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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설(假說, Hypothesis) 진실이라고 주장되는 것으로서, 경험적 검토에 의해 확증되거나 틀렸다고 증명되기 전까지 진실일 수도 있다고 보이는 이론, 과학적 방법에 속하는 한 요소.
▮ 개념(槪念, Concept) 철학에서 '개념'은 생각, 관념, 생각의 형식 또는 한 용어의 의미 등을 지칭한다. 예로 탁자에 대한 개념을 갖는 것은 탁자를 다른 모든 것들과 구분할 수 있다, 그리고 탁자에 대해 사고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 견유주의(犬儒主義, Cynicism) 고대 Greece철학의 한 분파로서, 덕을 유일 선으로 간주했고 덕을 획득하는 유일한 방식은 자기 통제라고 주장했다. 견유주의는 인간의 쾌락에 대하여 완전하게 무관심을 보였을 뿐 아니라, 또한 인간 감정에 대한 경멸을 표현했고, 대부분의 인간들에게 있어 덕의 결핍을 비판했다. Diogenes디오게네스(주전412?-주전323)가 가장 잘 알려진 견유주의자이다.
▮ 결정론(決定論, Determinism) 무엇이든 일어난 것은 일어나야만 한다는 관점으로서, 모든 사건은 선행하는 원인들의 불가피하고 필연적인 귀결이며, 그 원인들 또한 그에 선행하는 원인들의 필연적인 결과이므로, 인과의 연쇄는 신 혹은 자연법칙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과학에서는, 완전히 기계론적인 관점이 결정론적이다. 고대 세계에서,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운명예정론에서, 운명의 관념은 철저하게 결정론적이다.
▮ 경험주의(經驗主義, Empiricism) 감각경험이 타당한 지식의 유일한 기반이라는 관점, 경험주의자는 경험에 무관하게 진리성을 주장하는 어떠한 진술이라도 의심한다.
▮ 공리주의(功利主義, Utiltarianism) Jeremy Bentham벤담(1748-1832.영국)에 의해 구상되고, John Stuart Mill밀(1806-1873.영국)에 의해 정교화된 윤리 이론으로서, 행복으로 이끌어지는 행동들에 기반한 도덕성을 주장했다. 이런 이론적 틀 안에서, 불행으로 이끄는 행동은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이에 뒤따르는 것은, 사회가 최대 다수의 행복을 목적해야 한다는 관점이다.
▮ 과학주의(科學主義, Scienticism) 자연과학에 사용되는 탐구 방법들이 모든 연구 분야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이론.
▮ 관념론(觀念論. Idealism) 경험 세계가 인간 정신에 대하여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그러므로 세계에 대한 우리의 개념화에 따라서만 그것이 알려질 수 있다는 철학적 관점. 유물론의 반대.
▮ 구조주의(構造主義, Structuralism) 20세기의 철학 운동으로서 인류학, 언어학, 문학 비평에서 큰 영향을 끼쳤다. Ferdinand de Saussure(1857-1913.스위스)페르디낭 드 소쉬르(프랑스어: )의 언어학에서의 작업을 뒤를 따라서, 구조주의자들은 대상들이 독립적인 실체들로서가 아니라 관계들의 체계로서 탐구되어야 한다는 관점을 지지했다.
▮ 귀납(歸納. Induction) 연역(이미 알고 있는 판단을 근거로 새로운 판단을 유도하는 추론)의 반대로서, 귀납은 개별적인 사례들로부터 일반적 원리로 이동한다. 연역과는 달리, 귀납은 필연적으로 진실인 결론들로 이끌어지지는 않는다.
▮ 기호학(記學, Semiotics, sign) 기호들과 상징들에 관한 연구로 예로 무언가에 대한 표시나 표지를 가리키는 것으로 언어와 관련된, “기호”에 대한 분석, 거리의 표지가 공원으로 가는 길을 알려 줄 수 있는 것과 같이, 단어도 사물이나 생각을 가리키거나 표지가 되는 기능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기호로 특정한 실재를 가리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글)은 화자(저자)의 생각을 담은 기호로 이해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상징의 측면에서 기호에 대해 “글로 쓰인 말은 발화된 말의 상징이며, 발화된 말은 정신적 경험의 상징이다”. 발전된 기호학은 Augustinus아우구스티누스(354-430년)가 그리스도교 교양에서 기호에 대해 논의하면서 더 나아가 기호학과 기호개념은 언어와 해석의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성례전의 본질과 관련하여 신학 담론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 논리 실증주의(論理實證主義, Logical Positivism)) 철학이 관찰과 시험에 기반해야만 하며, 명제들은 단지 그것들이 경험적으로 입증될 수 있는 한에서만 의미를 갖는다는 관점. 어떤 유형의 형이상학적 사변에도 대립된다.
▮ 논리적 타당성(論理的妥當性, Validity) 논증의 속성. 한 논증은 그것의 결론이 전제들의 필연적인 귀결이라면 타당성을 갖는데, 심지어 거짓된 전제로부터 도출된 거짓된 결론이라고 할지라도 그러하다. 다른 말로 하자면, 한 논증은 그것의 결론이 거짓일지라도 논리적으로 타당할 수 있다.
▮ 논리학(論理學, Logic) 합리적 논증의 성질을 검토하는 철학의 한 분야, 추론의 원칙들, 명제들의 구조, 연역 추론의 방법들과 타당성 등을 다룬다.
▮ 도구주의(道具主義, Instrumentalism) 실용주의 이론으로서, 과학 이론들과 같은 관념들은 행동을 안내하기 위해 기능하는 도구들이며, 현실 세계의 문제들을 다루기 위해 사용된다고 주장한다. 그렇듯이, 관념들은 실재에 대한 진실한 설명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타당성과 가치는 우리가 행동하고, 문제를 해결하고, 결과들을 예측함에 있어서 성공에 의해 결정된다.
▮ 동어반복(同語反覆, Tautology) 필연적으로 진실인 진술, “빨강은 빨갛다.”와 같은 것. 어떤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수사적으로 표현한 것. ]
▮ 목적론(日的論, Teleology) 최종 목적들에 대한 연구, 생명과 우주에 목적이 존재한다는 관점이며, 그러므로 또 한 모든 발달을 목적 지향적이고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드는 어떤 종류의 청사진이나 전반적인 설계가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 무신론(無神論, Atheism)
신의 존재에 대한 절대적인 불신과 거부.
▮ 미학(美學, Aestheties)
미의 본질과 표현을 다루는 철학의 한 분야, 또는 칸트 철학에서 감각 법칙들과 관련 되는 형이상학의 한 분야.
▮ 방법론(方法論, Methodology)
특정한 지식의 분야에서 사용되는 원칙들, 관습들과 절차들의 체계, 예를 들면, 역사적이고,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방법론들이 수렴할 수 있지만, 그것들은 서로 대단히 다르다.
▮ 범신론(汎神論, Pantheism. antheism) 신 또는 신들을 자연의 힘들 및 작용들과 동일시하는 신조. 하나님과 세계가 동일하다는 믿음. 서구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범신론의 옹호자는 바뤼흐 스피노자이다. 그는 하나님과 자연이 동일한 실재의 두 이름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실재는 사유와 물질적 연장extension이라는 두 가지 속성을 지닌다. 범신론은 아드바이타 베단타 힌두교의 절대적 일원론(엄밀하게는 절대적 불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을 묘사하는 데에도 사용된다. 아드바이타 베단타는 실재 전체가 하나의 절대자, 즉 신과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대상들 사이에서 짓는 우리의 구분이 그저 현상적인 부분이라고 주장한다.
▮ 범재신론(汎在神論, Panentheism) 우주 전체가 하나님 안에 포함되어 있으나, 하나님이 우주에 국한되지 않는 견해, 유신론에서와 같이 세계와 하나님이 다른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범신론에서처럼 하나님과 세계가 동일한 것도 아니다. 범재신론자들은 간혹 우주를 하나님의 몸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범재신론자들은 인간이 자신의 물질적 몸을 초월하는 것과 거의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자신의 몸을 초월한다고 말한다. 범재신론은 과정 신학 안에서 공통된 입장이다.
▮ 범주(範疇, Category) 철학에서, 범주들은 사물들이 분류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집단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범주는 환원 불가능하고 근본적인 개념으로서 다른 개념들이나 사물들에 적용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칸트는 각자 범주들의 완전한 목록을 작성하고자 시도했는데, 실체, 관계, 장소, 시간, 열정, 행동 등등을 포함하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10 범주는 유명하다. 그 10개는 실체, 관계, 양, 질, 장소, 시간, 상태, 위치, 능동, 수동이다. 또 다른 유명한 범주적 구분으로는 르네 데카르트의 것이 있다. 그는 실체를 두 종류의 근본적인 종류로 구분하였는데, 바로 정신적 실체와 물리적 실체이다. 범주에 관한 임마누엘 칸트의 주장도 유명하다. 즉, 오성(지성)의 기본 범주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그 자체로) 알 수 없고, 단지 우리가 가진 기본적인 개념들로 구성해낸 세계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의 견해는 반실재론으로 총칭되는 다양한 관점에 영감을 미쳐 왔다.
▮ 변증법(辨證法, Dialectic) 원래 소크라테스의 방법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그리스어로서, 그에 따르면 논증과 추론은 대화의 형식을 취했다. 헤겔과 마르크스에게는, 변증법이란 해석의 방법으로서, 명제(命題)와 그것의 반명제(反命題) 사이의 모순이, 대립하는 입장 각각의 요소들을 포함하는 합명제(合命題)로 해소된다.
▮ 보편성(普遍性, Universal) 특정한 부류의 각 개체에게 귀속되는 속성, 또는 한 집단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일반적 개념, 예를 들면, 모든 차가운 것들은 “차가움”을 예시하기 때문에, “차가움”은 모든 차가운 것들의 보편적 성질이다. 중세에는, “차가움”이 그 자체로 존재한다고 믿었던 철학자들은 “실재론자”라고 불렸고, 그런 속성들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던 이들은 “유명론자”라고 불렸다.
▮ 본질(本質, Essence) 무언가를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이게끔 하는 근본적인 속성들이 그것의 본질을 구성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개의 본질은 그것이 고양이나 말이 아니라 개이도록 하는 것이다. 사물 안에 본질 또는 본성이 실재한다는 형이상학점 관점.
▮ 분석철학(分析哲學, Analytic philosophy) John Locke/1632.8.29.-1704.10.21. 영국/로크)와 David Hume(1711.4.26.-1776.8.25.스코틀랜드 흄)의 경험주의를 따르는 철학적 방법으로서, 논리를 강조하고, 언어에 주의를 기울이며, 논증의 단순성을 강조하고, 개념들, 이론들, 생각들과 방법들을 명확히 하는 것을 추구한다. 20세기의 미국과 영국 철학자들이, 대륙 철학의 형이상학적 사변과 체계 건축을 추구하는 대신 이런 접근을 택했다.
▮ 불가지론(不可知論, Agnosticism) 신의 개념이 영혼, 불멸, 제1원인의 개념들과 마찬가지로, 자연 현상의 세계만을 알 수 있는 인간 정신이 도달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 존재하기 때문에, 신의 존재에 대해서 어떤 증명도 될 수 없다는 믿음.
▮ 불가지론자(Agnosite) 신의 존재는 증명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신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거부하지 않는 사람.
▮ 선험적(先驗的, A priori) 경험에 앞서 진위여부가 알려지는 것. 그것의 반대말은 후험적(A posteriori)인데, 이것은 경험에서 도출된 지식이라는 의미이다.
▮ 스콜라주의(Scholasticism) 12-14세기 중세 유럽의 신학적인, 그리고 철학적인 방법들과 체계들. 그리스도교 사상을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Ἀριστοτέλης,주전384년 –322년/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로, 플라톤의 제자이며,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 화해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성서와 교회 교부들의 가르침이 그리스 철학과 종합을 이룬 중세의 철학 및 신학 전통. 주요 인물로는 ‘안셀무스, 토마스 아퀴나스, 요하네스 둔스 스코투스, 오컴의 윌리엄’ 등이 있다. 종교개혁 이후의 시기에는 개신교 스콜라주의로 알려진 다수의 신학자들이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중세 스콜라 철학과 유사한 방식으로 루터교와 칼뱅주의 사상을 종합하려 했다.
▮ 스토아주의(Stoicism) 대략 주전308년에 제논에 의해 창시된 그리스 철학 학파, 스토아주의자들은 행복이 우주의 법칙을 받아들이는 것에 달려 있다고 믿었으며 좋고 나쁜 운명 앞에서 동일하게 평정을 유지할 것을 권했다. 그들은 인간들이 열정에서 해방되어 조용히 모든 사건을 신적인 의지의 결과로 받아들일 때 가장 행복하다고 주장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그레코로만) 세계에서 인간의 감정 통제를 강조한 영향력 있는 철학, 스토아 철학은 키프로스의 제논Zenon ho Kitieus, 주전334-262(제논의 역설로 유명한 엘레아의 제논 Zenon ho Eleates. 주전490-430과 다른 인물임)이 창시하였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발전하였는데, 보통 초기 스토아 철학, 중기 스토아 철학, 로마의 스토아 철학의 세 시기로 구분한다. 스토아 철학에 관한 저술 중 남아 있는 것은 대부분 마지막 시기의 것이며, 노예였던 Epletetos에픽테토스552-135와 황제였던 Marcus Aurelius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121-180가 그 시기의 가장 유명한 스토아 철학자이다. 스토아 철학은 우주가 이성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무슨 일이든 다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라는 확신으로 특징지어진다. 참된 미덕에는 외부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한 수용이 요구된다. 덕 있는 사람은 우주를 형성하는 이성에 따라 살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욕망하기도 하며 두려워하기도 하는 외부의 선과 악에 개의치 않음으로써 만족을 얻는 사람이다.
