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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6.06
    땅 끝까지의 시작점 구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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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령의 지시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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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15.05.31
    안디옥교회의 구성원들/니게르라 하는 시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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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디옥교회의 구성원들/바나바
  6. 2015.05.26
    베드로와 바울에 의한 복음전파
  7. 2015.05.25
    바나바와 사울의 동향
  8. 2015.05.23
    뻗어나가는 하나님의 말씀

땅 끝까지의 시작점 구브로(사도행전13:4-5)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쌔 요한을 수종자로 두었더라

사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을 떠났습니다. 이제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지는 과정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사울과 바나바가 성령의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떠난 것이 아니라 성령의 보내심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의 소명은 전적으로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것을 받아들일 뿐입니다. 성령께서는 보내시고 함께 하십니다.

그들은 안디옥에서 북쪽으로 8km 거리에 있는 오론테스 강 하구의 항구 실루기아에서 배를 탔습니다. 오래 전부터 중요한 섬이었던 구브로는 주전57년에 로마에 병합되었습니다. 주전55년에 길리기아지방에 펀입되었고, 주전27년에는 지방(道)으로 승격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수의 로마 지방총독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 후 주전22년에 아우구스투스는 이 성을 로마의 원로원에 양도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이 섬은 지방총독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구브로는 ‘구리’라는 뜻이며, 지중해의 비옥하고 쾌적한 섬으로서 길리기아와 시리아 사이에 위치하여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는 ‘깃딤’으로 불렸습니다(창10:4 민 24:24 사23:1). 그들이 구브로에서 처음으로 복음을 전한 곳은 살라미였습니다. 살라미는 구브로의 동쪽 해안에 자리 잡고 있는 그리이스의 도시로서 구브로동부 지역의 통치 중심지였습니다. 상업도시로서 유대인들이 많아서 유대인의 회당이 있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바울의 전도과정은 그들이 방문한 도시의 유대인 회당 혹은 그 도시의 회당들을 찾아가서 먼저 동족(同族)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습판으로 했던 것 같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파송한 바울의 제1차전도 여행은 구브로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은 마가요한을 데리고 갔습니다.

이들은 성령의 보내심을 받고, 전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to;n lovgon tou' qeou'). 이들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word-event)입니다. 유대에서의 말씀의 시작에서부터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나타나심과 제자들의 파송까지의 말씀의 역사(history)입니다. 사도들이 선포하는 사도적 말씀-사건(word-event)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말씀 -사건에 기초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도의 메시지는 세상의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전함으로 이 세상은 변해가고 있습니다. 말씀을 믿고, 말씀에 따르며, 말씀으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해방되고 있습니다. 복음은 아직도 땅 끝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이 이 세상의 가고 오는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할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말씀은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And

성령의 지시하심(사도행전13:2-3)

우리는 안디옥과 예루살렘을 생각할 때에 예루살렘이 더 큰 도시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였지만, 안디옥은 로마의 도시였습니다. 안디옥은 당시 로마제국의 3대도시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이었습니다. 이곳에 하나님의 말씀이 능통하던 바울과 바나바가 있었습니다. 안디옥교회의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정해진 사역을 감당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교회지도자들에게 사울과 바나바를 따로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탁월한 두 사람이 성령의 지시하심을 받은 것입니다.

안디옥교회에는 여러 지도자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해외선교를 꿈꾸지 않았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사울과 바나바를 따로 세우라고 성령께서 말씀하셨을 때, 안디옥교회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교회에도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습니다. 해외선교라는 것은 국외선교라는 것인데, 나라와 민족을 초월하는 선교입니다. 물론 로마제국입니다. 로마제국의 각 지역입니다. 그러나 유럽의 대륙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교통수단이 발달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러나 지시하신 분은 성령입니다. 성령께서 지시하셨습니다. 안디옥교회는 다만 성령의 지시대로 해야 했습니다. 이에 교회는 금식하고 그들에게 안수했습니다. 그리고 보냈습니다.

