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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ma라는 나라

 

주전753년에 로물루스에 의해 세워졌다고 하는 Roma. 로마는 서양문명을 대표하는 도시입니다. 원래 로마는 로마 중심부에서 시작된 작은 도시국가였습니다. 하지만 차츰 세력을 넓혀갔습니다. 서쪽으로는 영국, 동쪽으로는 중동 지역, 남쪽으로는 아프리카 사하라 지역까지, 북쪽으로는 북유럽 대부분을 정복하여 Roma제국을 건설했습니다. Roma인들은 민족이나 국가에 상관없이 좋은 문화를 모두 받아들여 자신들의 문화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리스, 에트루리아, 이집트, 페르시아, 지중해 연안 나라들의 문화를 전부 흡수했습니다. Roma인들은 자연신을 숭배했었습니다. 그들은 신들의 형상(우상)을 중심하여 제사와 특별한 연회에 의해서 소위 신들과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모든 Roma인은 식사 때마다 농장과 식품창고의 정령들에게 봉헌물을 바쳤습니다. Roma인들은 공화정시기(주전509-27)에 Greece신화를 받아들이고 그 신들을 마치 고유의 신이었던 것처럼 섬겼습니다. (우상)을 중심한 제사와 특별한 연회에 의해서 “신들과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Roma에서 Jupiter(Greece/Zeus)는 “가장 위대한 최고의 신”으로 여겼습니다. Roma의 Capitoline 언덕에 세워진 신전은 가장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Jupiter는 번개와 천둥으로 그의 뜻을 알려 준다고 생각했으며, 승리한 장군이나 황제는 Jupiter신전을 향하여 개선행진을 하였습니다. 이 행진에서 포로와 약탈물 들을 과시하였습니다.

여신 Juno(Greece/Hera)는 여자들과 결혼의 신이었습니다. 6월하반기에 결혼시기로 적절하다고 여겼습니다.

軍神 Mars(Greece/Ares) 는 Jupiter 다음이었습니다.

海神 Neptune(Greece/Poseidon)은 바다와 강의 신이었습니다. 그 사제들은 “다리 건설자”(라틴어로pontifex)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대사제(pontifex maximus)는 선출된 인물로서 종교력(層)과 제사를 주관하였습니다. 그 호칭은 계속 존속하였고, 오늘날 교황주의자들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Mercury(Greece/Hermes)는 상인과 도둑의 신이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결합이었습니다.

Venus(Greece/Aphrodite)는 사랑과 미의 여신이었습니다. 고린도에는 수많은 신전 창기들이 종교의식의 일부로서 그들의 직무를 수행하였습니다.

인간의 내면세계란 인간의 물리적인 실체를 외부로 보고, 그에 대하여 밖으로 나타내지지 않은 추상적인 속 부분을 말합니다. 내면세계란 주로 인간의 정신세계를 말합니다. 사람의 내면세계는 사람의 행동방식을 결정합니다. 그래서 어떤 내면세계가 있느냐에 따라서 외부로 나타나게 됩니다. 역사 속에서는 세 가지의 인간의 지성적 관념과 문화생활과 정치적 생활 속에 녹아있는 노선이 있었습니다. 철학적 노선, 과학적 노선, 종교적 노선입니다. 철학적 노선은 삶의 기본적 문제에 대한 지적해결을 추구합니다. 과학적 노선은 두 부분으로서 첫 번째는 물리적 우주의 얼개와 그리고 이 얼개가 발견한 것을 기술에 실재로 적용하는 것입니다. 과학이 나아갈 방향은 과학자들의 철학적 세계관이 결정합니다. 종교적 견해들도 역시 개인생활의 방향과 사회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이런 면에서 로마는 오늘날의 서구에 많은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서구의 문명이 미치는 곳에 로마의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Roma는 모든 인간이 직면하는 기본적 문제에 대해서는 진정한 해답을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Greece가 주전146년에 Roma의 통치를 받게 된 후에 로마의 사상과 문화는 대부분 Greece의 사고방식에 의해 형성되었습니다. Greece들은 도시 국가(polis)에 사회를 세우려 했습니다. 도시국가는 시민으로 받아들인 모든 사람들로 구성되었습니다. 모든 가치는 polis와 관련되었습니다. 그래서 Sōcratēs(주전469?-399?)는 죽음이 아니면 자기에게 의미를 주었던 것(polis)에서 추방되는 것을 선택해야 했을 때, 죽음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polis는 한 사회를 세우기에 충분한 기반이 못되었습니다. 그래서 무너졌습니다. Greece들과 그 후 로마인들은 또한 자기들의 신들을 기초로 삼아 사회를 세우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한낱 사람들이 만들었던 것이었기에 아무런 힘이 없었습니다. Greco-Roman의 사고방식에서 신들은 인간들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인식하고 있는 신은 오늘날처럼 인간이 확대된 것에 불과했습니다. 엄밀하게는 신이 아니었습니다. Greece들이나 Roma인들에게 무한한 신은 없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지적으로 충분한 참조점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가치 계는 개인적, 정치적 삶의 긴장을 견뎌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많이 섬겼던 신들이 다 모여도 그들의 삶, 도덕, 윤리의 궁극적 결단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이들 신들은 자기들을 만든 사회에 의존했고, 이 사회가 무너졌을 때, 신들도 함께 몰락했습니다. 그래서 엘리트주의적 공화국에 입각한) 사회의 조화를 노린 Greece와 Roma는 실패한 사회였습니다.

