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새벽강해'에 해당되는 글 262건
- 2011.09.13
- 2011.09.12
- 2011.09.09
- 2011.09.08
- 2011.09.07
- 2011.09.06
- 2011.09.04
- 2011.09.01
거룩한 관유(출애굽기30:22-33)
“너는 기름을 부으라/발라라(T;j]v'm;W/ūmāshahthā)는 jv'm/마샤 ‘칠하다, 기름을 바르다(붓다)에서”유래했으며 “기름부음(바름)을 받다”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가장 좋은 향품을 취하라 하셨습니다. 액체 몰약(값비싼 향품:소말리아·이디오피아·아라비아) 500세겔(5700g), 향기로운 육계 250세겔(2850g), 향기로운 창포(갈대)250세겔(2850g), 계피 500세겔(5700g)과 감람기름 한 힌(367ℓ)을 섞어서 거룩한 관유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이 관유는 향기로운 관유였습니다.
이 기름으로 회막에 발랐습니다. 증거궤에 발랐습니다. 떡상과 그 기구에도 발랐습니다. 등대와 그 기구들도 발랐습니다. 분향단에도 발랐습니다. 번제단과그 기구와 물두멍에도 발랐습니다. 그 받침도 기름으로 발랐습니다(28). 이렇게 해서 지성물로 거룩하게 구별하였습니다. 즉 성막과 성막안의 모든 것들이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기름부음을 받음으로 거룩하게 된 것입니다. 기름은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도 부었습니다. 이리하여 그들이 비로소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타인들에게 즉 정한 사람들(왕·제사장·왕) 이외에 기름을 붓게 되면 그 사람들은 끊어졌습니다. 즉 그 집이 영원히 멸망하였습니다.
기름부음은 통치자 또는 어떤 직분에 임명이나 취임의식에 사용되었습니다. 이 경우 뿔에 담긴 기름을 사람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마샤흐”는 선지자에게 기름 붓는다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습니다(왕상19:16, 사 61:1). “마샤흐”는 이스라엘의 사울 및 다윗, 솔로몬 같은 왕들에게 기름 붓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습니다(삼하12:7, 삼상16:3,12,13, 왕상1:39,23:30 왕하11:12, 대하22:7,11). 어떤 개인이나 어떤 대상에게 기름을 붓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봉사를 위해 권위가 위임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거룩하게 하려고”기름을 부었습니다( 레8:12, 출29:36, 제단에 대하여). 아론을 거룩하게 하려고 기름을 부었습니다.
대행자가 제사장 혹은 선지자라 할지라도 성경 기자들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을 주님께서 기름 부으신 자들로 말하였습니다(삼상10:1,12:7). 이와 같은 말은 권위의 부여자는 하나님이시라는 것,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은 신성하며(삼상 24:8), 기름부음을 받은 자는 특별한 존경을 부여 받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삼상26:9). 하나님의 권한 부여가 “마샤흐”에 수반하게 됩니다. 사울과 다윗의 경우에 모두, "네게는 하나님의 신이 크게 임하리라"하는 것은 그들에게 기름 붓는 것과 관계되어 언급됩니다(삼상10:6,삼상 16:13). 이사야61:1에서 “마샤흐”는 기름부음을 비유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에서 기름 붓는 의식은 왕과 제사장, 선지자들에게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61:1은 예언자의 증언으로 보아야 합니다. 예언자는 이곳에서 자신의 카리스마적 자질을 권위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눅 4:18)에서 이 본문은 예수님께 적용되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약속된 예언자가 되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 기름 부으심을 받으셨습니다.
물두멍(출애굽기30:17-21)
17절도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17). 물두멍을 놋으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물두멍 받침도 놋이었습니다. 물두멍의 목적은 씻게 하는 것입니다. 물두멍의 위치는 회막과 번제단 사이에 두었습니다. 그 속에 물을 항상 담아두어야 했습니다(18). 아론과 아들들이 그 물두멍에서 손과 발을 씻어야 했습니다(19). 아론과 아들들은 반드시 회막에 들어갈 때에 물로 씻어야 했습니다. 그래야 죽기를 면했습니다. 단순히 위생상 씻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 때에도 씻어야 했습니다(20절). 이것은 이스라엘이 대대로 지킬 규례였습니다.