▮ 시간(時間 time) 세계에서 일어나는 연속적인 사건들이 서로에 대해서 갖는 관계, ‘전과 후’와 같은 어떤 관념을 사용하지 않은 채로 이 관계의 본성을 서술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이는 ‘아무도 내게 시간의 정의를 묻지 않는다면 나는 시간이 무엇인지 안다.’는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11.13-430.8.28)의 유명한 언급을 확증하는 것이다. 철학자들 사이에서는 ‘시제’tense와 ‘변화’(생성; 되어감] becoming의 실재에 대한 의견이 강하게 엇갈린다. 시간은 우리에게 일련의 ‘현재들’로 경험된다. ‘현재들’은 금세 과거가 되며 우리는 미래의 ‘현재들’을 기대한다. 그러나 많은 철학자는 시간상의 사건들이란 그저 순서를 갖는 사건일 뿐이며(‘B계열’B series), ‘변화’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은 오직 현상뿐이라고 주장한다. 신학자들은 하나님과 시간의 관계에 대해 서로 의견을 달리해 왔다. 다수를 차지하는 전통적인 신학자들은 하나님이 무시간적으로 존재하신다는 의미에서 영원하다고 주장한다.
▮ 식민주의(植民主義colonialism), 온정주의(溫情主義paternalism), 제국주의(帝國主義imperialism), 서양이 우월하다는 태도가 스며들어 있다고 보일 때, 다문화주의자들이 학술 작업에서 사용하는 비판적인 용어. 이런 비난을 받는 관점들은 종종 남성적 영역과도 관련이 있다.
▮ 신국론(神國論)City of God(Against the Pagans) 라 De civitate Dei (contra paganos) .하나님의 도성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가 쓴 고전 작품으로, 413-426년 사이에 썼으며, 인간의 역사를 자기애 위에 세워진 세속 왕국과 하나님의 은혜 위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공동체 Society 사이의 투쟁으로 해석한다.
▮ 신명령이론(神命令理論; divine command theories ) 행동이 옳거나 틀린 이유 중 적어도 하나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 혹은 금지하신 것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윤리학 이론, 철학자들은 신 명령 이론을 거부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 이론이 윤리적 의무를 임의적으로 만든다고 하여 거부하거나, 도덕적 자율과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하여 거부한다(에우튀프론 딜레마). 그러나 로버트 아담스Robert Merrihew Adams,1937-나 필립 퀸 Phillp L. Quinn. 1940-2004과 같은 철학자들은 이러한 비판에 맞서 신 명령 이론을 설득력 있게 옹호하여 왔다.
▮ 신학(新學; Theology) 하나님과 종교적 진리의 본성에 관한 연구, 철학이 신의 존재를 가정하지 않음에도 불 하고, 그것의 논증들과 방법들은 수 세기 동안 자연 신학과 계시 신학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따라서 신학은 체계적으로 정리된 하나님에 대한 연구 및 하나님과 그 피조물의 관계에 대한 연구이다, 신학에는 여러 다양한 유형이 있다. 철학적 신학은 어떤 특정한 계시나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권위를 상정하지 않은 채, 하나님에 대해 알려질 수 있는 것을 파악하려는 시도이다. 성서 신학은 성서 본문에 대한 연구로부터 신학을 발전시키는 시도로, 신약 신학, 바울신학, 마가 신학 등등의 더 구체적인 형태로 행해진다. 조직신학은 성서 신학과 철학적 신학 모두를 이용하여 하나님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에 대해 포괄적인 설명을 발전시킨다. 교의 신학은 교회의 가르침(또는 교의) 또는 어떤 특정 개교회의 가르침에 입각하여 신학을 하는 시도이다.
▮ 실용주의(實用主義 pragmatism) 생각과 믿음을 행동에 미칠 영향과 관련하여 보는 철학적 운동, 의미에 관한 실용주의 이론은 진리에 관한 실용주의 이론과 구별되어야 한다. 실용주의 진리론은 진리를 실재에 대응하는 것으로 보는 “진리 대응론을 거부하는 것이다. 실용주의는 미국에서 찰스 샌더스 퍼스, 윌리엄 제임스, 존 듀이에 의해 개발되었다. 실용주의는 경험론의 한 형태지만, 경험을 감각들로 구성된 것으로 보기보다는 자아와 환경 사이의 역동적인 상호 작용의 한 형태로 본다. 최근에 실용주의는 리처드 로티에 의해서 포스트모던적 방식으로 해석되고 다시 살아나고 있다.
분노에 휩쓸리지 않기 위한 좋은 방법은 마치 폭군에 대하여 취해야 할 태도와 매우 같다. 분노를 앞에 두고 자신의 얼굴을 스스로 때리는 방법이다. 그러 면 냉정해지고 거친 행동이나 고함을 질러 정렬을 부채질하는 일은 자제될 것이다. 거친 행동이나 고함은 더욱 고통을 크게 할 뿐이다. 정열이든 사랑이든 질투는 공포는 그 어느 하나도 모든 절대적인 가치를 훼손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분노는 모든 것에 도전하여 적, 친구, 어린이, 어른, 신, 짐승, 물질 등 모든 것을 가리지 않고 덮쳐 평화를 유린한다. 나는 옳고 그름에 상관없이 분노를 고치기 위하여 스파르타 파들이 노예의 만취한 추태를 연구하듯이 타인이 분노한 행동을 연구했다. 무엇보다 첫째로 어떠한 병에서도 볼 수 없는 가장 무서운 조짐을 히포크레스에게서 보았던 것을 기억한다. 나는 사람들이 분노 때문에 아주 미칠 듯이 분별력을 잃고 말투, 얼굴빛, 걸음걸이, 목소리 할 것 없이 모두 바꾸어져 버리는 것을 보고 그것이 분노라는 정염의 열기로, 또는 형상으로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아주 정 떨어지는 기분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만약 나의 친구나 아내나 딸들이 별안간 내가 이토록 무섭고 사나운 꼴이 되어 난폭하고 사악한 눈초리로 노려볼 뿐만 아니라 분노의 목쉰 소리로 꽥꽥 고함 지르는 꼴을 본다면 어떻게 생각할까?’하고. 사나운 바람이 바다의 해초를 송두리째 뽑아버리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바다에서와 같이 마음속에 폭풍우가 생겼을 때 분노는 상스럽고 험상궂고 사악한 말을 뱉어 버리게 한다. 인간의 입이란 그런 말로 가득 차 있고 더럽혀져 있는 상태로 어느 때라도 내뱉을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나 분노가 닥쳐왔을 때 주의 깊게 반성하면 분노가 도대체 어떤 것인지 잘 이해하게 하고, 결코 그런 감정으로 끌려가지 않고 도리어 그 같은 감정의 파산적인 성격을 똑똑하게 깨닫게 된다. 무엇보다 먼저 이 자아반성은 분노가 결코 고상한 것도 남성적인 것도 아니고 분노 속에는 결코 지양된 감정도 위대한 감정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한다. 그러나 무지한 사람들은 그런 것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광태를 적극성으로 공감을 용기로, 불순을 힘으로, 잔인을 힘의 기호로, 경박을 견고함으로, 심술을 악에 대한 혐오라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사실상 분노하는 사람의 행동은 모두 그 사람의 약함과 어리석음을 표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컨대 그 삶이 격분해서 아이들을 때리거나 아내에게 행패를 부리는 경우뿐만 아니라 개나 말을 차고 때리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심하게 매질하면 몸이 붓는 것과 같이 약한 마음이 상처를 받으면 점점 더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강한 분노를 느끼게 된다. 여자는 남자보다 노하기 쉽고, 병든 사람이 건강한 사람보다 노하기 쉬운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와같이 분노는 강한 마음의 표현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약한 마음의 표현인 것이다. 약한 마음은 몸부림치면서 고집을 잊어버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구정물을 내뿜는 폭풍우의 바다와 같이 자신을 암흑으로 더럽힌다.
Seneca
하나님의 절대주권이지 사람이 아니다(로마서 9:14-18)
사람들이 舊敎 新敎라고 부르는데 구교와 신교라고 부르는 것이 맞을까? 대답은 아닙니다. 소위 구교는 Roman-Catholic, 신교는 그리스도교라고 말하는데 그 근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말은 만들어진 말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Roman-Catholic을 구교라고 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신교라고 불러야 할 근거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근거 없는 말들이 굳어져서 신교(?) 구교?)라 말하니 어이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복음22:26을 보면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찌니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교회에서는 누가 낮고 누가 높다는 말을 써서는 안 됩니다. 그 이유는 모두 평등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목사가 제일 높고, 다음으로 장로, 안수집사… 순으로 순위를 부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도 현 체제 역시 그렇다고 생각하니까 어이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섬기는 자로서 너희 가운데 있느니라”고 말씀하신 말씀은 주님을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 얼마나 실천하기 어려운 교훈입니까? 주님께서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드시기 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심으로 이러한 교훈에 대한 가장 소박하고 인상적인 적용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모범과 교훈과는 반대로 교만과 이기적인 정신 그리고 첫째가 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교회 안에서 어떻게 싹텄습니까? 교회의 많은 직분 자들이 “큰 자”로서 대접받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교황의 직분이 생겨났습니다. 교황은 교회의 지도자 중의 지도자로서 교회 안에서 최고의「교부」(敎父)라는 것입니다. “교황”(pope)이라는 말은 아버지를 뜻하는 라틴어『파파」(papa)의 변형된 형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할 것은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교회에는 오직 두 개의 恒存(항존)직분이 있는데, 그것은 장로와 집사입니다. 장로의 직분은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말씀을 전파하는 직분(가르치는 장로)과 양떼들을 지키고 관할하는 직분(치리 장로)입니다. 장로는 또한 감독(bishop)이라고 하는데「감독」이라는 말은 ‘감독자’ 또는 ‘관리자’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얼마 후에 일부 감독들이 자기들이 보기에 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는 다른 장로들보다 자기들이 훨씬 더 높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전적으로 반대되는 생각이었습니다. 우리교회는 작은 교회입니다. 작은 교회를 섬기면 별소리를 다 듣습니다. 교회가 시내에 있을 때였습니다. 어떤 가정을 전도하려고 무려 3년을 그 가정을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 그리하여 곧 나오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시내에 ○○교회 권사라는 직분을 가진 사람이 하는 말이 저 작은 교회에 뭣하러 다닐 거냐고 했습니다. 내가 안 들었으면 했는데 그 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목사면 다 목사냐는 것입니다. 큰(?)교회 목사와 작은 교회 목사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교회는 그 교회를 교회라고 부르지 ○○주식회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목사나 교인들이 세 불리기에 혈안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마23:8). 물론 이 말씀은 가정생활에서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르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아버지라 부르고 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인데 그 말씀을 무시하고 아버지라 부르고 있다. 어떤 단체든지 부패와 타락의 길로 일단 접어들게 되면 빠른 속도로 기울게 된다. 이처럼 교회가 무서운 속도로 타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많은 회중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대도시(大都市)의 감독들이 보다 작은 지역 교회들의 감독들을 무시하고 그들에게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로마, 안디옥,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에베소, 고린도 그리고 콘스탄티노플의 감독들은 스스로 가장 높은 권위를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스스로「대감독」(Patriarch)이라고 부르면서 다른 교회들 위에 군림하여 최고의 권위를 행사하였다. 이러한 대감독(또는 대주교)들 사이에서도 서로 더 높아지려는 싸움이 전개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로마의 대감독과 콘스탄티노플의 대감독 사이에 서로 패권을 차지하려는 치열한 싸움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콘스탄틴 대제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로마 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보스포러스 해협에 있는 비잔티움으로 옮겼다. 보스포러스 해협은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좁은 해협이며 콘스탄틴은 비잔티움을 자신의 이름을 따라「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로 개칭하였다. 그 후에 로마의 황제들은 이태리에 거주하지 않게 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로마의 감독들이 자기들의 힘을 결집할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되었다. 베드로사도가 로마에서 25년 동안 살며 사역했었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는 그러한 내용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베드로가 로마의 감독을 지냈다거나 로마에 얼마 동안 머물렀을 것이라는 주장에 대하여는 증거가 없다. 그러나 베드로가 로마에서 순교했을 가능성은 있다. 적어도 서방에서는 로마가 콘스탄티노플을 능가하고 있었다. 로마의 대감독은 모든 교회에 대한 최고의 권위를 주장하면서 스스로가 베드로의 후계자라고 선언하였다.「대감독」이라는 이름은 6세기 초에「교황」(Pope)으로 바뀌었다. 로마교회의 부상이 제도적으로 뒷받침된 것은 3세기 이후의 현상이었다. 3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모든 교회가 형제”였다. 그러나 그 후에 로마교회는 다른 교회와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동등한 가운데서 으뜸이라고 생각했다. 3세기 중엽 칼타고의 키프리안 감독과 로마의 스데반 감독 사이에 세례에 관한 열띤 의견의 불일치가 발생한 끝에 스데반이 키프리안에 대항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기 이전에는 “너는 베드로라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는 마태복음16장18절은 로마의 지도력과 권위를 설명하는데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이에 대한 John Calvin은
