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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인연의 우선성(마태복음12:46-50)
예수님의 곁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접근이 쉽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들에게 말씀하고 계실 때에 예수님의 모친과 동생들이 왔습니다. 그러나 만나지를 못했습니다. 밖에서 사람을 시켜서 예수님께 전갈을 보냈습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의 모친과 동생들이 왔다고 말했습니다(46,47절). 이들이 예수님께 왔던 이유는 마태복음에는 없습니다. 하지만 마가복음3:21을 보면 예수님을 붙들어 가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미쳤다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집으로 데려가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전갈을 해준 사람에게 반문했습니다.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고 했습니다(48절). 그리고 손으로 제자들을 가리켰습니다. 제자들이 나의 모친이며, 나의 동생들이라고 했습니다(49절). 그리고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이며, 모친이라고 했습니다(50절). 어떻게 보면 황당한 말씀 같습니다. 가족도 몰라보는 사람같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가족들은 예수님이 걱정이 되어서 찾아왔는데 동문서답하는 식으로 대답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영적인 문제보다 육적인 문제가 항상 앞서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문제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고, 육적인 문제는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들을 놓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육적인 가족보다 영적인 가족의 중요성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영적인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50절에 우리말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은 단어가 있습니다. (이는/참으로/gavr)입니다. 이유는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하늘의 아버지의 뜻대로 하고 있기 때문에 내 가족보다 소중하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o{sti")를 사용하셨습니다. 이 말은 이후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모두가 적용되었습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흑인이든지, 백인이든지, 동양인이나 서양인이나 가난한자나 부자나 노예나 자유인이든 모두 포함되었습니다. 하지만 ‘누구든지’라고 해서 모두는 아닙니다. 배타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들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들이지 그의 뜻을 알고도 행하지 않는 자들은 예수님의 가족이 될 수 없습니다. ‘아버지의 뜻’이란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의도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그의 뜻을 이 땅에 전했지만, 이제는 계시된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회개하려는 의지, 예수님을 구세주로 모시려는 의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는 의지가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런 자들이 예수님의 가족이고,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생을 가진 자가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가 평생을 통해서 임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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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없는 빈집(마태복음12:43-45)
계속해서 예수님의 말씀이 이어졌습니다. 이번에는 사람들이 비어 있는 집을 예화로 사용하셨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습니다. 이 귀신은 물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어디에도 그 귀신이 정착할 곳이 없었습니다(43절). 아무래도 예전만한 집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입니까? 그 집이 그 귀신이 나간 사이에 깨끗이 소제되었습니다. 말끔하게 수리되었습니다(44절). 이 귀신은 자신이 혼자 그 집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일곱을 데려왔습니다. 따라서 이전에 귀신이 나갔었지만 이제는 전보다 더 악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귀신이 나갔다고 좋아했지만 이전보다 더 나쁜 상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세례요한과 주님밖에 사역을 하지 않았습니다. 세례요한과 주님은 사역이 같았습니다. 세례요한과 주님은 악한 영들을 쫓아내는 사역이었습니다. 세례요한과 주님께서 부지런히 일하고 계셨지만 그 효과가 나타나지 않은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도무지 마음을 전혀 개혁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빈집으로 표현했습니다.
사단은 귀신을 인간의 마음속에 보냅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장악하기 위해서입니다. 목적은 죄악의 제왕인 자신에게 항상 종속시킬 것을 열망하기 때문입니다. 귀신은 인간의 잔혹한 가해자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귀신으로부터 구원받는 것은 하나의 복입니다. 회개하고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은 짧은 기간의 상황은 분명히 그들에게 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잠시 있을 곳을 찾기 위해 떠난 귀신들은 자기가 떠났던 집이 비었다면 다시 돌아올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귀신들이 거할 곳을 찾으려 했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자신이 거하던 집으로 돌아오려 했습니다. 그런데 말끔히 청소가 되었습니다. 들어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빈집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이 귀신이 자기보다 악한 귀신 일곱을 데려왔습니다. 성경은 처음보다 나중 형편이 더 악화되었다고 했습니다.