지구상에는 수많은 종교들이 있습니다. 힌두교, 불교, 유교, 마호멧교, 로마카톨릭 등 나라마다 민족마다 섬기는 신들이 달랐습니다. 이들이 섬기는 신들은 살아 있지 않은 신들입니다. 즉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물론 이들 종교들은 예수님 후에 나온 종교들도 있습니다. 이제 바울과 바나바가 따로 세움을 받으면서 판도가 달라졌습니다. 세계의 모든 종교들이 기독교에 그 자리를 내어주어야 했습니다. 어느 종교인이 많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구원을 받아야 할 사람은 많습니다. 구원받아야 할 장소와 시기는 다르지만 하나님의 사람이 될 사람들이 각국에 많이 있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 사람들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한 사람 한 사람 찾아 나설 것입니다. 아직까지 예루살렘과 사마리아, 유대 그리고 안디옥 등을 제외하면 교회는 이 세상에 거의 없었습니다. 사울과 바나바는 긴 여정을 떠난 것입니다. 특히 바울은 순교하기까지 멈추지 않습니다. 갖은 고난과 환란을 당하면서도 이 일에 매진합니다.

이로 인해서 지구의 역사는 달라집니다. 전 세계 어느 곳에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곳이 거의 없습니다. 차례차례 복음이 어둠을 점령했습니다. 복음의 전령사 바울과 그의 사람들을 통해서 세상은 차차로 복음에 접수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누구도 그들의 길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누구도 그들을 훼방할 수 없었습니다. 누구도 그들의 길에 장애물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복음이 전해지면서 많은 박해들이 있었지만 사망도, 위험도, 칼도 결코 복음의 진행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막는 자들은 하나님의 레이더망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And

안디옥교회의 구성원들/마나엔(사도행전13:1)

마나엔(Manahvn/Manaên)은 ‘위로자’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 마나헴(위안자)의 헬라형입니다. 젖동생이라는 말은 황태자들과 나이가 같은 소년들에게 붙여지던 칭호였습니다. 황태자들은 궁중에서 이 소년들과 함께 양육을 받았습니다. 분봉왕 헤롯은 Herod Antipas로서 주전4년부터 주후39년까지 갈릴리와 베뢰아를 다스렸습니다. 마나엔은 그의 젖동생입니다. 두 사람의 젖형제가 자랐는데 한 사람은 기독교인의 지도자이고, 한 사람은 기독교인을 심히 미워한 것을 볼 때 신비로운 것입니다.1

명상록(冥想錄)은 로마의 황제이며 스토아2 철학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그리스어로 쓴 철학적 성찰이 담긴 일기체의 저서입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넓은 대륙은 대우주의 한줌 흙이며, 현재는 영원 속의 한순간에 불과하듯이, 만물은 끊임없는 변화와 유전을 겪을 수밖에 없음이 자연의 이치이므로, 우리 인간도 육체적 욕망에 몸을 맡기지 말고 불굴의 의지로 국가 안에서 자기가 맡은 역할을 충실히 다하는 것이 본연의 의무’라는 스토아적 도덕성을 호소력 있게 전달한다고 평을 받습니다. 이 작품은 스토아 사상을 이해하는 입문서로서 정평이 나 있다고 평합니다.

