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새벽강해'에 해당되는 글 142건
- 2012.07.21
- 2012.07.20
- 2012.07.19
- 2012.07.18
- 2012.07.16
- 2012.07.15
- 2012.07.12
- 2012.07.07
번성케 하시는 하나님(창세기17:2)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일방적으로 세우신(나탄)복된 언약을 현실로 보이시겠다 하십니다. 복된 언약을 받을 사람은 아브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완전하라고 하셨지만 아직 완전치 못한 아브람입니다. 그렇다고 아브람이 완전해진 후에 다시 오시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수련이 끝나고 수행이 끝난 다음에 복을 주시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아브라함에게 복된 약속을 하시겠다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우리자신이 완전해야 복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생각해내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우등생이 되려하는 것입니다. 최우수상을 받아야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등생종교인이 되려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보다도 열심히 하면 하나님께서 나의 열심을 보고 복을 주시겠지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사람이 많다 해도 최우수상은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보편적이신 분인데 꼭 한 사람에게만 복을 내리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완전하지 못한 아브람을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만일에 하나님께서 완전한 사람들만 복되게 하신다면 야곱 같은 사람은 절대로 복을 받을만한 사람이 못됩니다.
우리가 완전치 못한 죄인들이지만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서 복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굉장한 특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베리트)을 세우는데 하나님과 아브람 사이에 세우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게 세우시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어려운 글자를 힘겹게 풀어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쉽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내가 너로 번성케 하리라 하십니다. 심히 번성케[라바 메오드 메오드]하리라 하십니다. 네가 부족하더라도 번성케 하리라 하십니다. 네가 연약해도 번성케 하리라 하십니다. 매우매우 번성케 하리라 말씀하십니다. 이 언약을 아브람의 99세 때에 하나님께서 이루시겠다고 하신 내용입니다. 아브람의 언약이 곧 우리의 언약입니다.
기업을 주시는 하나님 (0) | 2012.07.23 |
---|---|
우리의 이름을 바꾸시는 하나님 (0) | 2012.07.22 |
전능하신 하나님 (0) | 2012.07.20 |
침묵하시는 하나님 (0) | 2012.07.19 |
찬송케 하시는 하나님 (0) | 2012.07.18 |
전능하신 하나님(창세기17:1)
아브라함은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낳은 후에 오랫동안 침체 속에서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찾지 않으셨습니다. 그 기간이 무려 13년이었습니다. 아브람으로는 그야말로 견디기 어려운 세월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긴 침묵을 깨시고 아브람에게 나타내셨습니다. 아브람에게 비로소 복을 주실 때가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든 일을 거의 혈기 왕성한 젊은 때에 실행합니다. 왜냐하면 그 일을 할 수 있는 힘이 그 때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년퇴임이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정년퇴임 전에 모든 일을 다 합니다. 정년이 되면 모든 자리에서 물러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기대는 그 반대입니다. 우리에게 할 수 있는 힘이 남아 있을 때는 그 힘을 모두 빼버리십니다. 사라는 이미 13년 전에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기능을 상실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99세가 되어서야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기능을 상실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때가 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기다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나이 99세에 나타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 위해 나타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 즉 [엘 샤다이]로 자기소개를 하십니다. [나는 엘샤다이 나이다]라고 하십니다. 엘샤다이는 [강하셔서 충분하게 하실 수 있는 자]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우리에게 계시로 알리십니다. 하나님은 나타나실 때마다 개인적인 이름을 가지시고 알리십니다. 우리가 모자랄 때는 여호와이레, 우리가 불안하고 평안하지 못할 때는 여호와 살롬 등 하나님의 이름에는 신비함이 있습니다.
자신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소개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불러서 너는 내 앞에서 행하라 하십니다. 내 길을 따라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아브람은 하나님 앞에서 행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는 싶은데 완전하지 못합니다. 말씀대로 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낙심하고 좌절합니다.
여기에서 ‘완전하라’는 말씀은 도덕적인 면이나 윤리적인 면, 어떤 선행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일을 하기 전에 먼저 아브람이 자신만을 따르고 믿을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내가 지시하는 대로 행하라 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꼭 지켜야 할 하나님의 표준입니다. 이 말씀 없이, 이 믿음 없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너는 내 앞에서만 행하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오직 나만 의지하고 내가 지시하는 대로 행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완전입니다.