주님은 이 말씀으로 베드로에게 보상을 약속하셨으며 그의 고백을 들으시고 참으로 기뻐하셨음을 선언하셨다. 주님은 차기 제자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전에 이미 주셨고 그를 사도로 임명하셨다. 그러나 주님은 이 값없이 주신 은사들이 마치 보상이나 되는 것처럼 그의 믿음이 훌륭하기 때문에 이를 주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런 일은 성경에 흔하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베드로에게 두 가지 영예를 주고 계신다. 첫째는 그의 구원에 관한 것이며 둘째는 그의 사도직에 관한 것이었다. 너는 베드로라고 말씀하신 것은 주님께서 그에게 이 이름을 공연히 주시지 않았으며 그가 하나님의 성전 안에서 산돌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확증하는 말씀이었다. 이 사실은 모든 신자들에게도 적용된다. 믿는 자들은 각각 하나님의 성전이며 신앙으로 결속되어 한 성전을 이룬다(엡2:20). 그리고 이 말씀은 베드로의 탁월함을 표명하기도 한다.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께서 주신 은사의 분량대 로 자기의 순위에 따라 다소간의 영예를 받기 때문이다. 이 반석 위에 이 말씀은 베드로라는 이름이 베드로 자신과 다른 신자들에게 공히 속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다시 말하면 모든 신자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 근거하여 거룩한 일치에 의해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 계시도록 신령한 건물을 형성한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이 반석이 전체교회를 위한 공통된 기초가 된다고 선언하심으로 주님은 이 세상에 생존하는 모든 신자들을 베드로에게 결합시키기를 원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과 같다. “너희는 지금 적은 숫자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현재 너희들의 고백은 조금 밖에 그 가치를 발휘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 신앙고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광범위하게 보급될 때가 곧 오게 될 것이다” 이 말씀은 지속적으로 제자들을 격려하는 데 적지 않게 효력을 미쳤다. 왜냐하면 그들의 신앙이 비록 희박하고 비천했었으나 그들은 주님에 의하여 첫 열매로 선택되었으며 마침내 이 미미한 시작으로부터 음부의 모든 권세를 이기게 될 새로운 교회가 일어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한글개역 성경에는 이 대명사 ‘그것’이 나타나 있지 않으나 헬라어 성경에는 18절 끝에 ) aujth'"./아우테스/ ‘it’가 있음)이란 대명사는 신앙 아니면 교회를 가리키고 있으나 후자를 가리키고 있다고 보아야 옳다. 왜냐하면 교회가 사탄의 온갖 권세에 대항하여 승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교회가 갖는 신앙의 기반이 되는 하나님의 진리는 결코 요동함이 없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5:4)는 요한의 말과 일치가 되고 있다. 이 약속의 말씀은 주시할 가치가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하고 그를 그리스도와 중보자로 안식하는 자들은 세상 끝날 까지 모든 해악으로부터 보호를 받는다는 의미다. 모든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일체가 되기만 한다면 교회의 지체는 그 신자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실은 우리에게 경고를 주기도 한다. 이 땅에서 교회는 순례자이므로 교회는 안식할 여유를 갖지 못하며 허다한 공격을 받고 있다. 사탄이 우세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주님께서 항상 사탄을 대적하시겠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 말씀 위에 서서 사단의 대항에 관한 한 안전함을 기뻐하며 우리의 신앙으로 그의 모든 세력을 이미 이기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전쟁에 대비하도록 나팔은 울렸다는 사실 또한 알지 않으면 안 된다. ‘권세’라는 말은 의심할 여지없이 일종의 세력과 요새(要塞)를 의미하고 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의 공적(公的) 직임 즉 그의 사도직을 말씀하기 시작하신다. 주님은 이중의 찬사로 이 사도직의 위염을 더해주고 계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의 일군들이 천국의 열쇠를 가졌으므로 그 문을 지키는 자들과 같다고 말씀하셨고 땅 위에서 매고 풀면 천국에서 실제로 그렇게 되는, 이 매고 푸는 권세가 이들에게 부여되었음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은유로 말씀하신 이 ‘열쇠’는 가르치는 직무에 적합한 말이다. 누가복음11장 52절에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해설자들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천국의 열쇠를 가진 자들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명의 문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만 우리에게 열려지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볼 때 이 열쇠는 말씀의 사역자들의 손에 쥐어져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사도들은 이 문을 여는 일 뿐만 아니라 닫는 일을 위해서도 세움을 받았기 때문에 ‘열쇠들’( klei'da"/클레이다스/복수)이라고 복수로 말씀하셨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그들대로의 그럴 듯한 견해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이 견해보다 더욱 미묘한 의미로 이 말을 해석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이를 자기 혼자만의 의견으로 갖고 있어야 하겠다. 주님께서 베드로를 사도로 세우셨을 당시에 베드로에게 이미 주셨던 것으로 생각되는 것을 앞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이유에 대하여 의문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의문은 마태복음10장에서 풀렸다. 12사도는 당초에 잠정적인 포고자(布告者)들이었으며 그들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받은 분부를 다 수행했었다고 나는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을 때 그들은 교회를 위한 평범한 선생들로 임명되기 시작했다. 이런 점에 있어서 베드로가 얻은 영예는 미래를 위해 주신 것이었다. 네가 무엇이든지 매면 이 두 번째 은유 혹은 직유는 엄격히 죄의 용서를 의미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복음으로 우리를 영원한 죽음의 죄로부터 자유케 하심으로써 우리가 전에 속박되었던 저주의 올무를 풀어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교리는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사슬을 풀어주기 위한 것임을 주님은 선언하고 계신다. 이 땅 위에서 사람들이 전하는 음성과 증거로써 우리가 풀린 자들이 되어 하늘에 들어가게 됨으로 우리가 하늘에서도 풀린 자들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불경건자들이 이렇게 주신 자유를 배격할 뿐만 아니라 고집을 부림으로써 더욱 무서운 심판을 자청하고 있기 때문에 ‘매는’ 권세와 위임(委任)이 복음의 사역자들에게 부여되었다. 그러나 이는 우발적이며 복음에 잘 조화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을 주시해야 하겠다. 바울이 모든 불신자들과 거역하는 자들을 벌하기 위해 준비된 보응에 관하여 말하면서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고후10:6)라는 말을 덧붙여 말한 사실과 같다. 버림을 받은 자들이 자신들의 과오로 생명을 사망으로 바꾸지 않는 한 복음은 만인이 구원을 얻기 위한 능력인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不敬虔(불경건)이 공공연히 나타나고 하나님의 진노를 더욱 격발시키고 있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복음이 필연적으로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되고 있다.
요약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친히 증인으로서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것과 똑같이 제자들이 확신을 가지고 이 구원을 기다리도록 복음 안에서 그들에게 약속된 구원에 관하여 교훈하고 싶어 하신다. 그러나 주님은 복음을 경멸하는 자들이 말씀의 사역자들을 희롱해도 아무런 헐별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이들에게 두려운 마음을 주입하고 싶어하시
기도 했다. 이 두 가지는 대단히 필요하다. 왜냐하면 생명의 불가해한 보화가 질그릇들 속에 담겨서 우리 앞에 놓여 있으므로 영원한 구원의 교리에 관한 권위가 이런 방법으로 확증되지 않으면 그들의 신앙은 거의 매순간마다 소멸되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불경건자들은 극히 담대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단지 사람들과 상관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장차 하늘에서 행하실 심판이 어떠한 것인가를 땅 위에 계시해 주는 것은 복음의 전도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과 우리가 생명과 죽음에 관한 확실한 것을 복음 이외의 어떤 것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선언하고 계신다. 우리가 주님의 구원을 세상에 증거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언자로 세우신 것은 큰 존귀가 아닐 수 없다. 복음이 갖는 최고위엄은 이 복음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화해를 이룩하여 준 使節(사절)의 직능을 다했다는 점이다. 경건한 자들은 어떤 보잘 것 없는 자들에 의하여 자기들에게 전해진 구원의 소식이 하나님께서 승인하신 것임을 알게 될 때 놀라운 위안을 얻는다.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전파된 구원의 교훈을 경건하지 못한 자들이 조롱하고 싶다면 조롱하게 내버려두자. 마침내 이들은 사람들의 입을 통하여 자기들을 위협하는 분은 실제로, 그리고 참으로 하나님이심을 알게 될 것이다. 이 확신으로 무장한 경건한 교사들은 담대하게 자신들에게도 보증인들이 될 뿐만 아니라 살리는 은혜를 받은 타인들에게도 보증인들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가르침을 완고하게 경멸하는 자들에게 이 경건한 교사들은 적지 않은 용기로써 위협을 주고 있다.
지금까지 나는 본문 말씀의 순전한 의미를 선명하게 해설했다. 그러므로 더 이상 다른 것을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로마의 적그리스도(Calvin이 말하고 있는 Roma의 적그리스도는 교황을 의미)는 자기포악에 대한 변명을 해보려고 블신앙에 못지 않는 악독으로 여기 있는 말씀 전부를 왜곡하려고 한다. 내가 지금까지 논한 참 해설의 빛이 교황의 우매를 닦아내는데 넉넉하겠지만 경건한 독자들이 실족할까 염려되므로 간단하게 그의 독한 오류를 논박하고자 한다. 첫째로 그는 베드로가 교회의 기초가 되는 것처럼 위장한다. 그러나 베드로가 그리스도 안에서 갖는 ‘신앙’을 교황은 베드로라는 ‘인물’로 잘못보고 있다는 사실을 누가 모르겠는가? 헬라어로 Pevtro"/페트로스/베드로와 pevtra/페트라(반석)가 전자는 아티카(아테네) 말이고, 후자는 일반적인 말이라는 사실을 제외하고 동일한 것을 의미하고 있음을 나도 시인한다. 그러나 마태복음에 이 말들이 어미가 변화되어 기록된 것은 아무런 생각 없이 된 것이 아니며 무엇인가 다른 것을 표명하기 위하여 신중하게 기록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고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모국어로 그러한 구분을 의미하셨을 것임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Christ)라는 말로부터 그리스도인들(Christians)이란 칭호를 얻게 된 것처럼 페트라(반석)가 베드로로부터 연유되지 않고 베드로가 페트라로부터 연유되었다고 지혜로운 말을 댔다. 간단히 말해서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 위에서만 설립될 수 있다(고전3:11/이 닦아 둔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한 바울의 말이 분명하고 확실한 말씀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교황이 다른 기초를 조작해 내는 것은 불경스러운 모독이다. 그리고 교황과 그의 추종자들이 이 하나의 이름을 근거로 하여 행사하는 暴虐(포학)을 우리가 얼마나 증오해야 할 것인지 말로서는 다 표현할 수가 없다. 이 베드로라는 이름을 위하여 교회의 참된 기초는 배제되고 음부의 구덩이가 불행한 영혼들을 삼키고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말했거니와 본문의 말씀은 아직 베드로의 공적 직임을 논하고 있지 않다. 이 말씀은 단순히 그가 성전의 거룩한 반석들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음을 의미하고 있다. 이 말씀에 이어서 나온 칭찬은 분명히 사도적직임에 관련되고 있다. 그러므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은 모두 그의 동료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인 것이다. 사도적위엄이 그들 모두에게 공통된 것이었다면 이 使徒的威嚴(사도적위엄)에 부가된 것 역시 그들에게 공통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라는 이름만을 불러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모든 제자들을 대신하여 한 사람이 고백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말씀도 그 한 사람을 향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들 모두에게 속한 것이었다. 그러나 주님께서 교회의 통일을 권하고 계신다고 Cyprian과 다른 사람들이 추론하고 있는 이유도 가볍게 보아 넘겨서는 안 된다. 그들은 이 권세를 특별하게 부여받은 사람이 타인들보다 선택된 자라고 논하고 있다. 그러나 이 말은 마치 그들이 베드로야말로 그의 동료들보다 우월한 사도였 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대양으로부터 열이나 빛을 배제할 수 없는 것처럼 매고 푸는 권세는 가르치는 직임과 사도직으로부터 배제될 수 없다. 베드로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권세를 받았으므로 우월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하더라도 베드로가 전체 교회의 머리가 되도록 그에게 지상권(至上權)이 주어졌다고 하는 교황과 그의 추종자들의 생각은 (매우) 우매한 것이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가진 위엄과 전 세계를 자기 손아래 모으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감당할 이상의 직무를 그에게 부담시키지 아니하신 것이 분명하다. 그가 천국의 문지기가 될 것을 명령하셨고 매고 푸는 것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활용하라고 명령하셨으며, 땅 위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집행하라고 멍하셨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의 직무는 육을 가진 그의 능력이 미치는 한도까지였다. 그러므로 그에게 부여된 것은 무엇이나 교회의 유익함을 위하여 주어진 은혜의 분량에 국한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하여 교황이 정당한 이유 없이 사취하고 있는 그 방대한 제국은 붕괴되는 것이다. 베드로에 관한 이론(異論)이나 논쟁이 없다 하더라도 교황의 독재는 베드로에 관한 사실과는 하등의 상판이 없다. 왜냐하면 교황과 그의 추종자들은 베드로가 받았던 권한이 마치 상속권에 있어서처럼 그의 후계자에게 계승되었다고 주장하나 바른 정신을 가진 자라면 누구도 이들의 주장을 승인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어떤 것 하나라도 자기 계승자에게 줄 수 있도록 허용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교황과 그의 무리들은 베드로가 다른 사람의 권한을 마음대로 처분하도록 조작하고 있다. 그리고 지속적인 계승이 실제로 유효했다 하더라도, 교황은 자신이 베드로의 합법적인 계승자라고 증명되기 전에는 이 계승권으로부터 아무 것도 취득하지 못할 것이다. 자기가 베드로의 후계자임올 교황은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베드로가 로마에서 죽었기 때문인가? 로마가 한 사도를 살해함으로써 다른 곳보다 우월권을 얻은 것인가? 그들은 베드로가 로마의 감독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무익한 주장에 관해서는 나의 책〈기독교 강요〉에서 충분히 논했다. 나는 독자들에게 수고와 지루함을 주지 않기 위해 이를 여기서 반복하는 대신에 이에 관한 전반적인 내용을 본서에서 찾아보도록 권하고 싶다. 그러나 이 짤막한 한 마디만 덧붙이자. 로마의 감독이 그 권한에 의하여 정당하게 베드로의 후계자가 되었다고 가정하더라도, 자기의 가르침으로 과다한 존귀를 자기의 것으로 횡령했을 때 그는 실제로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의 후계자들에게 주셨던 것을 하나도 갖지 않았던 것이다. 교황의 궁전이 로마에 있다는 사실은 너무도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로마에 교회가 있다는 표적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지배권을 얻기 위해서 탐욕을 갖고 투쟁하는 반면에 목자의 참된 직임을 싫어하고 있다. 분명히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의 계승자들을 격찬하심에 있어서 모든 칭찬을 아끼지 아니하셨다. 그러나 자신의 존귀를 배교자들에게 주실 만큼 후하신 분은 아니셨다(John, Calvin, 1980, 98-104.
William Barclay도 이렇게 주석했습니다.
