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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람의 구출작전(창세기14:14-16)

롯의 급보를 들은 아브람은 즉시 어떠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과거사를 들춰서 “벌을 받아 마땅하다”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집에 있는 목자들 318명을 동원하고 동맹한 마므레의 3형제와 더불어 구출작전을 폈습니다. 어찌 보면 아브람은 무모한 행동입니다. 사해5개국 동맹국과 주위의 여러 국가를 초토화시킨 메소포타미아 연합국과 전쟁을 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브람이 파죽지세로 승리했다는 기록만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전쟁을 통하여 기드온의 전쟁과 연관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전쟁은 아브람의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전쟁이었습니다.

아브람에게는 훈련된 종들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아브람은 한 국가나 다름없었습니다. 따라서 국방을 담당해야 할 사람들이 항상 필요했습니다. 이것을 대비하여 아브람은 종들을 훈련시키고 있었습니다. 아브람은 그들 중 318명을 동원하였습니다. 그리고 동맹자인 마므레 형제들과 더불어 그돌라오멜의 뒤를 쫓아갔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적국에 비하면 전쟁하기에 불가능한 숫자였습니다. 전쟁의 원칙은 피아 비교를 해서 아군 쪽이 월등할 때에 선전포고를 하는데 아브람은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아브람에게는 어떠한 도움이 없으면 롯을 구출하는 작전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아브람은 전면전은 피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야간기습작전을 하기로 하고 여러 팀으로 나누었습니다. 아브람은 적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밤에만 이동을 하였습니다. 적들의 뒤를 바짝 추격한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금방 알아차렸습니다. 적들은 승리에 도취되어 가는 곳마다 파괴하고 술에 만취되어 경계도 허술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롯의 구출작전을 펴는 동시에 천군천사들에게 특별지시를 내렸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람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돕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하고자 하는 대로 천군천사에게 도우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아브람에게 맡기고 천군천사들은 무조건 도우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패하면 안 되었습니다. 하란에서 불러내실 때에 아브람에게 약속하신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끌려가시는 하나님입니다. 아브람에게 전쟁의 전권을 위임하고 천사들은 돕는 자로서만 나타나라고 하셨습니다. 천사는 아브람의 앞뒤에서 격전을 할 때마다 나서서 아브람은 마치 삼손이 블레셋을 치는 것과 같았습니다. 애굽에서 함께 하신 하나님은 지금 아브람과 함께 하셔서 적국을 단숨에 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아브람의 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애굽에서 아브람과 함께 하신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아브람을 이기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와 함께 하셔서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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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을 구하는 아브람(창세기14:13)

중동전쟁에서 패배하고 도망한 한 사람이 히브리 사람인 아브람에게 말했습니다. 롯이 잡혀서 포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아브람은 즉시 롯의 구조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바로 출동하였습니다.

히브리 사람이란 명칭은 여기에서 처음 나옵니다. 히브리인이란 아브람을 지칭하는 독특한 명칭입니다. 아브람이 가나안 주민들 중에 살면서 불려진 관습적 별명입니다. 이 명칭은 민족의 이름이었지만 이방인들과 교제할 때나 그들 자신을 이방인들과 구별할 때 외에는 “히브리인”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히브리인이란 다른 편에서 온 사람, 강을 건너 온 사람이란 뜻입니다. 아브람은 토착민 또는 정착주민들에게 단순히 이방인 곧 요단 혹은 큰 강 유프라데스 강 저편에서 온 사람이나 ‘강 건너온 사람’으로 알려졌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는가?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 살 때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비쳐집니까? 우리는 아브람처럼 대이주(大移住)를 하므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즉 과거를 떠나야 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체에서 이탈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것들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많은 재산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의 상속자이기 때문입니다. 철저한 종교인들 중에서 수개월 혹은 수년에 걸쳐 어느 한 순간에 의식적인 변화가 있습니다. 그것이 새벽과 같았든 촛불 점화 같았든 하나님의 빛이 처음으로 마음속에서 불타오르던 때입니다. 이때 우리는 강을 건넙니다. 예수님이라는 믿음의 강을 넘을 때 변화가 있습니다. 한번 강을 건너온 우리로서는 강 저편을 바라보지 않아야 합니다.

