데는 너나 할 것 없이 한 패거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국회에서 정말 부끄러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미디어법을 불법으로 통과하여 나라가 부끄럽고 시끄럽습니다. 그런데 한 야당이 여당과 같이 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노선이 다릅니다. 그런데 미디어법에 관해서는 한 목소리를 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이 한 것입니다. 참 묘한 분위기입니다. 국민들의 70%가 반대하는 미디어법을 그들이 기어이 통과시키겠다는 것입니다. 헌재에 제소되어 있는 건을 압박하기 위해 여당에서는 문제없다는 말을 계속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구하러 오신 하나님께 항상 반기를 들었습니다.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철저하게 이중적인 신앙생활을 해왔습니다. 그러면서 이들은 인본주의신앙으로 발전해갔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에 덧칠을 한 그림 같았습니다. 이 사람이 와서 원래 그림에 덧칠을 했습니다. 저 사람이 와서 그림에 덧칠을 했습니다. 도무지 그림을 알지도 못한 사람들이 그림에 덧칠을 했습니다. 후에는 그림인지 먹칠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원래의 그림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하라는 계명은 지키지 않았습니다. 하지 말라고 하는 계명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도 믿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이 과거에 섬겼던 하나님의 말씀도, 주님의 말씀도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악하고 음란했습니다. 세상의 술에 깊이 취했고, 마귀의 잔에 춤추는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들은 이들과 같이 강퍅하지 않아야 하며, 항상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시대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주님의 말씀을 항상 묵상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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