이 본문은 신약의 해석에서 논쟁의 중심에 있는 구절중 하나다. 지금까지 냉정하고 편견 없는 자세로 이 본문에 접근하기는 쉽지 않았다. 이 본문을 기반으로 Roman-Catholic과 교황의 위치가 확보되어 왔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사람을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하거나 하늘나라에서 제외할 수 있는 열쇠를 갖고 있으며, 사람을 그의 죄에서 놓아 주거나 놓아 주지 않을 수 있는 권세를 갖고 있다는 생각은 Roman-Catholic이 주장하는 해석이다. 더 나아가 베드로에게 이런 어마어마한 권리가 있었기 때문에 로마의 교황이 되었고, 이 권한이 그후 로마교황에 의해 계승되었고 오늘날 로마의 주교며 교회의 머리인 교황에게 주어졌다고Roman-Catholic은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성도라면 이러한 교의(敎義)가 얼마나 얼토당토않은 것인지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개신교와 Roman-Catholic이 다 같이 이 말씀의 내용을 순수한 의미에서가 아니라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오히려 가능한한 상대편의 입장을 무너뜨리려는 관점에서 그 의미를 찾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면 본문의 의미는 무엇인가? 여기에는 어느 정도 언어 유희적인 요소가 있다. 베드로라는 말의 헬라어는 폐트로스(Petros)고, 반석을 의미하는 헬라어는 페트라(Petra)다. 베드로의 아람어 이름 게바(Kephas)도 반석을 의미한다. 이런 여러 나라의 말을 살펴볼 때 여기에 는 언어유희가 들어 있다. 베드로가 위대한 고백을 하자마자 예수께서는 “너는 베드로(Petros)라 이 반석(petra)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무엇보다도 굉장한 칭찬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해석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유대인의 사고방식으로 이것은 결코 낯설거나 비정상적인 은유가 아니다. 랍비들은 반석이란 말을 아브라함에게 적용했다. 그들은 “거룩하신 이가 아브라함의 나심을 보고 말씀하시기를 ‘보라 나는 세계를 세울 반석(petra)을 발견 하였노라’고 하시니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반석(sur)이라 불렀다. 그것은 ‘너희의 잘라낸 반석을 생각해 보라’ 고 기록됨과 같다”라고 말했다. 아브라함은 그 위에 나라와 하나님의 목적을 세울 반석이었다. 더욱이 반석(sur)이란 말은 때때로 하나님 자신에게 더 적용되었다.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신 32:4). “그들의 반석이 우리의 반석과 같지 아니하니”(신32:31),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삼상2:2). “여호와는 나의 반석 이시오, 나의 요새시오, 나를 위하여 나를 건지시는 자시오”(삼하22:2). 이와 같은 말은 시편의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냐?”(시18:31)에도 나오며 사무엘하22:32절에도 이런 구절이 나온다. 여기에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어떤 사람을 반석이라고 말하는 것은 최고의 찬사요, 구약성경을 알고 있는 유대인에게는 자신의 유일한 방어이자 구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상기시켰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본문 말씀에서 반석이란 말을 사용하신 의미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적어도 네가지 해석이 있다. 첫 번째로 어거스틴은 “반석”을 “예수님 자신”으로 해석했다. 그는 예수께서 마치 “너는 베드로다. 반석 인 나 자신 위에 나의 교회를 세우리라. 그날이 오면 너는 네 신앙의 대가로 그 교회에서 크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라고 해석했다. 두 번째 해석은 이 반석이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진리를 말한다는 것이다. 베드로에게 그 위대한 진리가 성령으로 계시되었다. 그런 위대한 진리를 볼 수 있도록 눈을 열어 주신 이는 하나님 자신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실로 교회 신앙과 교의의 초석이다. 이 위대한 진리 위에 교회는 영원히 서 있을 것이다. 이 해석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성령에 의해 계시된 진리야말로 교회가 설 수 있는 유일한 기반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는 진리지만 여기에 있는 것은 거의 언어유희에서 온 것을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세 번째 해석은 반석이 베드로의 신앙이라는 것이다. 베드로의 신앙위에 교회는 세워진다. 전 세계 교회에 신앙의 불을 붙인 불씨가 베드로의 신앙이었다. 베드로의 신앙이 우주적 교회를 처음 출발시킨 원통력이다. 마지막 해석은 지금까지는 가장 좋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베드로 자신이 반석이라는 것은 특수한 의미를 지닌다. 교회가 그 위에 세워질 반석은 베드로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그는 모든 교회의 첫 초석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지상에서 최초로 발견한 사람이었다.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고 처음으로 신앙적 도약을 한 사람이었다. 다시 말해 베드로가 교회의 첫 구성원이 되었고, 그런 의미에서 모든 교회가 그 위에 세워진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베드로여, 너는 내가 누 군지를 알게 된 첫 사람이다. 그러므로 너는 내가 세울 교회의 첫 주춧돌로서 바로 그 교회의 시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어느 세대든 베드로와 같은 발견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의 교회 건축 사업에 보탬이 되는 하나하나의 돌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분명하게 하는데 도움이 되는 두가지 내용에 주목해 보자. 성경은 종종 한 가지 요점을 명백히 나타내려고 상징을 사용한다. 이 상징 이 나타내려는 중심점은 하나뿐이고 세부적인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즉 신약성경은 교회와 관련해 여러 번이나 건축에 대한 상징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많은 목적을 위해 그리고 많은 관점에서 사용되고 있다. 모든 교회가 베드로라는 한 사람 위에 세워진다는 의미에서 베드로는 그 터다. 그가 예수님의 본질을 발견한 첫 사람이기 때문이다. 에베소서2:20절에서는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교회의 터라고 말했다. 인간적으로 말해 지상에 있는 교회는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사업과 충성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구절에는 예수님이 모퉁잇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함께 모이게 하는 능력이고 세력이다. 예수님께서 안 계시면 건물 전체가 무너진다. 베드로전서2:4-8절을 보면 모든 기독교인은 같이 동참해 교회 건축물을 세우는 살아있는 돌들이다. 고린도전서 3장 1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유일한 터로서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다. 신약성경 기자들은 건축하는 상징으로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교회를 베드로에게 의존하게 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교회가 의존하는 대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반석이신 하나님뿐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교회가 베드로와 함께 시작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베드로는 교회의 터다. 이 사실은 그 누구도 베드로에게서 빼앗아 갈 수 없는 영예다. 이 본문에 있는 교회(ekklesia)란 낱말이 잘못된 인상을 주고 있다는 것이 두 번째 요점이다. 교회라는 말을 들으면 흔히 지금 우리가 다니는 교회, 건물과 구성원과 예배, 회합, 여러 기관이 있고 갖가지 활동을 하는 어떤 제도나 기구로 생각하기 쉽다. 예수님께서 여기서 사용하신 말은 lh;q;/카알(quahal)인데, 이 말은 구약에서 여호와의 백성의 모임인 이스라엘의 회중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은 “베드로야, 너는 새 이스라엘, 주의 새 백성, 나의 이름을 믿는 자들의 새로운 교제의 시작이다”라는 의미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믿는 첫 성도의 교제였다. 베드로와 함께 시작한 교회는 교파적인 의미에서 더욱 작아져 버린 인간적 의미의 교회가 아니다. 베드로와 함께 시작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도의 교제로서, 어떤 특정교회와 동일시되거나 어떤 특정교회에 국한되지 않고 다만 주를 사랑하는 모든 교회 안에 존재하는 전 성도를 포괄하는 것이다. 대단히 논쟁적인 이 구절이 의미하는 것은 예수그리스도가 주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기꺼운 마음으로 공언하는 자들이 모여 큰 성도 교제의 첫 사람이 된다는 의미에서 베드로가 교회의 초석이라는 것이다. 궁극적인 의미에서 교회가 설 수 있는 반석은 하나님 자신이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해 음부의 문도 교회를 이기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문이 이긴다는 것은 자연스럽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이 아니다. 이것은 한 요새지를 말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가이사랴 빌립보를 조망할 수 있는 산꼭대기에는 아직까지 거대한 성의 폐허가 있다. 이런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예수님 당시에 그곳에는 굉장한 영광으로 큰 성이 틀림없이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교회를 요새로, 악의 세력을 적의 요새로 생각하고 계셨는지 모른다. 그래서 접전을 벌이더라도 악의 세력이 결코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닌가? 리처드 글로버(Richard Glover)는 이 구절을 흥미롭게 설명하고 있다. 고대 통방에서는 성문 특히 작은 읍이나 마을의 문에 장로들과 통치자들이 모여 회의를 열고 법을 진행했다. 예를 들어 율법에는 어떤 사람에게 반역하고 불순종히는 자식이 있으면 부모가 그를 붙들어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신21:19) 데려가 그를 재판하고 판결해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명기25:7절에 따르면 어떤 문제를 가진 사람은 “성문으로 장로들에게로 나아가” 말해야만 했다. 성문은 장로들이 회합하여 간단히 재판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문이란 표현은 통치의 장소를 의미하게 되었다. 예를들면 오랫동안 터키에서는 정부를서브라임 포르트 (Sublime Porte/Porte는 프랑스어로 성문)라고 불렀다. 그러면 이 구절은 음부의 정부, 곧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이기지 못하리라는 의미가 된다. 제3의 가능성이 있다. 교회가 서있는 반석이 바로 예수님께서 실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념과 신앙, 확신이라는 관념으로 돌아가 생각해보자. 어쨌든 이 말은 지옥의 문이 아니고 음부의 문이다. 음부란 벌을 받는 곳이 아니라 원시 유대신앙에서는 죽은 자들이 모두 가는 곳이다. 확실히 문의 기능은 안에 들어있는 것들을 지키는 것, 즉 그들을 제한하고 감금하고 지배하는 것이었다. 이제 음부의 문이 감금할 수 없는 단 한 사람이 있으니 그가 곧 예수 그리스도였다. 그는 사도행전 기자가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행2:24),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행2:27)라고 말한 바와 같이 사망의 사슬을 끊으셨다. 이제 이것은 순전히 다가오는 부활을 의미하는 승리의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너는 내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됨을 발견했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힐 시간이 곧 올 것이다. 그리고 음부의 권세가 나를 가두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나를 감금해 두지 못할 것이다. 음부의 권세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인 나를 거역할만한 능력이 없다”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든지 간에 이 말씀은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의 불멸성을 나타내는 승리의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특권과 의무에 대한 두 마디 말씀에 주목해 보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참 난해한 구절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확신할 수 있는 내용부터 먼저 밝혀내고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구절은 언제나 대단히 특별한 능력을 의미했다. 예를 들면 랍비들에게는 “출생과 비 내림과 죽음에서 부활의 열쇠는 하나님만 갖고 계신다”라는 격언이 있었다. 다시 말해 하나님만이 생명창조의 능력과 비를 내리는 능력,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어 다시 일으키시는 능력을 갖고 계신다는 것이다. 이 말은 언제나 특수하고 유일한 능력을 나타낸다. 신약성경에 이 말이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열쇠는 오직 주의 손에 있고 그밖에 아무도 가진 사람이 없다. 요한계시록1:18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요한계시록3:7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라고 기술되어있다. 이 말씀은 신적인 권능을 지시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하며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에게만 속한 권능을 지시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베드로에게 주어진 약속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그리스도의 권능은 무효가 되거나 침해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 신약성경 이야기는 이사야서 안에 있는 이야기(사22:22)에 귀착한다. 이사야서에서는 엘리아김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데 그는 어깨에 다윗의 집의 열쇠를 갖고 있어 그만이 열고 닫을 수 있다고 되어 있다. 엘리아김의 사명은 그 집을 위해 충실한 청지기가 되는 것이었다. 집 열쇠를 가진 자는 그 집의 청지기로서 아침에 문을 열고 저녁에 문을 닫으며, 그를 통해 모든 방문객이 주인 앞에 가까이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은 장차 올 그날에 베드로가 하늘나라의 청지기가 되리라는 의미가 된다. 베드로의 경우 그의 책임은 하늘나라의 문을 여는 것이지 닫는 것은 아니다. 실로 이것은 풍부한 진리를 나타내 보여준다. 오순절에 하늘나라의 청지기인 베드로가 3천 명에게 문을 열어 주었다(행2:41). 그리고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에게도 문을 열었다. 그래서 하늘나라의 문은 거대한 이방 세계가 들어갈 수 있게 활짝 열렸다. 사도행전15장에는 예루살렘 공의회가 어떻게 이방세계를 위해 문을 넓게 열었는지. 그렇게 되도록 베드로가 거기에서 어떻게 증거를 했는지 말해 주고 있다(행15:14/시몬은 베드로). 베드로가 하늘나라의 열쇠를 가질 것이라는 약속은 베드로가 장차 올 날에 수 천 명의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문을 여는 수단이 될 것이라는 약속이다. 분명한 사실은 하늘나라의 열쇠를 가진 사람은 베드로뿐 아니라 모든 기독교인이라는 것이다. 이는 우리 모두가 누구에게든지 하늘나라의 문을 열어주고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약속에 들어가게 하는 특권을 받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무엇이나 “매”면 “매”일 것이고, 무엇이나 “풀”면 “풀”릴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리처드글로버는 이것을 베드로가 사람들의 죄를 그들의 양심에 매어 그들을 구속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의 말씀을 그들에게 말함으로써 사람들을 죄에서 풀어 주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것은 훌륭한 생각이고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실이다. 이런 일은 모든 기독교인 설교자와 교사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본문에는 이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푼다는 것과 맨다는 것은 통상적으로 유대인이 사용하는 말로서 특히 훌륭한 교사들과 랍비들이 결정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다. 유대인이라면 전부 알고 있는 이 말의 일반적인 뜻은 허락하는 것과 금지하는 것이었다. 어떤 것을 맨다는 것은 금지된 것으로 선포하는 것이고, 어떤 것을 푼다는 것은 그것을 허락된 것으로 선포하는 것으로 율법에 대해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정규적으로 사용되는 말이었다. 이것이 사실상 이러한 문맥 속에서 이 말이 의미하는 유일한 내용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시는 말씀은 “베드로야, 그대는 중요하고도 무거운 책임을 맡으려 하고 있다. 그대가 모든 교회의 번영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결단을 내리고자 한다. 장차 다가올 그날에 네가 교회를 다스릴 것이다. 그대는 나이 어린 교회의 안내자와 관리자가 될 것이다. 그대가 내리는 결정은 대단히 중요해서 그 결정이 그 시대와 영원까지 사람들의 영혼을 지배하는 힘이 될 것이다”라는 의미다. 이 열쇠를 받음으로써 베드로에게 생긴 특권은 하나님의 권속을 돌보는 청지기가 되어 사람들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을 개방해 주는 것이다. 매는 것과 푸는 것이 의미하는 의무는 베드로가 항구적인 결과를 초래할 교회의 생명과 생활에 결단을 내린다는 것이다. 사도행전의 처음 몇 장만 읽어 봐도 우리는 예루살렘에서 베드로가 바로 일을 했음을 볼 수 있다. 베드로는 자신에게 부과된 의무와 사명과 특권에 대해 진실했다. 이제 이상의 많은 논리와 토론을 불러일으킨 이 본문을 쉽게 풀이해 보면 그 중심점은 교직자나 교회의 일에 대한 것이 아니라 구원에 대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베드로야 그대의 이름은 반석을 의미하는 것인즉 그대의 본분은 반석이 되 는 것이다. 그대는 내가 누구인지를 처음으로 안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나를 따르는 자들로 이루어지는 성도의 교제를 세우는 건물에 처음 놓인 돌이다. 이 성도의 교제에 반역하여 싸우는 악의 세력은 이제는 더 이기지 못하리니, 원수가 너를 사망에 가두어 둘 수 없기 때문이다. 장차 올 그날에 그대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다 함께 들어오는 하늘나라의 문을 열어주는 청지기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대는 지혜로운 관리자와 안내자가 되어 이제 자라나기 시작하는 어린 이 무리의 문제를 해결하고 사명을 지시해야 할 것이다” 베드로는 위대한 발견으로 위대한 특권과 책임을 맡게 되었다. 누구나 스스로 바로 이런 발견을 해야하며, 이런 발견을 했을 때 그에게 이에 부응하는 특권과 책임이 부과되는 것이다(William Barclay, 2009, 188-197).
