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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것이 우리가 공적으로 행하는 묵상의 최고의 영역이다. 찬양은 그 말하고자 하는 뜻을 마음속에 가장 오랫동안 유지시킨다. 기도와 말씀을 듣는 것은 빠르게 생각을 진행시키지만, 찬양은 그 생각을 오래도록 지니도록 한다.
John Lightfoot
한 번 선택이 10년을 좌우할 수도, 100년을 좌우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선택할 때 신중하게 해야 한다.
Pearl Kim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까(로마서8:35-39)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하신 말씀이 Roma에 계속 퍼지고 있었습니다. Roma는 어떤 결단을 내려야만 할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속주인 팔레스타인으로부터 나온 기독교를 어떻게 할 것인가? 그대로 놓아두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제재를 해야 할 것인가? Roma에는 그 자체의 종교가 있었습니다. Zeus를 비롯한 수많은 신들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Roma사람들은 그 신들이 나라를 세우고 왕성하게 하여 대제국으로 만들어주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 신들의 도움으로 전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의 Roma에는 얼마나 신들이 많든지, 걸어다니면 발에 걸리는 것들이 신이라고 했습니다. Roma는 주전 27년 Augustus 때가 전성기였습니다. 그로부터 200년 년간 Roma는 참으로 평안하였습니다. 약간의 충돌이 국경에서 있었을 뿐, 내전도 없었고 경제는 번영했습니다. 따라서 문학과 예술도 활짝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법은 북아프리카에서 북해까지 그리고 아라비아에서 영국까지 적용되었습니다. 대제국이었습니다. Roma는 여러 민족들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평화는 사람들을 나약하게 만들었습니다. 황제도 원로원에서 선출하지 못했습니다. 군부에서 황제가 나왔습니다. 당연히 힘으로 밀어붙였습니다. 황제는 명분만 민주공화제였습니다. 실상은 독재였습니다. 황제의 철권정치였습니다. 이러다보니 사람들은 황제가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최고의 권좌에 오르면 하고 싶은 일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신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황제숭배를 강요했습니다. 그리고도 행여 지진이나 전쟁에서 안 좋은 조짐이라도 보이면 여지없이 다른 곳에 눈을 돌리게 했습니다. 기독교가 있으니까 안 좋은 상황들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바울사도가 이 말을 할때에 막연하게 이런 것들이 있을 것이라고 나열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사도는 로마서를 쓰기이전에 이미 환난,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을 체험하였습니다. 외적으로 환난을 당하여 내적인 곤고를 느꼈습니다. 그야말로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 것들이 수없이 밀려왔습니다. 왜 이런 못된 것들이 예나지금이나 성도들을 괴롭힙니까? 우리의 원수들이 주님과 우리사이를 단절시키고자 불리한 환경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사도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라고 고백합니다.
남녀간의 사랑은 주고받는 사랑입니다. 상대방이나 내가 잘못할 때는 가차없이 끝내버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렇게 가면 안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탄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너 예수믿니?’ 그런데 네가 이렇게 어려운 상황인데 예수께서는 아무조치도 취하시지 않지않아? 그러니까 소용이 없는거야.라고 하면서 우리들의 역경을 바라보며 하나님 믿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고 자꾸 빈정거립니다. 그리고 믿을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해서 실제로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이 교회를 공격하고 우리들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 주님께 매여 있는 성도들은 어떻게 해도 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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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log.daum.net/jewhakim/1005
퍼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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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우리를 정죄할까?(로마서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나치정권에서 Auschwitz 수용소 Guard로 근무한 94세의 Groening이 4년 징역형을 언도받았습니다. 2차세계 대전시, 독일의 Hitler와 일본의 의 군국주의자들의 잔혹상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앞으로는 다시 있어서는 안 될 우리 인류의 한 치부입니다. 수백만명을 학살한 그들은 사람이기를 포기한 자들입니다. 잔인하기 이를데 없는 슬픈 역사의 한장면입니다. 당시 Auschwitz 수용소에서 간수로 근무했었던, 94세의 Groening이 자신이 고백한 죄과에 대한 재판에서 4년 언도를 받았다고 합니다. 독일의 정부와 국민들은 나이에 상관없이 죄과에 대한 엄격한 법적용으로 공평을 유지 하고져 하는 노력합니다. 이 재판을 받은 독일인은 1921년에 독일의 Lower Saxony에서 출생 했다고 합니다. Hitler가 위세를 떨칠 때, Waffen SS로 불렸던, 청년 유격대에 합류했습니다. 1942년부터 Auschwitz 수용소에서 근무 했습니다. 그의 임무는 감옥에 끌려온 죄수들을 상대로 압수한 현금을 주고 계산하는 일을 했었습니다. 그는 느낀바 있어, 당시 그런일을 한것을 후회하고, 공개적으로 Auschwitz수용소에서의 경험을 공개적으로 폭로했습니다. 그럼에도 전범이기 때문에 4년형의 형기를 언도받았습니다. 사실 94살의 4년형이란 감옥에서 인생을 끝내라는 형벌입니다.
