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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稱義)(창세기15:6/로마서4:3,9/갈라디아서3:6)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알았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자기의 생각을 교정하고 난 뒤에 비로소 아브람은 하나님의 의도하신 바를 조금이나마 알았습니다.

우리자신의 생각은 항상 믿음과 배치됩니다. 우리생각은 모든 것을 빨리 끝내고 싶어 합니다. 성공도 빨리 하고 돈도 많이 모으려고 합니다. 우리의 생각은 내 입장에서만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은 전혀 하지 않습니다. 오직 내 입장만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편에서 생각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큰 계획이 있는데 그것을 볼 수 없다고 하나님을 믿지 못하면 믿음이 아닙니다.

“믿으니라”는 말은 ‘확증하다, 지지하다, 확실하다’를 의미하며 이 말의 핵심에는 확실성의 개념이 있습니다. 이 믿음은 보증, 확실성으로, 일반 사람들의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과 대조가 되는 단어입니다. 바로 아브람이 하나님을 확고히 믿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내가 생각하고 있는 사고를 전부 바꾸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믿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의 생각에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전적으로 믿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때에 아브람이 여태까지 품고 있었던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침체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하란에서 떠나올 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점점 확실하게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전적으로 의지하고 제대로 믿을 때에 가질 수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을 가진 자는 염려하지 않습니다. 믿음을 가진 자는 담대합니다.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는 말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께서 의의 옷을 입히셨다는 말씀입니다. 아브람의 신앙이 좋고 열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일방적으로 인정하신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와 하나님사이의 상호관계와 조화를 이루는 행동의 문제입니다. 여호와는 약속하시고 아브람은 여호와를 신뢰하고 그의 약속을 확고히 믿는 것입니다. 이제 아브람은 자기의 삶의 토대를 약속에 두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안전과 기초를 삼은 것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풍성한 약속들을 붙잡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며, 그의 말씀을 신뢰하고 그의 말씀에 의거하여 행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이러한 믿음을 로 여기신 것입니다.

바울은 아브람이 하나님의 의를 받은 것은 그것에 합당한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단순한 믿음에 의해서였다고 지적했습니다(롬 4:1-5). 하나님의 구원은 항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졌으며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믿음을 통해 우리가 소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의 증거가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의로 여기셨다는 것은 새로운 사상의 창조입니다. 이전에 우리가 죄로 얼룩져 있었으나 예수님을 믿으므로 인해서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죄를 전 인류에게 전가하셨습니다(롬3:23). 하나님께서는 전 인류의 죄를 그리스도에게 전가시키셨습니다(사53:5,6).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의를 죄인에게 짊어지우셨습니다(빌3:9).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침체해 있을 때 찾아오셔서 두려워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에게 자신을 믿고 있으라고 신신 당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므로 침체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므로 새롭게 길을 재촉할 수 있습니다. 사단의 반격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믿으면 내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의 문제로 되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종종 좋게 추측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낙천주의도 아니며, 어떠한 것을 하고자 굳게 결심하는 마음도 아닙니다. 믿음은 교회에 나와서 헌신하고 헌금했으니 하나님이 알아서 지켜주실 것이다 하는 미신이나 상상이 아닙니다. 믿음은 단순한 맡김인데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것 중 최고의 유산입니다. 믿음이란 우리보다 큰 힘에 의해서 점령을 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위력이 우리를 흔들고 우리를 돌이키게 하고 우리를 개조시키며 우리를 고쳐줍니다. 그리고 그 힘 앞에 항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나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하나님께로부터 출발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바른 믿음으로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일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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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교육(창세기15:5)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믿도록 시청각교육을 시키기로 하였습니다. 5절에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하나님의 확고한 결심을 계속 아브람에게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지 못할 때 직접적으로 알려주십니다. 이스라엘과 유대가 하나님을 떠나서 범죄 했을 때 수많은 그의 대변인을 보내서 어떻게든지 죄로부터 분리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여러 유형의 선지자들을 보내서 이스라엘과 유대의 죄를 샅샅이 수색하고 날마다 수사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답답하였습니다. 아브람이 생각하는 것은 틀렸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을 밖으로 끌고 나가신 것입니다. 하늘을 쳐다보라 하셨습니다. 별을 헤아려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표준 새번역에서는 “주께서 아브람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가서 말씀하셨다.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그리고는, 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의 자손이 저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늘의 별이 세상 모든 해안의 모래알만큼이나 많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별은 사람이 헤아리지 못할 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네 몸에서 태어날 자손이 수를 헤아리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브람에 대한 계획이셨습니다.