William Hendriksen은
너는 베드로 즉 반석이라 내가 이 반석 즉 베드로 너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아람어로 말하자면, 우리 주님께서 아마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너는 게바(Kepha)라. 내가 이 게바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그 당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위에 그의 교회를 세우실 것이라고 그에게 약속하고 계시다. 저자는 이 견해를 받아들인다. 이 견해를 주장하려면 다음과 같이 이 해석을 보완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이 교회를 세울 것을 약속하신다. 교회는 자연인으로서의 게바 위에 세워질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은혜의 결과로 생각되는 그 위에 세워진다는 말이다. 본래 이 사람은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어떤 의미에서 나약하고 불안정한 사람이었다. 그는 은혜로 말미암아 가장 용감하고 열정적인 사람이 되었으며, 성부께서 그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드러내신 진리의 유능한 증인이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자기 교회를 세우는 일(모으고 강화시키는 일)에 사용하신 것이다. 교회는 자기 혼자 모든 것을 생각한 게바 위에가 아니라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마10:2) 즉 “열 한 사도와 같이 서(행2:14) 있는 게바” 위에 세워질 것이다. 16:19에서 베드로에게 위탁된 그 권위는 18:18에서 열 두 사도에게 주어졌다(요20:23). 사실상 이 권위를 사용함에 있어서 지역회중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18:17). 주께서 16:18,19에 기록된 말씀을 하셨을때 베드로가 이제부터 다른 제자들 위에 “군림”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으셨다. 그 이외의 제자들도 그 말씀을 그런 식으로 이해하지 않았다(18:1, 20:20-24). 예수님께서 그런 해석은 어떤 것이든 분명히 거절하셨기 때문이다(20:25-28, 눅22:24-30). 만일 베드로 자신이 자기 자신의 권위나 다른 사람의 권위를 독재자의 권위로 생각한 바 있었다면 그가 어떻게 베드로전서5:3을 기록했을까?(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교회가 근본적인 기초로 게바 위에 세워진 것은 아니다. 그 용어의 제 일차적 또는 기본적 의미에서 오직 유일한 기초가 있는데, 그 기초는 베드로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 자신이시다(고전3:11). 그러나 제 이차적인 의미로 베드로를 포함한 사도들을 교회의 기초라고 하는 것은 정당하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언제나 그들 자신에게서 유일한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주의를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에 대한 분명한 예를 행 3:12과 4:12에서 발견할 수 있다.
사도행전3: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사도행전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따라서 이차적인 의미에서 성경은 교회의 기초를 사도들이라고 말한다(엡2:20, 계21:14).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로가 아니라, 교회의 건축자이며 주인이신 자신에 대하여 언급하고 계시다는 사실 역시 강조되어야 한다. 그는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말씀하신다. 교회를 상징하는 건물의 비유는 고린도전서3:9, 에베소서2:21,22, 베드로전서2:4,5과같은 구절에서도 발견된다. 조금씩 건물은 올라간다. 그것은 힘, 아름다움 그리고 유용성에 있어서 증가하며, 교회의 성도들은 “산돌”로 여겨지고 있다. 그의 교회를 세우는 일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을 사용하신다. 사실상 그는 이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교회의 모든 살아 있는 성도들을 사용하신다. “내 교회”라는 표현은 물론 우주적인 교회이다. 신약성서에서 나타나고 있는 “그리스도의 몸 전체” 또는 “모든 자들의 총체”이다. 신약성경의 어느 구절에서든지 그것은 실제로 이 땅 위에 있는 것을 대표한다(행9:31, 고전6:1, 12:28, 엡1:22, 3:10,21 , 5:22-33, 골1:18, 빌3:6). 예수님께서 이 교회를 “바로 자기 자신”으로 생각하신다는 것은 하나의 큰 위안이다. 그는 “자기 피로” 교회를 사기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신 것이다(행20:28). 사도행전의 처음 열 두 장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초돼 교회의 역사는 베드로에 관한 그리스도의 예언이 이루어졌음을 충분히 입증해 준다. 사도행전의 처음 열 두 장에서 베드로의 이름은 50회 이상 나타난다. 베드로의 이름은 스데반의 이야기가 살린6장과 7장을 제외한 모든 곳에서 발견된다. 따라서 마태는 베드로가 자기 자신 안에 있었거나 또는 자기 혼자 힘으로 모든 것을 행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도구로서 신약성서에 명시된 그리스도의 교회의 확립을 위하여 열 두 사도 증 한 사람으로서 같이 서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초기에 (바울이 행 13-28장에서 크게 두각을 나타내기 전) 베드로는 예수님과 교회 사이를 연결하는 가장 힘 있고 유능한 인간이었으며, 교회의 내적, 외적, 성장을 위한 가장 유력한 수단이었다. 오순절에 베드로 설교결과로 삼천명이나 회개하였다(행2:41). 다시 베드로와 요한의 증거(3:11, 4:1), 주로 베드로의 증거를 통하여(3:12) 이천 명의 신자가 뒤이어 증가하였다(4:4). 베드로가 주도하여 공헌한 다른 사건들은 다음과 같다. 가룟 유다 대신 맛디아를 선출(행1:15-22), 앉은뱅이 거지를 고침(행3:4-6). 뿐만 아니라 산헤드린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웅적으로 선포함(4:8-12,29). 그 이외에도 믿을 수 있는 전통에 의하면 “베드로의 통역자”는 마가였다. 여기에 베드로의 서신을 덧붙일 수 있다. 그는 거기에서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매우 아름답게 설명했다(벧전2: 21-25. 그리스도의 예언은 베드로의 사역을 통하여 성취되었다. 베드로가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벧전2:25), “목자장”(벧전5:4)으로 묘사하신 분이 이 사도에게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다(요21:15-17). 유대인의 우리에 들어 있지 않은 양도 있다는 것이(요10:16), 베드로에게는 생생하게 새겨지게 되었을 것이다(행10 :9-16,34-48,11:17,18). 이 사도의 생애에서도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요17:21)라는 대 원리에서 순간적으로 이탈하는 실수가 있었지만 베드로가 바울의 책망을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믿는 것은 당연하다. 주께서 마침내 그를 이 세상에서 해방시키고(요21:18,19), 약속된 기업을 그에게 주시기까지(벧전1:4) 신실하게 수고하였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는 그리스도의 예언은 그의 증거의 열매에 의하여 충분히 이루어졌다. 음부의 권세(문들)가 이기지 못하리라. 복음서에서 “음부”는 당연히 “지옥”이다. 그 이외에 “죽음의 왕국”이라는 의미를 택하는 자들은 그 왕국의 문이 교회를 이기려고 한다는 것과 그들의 공격이 실패한다는 점에서 큰 곤혹을 당한다. 음부가 “지옥”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될 때 주님에 의해 본문에 주어질 확증이 쉽사리 이해될 수 있다. “지옥의 문들”은 환유법을 통하여 사단과 그의 군대들이 교회를 공격하고 파괴하기 위하여 뛰쳐나오고 있다. 본문이 담고 있는 내용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악의 군대를 이길 것이라는 사실을 재차 반복한 약속이다. 이 구절은 마치 예수님께서 “너희가 속한 교파나 회중의 교리적 순수성에 대해 염려하지 마라. 내가 지옥의 문들이 결코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을 보리라고 약속하지 않았느냐?"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종종 오용된다. 마치 예수님께서 특별한 이 교파나 저 교파 또는 지역회중은 절대로 그 교리적 순수성을 잃을 수 없게 된다고 약속하신 것처럼 생각한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자기 백성이 악마와 그의 군대를 이기도록 할 것을 약속하셨다. 이 약속은 차지도 뜨겁지도 아니한 라오디게아 교회에서 주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군사들”에게 주신 것이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천국의 열쇠를 가진 이가(계1:18, 3:7) 입장을 허락할 자와 거절할 자를 결정한다. 한 무리로서 그 사도들이 이 권리를 행사한 것은 사도행전 전체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모든 사도들은 어떤 두령이나 감독도 없이 대등한 입장에서 이 권리를 행사했다(4:3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상고한 바와 같이 베드로의 영향은 주목할 만하게 나타났다. 복음의 선포를 통하여 그는 어떤 사람들에게 그 문을 열고(행2:38,39, 3:16-20)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문들을 닫았다. “어떻게 거룩한 복음의 선포에 의해서 천국이 열려지고 닫혀지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하이델베르그교리문답(주의 날 31. 질문에 대한 답변84)은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르면 믿는 사람들 모두에게 그것을 공공연하게 선포하고 증거 함으로 그들이 참 믿음에 의하여 복음의 약속을 받아들일 때는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든 죄를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진정으로 용서하신다. 그러나 모든 불신자들과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 선포되고 증거 됨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개심하지 않는 한 하나님의 진노와 영원한 정죄가 그들 위에 머무른다. 이 복음의 증언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이생과 내세에 걸쳐 모두 심판하실 것이다” 治理(치리)는 열 두 사도에 의해 행해졌으며, 베드로가 맡은 역할은 여기에서 다시 강조되었다(5:1-11). 얼마 후에 바울 역시 두 가지 요소 즉 복음의 선포와 치리의 활용을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하였다. 마태복읍16:18에서의 “교회”와 19절에서 “천국”은 의미에 있어서 동일할 수 없지만 아마 후자가 본문에서도 역시 더 넓은 개념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18절에서 “교회”로 말미암아 하신 것과 같은 일을 본문(19절)에서는 “천국”에서도 행한다는 의미이다. 유형교회에서의 제명(18:17, 고전5:5상반절)은 가능하다. 천국에서의 제외도 마찬가지이다(8:12). 따라서 “천국 열쇠”라는 용어가 복음 선포와 치리의 실행과 관련된다고 하는 비교적 일반적인 견해가 옳다고 하는 것은 바로 사도들이 하나님의 승인과 더불어 그들의 사역을 수행하고 그들의 권위를 주장하는 방법에서 나타나게 되었을 것이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이 말씀은 “베드로가 천국 열쇠의 능력”올 땅에서 행사하는 것처럼 서술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18:18을 보면 바로 그 표현 “누구든지”가 아니라 “무엇이든지”를 유의하라 그 구절이 이 믿음과 행실에 있어서 직접적으로 사람이 아닌 사물임을 유의해야 한다. 매는 것과 푸는 것은 금하는 것과 허락하는 것을 의미하는 랍비적인 용어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회개하기를 거절하면서 급해진 것을 행하거나 믿는다면 그는 당연히 징계 받게 될 것이다. 반대로 만일 그가 그 악한 길에서 회개했다면, 그는 용서받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 “금지령”이 해금될 것이다. 그러므로 간접적으로 그 구절은 마태복음16:19과 요한복음20:23의 비교에서 지적되는 바와 같이 교인들의 지속적인 선이나 지속적인 선의 결핍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열 두 사도를 대표하는 베드로(마16:19)나 열 두 사도(요 20:23), 궁극적으로는 그 교회(마18:18)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분명히 매일 것이며, 이와 마찬가지로 베드로(기타, 등)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분명히 풀릴 것이라는 것이다. 믿음과 도덕에 대한 이러한 권위, 그리고 결국에는 교만에 대한 이러한 권위가 예수님의 가르침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과 완전한 조화를 이룰 때에만 행사될 수 있다는 것은 거의 부언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침범하는 것이 되는 금하는 것과 허락하는 것, 제외시키는 것과 수용하는 것, 또는 재수용하는 것 둥의 어떠한 매는 것과 푸는 것이라도 분명히 정리하셨다(15: 1-20, 23:13)(William Hendriksen, 1985, 404-414).
Matthew Henry는 이렇게 주석했습니다.
