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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는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돼지는 말처럼 짐을 나르지는 못하고, 소처럼 쟁기를 끌지도 못하며, 양처럼 털을 깎을 수도 없고, 젖소처럼 우유도 짜내지 못하며, 개처럼 집을 지키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돼지는 잡아먹기 위해서 길러질 따름이다. 이러한 돼지와 같이 탐욕적인 부자도,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의 부가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 그가 죽었을 때, 비로소 그의 부는 처분되어 유용하게 쓰일 수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죄인의 부는 의인을 위해 예비 되어 있다”는 말이 맞다.

                Andrew Will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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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http://omn.kr/1v8s9

 

빈소에서 윤석열 안수기도? 목사의 한 사람으로 수치스럽다

[주장] 한국 보수교회 목사들의 행태... 이래서 교회도 목사도 세상의 조롱거리 되는 것

www.ohmynews.com

 

And

예수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됨(로마서8:26-30)

 

Calvin은 기독교강요에서

 

사도신경은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도 그리스도께서 모는 면에서 우리 구속의 값을 치루기 위하여 우리를 대신하였음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죽음의 그 멍에 아래 잡혀 있었는데 그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건져내 주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그 세력에 내맡겼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의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신 것이다”(히3:32)라는 말도 이러한 의미이다. 그가 죽으심으로서 우리가 죽지 않을 것임을 보증하셨고, 죽으심으로서 우리가 살도록 구원하셨다. 그러나 그가 우리와 다른 것은 그는 죽으심으로서 자신이 삼킨바 되었는데 이는 그 깊은 연못가운데 빠진 것이 아니고 도리어 우리를 삼켜 버리려했던 그것을 삼켜 버렸다(벧전3:22). 그는 친히 죽음을 따랐지만 그 죽음의 세력에 압도당해 버린 것이 아니고 그것이 우리를 위협하고 우리의 쓰러진 상태를 보고 기뻐 날뛰었을 때 결정타를 가하셨다. 또한 그 목적은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어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함이었다(히2:14-15). 이것이 그의 죽음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첫 열매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또 다른 효과는 우리가 그것에 참여함으로서 그의 죽음은 우리의 지상적인 지체가 죽어버림으로서 더 이상 효능을 다하지 못하게 하였고 또 우리 안에 있는 몇 사람을 죽여 버림으로서 번영과 질서를 맺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장사 지낸바 된 것도 같은 효과를 가지는데 우리가 그것에 참여함으로서 그와 함께 죄에 대하여 묻혀 버리게 된다. 바울사도는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느니라”(롬6:5). 또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죄에 대하여 장사 되었느니라”(롬 6:4). 이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뭇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뭇박히게 하기 위함이요(갈2:19/6:14), 이는 우리가 그와 함께 죽기 위함인 것이다(골3:3) 라는 등의 말들로서 바울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죽음을 모범으로만 삼으라고 권면하는 것만 아니고 그의 죽음을 무용하고 열매 없는 것으로 돌리고자 하는 뜻이 없는 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나타나야 할 효과가 그 죽음 속에 있다는 것까지 명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에 이중적인 복을 누리게 했는데 그것은 우리가 묶여 있던 죽음으로부터의 해방과 우리 육신의 죽음 등 두 가지다.

라고 했습니다.

 

John Murray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경이로움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탁월하게 시현(示顯)된다. 그리스도가 주어지고 보내심을 받은 것은 성부의 뜻에 의해서였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그리스도 자신의 뜻에 의해서였다. 그리스도는 구원하기 위해 보내심을 받았고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유일한 선택은 온 인류가 멸망 받는 것이었다(요3:16). 예수만이 홀로 구원의 대장이시다. 그분 외에 그 누구도 구속을 수행하지 않았으며, 그분 외에 그 누구도 죄를 위해 속죄하지 않았고, 화목제물이 되지 않았으며, 화목을 행하지 않았다. 우리 인간들이 이 장중한 성취에 어떤 부분을 담당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신성모독죄를 범하는 것이겠는가!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끝에 나타나셨느니라"(히9:26).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단 하나의 유일 무이성, 그것이 나타내는 은혜의 지극히 크심, 그것이 가져오는 구원의 완전한 효력을 바라보는 바로 그때,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엡2:7) 나타내신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의 성격과 작용을 우리들이 짓는 어떤 구성요소에 의해 조건 지으려 하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를 욕되게 하는 것인지 드러난다. 우리가 죄 가운데 죽었을 때 베푸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대한 이러한 시각은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구원을 얻었나니”라는 바울의 말을 생각나게 한다. 고 했습니다.