법정에서 재판관이 판결을 내리면 사람들은 판결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징역형을 살든지, 사형이라든지 등의 형벌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그것을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그 형벌이 싫으면 죄를 짓지 않으면 됩니다. 사실 이 세상의 법정도 무섭습니다. 법이 사회와 격리시키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 세상과의 완전한 격리의 형벌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정죄는 두려운 것입니다. 정죄 katakrivnw/katakrîno/카타크리노는 ‘유죄 선고하다’입니다. 카타크리노는 Herodotus이래 ‘~에 불리한 판결을 내리다’라는 뜻을 의미했습니다. 카타크리노는 하나님의 심판입니다.하나님의 심판으로서 천벌이나 파멸을 말합니다. 인간의 재판에서는 이 단어가 형의 집행과 구별되는 것으로서 판결만을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에서는 형집행과 판결 모두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16:16을 보면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를 정죄하셨습니다. 그 곳을 재로 만들어 모든 사람들을 정죄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정죄를 받는다는 것은 매우 두려운 일입니다. 영원한 정죄는 어느누구도 내릴 수 없습니다. 인간들은 전혀 내릴 수 없습니다. 물론 죽어서 땅에 묻혔던 사람을 다시 파내어 형벌을 가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산 사람의 분풀이에 불과합니다. 이미 죽었기 때문에 아무런 고통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시라면 예외입니다. 죽었던 사람도 정죄할 수 있습니다. ‘누가’tiv"/tîs는 의문대명사(疑問代名詞)입니다. 부정대명사(不定代名詞)입니다. 따라서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요?’는 이 세상에서 우리를 정죄할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다.
바울사도는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정죄할 수 있을까? 하고서 예수그ㄹ스도의 죽으심, 부활, 승천하심, 그리고 심판석에 앉으심을 말했습니다. 이사야53:12을 보면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즉 예수그리스도께서 많은 사람(그의 백성)의 죄를 짊어지고 가셨다는 것입니다. 즉 바울사도의 논증으로는 우리들을 정죄할 분은 하나님 한분이신데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자녀로 이미 정립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정죄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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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영웅은 없다
창세기12:1-3
英雄이란 남다른 용기와 재능이 있는 사람입니다. 지혜로 보통 사람들이 해내지 못하는 것을 해내는 비범한 사람을 뜻합니다. 영미권에서는 Hero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 영웅은 거품이 많습니다. 남다른 용기와 재능을 어디에 썼느냐는 것입니다. 이순신장군과 같은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영웅이라고 했던 사람들은 오늘날 거의 나쁜 사람들로 판명되고 있습니다. 죄인을 잡으라고 권력을 주었더니, 죄인은 잡지 않고, 의인들을 잡아들이는 것과 같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위인이라는 말을 과거에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설교 때나 부흥회 때에 이런 말을 수없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다윗 같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모세 같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다니엘이나 엘리야 같아야 하며, 솔로몬 같아야 하고 사무엘 같아야 합니다.” 그러면 아무런 비판 없이 “아멘, 아멘”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어딘가 모르게 허전하고 이상합니다. 그리고 내리는 결론이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런 사람들 같지는 못할 거야.”라곤 했습니다. 나는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어림도 없어.라고 모든 것을 포기한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아브라함의 이름은 압도적입니다. 그만큼 아브라함은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5대족장중 첫 번째로 이스라엘의 토대가 되는 인물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구원과 믿음에 관한 말을 할 때면 언제나 등장합니다. 마태복음을 시작하면서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하면서 아브라함이 등장합니다. 복음의 message를 가장 집약적으로 설명하는 로마서에서도 우리가 ‘구원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대표적 인물로 아브라함이 소개됩니다. 히브리서에서도 아브라함, 서신서에서도 아브라함은 어김없이 등장합니다. 그만큼 아브라함은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서3장에서 ‘구원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얻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오해될까봐 덧붙여서 로마서4장에서는 아브라함의 무능함에 대한 재해석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인식해야 할 것은 성경이 아브라함의 생애를 단 한 사람의 信仰行路로만 취급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가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복음의 비밀, 구원의 비밀인 믿음을 가장 잘 설명하는 생애라는 사실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에서 “23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성경은 아브라함 한 사람에게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고 오는 세대의 사람을 위함이라 하였습니다.
