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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는 것 (창16:2)

아브람 부부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기한이 십 년을 넘기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사래는 조급했습니다. 초조했습니다. 견딜 수 없었던 사래는 전면에 나서서 아브람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하나님의 시간과 사람의 시간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아주 급한데 하나님께서는 전혀 급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급하신데 우리는 전혀 급하지 않습니다. 서로 싸인이 맞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싸인이 맞으면 역사가 나타나는데 싸인이 맞지 않는 것입니다. 누가 시간을 맞추어야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간을 맞추어야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이 지구는 무질서의 연속일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시간에 맞추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부부에게 출산을 허락하지 않은 것에는 어떠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아브람이 기다려야 했습니다. 사래는 자신이 이미 단산상태이니 여호와께서도 자신에게 자녀를 주실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에게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모두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때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 믿는 자의 도리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못하실 일이 없음에도 그들에게 아이가 없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시간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못하신 것이 아니고 허락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못했다는 것은 무능력입니다.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은 보류입니다. 하나님은 억제하시기도 하시고 뜻대로 행하시기도 하십니다. 사래의 생산은 주께서 보류하셨거나, 막으셨음으로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사라가 아브람에게 제안하지 않아야 할 것을 제안합니다.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사래는 자기의 젊은 여종 하갈을 아브람에게 첩으로 주었습니다. 사래는 하나님의 약속을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도록 한 것이 아니라 약속에 도움을 가미코자 하였습니다. 그의 여종 하갈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코자 한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실패를 하는 원인중의 하나가 내 생각대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내 멋대로 처리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앙 안의 불신이라 합니다.

사래는 약속을 더 기다려야 했습니다. 아브람에게 제안을 하지 않았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래는 아브람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그 때 아브람의 반응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는 의외였습니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우리는 아브람을 곧잘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끝에 가서야 붙어야 할 수식어입니다. 사래의 제안에 아브람은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선뜻 받아들였습니다. 그들 부부의 소견이 일치를 본 것입니다. 이들 부부가 믿고 있었던 것은 아브람에게 아직 출산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출산력이 있는 아브람과 젊은 여자의 결합이라는 것은 기발한 아이디어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나 사래 모두가 완전히 단산 상태를 기다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을 나타내시려 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러한 뜻을 모르고 전혀 엉뚱한 쪽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했습니다. 그들은 기다려야 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수없이 포기하라고 하십니다. 네 힘으로는 되지 않는다 오직 내 힘으로 하라고 하십니다. 베드로가 자기의 생각을 포기하지 못하고 그물을 내렸을 때 잡은 고기가 모두 달아났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다메섹 길에서 자신을 포기했을 때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스데반이 자기의 목숨을 포기하였을 때 예루살렘과 온 유대에 순교의 피가 흘러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습니다.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자만심을 가지는 자는 모두 망하고 맙니다. 사래와 아브람은 어리석게도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믿었습니다.

And

믿음의 장애물은 우리 곁에 있습니다(창16:1)

사래는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의 아내였습니다. 그래서 사래는 자식 때문에 스트레스였습니다. 사래의 불임으로 인하여 아브람의 집안은 그늘져 있었습니다. 사람으로서 할 일은 다했습니다. 그러나 사래에게는 아직 아이가 없었습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성경을 보니까 나에게 약속하신 것이 많은데 그 약속을 언제 이루어 주시려고 아직까지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실까 답답하기만 합니다. 꿈은 확실한데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잘 이루어지는 것이 왜 나에게는 이루어지지 않는지 이것이 우리의 의문사항입니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생산치 못하였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지 10년이 지났습니다. 십 년이 넘도록 아무런 액션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따라서 아브람과 사래는 답답했습니다. 차라리 약속이 없었으면 희망을 가지지 않는데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알 같이 네 자손이 많게 하리라는 엄청난 약속을 받은 그들로서는 그들의 불임을 수용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사라는 자신이 아이를 생산할 수 없음을 포기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변을 살펴보았습니다.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둘러보니 하갈이라는 여종이 있었습니다. 하갈은 애굽에서 나올 때 바로로부터 선물로 받은 여종입니다. 그는 젊은 여인이었습니다. 출산력이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성경은 그 여인이 애굽 사람이라고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왜 그를 애굽의 여인으로 독자들에게 알리고 싶어했을까?

