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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명을 먹이신 예수님(마태복음15:32-39)
지난번에는 5000명을 먹이셨습니다(마14:13-21). 몰론 여자와 아이외에 남자만 5000명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은 무려 사흘을 함께 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준비했던 식량은 이미 바닥이 났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이 집에 가다가 길에서 기진할 것을 우려하셨습니다(32절). 이번에도 제자들은 ‘광야인데 어디서 이 사람들이 먹을 만큼의 떡을 구하리이까?’라고 했습니다(33절). 예수님은 그들에게 떡이 몇 개가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확인결과 떡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였습니다(34절). 예수님은 지난번처럼 무리들을 식사대형으로 앉혔습니다(35절). 예수님은 그것들을 축사하시고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었습니다. 제자들은 무리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36절). 한사람씩, 열씩, 백씩, 천씩 거기 있는 무리들 전체가 그 떡과 생선을 먹었습니다. 37절을 보면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가득 차게 거두었습니다. 먹은 사람들은 여자와 아이 외에 4000명이었습니다(38절). 예수님은 무리를 흩어 보내시고 마가단 지역으로 가셨습니다(39절).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습니다. 자칫 대충 읽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독(多讀)보다 정독(精讀)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5000명(여자와 아이를 제하고)과 4000명(여자와 아이를 제하고)을 비교하여 먼저번보다 숫자가 적은 것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은 반복해서 기적을 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언제라도 기적을 행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항상 주님의 기적은 풍성합니다.
5000명/마14:20,21: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사람은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4000명/마15:37,38: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자는 여자와 아이 외에 사천 명이었더라
남은 것을 거둔 것을 보아도 풍성합니다. 바구니(kovfino")는 어린아이는 들어가도 성인은 들어갈 수 없는 작은 것입니다. 그러나 광주리(spuriv")는 성인도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행9:25 그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 내리니라).
예수님의 기적은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 사람을 살리려고 이 세상에 들어오셨습니다. 하늘 영광을 잠시비우고서 낮아진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사람을 살리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이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성경을 비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사람들을 위해서 한 일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것, 사천 명을 먹이신 것도 생명을 살리고자 하신 것입니다. 성도들은 생명을 살리는데 앞장을 서야 합니다. 생명을 죽이는 것은 마귀가 하는 일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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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호수가에서의 치료(마태복음15:29-31)
사람들에게서 사람들을 사랑해야 하는 긍휼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는 교회가 맘몬에 깊이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용산참사로 6명 사망, 쌍용차사태, 경인전철 공사 중 안전장치 미흡으로 철근이 무너져 5명이 사망하는 사건, 국회에서 여당이 조중동에 방송을 몰아주고자 날치기한 사건 등 무엇하나 제대로 돌아가며, 사람을 긍휼히 보지 않는 사건만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회는 어떤 상황이라도 냉정을 잃지 않고 사람들을 긍휼히 여겨야 하는데, 오히려 교회가 앞장서서 사람들을 핍박하고 있습니다. 상당히 많은 교회들이 정권과 야합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가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 기회를 놓쳐버린 것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재정이 풍부하다보니 목회자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습니다. 심판의 자리에 앉아서 세상을 심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심판하고 있습니다. 