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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왜곡/교황제도 확립(로마서 9: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어떤 종교든지 사람들을 제압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으면 타락하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이 많고 사람들이 많아지면 교회가 다른 곳으로 그 힘을 돌리려고 합니다. 이때 교회가 성경적이지 못하면 바로 세속화되기가 쉽습니다. 왜냐하면 돈을 가지고 있고 여러 가지를 할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교회가 슬슬 지금 기어 나오려 하고 있습니다. 슬픈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결코 심판하심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Roma의 영향력은 레오1세(Leo I/440-461)가 로마교회 감독으로 있는 동안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그는 5세기 교황들 가운데 가장 기민한 자였습니다. 5세기중엽에 발생한 두 가지 중요한 사건 즉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관계에 대한 기독론논쟁과 로마제국에 대한 야만인들의 침공에 대한 교회의 대응에서 레오1세는 중추적 역할을 했습니다. 성직임명과 관련된 사계 제일기간, 즉 사순절, 오순절 이후 9월, 강림절에 매년 4번의 단식을 준행하게 한 것도 레오였습니다. 레오의 정치적 수완은 로마의 역대 감독들과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Damasus 아래 제정된 일련의 법령들을 지속시켰습니다. 마니교의 성찬동참이나 태양신과 기독교를 혼합시키려는 행위에 대해서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았습니다. 452년에는 로마를 괴롭히는 흉노족인 아틸라에게 찾아가 담판까지 벌렸습니다. 455년 반달족이 로마를 침입했을 때는 중재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교회의 삶에서 핵심적인 문제였던 교리적 문제도 손을 댔습니다. Leo는 서방신학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여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신성과 인성이 연합되었다고 일관되게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서방교회에 기독론의 표준이 되었습니다. “로마의 감독 지위가 교회에서 베드로가 사도들 중에서 지녔던 지위와 동일한 지위”라는 그의 진술은 교황제도의 교리적 토대를 확립시키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지위에 대한 그의 주장에 있어서나 그가 발휘한 영향력에 있어서 누구도 그를 따를 자가 없었습니다. Leo가 성 베드로 성당에 묻힌 최초의 교황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Leo는 베드로와 바울이 Romulus(로마 건국의 시조라고 하는 자)와 Remus(로마의 건국 시조인 로물루스의 쌍둥이 형제) 대신 로마 수호신의 자리를 차지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Leo의 편지와 칙서에 나타난 문체를 보면 마치 황제가 내리는 조서 같았습니다. 이토록 Leo는 그레고리1세와 니콜라스1세와 함께 역사에서 소위 “대제”(Great)라 불리는 세 명의 교황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미래 교황청의 권력과 특권이 그의 방법론, 정책, 이상에 개괄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셀레스틴과 식스투스III세 아래서 420년과 430년대에 로마교회 수석집사 역할을 하면서 Leo는 역량을 발휘하였습니다. 그는 곧 로마의 감독이 되었고, 440-461까지 21년 동안 서방교회에서 “로마의 교황권을 확립하고 동방 교회들과의 관계에서 교회법 (Canon Law)을 지지하며, 동방에서 발생한 기독론 논쟁에서 로마교회의 정통적 기독론을 방어하는데 힘을 쏟았습니다. 야만인들의 침략 앞에서 로마교회를 다스리는데 진력하였습니다. 이런 일들이 Leo의 입지를 강화시켰습니다. 그리고 교황제도의 확립에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Leo가 감독으로 있는 동안 로마교회의 우월성은 서방에서 인정을 받았습니다. Leo는 서방 교회들에 보낸 자신의 편지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마니교, 브리스길라주의(Priscillianism),1 펠라기우스주의(Pellagianism),2 감독의 자질, 재세례 같은 치리적 실제적 문제들 및 야만인들의 침공에 의해 야기된 문제들을 다루었습니다. Leo가 로마감독의 지위를 강화시킨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는 칼케돈회의입니다. 여기서 레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으로서 시릴의 후계자였던 디오스코루스는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권위를 동방 교회들 위에 높이 진작시키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지도자인 유티케스(Eutyches)를 동맹자로 두고 있었습니다. 유티케스는 시릴의 교리를 극단으로 끌고 가 그리스도의 인성에 적절한 자리를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449년에 기독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회의가 열렸으며 사회를 주도한 디오스코루스는 이 회의에서 Leo의 서신낭독을 불허했습니다. Leo의 입장이 이 회의에서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동방 황제 데오도시우스II세가 450년에 죽었습니다. 그의 누이 펄케리아(Pulcheria) 및 그녀와 결혼한 마르시안 장군이 왕위를 계승하였습니다. 펄케리아는 오래 전부터 Leo와 그의 양성 기독론에 동조해 왔었습니다. 정치적 변화는 곧 교회의 논쟁의 변화였습니다. 451년 520명의 감독들이 모인 가운데 칼케돈에서 회의가 개최되었습니다. Leo는 로마 감독들이 이전의 동방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던 전례에 의거하여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교황 사절단을 대리로 파견하여 자신의 입지를 강화시켰습니다. 451년에 칼케돈에서 열린 이 회의에서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신성과 인성이 혼합, 변함, 나뉨 그리고 분리됨이 없이 연합되었다는 내용의 Leo의 서신이 낭독되자 그곳에 모인 회원들은 갈채를 보냈습니다. “그것은 교부들의 신앙, 사도들의 신앙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믿는다. 정통은 그렇게 믿을지어다! 