아브람은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메소포타미아에 가지 않았습니다. 메소포타미아는 아브람에게 필요한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곳은 똑같은 세상이지만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5:17을 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비록 강 이편에 괴로움과 고통이 있을지라도 강 저편에 가지 않는 이유는 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강 저편에 갔다가 오면 그만큼 세월이 낭비가 됩니다. 갔다가 오면 원위치가 되어 기초에서부터 새로 시작해야 됩니다. 그래서 강 저편을 바라보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을 일부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을 인도하는 분은 창조주이십니다. 아브람이나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아브람을 害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 창조주이십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누구든지 해할 수 없습니다. 역시 하나님의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강을 건너온 사람입니다. 강 저편에 세상의 모든 것을 놓고 나왔습니다. 새롭게 시작할 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인도하고 채우실 것을 믿고서 다시는 강 저편으로 건너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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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로잡힌 롯(창세기14:1-12)

롯은 소돔 가까이 살았습니다. 소돔은 사람들이 보기에 욕심나는 지역이었습니다. 그래서 전쟁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롯은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시날 왕(아므라벨), 엘라살 왕(아리옥), 엘람 왕(그돌라오멜), 고임 왕(디달) 등의 네 왕들과 소돔 왕(베라), 고모라 왕(비르사), 아드마 왕(시납) , 스보임 왕(세메벨) , 소알 왕(벨라) 등의 다섯 왕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이 전쟁은 성경에 기록된 국가간의 첫 연합전쟁입니다. 첫번째 전투에서 그돌라오멜과 그 연합군은 소돔 왕과 그 연합군을 물리칩니다. 그리고 두 번째의 전투에서 그돌라오멜은 여러 가나안 거민들과 사해 지역의 왕들을 물리칩니다. 이때 아브람의 조카 롯이 포로로 잡혀가고 그의 재물도 모두 노략질 당합니다. 이 두 전투를 통해서 그돌라오멜은 무적의 강자로 부상하였습니다. 그러나 세번째 전투에서 아브람은 그돌라오멜과 그 연합군을 물리침으로 그가 어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강자임을 과시하였습니다.

전쟁의 원인은 팔레스타인의 동맹국들이 메소포타미아의 지배에 불만을 품고서 조공을 거절한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이 싸움에서 팔레스타인의 동맹국이 대파하게 되어 롯이 사로잡혀가게 되었습니다.

13장과 14장에 롯에 대해서 창세기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베드로후서2:6-8에 나옵니다. 롯의 삶은 비록 이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주위의 악행에 대해 분노했습니다. 그로 인해서 그는 굉장히 괴로워했습니다. 그러나 롯은 소돔과 고모라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화를 입었습니다.

13:13절을 보면 소돔사람은 악(라)하여 여호와 앞에 큰(매우) 죄인(핫타)이라고 했습니다. “라”는 이 형용사와 관련된 명사들을 수식하여 그 명사의 특성이나 해로운 행동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곧 사람들이 혐오하거나 싫어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악(라)하지 않아야 했습니다. 외관상으로는 여호와의 동산 같게 보였지만 그 땅은 매우 나쁜 지역이었습니다. 노아시대에 죄를 쓸어버렸지만 얼마 되지 않아서 급속도로 죄가 퍼진 것입니다.

최근에 한국기독교는 정치의 맛을 들였습니다. 기업적인 맛을 들였습니다. 교회는 거침없이 정치와 기업적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와 기업적은 “악”하다는 것입니다. 깨어 있지 않으면 교회는 한없이 추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조심해야 합니다. 여호와 앞에 정치와 기업은 악하지 않은가 조심해야 합니다. 자칫하면 포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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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약속 받는 아브람(창세기13:14-18)

너는 일어나라 (왜냐하면) 그리고(횡으로) 종과 그 땅을 너는 행하여 보라 내가 네게 그것을 주리라

롯이 떠난 후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북을, 그리고 남을, 그리고 동을, 그리고 서를 바라보라”하셨습니다. 롯은 자신이 요단들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위하여 땅을 선택하여 주십니다. 아브람이 바라본 것 네 가지가 있습니다. (1)땅-13:14, (2)하늘-15:5. (3)여호와-18:2. (4)대리자-22:13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땅과 자손에 대한 약속을 재확증 하십니다.