우리의 이름을 바꾸시는 하나님 (0) | 2012.07.22 |
---|---|
번성케 하시는 하나님 (0) | 2012.07.21 |
침묵하시는 하나님 (0) | 2012.07.19 |
찬송케 하시는 하나님 (0) | 2012.07.18 |
우리의 고통을 들으시는 하나님 (0) | 2012.07.16 |
침묵하시는 하나님(창세기16:16)
16절을 보면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 륙세이었더라”하였습니다. 창세기 12:4절을 보면 아브람이 메소포타미아를 떠날 때가 75세였습니다. 그리고 창16:3절을 보면 사래가 여종 하갈[이주하는, 도망하는]을 아브람의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한지 10년후였습니다. 따라서 아브람의 85세 때에 하갈이 임신하였습니다. 그러므로 1년 후에 하갈이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하나님이 당분간 침묵하십니다. 즉 아브람에게 여러 해를 나타나시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아브람도 이 기간에는 하나님께 단을 쌓았더라는 구절이 없습니다. 우리말 속담에 “침묵은 금이고 웅변은 은이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매일 하나님과 교제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찐 일인지 하나님과 아브람의 관계가 소원해졌습니다. 분명히 너는 내 친구라 하셨지만 이 기간에는 하나님 편에서도 아브람의 편에서도 아무런 액션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시지 않은 이유는 많지 않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아브람과 사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15장에서 온갖 교육을 다 시켰는데 듣지 않았습니다. 만일에 아브람과 하갈이 약속을 받았다면 하갈의 출생에 대해서 사라보다 더 소상히 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갈은 사래의 종으로서 애굽 사람이었다고만 기록되었습니다. 그리고 하갈이 잉태한 것에 못마땅해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갈의 임신에 성경은 별로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만일에 하갈이 약속의 어머니라면 굳이 바로에게서 사래를 구출할 이유가 없습니다. 바로의 집에 큰 재앙을 주면서까지 사래를 바로와 동침하지 못하도록 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따라서 왜 너희들은 나를 믿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이 있노라 말합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믿음 있게 살지 않습니다. 아직도 살아가는데 나의경험이 우선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모든 것을 하려는 마음이 팽배하지 않은가 우리는 스스로 점검에 들어가야 합니다. 다윗은 자신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반드시 하나님께 물어서 매사를 처리하였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성령님을 믿어야 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행하여야 합니다. 아브람은 이점에서 하나님을 상당기간 서운하게 하였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운데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의 혜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번성케 하시는 하나님 (0) | 2012.07.21 |
---|---|
전능하신 하나님 (0) | 2012.07.20 |
찬송케 하시는 하나님 (0) | 2012.07.18 |
우리의 고통을 들으시는 하나님 (0) | 2012.07.16 |
우리의 처지를 아시는 하나님 (0) | 2012.07.15 |
찬송케 하시는 하나님(창세기16:13-15)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하갈은 기뻤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약속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래에게 학대를 받을 때마다 고통을 당하고 죽고 싶었는데 하나님께서 그 소리를 들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하갈은 자기의 처지를 너무나도 잘 아심을 깨닫고 자기가 만난 하나님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으로 명명했습니다. 조금 전까지 고통 가운데 마셨던 우물을 이제는 기쁨의 우물로 명명했습니다. 하갈의 기쁨이 무엇입니까? 사래에게는 없었던 비전이 하갈에게는 있었습니다. 사래에게는 없었던 행복이 하갈에게는 있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진리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이 이점입니다. 사래는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아무런 소식이 없고 오히려 하갈에게는 좋은 소식이 이어지게 되어 신앙에 혼란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지 않으면 살기라도 잘사는데] 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가장 좋은 것은 후에 주십니다. 아브람이나 사래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특별관리대상입니다. 하나님의 특별보호하심이 있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끊임없는 공급하심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우리를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말은 우리가 미처 생각지도 못한 것까지 하나님께서 감찰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슬픔과 괴로움을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잘못하여 고통을 자초하였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로 버리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고통 때문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주십니다. 