그러나 철학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기독교인 10대박해자 중의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철학자 황제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이름이 철학자의 책에 등장합니다. 수사학과 법학을 공부했지만 철학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철학자라고 하는 사람이 어떻게 성도들을 많이 죽였습니까? 그의 사람됨이 잔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의 철학이 인본주의였기 때문입니다. 후기 스토아철학은 일종의 인생철학이며 대중철학입니다. 스토아철학의 신론은 범신론입니다. 스토아철학에서는 인간의 이성을 신으로 여겼습니다.3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스토아철학자로 인간애를 중요시했지만, 로마제국의 황제로서 다신교를 믿는 로마의 국가종교를 신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람이 예수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는 그의 철학이 무엇인지가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황제로 있으면서 성도들을 죽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권세와 명예를 버리고, 하나님의 일에 나서고 있습니다. 인생의 궁극적 목표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많이 공부를 하고 지위가 높다하더라도 천국과 지옥을 모르면 그 인생은 불쌍한 인생입니다. 겨우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은 100년 안팎입니다. 그리고 곧바로 천국 아니면 지옥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에도 이것을 모르는 사람이 태반입니다. 복음에 겸손하지 못함으로 받아들이지 못해 불쌍하게 인생을 마감하는 지위높은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1 F.F.Bruce.『헨드릭슨 패턴주석 사도행전(上)』, 15. 

 2 Stoa主義 자기 자신으로부터 윤리적 삶의 기초를 만들려고 노력한 사람들의 학파로 참다운 윤리적 삶을 위한 법칙을 찾아내어 실천적 삶에서 현실적으로 적용하려고 했다. Curt Friedlein,『서양철학사』강영계 옮김 (서울: 서광사, 1985), 86-87.

 3 김광채,『그림으로 본 10대 박해』(서울: 사)기독교문서선교회, 2010),83.

And

안디옥교회의 구성원들/니게르라 하는 시몬(사도행전13:1)

 

안디옥교회의 교사 중에 니게르라는 시몬이 있었습니다. 니게르(Nivger/Nîger/니게르)란 검은 뜻입니다. 즉 검은 피부를 가진 시므온입니다. 니게르라 하는 시몬에 대한 정보는 성경에 별로 없습니다. 여러 주석을 찾아보아도 니게르라 하는 시몬에 대한 정보는 겨우 이름만 나왔을 뿐입니다.

우리 시대는 최첨단 미디어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난 일도 순식간에 인터넷상에 퍼집니다. 통신이 발달되지 않고 인편으로 모든 것을 전했던 옛날에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웬만한 것들은 인공위성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정확하다는 것입니다. 거리오차가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버락 오바마의 일거수일투족이 지구곳곳에 생중계되고 있습니다. 지구상의 미디어를 접촉한 곳에서는 버락 오바마가 미국의 대통령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엔사무총장이 반기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유명세를 타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예로 우리나라의 대형교회의 목사들은 기독교인들이 대충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나라의 기독교인들이 알 턱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유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소형교회의 목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교회가 교회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예수께서 기초가 되시고 사도들의 터 위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교회로서 할 일을 다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은 미디어시대라 해서 교회에서도 방송시스템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대외로 알리려고 합니다. 그리고 목사들이 유명해지려고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어떻게 세워졌습니까?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의 믿음으로 세워졌습니다. 이름 없는 사람들의 순교로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름 없이 화형을 당하고 유리하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런데도 요새 성도들은 대형교회로, 대형교회로, 나가고 있습니다. 소형교회들은 텅텅비어 있는데, 대형교회들은 部制(부제)예배를 드립니다. 아침부터 계속 같은 설교를 하고, 같은 프로그램을 합니다. 그래서 대형교회는 재정도 차고 넘치고, 성도들도 차고 넘칩니다. 그래서 교인들과 목회자들의 교만도 차고넘칠 수 있습니다. 다는 아니지만 그러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들이 알아야 할 사항은 성경에 위인들이란 없습니다.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이나 어떤 사람도 위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흔히 세상말로 영웅이란 것을 우리는 배제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브라함이나 바울, 다윗 등이 영웅이면 하나님은 가려지게 됩니다. 이면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아야 하는데, 대체적으로 그렇지 못합니다. 항상 성경의 인물이 돋보이고 하나님은 계시지 않게 설교합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사세요. 다윗처럼 용맹스럽게 사세요’ 등입니다. 이러다보니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숨겨지고 사람만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면 성경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목회자가 하고 싶은 말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사람의 말이 나갑니다.