아브람이 롯에게 그의 몫을 선택하도록 허락하자마자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온 땅이 그의 것이 될 것이라고 보증하셨습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 것”이라는 것을 확증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속히 부(富)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벽촌에 거할지라도 하나님의 제단 주위에 모여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며 그들이 어떠한 위험에 처할지라도 그들에게 하나님의 격려는 온다는 것을 확신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하신 땅에 대한 보증은 롯이 그의 양떼와 종들을 데리고 떠난 후에 아브람에게 있어서 매우 필요한 것입니다. 그의 목자들이 주인이 롯에게 좋은 것들을 양도했다고 불평하는 것을 들었을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이러한 비난은 이 일을 처리할 것이라고 기대했던 하나님에 대한 비난으로 자라납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신 것은 후에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식언이 없으십니다. 아브람은 창조주께서 후원자입니다. 이것만 정확히 안다면 아브람은 염려가 필요 없습니다. 아무리 척박하고 어려운 상황이지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아직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믿고 때로는 믿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신실(hn:Wma?;에무나)십니다. R.A.Torrey는 신실하심에 대해서

眞實, 信實, 忠信 등 구약에 씌어져 있는 히브리 원어의 의미는 [떠받친다, 지탱한다, 멎는다]···· 등의 의미를 가진 것이다. 이 말을 자동사로써 쓰는 때에는 [멎는다]는 것, 또는 [지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진실이라는 뜻처럼 인간에 대하여 쓰이는 때에는 [인간이 안심하고 의뢰할 수 있는 분]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언약을 붙잡아야 합니다.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신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매사를 간섭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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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의 거처인 소돔(창세기13:12-13)

굉장히 여호와앞에 죄인(들)이었더라 악하여(복수) 세돔 사람(들)은

.daom hw:hyl' !yai=F;j'w] !y[ir: !dos] yven]a'w]

11절에 롯이 떠난 다음에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다고 기록되었습니다. 롯은 아브람을 떠난 처음에 평지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점점 동으로 옮겼습니다. 거처를 점점 옮겨서 소돔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소돔에 롯이 이르렀을 때에 이미 소돔사람은 악하였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큰 죄인들이었다고 말합니다. 보통 죄인이 아니고 [대단히, 심히, 매우, 큰]죄인들이라고 말합니다.

롯의 선택은 그의 자녀와 자기 자신에게 비참한 결과를 가지고 왔습니다. 사람들의 과오(過誤)는 비참한 결과를 2세에게 나타냅니다. 악성 질병과 같이 그것은 잠복기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롯은 아브람의 장막에 있을 때에 안전합니다. 그러나 복된 장막을 떠났을 때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롯은 소돔의 위험한 富를 주로 그의 자녀 때문에 선택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차라리 하나님 안에서 굶어죽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러한 논리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사람의 타락에 대해서 존 머레이는

[죄는] 우주적 혁명. 죄는 사람의 마음의 영적 영역에서의 사건이다. 죄는 영에서 발생하여 영에 존재한다. 그것은 육체적 세계에서의 혼돈이 아니며 육체적 상태의 불균형이 아니다. 그것은 영의 영역에서의 움직임이다. 하지만 그것은 육체적이고 비영적인 것에 철저하게 영양을 미친다. 죄는 우주적 관련성을 갖고 있다.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창3:17).

하였습니다. 아브람의 장막을 떠난 롯은 소돔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모르고 자꾸 롯은 소돔쪽으로 장막을 점점 옮겼습니다. 이것을 오늘의 말로하면 교회를 떠나서 조금씩 세상으로 향한 것입니다. 차라리 완전히 그리스도인이든지 아니면 세상 사람이든지 해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면 세상에서도 어울리지 못합니다. 교회에서도 어울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눈은 그것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세상적인 조건을 자꾸 찾고 있습니다. 하늘의 것을 찾아야 하는데 자꾸 소돔만 바라보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를 실패하게 하는 원인입니다. 군사용어로 말하면 롯은 화생방 지역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의 눈이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적인 눈을 떠야 합니다. 영적인 눈이 있는 한 소돔은 택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게 보여도 절대로 속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 믿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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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의 선택(창세기13:10-11)