누구의 위로로도 위로가 안 되는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돌이킬 때 그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죄에 대한 은밀한 애통과 고통을 감수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받은 애통과 고통을 스스로 감수하시면서 우리 대신 고통을 감수하십니다. 집에 돌아온 하갈은 기한에 하나님의 약속대로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로써 하갈은 하나님의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의 발을 평탄케 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스프링을 우리 발에 달아주십니다. 왜냐하면 자녀들을 항상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갈은 이 세상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서 제외되어야 할 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녀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이며 약속된 자와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이 되어있는 사람들입니다. 버려질 하갈을 축복하실진대 하물며 그의 자녀 된 우리에게는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감찰하시는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0) | 2012.07.20 |
---|---|
침묵하시는 하나님 (0) | 2012.07.19 |
우리의 고통을 들으시는 하나님 (0) | 2012.07.16 |
우리의 처지를 아시는 하나님 (0) | 2012.07.15 |
아브라함과 사라의 고통 (0) | 2012.07.12 |
우리의 고통을 들으시는 하나님(창세기16:9-12)
하갈은 하나님의 말씀을 잠자코 들었습니다. 그러한 하갈에게 다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처방을 내리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래에게 돌아가라 하셨습니다. 돌아가서 사래에게 복종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하갈에게는 무척이나 힘들었습니다. 겨우 박해를 피해서 돌아왔는데 다시 돌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어떨 때에는 이해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말씀은 좋은데 실천하기가 참으로 힘이 듭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좋은 말씀인데 실천하기가 어렵다고]
그러나 하갈의 행복은 사래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음을 말씀하시고 그 뒤에는 반드시 덧붙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무조건 떠나라 하시지 않았습니다. 뒤에 덧붙이는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무조건 광야로 몰지 않으셨습니다. 거기에는 이미 만나가 준비되었습니다. 생수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오늘의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는 그 뒷면에는 반드시 덧붙여지는 것이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하갈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네가 다시 돌아가기만 하면 네 자손이 셀 수 없이 번성하리라는 약속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공의로운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갈이 임신한 아이가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갈이 무사히 아들을 낳으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마엘(la[em;v]yI)이라는 이름까지 지어주었습니다. 이스마엘은 '하나님이 들으신다'입니다. 하나님은 사래가 학대할 때마다 신음하는 고통의 소리를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통당할 때 모두 기억하십니다. 그리고 고통의 신음소리를 모두 기억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브람이 후에 이 말을 들었을 때 대단히 놀랐습니다. 태어날 아이가 형제들과 대적하면서 살 것이라는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마엘은 태어날 때부터 아브람과 사래에게 큰 부담이었습니다. 아브람과 사래의 잘못된 선택의 값을 이스마엘에게서 묻는 것입니다. 아랍인들은 이스마엘의 후손입니다. 사래의 조언을 아브람이 들음으로서 야기된 가정불화가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방심한 한 순간의 행동 하나로 말미암아 초래될 수 있는 결과가 영향력이 대단합니다. 오늘도 아브라함의 후손끼리 중동지방에서 극렬하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신앙이 있어야 함을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바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믿음은 그 약속을 인내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못하고 우리 생각대로 할 때에 우리의 인생 방향이 엉뚱한 쪽으로 기울기 때문입니다.