전도해야 할 사람들을 심판하여 교회를 싫어하는 짓만 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저명했던 사람들이 하룻밤 사이에 저질로 바뀌어버렸습니다. 따라서 교회가 긍휼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지금 우리주변의 BY교회는 엄청난 건물에 엄청난 땅을 계속 사들이고 있습니다. 주변에서 하나같이 손가락질을 하고 있습니다. 교인들을 모으기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목회자들, 작은 교회의 성도들을 빼앗기 위해 별별 프로그램을 개발해서 단계별로 공부를 시키는 파렴치한의 대형교회들, 이들에게서 예수님의 긍휼의 냄새라고는 코를 아무리 청소하고 맡으려고 해도 맡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두로와 시돈을 떠나 갈릴리 호숫가로 가셨습니다. 근처의 산에 올라가셔서 앉으셨습니다(29절). 그때 큰 무리가 예수님께 많은 병자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다리장애자들, 불구자, 소경, 벙어리, 등 각색 병을 앓는 사람들을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그런 자들을 예수님은 모두 고쳐주셨습니다(30). 고침을 받은 그들은 벙어리가 말을 하고, 불구자가 온전해졌습니다. 절뚝발이가 걸었으며, 소경이 보게되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서 사람들이 기이히 여기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행보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신 것에서 출발합니다.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는 사람들은 잔인합니다. 성도라면 잔인하지 않아야 하는데 잔인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 세상이 천국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현 정국은 대통령부터 시작해서 정부요직에 앉은 사람들이 신자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역대 어느 정부보다 잔인한 정부입니다. 사람을 때려잡습니다. 조금만 정부를 비판하면 잡아가둡니다. 어느 정부보다 민주화를 해야 할 정부가 독재정부를 세우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잔인하기 때문입니다. 잔인하니까 사람들을 함부로 대합니다. 이들 때문에 한국교회가 심히 멍들어가고 있습니다. 한국의 대형교회가 긍휼을 버리고 권력과 손을 잡은 것은 심히 유감스런 일입니다. 하나님은 한국교회를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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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뢰아 사역/가나안여자의 믿음(마태복음15:22-28)
마태복음1:1-4:11은 예수님의 사역의 시작입니다. 4:12-20:34까지는 계속적인 사역입니다. 그 사역 중에서 4;12-15:20은 갈릴리사역이며, 15:21부터 20:34까지는 베뢰아 사역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이방인의지역에 들어가셨습니다. 사역을 하러 가신 것이 아니라 쉬시려고 가셨습니다. 그러나 쉴 수가 없었습니다. 두로와 시돈지방으로 가셨지만 이미 주님에 대한 소문이 쫙 퍼졌기 때문입니다(21절). 지나가시는 길에 한 가나안 여자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자기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 여자는 마가복음7:26을 보면 이 여자는 헬라인이며 수로보니게 족속이었습니다. 헬라인이란 그리스사람이라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을 말합니다. 이방인은 오히려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부릅니다(22). 그러나 예수님은 한 말씀도 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그 여인이 소리를 지르니까 보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의 간구에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 여인이 몇 번 불러서야 예수님은 그 여인의 기대에 전혀 미치지 못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외에는 신경을 쓰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외에는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이 여인을 개처럼 취급했습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지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자녀요, 이방인들은 개라는 말씀입니다(26). 그러나 가나안의 여인은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했습니다(27). 이에 예수님은 그 여인의 소원을 들어주었습니다. 그 여인의 믿음이 크다고 했습니다. 소원대로 네 딸이 귀신의 세력에서 놓였다고 하셨습니다.
도대체 믿음은 무엇입니까? 어찌 보면 이 사람은 당시로서 언약 밖의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 여인은 아브라함의 자녀였습니다. 육신적으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녀라 했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오히려 이들이 언약 밖의 사람들입니다. 이런 것을 봐서 예수님은 이 아브라함의 자손인 수로보니게 족속의 가나안 여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두로와 시돈지방에 가신 것입니다.