중생이 없는 개혁은 소용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인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집을 청소하고 장식해도 그 집의 주인이 하나님이 아닌 이상 그 집은 언제라도 망가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개혁이라느니, 쇄신이라느니 말들을 하지만, 그것은 빈집일 뿐입니다. 언제든지 귀신이 자기 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옛 귀신 대신 새로운 주인이 없는 한 그 사람은 필연코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상황이 악화되지 않으려면 온전한 복을 받는 길로 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성숙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시지 않는 사람은 항상 빈집입니다. 아무리 위대하게 보이더라도, 유명한 종교의 창시자라도, 머리에 3층 면류관을 쓰더라도 빈집에 불과합니다. 어떤 신분을 가지고 있더라도 주님을 모르면 빈집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으로부터 중생을 받고 그의 뜻대로 행하여야 합니다. 일곱 귀신보다 수억 배 강하신 주님을 주인으로 모실 때 어떤 세력도 들어오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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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 받을 자들(마태복음12:41,42)
예수님은 비교법을 사용해서 더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고라신과 벳새다가 심판날에 두로와 시돈이 견디기 쉬울 것이라 하셨습니다(11:21,22). 가버나움이 소돔보다 더 악하다고 했습니다(11:23,24). 니느웨 사람들이 심판 때에 이 세대사람들을 정죄할(katakrivnw) 것이라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볼품없는 요나의 전도를 듣고 니느웨 전체가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심판 때에 남방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사람들을 정죄할 것이라 했습니다. 남방여왕이 솔로문의 지혜를 들으려고 솔로몬을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요나의 전도를 들었고, 솔로몬의 지혜를 찾았는데, 요나보다, 솔로몬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다고 했습니다.
요나2:3-9을 보면 하나님께서 당시 가장 악한 나라에 요나를 보냅니다. 하지만 요나는 가기 싫어합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엉뚱한 곳으로 갑니다. 그러다가 결국 큰 물고기 뱃속에서 3일을 지내면서 엄청나게 회개합니다. 하나님은 물고기로 하여금 니느웨에 토해 놓게 합니다. 이때 요나는 니느웨에 하나님의 심판을 전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전혀 들을 것 같지 않았던 니느웨가 회개를 한 것입니다. 왕으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사람들이 회개했습니다. 심지어 짐승까지 굶기면서 전국이 회개했습니다. 이로 인해 40일로 한정된 심판을 받지 않았습니다.
열왕기상10:1-9절을 보면 스바 여왕이 솔로몬이 지혜가 출중하다고 하여 솔로몬을 찾아왔습니다. 이 여왕은 사베이아 왕국의 여왕이었습니다. 이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알고자 먼 길을 엄청난 보물을 싣고 이스라엘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시험했고, 놀랐습니다.
예수님은 요나의 전도나 스바 여왕의 지혜를 찾는 열정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비교했습니다. 도대체 어떤 말을 해도 듣지 않았고, 무슨 기적을 베풀어도 역시 믿지 않았습니다. 한번 비뚤어진 이들은 전혀 고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조상과 장로들의 유전이 곧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면서 이를 반대하면 공권력을 동원하여 철저하게 응징을 하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반복해서 하시는 말씀이 심판입니다. 심판의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언급하셨습니다. 요나의 외침을 들은 니느웨는 회개로 반응했습니다. 소문이 하도 무성해서 스바 여왕은 그 소문이 진실인가 하고 먼 길을 찾아 나섰습니다. 스바 여왕은 직접 찾아가보기로 반응했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예수님이 이스라엘에게 신경을 쓰셨어도 도무지 반응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반발만 심해졌습니다.