침묵하시는 하나님 (0) | 2012.07.19 |
---|---|
찬송케 하시는 하나님 (0) | 2012.07.18 |
우리의 처지를 아시는 하나님 (0) | 2012.07.15 |
아브라함과 사라의 고통 (0) | 2012.07.12 |
하나님의 뜻 (0) | 2012.07.07 |
우리의 처지를 아시는 하나님(창16:7,8)
성경은 여호와의 사자(hw:hy] &a'l]m ;말라크 예호와)가 등장했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하갈 앞에 나타났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은 대단히 큰 복입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는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본문의 문맥으로 보아서 천사가 아닙니다. 13절을 보면 하갈이 하나님을 뵈었다 했습니다. 그렇다고 성령님도 아닙니다. 성령께서는 사람의 모습으로는 나타나시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성부하나님은 더욱 아닙니다. 성부하나님은 죄인인 하갈이 보자마자 하나님의 영광 때문에 죽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여호와의 사자는 성육신 이전에 지상에 출현하신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하갈의 처지를 아시는 하나님은 하갈을 미리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하갈은 사래의 학대를 피하여 무작정 멀리 달아났습니다. 술은 애굽의 동편 국경에 접한 요새화된 성벽이나 지역입니다. 그녀는 되도록 전심을 다하여 사래로부터 멀리 달아나려 했습니다. 그러나 갈 곳이 없었습니다. 하갈은 사래를 피하여 반사적으로 자기의 옛 고향으로 달아나려 했지만 그 길이 불가능함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 때에 하갈은 일생 잊지 못할 일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때로 돕는 자가 없다고 실망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벼랑 끝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전혀 소망이 없는 광야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잘못될까봐 노심초사하시는 모습으로 기다리시고 계십니다.
8절 지구상 어디고 갈 곳 없는 하갈에게 하나님께서 질문했습니다. 하갈에게 어디로 가느냐 물었습니다. 병들어 지쳐있는 하갈을 하나님께서 진단하시는 것입니다. 이 물음은 항상 하나님의 집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가는 사람에게 반드시 질문하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타락한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 물었습니다. 지금 네가 무엇을 하느냐 물으십니다. 이것은 아담의 행방을 모르셔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처지를 아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회개의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일 때 하나님의 도움을 받게 됩니다. 하갈은 하나님의 질문에 응답했습니다. 지금 자기는 사래의 학대를 피하여 도망한다고 하였습니다. 하갈은 지금 자기를 아무도 도울 수 없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질문에 선뜻 대답하였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보면 이상한 점을 발견합니다. 하갈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하갈은 이러한 사람이 아닌데 하나님 앞에서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이것이 하갈에게 복이었습니다.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의 수가성의 한 부정한 여인을 우물가에서 만나셨습니다. 그 여인은 그대로 있으면 영원히 잃어질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마리아는 유대인들이 상종을 하지 않는 지역입니다. 거기에다가 이 여자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던 여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행위로서는 도저히 구원받을 엄두도 내지 못할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자가 예수님과 대화를 하는 가운데 은혜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다보니 자기의 모든 부정을 용서받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출발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찬송케 하시는 하나님 (0) | 2012.07.18 |
---|---|
우리의 고통을 들으시는 하나님 (0) | 2012.07.16 |
아브라함과 사라의 고통 (0) | 2012.07.12 |
하나님의 뜻 (0) | 2012.07.07 |
믿음은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는 것 (0) | 2012.07.05 |
아브라함과 사라의 고통(창세기16:4-6)
아브라함이 86세 때 사라의 의도대로 하갈이 잉태하였습니다. 어쩌면 이들은 하나님의 뜻으로 알았을 것입니다. 사라는 이제 여자로서 떳떳했습니다. 하갈을 아브람에게 준 것이 천만다행이었습니다. 그러나 하갈이 이상해졌습니다. 사라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그 때부터 아브람의 집안에 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 하갈은 자신이 아브람의 후사를 이어줄 자이기 때문에 사라는 사라져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하갈은 그의 주인을 심히 멸시하였습니다.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모른 것입니다. 나는 날 때부터 개구리였지 올챙이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여주인 사라를 보잘것없는 존재로 여겼습니다. 하갈이 오히려 사라를 하녀 취급하였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방법대로 한 실패의 결과입니다. 우리 주위에서 이러한 일을 많이 봅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사람들입니다. 당연히 사라가 열병이 났습니다.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장막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원인제공은 자기가 하였으면서 오히려 아브라함에게 하갈의 문제를 전가하였습니다.