우리들은 믿음이라는 것은 인내를 요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갖은 말을 다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한결 같았습니다. 딸만 고친다면 어떤 수모도, 어떤 어려움도 다 겪어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이 여인은 그 모든 것을 다 참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여인을 더욱 사랑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신앙에 간절함과 인내가 묻어있지 않는다면 신앙생활 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포기하지 않는 믿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아야 합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끝까지 인내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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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인도자들(마태복음15:12-14)
해외여행을 할 때는 흔히 guider를 둡니다. 여행을 편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해외여행은 흔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안내자가 없으면 좋은 여행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여행사들이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그들을 믿고서 좋은 여행을 할 수 있습니다. 여행사들은 해외지리와 기후 등을 가장 잘아는 사람들을 모집해서 여행을 잘 할 수 있도록 합니다. 좋은 안내자를 많이 둔 여행사들이 많은 고객들을 모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책망할 때 제자들이 있을 때 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된 줄 아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왜냐하면 종교지도자들은 무척 화가 났습니다. 면전에서 질못 된 사람으로 낙인찍힌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기들이 보물처럼 여기는 장로들의 유전이 한 순간에 허물어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예수님 말씀처럼 자신들의 유전이 틀려서 허물어진다면 큰일이 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무슨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말을 의식했습니다. 아무래도 그들의 신경을 건드려서 좋을 것이 없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그러한 것을 염두에 두셔서 말씀하시라는 암시를 주었습니다. 그들을 건드려봐야 좋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심지 않으신 것은 모두 뽑힐 것이라 했습니다. 뽑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마귀가 심은 가라지입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뽑혀서 불에 태워버립니다. 이 일은 최후심판 때에 행하여집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오히려 관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즉 신경 쓰지 말라고 하십니다. 저들은 이미 소경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들의 인도대로 간다면 틀림없이 사망의 구덩이에 빠질 것이라 하셨습니다. 문제는 이들이 훌륭한 지도자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들도 그렇게 생각했고, 그들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 모두 문제라 하셨습니다. 그들이나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 구덩이에 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television에 바쁘게 출연하는 목사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아닌데 이쪽 television도 보이고, 저쪽 television에도 보입니다. 코미디를 사용하면서, 복음을 코미디로 전락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그 행위가 자못 심상치 않습니다. 그런데 television의 이쪽저쪽에 출연한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장로라고 하고, 목사라고 합니다. 자신은 지도자고 주변들도 그렇게 믿습니다. 아무리 봐도 아닌데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런 것을 보면서 주님의 말씀을 볼 때 두렵기까지 합니다. 성도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는 것을 볼 때에 할 일을 잊어버릴 정도입니다. 눈먼 인도자들이 누구를 인도하겠다고 하는지 한심할 노릇입니다. 복음으로 자신의 기회를 찾는 자들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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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죄(마태복음15:10-11,16-20)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는 것에 토를 달았습니다(1,2절). 손을 씻고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장려할만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위생상 좋기 때문입니다. 손에 병균을 씻어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손을 자주 씻는 것은 칭찬할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들을 왜 책망합니까? 이들이 본질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계속 말씀을 이해하라고 하십니다(13:51,15:10). 예수님은 외적인 정결보다 마음의 정결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했습니다. 마음의 성결이 보여지는 외적인 성결보다 훨씬 낫다는 것입니다. 대체적으로 모든 종교들이, 또는 모든 사람들이 눈에 보여지는 것을 더 가치 있게 평가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보여지는 행동보다 보이지 않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했습니다.
11절을 보면 입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음식입니다. 손을 씻고 먹든, 씻지 않고 먹든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더럽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말입니다, 이 말 중에서 더러운 말이 있다는 것입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옵니다(18절). 이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은 거의 사람을 죽이고 훼방하는 것들입니다. 악한 생각(dialogismoi; ponhroiv), 살인(fovnoi), 간음( moicei'ai), 음란(pornei'ai), 도적질(klopai), 거짓증거(yeudomarturivai), 훼방( blasfhmivai)입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입에서 나오는 즉 생각에서 나오는 죄들입니다.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깨끗이 씻고 위와 같은 일들을 저지르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합니다.