우리가 처음 하나님 앞에 나아 올 때에는 참으로 미약합니다. 정말로 하찮고 볼품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시면 달라집니다. 이스라엘은 기껏해야 애굽에 있었을 때 노예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에 열국 중에서 빼어난 민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계획은 무한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범죄 했을 때 여자의 후손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에녹이 300년간 하나님과 동행했을 때 죽지 않고 천국에 오르게 하실 것이라고 서판에 기록하셨을 것입니다. 온 땅이 모두 패괴하여 홍수로 심판을 내리실 때에 한 가족 노아에게 심판을 면해주시마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하신 약속은 하나도 식언치 않으셨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성경에 수많은 약속을 기록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믿고 그대로 따르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큰 상급을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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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생각(창세기15:4)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떠나셨다면 아브람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혼자서 두려워하다가 심한 번민에 더 깊숙이 빠져들어 필경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떠나지 않으시고 아브람을 설득하십니다. 아브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설득하시는 이유는 아브람에게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으시고 방문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남아있는 세상의 것들이 있어서는 안 될 것들을 떨어내시고 약속에 추가될 복을 말씀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자기의 생각을 자꾸 하나님께 말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왜 주어져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의 계획을 우리에게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모두 우리를 위해서 기록된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 말씀을 믿고 따르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한 하늘 문은 닫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면 하나님을 알 수 있고, 왜 우리들에게 오셨는가를 이해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있는 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시고 보호 하실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굉장히 비밀스럽게 기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대적들이 아무리 읽어도 그 뜻을 풀 수가 없습니다. 도저히 해독을 할 수가 없습니다. 사단은 아브람에 대해서 안심했습니다. 아브람은 절대로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라는 더욱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미 과학적으로 생리학적으로 증명된 것이기 때문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사단은 아브람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아브람에 대해서 연구해보았지만 아브람은 아니었습니다. 실수도 많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아브람을 사단은 제외시켰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될 때는 다릅니다. 모든 말씀이 누구나 알기 쉽게 보편적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일급비밀 같았는데 술술 풀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삽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잘못된 고정관념을 고치시기 위해서 아브람에게 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말하는 다메섹의 엘리에셀, 네 집에서 길리운 자가 절대로 너의 후사가 아니다 오직 너와 사라의 몸에서 태어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것이 아브람에게 대한 하나님의 비전이었습니다. 창세기 11:30에 “사래는 아이를 갖지 못하는 몸이어서 자식을 낳지 못하였더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특별관리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잘 되어 가는데 우리가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특별 관리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하나 하나를 무척이나 사랑하십니다. 우리 하나 하나에게 굉장한 비전을 가지고 계십니다. 세상 사람은 우리를 몰라주어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특별대우 하십니다. 지금의 네가 내가 바라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는 지금의 너를 자기로 알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 평가를 함부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바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어려움이 있고 앞이 캄캄해도 인내하고 묵묵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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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람의 생각(창세기15:3)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날개가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지역적인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디고 갈 수 있습니다. 생각은 묶어둘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자유자재로 할 수 있습니다. 파스칼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 했습니다. 생각 속에서 많은 것들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의 생각은 조심해야 합니다. 아브람이 생각하고 말했습니다.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 주셨으니” 이 말은 하나님께서 아직까지 나에게 약속하신 후사가 아직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십시오. 주님께서 아시다시피 저에게는 주님께서 자식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아브람은 사람들에게 자손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주시겠다 하신 자손이 없음을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잡아주시므로 우리들이 살고 있고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는 은혜로서 살고 있음을 철저하게 알아야 합니다. 아직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 씨를 주시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가장 적절한 때에 하나님께서 반드시 주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람은 3절에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 라고 아브람은 하나님께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브람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많은 설교자들이 창세기 12장부터 아브람의 믿음에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아브람 같이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목사나 장로 그리고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들은 무조건 믿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피차간에 우리들 모두 그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알고 있을 때 복병이 여러 곳에서 나타납니다. 전혀 이해하지 못할 일들이 나타나 신앙생활이 힘들어지게 됩니다. 믿음이 좋은 줄 알았는데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연륜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후손을 약속하셨지만 지금까지 저에게는 아무런 이상도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후사는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내 집에서 동고동락한 자 중의 하나가 나의 후사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람의 믿음이었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는데도 그 말씀을 믿지 못했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조금 전에 상급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도 하나님의 말씀을 확증하지 못했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개입하시기 전까지는 믿음이 형편없었습니다.