아브라함하면 우리는 여러 생각이 떠오릅니다. 믿음의 사람, 믿음의 족장으로 ‘본토’를 떠난 사람, 아니면 ‘이삭을 바친 사건’도 떠오릅니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사건입니다. ‘이삭을 바친 사건’과 ‘갈대아 우르를 떠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가나안으로 갔다’는 사건을 연결할 때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가나안으로 간 아브라함이기에 하나님께서 이삭을 바치라고 했을 때도 믿음이 좋기에 바쳤을 것이라고 우리는 늘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만 생각하면 우리는 기가 죽습니다. 아브라함과 비교를 하면 우리는 늘 희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 정도나 되니까 그렇지, 우리는 어림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family에 명함도 못 내밀고 있는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히브리서11:8절부터 보시면,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 갈 바를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을 따라 나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12장에 나타나는 아브라함의 생애는 그렇게 안 보여 진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정말 믿음으로 갈대아 땅을 떠났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를 우리가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앙을 위함입니다. 과연 아브라함이 신앙의 위인인가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11:26-32 데라는 칠십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 데라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본토 갈대아 우르에서 죽었더라 아브람과 나홀이 장가들었으니 아브람의 아내 이름은 사래며 나홀의 아내 이름은 밀가니 하란의 딸이요. 하란은 밀가의 아비며 또 이스가의 아비더라 사래는 잉태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데라는 이백 오세를 향수하고 하란에서 죽었더라
아브라함의 가족 즉 데라와 롯과 아브라함이 갈대아우르를 출발해서 가나안으로 가고자 했습니다. 그 중간에 있었던 곳이 하란입니다. 하란까지는 누가 가족들을 인도합니까?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입니다. 아브라함의 주도권이 아니라 데라가 주도권을 잡고 있었습니다.
이제 사도행전7:2절을 보면 스데반의 설교 중에 우리가 모르는 사실이 하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스데반의 설교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서 나타나신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갈대아 우르란 메소보다미아의 비옥한 문명도시입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이미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창세기에 의하면 어디서 나타난 것부터 기록되어 있습니까? 하란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설교에 의하면 하나님이 어디서 이미 나타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 갈대아 우르에서 이미 나타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번에는 여호수아24:1-3을 보면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세겜에 모으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그 두령들과 재판장들과 유사들을 부르매 그들이 하나님 앞에 보인지라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편에서 이끌어내어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구절이 있습니다. 가나안에 오기 전 갈대아 우르에 살 때 누가 이방신을 섬겼습니까? 데라가 섬겼습니다. 데라는 누구입니까? 아브라함의 아버지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때에 이방신을 섬겼습니까? 하나님을 섬겼습니까? 이 문제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이방신을 섬겼다면 믿음으로 그가 갈대아 우르를 넘어왔다는 말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여호와를 믿었다. 그래서 그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너는 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라고 하시자마자 믿음으로 순종하였다고 하면 이야기가 잘 맞아 떨어집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 신앙생활의 가장 근본이 되는 아브라함의 생애를 추적하려고 하는 것은 그 부분이 과연 그런가 하는 문제입니다. 과연 아브라함이 첫 번부터 믿음이 있었고, 하나님을 알고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하란에 있고 가나안에 들어오는 아브라함으로 알고 있지 않습니다. 언제나 이삭을 바치는 아브라함으로 알고 있어서 결론이 좋으면 모든 것이 좋은 걸로 봅니다. 사람이 괜찮다고 한번 인정하면 거기에 맞추어서 생각하는 버릇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니까 당연히 순종했을 것이고 당연히 믿음 속에서 그 길을 걸었을 것이라고 우리가 지레짐작을 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그렇지 못한 인물이라면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어떤 문제가 생기느냐 하면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아니라 심판하는 조상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상황이든지 아브라함을 꺼내놓고 아브라함은 했는데 너희는 왜 못하느냐? 이렇게 이야기가 되어야 맞습니다. 그런데 한 번도 아브라함을 성경이 그런 차원에서 쓰지를 않습니다. 