역사적으로 전쟁을 일으켜서 사람을 죽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모르는 사람들은 그들을 영웅이라고 말합니다. 실은 도둑들이고, 살인자들인데 그들을 전쟁영웅이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면 자신을 위해서 전쟁을 일으킨 수많은 왕들이 그런자들입니다. 시저, 알렉산더, 징기스칸, 풍신수길, 히틀러, 무쏠리니, 교황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겉으로는 의식상 정결하게 손 씻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는 악한 생각들이 잔뜩 들어 있었습니다. 악독한 마음들이 있기에 수백 만 명을 수 천만 명을 죽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웬만한 사람들이 이 안에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악한 생각, 살인, 간음 음란, 도적질, 거짓증거, 훼방 등에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위의 높고낮음에 관계없습니다. 우리는 청문회 때 종종 기억에 없습니다. 하면서 눈 번히 뜨고서 거짓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간음하는 사람들, 악한 생각하는 사람들, 살인하는 사람들을 먼 나라에서가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현재 일어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마음의 죄는 우리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항상 묵상하며 말씀을 의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닙과 가까이하는 것이 죄로부터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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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과 속이 다른 유대인들(마태복음15:7-9)
충신과 간신의 차이는 이중성의 마음을 쓰느냐 안 쓰느냐의 차이점입니다. 충신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반드시 합니다. 백제의 성충·흥수·계백은 충신들입니다. 성충(成忠)?-656(의자왕16)은 백제 의자왕 때에 좌평(佐平)이었습니다. 656년 의자왕이 신라에 대한 성공적 공략에 도취되었습니다. 그러자 음란과 향락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습니다. 이에 성충은 적극적으로 간했습니다. 그러나 성충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옥에서 죽기 전에 의자왕에게 글을 올렸습니다.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으니 한마디 하고 죽겠다. 시국의 사변들을 보건대 반드시 전쟁이 있을 듯 하다. 반드시 상류에서 대적을 맞이해야 보전할 수 있다. 만약 다른 나라 군사가 오면 육로로는 침현(沈峴:또는 炭峴, 충남 대덕군)을 지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伎伐浦/강 하구) 연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며 험준한 곳에 의존하여 적을 막아야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660년 백제가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자 흥수(興首)가 다시 한 번 이 방책을 권했으나, 의자왕은 듣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적군을 맞았습니다. 결국 패배하여 도성이 위급해졌습니다. 의자왕은 성충의 말을 듣지 않고 그 지경이 된 것을 후회하며 웅진성(熊津城공주)으로 피난하고, 둘째 아들 태(泰)가 자립하여 왕이 되어 저항했으나 사비성은 함락되었습니다. 의자왕이 소정방(蘇定方)에게 항복함으로써 백제는 멸망했습니다.
충신은 나라와 임금을 위하여 행동을 합니다. 하지만, 간신은 나라와 임금을 위하는척합니다. 그러나 실은 자신을 위하여 살아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나지금이나 간신은 많고 충신은 적습니다. 그러니 국민들의 형편은 점점 나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외식하는 자들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사야서를 인용했습니다. 이사야29:13을 보면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겉으로는 어떤 민족보다 하나님을 잘 믿는 척했습니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입술로는 주님을 존경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천리 밖이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만든 계명을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은 오늘날의 교회에 편재해 있는 상황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입술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말하지만 실상은 신앙이 하나도 없는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것이 우선이어야 하는데, 자신들의 안위와 안전입니다. 목사가 리무진을 타고, 자녀들은 모두 유학으로, 초호화별장까지 갖추어 하나님 무서운 줄 모르고 있습니다. 교회의 건물은 천국인데 하는 짓들은 지옥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고르반제도(마태복음15:3-6)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질문에 예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대답이라기보다는 그들의 잘못 행하고 있음을 지적하셨습니다. 장로들의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3). 10계명 중 부모공경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고, 어미를 훼방하는 자들은 계명에 죽이라고 하였는데(4절), 그들은 부모에게 어떤 것을 주고 싶지 않을 때는 하나님께 드렸다고 선언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마가복음7:11을 보면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고르반(korba'n)은 ‘하나님께 바쳐진 예물’을 의미하는데 구약성경에서 코르반은 ‘하나님께 드려진 것’을 가리켰습니다(민7:3).
10계명에는 부모 공경조항이 있습니다.