달리 믿는 자에게 저주(Anathema)가 있을지어다! Leo를 통해 베드로가 이렇게 말했다! 사도들이 그렇게 가르쳤다” Leo의 서신이 받아들여져 칼케돈회의에서는 그리스도가 한 인격과 한 본체에 두 본성이 혼합 없이 변화 없이 분열 없이 분리 없이 존재한다고 선언했습니다. 레오의 교리가 확정됨으로 말미암아 로마는 교리적으로 승리를 거둔 셈이었습니다. 그러나 칼케돈회의에서는 제 28조항에 “새 로마” 콘스탄티노플이 교회문제에 있어서 로마와 동등한 권한을 가져야하며 로마 다음가는 두 번째 지위를 가져야 된다고 명문화하였습니다. 모든 점에 있어서 거룩한 교부들의 판단을 따라 또한 우리가 읽은바 가장 경건한 150감독들의 법규〔콘스탄티노플 회의. 381〕를 따라 우리는 새 로마인 가장 거룩한 도성 콘스탄티노플의 특권에 대하여 같은 것을 작정하고 반포했습니다. 대개 옛 로마의 왕위에 대하여 교부들이 특권을 허락하였던 것은 마땅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제국의 수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150 감독들은 이 새 로마에 대하여 꼭 같은 특권을 부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새 로마는 교회의 문제들에 있어서도 옛 로마와 똑같은 특권을 누려야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만 그 순위에 있어서 옛 로마의 다음이 될 뿐이었습니다. 칼케돈 회의의 결정은 381년 콘스탄티노플이 로마와 동등하다는 콘스탄티노플 결정을 재확인 한 것입니다.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는 “콘스탄티노플은 새 로마이기 때문에 콘스탄티노플 감독은 로마감독 다음의 영예를 가진다”고 결정한 바가 있습니다. 항상 로마의 우월권을 주창한 Leo는 “28조항의 법규가 325년 니케아에서 가결된 법규와 모순되며 안디옥과 알렉산드리아의 위상을 손상시킨다고 주장했습니다. 칼케돈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Leo는 로마교회의 우월성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Leo는 “단순한 역사적 이상의 의미로서 자기가 베드로의 후계자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가 설교하거나 편지를 쓸 때에 바로 베드로 자신이 말하고 글 쓰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최소한 그의 말과 그를 듣고 읽는 이들은 이러한 태도를 마땅히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교황은 성 베드로가 소유했던 모든 것의 합법적 계승자이므로 그가 가진(천국에의) 열쇠의 권한의 정도도 전혀 약화되지 않았다고 믿었+습니다. Leo는 선대 감독들로부터 물려받은 자료들을 이용하여 로마교회의 베드로적 권위를 구체화하고, 일관성 있고 권위 있는 로마교회의 최고성 교리를 만들었습니다. 그의 임직 기념일에 있었던 그의 설교는 마태복음16:16-19, 누가복음 22:31, 요한복음21:15-17을 사용했습니다. 베드로가 감독들을 다스릴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고 참람된 주장을 했습니다. 베드로는 로마의 감독이 되었으며 그의 권위를 로마의 후임 감독들에게 전이하였으므로 로마 교회에는 영구적인 베드로의 권위가 존재한다고 참람된 주장을 했습니다. 베드로의 말도 듣지 않고. 사도들의 왕인(?) 복된 베드로를 통하여 지극히 거룩한 로마교회가 전 세계의 모든 교회에 대한 통치권을 소유한다고 주장했습니다. Leo는 자신을 베드로와 거의 동일시하였습니다: “Leo는 우리가 베드로의 대리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의 감독은 모든 감독들 가운데 최고라는 것입니다. 3세기의 감독직에 대한 교리는 모든 감독을 본질적으로 동등한 존재로 다루었으나, Leo는 감독들의 권위가 어떤 의미에서 자기에게 종속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감독들이 교회의 목양에 동참하지만 로마감독의 “충만한 권위”에는 동참하지 못한다고 못 박았습니다. Pope(아버지)이라는 단어는 3세기 이래 주요 교회들의 감독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4세기 이후부터 로마의 감독에 대한 칭호로 쓰였습니다. Leo에게서 이 단어는 특별한 의미였습니다. 로마교회의 우월성을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Leo는 비약적인 방법을 사용하고자 했습니다. Leo는 그리스도의 두 본성과 로마제국의 두 부분 (교회와 정부) 사이에 어떤 유비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설교에서 로마와 교회를 비교했습니다. 로마교회의 창설자인 베드로와 바울은 로마의 쌍둥이 창설자 Romulus와 Remus 같다는 논리를 폈습니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Leo가 바울을 소홀히 다루었습니다. 그 이유는 베드로 관련 본문이 로마의 최고권에 대해 보다 많은 지지기반이 될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Leo덕에 로마는 다른 교구보다 우월한 지위를 확보하였습니다. 교황제도가 표면적으로 역사에 등장한 것입니다. Leo이후 영향력 있는 자는 겔라시우스1세(492-496)였습니다. 겔라시우스1세는 세속의 최고의 권한자는 황제이고 교회의 최고 권한자는 교황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세속적인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황제가 해결의 열쇠를 가지듯이 교회 안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해결의 열쇠가 당연히 로마의 교황에게 있다고 황당하게 주장을 했습니다. “축복받은 베드로의 교구는 다른 어떤 감독들의 결정에 의해 매어진 것이라도 다시 풀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천명했습니다. 이런 확신 하에 그는 교회 문제에 깊숙이 관여했습니다. 이 시기까지 로마교회는 거룩한 교구(the Holy See)로서 자리를 완전히 굳히게 되었고, 다른 교구들도 자의든 타의든 이 사실을 인정하였습니다. 이것으로 교황제도는 역사에서 정착되었습니다.
1. 4세기 스페인에서 발생한 이단(異端)으로 원래 평신도였던 프리실리아누스는 인스탄티우스(Instantius, 385년 면직) 주교에 의해 주교로 임명되었고, 살비아누스(Salvianus) 주교에 의해 아빌라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당시 스페인으로 흘러들어온 그노시스주의와 마니교를 받아들여 독자적인 교리를 만들어 내어 그가 사목을 담당하는 지방에 그의 교리를 폈으며, 황제 막시무스에 의해 체포되어 마술사라는 죄목으로 화형을 당하였다. 프리실리아누스파는 양태론(樣態論, Modalist)적 입장에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人性)을 부정하였으며, 천사는 하느님에게서 유출(流出, emamations)된 존재로 파악하였다. 또 악마는 모든 악의 근원으로 악마에게서 육체가 생겨났고, 죄를 범한 영혼은 벌을 받아 육체와 결합하게 되었기 때문이라 생각하여 육신의 부활을 부정하였다.