Julius Caesar(주전100-44) 시대에 로마는 씨저에 권력이 집중된 권위주의적 체제로 돌아섰습니다. 씨저 시대 이전에는 원로원이 질서를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무장한 강도떼가 로마시를 공포에 떨게 했고, 권력을 노리는 경쟁자들 때문에 정부의 정상 활동이 중단되었습니다. 이기심이 사회의 이해보다 더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좌절 속에서 권위주의적 정부를 받아들였습니다. 따라서 Roma가 씨저를 선택한 것은 공인된 독재였습니다.

Julius Caesar가 죽은 후에 Caesar Augustus라고 불린 Octavianus(주전63-주후14)는 씨저의 질녀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입양되어 씨저의 양자가 되었습니다. Roma의 시인 버질(주전70-19)은 Augustus의 친구였는데, Augustus가 신에 의해 임명된 지도자이며 로마의 사명은 평화와 문명을 세상에 가져다주는 것임을 보일 심산으로 ‘Aeneid’를 기록했습니다. Augustus가 평화를 세우고 외부적으로는 입헌적 형식을 따랐으므로 로마와 모든 계층은 정치체계, 상업 그리고 일상생활의 일들의 기능을 회복하고 확고하게하기 위하여, 기꺼이 그에게 모든 권력을 주었습니다. 주전 12년 이후로 그는 국가종교의 수장이 되어 최고신관(Pontifax Maximus)의 칭호를 가지고 ‘로마의 정신과 황제의 수호신’을 숭배할 것을 모든 사람에게 촉구했습니다. 후에 이것을 제국의 모든 백성에게 강요했고, 그 이후의 황제들은 자신을 신처럼 여기고 제국의 백성을 지배하려 했습니다. Augustus는 도덕과 가정생활에 관하여 입법하려 했고, 그 뒤에 나타난 황제들은 법률적 개혁과 복지계획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신은 토대로 삼기에는 빈약하였고 따라셔 로마는 몰락했습니다.

Roma제국은 규모나 군사력이 대단했습니다. 로마의 도로는 모든 유럽, 근동 그리고 북부 아프리카에 뻗어 있었습니다. 그들의 군사력은 대단했습니다. 그들은 다른 나라들처럼 전쟁을 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적을 침략하기 위해서 도로부터 냈습니다. 그리고 노도처럼 밀어붙였습니다. 그리고 제국을 확장했습니다. 하지만 그 제국은 힘으로만 유지되는 제국이 아니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황제를 섬기지 않는 것에 매우 분개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들은 무너졌습니다. 그리스도 없는 국가는 영원히 존재할 수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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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berius와 유대인(사도행전25:6-12)

Tiberius는 유대민족의 특수성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Syria 총독 Kurêvios를 계속 중용한 것도,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여러 가지 타협책을 취한 것도 Tiberius가 유대인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반면에 유대인을 이해했기 때문에 특수한 유대민족이 보편을 지향하는 Roma제국에 가져올 위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법을 따르는 유대인과 인간의 법에 따라 다스리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 동방에서는 연중행사처럼 일어나는 Greece 주민과 유대계 주민의 충돌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그 이유는 Greece인들은 다신교였습니다. 그래서 Greece 사람들은 Roma와 친숙할 수 있었습니다. Roma인과의 동화에 별다른 저항감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은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다신교와 일신교를 믿는 사람들이 도저히 섞일 수 없었습니다.