And

안디옥교회의 구성원들/바나바(사도행전13:1)

안디옥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안디옥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모든 것들을 미리 아는 선지자들, 그리고 가르치는 교사가 아니라 가르치는 면에 있어서 성령의 특별한 은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Calvin). 선지자의 원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이상을 보거나 환상, 또는 꿈 그리고 말씀으로 선지자에게 임했습니다. 교사들은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이었습니다. 1절에서 누가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안디옥교회에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바나바와 시므온, 루기오, 마나엔, 사울 등입니다.

바나바(Barnavba"/barnâbas/바르나바스)는 초대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바나바는 부드러운 마음을 가졌다고 성경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름대로 ‘위안의 아들’입니다. 누가의 기록처럼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입니다. 거기에 바나바는 설득력까지 있었습니다. 누가는 바울과 바나바를 ‘사도들’이라 칭하였습니다(사도행전14:1-14). 전승에 의하면 그는 예수님이 파송한 70인 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누가복음10:1). 초대 교부였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eria)는 바나바가 70인 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스도를 직접 보았으며, 그의 지상전도 사업에서 그를 수행했었다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12제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초기기독교 사도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이며, 중심적인 인물입니다(사도행전11:19-15:41). 바나바는 루스드라 사람들에게 신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지상에 내려오신다면 바나바와 같은 형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나바는 예수가 죽은 직후 예루살렘교회에 들어온 구브로인 가정에서 태어난 유대계 헬라인으로 추정합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구브로 섬에 정착해 살고 있었는데, 성령강림절에 사도들이 제각기 여러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들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바나바는 축제에 참석하기 위해 구브로에서 왔다가, 베드로가 자기 민족의 방언으로 복음을 설교하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바나바의 원래 이름은 ‘요셉’이었습니다. 바나바는 기독교인이 된 이후 사도들에 의해 붙여진 별칭입니다(행4:36). 유대인 태생으로 레위족속이었던 요셉이라는 이름은 나중에 “권고의 아들” 혹은 “훈계의 아들”, “위로의 아들”이라는 의미로 해석되었습니다. 사도들이 그에게 그런 이름을 부여했던 것은 그의 마음과 생활이 친절했고, 관대한 마음과 돕고자 하는 사랑으로 충만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와 바울 간의 관계에서도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그의 헌신적이고, 고귀한 정신은 조금도 시기심이나 질투심이 없었습니다. 바나바의 생애의 경력을 보면 인정 많고 친절한 성향입니다. 바나바는 동료 바울과 같이 탁월한 지성이나 독창적이거나 창조적인 능력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초대교회에서 마치 천사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사랑과 신뢰를 받으며 항상 널리 인간의 이익을 구하는 입장에 서있어, 사회적 영향력을 얻어 초대 교회에서 탁월한 지위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바나바는 사울을 자신의 깃 아래 보호하고 바울의 첫 동료가 되어주었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언급될 경우 바나바가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를 파송한 안디옥교회가 그에게 그만한 지위를 부여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점차 두각을 드러내게 되면서 바나바는 서서히 뒷자리로 물러나 이야기의 전면에서 사라집니다. 오늘의 교회에서 바나바 같은 사람들은 필히 필요합니다.

And

베드로와 바울에 의한 복음전파(사도행전1장-28장)


4복음서에서 사울(바울)은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4복음서에 베드로는 부각되어 나옵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예루살렘교회와 이방교회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베드로는 고기 잡는 일터에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다메섹도상에서 그것도 예수 믿는 사람들을 체포하려고 하는 길목에서 부르심을 받습니다. 베드로도 열성 있는 사람이고, 바울 역시 열심 있는 사람입니다. 아마 초대교회에 이들이 없었다면 어떤 결과가 있을까요? 물론 주님께서 더 나은 결과를 주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초대교회에, 교회사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사도행전은 1장에서 12장, 13장에서 28장의 두 부분으로서 구분할 수 있겠지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주 무대가 예루살렘,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까지입니다. 물론 베드로와 바울이 전적으로 초대교회에 모든 것들을 행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교회와 이방교회의 핵심인물로 선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입니다. 성령께서 이들을 강권적으로 역사하셔서 그 일들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톰슨성경은 이렇게 구분합니다.