2. Pelagianism: 영국의 금욕적수도사이며, 신학자이고 교사였던 Pelagius로부터 유래한 신학적 견해. 그는 410년을 전후하여 로마에서 신앙생활 지도와 저술에 종사하다가 아프리카의 히포와 카르타고, 팔레스타인을 전전하며 금욕적 수도생활을 했다. 그는 하나님이 남녀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그들이 구원받든지 말든지를 선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와 함께 은총론 및 예정설의 내용을 변질시키고 원죄(原罪)를 부정하는 이른바 펠라기우스설을 주창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 그 무엇 하나도 명령하지 않았고, 또 누구든지 그 사람이 원하기만 하면 죄를 범하지 않고 생활할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 육체의 연약성 등을 구실로 우유부단한 신앙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도덕적 노력을 하도록 분발시키려 했다. 펠라기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인간의 성질은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충분한 능력이 있다고 가르쳤다. 인간의 의지는 항상 선과 마찬가지로 악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면서 인간의 성질은 악에 대한 편향을 조상에게서 물려받지 않았다고 했다. 즉,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 유아들은 타락 이전의 아담과 똑 같은 상태였다는 것이다. 또한,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한 내적 은혜의 필요성도, 속죄의 필요성도 모두 부정하였다. 인간의 성질은 선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만일 원하기만 한다면 쉽게 바른 생활을 할 수 있는 힘을 창조자로부터 부여받았다고 한다. 이른바 '선택할 수 있는 힘'(possibilitas utriusque patris) 곧 형식적인 자유(인간은 그의 자유의지에 의해 하나님에게서 해방되었다는)를 강조했다. 이러한 사상에 가장 강력히 반발한 사람은 어거스틴이었다. 어거스틴의 불만으로 논쟁이 일어났고 마침내 예루살렘 회의(415년), 디오폴리스 회의(415년)에서 펠라기우스주의가 이단시되었으며, 두 차례 카르타고 회의(417, 418년)에서 정죄 유효선언이 내려졌고, 제2오랑주 회의(529년)에서 다시 정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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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행위는 사회로부터 칭찬과 박수를 받는다. 그러한 칭찬을 눈앞에 맞이할 때 인간은 먼 곳에 무지개가 떠 있는 것을 보는 듯하다. 그리고 그것은 젊은이에게는 유달리 매혹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무지개, 즉 그 상황이 사라져 버리면 그와 동시에 노력하는 힘도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기독교도 앞에는 영원히 무지개가 빛을 내고 영원의 상황이 보인다. 기독교도는 젊은이와 마찬가지로 인생에 있어서의 싸움을 갈망한다. 기독교도에게는 늘 싸워야 할 것과 나아가야 할 것이 있다. 왜냐하면 늘 맑고 밝은 자아의 반성은 스스로의 속에 있는 새로운 결점을 폭로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결점과 싸우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도 속의 모든 힘은 잠자거나 약해지거나 하지 않게 되어 항상 눈뜨고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좀 더 선하고 싶다는 소원은 제아무리 노력해도 만족할 줄 모르는 야심가에게는 주어질 수 없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퇴화해 가는데 왜 기독교도는 발전해 가는가? 그리고 기독교도들은 앞으로 나감에 따라서 왜 점점 더 깊은 지식을 얻는가? 그 원인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Nikolai Vasil evich Gogol
이재명 지사에 관한 좀 긴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소설보다 더 재미있으실 겁니다.
성남시에는 전쟁이라 불리는 사건, 즉, 성남시와 대형건설사 간의 소송전이 있었습니다.
성남시의 호화청사는 3,200억이나 들여서 성남시를 빚더미에 앉힌 그런 공사였습니다. 물론, 박근혜 정부시절, 이재명 이전의 한나라당 출신 시장이 추진했던 일인데 뇌물수수와 같은 비리도 있었고.... 그런데 성남시청 건설에 참여한 건설사들은 현대건설, 태영건설 등이 있습니다. (태영건설을 잘 기억해 두십시오. SBS의 최대주주 입니다.)
이재명이 성남시장이 되고나서 성남시는 이 건설사들을 상대로 소송을 겁니다. 부실공사에 대해 배상을 하라는 것이었지요. 손해배상을 청구했는데 지난한 재판 끝에 건설사들이 배상해야 한다는 승소판결을 이끌어냈습니다.
그래서 태영건설을 비롯한 대형 건설사들에게 이재명은 공공의 적이 되었지요. "이재명만 아니면 아무 탈없이 잘 해먹었을 텐데 웬 날벼락!" 했겠지요?
또 성남시에 대장동이라는 땅이 있었습니다. 판교와 분당신도시, 수지로 둘러쌓인 그러나 보존녹지였던 금싸라기 땅이었습니다. 원래는 대한주택공사가 도시개발사업을 계획했었는데, 2010년 6월 돌연 사업을 포기하고 민간개발로 돌려버립니다.(이 부분을 잘 기억해 두세요. 이 과정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될 겁니다.)
이재명이라는 사람이 막 성남시장이 되었을 그때 입니다. 이재명 시장은 시장이 되자마자 시장권한을 최대로 이용하여 이것을 다시 공공개발로 돌려버립니다. 그래서 무려 5,500억의 이익이 성남시민에게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후 2015년에 대장동 도시개발사업 비리수사로 9명이 기소됩니다. 민간시행사 대표는 99억을 횡령해서 지역정치인과 대한주택공사 임원 및 관계자들에게 뇌물을 건낸 혐의였습니다.
전 대한주택공사 본부장은 공영개발을 포기할 수 있도록 대한주택공사와 정치권에 로비해주는 명목으로 13억 8천만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기소 되었습니다. 또 변호사와 전 해당지역 국회의원 신모 씨의 동생도 같은 명목으로 8억3천과 2억을 받은 혐의로 구속 기소되었고요.(자유한국당 소속 신모 의원은 국정감사 때 민간에게 개발을 넘기라고 압박을 하였음) 그리고 또 대한주택공사가 공공개발을 포기하고 민간으로 돌리자 감사의 표시로 5,000만원씩 뇌물을 더 줍니다.