지금까지 성경은 롯의 성격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결정적일 때 성경은 롯의 성격을 말합니다. 물론 사람이라면 자신의 살 준비를 하는 법입니다. 자신의 욕심을 누구나 드러내는 법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경우에 따라서 해야 합니다. 현재의 상황에서는 반드시 아브람에게 먼저 우선권을 주어야 했습니다. 그의 그러한 마음으로 선택권을 받고 보니 요단들을 생각했습니다. 이제야 요단들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평소에 요단들은 물이 넉넉했습니다. 마치 여호와의 동산 같았습니다. 이전에 애굽에서 보던 목초지와 똑 같았습니다. 그 땅을 롯은 욕심스럽게 바라보았습니다. 롯은 이미 그 땅이 아브람에게 속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따라서 당연히 아브라함에게 양보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습니다. 아량을 베풀지 못했으면서 아브람의 아량을 이용하였습니다. 바로 보기에 가장 비옥한 부분인 요단 온 들을 택했습니다.

롯이 소돔을 거주지로 택한 것은 생애의 큰 실수였습니다. 그러나 롯의 눈은 세밀하게 자신의 눈을 들어서 관찰하고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목자들을 위해서 또한 자신을 위해서 세밀하게 가나안 땅을 관찰하였습니다. 롯은 오직 세속적 이익만을 고려하였습니다. 그 안에는 아무런 깊은 것도 없었습니다. 높은 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아브람에 대한 의무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감사도 하지 않았고 겸손도 없었습니다. 그는 영적 교제를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땅의 분배에 관하여 어떤 것을 말씀하셔야 한다는 상식이 없었습니다.

그는 위험하지만 급속한 부의 길을 보았습니다. 그는 富를 붙잡기 위하여 위험을 보고도 못 본체 했습니다. 그 결과 자기 자신과 자기 가족을 파멸시켰습니다. 이러한 사태는 이 세상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사태입니다. 사업이나 문학 혹은 예술의 육성이나 어떤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그 사회에 바람직하지 못한 관행의 사람들과 같이 살게 됩니다. 그런데 이들과 제휴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보다 좋은 위치를 확보하는 기회를 제공받습니다.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러한 유혹이 널려 있습니다. 따라서 유혹인지 복인지 구분해야 합니다. 롯이 관찰하고 찾는 땅은 마치 여호와의 동산과 같다고 했습니다(창2:10). 미츠라임 땅과 같다고 했습니다. 이것만 보면 탁월한 선택입니다. 그런데 뒤에 “여호와께서 멸하시기 전이었는 고로”라는 말이 있습니다. 따라서 롯은 탁월한 선택을 했다고 하는데 죽음의 선택을 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선택을 하고 있습니다. 많은 선택 중에서 과연 아브라함의 선택이냐 롯의 선택이냐는 것입니다. 롯의 선택은 분명히 비판을 받아야 합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선택을 우리는 계속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고난이 따른다는 것일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 끝이 좋은 것입니다. 육신을 위한 선택은 우선은 좋을지 모르나 끝은 파멸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영적인 선택을 해야 합니다. 미츠라임과 같은 것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거기에는 함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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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제안(창세기13:8-9)

창세기저자는 롯이 아브라함과 함께 떠났다는 것을 수시로 강조하고 있습니다(11:31, 12:4). 그가 아브라함과 동행하고 있음을 말합니다(13:1,5). 그러나 재산의 증가로 인해서 이제는 같이 할 수 없음을 성경은 말합니다. 아브람은 가나안의 사람들에게 형제끼리 싸우는 추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이 롯에게 말했습니다. 아브람이 고심한 끝에 말한 것입니다. 다툼을 피하기 위해서 이미 아브람은 롯과의 가이드라인을 그어가지고 있었습니다. 너와 나는 골육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와 나는 다투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원문에는 [다투게 하지 말자]란 앞에 “제발, 청컨대”를 뜻하는 불변화사 an:(나)가 있어서 “제발 다투게 하지 말자”라는 뜻입니다. 문자적으로 “청컨대 나로부터 스스로 분리하라(혹은 떠나라)”라고 하였습니다. 네가 “왼편이면 나는 오른 편을 택할 것이고 네가 오른 편이면 나는 왼편을 택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람은 애굽의 사건으로 신앙이 자란 것입니다.

