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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12.11
    율법으로 인하여 죄를 알지만
  2. 2020.10.10
    죄가 우리 주인일 수 없다.
  3. 2019.10.03
    죄를 깨닫게 하는 하나님의 율법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를 알지만(로마서7:8-12)

 

교육이란 어떤 것에 대하여 모르는 사람에게 잘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전까지는 잘 몰랐던 것을 교육을 받아서 잘 알게 됩니다. 그래서 바른 교육이 꾸준히 전개되어야 하며, 바른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참 교육 참 교육 하지만 말로만 참교육을 하는 교육당국입니다. 이를테면 역사를 왜곡한다는 것은 바른 역사를 비틀어서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곡된 역사를 배우게 되면 왜곡된 것이 머리에 각인이 되어버립니다. 요즘 박근령의 망언에 우리나라사람들이 매우 분노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틈만 나면 역사왜곡을 하며 오만잡것들을 합사한 것들에게 절을 하는 일본의 총리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같이 아시아에서 흉폭하고 잔인한 일을 저지르고도 전혀 반성하는 기미가 없습니다. 그런 중에 박근령이 미친 말을 한 것입니다. 아베나 박근령이나 역사왜곡에 대해서 전혀 생각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러한 말들을 듣고서 교육이 이루어진다면 아주 잘못된 생각과 행동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극우주의자와 태평양전쟁의 주범들의 후손이라고 하는 작자들이 태평양전쟁이 잘못되었노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르게 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더구나 생명에 관한 일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을 때 사람들은 생명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하물며 영원한 생명에 관한 일들은 더욱 소중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교육에 찌들면 그 생각을 바꾼다는 것이 정말 어렵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자신의 고집대로 갑니다. 그러다가 망합니다. 국민들이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한 4대강 공사를 이명박이란 어리석은 사람이 어기고 공사를 끝끝내 했습니다. 국민들은 4대강공사를 하면 우리나라에 심각한 경제난과 강이 죽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기고 어기며 어기고 공사를 했습니다. 공식적으로 들어간 돈만 22조원입니다. 이 돈은 한 노동자 1000만년에 해당하는 연봉입니다. 2015년도 우리나라 예산이 306조원입니다. 4대강은 단 1%도 쓸모없는 공사입니다. 그런 곳에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 부었습니다. 그런데 이명박이란 자가 어기고 공사를 한 4대강의 혜택을 받았습니까? 전혀 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피해만 막심하게 입었을 뿐입니다. 끝내는 4대강의 댐을 파괴해야 할 것입니다. 이토록 고집 세게 한 결과 국민들에게 엄청난 손해와 피해를 주었을 뿐입니다. 이것이 바르지 못한 것이고 고집을 세운 결과입니다.

바울사도는 첫걸음마를 하고 있는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성도들에게 바르게 알려주려고 무진 애를 쓴 것입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전통, 전통 하면서 자신들의 교리를 바꾸지 않으려 했습니다. 바울사도의 변()이 무엇입니까? 율법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법입니다. 그러므로 잘못될 수가 없습니다. 율법의 기능은 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율법은 죄의 근본적인 것을 다루지 않습니다. 율법은 죄의 존재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율법이 죄를 정합니다. 죄는 율법이 없다면 죽은 것입니다. 죄는 율법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습니다. 율법에 의해 어떤 일이 죄로 정해지기 전에는 사람은 그것이 죄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율법은 기한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입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매년 대속죄일에 하나님께 희생제를 드렸습니다(9:24-26).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가 일 년간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고 사람들의 어떠한 행위로 인해서 죄를 용서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희생양의 죽음으로 용서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을 지켜서 용서함을 받는 것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율법은 다만 사람으로 하여금 이것이 죄고, 저것이 죄다라고 알려주는 것뿐입니다. 희생양으로 인한 속죄가 언제 끝났습니까?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입니다. 이제 다시는 희생양으로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함 받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모형의 희생양의 원형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And