(주님의 목적은) 목적은 교회를 설립하는 것이다. 교회설립을 승인하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교회의 머리요 통치자이시며, 모든 심판권을 위임받으셨고, 모든 능력의 근원이시다. 이에 따라서 그는 아버지에게서 권위를 받으셨으며, 선택된 자의 구원을 떠 맡으셨다. 그 설립 허가장은 베드로의 손에 주어졌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교회와 연관된 구약의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다윗처럼 신앙과 거룩함이 탁월한 특별한 사람들에게 즉각적으로 주어졌다. 그러나 그들에게 우선권(최고직)은 부여하지 않으셨다. 그 계승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신약의 헌장은 대리자인 베드로에게 교부되었지만, 이 헌장은 그 속에 구체화되고 내포된 목적에 따라서 모든 시대에 걸쳐 교회의 유익을 위해 교회에서 사용되도록 하였다. 약속된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를 반석 위에 세우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정치적 통일체(body poiltic)는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체제와 명칭에 의해 통합되고 있다. 교회는 세상에서 불러냄을 받아 구별되어 그리스도에게 바쳐진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것은 “너의” 교회가 아닌, “나의” 교회이다. 베드로는 이 말씀을 기억하였으므로, 사역자들에게 “하나님의 기업에 대해 주인이 되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교회는 그리스도에게 속했다. 세상은 하나님의 것이며 그 속에 사는 자들도 다 그의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선택된 남은 자들이 모인 곳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형상과 표제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교회의 설립자와 창시자는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내가 교회를 세우리니” 교회는 그리스도가 설립자가 되시는 성전이다. 그 재료와 솜씨 모두 그의 것이다. 그의 말씀을 전파하는 데 있어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주님께서는 영혼 속에 교회를 더 첨가시키시며, 또한 교회를 살아있는 돌(벧전2:5) 위에 세우시는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의 건축물”이다. 건축은 점진적으로 행해진다. 이 세상에 있는 교회는 건축에 있어서 집과 같이 “형상”(in fieri)에 지나지 않는다. 신적인 지혜와 능력을 가지고 계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지을 책임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은 교회가 잘 지어지기를 바라는 모든 사람들에게 큰 위안을 준다. 교회가 세워지는 기초는 “이 반석”이다. 건축가가 아무리 최선을 다해 공사를 했다고 할지라도 그 기초가 썩어버린다면 그 건물은 오래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초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그 기초는 그리스도이다. “왜냐하면 아무도 다른 기초 위에는 교회를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는 “반석” 위에 세워진다. 견고하고 강하며 영구적인 기초 위에 세워지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래 위에 그의 집을 세우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그는 폭풍이 일어날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 세상과 동일한 위치에 세워지지 않는다. 반석은 크고 넓다. 교회의 기초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크면 클수록 더욱 견고하게 되기 마련이다. 교회는 반석 위에 세워진다. 너는 “베드로”이다. 베드로라는 뜻은 “돌이나 반석”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처음 베드로를 불렀을 때(요1:42) 그 명칭을 부여하셨다. 여기에서는 그것을 확인하실 뿐이다. “베드로야, 너는 네 이름에 합당하게 행동하고 있다. 너는 견고하고 실속 있는 제자이며, 불변적이고 참을성이 있다. 또한 통솔력을 가지고 있는 제자이다. 베드로는 너의 이름이며, 강함과 견고함이 너에게 있도다. 너는 나에 대한 사람들의 그릇된 견해에 현혹되어 요동하지 않고 현재의 진리에 굳건히 서 있구나” 이 의미심장한 이름을 언급하신 것은“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시리라”는 사실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 반석이라는 말을 사도 중에서 우두머리인 베드로 자신이라고 해석한다. 베드로는 열두 사도 중에서 왕은 아니었지만 그들 중에서 손위였다. 그렇지만 그들보다 월등한 지위에 있지 않았다. 교회는 사도들의 기초 위에 세워지고 있다(엡2:20). 그 건축물의 첫 기초는 그들의 사역에 의해, 사역 가운데서 놓여졌다. 그러므로 그들의 이름은 새 예루살렘의 “기초석에 새겨진다”(계21:14)고 말했다. 이제 베드로는 유대인을 회개시키고(행2장) 이방인을 회개시킴으로써 교회의 첫돌을 놓은 사도가 되었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그는 기초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게바”는 기둥으로 여겨지기도 하였다(갈2:9). 그러나 단지 건물의 첫 돌을 놓은 사람을 교회의 기초라고 부르는 것은 너무도 성급한 일이다. 교회에 첫돌을 놓는 일은 일시적인 행동에 불과하며, 기초를 놓는 일만이 영구적인 일이 될 수 있다. 만일 그렇게 하였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사실이 로마교황의 위선적인 교리를 지지해 주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그가 주장하는 것과 같은 지도권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의 계승자들이라고 하는 로마교회의 주교들에게까지도 그 지도권이 이어져 내려올 수는 절대로 없다. 어림없고 어처구니 없는 소리이다. 로마의 주교들이 실제로 베드로의 자리를 계승했는지 안했는지의 여부도 문제가 되겠지만, 교회의 진리에서 볼 때 그들의 이러한 전통성의 재론성은 재론할 가치도 전혀 없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이 “반석”을 “그리스도”라고 생각한다. “너는 베드로라. 너는 돌이라는 의미를 지닌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 반석 위에(자신을 가리키면서) 내 교회를 세우겠다” 아마도 그가 “그 자신의 몸이 성전임을 말씀하셨을 때” “이 성전을 혈라”(요2:19)고 말씀하시면서 그의 손을 가슴에 얹으셨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 때에 그가 계셨던 곳이 성전이었으므로, 많은 사람들은 그의 이러한 말을 듣고 오해를 하였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들어 자신이 반석임을 말씀하셨지만 사람들은 그가 베드로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인 줄로 오해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그리스도만 이 교회의 유일한 기초가 되신다고 말하는 많은 성경 귀절들에 의하여 설명되어져야만 한다.
고린도전서3:11절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베드로전서2:6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그리스도예수님은 교회의 기초자이시며 또한 그 기초이시다. 그는 영혼을 이끌어 내시며, 자신에게로 모으신다. 그들은 그에게 연합되어 있으며, 그를 의지하고 영원히 신뢰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반석”이 베드로가 그리스도에게 고백했던 신앙고백이라고 해석하며,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그 반석이 곧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깨닫게 만들고 있다. 베드로가 고백했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신앙고백은 참으로 훌륭하였다. 나머지 제자들도 그의 신앙고백에 동의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이제 내가 이 위대한 진리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 이 진리 자체를 없애버린다면 보편적(universal)인 교회는 무너진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시라면 그리스도교는 일종의 속임수이며 단지 하나의 환상에 그치고 말 것이다.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며, 너희 믿음도 헛것이요,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 그대로 있으리라“(고전15:14-17). 만일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니시라면, 그를 소유한 자들은 교회에 속한 자가 아니라 속이는 자이거나 속임을 당한 자에 불과하다. 어떤 특정한 교회로부터 이 진리에 대한 믿음이나 신앙고백을 없애버린다면 그리스도의 교회의 한 지체가 되지 못하고 불신상태의 신분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이것은 articulus stantis et cadentis ecclesiae / 교회가 일어서느냐, 또는 무너지느냐를 판가름하는 조항이 되는 것이다. 즉 “구원의 문을 돌리는 중요한 돌쩌귀(hinge)”가 되는 것이다. 그대로 내버려 두는 자는 기초를 붙잡지 못한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을 기독자라고 자처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결국은 자신을 속이는 일이 되고 마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이 위대한 진리의 확실성 위에 설립된 성스러운 단체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위대하며, 지금까지 승리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에서 교회가 세워질 때 그 교회를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실 것을 약속하고 있다. “음부의 권세(또는 문)가 이기지 못하리라” 이 진리를 이기거나 이 진리 위에 세워진 교회를 이기지 뭇하리라. “음부의 문(권세)”은 음부의 도성이다. (이 도성은 하늘에 있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과 직접적으로 반대의 도성이다) 이 음부의 도성은 사람들을 지배하는 마귀의 권세라고도 할 수 있다. 음부의 문은 마귀왕국의 권세와 교활함 즉 용의 머리와 뿔, 마귀는 이러한 것을 가지고 “어린 양”과 싸움을 일으킨다. 음부의 문에서 나오는 것들은 음모와 모략 같은 것들이다. 이러한 것들은 복음의 진리를 반대하거나 복음의 규정을 타락시키거나 선한 사역자나 기독자를 박해함으로써 교회를 대적한다. 즉 간사하게 이끌리는 체하거나 강제적으로 시키게 하는 방법(이러한 것은 종교의 순수성에 위배)을 사용하여 교회를 대적한다. 이러한 것들은 기독교의 이름을 말살하거나(시83:4), 이 도성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음부의 문(권세)의 악한 음모이다. 이 헌장의 또 다른 목적은 교회의 질서와 통치를 설정하기 위한 것이다(19절). 도시나 단체가 설립이 될 때 행정관리들은 공공의 유익을 위해 임명되고 자격을 부여받게 된다. 통치체제가 없는 도시는 혼란을 거듭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교회정치의 제정은 열쇠를 교부함으로써 또한 그들에게 매고 풀 수 있는 권한을 줌으로써 표현된다. 그러나 베드로가 마치 천국 문의 유일한 문지기이거나 또는 다윗의 후손에게만 소속된 다윗의 열쇠를 가진 것처럼 그에게 어떤 특별한 능력이 주어진 것으로 이해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이러한 능력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지도하고 통치하도록 모든 사도들과 그들의 계승자들에게 사역적인 권세로 주어지고 있으며, 복음의 규칙을 따라 어떤 특별한 모임이나 교회에 존재하는 것이다. “제사장이 된 우리 모든 사람들은 축복받은 사도 베드로 대신에 천국열쇠를 받았다. 열쇠는 단지 맨 처음 베드로의 손에 주어졌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방인에게 맨 처음으로 신앙의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행10:28). 왕이 자치지구에 헌장을 수여할 때 지방장관들에게 그의 이름으로 재판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다. 즉 그들로 하여금 사실을 심리하고 법에 따라 결정하며, 대법원에서 정규적으로 행해진 것처럼 확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도 그의 교회를 설립하실 때 질서와 통치를 유지하고 또한 그의 법이 적절하게 집행되는가를 살피게 하기 위하여 사역의 직분을 임명하셨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그는 “내가 그 열쇠들을 이미 주었다”거나 “지금 주고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내가 줄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시는데, 이것은 그의 부활 후에 주실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그러한 선물들을 주셨다(엡4:8). 그 때에 이 권세는 베드로에게만 아니라 남은 모든 사람들에게도 실제적으로 주어졌다(마28:19,20, 요20:21). 그는 열쇠가 “주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내가 그 열쇠들을 주리라”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사역자들은 그들의 권세를 그리스도에게서 받고 있으며 또한 그들의 모든 권세는 그의 이름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고전5:4). 여기에 위임된 권세(권한)는 영적인 권세이다. 그것은 “천국” 즉 교회에 속한 권세이다. 지상에서 전투하는 교회는 복음시대에 속한 권세를 가지고 있다. 사도적이고 치리적인 권세도 이러한 권세에 속한다. 여기에 표현된 권세는 사회적이고 세속적인 권세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후에 “하나님 나라에 속한 일”들에 대하여 가르쳤다(행1:3). 여기에서 주어진 것은 곧 열쇠의 “힘”(권세)인데, 이것은 어떤 장소에 대한 전권을 부여하는 관례적인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또는 집주인이 청지기에게 “때를 따라 그 집 사람들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거나”(눅12:4)또는 필요할 때 가족의 규칙을 따라 거절하도록 창고열쇠를 주는 것과 같다. 사역자들은 “청지기”이다(고전4:1). 다윗 집의 “열쇠”를 가졌던 엘리아김은 “집을 다스렸다”(사22:22). 여기에서 위임된 권세는 “매고 풀 수 있는” 즉(열쇠의 은유법을 따른다면) 닫고 열 수 있는 권세이다. 바로 집의 주인이었고 창고지기였던 요셉은 “임의로 백관을 제어하며 지혜로 장로들을 교훈하였다. 집의 창고나 보고가 닫히게 될 때 그들은 묶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집의 창고나 보고가 다시 그들에게 열리게 될 때 그들은 그 속박에서 해방되어 비난을 면하게 되며, 그들의 자유를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위임된 권한은 그리스도께서 적절한 지배권을 인정하실 것을 약속하셨던 권세(권한)이다. 주님께서는 그의 청지기들의 판결을 그 자신이 시인하심으로써 정당화하실 것이다. 즉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옳고 그르든 간에 교회의 모든 단점을 인정하시겠다는 말씀은 아니다. 말씀에 따라 즉 열쇠를 옳은 방법으로 돌리면 당연히 문이 열리듯, 이러한 것이 하늘에서 보증이 되는 것이다. 즉 신실한 사역자의 입에 있는 복음의 말씀은 사람의 말로 간주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간주되며 또한 이와 같이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그러면 “천국 열쇠는 어떤 열쇠인가?” “지식”의 열쇠라고 불리는 “교훈”의 열쇠이다. “너희는 앞으로 하나님의 뜻을 진실하고 책임감 있게 세상에 설명하는 임무를 맡게 될 것이다. 이 사명을 위하여 너희는 임명장 즉 신임장을 받게 될 것이며, 매고 풀 수 있는 완전한 가르침을 받게 될 것이다. 그 당시에 유대인들의 일상적인 대화에서 이러한 표현은 금지나 허락을 의미했다. 불법적인 일들에 대해 가르치거나 선포하는 일은 “매는” 것이요, 합법적인 일들에 대해 가르치거나 선포하는 일은 “푸는” 것이었다. 이제 사도들은 이와같은 특별한 권세를 가졌다. 모세의 율법에 의해 금지된 어떤 일들 즉 어떤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등의 일들은 지금 허락이 되었으며 또한 모세 율법에 허락이 된 이혼과 같은 일은 지금 금지되었다. 또한 사도들은 이것을 세상에 선포하도록 권한을 받았으며, 사람들은 그들의 말들을 취하게 될 것이다. 베드로가 처음으로 “아무 것도 속되거나 부정하다고 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받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쳤을 때 이 능력은 실천되었다. 또한 임명된 직임자(officers)로서 복음을 전파하도록 모든 사역자들에게 나타내어진(암시된) 일반적인 권세가 있다. 즉 하나님의 이름으로 성경 말씀을 따라 “무엇이 선한 것이며, 주님께서 그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사람들에게 말하도록 그들에게 일반적인 권세가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모두 선포하는” 자는 이 열쇠를 잘 쓰는 자이다(행20:27). 어떤 사람들은 주님께서 열쇠를 주신다고 하신 것은 율법사들이 창안하였던 관습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관습에 의하면 율법사는 율법 책을 취하여 읽는 권한을 받았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그 책이 보관되어 있는 상자의 열쇠를 손에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매고 푸는 것”은 그들의 책이 두루마리로 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실로 매어 그 두루마리를 닫았으며, 열 때는 그 실로 풀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필요할 때 백성들에게 복음의 책을 열고 닫을 수 있는 권세를 사도들에게 주시고 계시다. 이 능력의 실천에 대해서 사도행전13:46, 18:6절을 보면 사역자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하는 자에게는 용서와 화평을,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는 진노와 저주를 전파할 때 그들은 이 “매고 푸는” 권세에 따라 행동하였다. “천국 열쇠”는 “훈련”의 열쇠인데, 이것은 특정한 사람들의 개성과 행동에 대한 올바른 평가에 근거하여 그들에게 앞서 말한 교훈을 적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에서 수여된 권세는 법률적(입법적)인 것이 아니라 재판적(사법적)인 것이다. 법관은 법을 만들 수 없고 단지 법이 무엇인가를 해명하며, 그 원인에 대한 결과를 편견 없이 조사한 후에 이에 준한 판결을 내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열쇠의 권세”이며, 교인들은 어느 곳에 있든지 이 권세와 그 특권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교회에 들어갈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 “모든 족속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라.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을 고백하며 그에게 순종하는 자들은 세례를 받음으로써 교회의 일원으로 인정될 것이다”(Matthew Henry, 1981, 351-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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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절대주권(로마서 9:14-18)