아브람의 제안은 화평의 제안이었습니다. 아브람은 평화를 위한 명분(名分)을 제시했습니다. 아브람의 제안은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지 않고는 이러한 제안을 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어떤 종교보다 탁월합니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사람 앞에서 다투는 것은 파멸을 자취하기 때문에 다투지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람의 평화를 위한 제안은 아브람은 동일한 권리가 없는 자에게 동일한 몫을 제공하였습니다. 그것도 우선권이었습니다. 이것은 비이기적인 제안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제안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믿음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제안입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다툼의 원인과 그 해결책을 가르침 받습니다. 선한 사람의 부는 하나님의 복의 열매입니다(잠10:22). 하지만 부는 친족과 이웃 중에서 다툼의 원인입니다. 우리는 가정이나 공동체에서 재산 때문에나 이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다투는 것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이런 다툼은 주위 환경과 세상인심으로 말미암아 더욱 가열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을 믿음으로 해결하지 않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 사건은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신앙인의 자세를 보여줍니다. 구약성경이 가르치는 진리는 [외적 번영은 그것을 구하지 않은 사람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오늘 날에도 부(富)하려는 사람들이 가난의 구덩이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재산을 세상의 방법으로 아니고 하나님의 방법에 따라서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빌4:11).”는 성경의 말씀을 우리 속에 깊이 아로새겨야 합니다. 재산의 있고 없음은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알면 재산에 깊이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이미 애굽에서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지켜주실 것을 체험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믿음이 그러해야만 합니다. 섭리하시고 보존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있으면 됩니다.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그 분은 응답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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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후의 시험(창세기13:5-7)

5절을 보면 롯이 등장합니다. 그냥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람의 일행 롯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문자적으로는 [아브람과 동행한 롯도]입니다. 동행 &lehoh' 는 “가다, 걷다”입니다. 따라서 아브람과 롯은 같이 살았습니다. 갈대아우르에서부터 그 전에 하란에서부터 롯이 아브람을 따랐습니다. 사실 동행에는 전제가 붙어야 합니다. 즉 뜻이 같아야 합니다. 아브람의 칠대 손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에녹은 전적으로 하나님과 뜻을 맞추었습니다. 자신을 굽혔습니다. 자기를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의도를 전적으로 따랐습니다. 결국 그는 죽음을 당하지 않고 하늘로 올리움을 당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아브람과 롯의 동행은 같지 않았습니다. 또한 문제가 아브람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이 다툰 것이었습니다. 심하게 다투지는 못하였습니다. 이유는 가나안 사람, 브리스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 약한 틈을 주지 않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갈수록 다툼은 늘어갔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다툼은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옵니다. 사탄이 그리스도인들의 주변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동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싸우고 있습니다. 그 이유로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경쟁입니다. 논쟁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 간의 불일치 등은 세 가지 방면에서 그리스도인을 심하게 파괴합니다.

그리스도인들 간의 다툼은 선한 의지와 신뢰와 평화가 깨어집니다. 즉 인간관계의 기본을 해치게 됩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의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하였습니다. 두 열심들이 오히려 교회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선한 마음의 경쟁이라도 교회에 유익보다 해를 끼치게 되는데 전혀 다른 마음을 가졌다면 교회에 심한 파괴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 간의 다툼은 중요한 목표를 향한 진행을 방해합니다. 아브라함은 애굽에서의 사건 이후로 신앙에 가속도가 붙었습니다. 세상에서 다시 교회로 들어왔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제 더욱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의 장에 있었는데 다툼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잘 나갈 때를 주의해야 합니다. 항상 우리에게 바리케이트를 치려고 하는 대적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의 공동목표인 하나님나라의 확장을 훼방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 간의 다툼은 우리를 사랑 중심으로 보다 오히려 자기중심적으로 만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이 파괴적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배신당하여 체포되기 전에 '그의 제자들이 하나가 되어 주기를 기도하셨습니다(요17:21).

그리스도인들이 협력하여 공동의 적을 물리치지 않으면 유익을 보는 것은 사단입니다. 우리들이 가는 길에 장애물을 놓고서 넘어지기를 기다리는 사단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더 하나님께 가까이 갈수록 사단도 더 방해가 심하다는 것을 항상 인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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