사람들의 고집은 꺾을 수 없습니다. 이 고집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습니다. 한번 고집을 부리면 아무리 옳은 것을 만나도 고치지 않습니다. 이 고집은 학력을 불문하고 남녀를 불문하고, 고금을 불문하고 사람들이 피우는 못된 것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결국 고집을 피우다가 사람들은 파멸로 치닫습니다. 그러므로 쓸데없는 고집을 피우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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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못박히실 것을 예언하심(마태복음12:38-40)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논쟁을 해서 한 번도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율법사들인 서기관들을 불러서 예수님과 논쟁을 하려고 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 표적을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표적(shmei'on)이란 ‘겉으로 드러난 흔적’으로 성경에서는 초자연적인 능력에 의해 외부로 나타난 현상입니다. 따라서 기사와 표적이란 ‘하나님의 거룩한 뜻과 섭리를 드러내는 이적을 일컫는 관용적 표현’입니다. 유대인은 항상 선지자가 오면 표적을 구했습니다(고전1:22). 이들은 예수님께 정중하게 표적을 구한 것입니다. 경외와 외적인 형식을 갖추어서 주님을 괴롭히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은 외식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많은 표적과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진실과 다르게 이야기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에게 메시아라면 표적을 보이라는 것입니다(38절).
그러나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보기를 원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과거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줄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Genea; ponhrov" kai; moicali;")란 도덕적인 타락으로 인해 악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의로운 남편인 여호와께 불충실하므로 음란하다는 것입니다(사50:1). 그리고 요나의 표적은 장차 있을 십자가와 부활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나가 사흘을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예수님도 땅에 사흘을 묻혀 있음을 말하는 것이며, 요나가 사흘 만에 물위에 나온 것처럼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격인정물(credential로서의 표적은 무가치함을 보여 주셨습니다. 표적과 기사를 보았는데도 자신의 말에 순종하지는 않으면서, 자신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경멸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질문을 차단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사단과 어떻게 싸움을 하십니까? 사단은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의 죽음만을 바랄뿐이었습니다. 아니,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들을 사용해서 살해할 음모를 계속 꾸미고 있었습니다. 사단은 예수님만 죽이면 모든 것이 끝날 줄만 알고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님만 축출하면 모든 것이 끝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40절을 보면 한정된 시간이 있습니다. 사흘입니다. 인자가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아마도 이 말을 했을 때 그 의미를 아무도 몰랐을 것입니다. 안다고 하더라도 아마도 죽을 것이려니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탄의 허를 찔렀습니다. 죽음으로 죽음을 이긴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죽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나가 사흘 만에 물 밖으로 나온 것처럼 땅속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우리와 먼 관계가 아닙니다. 타종교 교주들과 같이 수천 년 전의 가르침으로 기약 없는 이 세상에서 황당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에도 계시고, 현재도 계시며, 미래에도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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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훼방죄(마태복음12:30-37)
하나님의 은혜는 한없이 넓습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자신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도 용서받을 수 없었던 죄라도 하나님께 가져가면 용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도 무한정 용서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런 죄 중의 하나가 성령 훼방죄(tou' pneuvmato" blasfhmiva)입니다. 성령 훼방죄는 성령을 모독하는 죄요, 비방하는 죄입니다. 이 죄는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나와 함께 하지 않는 자는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반대하는 자이며, 헤치는 자라고 했습니다(30).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용서를 받을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령 훼방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31). 성령 훼방죄는 마음으로나 말로나 용서받을 수 없는 죄였습니다(32). 결국 사람들은 열매로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실과는 좋은데(귀신을 쫓아낸 사건), 나무(예수님)는 좋지 않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근본은 악하기 때문에 절대로 선한 것을 내놓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독한 말들을 하고 있는데 그것에 대해서도 심판 날에 정죄를 받는다 하셨습니다.