예루살렘에서의 증거(1:1-7:60) 부활하신 예수께서 40일 동안 세상에 머무르시면서 제자들에게 사건을 미리 약속하셨다. 이 약속은 예수께서 승천하신 지 열흘 후에 성취되었다. 성령의 권능을 체험한 제자들, 특히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주요 내용으로 한 복음을 담대히 증거하기 시작하였으며, 그 결과 놀라운 결실을 거두었다.

유대와 사마리아에서의 증거(8:1-12:25. 예루살렘교회가 확장되는 가운데 스데반의 순교로 인해서 유대와 사마리아로 피한 성도들 중 집사 빌립의 사마리아 전도 활동이 성공적이었다. 그리고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의 회심 사건이 등장한다. 이어서 이제껏 유대인만을 상대로 복음을 전했던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에게도 증거 하였다.

땅 끝까지 증거(13:1-28:31) 13장에서부터 본서의 초점이 베드로에게서부터 바울에게로 옮겨진다. 근거지 또한 예루살렘으로부터 수리아의 안디옥으로 차츰 대치되었는데 바울이 세 차례에 걸친 전도여행을 시작한 곳도 안디옥이었다. 바울의제1차전도 여행(47-48년)은 비시디아의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둥 갈라디아 성읍들을 중심이었고, 제2차전도 여행(50-52년)은 마게도냐와 헬라 지방에까지 확장되었다. 제3차여행(53-55) 때 바울은 에베소에서 3년가량 장기 체류한 후 마게도냐와 헬라지방을 재차 방문하였다. 그후 바울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고소로 체포당했다가 가이사랴 주재의 벨릭스 총독에게로 압송된 지 이년 만에 로마로 호송되었다(59년).

물론 복음은 베드로와 바울이 없어도 차질 없이 전파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바울을 쓰신 분이 주님입니다. 전하지 않으면 복음은 전파되지 않습니다. 복음이 지구를 한 바퀴 도는데 무려 2000년이란 시간이 흘렀습니다. 거기에는 베드로와 바울, 그리고 그 외의 제자들과 피 흘린 성도들의 대가였습니다. 그들이 흘린 피와 땀으로 지구상이 복음화되었습니다.

And

바나바와 사울의 동향(사도행전12:25)


사도행전11:27-30을 보면 예루살렘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이에 안디옥교회에서 유대에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합니다. 이 헌금을 안디옥교회는 바나바와 사울을 통해서 예루살렘교회의 장로들에게 전했습니다. 그리고 성경기자는 예루살렘교회의 핍박에 대해서 12장을 할애했습니다. 그라고 맨 마지막에 다시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의 일을 마치고 마가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렀다고 기록합니다. 아마도 이들이 예루살렘에서 마가의 집에 거하였지 않느냐 추정할 뿐입니다. 바나바와 사울, 그리고 마가가 새롭게 등장하는데 이제는 선교부의 카메라가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그리고 이방으로 이동해서 보여주는 서막입니다. 1장에서 12장까지는 주로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베드로를 중심으로 선교가 확장되었습니다. 그 어간에 사울의 회심이 있었고, 스데반의 순교와 야고보의 순교와 헤롯의 핍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이방에 어떻게 교회가 세워졌는지, 어떻게 성령께서 역사하셨는지가 세밀하게 기록되었습니다.