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선택과 유기를 우리가 생각할 때 무엇인가 불평등한 느낌을 받는 것 같습니다. 바울사도가 하는 말이 그 말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렇다고 하나님께 불의가 있을까? 아니? 그렇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불만이 있을까?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에 대한 불만인 사람들의 요구가 무엇입니까? a. 하나님의 선택은 아무래도 불의한 것 같다. b. 하나님께서 선택하셨다면 인간에게는 죄에 대한 어떤 책임도 없지 않느냐? 과연 하나님의 선택이 정당한가? 사람들의 의지는 전혀 반영되지 않고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정책이 괴연 공의일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전 역사는 하나님의 선택과 선별과정이었습니다. 바울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전혀 불평등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Servius Sulpicius Galba(재위68-69/로마 제6대 황제)는 Nero에 이어 로마황제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고압적인 통치스타일 때문에 친위대 병사에게 살해되었습니다. Galba는 폭군 Nero를 쫓아내고, 황제로 등극했을 때,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고 또 누구에게라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Roma황제의 특권을 말한 것입니다(William Barclay, 1981, 192). 바울사도는 출애굽기33:19을 인용합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하나님께서는 한 민족이나 한 세기에 대해서는 자비를 베푸시고 다른 세기와 다른 민족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나오시는 이유가 이성으로 봐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만큼 사람들이 공정하지 못하다고 툴툴거립니다. 어느 사람은 택하고 어느 사람은 버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은 언제고 불경건한 사람들의 중상모략을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다양성의 원인을 이해하기 전에는 이 양자에 대한 구별을 짓는 하나님께서 불공평하다고 정죄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에 따라서 자신이 기뻐하는 자들에게 자신의 특수한 자비를 행하심으로써 자신의 의를 주장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전파를 통해서 영원 전부터 비밀로 되어 있던 이 신비를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불가해한 경륜을 신자들에게 지적했습니다(롬16:25).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동안 오랜 세기에 걸쳐서 국외자들이었던 이방인들을 교회의 품에 접붙여 주심으로써 천사들에게 마저 숨겨 두셨던 오묘한 신비를 시간이 차자 만민에게 드러내 보여 주셨습니다(엡3:9). 하나님께서는 그가 자신을 옛날 족장들보다 모세에게 더 완전하게 드러내 보여주시는 원인은 오직 자신의 경륜 내지는 선하신 뜻에서 찾아야 한다는 점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은혜의 시여는 자신의 유일한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느 민족의 선택과 그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의 태도도 오직 하나님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애굽과 바로의 권력으로부터의 해방 전쟁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습니다. 모세가 처음으로 바로에게 가서 놓아달라고 요구했을 때, 바로에게 경고하기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또 그 능력을 거역하는 자에게 그 능력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명백히 하기 위해서 바로를 역사의 무대 위에 올려놓으셨다고 했습니다. 바로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에게 대항하는 사람에게 어떤 일이 생길 것인가 하는 한 예로써 역사 위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새삼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아무 일이나 하실 수 있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성격에 위배되는 일을 아무 것도 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지구의 공전과 자전을 바꾸신다든지, 지구의 자전을 바꾸신다든지 하지는 않으십니다.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빚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베푸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에서 바로의 마음상태에 대한 구절이 여러 곳에 있습니다.
7:13 그러나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여…
7:22 애굽 술객들도…행하므로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여…
8:19 …바로의 마음이 강퍅케 되어…
9:12 그러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9:35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여…
10:20 그러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10:27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11:10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13:15 그 때에 바로가 강퍅하여…
14:4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강퍅케 하다’는 ‘강화하다’라는 말입니다. 즉 바로가 자신의 마음을 강화하였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는 모세의 말을 자신의 마음을 강화시켜 무시해버렸다는 말입니다. 9:12절과 10:20 등에서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 말을 잘못 이해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신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본래는 선했던 바로의 마음이었는데,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고의적으로 악하고 강퍅한 마옴으로 바꾸어 놓으셨다는 뜻으로 알기 쉽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느 누구의 마음도 능동적으로 개입하셔서 강퍅케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악한 자들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돌이켜 회개하여 살기를 원하십니다.
에스겔33:11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디모데전서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베드로후서3:9 주의 약속은 어떤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이 세상의 패역한 인간들이 하나님을 대항해서 자기들 스스로의 마음을 강퍅케 했을 뿐입니다. 바로는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동안 자신의 행동이 여호와께 명백한 죄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원초적으로 주어진(창2:16.17) 자유의지를 남용하고 악용하여 자신의 오만한 거부 행사를 철회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그 강퍅한 마음을 그대로 버려 두어 전혀 관여치 않으셨습니다. 본 절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유기 상태를 표현한 말입니다(롬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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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과 유기(로마서 9:6-13)
하나님의 본성에서 “하나님께서는 선하심이 영원불변하시다”고 말합니다. 소요리문답이 가르치는 대로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도 항상 그리고 앞으로도 항상 무한히 선하십니다. 하나님의 본성의 이 완전성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모든 피조물을 관대하고 친절하게 대하십니다. 하나님의 거룩의 속성이 피조물에 대한 그의 초월성을 강조하고 있다면 그의 선하심의 속성은 그의 피조물을 향한 謙讓(겸양)을 강조하는 것입니다(Robert L. Raymond, 2004, 276).
우리는 성경에서 또는 신학에서 예정과 선택 그리고 유기를 만나게 됩니다. 아무리 이것을 제거하려고 해도 제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제거해서도 안 됩니다. 그 이유는 성경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예정이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의해서 발생하는 모든 일들을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여 놓으신 것입니다(엡1:11). 선택이란 어떤 특정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며 영원한 구원을 소유하게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특별은총을 받게 하는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입니다(눅10:20, 행13:48, 롬11:5, 엡1:4, 살후2:13). 유기란 어떤 특정한 사람들을 하나님의 특별은총의 수혜에서 제외시키며, 그들의 죄로 인하여 영원한 형벌에 들어가게 하는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입니다(롬9:13,17,18,21,22, 벧전2:8). 하지만 우리가 조심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두 가지 하나님의 작정이 모두 결정적이지만, 이 두 가지가 모든 면에서 동등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죄는 유기의 작정에 관한 정의에서 언급된 형벌의 원인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선택의 작정에 관한 정의에서 언급된 구원의 원인은 아닙니다(William Hendriksen, 1984, 35). 어떤 의미로는 타락, 죄, 그리고 영원한 형벌이 모두 하나님의 작정 안에 포함되어 있으며 하나님에 의하여 의도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어떤 의미에 있어서만 그러할 따름입니다. 은혜와 구원과 같은 의미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은혜와 구원은 모두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죄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으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형벌을 즐기시지도 않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사랑의 하나님께서 어떻게 어떤 사람들로 하여금 영원한 형벌에 빠지도록 결정하실 수 있는가?입니다. 이 질문은 수많은 사람들이 제기하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또한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처벌을 요구하시는 공의의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영원한 생명과 영광에 이르도록 결정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입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놀라운 일”은 죄를 대속하시기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입니다.
이에 대하여 1647년에 작성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Westminster onfession)은 선택과 유기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가장 지혜롭고 거룩한 자신의 뜻의 경영에 의하여 장차 되어 질 모든 일을 자유롭게, 그리고 변함없이 미리 작정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의 창조자는 아니고, 인간의 의지는 침범당하지 않으며, 제2원인의 자유와 우연성은 폐하여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굳게 선다(제3조1항). 하나님은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된 사람들을 창세 전에 그의 영원하며 불변하신 목적과 비밀의 계획과 그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영원한 영광에 이르도록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셨는데,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와 사랑으로 된 것이며, 사람에게 있는 신앙이나 선행이나 인내나 다른 어떤 것이 하나님을 감동시켜서 그들을 선택하게 하리라는 것을 미리 보시고 선택하신 것이 아니며,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화로우신 은혜를 찬송하기 위하여 선택된 것이다(제3조5항). 하나님께서는 측량할 수 없는 그의 뜻의 경영을 따라서 택한 백성 이외의 사람들에게 대하여 기뻐하시는 대로 자비를 베풀기도 하시고, 베풀지 않기도 하신다. 모든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권능의 영광을 위하여 용서도 하시고 부끄럽게도 하시며, 그들의 죄에 대하여 노하기도 하시고, 자기의 영광스러운 의를 찬양하게 하기를 기뻐하시기도 하신다(제3조7항).
이와 동일한 진리들이 도르트 신조(Dort Canons)의 제1부 7조와 15조에 표현되어 있으며, 벨기에 신앙고백(Belgic Confession)의 16조에도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Heidelberg Catechism)은 이 문제를 거의 말하지 않습니다. 도르트 신조 제5부의 실수의 거부, 결론에서 개혁교회의 교리가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로 만들었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에게 경고를 보내고 있습니다.
…(개혁교회는) 하나님은 어떤 죄를 예상하시거나 보시는 일도 없이, 순수한 의지의 임의성만에 의해서 세계의 대부분을 영원한 정죄로 예정하셨으며, 오직 그 정죄만을 위하여 그들을 창조하셨다고 가르치며, 선택의 사실이 신앙과 선행을 일으키는 근거가 되는 것과 똑같은 형태로 유기는 불신앙과 불경건의 원인이 된다고 가르치며, 신자의 많은 자녀들이 죄가 없으면서도 그들의 어머니의 품에서 탈취되어서 폭력에 의하여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다고 가르치며…개혁교회가 인정하지도 않을 뿐더러 전심으로 싫어하는, 이와 유사한 많은 것들을 개혁교회가 가르치고 있다고 그들은 말한다.
개혁교회가 잘못이해하고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 오히려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遺棄(유기)된 자들도 이 세상에서 많은 복을 받고 있습니다. 이 복은 유기의 작정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혜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들은 생명, 건강, 힘, 양식, 행복 등의 많은 자연적인 은사를 받습니다(마5:45, 행14: 17, 17:28, 롬1:19, 약1:17 등). 또한 하나님께서는 유기된 자들에게도 스스로를 증거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 대해서도 오래 참으심을 보이십니다(롬9:22).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도 자신의 은혜의 복음이 선포되게 하십니다. 그들의 죽음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겔18:23,33:11, 마23:37, 눅19:41,24:47, 요3:16, 행17:30, 롬11:32, 설전5:9, 딤전2:4, 벧후3:9). 우리가 아는 대로 가인은 유기된 자였습니다.