지금 아브람의 집에는 무엇인가 심각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왜 하갈이라고 이름을 밝혔을까? 우리는 신앙의 장애물이 너무 가깝고 손쉬운 곳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갈이 곁에 있으면 안 됩니다. 더구나 나에게 문제가 있을 때 하갈이 곁에 와 있으면 안 됩니다. 아브람과 사래사이에 하갈이 끼어들면 안 됩니다. 그런데 옆에 하갈이 있었습니다.

하와의 곁에는 아름답고 지혜로운 뱀이 곁에 있었습니다. 마치 상담자처럼 하와의 곁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파죽지세로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아이성에 진군했을 때 아간이 곁에 있었습니다. 아간으로 인해서 이스라엘이 고생했습니다. 초대교회에 성령의 역사가 불같이 쏟아지고 있었을 때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곁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속에 가룟사람 유다가 곁에 있었습니다. 이들은 차라리 그 자리에 없었어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 때문에 거룩한 총회가 머뭇거렸습니다. 이들 때문에 진군이 더디어졌습니다. 이들 때문에 다른 죄가 파생했습니다. 사래는 바로 그의 곁에 세상을 사랑하는 애굽 여인 하갈을 보지 못하고 젊은 여인 여종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장애가 바로 곁에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사단은 우리의 믿음을 의심케 하고 어떻게든지 방해하기 위해 굉장히 애를 씁니다. 따라서 우리 곁에 사단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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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장애물은 우리 곁에 있습니다(창16:1)

사래는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의 아내였습니다. 그래서 사래는 자식 때문에 스트레스였습니다. 사래의 불임으로 인하여 아브람의 집안은 그늘져 있었습니다. 사람으로서 할 일은 다했습니다. 그러나 사래에게는 아직 아이가 없었습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성경을 보니까 나에게 약속하신 것이 많은데 그 약속을 언제 이루어 주시려고 아직까지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실까 답답하기만 합니다. 꿈은 확실한데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잘 이루어지는 것이 왜 나에게는 이루어지지 않는지 이것이 우리의 의문사항입니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생산치 못하였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지 10년이 지났습니다. 십 년이 넘도록 아무런 액션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따라서 아브람과 사래는 답답했습니다. 차라리 약속이 없었으면 희망을 가지지 않는데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알 같이 네 자손이 많게 하리라는 엄청난 약속을 받은 그들로서는 그들의 불임을 수용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사라는 자신이 아이를 생산할 수 없음을 포기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변을 살펴보았습니다.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둘러보니 하갈이라는 여종이 있었습니다. 하갈은 애굽에서 나올 때 바로로부터 선물로 받은 여종입니다. 그는 젊은 여인이었습니다. 출산력이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성경은 그 여인이 애굽 사람이라고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왜 그를 애굽의 여인으로 독자들에게 알리고 싶어했을까?

지금 아브람의 집에는 무엇인가 심각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왜 하갈이라고 이름을 밝혔을까? 우리는 신앙의 장애물이 너무 가깝고 손쉬운 곳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갈이 곁에 있으면 안 됩니다. 더구나 나에게 문제가 있을 때 하갈이 곁에 와 있으면 안 됩니다. 아브람과 사래사이에 하갈이 끼어들면 안 됩니다. 그런데 옆에 하갈이 있었습니다.