우리가 착각하고 있는 것이 교회의 직책에 믿음을 두는 것입니다. 목사, 장로, 권사는 물론 믿음이 좋다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교회를 오래 다녔기 때문에 믿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믿음이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그것이 아닙니다. 어제 갓 교회에 출석한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자가 믿음이 있는 것이지 교회를 오래 다녀서 직책이 있어서 믿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신앙의 한 도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가능한 것만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철학입니다. 기도도 신앙의 도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길을 여시는 통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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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라는 것(창세기15:2)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마음을 미리 아시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아브람은 하나님께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아브람은 자기가 왜 이토록 오래 기다려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아브람의 종들은 모두 자식들이 있었습니다. 그의 장막들 안에는 자식이 없어 걱정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아브람은 장막을 나설 때 마다 다른 사람의 자식들이 울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아이들이 자기 옷자락에 매달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그로서 그 기쁨을 만끽하지 않았습니다. 만끽은커녕 그 기쁨의 문 앞에도 가지 못했습니다. 체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과 그 성취가 늦어지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과 거듭하여 논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아브람은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의 모든 선물(은사)이라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아브람은 희망에 찬 이주자였습니다. 한 가족의 시조로 출발했습니다. 실망으로 점철됐던 그 세월은 그를 하나님의 친구요,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물(은사)를 받는 기쁨에서, 하나님 자신에 대한 기쁨으로 나아갈 때 그 과정은 느립니다.

어쩌면 우리들이 이렇지 않은가 공감되는 말씀입니다. 지금 나의 상황이 말이 아닙니다. 이루어야 할 일은 굉장히 많은데 지금 우리는 한 가지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저에게 어떠한 것을 주시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을 저희들이 섬기고 있는데 저희들에게 어떠한 상급이 있는지요? 아브람은 이어서 하나님께 믿음 없는 본론을 끄집어냅니다. 하나님께서 상급을 주신다 해도 나는 지금 아무 낙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자식들이 모두 있는데 나에게는 재산을 물려줄 자식이 없습니다. 아브람은 갈대아를 떠나 온지가 상당히 되었음에도 아직까지 자식이 없으니 어찌할 줄을 모른 것입니다. 자식이 필요한 시기에 자식이 없는 자의 고독과 결핍감을 리얼하게 묘사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은 지가 상당히 오래인데 왜 지금까지 잠잠히 계시는 것입니까? 언제까지 하나님의 약속만 믿고 기다려야 합니까? 이것은 하나님을 충분히 믿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우리의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하나님께 나의 상속자는 다메섹의 엘리에셀이라는 것입니다. 엘리에셀에게 나의 죽은 후에 나의 모든 것을 상속할 수밖에없다는 것입니다. 할 수없이 그를 나의 상속자로서 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아브람의 생각이었습니다. 우리들에게 엘리에셀은 누구입니까? 현재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없이 의지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아닌데도 마치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 같은 것이 엘리에셀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이러한 유혹을 많이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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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약속(창세기15:1)