여호수아24:2절을 보면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다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절만 보면 데라 혼자서만 이방신을 섬긴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너희 조상들이라고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너희란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은 아브라함입니까? 데라입니까? 아브라함이 이스라엘 조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 있어서 최초의 조상은 아브라함부터이지 데라부터가 아닙니다. 너희 조상들이라고 함으로써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인 데라를 지적하는 것은, 너희들의 조상 아브라함의 아비 데라가 이방신을 섬겼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말이 이렇게 됩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의 아비 데라가 이방신을 섬겼고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여호와를 섬겼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방신을 섬기던 본토 친척에서부터 너희조상 아브라함을 꺼냈다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정당한 추측입니다. 그런데 다시 2절을 보면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편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우리말에 ‘했으나'라는 것은 앞에 있는 내용과 뒤에 있는 내용이 반대라는 의미입니다. 앞에 있는 조건과 전혀 다른 결과가 뒤에 쫓아 나온다는 뜻입니다. 이방신을 섬겼으나 그 속에서 아브라함을 꺼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가면 어떻습니까? 아브라함은 나를 믿고 데라와 그 위의 선조들은 이방신을 섬겼기 때문에 내가 꺼냈다 그러면 말이 이렇게 되어야 됩니다. 데라가 이방신을 섬겼기 때문에 혹은 아브라함이 나를 섬겼기 때문에 꺼내 왔다고 해야 되는데, 전체적인 앞에 있는 조건은 꺼내 온 것에 합당할 조건이 아닌 조건이 있었다는 nuance입니다. 이방신을 섬겼는데도 불구하고 꺼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생각은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섬겼고 데라는 이방신을 섬겼으니까 이방신을 섬기는 속에서, 이방신을 조상들이 섬겼지만 그 속에서 그래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꺼내 오신 것 아닌가? 어떤 해 어린이주일학교 설교집에 아브라함이 어느 날 데라가 섬기는 우상을 다 깨버렸다는 것입니다. 데라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데, 어린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24:2을 보면 그렇지 않은떼, 참으로 황당한 설교였습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은데, 마치 그런 것처럼 아브라함을 美化 또는 信仰化한 잘못된 설교집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와 똑같습니다.
창세기11:31을 보면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만일 여호수아24장의 이방신을 섬긴 문제가 데라와 아브라함과의 차이라면, 데라는 이방신을 섬겼고 아브라함은 여호와를 믿는 신앙의 갈등이 있었다면 가나안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최초의 싸움은 누구와 누구의 사이에서 일어나야 합니까? 데라와 아브라함의 사이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가나안으로 가는 여행의 주도권이 누구입니까? 데라입니다. 데라가 가나안으로 가는 일에 주도권을 잡고 여행을 출발시킵니다. 누구와 누가 최소한 같은 편입니까? 데라와 아브라함이 같은 편입니다. 그래서 가나안을 향해서 가는 이 여행이 아브라함이 이미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같은 수준에서 출발된 여행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건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아브라함을 폄하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은 사도행전7장에서
너희 조상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있기 전,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 영광의 하나님이 나타나서…
무슨 하나님이라고 여기서 기록하고 있습니까? 영광의 하나님입니다. 영광의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에게 이르기를 너는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고 했습니다(행7:3). 그러면 그것이 여호와를 믿는 아브라함과 여호와를 믿지 않고 이방신을 섬기는 자기 친척 집을 떠나는 싸움이라면, 그 집과 혈연을 깨고서라도 믿음을 지켜야 되는 싸움이라면, 아브라함은 일단 데라로부터 도망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아브라함과 데라가 한 마음이었다고 생각해봐야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아브라함도 이방신을 섬기고 있었다는 겁니다. 아브라함도 여호와를 까맣게 몰랐다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동일한 우리 수준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에 잠을 자는데 꿈속이었는지, 생시였는지, 비몽사몽간에 금빛 찬란한 광채 속에 어떤 분이 나타나셨습니다. 감히 형상을 이룰 수가 없고 감히 뭐라고 말대꾸를 할 수 없는 영광의 어떤 신이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아! 나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창조주요, 너를 지목한 신이다. 내가 네게 복을 주려고 하니까 너는 네 아비 집을 떠나서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 그리고는 잠이 깼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사람, 여호와를 알고 있는 입장에서 그 환상을 보았으면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하고 창세기22장에 나오는 이삭을 바치는 사건 같이 이야기가 풀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도무지 알지 못하는 분을 만난 것입니다. 