 

이러한 것을 볼 때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지, 그 어떠한 것도, 그 어떠한 사람도 개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종교다원주의의 구원은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이교도 그들의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선한 행위자체가 구원에 개입될 수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그리스도에 의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대속(代贖)의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이교도도 죽은 이후로 부활한 사람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창조주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마귀에 속고 있습니다. 인간의 어떤 행위가 자신들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창세기11장을 보면 인간들이 바벨탑을 쌓습니다. 여기에 인간의 각종교만이 숨어 있습니다. 스스로의 구원, 심판배제 등 하나님과 관계된 것을 모두 끓으려하는 인간들의 어리석음을 볼 수 있습니다.

And

우리의 구원 주 예수그리스도(로마서8:26-30)

 

마태복음1:21을 보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4:12을 보면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로보아도 인간은 구원을 받아야 할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은 예수그리스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자체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는 저희 죄에서 aJmartiva/hamartîa라는 말을 썼습니다. ‘하마르티아aJmartavnw/hamartâno라는 고전 헬라문헌에서 Homer 이래 빗맞추다, 놓치다, 실수하다, 실패하다이며 비유적으로, ‘지적으로 부족하다, 잘못하다, 등 도덕적으로, ’잘못(그릇) 행하다'를 의미하다에서 유래했습니다. ‘하마르티아표적(과녁)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표적에서 빗나간 존재입니다. 단지 이 빗나감은 수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총은 얼마든지 수정을 할 수 있습니다. 가늠자를 수정하여 원하는 표적을 맞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는 이미 쏜살입니다. 연습이 없습니다. 실재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죄는 이 세상에 항상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 죄를 인해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Calvin의 기독교강요 제2167항의 십자가에 달림에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그는 자신을 저주에 내맡겼다는 뜻이 된다. 그래야했던 것이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아니, 오히려 우리 위에 임한 모든 저주가 그에게 옮겨짐으로서 우리로부터 제거되도록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 사실은 율법에도 예시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 죄를 드리는 제물과 보상을아쉬모트라고 불렀다. 이 말을 비유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성경은 죄로 인해 저주를 받은 정화의 제물과 같은 것임을 암시하려 했다. 모세의 제사에서 비유적으로 묘사된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입증되었다. 그러므로 완전한 보상을 치루기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목숨을 !v'a:/’âsham) 즉 선지자들의 말 그대로(53:10), 죄를 위한 보상적 제물로 드렸는데 그 때문에 우리의 더러움과 형벌은 다소 제거되어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은 그치게 된다. 사도는 이 사실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5:21)고 가르침으로서 더욱 분명하게 증거 하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은 일체의 허물도 없는 전혀 무죄한 분이지만 우리의 불의함으로 인해 부끄러움과 욕을 친히 담당하시고 그 대신 우리에게는 그의 순결로 옷 입혀 주셨기 때문이다. 바울이 죄에 판하여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의 죄를 정하셨느니라”(8:3)고 한 것도 같은 의미이다. 아버지께서는 죄에 대한 저주가 그리스도의 육신에 옮겨질 때 죄의 세력을 멸하셨다. 그렇다면 이 말의 의미는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희생을 통하여 모든 보상을 다 치르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지 않도록 보상의 제물로서의 죽음을 아버지께 드리셨다는 것이다. 이제 선지자의 여호와께서는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53:6)라는 말의 의미는 분명해진다. 즉 불의로 인한 더러움을 제하여 버리고자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를 그리스도에게 전가시키셨다. 사도의 증거와 같이 그리스도가 못 박힌 십자가가 이를 상징해 준다(3:13-14). 베드로역시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못으로 우리 죄를 담당 하셨느니라”(벧전2:24)고 함으로써 같은 것을 말하였다. 이는 저주의 바로 그 상징에 의해서 우리가 괴로움을 당하던 짐을 그가 지게 되었음을 우리는 분명히 이해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그에게 눌린 저주에 굴복하여 쓰러졌다고 보아서는 안 되고 오히려 자신이 저주를 친히 담당하심으로서 그 전체의 세력을 분쇄하고 파괴하고 혼비백산하게 된 것으로 알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유죄선고를 인하여 무죄선고를 받게 됐고, 그의 저주를 언하여 복을 받게 되었음을 믿음으로서 납득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치욕으로 가득찬 십자가상에서 얻은 승리를 당당하게 선언하고 있다. 그는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 하셨느니라”(2:14-15)고 말하였다.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 더구나 그 죽음으로 우리가 큰 용서함을 받고, 큰 구원을 얻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삶을 얻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나라의 삶을.