시행사의 후임대표는 민간개발방식의 사업승인을 받아달라며 전 성남시의회 의장에게 1억여원을 건낸 혐의로 기소되었으며, 경기도 생활체육단체 회장, 감정평가사, 전 저축은행지점장 등 줄줄이 엮여서 부정부패가 밝혀지지요. 정계, 재계, 건설사, 언론계가 한통속이 되어 국민의 혈세로 배를 불리는, 소위 기득권 세력의 카르텔이 무섭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재명은 시장이 되자마자 이걸 그냥 공공개발로 바꿔버렸던 것입니다. 저들이 대장동에 땅도 많이 사두고 쏟아부은 뇌물이 얼마인데 저들의 노력은 하루아침에 모두 허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후에 뇌물 혐의까지 밝혀져 버렸으니 이재명이 얼마나 미웠겠습니까? 그리고 이걸 지켜보는 건설사들은 또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이재명은 성남시장 시절에 전국 최초로 공공건설의 원가와 세부내역을 공개해버립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시에서 건설하는 공공건물이나 도로 등이 어떻게 설계됐고 각각의 건축공사나 토목공사, 조경공사 등에 비용이 얼마 드는지 누구나 바로 확인할 수 있게 했다는 것입니다. 공사내역이 공개되면 민간공사와 비교가 가능하기 때문에 공공건설 공사를 할 때 지적되던 부풀리기 설계 여부가 투명하게 밝혀질 수 있는 것이지요. 실제로 이재명 시장은 공사내역을 공개하여 부풀려진 건설비를 언론에 공개하고, 시민단체들도 가세하여 정경유착과 불법비리를 캐내기 시작했습니다. 이러니 비리 정치인들과 결탁해온 건설사들은 미쳐버리겠지요?
또 박근혜 정부가 공사발주 시 표준품셈으로 산정하도록 정한 정부지침에 대해 제2의 4대강 사업이라고 비판하며 거부해버립니다.
실제 시장거래 가격인 표준시장단가로 하겠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면 공사비용이 훨씬 저렴하게 됩니다. 이 차이는 당시 계획되있던 공사들만 따져도 무려 50억이 되었는데 이 금액은 전부 공사업자들과 건설사들에게 들어갈 돈이었지요. 그러니 또 미쳐버리겠지요?
그리고 아파트도 후분양제를 실시해버립니다. 선분양제, 후분양제가 어떤 차이이고 어떤 의미인지는 여러분도 잘 아실 것 같아 여기서는 설명을 생략하겠습니다. 정말 놀랍게도 이재명 지사 전임인 남경필 지사 시절에 2,500여억원의 광교 신청사 공사를 '태영건설'이 시행사가 되어 짓게 되었지요. 그런데 갑자기 이재명이 경기도지사가 됩니다. 모두 아시다시피 태영건설은 SBS의 최대주주이지요. 그가 경기도지사가 되자마자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는 이재명에 대한 조폭몰이가 시작되었지요. 물론, 전부 무혐의 처분되어서 기소조차 되지 않았지만...
이재명에게는 두려움이었겠지요. 보통 사람들 같으면 태영건설 같은 막강한 힘을 가진 대형건설사들과 지방토호세력이 한 사람을 죽이려고 총공세를 한다면 두려워서 무릎을 꿇었을 테지요. 그러나 이재명은 성남에서 이미 지겹도록 겪어봤으니 경기도에서도 공공건설의 원가를 공개하기로 하고 3년 전의 공사까지 모두 공개합니다. 태영건설이 짓고 있던 신청사도 당연히 포함되겠지요? 그래서 전국건설노조 경기도 건설지부는 이 공사현장에서 불법행위가 이루어지고 있다며 태영건설을 고발했고 경기도의 특별감사를 요구했습니다. 바로 이재명에게요!
바로 얼마 전에도 2017년 태영건설 하청 건설노동자 두 사람이 산재로 사망한 사건으로 고용노동부에 고소당해 1심에서 패소하자, 경기도에서는 태영건설에 올 10월 말부터 3개월 영업정지 행정처분을 내렸고 태영건설은 행정처분의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과 취소소송을 걸어 가처분 신청이 받아들여지면서 소송 중에는 영업할 수 있으니 영업하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관계들로 엉킬 수밖에 없는 상황에 SBS가 이재명을 왜 그렇게 증오했는지 이제 대충 그 밑그림이 그려지겠지요?
TV방송은 물론 라디오까지 모두가 아주 이재명을 죽이지 못해 안달이난 것처럼 보였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OO 판사까지 불러 계속 방송을 했으니까요.
원가공개, 후분양제, 토지거래허가제 등등 전국에서 가장 강한 정책을 펴고 있는 이재명 지사입니다. 노무현 정부시절부터 여러번 발의가 되기도 했었지만 결국 하지 못하고 계류되거나 국힘당의 전신들에 의해 원점으로 돌아갔었습니다. 지금은 경기도지사의 권한으로 공공건설에만 적용되고 있지만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민간으로 확대되거나(이재명은 계속 정부와 국회에 요구하고 있음) 그가 만약 대통령이라도 된다면, 그들에겐 헬게이트가 열리는 것일 테지요. 수천억, 수조원의 이익이 걸린 문제이고 그래서 더 무섭게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정치인에게 필요한 진정한 깡다구는 이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하여 공정하게 행정을 추진하고 비리와 부정을 과감하게 척결할 수 있는 결단력과 추진력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재명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이재명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이재명 때문에 이권을 빼앗긴 기득권 카르텔들입니다. 수많은 난관과 협박, 도전이 있었음에도 이재명은 결코 굴복하지 않았지요. 그의 지난 10년이 이를 증명합니다. 그는 항상 이와 같은 살얼음판 위에 자신을 내놓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지금까지 살아있습니다. 오히려 그 존재가치가 훨씬 더 커져서 지금 대권경선에까지 뛰어들었습니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기득권에 굴복하지 않고 정조 이후에 가장 강력한 개혁을 추진하겠다고 천명하였습니다. 우리 국민은 이재명의 이런 깡다구가 우리 정치판에서 소중하게 쓰이기를 바라며, 어떤 위기와 유혹이 오더라도 이재명은 절대 변하지 않고 개혁을 완수해내기를 기원해봅니다.