성령 훼방죄가 왜 이렇게 가혹합니까? 이것은 구원의 마지막 보루를 거절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27:19-24을 보면 예수님의 재판장면 뒤에 로마총독의 권한아래 죄수 한 사람을 놓아줄 수 있었습니다. 이때 군중들은 ‘예수님’과 ‘바라바’ 중에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거절하고 훼방한 것입니다. 이들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자신들의 옷을 벗어서 길에 펴면서 ‘호산나’를 외쳐 불렀던 사람들입니다. 예루살렘에 예수님이 왕이 되는 줄 알았는데, 바리새인들에게 잡혀서 힘없이 재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제 예수를 의지해봤자 별 볼일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예수님을 거절하고 훼방했습니다.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에 이들이 사도들의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던 사람들이 사도들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사도행전2:36-41을 보면 사도들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림을 받고, 회개를 합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습니다. 즉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비록 예수님을 배반했지만, 구원의 기회는 있었습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을 거절하는 것은, 구원을 받는 마지막이기 때문에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이스라엘에서 제일 신앙이 좋은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보시기에 신앙은커녕 하나님의 백성도 아니었습니다. 사탄의 종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았지만, 결국 지옥에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신들이 믿고 있는 신앙이 잘못된 것임을 몰랐고,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예수님입니다. 사람의 구원은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믿는 신앙에서 출발합니다.
심판 받을 자들 (0) | 2010.03.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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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사논쟁/귀신을 쫓아내시는 예수님(마태복음12:22-29)
22절에서 37절까지는 귀신을 쫓아내시는 예수님을 바리새인들이 배척하는 모습입니다. 예수님께 어떤 사람이 눈이 멀고, 벙어리 된 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마태는 이 사람이 귀신이 들려서 그렇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며 고쳐주셨습니다. 바로 보게 되고 말하게 되었습니다(22절). 이를 보고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그리고 고쳐주신 예수님을 다윗이 자손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아마도 다윗의 자손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적을 행할 자가 그분밖에 누구겠는가?”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바로 메시야일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주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예수님의 적대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확실한 의사표시를 할 수 없었습니다(23절). 아니나 다를까 바리새인들은 바로 예수님을 폄하했습니다. 귀신을 쫓아냈다고 하지만, 그것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도움으로 쫓아낸 것일 것이라고 했습니다(24절).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완악함을 아셨습니다. 그리고는 사단이 사단을 쫓아낼 수 있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또한 내가 바알세불의 힘을 입어서 쫓아냈다고 하면, 너희들은 누구를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말씀에 바리새인들은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희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쫓아내고 예수님은 귀신의 왕의 힘으로 쫓아냈다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귀신을 쫓아냈는데, 이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임한 증거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무당들이 귀신을 쫓아낸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실제로 체험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아니라도 귀신을 쫓아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무당이 굿을 하는 것은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달래는 것입니다. 귀신을 쫓아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귀신이 쫓겨난 것이 아닙니다. 귀신들끼리 장난을 친 것입니다. 마치 쫓겨난 것처럼 가장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귀신들을 섬기게 하는 흉계입니다. 따라서 귀신들은 자기들의 동료인 귀신들을 쫓아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메시야가 도래했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서 사탄의 나라를 공격한 것입니다. 사탄의 나라를 공격했다는 것은 예수님이 사탄보다 강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귀신은 감히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힐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죄를 심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며, 사람들을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허황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신화적인 인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실재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고 사람입니다. 하나님이고 사람인 분이어야 사람들의 죄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누구도 이 세상에서 죄를 속할 수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죄인일 뿐입니다. 자신의 앞가림하기도 버겁습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을 구원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오직 예수님만 구원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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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종(마태복음12:14-21)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죽기 살기를 각오하고 덤벼듭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선점을 했다는 것입니다. 동물들로 말하면 자신의 영역입니다. 이 영역에 들어오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세례요한과 예수님 때문에 입지가 위협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고소할 틈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여간해서 그 틈을 찾지 못했습니다. 안식일논쟁에서 소득을 건지지 못한 그들은 직접 예수님을 살해할 음모를 찾기 위해 나갔습니다.