출애굽기38:8을 보면 “그가 놋으로 물두멍을 만들고 그 받침도 놋으로 하였으니 곧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의 거울로 만들었더라”하였습니다. 옛날에는 거울을 유리로 미처 만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구리거울을 사용했습니다. 육을 아름답게 했던 것이 이제는 영을 아름답게 하는 재료로 변했습니다. 물두멍에 담긴 것은 물입니다. 그런데 보통의 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발을 씻기실 때에 씻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너와 나는 관계가 없다고 하니까 온 몸을 씻겨 달라고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요13:4-10).
4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5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6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7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8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또는 영원히)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9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10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이미 목욕한 자”란 “주님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주님의 백성으로 “칭의 된 자”입니다. 주님의 피로 용서함을 받은 자입니다. 주님의 피로 깨끗함을 받은 자입니다. 과거 죄에서 놓여난 몸입니다. 천국의 백성입니다. 따라서 “이미 목욕한 자”란 중생한 몸으로서 마귀가 어떻게 하지 못하는 몸입니다. “중생했다”는 것은 천국의 백성으로서 잃을 수 없는 구속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목욕이 끝난 상태입니다.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고 하신 말씀은 이미 죄를 용서받은 몸으로서 할일인 성화입니다. 성화는 인간의 마음속의 하나님사역입니다. 이 사역으로서 우리가 계속해서 새로워집니다. 겸손해지고 받은 은혜에 감사합니다.
성화는 씻는 행위입니다. 날마다 죄 된 마음을 씻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러 갈 때마다 물두멍에 씻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비결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항상 감사를 드릴 마음의 자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갈 때까지 계속 씻고 씻어야 합니다.
속전(출애굽기30:11-16)
속전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불해야 하는 돈입니다. 성소의 건립과 기구들에 관한 보충적 명령들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1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씀으로 이 출애굽기의 출처가 여호와하나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출4:4,21,30,6:1,10,29,7:1,14,8:1,5,16,20,9:1,12,13,22,35,10:1,12,21,11:1,9,13:1,14:1,15,26,16:4,11,28,34,17:5,14,19:9,10,21,20:22,24:12,25:1,30:11,17,22,34,31:1,12,32:7,33,33:1,5,17,34:27,38:22,39:1,5,7,21,26,29,31,32,42,40:1,19,21,23,25,27,29,32).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없다고 하고 절대자는 없다고 하여도 성경이 말하기를 오히려 그 사람이 어리석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백성들을 정확하게 헤아려 속전(rp,Ko/khōper/코페르)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했습니다. 속전/khōper은 “몸값, 역청”입니다. 덮는다는 의미입니다. 죄를 덮는다는 의미입니다. 헤아려야 할 대상은 남자 20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만한 사람입니다. 전쟁을 할 만한 사람입니다. 계수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코페르”(속죄)로 속전에 의해서 화해되어야 할 것을 말합니다. 속전이라 함은 화해해야 할 사람의 얼굴이 예물로 가리어졌다는 것을 뜻합니다(창32:21,삼상12:3). 그리고 죄 그 자체가 가려진 것을 말합니다(시32:1). 또는 씻어져서(렘18:23) 하나님의 눈에 더 이상 그 죄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죄가 가려짐으로써 죄인이 심판자의 형벌로부터 보호된다는 가정입니다.
모세는 이 속전을 회막의 봉사를 위해 써야 했습니다(38:25-28). 이렇게 함으로써 그 속전은 “여호와 앞에서”그들이 이스라엘 자손의 기념이 되었습니다. 여호와 앞에서 그들이 속죄된 사실을 영구히 상기시켜주었습니다. 속전은 20세이상 50세미만의 계수된 사람만 받았습니다. 속죄금은 모두에게 요구되었습니다. 가난하다고 면제되지 않았습니다. 부자라고 더 내지도 않았습니다. 똑같았습니다. 각 사람에게 같은 값의 속전이었습니다. 이것은 애굽에서 넘었던 사망의 값이기도 했지만 미래의 속전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교회가 확장되어야 합니다. 이 경비는 우리가 내는 속전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세상의 어떠한 일에 돈을 쓰는 것보다 하나님의 일에 쓰는 돈이 가장 값진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투자입니다. 잃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없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헌금(속전)은 나에게 다시 되돌아옵니다. 내가 필요할 때에 반드시 되돌려주십니다. 지금도 우주를 주관하시는 분께서 우리를 감찰하시기 때문입니다. 감찰하시는 하나님께서 이 아침에도 함께 하십니다.