이글은 전 경북대 경영학부 김석진 교수가 보낸 자료이며, <이진홍님의 글 옮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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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에 맞은 상처는 치료할 수 있어도 말에 입은 상처는 고칠 수 없다. 페르시아속담
말은 할 말이 있고 하지 않아야 할 말이 있다. 예를 들면 보복한다든지, 검찰제국을 만든다든지, 촛불을 들고 집회했던 사람들을 다 집어넣어야 할 놈들이라고 하는 무시무시한 말들이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왜곡/사르디카 회의(로마서 9: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항상 회의라는 것은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회의(council)에 거는 기대가 크기 때문입니다. 예로 國會(국회)라 하면 사람들이 거는 기대가 만만치 않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회의는 나라를 망칠 수도 있습니다. 4대강을 하자고 못된 회의를 해서 산죽이고 강죽이고 바다를 죽이며 사람들을 죽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마어마한 돈을 전혀 조금치도 필요 없는 곳에 쏟아 붓고서 결국은 파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것을 하자고 주재한 會議體(회의체)는 전혀 못들은 척 하고 있습니다. 이토록 잘못된 모임의 회의는 두고두고 가슴을 치게 합니다. 사르디카 회의가 그렇습니다. 사르디카는 불가리아의 수도Sofia입니다. 불가리아에서는 Sofia를 Sredetz , Serdica 또는 Sardica라고 부릅니다. 문제는 제국 내 삼위일체 논쟁이 발생하자 교회는 정통성확립을 위해 일관된 창구가 필요했습니다. 보다 엄격한 치리와 중앙집권화한 통솔의 필요성을 실감했습니다. 자연히 교회내의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교회 법령(cannons)을 제정하기 위한 지방회의가 개최되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니케아회의(Council of Nicaea)입니다. 가이사랴의 바실은 지금까지 있었던 법들을 한데 모아 일관된 교회법을 제정하는데 대단한 관심을 가졌습니다. 로마교회의 문서 기록부에서도 당시까지의 기록을 수집 정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세르디카(Serdica) 서방회의에서는 로마 교구를 다른 교구의 상급 법원으로 지정하였습니다. 로마교구의 우월성을 합법화시켜 준 것입니다. 세르디카 회의 법령에서는 밝히지 않고 자신들의 법령의 출처를 니케아회의에서 제정된 법령들과 合致(합치)시킴으로 5세기에 이르러서는 세르디카 법령들이 니케아 회의의 결과인양 인용하는 경우도 생기게 되었다. 세르디카 법령들을 니케아 회의 법령들과 동등하게 다루게 된 이면에는 로마교회의 위치가 니케아 회의의 위치와 버금간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서방교회에서는 동방교회처럼 소위 에큐메니칼 종교회의가 그리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이면에는 “서방에서 유일한 사도가 세운 교회라는 면에서 로마 교구는 헬라세계의 어느 감독교구에도 비길 수 없는 월등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로마 못지않게 당대 예루살렘도 후광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감독들은 정치에 있어서는 처음부터 영향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구가 로마교구보다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고울이나 스페인 지방의 감독들이 문제가 있을 경우 자신들의 대감독들에게 문제의 자문을 구하기보다는 직접 로마 감독에게 자문을 구하였습니다. 문제가 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Damasus 감독은 다른 교구의 감독들이 자문을 구하기 위해 보내오는 편지들을 마치 황제가 지방장관들의 서신들을 다루듯이 가볍게 다루었습니다. 그의 교만함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Damasus는 자신만이 베드로의 역사를 계승한 유일한 감독이라는 주장을 하기시작했습니다. 그 근거로 마태복음16장을 붙들었던 것입니다. 문제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다는 Roma감독에게는 사법적인 권한이 동시에 부여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라고 하셨는데 지역이 조금 다른곳보다 크다고 하는 것으로 자신이 이 세상의 왕이나 된 것처럼 행세를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이것을 또 인정해주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로마 감독의 편지는 교령(decretals)의 성격을 지녔습니다. 로마교회는 모든 교구의 대표적인 성격을 띄게 되었습니다. 다른 교구에서 찬성을 한다해도 로마교회의 찬성이 없으면 헛일이었습니다. 로마교회에서 시행되는 예배모범은 다른 교구에서 자연스럽게 수용되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성지순례였습니다. 콘스탄틴 대제와 그의 모친 헬레나가 예루살렘과 베들레햄에 거대한 성전을 짓고 성지순례를 행하자 많은 사람들이 그 전례를 따랐습니다. 348년경 Egeria라는 스페인 귀족부인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팔레스틴의 성지의 명소들이 “유려한 구어체 라틴어”로 기술되었습니다. 이것은 로마의 라틴예식이 당대에 얼마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는 근거입니다. 감독 이노센트1세는 416년에 “오직 로마교회에 의하여 다른 서방지역의 교회에까지 복음이 전파되었으므로 모든 라틴계 교회들이 로마교회의 예배의식을 쫓아야만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교회에 못된 것들이 또아리를 틀었던 것입니다. Damasus외에 로마의 우월권을 확립하는데 영향을 미친 인물은 Milano의 감독 Ambrose입니다. Ambrose나 Augustine과 같은 당대의 감독들은 Africa에서 로마의 예식이 그대로 행해지고 관습화되고 있는 것에 대해 달갑지 않게 생각했지만, 그것은 하나의 관례처럼 일반화되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영향력이 모든 지역에까지 균형있게 미치지는 않았습니다. Italy 지역에서 로마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지만, 헬라어 통용지역에서 로마의 영향력은 제한적이었습니다. 