 

And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마서8:26-30)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속죄제물로서 우리의 죄로 인해 상함을 입었습니다(53). 대예수그리스도께서는 제사장으로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28:38). 또한 중보자로서 그리스도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자기 자신의 것으로 간주하셨습니다(69:5). 이 세상의 모든 죄를 예수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것으로 간주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22:22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인자는 이미 (하나님에 의해) 작정된 대로 (십자가로) 가거니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2:23절에서 베드로는 그가 하나님 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으니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뿐 아니라 베드로의 말 속에서도 교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의 중심이라고 믿을 만한 명백한 근거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에 따라 사도행전4:24-28절에서 온 교회는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라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이 연합하여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그것을예수에게 행했다고 고백했습니다. 따라서 히브리서 13:20절이 영원한 언약의 피를 말하면서 의도한 일은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 계획안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에 의해 그리고 그 사역 안에서 가능하게 됩니다. 이 피가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과 연관된 것이라면, 십자가는 다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의 중심으로 나타납니다. 이로써 우리는 그리스도 뿐 아니라 그분의 희생적인 죽음까지도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의 필수적인 요소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다는 사실은 우리들의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십자가대속사건을 어렸을 때부터 너무나 많이 들었습니다. 오히려 그 익숙함이 하나님의 은혜를 모호하게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그리스도예수님의 죽으심이 비정상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죄로 인해서 죽어 마땅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예외입니다. 그는 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죽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힘없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는 영원하신 분입니다.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일 뿐만 아니라 성부와 동등하신 분이셨습니다. 말씀이시며, 영원 전부터 선재하셨습니다. 영원 전부터 함께 계셨습니다.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셨던 그가 육신이 되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성부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이셨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죽음은 모순이었습니다(John Murray). 그럼에도 그는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를 깨끗케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짊어지지 않으셨다면 그는 인간들 죄의 형벌의 결과를 처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는 형벌의 결과를 낳기 때문입니다. 죄의 결과를 허용하고 방치하는 것은 하늘에 속한 타당한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거기에 죄의 책임과 결과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죄의 책임과 존재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났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죄에 관한 모든 세부적인 사항까지도 다 이루셨습니다. 이것을 성경에서 수없이 사람들에게 외치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희생, 화목 제물, 화목, 구속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사항들은 죄의 의미를 바라보는 여러 가지 시선이 있기 때문입니다. 죄는 반드시 죄책을 수반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예수의 희생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책을 위해 예비된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킵니다. 따라서 죄가 있고서는 화목할 수 없습니다. 바로 화목제물은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는 것이다. 죄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소외시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예수의 죽음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물어버렸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은 순전히 그의 백성들을 위함이십니다. 죄는 우리를 죄 자체의 종 즉 사단의 종이 되게 합니다. 구속은 이러한 종 됨을 위해 예비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의 속전(購錢)입니다. 또한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죽음 그 자체를 멸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무엇을 제일 두려워합니까? 죽음입니다. 그런데 그 죽음을 멸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은 과거 에덴에서 하나님께 패역한 죄를 져서 영원한 죽음을 죽어야 하는 것을 죽지 않게 하신 것입니다.