이후에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후란 14장의 전쟁사건 들의 후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일생동안 수시로 나타나셨습니다. 갈대아우르에서, 하란에서, 모레 상수리나무에서, 벧엘과 아이 사이에 쳤던 장막에서, 그리고 지금 마므레에서 나타나셨습니다. 이러한 지역들에서 아브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지도(인도)와 격려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에게 필요할 때면 반드시 나타나 그 필요를 충족시켜 주십니다. 이미 선포(언약)된 것들을 실현시켜 주십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적시에 임하십니다. 아브람이 이때처럼 확신이 절실했던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야간습격에 성공하여 유브라데스강 건너편의 군사들을 물리쳤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동방 군주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브람은 그들의 보복적 재침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하시는 말씀이 ‘두려워 말라’ 하십니다. 나는 너의 방패이며 지극히 큰 상급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감히 너를 건드릴 자가 없다는 말씀이요 약속은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이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 중 능력에 대해서 Millard J. Erickson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은 자신이 원하시는 모든 것을 하 실 수 있다는 것이다. ···· 우리는 또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 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통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두렵고 떨리는 일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때 우리들은 대체로 사람을 의지하려고 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 우리를 도우실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방패이십니다. 방패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막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방패도 전쟁의 무기는 막을 수 있는데 하나님의 방패는 어느 누구도 뚫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와 하나님의 사이에는 언약이 있습니다. 이 언약이 우리에게 있는 한 감히 아무도 우리를 건드릴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계속 하나님께만 붙어 있으면 됩니다. 그 약속을 믿고 예수님 안에 있으면 됩니다. 그러면 무슨 일을 만나든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믿음이 우리에게 절대 필요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우리를 감찰하고 있음을 믿는 믿음이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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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의 처신(창세기14:21-24)

재물이란 “돈이나 그 밖의 값나가는 물건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라고 국어사전은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재물을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이 재물이 사람을 행복하게 해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재물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지 않습니다. 이 재물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옛날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재물을 소홀히 다루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필요한 물품들은 반드시 있게 하십니다. 우리가 그것을 알 수 있는 길은 創造時에 모든 것을 다 만들어 놓으시고 나중에 인간들을 창조하신 배려입니다.

아브람에게 물질의 시험이 왔습니다. 이 물질은 아브람이 허락만 하면 얼마든지 소유할 수 있는 당연한 물질입니다. 그러나 소돔 왕의 제안에 아브람은 거절합니다. 재물은 없어서 안 될 것인데 왜 아브람이 그 재물을 거절하였습니까? 받아도 될 물질인데 왜 아브람이 거절하였습니까?

아브람은 소돔왕 베라의 도움은 받고 싶지 않았습니다. 후에 거부가 된다면 틀림없이 “내가 아브람의 재산증식을 하는데 일조했다”라는 말을 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이 말을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브람은 자기가 일어서도록 예정되어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일어서리라는 것을 알고 싶었습니다. 모든 것을 오직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만을 받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런 경우에 그 선물을 받아들이는 것은 참으로 승리를 쟁취하신 하나님께보다는 오히려 아브람에게 모든 사람의 주의를 집중시킬 것입니다. 아브람의 거절은 단호했습니다. 그는 “맹세”함으로써 자기의 태도를 분명히 했습니다. 아브람에게 있어서 그 재물이 어떠한 유익을 줄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바 아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때가 많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사물을 건전하게 보아야 합니다. 양심적으로, 그리고 올바르게 보고 있다고 판단될 때 우리의 행동 거취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입장은 사회의 올바른 구조가 무시될 때 우리는 결코 올바른 행동을 철회할 수 없습니다. 전리품은 사람을 유혹하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소유해도 무방했고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이 아브람을 유혹하지는 못했습니다. 이미 아브람이 손을 들어 맹세한 천지의 창조주와 소유자이신 그 분의 손에는 소돔의 선물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부(富)가 있었습니다. 아브람은 자기의 성공이 하나님의 전권에 달려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돔 왕의 제안을 거절할 수 있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이런 요소가 있습니다. 행복과 성공과 위로와 기쁨을 위해서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의 복잡한 사회생활 속에서 이러한 생활을 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인의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언제든지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은 곧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세상의 것으로 우리가 살려고 하지 않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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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렘 왕 멜기세덱(창세기14:17-20)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한 왕들을 격파했습니다. 잡힌 포로들을 구하고 돌아왔습니다. 이때에 소돔왕 베라와 살렘왕 멜기세덱이 사웨 골짜기까지 영접을 나왔습니다. 사웨란 '평평한 평원'을 말하는데 예루살렘 가까이에 있던 골짜기입니다. 후대에 사웨는 '왕곡'이라 불렸습니다(창 14:17, 삼하 18:18). 압살롬은 사웨 골짜기 곧 왕곡에 기념비를 세웠습니다(삼하 18:18).