하와의 곁에는 아름답고 지혜로운 뱀이 곁에 있었습니다. 마치 상담자처럼 하와의 곁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파죽지세로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아이성에 진군했을 때 아간이 곁에 있었습니다. 아간으로 인해서 이스라엘이 고생했습니다. 초대교회에 성령의 역사가 불같이 쏟아지고 있었을 때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곁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속에 가룟사람 유다가 곁에 있었습니다. 이들은 차라리 그 자리에 없었어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 때문에 거룩한 총회가 머뭇거렸습니다. 이들 때문에 진군이 더디어졌습니다. 이들 때문에 다른 죄가 파생했습니다. 사래는 바로 그의 곁에 세상을 사랑하는 애굽 여인 하갈을 보지 못하고 젊은 여인 여종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장애가 바로 곁에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사단은 우리의 믿음을 의심케 하고 어떻게든지 방해하기 위해 굉장히 애를 씁니다. 따라서 우리 곁에 사단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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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기 이전하시는 하나님(창세기15:18-21)

하나님과 아브람의 계약은 일방적이었습니다(18절).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파기할 수 있는 계약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계약을 무효화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아브람의 후손이 거할 땅의 경계를 정하셨습니다. 아브람의 등기부등본에 자세하게 기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약속되어 있는 내용을 한 가지도 빠트리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반드시 지키십니다. 우리가 재산관리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는 재산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제도적인 공증을 합니다. 그리고 법무부에 등기를 합니다. 그러면 누구든지 그 재산에 손을 대지 못합니다. 아브람의 등기부등본에 기록될 사항은 이스라엘국경의 경계였습니다. 그것이 언약을 세우는 것입니다. 남쪽국경은 애굽 국경 가자 지방이었습니다. 북쪽의 국경은 유프라테스 강이었습니다. 학개 2:8절에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좌절과 낙심 중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활에 또는 영적인 면에 들어오셔서 반드시 국경을 정하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땅에는 10족속이 살고 있었습니다. 겐,그니스,갓몬,헷,브리스,르바,아모리,가나안,기르가스,여부스 족속 등입니다(19-21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느 빈 땅에 정착시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죄악이 많은 나라 죄악이 관영된 나라를 심판하여 그의 백성에게 주십니다. 사람들이 알아야 하는 것은 지금의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만일에 죄 된 것이라면 가차 없이 빼앗아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가나안사람들은 400년간이나 그 땅이 자기의 땅인 줄 알고 온갖 죄를 저질렀지만 회개하지 않은 그들의 역사는 지구상에서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땅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복종하는 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에는 우리 아버지라고 말하면서 주중에는 고아처럼 행하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언약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약속하고 그 언약을 지키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반드시 지키시는 하나님임을 한 시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항상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마태복음 28:1820에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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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한 계약 (창세기15:13-17)

나님은 우리에게 확실한 계약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임하셨습니다. “너는 정녕히 알라”라는 말의 문자적인 의미는 알고 또 알라입니다. 그러므로 알라는 말이 강조형과 명령형으로서 아브람이 ‘확실하게 알라’입니다. 아직은 그에게 아들이 하나도 없지만 네 자손이 수없이 번성하여 이방에서 나그네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그네로 지내고 있는 그 나라를 섬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아브람의 후손이 하나님의 구원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 속박의 기간이 무려 400여년이나 됩니다. 그러나 400년이라는 기간은 이스라엘이 성장하는 기간이었습니다. 14절 하나님의 말씀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고통의 끝이 온다고 하셨습니다. 네 자손이 섬기는 나라를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에서 오랜 고난을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그들을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는 것입니다. 사단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것 같은데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승리의 깃발을 들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15절 아브람이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말씀은 먼 미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지금의 아브람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관계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현재의 아브람의 신분과 생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너는 장수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창세기25:7절을 보면 아브람은 하나님이 하란에서 불러내신 후 100년만에 그러니까 175세가 아브람의 향년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장수하다가 평안히 나에게로 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의 아름다운 현실이요 미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애가 불투명한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자신의 백성들이 아름답게 사는 것을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16절 이스라엘은 4대만에 아브람이 현재 살고 있는 땅으로 돌아오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대만에 돌아온다는 말씀은 100년을 1대로 잡은 것입니다. 그래야 13절에 400년하고 맞는 계산이 나옵니다. 그러면 왜 400년 만에 이스라엘이 돌아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아모리인의 죄가 아직 심판의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모리 족속의 죄악 즉 가나안 족속의 죄악은 저들을 파멸로 이끈 성적인 타락이었습니다. 아모리 족속은 일반적으로 한 특정한 백성이었지만(10:16) 때때로 가나안의 이스라엘 이전 백성들을 종합하여 부르는 용어였습니다. 아브람과 하나님과 대화하는 당시에 벌써 가나안 사람들은 하나님께 심판을 받을만한 죄를 키워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 땅에 있는 족속들이 회개를 하였다면 그들의 땅이 되었을 것입니다. 죄는 이와 같이 한 나라를 멸망시킬만한 위력이 있습니다. 아모리인의 죄가 심판의 때가 되었을 때는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잡을만한 힘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사단의 한계입니다. 사단이 아무리 우리를 잡고 놓으려 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 한마디에 꼼짝하지 못하고 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했을 때 고통과 고난과 귀신이 그에게서 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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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응답(창15:9-12)