분향단(출애굽기30:1-10)
분향단은 조각목으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 분향할 단입니다(1). 길이가 일규빗, 넓이가 일규빗인 정사각형으로 네모반듯하게 만들어야 했습니다. 높이는 이규빗으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제단에는 네 개의 뿔이 있었습니다. 이 뿔은 높이와 연결시켰습니다(2). 제단의 위와 전후좌우를 금으로 쌌습니다. 뿔도 정금으로 싸고 주위를 금테로 둘렀습니다(3). 금테아래 양편에 금고리 둘을 만들었습니다. 양편에 만드는데 이는 단을 매는 채를 꿸 고리입니다(4). 그 채도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싸야 했습니다(5절). 이 단의 위치는 증거궤 위 속죄소 맞은편의 장밖에 두라고 하셨습니다. 이곳에서 하나님께서 만나시겠다는 것입니다(6).
아론은 아침마다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살라야 했습니다. 등불을 정리할 때에 살라야 했습니다(7). 저녁때에도 등불을 켤 때에 살라야 했습니다. 이 향은 여호와 앞에 영원히 끊지 않아야 했습니다(8). 향을 사를 때 다른 향을 사르면 안되었습니다. 번제나 소제도 같이 드려서는 안 되었습니다. 소제나 전제도 드려서는 안 되었습니다(9). 아론은 1년에 한차씩 향단의 뿔을 위하여 속죄하여야 했습니다. 이 단은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한 단이었습니다(10).
분향제와 번제간의 연관성은 그 두 제사를 동시에 드려야 했습니다. 두 제사 모두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헌신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두 제사 모두 매일 드려야 한다는 점에서 헌신이 영속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분향제는 하나님과의 화해를 전제하였습니다. 이 전제를 근거로 해서 하나님의 영속으로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분향단은 기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귀가 밝으셔서 우리가 기도하면 직접 들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천사로 하여금 하늘에 있는 분향단의 향로를 가지고 내려가서 성도들의 기도와 향연을 담아 하나님 보좌 앞에 분향단에 쏟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늘의 분향단과 땅의 분향단이 연결되는 것이 바로 기도의 응답입니다. 성도가 기도하느라고 바쁘면, 천사는 왔다 갔다 하느라고 바쁘고, 하나님은 응답하시느라고 바쁘며, 마귀는 방해하느라고 바쁘다는 말이 있습니다.
분향단에는 네 개의 뿔이 있습니다. 이 뿔은 기도의 권세입니다. 믿음의 기도에서 궨세의 기도까지 가야 했습니다. 모세는 홍해를 여호수아는 권세의 기도로 태양을 멈추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믿음과 권세의 기도로 앉은뱅이를 고쳤습니다.
향을 아침저녁으로 피웠습니다. 꺼지지 않게 함이었습니다. 기도는 그치지 않고 계속 해야 합니다. 우리역시 그침 없는 기도를 하여야 합니다.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 은혜를 누립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기도가 그치면 문제가 붙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언제나 받기 원하면 하나님께 기도를 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믿음의 기도를 할 때에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게 됩니다. 하나님의 권세가 우리에게 항상 머물게 됩니다.
매일드리는 제사(출애굽기29:38-46)
제단위에 매일 하나님께 드릴 것은 일 년 된 어린 양 두 마리였습니다(38). 한 마리는 아침에 드리고, 한 마리는 두 저녁 사이에 드렸습니다(12:6). 한 어린 양마다 고운 밀가루(레2:1)에바1/10(2.2ℓ)과 찧은 기름 한 힌(3.6ℓ)의 1/4의(약0.9ℓ)을 혼합한 소제를, 그리고 포도주 한 힌의 1/4(약0.9ℓ)일을 드리는 전제를 바쳤습니다. 한 어린 양은 저녁(일몰·해질녁)때에 드리는데 아침에 드리는 제사와 같이 번제와 소제와 전제를 드려서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했습니다. 이런 제사들을 통해 이스라엘은 그들의 생존을 매일 여호와께 바쳤습니다(레1장·2장). 매일의 생활전체를 여호와께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미래의 시간을 위해 여호와 앞 회막의 문에서 드렸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곳에서 백성들을 만나 그들과 교제하심을 나타내심입니다.