멜기세덱은 창14:18-20, 시110:4, 히5:4,10, 히7:1-10에 나옵니다. 멜기세덱에 대해서 성경은 우리에게 확실한 정보제공을 하지 않습니다. 대체로 멜기세덱에 대해서 세 가지의 견해가 있습니다.

셈이라고 하는 설이 있는데 이 이론은 히브리 전승입니다. 그리스도라는 견해가 있는데 신학자들의 견해입니다. 그리스도의 현현을 언급하고 히7:1-4을 언급하면서 주장합니다. 다만 예루살렘의 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멜기세덱의 문자적 의미는 “의의 왕”입니다. 그리고 살렘은 예루살렘의 처음 이름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손석태 박사의 창세기 강의에서 “가나안의 왕이자 제사장이었던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윌터 브루거만은 그의 창세기 주석에서 “본문은 예수가 멜기세덱으로부터 비롯되었다거나 멜기세덱의 후손이라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멜기세덱과 같은(like) 자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자라고 말한다”고 했습니다.

매튜헨리 역시 “멜기세덱이 가나안의 왕이며 살렘을 통치했고 거기서 참된 신앙을 지켰다는 것이다”고 말하면서도 당시의 통념을 말하고 있습니다 .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칭호입니다. 그 의미는 ‘의의 왕’ 또는 ‘의로운 왕’입니다. 그는 살렘, 곧 평강성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항상 있는 것입니다(히 7:3). 멜기세덱이 가나안 왕이며 살렘을 통치했고 거기서 참된 신앙을 지키며 제사장으로 사역하였다고 합니다. 멜기세덱에 대해서 성경은 미스테리 인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미스테리 인물로 알아야 합니다.

그가 사웨 골짜기 곧 왕곡에 출현했으나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 그가 떠난 곳이 어디인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그의 두 손에는 전쟁으로 지친 아브람의 가족 및 사로잡혔다가 구출돼 온 자들에게 필요한 선물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브람의 절을 받고 그의 십일조를 받았습니다.

멜기세덱이 족보도 없고 그의 생애에 시작도 끝도 없이 사역을 한 것처럼, 우리 주님도 비록 여자에게서 태어나긴 했지만 죄인과는 구별되어 그리고 보통 가계(家系)와는 아주 동떨어져 계시며, 유전을 통해 물려받지 않은 임무를 완수하셨습니다. 그 임무는 그 누구에게도 물려줄 수 없었습니다. 멜기세덱이 역사의 흐름 속에서 그 어느 누구와도 연계되지 않은 채 우뚝 서 있는 것처럼, 사실상 우리 주님은 영원에서 갑자기 나타나사 보는 이들에게 기묘자였습니다. 육신의 부모에게도 명령을 내릴 권위를 지니셨습니다. 아브람보다 훨씬 먼저 있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홀연히 사로잡힌 자에게 나타나 사로잡고, 그의 두 손에 선물을 가득가지고 나타나시고, 그의 입술에서는 복의 말씀이 떨어졌습니다.

이사야 9:6에 예수님을 소개하는데 “그의 이름은 기묘자(펠레; 불가사의 한것)라, 모사(고안자)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하였습니다. 비밀에 싸였지만 우리가 알 수 있는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신비한 분이시지만 우리에게는 전혀 낯설지 않으신 분이 우리의 매사에 함께하셔서 그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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