대표적인 지역이 Greece와 Macedonia였습니다. 이 지역은 379년까지 서로마 제국에 속해 있었지만, 379년에 이들 행정관할권을 동로마에 인계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2년 후 381년에 헬라측이 주축이 되어 모인 Constantinople 종교회의에서는 “종교적 지역 구분은 단순히 세속정부가 구분한 경계를 따르도록 결의”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Constantinople 회의에서는 하나의 종교법(fateful cannon)을 작성했습니다. 곧 Constantinople이 새로운 로마(New-Roma)이므로 이곳의 감독은 로마감독에 버금가는 권위를 지닌다고 규정했습니다. “Constantinople의 감독은 Constantinople이 새 로마이기 때문에 로마의 감독 다음의 영예를 갖는다”고 명문화했습니다. 이런 결정은 제국에서 제2의도시라고 자처해왔던 Alexandria가 강하게 반발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회의의 결정을 필사적으로 반대한 것은 로마교회였습니다. 따라서 Roma교회 Constantinop, Alexandria가 서로 누가 크냐 다투었습니다. 로마교회의 감독 Damasus는 Constantinop회의의 결정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 결정에 대하여 강력한 이의를 제기하였습니다. 451년에 개최된 Chalcedon회의에서는 이전에 로마교회에만 부여했던 호칭인 “가장 거룩한 도시”를 Constantinop에도 부여하여 그 도시를 “가장 거룩한 도시 새 로마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명문화했습니다. 이런 와중에서 로마의 영향력을 헬라지역에 확대하기 위해 Damasus는 데살로니가 감독들을 그들의 사도적 권위의 대리인들(vicars apostolic)로 임명하여 이것을 후대에 제도화시켰습니다. 이것은 한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로마는 이 제도를 통해 동로마권에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최초의 기독교황제는 Roma의 기독교박해를 멈추게 했습니다. 그런데 콘스탄틴의 통치는 부조리한 일이 많았습니다. 곧 Roma의 주교를 크게 만들어버렸습니다. Roma교회는 박해에서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교회들과 토지를 황제로부터 선물을 받았습니다. 콘스탄틴은 바티칸 언덕에 있는 베드로의 예배실을 덮는 바실리카 양식의 교회당을 짓도록 명령했습니다. 오스티안(Ostian) 도로에 있는 바울의 예배실외에도 다른 교회당을 짓게 했습니다. 또한 황후 파우스타(Fausta)의 라테란 궁전은 로마주교의 관저로 주었습니다. 이런 일들이 계속 있다가 보니 자연히 자신들이 하나님인양 거들먹거리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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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왜곡(로마서 9: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경제에 대한 이해는 매우 중요합니다. 비단 먹고사는 일 때문만은 아닙니다. 경제가 중요한 이유는 경제가 역사를 움직이는 토대가 되고 정치와 사회를 이해하는 근간이 되어서 중요합니다. 현실 세계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분야로서의 경제는 시장의 지유를 추구하는 입장과 정부의 개입을 추구하는 입장의 경제가 있습니다. 시장의 자유는 세금을 인하합니다. 그리고 경제 활성화를 위하여 규제를 완화하는 데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정부의 역할은 축소됩니다. 아울러 복지도 줄어듭니다. 반면 경제에 정부의 개입이 강조하면 세금이 인상되고 규제가 강화되며 이에 따라 복지가 향상됩니다. 정상적인 사람들이 편향되지 않게 배분을 한다면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반드시 이해득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정말 꼭 버려야 할 學緣(학연), 地緣(지연), 血緣(혈연) 등이 엄청나게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어떤 돌파구를 찾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크다(great), 많다(great), 높다(high) 등에 휘둘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생각들이 敎皇制度교황제도를 발달시켰습니다.
3세기의 교회성장은 도시와 큰 읍에서 주교의 책임을 아주 증대시켰습니다. 한 도시에 한 사람 이상의 주교를 가짐으로써 교회를 나눈다는 생각은 서방에서 결코 하지 못했습니다. 대신 주교를 보좌하는 많은 사제들만 늘어났습니다. 4세기에 이러한 성직들은 공식적인 교회성직제도가 되었습니다. 야심 있는 Roma의 귀족에 의해 주장된 직분의 승계와 같았습니다. 이로써 도시의 모든 교회는 주교의 직접적인 목회적 관심의 대상이었습니다. Roma에서는 주교가 모든 세례식을 집례 했습니다. 이로 인해 주교의 영향이 막대해졌습니다. 수입도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당연히 Roma교회는 엄청나게 외적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리하여 Roma교회 주교의 권위가 하늘을 찌르는 듯 했습니다. 이론상으로는 모든 주교들은 동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초기부터 도시의 중요성 때문에 어떤 주교들은 다른 주교보다 자신이 탁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생각을 했던 교회들이 Alexandria교회, Antioch교회, Roma교회, Carthage교회, Constantinople이었습니다. 특히 Roma의 주교는 위치가 다른 곳과는 다르다고 생각하여 382년에 Damasus(304?-384/대립 교황 우루시누스(Ursinus, ?~385)와 다투어 그 지위 유지에 진력하고, 또 국가권력과 결탁하여 로마교회를 성장시킴) 지도아래 개최된 Roma공의회는 Roma의 탁월성이 어떤 역사적 사건이나 어떤 종교회의의 법령에 의존하지 않는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래서 이미 순교한 사도 베드로를, 베드로의 의견도 묻지 않고, 하나님의 뜻도 묻지 않고, 중세교회에 있어서 Roma주교의 우월성을 위한 기초공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Richard A. Todd).