생전 처음 이런 일을 당했습니다. 아브라함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어떻게 그가 그 일을 처리하겠습니까? 목사님을 찾아간다, 교수를 찾아 간다. 친구를 찾아간다? 그런데 그때 의논할 최소의 대상은 아버지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버지에게 여쭈어 보았을 것입니다. “아버님, 간밤에 저는 참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광채와 빛난 영광 속에 어떤 신이 저에게 말하기를 내가 너에게 복을 주려고 하니까 너는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아버님, 이 일을 어쩌면 좋겠습니까?” 데라가 가만히 그 말을 들어보니까 그 말을 하는데 아들이 땀을 뚝뚝 흘리고 온몸에 소름이 돋아나고 너무 진지하고, 너무 두려워하며, 너무 굉장한 표정의 자세입니다. 데라는 아! 내 아들에게 간밤에 무슨 일이 생기긴 생겼구나. 무슨 이상한 환상을 보긴 보았구나. 최소한 하나님이 누구인지 아는 것은 아니지만 이방 신이라도 섬기는 종교심이 있는 자니까 그렇게까지 찾아오고 나타난 신에 대하여 거부했다가는 어떤 일을 당할지에 대해서는 아니까 그의 말을 일단 듣자. 그래서 아버지가 주동이 되어서 아버지의 명령권이 해당되는 혈연들만 모아서 길을 떠나게 되지 않았나? 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그렇게 기록되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들이 갈대아 우르를 떠났습니다. 갈대아란 그 시대의 문명권이고 나라이름입니다. 하란은 갈대아문명의 최 변방입니다. 우리나라로 이야기하자면 “만주로 가라” 그래서 어디까지 간 셈인가 하면 신의주까지 간 것입니다. 거기서 차마 못 넘어 갑니다. 왜 못 넘어가느냐 이유가 있습니다. 그 시대의 사회에서는 자기를 방어하는 것은 국가도 아니고 법도 아닙니다. 자기방어를 자기가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여행을 데라와 롯과 아브라함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출발해야 되는 이유입니다. 자기목숨과 재산을 자신의 힘으로 지켜야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와서 데라도 아브라함도 넘어갈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 정도의 환상을 가지고 자기 문명권을 벗어나서 목숨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재산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미래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곳에 발을 디딜 수 없었습니다. 신앙이라는 이름을 붙일 단계는 더더욱 아닙니다. 억지로 떠밀려서 하란까지 온 것입니다. 안 왔다가는 무슨 일을 당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최소한의 종교적인 겁을 먹은 이유로 하란까지 겨우 온 것입니다.
이렇게 된 상황을 성경은 우리에게 설명을 합니다. 하란까지 아브라함 일행을 인도한 jr'T,/데라의 이름은 지연시킨다는 뜻입니다. 내일내일 하는 사람입니다. 데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들어가는데 도움을 받기보다는 더 많이 방해를 받았을까요? 그러나 우리가 명심할 것은 데라와 아브라함 간에 신앙차이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똑같습니다. 결국 데라는 하란에서 떠나지 않기로 작정했습니다. 데라가 145세 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다시 나타나십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되리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말씀을 좋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날 때 그의 나이가 칠십오세였더라
아브라함이 드디어 가나안에 들어갑니다. 길게 이야기한 것이 무엇입니까?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이제 우리가 갖고 있던 편견과 비교해 보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사람의 복과 한 사람의 결과를 그 사람에게 원인으로 돌리고 싶어 하는 본성이 있습니까? 아브람이 아브라함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기보다는 아브람은 그렇게 될 이유가 그에게 있었을 것이라고 우리가 꼭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놈의 그릇론 그 사람은 큰 그릇이야? 그러니까 저렇게 큰 교회를 하지. 그릇이 커서 큰 교회를 하는 사람들이 비리와 불의의 큰 그릇을 가지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큰 갈등은 무엇입니까?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을 감히 할 수가 있는가? 내가 이 꼴인데도 하나님이 나에게 복을 주실 것인가? 내가 이 꼴로 예수 믿는다는 이야기를 남에게 해도 좋단 말인가? 이 질문의 뒤에 있는 가장 큰 불신앙이 무엇입니까? 복은 받을 만한 사람이 받는 법이다는 인간적인 사고방식입니다. 모든 결과는 원인이 있어야 되는 법이다. 이것을 불신앙이라고 합니다. 기도를 하루에 12시간하고, 금식기도를 40일해야 복받는다 하는 것은 세상종교의 사고방식입니다. 우리가 열심을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열심을 내시는 것입니다. 이 사고방식을 우리가 바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성경이 믿음이라는 단어를 쓰고 신앙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은 우리로서는 mistery입니다. 정말 신비로운 일입니다. 우리가 지금같이 이야기 하신 것을 고집하신다면 구원문제가 일단 말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것은 앉아 있을만한 조건이 여러분에게 있다고 고집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구원받을 만한 조건이 있어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원해 주셨기 때문에 여기 앉아 있는 것입니다. 동일한 이야기를 아브라함에게서는 더더욱 깊이 더 확실하게 해야 합니다. 그는 믿음의 조상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가 왜곡되는 것은 아브라함 때문에 문제가 아닙니다. 전 성경의 메시지가 구원을 우리가 어떻게 얻는가? 