9절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출발한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에 대해 여러 번 질문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친절하게 아브람에게 대답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말로만 하지 않으시고 짐승들과 새들을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람은 즉시 짐승들과 새들을 준비하였습니다. 아브람이 행복할 수 있는 것은 여호와께서 항상 대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아브람의 질문에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즉시 대답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꾸 묻기를 원하십니다. 즉 우리가 쉬지 않고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마다 응답하십니다. 다만 당시의 아브람이 하나님의 사람이었기에 은혜를 받은 것같이 오늘날에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기도만 들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왜 이러한 것을 준비하라고 하셨을까? 제단 위에 짐승들과 새들을 배설하는 행위는 당시에 계약을 맺는 동양적인 방식이었습니다. 오늘날의 방법은 계약서 위에 서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행위는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아브람이 요구한 땅에 대한 계약서를 작성하는 의식인 것입니다.

10절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즉시 희생물을 준비를 하였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짐승을 배설하라는 의미를 알아차렸습니다. 따라서 아브람은 짐승 중에서 꼭 하나님께서 지시한 것들을 골랐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둘로 쪼갰습니다. 아브람은 쪼갠 것을 벌려 놓았습니다. 그러나 산비둘기 새끼와 집비둘기 새끼는 쪼개지 않았습니다. 아브람은 쪼갠 고기와 비둘기들을 둘로 벌려 놓았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말씀을 기다렸습니다.

11절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내용을 준비를 했는데 하나님께서 임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사이에 짐승들의 주검을 보고 독수리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사단은 하나님과 우리 일에 끊임없이 나타나 계속 훼방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려고 할 때마다 훼방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잘 되는 꼴을 못 봅니다. 죽음을 당한 짐승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표합니다. 독수리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효과를 제거하려 드는 악의 세력들입니다. 아브람과 하나님의 약속을 방해하기 위해서 제일 빠른 길은 의식용의 고기를 가져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솔개들이 아예 나타나시지 않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이 할 일입니다. 사단은 우리가 능히 쫓을 수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얼마든지 물리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우리가 할 일이 있고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있습니다. 아브람은 그것을 계속 쫓았습니다. 아브람은 독수리들을 쫓다가 깊은 잠이 들었습니다. 아브람은 오래 기다려도 하나님께서 임재하지 않으시자 깊은 잠이 들었습니다. 깊은 잠은 죽은 듯한 잠을 나타내며 위험에 대한 무감각상태입니다. 마소라성경에는 “깊은 잠이 아브람 위에 떨어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으로 깊은 잠에 떨어지게 하셨습니다. 아브람은 이런 상태에서 계시를 받습니다. 아브람은 잠이 들었을 뿐만 아니라 잠든 중에 그에게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그 두려움은 환경과 자연적인 공포의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는 두려움, 천국의 환상이나 하나님의 현현으로 인한 거룩한 두려움이었습니다. 이 두려움은 하나님의 백성만이 느낄 수 있는 확신 있는 두려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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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필요성(창15:8)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는 영웅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세상에서 탁월한 인물도 아니었습니다. 신앙이 썩 좋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를 부르셨습니다. 그를 통해서 한 민족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항은 세 분이신 하나님 외에 누구도 몰랐습니다. 따라서 이 사실을 모르는 아브람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모시면서도 땅을 약속했던 것에 대해서 굉장히 조바심이 났습니다. 이전에 자손에 대한 약속을 받았지만 땅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한 약속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하나님을 만난 것을 계기로 그 약속이 언제 이루어질지를 하나님께 질문하였습니다.