여러 교구 중에서 로마감독의 우월성이 주장된 것이 3세기에 들어서이지만 로마교회의 우월성에 대한 기록은 훨씬 이전부터 발견할 수 있습니다. 로마 교회의 우월성이 처음 알려진 것은 AD 95년에 기록된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의 편지입니다. 로마교회는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신을 보낸 것입니다. 이 서신에서 로마교회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직접적인 언급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로마교회가 고린도교회 문제해결에 대해 일종의 책임을 느끼기는 했다는 것입니다. 로마교회 우월성에 대한 주장은 20년 후 이그나티우스(Ignatius)의 편지에도 나타납니다. 그리고 114년경에 기록된 헐마스의 목자에도 나타납니다. 그 후 2세기 말엽에 이르러서는 이레니우스가 로마교회를 가리켜 “가장 위대한 우주적으로 알려진 교회”라고 칭할 만큼 로마교회가 부상하였습니다. 로마교회가 이처럼 부상한 이유는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교회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베드로와 바울이 순교하고 그들의 무덤이 있는 곳이고, 로마제국의 중심지이며, 교리의 diamond라고 할 수 있는 로마서의 수신자이고, 정통주의를 변호하는 일에 있어서 뛰어난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점점 로마교회는 변해갔습니다. “우리가 크다, 우리가 위대하다, 우리가 중심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점점 성경을 왜곡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우리교회가 제일이라고 자랑하는 교회는 조심해야 합니다. 교황으로 가고 있을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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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 미래에 적응할 인간을 교육하기 위해서는 이상적인 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스스로 자각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 것이 좋다. 마치 교육자들은 자기가 살고 있기를 바라는 그 같은 시대의 인간을 교육하는 심정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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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우가 치는 밤, 가난한 어부 자니는 오막살이 집안 화덕 가에 앉아 넝마 조각으로 낡아빠진 돛을 깁고 있었다. 강한 바람에 비가 유리창을 갈기고, 파도가 바닷가를 치며 부서지는 소리가 요란스러웠다. 밖의 소리가 쉴새 없이 자니의 귀를 올리고 있지만 가난한 어부의 오막살이 방은 포근하고 아늑했다. 방바 닥은 흙바닥 그대로 되어 있기는 하나 깨끗하게 쓸려 있고, 화덕에는 마른 나뭇가지가 빠짝빠짝 소리를 내면서 타고, 찬장에는 깨끗하게 닦은 접시들이 가지런히 얹혀 있고 방구석 한쪽에는 하얀 보료를 깐 낡은 침대가 놓여 있었다. 침대에는 아무도 없었으나 방바닥에 깐 요 위에는 어린것들 다섯이 시끄러운 파도 소리 속에서도 곤히 자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지금 바다에 나가고 없었다. 이렇듯 어둡고 추운 날씨에도 사나운 밤바다로 고기를 잡으러 나간 것이다. 이런 날 일 나가는 것은 매우 무서운 일이지만, 그러나 달리 살아갈 뾰족한 수가 없었고, 남편으로서 집안 식구들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자니는 파도 소리와 사나운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따금 애끊는 갈매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비는 줄기차게 퍼붓고 있었다. 자니는 괴로웠다. 그녀의 눈에는 난파선의 처절한 장면이 그림처럼 떠올랐다. 배는 바위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나고 사람들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 같았다. 아! 무서워!
낡은 괘종시계의 지친 듯한 소리가 똑딱똑딱 밤을 저미고 있다. 똑딱…. 그래도 어린것들은 곤히 자고 있다.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남편은 몸을 돌보지 않고 추위와 폭풍우를 무릅쓰고 바다에 나가 언제 다가올지도 모를 위험과 싸우고 있는 중이다. 그녀는 아침부터 밤까지 방에 틀어박혀 쉴새 없이 일해야 했다. 이렇게 힘들여 일해야만 살아 갈 수 있다니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어린 자식들은 여름 겨울 할 것 없이 맨발로 살아야 하고, 밀빵 같은 건 아예 엄두도 못 낸다. 귀리밥이 입에 들어가는 것만도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이따금 생선은 먹는다. 아무튼 어린 것들이 탈 없이 튼튼히 자라주는 것만도 하나님의 고마운 은총이다.
어쩌면 바다가 저렇게 사나운 소리를 내고 있을까! 그이는 지금 어떻게 하고 계실까? 하나님, 은혜의 손길로 그이를 보호해 주옵소서.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아직 잠자리에 들기에는 일렀다. 자니는 일어나 두툼한 외투를 걸치고 간데라 불을 켜 들고 밖으로 나섰다. 남편이 지금쯤 돌아오는 것은 아닌지, 바다는 좀 잠잠해지지나 않는지, 등대 불은 제대로 켜져 있는지 모두가 궁금하고 초조해서였다.
밖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가랑비가 오는가 했더니 억수처럼 퍼붓는 장맛비였다.
동네 어귀 바닷가에는 낡아서 반쯤 무너진 오두막집이 하나 있었다. 벽은 썩어서 시커멓고 낡은 문짝이 떨어질 듯 매달려 있었다. 바람이 몰아칠 때마다 문짝이 흔들리며 삐그덕거리며 소리를 냈다. 바람은 마치 그 초라한 오두막집을 날려 버리기라도 할 듯 몰아치고 있었다. 문짝은 가엾게도 부서지는 소리를
내고 지붕 위의 썩은 지푸라기는 구원이나 청하듯 바스락거렸다. 자니는 오두막집 문 앞에 걸음을 멈추고 찌그러진 창문으로 들여다보았다. 집안은 캄캄했다.
그 가엾은 환자를 돌봐줄 걸 깜박 잊었구나! 밤이 되면 더 나빠진다고 바깥양반이 말씀하셨지. 정말 저 이는 외로운 분이야. 아무도 돌봐 줄 사람이 없으니 하고 자니는 생각했다. 그래서 들여다본 것인데 인기척이 전혀 없었다. 그녀는 문 앞에 선 채 생각에 잠겼다.
‘가엾어라! 자기 손으로 어린것들을 돌봐야 할 처지에 병이 들다니! 무슨 팔자가 그럴 수 있을까! 둘째 아이를 뱃속에 가진 채 과부가 됐으니 딱하기 그지없는 일이야. 제 몸 하나에 자식들의 목숨이 달려 있는데 병이 들다니! 무슨 팔자가 그런가!’
그녀는 몇 번 노크해 보았다.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이봐요, 별일 없어요?”하고 자니는 소리쳐 보았다.
“그럼 좋아요. 주무시거든 그냥 계셔요.”