하나님이 은혜로 주셨다는 이야기가 무엇인가를 아브라함의 생애를 놓고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런데 왜 아브라함은 아브라함일 수밖에 없다고 조건을 달고 싶어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매우 좌절시키는데도.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에 믿으셔야 할 가장 중요한 믿음은 이것입니다. 좌절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좌절하는 것은 신앙이 없는 것입니다. 겸손한 것과 절망하는 것과를 혼동하면 안 됩니다. 절망은 없습니다. 왜 없습니까? 구원자체가 내가 요구하거나 내가 무엇을 내거나 내가 협의할 사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내가 믿었기 때문에 얻어진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나는 예수를 믿는다라는 말은 왜 하는지 아십니까?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말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은 자만이 저가 구원을 얻었다는 표시를 “저는 예수를 믿습니다. 십자가를 믿습니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구원 얻었기 때문에 말을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저는 구원을 얻었습니다.” “어떻게 얻으셨습니까?” “제가 예수를 믿거든요” 이렇게 말을 하면 그것이 조건으로 쓰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들으셔야 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생애는 이렇게 등장을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너는 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라.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했을 때 믿음으로 “네”한 것이 아닙니다. 무언지 몰라서 이집 저집 찾아다니면서 “이런 꿈꾸어 보신 분 있습니까? 이런 때 어떻게 해야 됩니까?”라고 몹시 당황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말을 듣고 보니까 가야 할 것 같네. 안 가면 안 될 것 같은데.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가 지금 인식하고 경험하고 있는 것이 원인도 조건도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하란까지 밀어내셨고 하란에서 가나안까지 또 밀어내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비 집을 떠나 하란에 들어왔고, 가나안에 들어옵니다. 그런다고 해서 아브라함이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가나안에 들어왔습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착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강 저편에 거할 때 이방신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영광의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이리로 가라고 했을 때 어리둥절해 하며 어쩔 줄 모르는 그를 계속 등을 밀어내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란에 왔습니다. 데라는 더는 가지 않겠다고 해서 아브라함만 또 등을 밀어내셔서 가나안에 들어옵니다. 12:5을 보면 “아브라함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마침내 가나안에 들어갑니다. 이 마침내는 하나님께 씨야 할 “마침내”입니까, 아브라함 쪽에서 써야 할 “마침내”입니까? 하나님이 쓰시는 마침내 입니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본토 친척 집을 떠난 여행이라면 그가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따라 드디어 가라는 곳까지 왔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신앙을 가진 것이 아니라면 마침내는 하나님이 쓰서야 됩니다. 아무리 가르쳐도 모르니까 끌고 밀고 해서 드디어 힘들게 가나안까지 끌고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이 문제가 하나님의 “마침내” 라는 가장 대표적인 근거가 무엇이냐 하면 그것이 하란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출발한 것이라면 하란에서 머물러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란에서 특별히 쉬고 있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란에서 생각건대 상당한 시간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스데반의 설교에서는 하란에 거하기 전이라고 해서 그 기간을 특별히 한 기간으로 설정하고 그 여행을 설명합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이 이 땅에 있기 전 그리고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라고 지적을 함으로써 하란에서 상당시간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하란에 있었던 것이 아브라함이 그의 신앙으로 하려고 했지만 되지 않았던 방해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려고 하는 일에 대해서 아브라함이 순종치 않은 결과라는 것을 또 하나 확인하기 위해서 하란에서 하나님은 다시 나타나셔야 했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나타나시고 하란에서 다시 한 번 나타나셔서 다시 권고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무엇을 비교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신앙 맨 밑바닥에 무엇이 있는가를 비교해 보아야 합니다. 창세기12:1-3에서 아브라함이 신앙으로 출발했습니까? 아니면 불신앙으로 출발했습니까?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지금까지 길게 논증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근거가 불신앙으로 출발한 아브라함이어야만 여러분과 제가 믿는 이 구원이 복된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 영웅 아브라함, 신앙의 위인 아브라함만 생각하면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을 것입니다. 없는 신앙의 영웅을 만들어서 고생하는 꼴이 됩니다. 이에서 우리가 벗어나십시다.