기독교는 지중해 동쪽 아주 작은 나라에서 태동을 했습니다. 참으로 시작은 미미했습니다. 전혀 주목받지 못할 이스라엘의 갈릴리에서 겨우 12제자 그 중에서 한 명은 배반을 했습니다. 그리고 쓸쓸하게 골고다에서 십자가형의 사형을 맞습니다. 누가 그가 전한 복음이 전 세계에 전해지리라 상상을 했겠습니까? 아마도 자신들이 믿고 있는 종교가 구원할 줄 알았을 것입니다. 특히 로마제국은 헬라사상이 만연해 있어, 신화가 엄청 많았습니다. 가는 곳마다 우상의 신전들이 즐비하고, 그 규모도 불가사의할 정도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중해변의 조그마한 나라, 조그마한 도시에서 태동한 종교가 이제 국제적인 종교가 되기 위해 기지개를 켜고 있었습니다. 그 중심에 사울과 바나바가 있었습니다. 물론 동역자들이 옆에 있었습니다. 마가요한, 누가, 디도메, 디도, 실라 등 항상 그 곁에서 사울의 사역을 도왔습니다.

종교가 세계적으로 전해지기 위해서는 그 종교가 전해질 수 있는 동기나 힘들이 있어야 했습니다. 불교는 ‘수행으로, 깨달음으로’라는 것을 통해서 자신들의 종교를 설파했습니다. 이슬람교는 칼로 자신들의 종교를 전파했습니다. 로마-카톨릭은 역시 힘으로 자신들의 종교를 전파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무력 또는 인간적인 기준인 도덕이나 수행으로는 전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그리스도를 전할 뿐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무기는 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총도 필요 없었고, 칼도 필요 없었습니다.

바나바와 사울은 이제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하심에 힘입어 그 첫발을 안디옥에서 내딛습니다. 그들 앞에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많은 장애물들이 그들을 막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장애도 뛰어넘으려 했습니다. 위험하면 피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복음을 위하여 물불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만 나아갔습니다.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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뻗어나가는 하나님의 말씀(사도행전12:24)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 부활하여 승천하신 이후에 사단은 엄청나게 교회를 공격했습니다. 사울(바울)을 사용하여 다메섹에 있는 성도들을 몰살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실패했습니다. 사울이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로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역시 실패했습니다. 결국 사단은 스데반을 이방에 있는 유대인들을 꼬드겨 결국 죽였습니다. 그 여세를 몰아 야고보사도를 죽였습니다. 베드로까지 죽이려고 하다가 천사로 인하여 실패했습니다. 그런데도 누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교회는 태동부터 박해를 해도 계속 증가했습니다.

2:41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4: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5:14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6:1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6: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9: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사람의 능력이라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어느 정도 힘이 있을 때는 천 년 만년이나 살 것 같이 생각하고 계획을 세웁니다. 그리고 무모하게 행동합니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합니다. 세계를 제패 하는가 싶더니 망해버립니다. 대신 다른 세력이 들어섭니다. 무슨 말입니까? 인생은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이 정권을 잡거나 주도권을 잡으면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려 애를 씁니다. 도덕도 윤리도 하늘의 순리도 없습니다. 자신의 고집과 생각대로만 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역사는 망하는 역사입니다. 죄인들이 세운 죄인들의 공화국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그 말씀을 막을 자가 없습니다. 그 말씀의 전파를 위해서 세상의 권력자였던 알렉산더는 유럽제국에 언어를 통일했습니다. 로마의 황제들은 자신들을 과시하려고 길을 닦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고자 했지만, 결국에는 복음의 길을 닦은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죽이고, 훼방하고, 가두지만 어떤 것으로도 막지 못했습니다. 애굽, 시리아, 앗수르, 바벨론, 페르샤, 그리이스, 로마 등 어떤 나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막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감히 헤롯 따위가 복음을 막으려 한 것입니다. 오늘도 헤롯과 같은 존재들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우리주변에 이런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복음을 막고 훼방하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절대로 하나님의 복음을 막을 수 없습니다. 우리들이 전하는 복음이 흥왕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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