바람은 멋질 않았다. 자니는 추위와 비에 젖어 와들와들 떨렸다. 집으로 돌아가려고 발길을 돌리는 순간 외투를 날려 버릴듯한 강한 바람이 몰아쳤다. 그 바람에 그녀는 중심을 잃고 문에 부딪쳤다. 그로 인해 문짝이 활짝 열려 버렸다. 얼결에 자니는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든 간데라 불이 캄캄한 집안을 비쳐 주었다. 집안이라지만 바깥이나 다름없이 축축하게 젖은 채 침침하고 추웠다. 오랫동안 불을 때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천장 이 구석 저 구석에서 마치 키질하듯 빗물이 새어내리고 있었다. 문을 등지고 벽가에 지저분한 지푸라기를 쌓아 놓은 위에 과부의 사체가 놓여 있었다. 머리는 뒤로 내던져지고 싸늘하고 푸릇푸릇한 얼굴은 입을 벌렁 벌린 채 오뇌와 절망의 표정이 얼어붙은 채로였다. 무엇인가 휘어잡으려는 듯이 내뻗은 푸르스레한 손은 맥없이 지푸라기 침대 위에서 아래로 내려뜨리고 있었다. 어미의 시체 발치 쪽에 덜렁 요람 속에 어린애가 둘이 있었다. 핼쑥한 얼굴이기는 했으나 곱슬머리에 예쁜 뺨을 한 어린것들이 상을 찡그리고 금발머리를 서로 비벼대며 고요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죽음이 다가오는 줄도, 폭풍우의 아우성도 모르는 듯. 어미는 죽어 가면서도 어린것들의 발을 큼직한 누더기 조각으로 감싸주고 자기의 옷을 어린것들에게 덮어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한 아기는 오동통한 작은 손으로 뺨을 고이고 있었다. 다른 쪽 한 아기는 형의 목에 귀여운 얼굴을 맞대고 있었다. 아기들의 숨소리는 조용하고 순조로웠다. 그 무엇도 그들의 잠을 깨우지 못하리만큼 깊고 편안한 잠을 자고 있었다. 폭풍우는 점점 더 거세어지고 있었다. 천장에서 새어 내린 빗물이 죽은 어미의 이마 위에 떨어져 뺨으로 흘렀다. 수심에 일그러진 그녀의 얼굴 위의 눈물과도 같이.
자니는 줄달음질쳐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외투 자락 속에 무엇인가 감춰 가지고 왔다. 그녀의 가슴은 몹시 뛰었다. 그녀는 누가 뒤를 쫓아오는 것만 같아 돌아볼 겨를도 없었다. 죽은 사람 집에서 무엇을 훔쳐온 것일까?
자니는 가지고 온 물건을 침대 위에 놓고 얼른 보료로 덮었다. 그리고 의자를 가져다 침대 곁에 놓고 주저앉아 침대 끝에 이마를 대고 엎드렸다. 그녀는 새파랗게 질린 채 흥분해 있었다. 양심의 가책을 받아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이따금 비명 같은 고함을 질렀다.
‘그이가 뭐라고 하든 난 몰라! 내가 무슨 짓을 했담! 아이들의 뒤치닥거리에 지쳤어…. 나는 바보야, 아아 돌아오셨나요? 아니, 아니야…. 차라리 나를 실컷 때려 주기나 했으면 좋겠어. 난 매 맞을 짓을 했어…. 아아, 그이가! 아아, 좋아, 차라리 내가!’
문소리가 났다. 누가 온 것 같았다. 자니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일어섰다.
‘이번도 아니잖아! 하나님, 어쩌면 제가 이런 짓을 했을까요? 이런 짓을 하고 어찌 그이를 바로 볼 수 있어요!’
자니는 또 생각에 잠겨 오랫동안 침대 곁에 앉아 있었다. 먼동이 트기 시작했다. 바람은 여전히 사납게 울부짖고 바다도 역시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홀연히 문이 열렸다. 동시에 방안으로 축축하고도 신선한 공기가 한 줄기 흘러들었다. 키가 헌칠하게 크고 햇볕에 타 거무스레한 어부가 젖고 찢어진 그물을 질질 끌고 오막살이 안으로 들어왔다. “자니, 나 왔소.” “오. 이제 오셨군요.” 자니는 대답은 했으나 일어선 채 고개를 들지 못했다.
“참 사나운 밤이었어, 지독한 날씨야.”
“참 그래요. 무서운 날씨였어요. 그래 많이 잡았어요?”
“망했어, 아주 망했어! 고기 꼬리도 걸리지 않아, 그물만 찢기고 왔지. 아주 멍들었어! 참 지독한 폭풍우였어! 간밤 같은 폭풍은 지금까지 만나 본 적이 없는 걸, 악마같이 울부짖으면서 배를 공기놀이하듯 들까불러댔어…. 밧줄이 끊어져 배와 함께 바다 속으로 묻히는 줄 알았지. 그래도 요행히 살아서 돌아온 거야.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지냈소?”
남편은 그물을 방안까지 끌고 들어와 난로 옆에 앉았다.
“저요?” 자니는 새파랗게 질려서 되물었다. “전 앉아서, 여기 앉아서 뜨개질하고 있었어요…. 바람 소리가 어찌나 심한지 혼자 있기가 무서웠어요. 밤새도록 당신 걱정만 했어요….”
“그랬을 거야. 정말 지독한 바람이었거든. 그런데 어떡하지?”
남편은 중얼거리다 말끝을 흐렸다. 내외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이윽고 자니는 떨면서 무슨 죄나 저지른 사람처럼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여보, 시몬 아줌마가 죽었어요. 언제 죽었는지는 몰라도, 아마 엊저녁 당신이 그의 집에 다녀온 뒬 거예요. 죽을 때 괴로웠을 거예요. 어린것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막히고 숨이 막힐 것 같아요. 젖먹이를 둘이나 남겨 놓고 죽었으니, 아랫놈은 아직 말도 못하고 윗놈은 이제 겨우 기기 시작했어요…”
자니는 입을 다물었다. 남편은 눈을 끔뻑거렸다. 선량하고 정직한 그의 얼굴은 엄숙하고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참 안 됐어. 딱한 노릇이야.” 그는 참다못해 목덜미를 빡빡 긁으면서 말했다.
“어쩐담? 우선 어린 것들을 데려와야지. 잠이 깨면 어미를 찾을 텐데, 어떻게든 해야지! 빨리 가서 데려오구려!”
그러나 자니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
“왜, 싫은가? 어린것들을 데려오는 게 마음에 걸린단 말이지, 자니 뭣하고 있는 거야? 어서….”
자니는 일어섰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남편을 침대 옆으로 끌고 가 보료를 치켜들었다. 거기에는 죽은 홀어미의 두 어린 아기들이 평화 스런 꿈을 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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