우리가 우리의 행위대가로 구원을 받는다면 바리새인과 하등 다를 바가 없습니다. 바리새인이 세리와 같이 성전에 올라가서 어떻게 기도합니까?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저를 저 세리같이 만들지 않으셔서 감사합니다. 저 세리와 다른 것을 감사합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를 내고 구제하고 기도합니다.”(눅18:9-14). 이것이 아브라함처럼 복 받는 근본이요,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신 기준이라면, 우린 아직도 죄가 무엇이며, 죄 값으로 사망한다는 것이 무엇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만이 인간이 구원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출발합니다. 그는 마침내 가나안에 들어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가나안까지 인도해 오시고, 강권하시며, 그러고도 모자라서 목을 매고 끌고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어쩔 수 없이 오지 않으면 안 되겠기에 하나님께 끌려온 것입니다. 사각 링의 홍corner로 몰아넣으시고, 너 가나안 갈래, 안 갈래 하시면서 항복을 받아내시고는 가나안에 아브라함을 마침내 끌고 오신 것입니다.
우리의 자랑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자랑은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라는 사도바울의 고백이 괜히 나오는 고백이 아닙니다.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내가 걸어오거나 하나님 앞에 “내가졌습니다.”라고 한 번도 합의한 적이 없습니다. 뭐 하러 예수를 믿는데. 예수 믿으면 갑자기 어떻게 된대. 우리가 손과 발로만 버티지 않았습니다. 온 몸을 다하여 버티고 버텼습니다. 한 번도 합의하거나 한 번도 동조한 적이 없는 길이 신앙의 길입니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우리가 한 일은 거부요, 반항이며, 미련한 짓이요, 아우성과 헛소리와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실수 들 뿐일 것입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신다면 아브라함의 이 인생의 시작을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이렇게 출발하시는, 그래서 우리 앞에 내어 놓으시는 말씀 앞에 우리는 항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문제를 하나 더 풀어봅시다. 히브리서11:8절을 봅시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믿음이 가장 중요하다는 이 설명을 하기 위해서 믿음이 등장합니다. 믿음은 자신이 자신을 설득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믿음이란 말을 잘 씁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톤을 높이고 박자를 맞춰서 믿는다고 껑충껑충 뛴다고 해서 마음속에 믿음을 의지하는 강한 신앙이 생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몽롱하고 혼란만 가중됩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자기 최면을 건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 믿음이 하나님을 설득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이렇게 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면서 결재도장을 다 찍어서 올립니다. 이걸 가지고 믿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설득하는 작업입니다. 그걸 믿음이라고 합니다. 모든 신자는 하나님 앞에 설득당한 자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설득당해서 구원을 얻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인정하고, 이해하고, 공감하게 해달라고 요청하기 이전에 여러분의 인생이 하나님 손에 인도되고 있다는 사실로 기뻐하십시오. 그것이 아브라함 생애에서 하나님이 표현하고 싶어 하는 하나님의 깊으신 계획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 같이 생각되어지죠? 그러나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작정하시고,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을, 성령님께서 주 예수님의 구원을 개인들에게 적용하십니다. 성령님은 사람들로 주 예수님을 믿도록 권고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믿음을 주십니다. 그리하여 주 예수를 구주로 믿고 회개하게 하십니다. 믿는 자들을 끝까지 믿음에 머물도록 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지느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만드시느냐 하는 싸움이 아브라함 생애에서 우리가 추적해야 될 가장 중요한 message입니다. 그렇게 우리도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우리의 여기가 어디쯤 될까요? 가나안에 막 들어왔을 겁니다. 가나안에 막 들어와서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결국 우리들을 이삭을 바치는 아브라함이 되는 자리까지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요 하나님의 설득입니다.