백성들이 언약궤에 접근하는 것이 허락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소안에 있는 번제단에 만은 가까이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곳에서도 자신을 그들에게 나타내시겠다는 의지입니다. 그의 영광으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실 것임을 선포하셨습니다.
매일 드리는 예배의 가치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립니다. 예배의 모든 요소는 의식에 스며들어야 합니다. 경배는 하나님의 위엄을 깨닫는데서 출발합니다. 하나님께 경배가 있는 곳에는 경외가 있습니다. 경건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많은 경우가 불경스럽다는 비난과 정죄를 받을 만합니다. 삶에는 흥겨움과 흥겨운 잔치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성소에서의 하나님의 예배에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딤전6:15,16)이십니다.
구약의 예배와 신약의 예배사이에는 대조가 있습니다. 구약의 예배의 중심은 성막이었습니다. 후에는 성전이었습니다. 예배는 특히 여러 가지 제사와 관련된 정교한 의식에 의해 드려졌습니다. 신약에도 의식이 있습니다. 세례와 성찬입니다. 또한 기도, 하나님을 찬미함, 말씀의 설교, 말씀의 봉독, 성례의 거행이 예배의 요소들입니다(존 머레이).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우리의 마음가짐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드려야 합니다. 아침저녁으로 번제와 소제와 전제를 드린 것처럼 우리는 매일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대한 섬김이요 우리의 살아 있음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후에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싶어도 드릴 수 없는 상황이 있기 때문입니다. 정한예배와, 삶의 예배가 우리들에게서 그침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치는 날은 우리가 하나님께 가는 날입니다.
제사장의 위임식(출애굽기29:35-37)
제사장의 위임식은 칠일동안 계속됩니다. 이 기간에는 7일간 계속 수송아지 한 마리씩을 속죄제로 드렸습니다. 그 수송아지로 단을 속죄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기름을 부어 거룩케 했습니다. 그것을 칠일동안 단을 위하여 속죄하여 거룩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면 단이 지극히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것이든 단에 접촉하면 거룩케 된다고 하셨습니다.
제단 성별이 제사장의 위임식과 연결되고 있습니다(레8:10-12). 제단은 사람이 만든 것입니다. 따라서 거기에 인간의 (더러움의 흔적이) 부정함과 범죄가 묻어 있습니다. 그래서 단을 위해서 속죄해야 합니다. 성소와 제단은 하나님이 거기 계심으로써 일상의 생활 영역에서 구별되는 “거룩한”영역이 됩니다. 따라서 자격 없는 자들이 이 영역 가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는 마땅히 하나님을 공경해야 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기에 여러 가지 부작용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자격 없이 성물에 접촉하는 자는 그 자체로 거룩하게 되어서(37절), 거룩하신 하나님의 것이 되었습니다. 이는 죽음을 뜻하거나(삼하6:6-7), 아니면 평생 제단에서 봉사해야 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요구하기를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도 거룩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 메시지는 신구약성경 모두를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거룩하시므로 그 분은 모든 거룩한 것의 초점이 되십니다. 따라서 구약성경에서 거룩하다는 것은 하나님께 드려졌기 때문입니다. 거룩하게 간주되는 사람, 장소, 시간, 그리고 사물들을 묘사하는데 사용된 전문 종교용어입니다. 일곱째 날은 거룩했다(창2:3;출20:8-11).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시기 위해 불 가운데 모세에게 나타나셨던 시내산도 거룩했습니다. 예배와 희생제사와 연관된 모든 것은 거룩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소유물로 구별되었기 때문에 유대국가와 백성들은 거룩한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핵심적인 측면은 보편적인 것에서 거룩한 것이 구별되었습니다. 즉 우리도 이러한 맥락에서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구별되었습니다. 구별되었다는 것이 눈에 보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예배와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거룩함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별되지 않은 세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보편적인 삶에서 구별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일단 성령님의 안에서 붙잡힌바 된 우리로서는 내가 거룩해서 거룩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거룩해서 거룩한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거룩한 것입니다.