출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신5:16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한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만일에 이것을 어기면 형벌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출21:17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찌니라
레20:9 무릇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찌니 그가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였은즉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예수님은 이들의 잘못으로 우선 제5계명을 들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잎만 무성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어떤 규례에 넣었습니다. 자신들의 잘못에 안전장치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부모공경을 교묘하게 회피하였습니다. 그들은 부모를 섬겨야 할 어떤 것이 ‘고르반’(korban) 곧 ‘하나님께 바친 물건’ 이라고 말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과일밭이 있으면 그 소출의 일부를 부모에게 드려야합니다.그런데 유대인들은 그 소출의 일부를 부모에게 드리는 것을 아깝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교묘하게 생각해 낸 방법이 그 과일밭을 하나님께 바친 것 곧 ‘고르반’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면 그 밭은 하나님께 바쳐진 성물이 됩니다. 그러면 그 소출로는 부모를 섬기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고르반’만 선포했지 실상은 고르반이 아니었습니다. 말만 고르반이었습니다. 참 편리하게 법을 변경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말도 안 되는 유전으로 묶어놓으려 했습니다. 오늘 이 땅의 소위 자기들이 크다고 하는 목사들은 자신들의 법을 만들어서 휘두르고 있습니다. 교인 몇 만명 된다고 그것을 힘으로 생각하고 휘두르려고 합니다. 오늘날 이들이 바리새인이요 서기관들입니다. 예수님의 의중을 조금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엘리트의식만 잔뜩 든 거품만 잔뜩 들어있는 의식 없는 목사들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읽지 못하고 정치의 개 노릇만 하는 목사들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죄 (0) | 2010.05.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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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과 속이 다른 유대인들 (0) | 2010.04.29 |
장로들의 유전 (0) | 2010.04.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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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자이신 예수그리스도 (0) | 2010.04.24 |
장로들의 유전(마태복음15:1,2)
예수님을 더 배척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이 사역하는 현장에 사람들을 파견했습니다. 이들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고 능력을 행하시는 것은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배척하기 위해서 파견된 사람들입니다(1절). 이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범한다고 했습니다. 즉 음식을 먹을 때 손을 씻지 않고 먹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당시 유대교 안에 있었던 종교운동과 정신적 조류가 있었습니다. 묵시문학, 사두개파, 바리새파, 혁명당원들, 엣세네파, 테라페우테스 교단, 쿰란 공동체, 율법학자들, 디아스포라의 유대교, LXX역성경, 알렉산드리아의 필로, 요세푸스 등은 유대교의 지주역할을 했습니다.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는 사람들은 율법과 장로들의 유전을 철저하게 지키려고 했습니다. 장로들의 전승을 성경과 동등하게 생각했습니다. 바리새파사람들은 자칭 자신들이 율법이 요구하는 의를 성취하도록 노력했기 때문에 항상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실수하여 율법을 범하지 않기 위해서 율법을 더욱 엄중하게 했습니다. 예로 안식일 저녁이 되기 전에 휴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안식일을 범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장로들이란 유대인들의 옛 종교지도자들입니다. 랍비라고 부르는 서기관들이 율법위에 여러 가지 규정을 덧붙였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손을 씻는 것입니다.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장로들의 유전으로 법제화를 만들어놓은 것입니다. 씻는 양과 질, 물 붓는 방법, 그것을 도와주는 사람, 손의 자세 등을 규정해놓았습니다. 이러는 상황에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밥을 먹었으니 힐난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은 “율법의 본질(마22:37-40)을 바로 보지 못했습니다. 유대백성들은 성 전의 파괴와 바벨론으로의 포로사건은 유대인들에게 강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러한 일들은 그들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난 결과라고 생각했습니다. 포로로 있는 동안에는 에스겔과 다니엘 등이 이들을 인도했습니다. 포로에서 돌아오자마자 에스라가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사”로 인정되어 새로운 상황은 율법의 새로운 적용을 요구하는 듯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외견상으로 율법에 근거한 듯이 보이는 규례를 만들어서 공표하는 일을 전문직으로 삼는 사람들이 서서히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규례를 위한 규례를 만들었습니다. 배보다 배꼽이 큰 결과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잣대로 예수님을 측정코자 한 것입니다. 오늘도 기독교를 윤리적인 측면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윤리를 훨씬 뛰어넘습니다. 사람들을 구원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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