8그가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아브람은 업을 삼을 줄을 어떻게 제가 알 수 있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그의 자손이 거룩한 민족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는 땅에 대한 약속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람을 이끌어낸 목적은 가나안 땅을 소유로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이 땅이 언제 제소유가 됩니까? 그것을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 땅을 언제 소유할 수 있으며 그 증표는 무엇입니까? 라고 질문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질문입니다. 지금까지 교회를 다니며 신앙생활을 했는데 언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십니까? 제 사정은 말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아브람에게 약속했고, 수많은 하나님의 종들에게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이제 저에게 약속하신 내용이 무엇으로 증표가 됩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브람과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하란에서 출발할 때에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출발했고, 갈대아 우르에서 출발할 때에도 하나님의 음성만을 들었습니다. 아브람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찾았습니다. 즉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실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 이름으로 출발할 때 승리의 깃발을 들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매사에 그와 함께 하기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우리가 유한하고 하나님께서 무한하시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기도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응답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할 때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기도를 절대로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기도의 응답이 우리의 생각에 다소 늦어지는 것은 있어도 기도를 거절하지는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복지에 관심을 가지시고 돌보시는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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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호와라(창세기15:7)

인간은 하나님을 아는 만큼 행복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사화복을 쥐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대단한 뉴스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정식으로 자기소개를 하십니다. 이 일은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은 직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알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배려이십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할 때에 하나님께서 자기소개를 하십니다. 아브람이 하나님께서 내미시는 명함을 받아보니까 나는 여호와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하나님을 아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습니다.

구약에 있어서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것은 그와의 교제를 위해 중요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확보하기 위해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그와 씨름한 강력한 존재에게 이름을 물었습니다. 또한 사사기 13:17을 보면 마노아가 신비한 신적 사자에게 그들의 이름을 알기 위해 물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인격적인 이름을 가지셨습니다. 그 이름에 의하여 그를 부를 수 있습니다. 지정된 전에서 여호와께 호소할 때 그는 가까이 오셔서 복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하늘에 거하시지만 땅에 그의 “이름”이 거할 장소를 선택하셨습니다. 그의 이름이 성전에 거한다는 점에서 여호와의 임재가 보증됩니다(왕상 8:13). 여호와의 이름은 그 자신과 마찬가지로 주권성을 가집니다.

아브람에게 자기를 소개하시는 목적은 아브람과의 언약관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나는 여호와로라라는 말씀은 우주의 실권을 가지고 있으신 하나님의 권능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아브람에게 하셨을 때는 아브람이 어떻게 하든지 언약을 지키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람을 출발시키신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굉장히 사랑하고 계십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에 들어가서 기근이 들자 아브람은 곧바로 애굽으로 갑니다. 거기에 어떠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서 애굽으로 갑니다. 애굽에 들어가서야 자기들이 크나큰 위험에 처해진 것을 압니다. 그러나 위에서 하나님이 지키신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애굽이나 갈대아 우르는 하나님의 자비가 제한된 곳입니다. 거기는 우상숭배지역입니다. 그곳에서 자리잡고 있으면 영원히 멸망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거기에 있습니다. 이 때에 하나님께서는 안타깝습니다. 결국 이끌어 내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십니다. 많은 사람 중에서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끌어 내실 때는 준비를 해놓으시고 부르십니다. 이 세상의 일도 보장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보장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끌어 내시는 것은 내 인생이 새롭게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나의 인생의 기초가 새롭게 놓이는 부르심입니다. 하나님의 특정한 계획에 들어가는 부르심입니다. 나는 너를 이끌어 낸 여호와로다이것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주시려는 특별한 부르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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