 

 

And

http://www.mdon.co.kr/news/article.html?no=27239

 

코로나19가 가져올 사회경제적 변화

기초과학연구원(IBS)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COVID-19‧이하 코로나19)와 질환의 원인이 되는 사스코로나바이러스-2(SARS-CoV-2 또는 2019-nCoV)에 대한 과학 지식과 최신 연구동향을 담은 「코로나19

www.mdon.co.kr

 

And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로마서8:26-30)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른 종교에는 없는 성경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계시로 인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계획에 관해 친히 계시하신 것을 이해하려고 시도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많은 성도들은 선택에 대한 교리가 그리스도인의 구원의 확실성을 파괴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또한 자유 의지의 이해에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 대해 연구하는 일을 피하려고 합니다. 이에 Calvin은 기독교강요3213절과 4절에서

성경은 성령의 학교이다. 그 이유는 알아야할 필요가 있거나, 알기에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성경에 나타나있으며 당연히 알아야할 것 외에는 어떤 것도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 안에서 예정에 대해 가르치고 있는 모든 교훈을 신자들에게서 빼앗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신자들에게서 속여 빼앗는 악한 자로 보이거나, 알리지 말았어야 좋았을 것을 계시했다고 성령을 비난하며 냉소를 보내는 자로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연약한 영혼들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것이 조심스럽고 두려운 나머지 예정(에 대한 가르침)을 묻어버리기 원하던 사람들은 그들이 지혜롭게 대처했다고 느끼는 그 위험을 하나님께서 내다보시지 못한 것처럼 그 분을 어리석고 사려 깊지 못했다고 그분을 간접적으로 비난할 때 어떤 구실로 그들의 교만함을 감출 것인가? 예정론에 대해 비난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께서 교회에 해로운 일을 분별없이 누설하신 것처럼 공공연히 하나님을 비난한다.

고 했습니다. 우리가 왜 선택하심을 입었습니까? 선택이란 뜻에는 어떤 사람들 가운데에서 뽑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정을 알아야 하고 하나님의 작정하심을 인식해야 합니다.

에베소서3:11에서 바울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취하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provqesin/prôthesin)이라고 했습니다. ‘이란 계획입니다. 단수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무엇보다 우선하는 하나의 뜻 혹은 계획을 가지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뜻이나 계획을 영원한 뜻”(provqesin tw'n aijwvnwn) <프로쎄신 톤 아이오논>이라고 했습니다. 영원한(아이오논)은 하나님의 계획 전체가 완전히 결정되지 않았던 때가 한순간도 없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어떤 일에 대해서도 최종적으로 결정하지 않았습니다즉 하나님께서는 항상 그 계획을 가지고 계셨는데, 그 계획안에는 본질적으로 시간적 요소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 계획의 여러 부분은 시간 관계보다는 논리적 혹은 목적론적 관계 안에 놓여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의 중심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영원한 계획을 성취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1:9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뜻의, 비밀을 그 기쁘심을 따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효력을 발휘하도록 예정하셨다고했습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하나의 머리 아래 오게 하는 기쁘심을 예정하셨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 위에서 그분이 행하는 모든 역사와 방식을 지배하는 그분의 영원한 계획을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도록 의도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알파와 오메가로서 처음부터 그분의 영원한 의도의 중심이자 목적입니다.

이 영원한 의도 혹은 계획은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와 직접적이고도 핵심적으로 연관되었기 때문에 구원론 문제와도 직접적이고 핵심적으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의도라는 말씀 바로 앞에 나오는 구절 속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기 위하여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말했습니다(3:9-10). 그리고 에베소서3:9-10절에서 언급한 행위의 결과로서 3:11절에 나오는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라는 말씀이 따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도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의 중심이자 목표인 것입니다이러한 하나님의 의도가 지닌 구원론적 특성은 바울이 하나님의 의도를 말씀하는 다른 구절들에 의해서도 지지됩니다. 로마서8:28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구원으로)(유효하게)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에베소서 1:11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하나님의) 기업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디모데후서1:9절에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고 합니다.