성물의 취급(출애굽기29:31-34)
위임식의 수양은 남겨진 수양의 고기입니다. 즉 태우지 않은 제물입니다. 이것을 삶되 거룩한 곳에서 삶아야 했습니다. 여기에서 거룩한 곳이란 회막문을 말합니다. 삶는 것은 같다고 해서 아무 곳에서나 삶지 못했습니다(레8:31).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이르되 내게 이미 명하시기를 아론과 그 아들들은 먹으라 하셨은즉 너희는 회막 문에서 그 고기를 삶아 위임식 광주리 안의 떡과 아울러 그곳에서 먹고
화목제희생으로 드리는 거제물은 드리는 자가 참여하여 먹었습니다. 또한 광주리에 있는 떡(남아 있는 떡)을 먹었습니다(32). 그러나 위임식 성물의 음식은 아론과 그 아들들(제사장의 직분자들)은 먹되 타인들(제사장외의 사람들)은 먹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聖物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제사장들이라 하더라도 아침까지 남았으면 먹지 못했습니다. 불에 살라야 했습니다. 그 이유는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2:2을 보면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외에는 절대적으로 순수한 존재란 없고, 도덕적 속성에는 많은 한계가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들은 그래서 거룩하지 못합니다. 인간들은 하나님 앞에 서고자 할 때는 반드시 거룩한 의식을 행하여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거룩하지 못한 인간들과는 상충이 됩니다. 그래서 항상 만날 때는 거룩한 의식을 행하여야 합니다.
교회는 거룩합니다. 교회의 거룩성은 신자들이나 교회의 제도에 있지 않습니다. 교회의 거룩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교회의 거룩은 그의 임재와 성령의 역사에 있습니다. 만일에 교회의 거룩성이 신자나 교역자들에게 의존한다면, 그것은 불충분한 거룩함입니다. 신자도 온전하지 못합니다. 성직자라 할지라도 인간적인 죄성에서 완전히 떠나지 못했기 때문에 거룩하지 못합니다. 신자나 성직자가 거룩한 삶으로 부름을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신자나 성직자도 죄성을 지닌 신체 속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거룩성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거룩성이란 하나님의 성령과 말씀과 기도와 성례전 속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현재 속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거룩성은 하나님의 일이지 인간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항상 거룩한 하나님의 앞에서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 때에만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의 책임이 강하게 부각이 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성도는 그렇게 살 때에 은혜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 역시 거룩해야 합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하셨습니다 .
대제사장의 상속(출애굽기29:29-30)
아론이 입는 성의(聖衣)는 그의 아들들에게 물려주어야 했습니다. 차기 대제사장에게 물려주는 것입니다. 대제사장들은 성의를 입고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의 아들들도 위임식을 거쳐야 대제사장을 할 수 있었습니다. 왜 대제사장을 상속합니까? 인간에게는 대제사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죄로 말미암아 죽어야 할 인간들을 하나님께서 대제사장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죄를 代贖하려면 대제사장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또한 중보자는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중보자가 성취했어야 할 일이 평범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중보자인 예수님의 임무는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에 회복시키는 임무입니다. 인간의 자녀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는 임무입니다. 지옥(Gehenna)의 후사들을 하늘나라의 후사로 변화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지 않았었다면 우리는 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가 그 자신의 것을 우리에게 주고 은총으로 본래 자신의 것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모습을 취하지 않았더라면 누가 이런 일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보증에 의지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임을 믿습니다. 그것은 본래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었고, 친히 육체가 되었으며, 우리의 육을 자신의 육으로 하였고, 또 우리의 뼈를 자신의 뼈로 삼고 우리와 한 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창2:23-24; 엡 5:29-31). 그는 자신에게 고유한 것을 우리에게 주기 위하여 자진하여 인간의 성품을 취하였습니다. 우리와 공동으로 하나님의 아들과 인자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가 "나는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요20:17)고 말했을 때, 그 자신의 입으로 칭찬하고 있는 거룩한 형제애가 나왔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하늘나라의 기업을 확신하는데 그것은 오직 천국을 전적으로 자기의 것으로 삼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그의 형제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아론의 대제사장은 예수님의 대제사장의 예표입니다. 구약에서 신비의 인물로 부각된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제사장 살렘왕 멜기세덱도 예수님의 예표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의 직분은 세습이 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세습은 얼마 아니 가서 끊어졌습니다. 예수님의 대제사장직이 온전한 제사장의 직분이었습니다. 아론의 대제사장직은 아무리 길어도 온전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야 온전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야 모든 것이 마침이 되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외쳤던 마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대제사장의 직분을 원하셨습니다. 그가 제물 되심도 원하셨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의 마침이었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은 상속되었지만 결국은 예수님으로 마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