우리가 지금 와 있는 수준에 대해서 너무 그렇게 당황해 하지 맙시다. 전주를 떠난 서울행열차를 타시면 그때부터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무얼 하십니까? “어디까지 왔나?”하고 쳐다보고 있는 사람은 미련한 사람입니다. 시계만 보시면 됩니다. “어디쯤 왔겠구나” 시간만 보면 됩니다. 하나님 손에 있는 인생이라는 것 때문에 우리는 좌절하지 않습니다. 기관사가 서울까지 데려다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서울행열차를 타고서 이 차가 부산으로 가면 어떡하지? 할 필요가 없습니다. 혹시 평양으로 가는 것 아니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서울행 열차를 탔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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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우리를 송사할까?(로마서8: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송사하리요’ ejgkalevsei/engkallêsei는 ‘고소하다’ejgkalevw/engkallêo의 미래동사 능동형 3인 단수형으로 ‘그가 능히 송사할 수 없다’입니다. ejgkalevw는 고전 Hella어 문헌에서의 최초의 의미는 ‘마땅히 해야할’이란 뜻이었습니다. 즉 당연하게 요구거나 청할 권리로서 ‘요구하다’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러다가 후에 ‘주장하다’라는 의미로도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을 고발(고소)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대개 실제적이거나 위협적인 법적인 소송절차를 나타내는 문맥에 나옵니다. 초대교회 당시 재판은 주로 시장에서 사도바울이 왜 세상법정에 소송을 제기한 그들을 신랄하게 말합니까? 당시의 로마 법정은 가난한 사람들은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평민들은 쉽게 갈 수 없었습니다. 낮은 지위를 가진 자로서 법정에서 판결을 받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또한 로마의 법정은 agora의 중심부에서 열렸습니다. agora는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시민의 정치, 경제에 관련된 생활의 중심이 되었던 곳입니다. 아고라는 광장으로 시민총회나 공개재판의 관행이 일찍부터 있었던 그리스 도시국가(폴리스) 특유의 공공시설입니다. 시장 특히 불신자들이 많이 있는 곳에서 재판이 열렸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로서는 큰 수치였습니다. 재판을 한 교회는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로마시대에는 부자와 권력자들만 상대를 법정에 세울 수 있었습니다. 낮은 계급이 높은 계급을 고소할 수가 없었습니다. 살림이 망하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높은 계급을 가진 사람들이 사회적 약자들을 수탈할 목적으로 재판을 했습니다.
따라서 성도들에게 소송을 제기하는 것은 성도들을 완전히 제거할 목적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랬고, 초대교회를 싫어하는 무리들이 그랬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고발자는 사탄입니다. 사탄은 우리들을 항상 각을 세워서 고발하려고 합니다. 스가랴3:1-4을 보면
1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2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3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4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여호와 앞에 섰습니다. 그때 사단도 그 우편에 섰습니다. 사탄이 여호와께 고소할 거리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여호와 앞에 섰습니다. 드디어 고소거리를 찾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여호와께서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옷을 갈아 입혔습니다. 스가랴는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사단은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여호수아를 대적했습니다. 그 모습을 여호와께서 스가랴에게 보이셨습니다(1절). 그때 여호와께서 사단을 책망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사단을 책망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단 앞에서 이스라엘이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라고 하셨습니다(2절). 그때에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있었습니다(3절). 그 모습을 보신 여호와께서 대제사장의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죄과를 제하여 버렸다고 했습니다. 다음에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셨습니다(4절). 그때 스가랴가 정한 관을 그(여호수아) 머리에 씌우소서 소원하니까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웠습니다(5절).
사실 대제사장은 정결해야 했습니다. 백성보다 정결해야 했습니다. 레위사람들보다 더 정결해야 했습니다. 성소 안에 있는 사람들보다 정결해야 했습니다. 제사장들보다 더 정결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여호와 앞에 섰습니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말입니다. 수치와 비난거리의 죄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였습니다. 더러운 옷은 !yaiXoh'(하초임/그 더러운 옷)으로서 가장 간악하고 혐오스러운 성격의 더러음을 표현하는 강력한 히브리어입니다. 그런데 이 더러운 오물이 묻은 옷을 대제사장이 입었습니다. 스가랴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대제사장이 이러한 옷을 입고 있음에 놀랐습니다. 거기에 이스라엘을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라 하셨습니다. 이것을 보고 사단은 대제사장을 하나님 앞에서 강력하게 힐난하였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벌을 주어야 마땅하다고 참소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대제사장의 옷을 갈아입히라고 했습니다. 죄를 깨끗이 제하셨습니다. 바로 단호하게 사단의 입을 막아버리셨습니다. 불은 Babylon의 포로를 상징합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로 말한 것은 포로에서 이스라엘을 구출한 것입니다. ‘더러운 옷’을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입었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부정함을 상징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부정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연회장에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Red Carpet을 밟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옷을 말끔하게 갈아입히셨습니다. 조금전까지만 해도 몸이 부정했습니다.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였습니다. 예식적으로도 정결하지 못한 심히 더러운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몸과 예식적으로 완전한 대제사장으로 거듭났습니다. 원고는 있는데 피고가 없어졌습니다. 원고인 사단은 어마어마한 law firm을 꾸려 이스라엘을 고소했는데, 피고가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스라엘이 용서받은 것입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셨는데 누가 우리를 고소하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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