죄가 우리 주인일 수 없다(로마서6:12-14)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aJmartiva/hamartîa 는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에서 표적(과녁)을 벗어나는 것 또는 목표를 이루지 못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aJmartiva는 윤리적, 지적, 법률적으로 모두에 사용되었습니다. 그 범위는 단순한 잘못에서 중죄까지 모든 그릇된 행위를 표현했습니다. LXX역본에서 aJmartiva taF;j'/hathâ’t(과오, ), @/[;/ʽâôn(옳은 길에서 의식적으로 이탈하는 죄), [v'P,/phesha’(반역) 등을 번역했습니다. 죄란 그 뿌리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전 生涯(생애)를 간섭합니다. ‘주관 한다 kuvrio"/kûirios주인이 되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죄가 사람을 영생하지 못하게 하고 바르게 살지 못하게 하며, 하나님과 불편한 관계를 늘 조성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럼에도 바울사도가 로마교회에게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죄가 사람(너희를)의 주인이 될 수 없는 이유를 말합니다. 너희가 율법아래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십계명을 비롯해서 이스라엘 백성 전반을 규정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거룩하게 구별하고자 세우셨습니다. 율법은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많은 일들을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수시로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요구했습니다. 사람들을 비난하고 저주했으며, 심판까지 했습니다. 그렇게 많은 것들을 했으면서도 율법은 정작 사람이 가장 필요했던 것은 하지 못했습니다. 즉 율법은 사람을 멸망에서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어느 나라고 간에 범죄자들은 수없이 많습니다. 잔악한 살인죄로부터 각종 경범죄까지 헤아릴 수없이 많습니다. 사실 헌법이 그렇게 많은 조와 항목이 필요 없습니다. 죄를 짓지 않는다면. 그런데 범죄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매일같이 저질러지고 있습니다. 법조항이 수없이 많은데 그 이상 죄는 저질러지고 있습니다.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조항이 많이 있어도 죄는 사라지지 않고 사람은 계속 멸망당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죄를 처벌할 조항이 없으면 세상은 온통 난리일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은 죄를 없이 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죄를 처벌은 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그렇게는 할 수 없었습니다. 언제인가는 죄인들을 완전히 용서할 하나님의 은혜가 이 땅에 와야 했습니다. 그 사이에는 모형으로 원형을 대신해야 했습니다. 모형은 각종제사였습니다. 원형은 예수그리스도입니다. 로마서8:1-3절을 보면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율법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보내셔서 율법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이루신 것입니다.

헬라에서 은혜 cavri"/chârisHomer 이래 사람들 중에 복리를 가져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카리스/은혜는 바울의 중심개념으로 인사말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카리스는 사람의 구원사건입니다. ‘카리스의 기본적인 사상은 값없이 주시는 것입니다. ‘카리스는 십자가에서 구체화되었습니다(2:21). 그리고 은혜는 복음으로 선포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은혜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죄인들에게 나타납니다(3:23-24). 그러므로 은혜는 구원의 전부입니다(고후6:1). 모든 신자들이 은혜를 받았습니다(고전1:4). 그리스도 안에서 구체화된 은혜로만구원을 얻습니다. 따라서 신자들은 믿음으로만구원을 얻지, 어떤 사람들의 공덕이나 본인들의 행위로 구원받지 않습니다(3:24). 이것은 구원의 방법으로서 율법을 배제하는 것입니다(4:16). 하나님의 은혜는 칭의(의롭다 하심)의 기반이었습니다(5:20-21). 그래서 은혜는 어떤 의미에서 일종의 상태입니다(5:2). 또한 은혜는 항상 선물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선물이지, 어떤 대가가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는 충분합니다(고전1:29). 그러므로 죄가 우리들을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And

죄를 깨닫게 하는 율법(로마서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게 한다는데 왜 율법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까? 율법을 주어진 목적은 우리가 죄인임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open성경). 율법은 모든 자가 죄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Thompson성경), 율법은 죄가 인식되고 규명되도록 적용할 따름입니다(독일성서교회해설성경). 인생의 최고의 문제는 사람이(죄인) 어떻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는가? 인간이 어떻게 안심하고 살 수 있는가? 절대로 소외감을 가지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공포감을 가지지 않고 살 수 있는가? 그야말로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는가?

 

이에 대해서 유대인들은 대답하기를 인간은 율법이 정하는 바를 정확히 지킴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상화 할 수 있다, 모든 율법의 행위를 완수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상화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무도 하나님과의 그런 정상관계를 얻을 가능성이 없다고 말하는 것밖에 안됩니다(William Barclay, 1981, 90). 사람이 완전하다면 지킬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게 완전한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습니다. 동서고금을 통해서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통한 구원은 상상도 생각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율법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그 용도가 무엇입니까? 율법의 용도는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는데 있습니다. 율법은 인간의 약함과 유죄성을 인간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즉 어떠한 법이 없으면 죄가 성립될 수 없습니다. 도로교통법에서 적색신호등은 정지해야 합니다. 사람이든지 자동차든지 정지해야 합니다. 만일에 정지하지 않고 가다가 사고를 당하면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법에 정지하라고 명시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법조항에 명시되지 않았다면 처벌할 수 없습니다. 처벌을 하려면 법을 만들어야 합니다. 율법이 그렇습 니다. 법이 있어야 죄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한다고 했습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지, 그 자체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 가는 길은 율법의 길이 아니고 은총의 길입니다. 다시 말하면 행위의 길, 즉 우리의 공로의 길이 아니고, 오직 신앙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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