Tiberius에게는 Alexandria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Tiberius 당시에 Alexandria의 인구는 100만 명이었습니다. Alexandria의 주민은 5개 지구에 나누어 살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3개 지구에는 Greece계 주민이 살고 있었고, 나머지 2개 지구에는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비율로 봐서 Alexandria에 유대인이 최소한 40만 명은 넘었을 것입니다. Antioch도 비슷할 것으로 추정합니다. 하지만 Roma에서는 14개의 행정구역 가운데 1개 지구에만 유대인 거주가 허용되었습니다. Roma에는 유대인들이 2만 명 정도였습니다. Tiberius는 Augustus가 예루살렘의 유대인에게 허용한 사법권을 동방의 여러 도시에 있는 유대인 에게 공식적으로 인정해주었습니다. 예루살렘과 같이 사형집행만은 Roma의 총독이나 장관의 허가를 받아야 하지만 동방의 유대인들은 율법에 따라 재판을 받는 것이 허용되었습니다. 또한 Tiberius는 토요일마다 안식일을 갖고 싶어 하는 유대인의 의식을 인정해주었습니다. 종교의 자유도 이주의 자유도 인정하고 유대교 특유의 관습도 인정해주었습니다.

주후19년에 유대에서 Kurêvios총독이 유연하게 진행하고 있을 때 Roma에서는 유대인들이 사회불안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Tiberius는 Roma에 사는 유대인들을 모조리 이탈리아에서 추방했습니다. Tiberius는 유대인이 많이 사는 동방에서 Caesar와 Augustus의 정책을 계승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자칫하면 격렬해지는 Greece계 주민들과 유대계 주민들에 대해서 Roma는 중재자역할을 함이었습니다. 이리하여 Roma제국의 동방은 Greece인과 유대인 없이는 존속하지 못했습니다.

Tiberius는 예루살렘과 유대를 헤롯 아그립바에게 맡길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능하지만 책임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대를 시리아 총독에게 맡긴 것입니다. Tiberius는 죽을 때까지 Roma인과 유대인의 관계를 위와 같은 정책으로 일관했습니다. 유대 쪽으로 볼 때 Caesar와 Augustus, Tiberius의 때에는 그런대로 만족한 관계였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참고: 로마인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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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전도여행을 끝내며(사도행전21:15-16)

바울사도는 예루살렘에 들어가게 되면 공식적인 전도여행이 모두 끝나게 됩니다. 바울사도는 가장 늦게 사도가 되었지만, 어쩌면 가장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바울사도는 이방인의 사도이고, 베드로는 유대인을 위한 사도라고 딱 선을 그을 수는 없습니다. 베드로도 이방인을 위해서, 바울사도도 유대인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특히 로마서를 보면 전반부에 바울사도가 얼마나 유대인을 사랑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에게 먼저’여야 한다는 생각에 부단히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요지부동이었습니다. 그들만의 편협한 생각은 복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복음과 율법 중에서 그들은 율법의 우월만 생각했습니다. 복음이 우선이어야 했는데, 율법만을 생각하고 강조하고 지키려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시내산만 바라보았지, 갈보리산은 바라보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바울이 위대하다고 생각했지만, 바울연구가 처음부터 열정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스위스의 신학자인 Franz Overbeck/1837-1905은 Marcion이 바울을 잘못 이해했지만, Marcion만큼 바울을 이해한 사람도 그때까지만 해도 흔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바울연구가 빨리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종교개혁시대 이전에는 Roman Catholic으로 인해서 성경연구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전통만 강조했습니다. 성경보다 교황청이 위에 있었기 때문에 성경을 연구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성경연구가 이러다보니 성경연구에 장애를 가져올 뿐이었습니다. 더구나 행위와 전통을 강조하는 때에 바울은 ‘믿음으로’를 강조하다보니 더욱 멀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Augustine 이후로 황무지와 같았던 바울연구가 비로소 종교개혁으로 활발해졌습니다. 특히 Martin Luther의 바울의 해석 ‘오직 믿음으로’인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바울사도는 가이사랴에서 며칠을 보내면서 숨을 고르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아직까지 모르고 있었지만 예루살렘에 바울이 나타나기만 하면 살해하려고 하는 유대인이 허다했습니다. 어쨌든 사도바울의 일행은 여행의 마지막 단계에 돌입하였습니다. 가이사랴에 도착한지 며칠 만에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짐을 꾸렸습니다. 그들은 약 100km이상을 가야 했습니다. 갈 때 가이사랴의 그리스도인 몇 명이 그들을 따라갔습니다. 그들은 편안하게 환대를 받을 수 있는 예루살렘의 어떤 장소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머물 집은, 구브로의 예루살렘 교회의 설립 멤버들 중 한 사람이었던 Mnason의 집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유대적 성격이 뚜렷한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이 이방 그리스도인들의 무리를 자기들의 집에 맞아들일 준비를 했던 것은 아니었을 것으로 사료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일행은 예루살렘 교회의 헬라파에 속했을, 나손으로부터 환대를 받을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유대인으로서 이방에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유대인들과 부딪히는 것은 당연했을 것입니다. 초대교회도 그 부분에서는 왈칵 개방적이지는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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