아브람과 사라의 기쁨은 잠시뿐이었습니다.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내가 받는 부당행위는 아브라함이 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사라에 대한 하갈의 태도가 얼마나 오만불손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회계급상 하갈은 하위자이지만 사라보다 상위자로 여기고 그 여주인의 자리를 위협하여 차지하려 했습니다. 사라가 여종 하갈에 대한 예민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5절을 보면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법적권리를 주장하였습니다. 부당한 불법에 대한 책임이 그녀의 남편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불법을 시정하는 것도 그의 남편에게 있다고 말했습니다. 사래는 그때서야 하나님의 판단을 원하였습니다. 사람은 어려움을 당하고서야 하나님을 찾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종이니 사라의 의도대로 하라는 것이었습니다(6절). 사라의 학대가 시작되었습니다. 하갈에게 호된 고통을 가하였습니다. 후사도 생각지 않았습니다. 오직 사라는 하갈에게 괴로움을 더해만 갔습니다. 결국 임신했다고 주인을 멸시했던 하갈은 학대에 못 이겨서 도망하였습니다. 사라의 하갈에 대한 학대에 아브라함은 침묵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침묵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갈에 대한 치리의 권한을 사라에게 맡겼습니다. 왜 그랬을까?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하심을 입었습니다. 하갈은 약속하심을 입지 못하였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안달을 내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기다리는 것은 어쩌면 지루할지 모르나 하나님을 바라는 것은 곧 확실한 희망이요 소망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므로 해서 복된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온 것입니다. 누구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온 사람들은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을 원하고 있습니다. 이미 약속하신 내용들이 눈에 보이도록 이루어지기를 원하고 있지만, 자칫 잘못하면 믿음의 장애물이 우리 곁에 있기 때문에 인내하면서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면 실패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고통을 들으시는 하나님 (0) | 2012.07.16 |
---|---|
우리의 처지를 아시는 하나님 (0) | 2012.07.15 |
하나님의 뜻 (0) | 2012.07.07 |
믿음은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는 것 (0) | 2012.07.05 |
믿음의 장애물은 우리 곁에 있습니다 (0) | 2012.07.04 |
하나님의 뜻(창세기16:3)
3절을 보면 사래가 하갈을 첩으로 아브람에게 준 때가 가나안에 거한 지 십년 후라 했습니다. 성경은 아브람과 사래가 하란을 떠난 지 10년이 지났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의 나이는 85세입니다. 아브람은 85세 때에 약속의 자녀를 얻기 위하여 하갈을 첩으로 맞았습니다. 아브람과 사라의 이러한 생각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꿈으로도 묵시로도 환상으로도 아브람이나 사래에게 계시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라와 아브람이 이러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이 있는데 내 뜻대로 해놓고서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사실화하는 것입니다. 내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고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전혀 하나님의 뜻이 아닌데도 하나님의 뜻으로 몰고 갑니다. 그런데 그 종착지가 엉뚱하게 나타납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데도 도움이 오지 않습니다. 자꾸만 힘이 듭니다. 하나님의 약속인줄 알았는데 오랜 후의 결과를 보니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내 뜻이었습니다. 분명히 내 뜻과 하나님의 뜻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바울의 뜻은 아시아로 가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유럽으로 보내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일과 성령의 일은 우리가 구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사이에서 태어나는 자녀가 아브라함의 후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라와 아브라함은 하갈의 소생으로 약속의 후사를 삼으려 했습니다. 롬12:2을 보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의 일부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 안에서 믿는 자들은 합당한 행동을 해야 합니다.
아브람과 사래는 지금 자기가 한 짓이 무슨 짓인 줄 몰랐습니다. 어떠한 결과가 나타날지 전혀 몰랐습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어떠한 결과가 나타날지 몰랐습니다. 이후로 이 일로 인해서 가정에 평화가 깨졌습니다. 후에 나타나는 일들은 지금까지 그들의 끝없는 분쟁의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9월11일에 뉴욕에서 일어난 테러를 보았습니다. 그 사람들이 아브람과 하갈의 소생 이스마엘의 후예들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아브라함을 통한 구속의 역사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한 인류의 구원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것도 끼어들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의한 역사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사라와 아브라함이 몰랐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그 뜻을 이룬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것이 인간들의 운영입니다.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우리의 처지를 아시는 하나님 (0) | 2012.07.15 |
---|---|
아브라함과 사라의 고통 (0) | 2012.07.12 |
믿음은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는 것 (0) | 2012.07.05 |
믿음의 장애물은 우리 곁에 있습니다 (0) | 2012.07.04 |
믿음의 장애물은 우리 곁에 있습니다 (0) | 2012.07.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