로마서9:11-13절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의도 안에서 선택의 원리가 모든 진정한 구원을 결정하는 은혜의 원리와 함께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일치함을 알게 됩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야곱과 에서 사이를 구분하시는 하나님의 행위 속에서 극적으로 나타나는 은혜와 선택 원리 사이의 연관성을 보는데, 바울은 그러한 구분이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그러니까 영원 전에(25:22-23) 일어났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은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서게 하려 하사라는 구절을 통해 가리키는 하나님의 구분을 지배하는 것과 후원하는 것 사이를 밝히려고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라는 구절을 덧붙였습니다. 이 구절은 행위가 아니라 은혜에 의해서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즉 하나님의 선택하심은 댓가 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따라서 이 계획에는 하나님의 선택, 예정, 교회를 창조하시려고 죄인들을 유효하게 부르심과 같은 것들입니다. 이렇게 세워진 교회는 사람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려하심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이지, 우리들의 어떤 것이 조금이라도 포함된 구원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항상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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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정하신 하나님(로마서8:26-30)

 

Westminster신앙고백서31-2항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장차 있을 모든 일을 영원한 때부터 그 자신이 뜻하신바, 가장 지혜롭고 거룩하신 계획에 의하여 자유롭게 그리고 변치 않게 작정해 놓으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의 조성자가 아니시며, 피조물들의 의지를 침해하시는 이도 아니시다. 2원인들의 자유나 우발성을 제거시키지도 않고, 오히려 확립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예상되는 조건들에 근거하여 장차 무엇이 일어날 수 있는가를 알고 계신다. 그러나 그가 어떤 것을 작정하실 때, 그것이 장차 있을 것으로 예지하셨거나, 또는 그 가정된 조건들에 근거하여 반드시 일어날 것으로 예지하셨기 때문에 그 어떤 것을 작정하신 것은 아니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장차 있을 모든 일을 영원한 때부터 뜻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뜻하신 바는 지혜롭고 거룩하십니다. 그 계획은 자유롭고 변치 않으십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죄가 들어왔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죄의 조성자는 아닙니다. 피조물들의 의지를 침해하지도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중심의 신학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그분 자신의 영광을 위해 창조하셨다는 것(43:7,21)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뛰어난 많은지혜를 나타내려 하셨습니다(3:9-10). 그분 자신의 명성과 찬양과 명예를 위해 이스라엘을 택하셨습니다(13:11). 그분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 그리고 그분의 능력을 알리기 위해서 고대의 백성들이 그분께 반역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106:7-8).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삼상12:20-22). 그들을 계속해서 남겨두셨습니다(20:9.14.22.44).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그들이 최대한으로 파멸되지 않도록 하셨습니다(48:8-11). 왜 그렇게 하십니까? 그분 자신의 이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과 일을 하심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이 땅에 첫 번째 오셨습니다(17:4. 6). 그분이 가져다 주셨습니다. 그분 스스로가 즐거워하시는 구원의 모든 세밀한 부분들은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자신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찬양하게 하시기 위해 예비해 놓으셨습니다(1:6.12.14). 예수님은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을 얻으시기 위해(살후1:9-10)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그러한 동일한 관심사인 하나님 자신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의 핵심이라는 것을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선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작정에 의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어떤 사람들과 천사들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되었습니다. 다른 이들은 영원한 사망에 이르도록 예정되어 있습니다(Westminster신앙고백서33).

논쟁의 여지없이 하나님의 지혜의 깊은 것가운데 하나입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예정된 사람들에 대하여 Westminster신앙고백서35항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되어 있는 사람들을 창세전에 자신의 영원하고 변함없는 목적과 그리고 그 뜻의 은밀한 계획과 선하시고 기쁘신 뜻을 따라서 오직 그의 거저 주시는 값없는 은혜와 사랑에 근거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시어 영원한 영광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두 그의 영광스런 은혜를 찬미케 하셨습니다. 그러나 믿음 또는 선한 행위 또는 그들 안에 있는 인내 또는 피조물들 안에 있는 어떤 다른 것들은 하나님을 감동시켜 저희들을 선택하게 하는 조건들이나 원인이 아닙니다.