마가복음3:6-12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헤롯당과 함께 연합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니라” 헤롯당은 헤롯과 로마정부를 돕는 앞잡이들입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매국노들입니다. 이들과 바리새인들은 철저하게 로마를 배척하던 사람들인데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는 연합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에 전혀 신경을 쓰시지 않았습니다. 15절을 보면 저희 병을 모두 고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병을 고침 받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고쳐주셨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를 18절에서 21절까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42장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1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2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3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4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공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왜 이사야42장을 인용하셨습니까? 이사야42장은 여호와의 종에 관한 예언입니다. 여호와는 나를 종으로 불렀다고 했습니다. 종은 자신을 스스로 보기에는 무익하나(사49:4), 하나님 보시기에는 존귀한 자입니다(사49:5).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종으로 부르신 것은 이스라엘만 회복하고 구원시킬 뿐만 이니라 이방의 빛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땅 끝까지 이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종처럼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하나님이 여호와의 종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미래에 이 사실을 알게 하십니다. 여호와의 종은 신실하십니다. 사람의 신분을 가리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종은 거룩하십니다. 그리하여 사단에게 잡혀 있는 자들을 구원하십니다. 그들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주십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정치계로 나갈 때에 마치 세상을 평정할 듯이 떠듭니다. 문화계나, 경제계 등에 나갈 때도 그렇습니다. 씨저나 알렉산더, 나폴레옹 등이 그랬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이름은 오늘날 술 이름으로 전락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러 오실 때 화려하게 오지 않았습니다. 마치 종처럼 조용하게 오셨습니다. 그러면서도 누구도 하지 못할 일을 하셨고,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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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아는 지식 (0) | 2010.03.12 |
계속되는 안식일 논쟁(마태복음12:9-13)
예수님에 대한 사탄의 적대감은 항상 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계시는 한 자신들의 입지가 좁을 뿐만 아니라 설자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종말의 때에 멸망될 것을 알면서도(마8:29), 어떻게든지 자신들의 생을 유지하려고 발악을 했습니다. 하지만 사단은 그 모습을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않습니다. 졸개들인 악령을 시켜서 사람들을 괴롭힙니다. 이때 마귀의 사용함을 당하는 사람들은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사두개인들이 사탄의 노리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그 회당 안에는 한쪽 손이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때는 이때다 하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범죄가 아닙니까?’ 이에 예수님이 그들에게 역으로 질문했습니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안식일에 양 한 마리가 구덩이에 빠졌다면 건지지 않겠느냐?” 아무리 안식일이라고 하지만 이러한 규정은 예외로 두었습니다. 그런데 양보다 사람이 얼마나 귀하냐? 따라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지 않겠느냐 하시면서 그 사람의 손을 고쳐주셨습니다.
법과 규정이라는 것이 애매할 때가 많습니다. 과거 직장에 있었을 때 일입니다. 어느 곳에 도로확장공사가 있었습니다. 도로공사를 하면 그 안에 여러 가지가 매설되어야 합니다. 상수도, 하수도, 전기, 전화 등 많은 것들이 도로공사를 할 때에 매설해야 합니다. 그래야 도로가 파헤쳐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역시 공사를 할 때에 매설해야 합니다. 그런데 매설할 물품이 없습니다. 예산이 없다는 것입니다. 누가 생각해도 그때 공사를 해야 맞습니다. 왜냐하면 공사 후에 다시 도로를 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공사비가 최소한 5배이상 듭니다. 그런데 규정 때문에 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후에 규정들이 고쳐졌습니다. 오히려 돈이 더 들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사람이 죽어도 좋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신봉하는 규정을 지키기 위해서 사람들이 고통을 당해도 좋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중 어떤 것을 행하여 합니까?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은 안식을 범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로 주일날에 한 성도가 예배 중에 심히 아파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 즉시 병원에 옮기던지, 약을 먹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그대로 있어야 한다는 억지입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들의 유전을 위해서는 사람이 죽어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그러한 처지에 있을 때는 다르게 적용을 했습니다. 이들은 이중적인 행동을 했습니다.
현재도 사단은 여러 사람들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괴롭힙니다. 사람들로 사람들을 괴롭힙니다. 특히 하나님의 사람들을 대단히 싫어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무차별 공격을 합니다. 때로는 정부를 사용하기도 하고, 경제계를 사용하기도 하고, 문화계도 사용합니다. 어떻게든 사람들을 교회와 분리시키려 애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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