신앙고백서는 또한 나머지 인류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는 피조물들 위에 행사하시는 그의 주권적인 능력의 영광을 위하여 그가 기뻐하시는 대로 긍휼을 베풀기도 하시고 거두시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택함 받은 자 이외의 나머지 인류에게는 그 자신의 뜻의 측량할 수 없는 계획에 따라서 그들의 죄를 인하여 그들을 버려두시기도 하십니다. 그들이 치욕과 진노를 당하도록 작정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이는 그의 영광스런 공의를 찬미케 하려 하심이다(37)

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두 부류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결정해 놓으신 자신들의 종착지에 임의적으로 도착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믿을 것인가 또는 그들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으시는 가운데 사람들이 그곳에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이유 때문입니까?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을 영광에 이르도록 작정하신 것처럼 그는 그의 영원하고 가장 자유로운 뜻과 의사에 의하여 그것을 위한 모든 방법들을 정하셨다(36)

그 방법에는 어떤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까? 사랑하시는 아들의 속죄 사역, 선택된 자들에 대한 유효한 부르심, 인간의 마음에 이루어진 회개와 믿음을 통한 성령의 중생시키는 사역 그리고 그분 자신의 칭의와 성화 사역 등입니다. 또한 나머지 인류를 버리시기로(‘passing by'’는 라틴어 praeteritio에서 유래한 ‘preterition’간과하심을 가리키는데) 정하신 하나님의 결정이 오직 그분 자신의 측량할 수 없는 계획에만 근거한 것이 사실인 반면, 그분께서 버리시기로 정하셨던 자들을 모욕과 진노에 처하도록 결정하신 것에는 그분의 진노를 받기에 합당한 상태()가 또한 고려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영원한 계획과 목적을 자신의 창조사역을 통해 실행하기 시작하셨습니다(소요리문답 8). 실제로 세상의 창조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전능한 권세와 헤아릴 수 없는 지혜 무한한 선하심을 섭리적으로 행사하심을 통해 자기 자신에게 영광을 가져오는 그 영원한 목적을 계속해서 실행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섭리하심은 모든 피조물들과 그들의 모든 행동들에게까지 이릅니다.

그 섭리는 아담의 첫 번째 타락파 천사들과 사람들의 모든 죄까지도 포함한다. 그런데 그러한 죄들은 단순한 허용에 의한 것이 아니며 하나님은 허용하시되 여러 세대에 가장 지혜롭고 강력하게 제한하시고 그 밖에도 명하시고 주관하시어 그 자신의 거룩한 뜻들을 이루도록 하신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54).

아담의 죄를 하나님께서는 그의 지혜롭고 거룩한 계획을 따라 기쁘게 허용하셨는데, 이는 그것을 명령하시어 그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기로 이미 계획하셨기 때문입니다(61). 그의 죄로 인해 아담은 원래의 순결한 상태(status integritatis)였습니다. 즉 죄를 지을 수도 있었습니다. 죄를 짓지 않을 수도 있던 상태(posse peccare aut posse non peccare)였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타락하였습니다. 죄로 죽게 되었습니다. 영과 육의 모든 기능들과 기관들이 전적으로 더럽혀지고 말았습니다.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담은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 온 인류의 언약적 대표자였습니다. 그렇기에 그가 범한 최초의 죄가 통상적인 출생에 의해 그로부터 모든 인류에게 전가되었습니다(63). 이에 따라 아담으로부터의 통상적인 출생에 의한 후손이 아닌 그리스도를 제외한 모든 인류를 하나님께서는 아담 안에서 죄인으로 간주하셨습니다. 아담 안에서의 대표성 때문에 또한 그들 자신의 죄와 부패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윤리적 거룩성과 그분이 세운 율법의 의로운 기준에 계속해서 못 미쳤습니다(3:23). 그로 인해 사망 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자신의 은혜로운 선택목적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선택하신 자들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들을 위하여 그들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통하여, 또 그리스도께서 구속하신 복의 유익을 그들에게 적용시키시는 성령님의 사역을 통하여 그들을 영원히 구원하셨습니다. 선택받은 자들이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구원에 있어서 전혀 결정권이 없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 7}지고 오는 모든 것들은, 그들이 구원받을 필요가 있음을 보여주는 자신들의 죄와 도덕적 오염일 뿐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구원은 근본적이고 전적으로 오직 주님께만 속한 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찬양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구속함을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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