요한일서3:12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유다서11 화 있을찐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좇아 멸망을 받았도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가인을 자비롭게 대하셨습니다. 창세기4:14-15을 보면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찌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
사실 우리의 신조는 타락후 예정론(infralapsarian)의 입장에서 생겼습니다. 즉 영광에 이르도록 예정된 사람들은 그들이 스스로 뛰어든 죄와 파멸의 상태로부터 선택되어서 건져내어진 사람들입니다. 멸망에 이르도록 예정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작정에 의하여 그 상태에 남아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왜 타락을 허락하셨는가?”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질문에 대해서 명쾌하게 답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저 신명기29:29의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라는 말씀밖에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욥기11:7,8의 말씀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여 전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어찌 하겠으며 음부보다 갚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 그러나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기이한 일들을 보고 있습니다. 악인들이 왜 득세를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 보기에 선한 사람들이 왜 고통을 받느냐는 것입니다. 수백만 수 천만 명이 지구상에서 학살을 당하느냐는 것입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비이성적인 일들이 일어났었고,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오묘는 우리가 측량할 수 없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택과 유기의 교리에 대하여 반대의 입장을 취하는 많은 견해들 중에서도 로마서9:13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의 선택과 유기의 교리를 지지한다는 의견에 대하여 반대의 입장을 취하는 견해들입니다. 이중에 반대하는 입장은 선택교리는 옳지만, 유기교리는 틀렸다는 것입니다, 로마서9:13뿐 아니라 성경의 어떤 귀절들도 유기를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실제로 선택과 유기를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이 지금까지 이미 제시되었습니다. 그러나 선택과 유기는 위에서 말한 대로 성경적입니다. 선택과 유기는 함께 성립되든가 부정되든가 하는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선택하시지 않은 사람은 거절하십니다. 하나님의 경영은 모든 것을 포괄하신다는 것을 우리들이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선택하실 때, 그로 하여금 마침내 천국에 들어오도록 하실 뿐 아니라, 그의 탄생으로부터 영화에 이르는 모든 과정에서 그를 인도하십니다(시139:16). 결코 성도들은 진공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도의 생명과 불신자의 생명 사이에는 만리장성이 가로 놓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택된 자의 삶과 선택되지 않은 자의 삶은 철저하게 서로 뒤얽혀 있습니다. 예로 선택된 자의 밭과 선택되지 않은 자의 밭에 비는 똑같이 오며 햇빛도 같이 비추입니다. 경기장에서, 학교에서, 사업장에서, 공장에서, 정치에서 등 선택된 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든 하나님의 계획은 선택되지 않은 자에게도 영향을 미치십니다. 그러면서도 그 계획은 그 두 가지의 경우에 있어서 공히 인간의 책임을 백지화시키는 일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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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의 자녀(로마서 9:6-13)
7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8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9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10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유대인들은 자기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였습니다. 배척한 것을 넘어서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목적이 좌절되고, 하나님의 계획이 차질을 가져온 것이라는 말인가?(William Barclay) 바울의 대답은 ‘아니오’입니다. 바울의 논증은 . 사실상 유대인 모두가 예수님을 배척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중 얼마는 예수를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초기 신자들은 다 유대인이었습니다. 초기란 복음이 이방으로 나가기 전입니다. 그리고 바울 자신도 유대인이었습니다. 사도들도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만약 우리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선택의 과정이 되풀이 하여 작용하고 있는 것을 볼 것이라는 것입니다. 반복하여 하나님의 목적과 설계 안에 들어 있는 사람은 유대인 모두가 아니라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중 일부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일부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하나님의 계획을 집행해 나가신 민족의 계보는 절대로 아브라함의 肉的後裔육적후예라고 주장하는 모든 사람으로 구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전체계획의 배후에는 순전한 혈통적 후예만이 아니고 하나님의 택하심의 꼭 있었습니다. 자기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바울은 유대역사에서 두 경우를 예를 들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여종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의 처 사라의 아들 이삭입니다. 이스마엘과 이삭 두 사람은 틀림없이 다 아브라함의 혈육입니다. 육체적으로 그들은 둘 다 그의 아들입니다. 사라가 아들을 낳은 것은 너무 늙어서 인간적으로 말할 때 불가능하다고 할 정도로 나이 많아서였습니다. 이삭이 나서 자랄 때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는 날이 왔던 것입니다. 사라는 매우 언짢게 생각했습니다.그리하여 하갈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을 내어 쫓았습니다. 이삭 흔자서 상속할 수 있게 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어 쫓기가 그랬습니다.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사라가 싫어해도 차마 그럴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내오 쫓으라고 명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자손이 그의 이름을 유지할 것이 이삭 안에서였기 때문입니다.
창세기21:10-12 10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매 11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위하여 그 일이 깊이 근심이 되었더니 12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사실 이스마엘이 하갈의 소생이라 해도 누가 보거나 누가 말해도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사도의 논증은 자연적이고 인간적인 방법과 욕망으로 낳은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아브라함과 하갈은 충분히 생리적으로 아들을 낳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인간적인 입장에서 볼 때 아들을 낳는다는 것조차 불가능한 때에 낳았습니다. 즉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아들이었습니다.
창세기18:10-14 10 그가 가라사대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11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는 끊어졌는지라 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1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14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진정한 후계권이 주어진 것은 약속의 아들이어야만 했습니다. 따라서 모든 아브라함의 육적인 후손이 다 유대인 즉 선택된 자로서 인정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민족 안에서 하나님의 선별과 택함은 계속되었습니다. 선택의 다른 예로서 바울사도는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잉태했을 때 하나님이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즉 그의 태속에는 두 민족의 조상이 될 두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때가 이르면 형이 아우를 섬기고 그에게 종이 되리라는 것입니다(창25: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이런 상황에서 쌍둥이 에서와 야곱이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사실은 에서가 형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택은 야곱이었습니다. 그 야곱의 계통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변론의 결론을 내리기 위해 바울은 말라기1:2-3을 인용했습니다. 그 곳에는 하나님이 그 선지자에게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바울의 논증은 유대인 됨에는 아브라함의 후손됨보다 무엇인가가 더 있고, 택함 받은 백성은 단순히 아브라함의 육적인 후손의 전체가 아니고, 그 종족 자체 내에서 역사 이래 선택의 과정이 계속 되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면 지금까지의 변론을 완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입니다. 아랍인은 아브라함의 순수한 육적인 아들 이스마엘의 후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유대인은 아랍인이 택함 받은 백성에 속한다고 말하는 것은 꿈도 꾸지 않습니다. 에돔인은 에서의 자손이었습니다. 이것이 말라기가 의미하는 바로서 이삭의 참 아들 아니 야곱의 쌍둥이 형인데도 불구하고 유대인이라면 어느 누구도 에돔 사람이 택함 받은 백성 중에 한 몫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의 관점에서 자기의 주장을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육적 자손의 가족 내에서도 선택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더 나아가 그 선택은 행위와 공로와 그것을 얻으려는 인간적인 노력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말합니다. 그 증거로서는 야곱과 에서는 그들이 낳기도 전에 야곱은 택함을 받았고, 에서는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 선택은 그들이 아직 모태에 있어 낳기도 전에 이루어졌습니다. 불가피하게 우리의 생각은 이 논리에 주저하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명백하게 마음대로 한 사람은 택하고 다른 한 사람은 버리는 분으로 보이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논리가 터무니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에게는 윤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행동에 대하여 책임을 지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에게는 이상하게 보이고 우리가 받아들이기 어렵게 생각이 되지만, 유대인에게는 적중한 논리입니다. 우리에게도 이 논리의 핵심에는 하나의 큰 진리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기인되었고 모든 것 배후에는 하나님의 행위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독단적이고 우연하게 보이는 것 까지도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목적 없이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고 어떤 사람은 거절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의하여 인간에 대한 선택과 유기는 결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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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적 예정견해(로마서 9:6-13)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우리는 현재 이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오는 세상을 맞이해야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습니다. 사람이라고 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두고 떠나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도 많지 않은 날에 그렇게 해야 합니다. 생명이 있는 것들은 반드시 이 세상에서 끝을 계산해야 합니다. 아무리 그 생명이 길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에서는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1년을 365.2422일로 정확하게 계산해서 50년을 살았다면, 1,8262일입니다. 100년을 산다고 가정했을 때는 3,6524일입니다. 많은 것 같아도 그리 많지 않은 것이 인생입니다. 길다고 생각하면 길고, 짧다고 생각하면 짧은 인생을,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살기도 하고, 뒤틀려 살기도 합니다. 옛 학창시절에 유명하다고 생각했던 문인들이 상당수 친일파라는 사실을 알고 경악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종교계에서도 적극적으로 친일파였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노래와 그림과 글 그리고 가르침들이 이어지고 있는 사회가 어이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가르침을 주어야 할 사료들이나 자료들을 없애버렷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들은 아무렇지 않은 일처럼 여기며 살아왔습니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 알기도 전에 친일했던 사람들을 위인으로, 또는 애국자로 바꾸어 가르침으로 인해서 그 피해가 크다는 것입니다. 제2차세계대전이 일어날 때 일본교회와 독일교회는 히틀러와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을 적극 지지했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들의 승리를 기원했습니다. 얼마나 잘못된 일입니까? 사람을 국가별로 살해하는 계획을 세운 사람들을 교회가 축복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영원한 상혼(傷魂)으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예정에 관한 예지적 견해와는 대조적으로 개혁주의적 견해에서는 구원에 대한 궁극적 결정권이 인간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 결정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천명합니다. 개혁주의적 견해에서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께서 일부 사람들의 생활가운데 개입하셔서 그들을 구원에 이르는 믿음으로 인도하시기로 하셨지만,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기로 하셨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행위를 미리 내다보시지 않고서도 영원 전부터 어떤 사람들은 선택하기로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유기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각 개인의 궁극적 운명은 태어나기도 전에 인간의 선택에 전혀 근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결정되었습니다. 물론 인간의 선택은 자유롭게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그러한 선택이 이루어지는 것은 먼저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로 하여금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영향을 미치시기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의 근거는 인간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기쁘신 뜻 가운데 있습니다. 예정에 대한 개혁주의적 견해에서는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의 선택보다 앞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각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 같이 생각되지만. 하나님의 예정이나 하나님의 내적 부르심이 없이는 아무도 그리스도를 선택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토록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히는 예정에 관한 하나의 견해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공정함에 관한 심각한 질문들을 일으키는 견해입니다. 이것은 그토록 많은 분노의 반응을 일으키고 숙명론의 도전 결정론의 도전 등을 유발시키는 견해입니다. 예정에 관한 개혁주의적 견해에서는 황금사슬을(롬8:29,30) 영원 전부터 하나님은 자신이 택하신 자들을 아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창조하시기도 전에 마음속에 그들의 정체에 대하여 생각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개인적 정체에 대하여 미리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먼저 사랑하셨다는 의미에서 그들을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안다”고 말할 때 이 표현이 종종 단순히 사람에 대한 정신적 인식과 깊고 밀접한 사랑 사이를 구별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냥 안면정도 알고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진보해서 단위별로 교제하는 정도의 앎이 아닙니다. 대단히 깊이 아는 앎의 정도를 말합니다. 개혁주의적 견해에서는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들을 모두 내적으로 부르시기로 예정하시고, 그들을 의롭다 하시며, 영화롭게 하시기로 예정하셨다고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그분의 택함 받은 자, 오직 택함 받은 자들만의 구원을 이루십니다.
선택과 유기 (0) | 2022.0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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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의 자녀 (0) | 2021.12.28 |
폐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예지와 예정 (0) | 2021.12.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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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리서치, 총 1천 명 대상 설문조사
한국리서치 조사 결과 1년 전 신앙을 갖고 있던 개신교인 10명 중 1명은 현재 신앙을 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불교와 비슷하고 천주교보다는 약간 높은 수치다. 전체 인구 중 개신교인은 20%로 지난해와 동일했으며, 불교(17%), 천주교(11%)가 뒤를 이었다.
매년 종교 현황을 조사해 온 한국리서치가 '[종교지표-2021년] 종교인구 현황과 종교활동' 여론조사 결과를 9일 발표했다. 설문은 11월 26일부터 29일까지, 응답자 1,000명(개신교인 207명)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단, 종교인구 비율조사는 1월부터 11월까지 23회 걸쳐 진행됐다.
개신교 20%, 불교 17%, 천주교 11% 변동 없어
신자 비율 광주·전라 25%, 부산·울산·경남 13%
2021년 종교인구 비율은 개신교 20%, 불교 17%, 천주교 11%, 기타종교 2%, 종교 없음 50%으로 나타났다.
연령대가 낮을수록 믿는 종교가 없다는 응답 비율이 높았다. 18-29세 응답자 중 67%가 '믿는 종교가 없다'고 했다. 반면 60세 이상 응답자 중 '믿는 종교가 없다'고 한 비율은 34%로, 18-29세의 절반에 불과하였다.
지역별로는, 광주·전라 지역 거주자는 개신교 신자 비율이 25%로 전체 평균(20%)보다 높았다. 부산·울산·경남(13%), 대구‧경북(15%)는 평균보다 많이 낮았다.
믿는 종교가 있다는 응답은 여성(54%)이 남성(46%)보다 높았으며, 개신교는 전체 여성 중 22%, 전체 남성 중 19%가 믿는다고 답했다.
2018년 이후 종교 인구 추이를 보면, 주요 3대 종교 모두 큰 변화 없는 비율을 유지하고 있다. 2019년 이후 개신교 신자는 전체의 20%, 불교 신자는 17%, 천주교 신자는 11%로 3년간 동일하다.
현재 믿는 종교는 2000년 이전부터 믿고 있다는 응답이 59%를 차지했다. 개신교는 2000년 이전부터가 63%, 2001년~2010년이 12%를 차지했다. 40대 이후부터는 새롭게 종교를 믿기 시작하는 것보다는, 기존부터 믿어왔던 종교를 계속해서 믿는 경향이 높았다.
"종교활동 매주 참여", 개신교 6% 하락 천주교 3% 증가
"종교활동이 내 삶에 중요해" 천주교 1%, 불교 2% 증가
1년 전과 비교했을 때 종교에 변화가 있는 사람은 전체의 9%였는데, 구체적으로 살펴 보면 1년 전에는 믿는 종교가 있었으나 현재는 없다고 답한 사람이 6%, 반대로 1년 전에는 믿는 종교가 없었으나 현재는 있다고 답한 사람이 2%였다. 1년 전과 현재 믿는 종교가 다르다는 응답은 1%였다.
1년 전 개신교를 믿고 있었던 사람 중 12%는 현재는 믿는 종교가 없다고, 1%는 다른 종교로 전향했다고 답했다. 1년 전 천주교 신자였던 사람 중 8%는 현재는 믿는 종교가 없다고, 2%는 다른 종교로 전향했다고 했다. 1년 전 불교를 믿었던 사람 중에서는 12%가 현재는 믿는 종교가 없다고, 2%는 다른 종교를 믿고 있다고 답했다.
개신교 신자 중 51%는 종교활동에 매주 참여한다고 답했다. 이는 작년 대비 6%포인트 감소한 결과다. 반면 한 달에 2~3번 참여한다는 응답은 17%로 작년 대비 7%p 높아졌다. 종교활동에 전혀 참여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14%로 작년 대비 2%p 하락했다.
이에 반해 천주교 신자 중 25%는 종교활동에 매주 참여한다고 답해, 작년 대비 3%p 높아졌다. 반면 종교활동에 전혀 참여하지 않는다는 응답 역시 전년 대비 2%p 상승해 31%를 차지했다.
종교활동이 내 삶에서 중요하다는 답변은 54%로, 1년 전과 비교했을 때 2%p 증가했다. 하지만 개신교는 '중요하다'는 답변이 39%에서 36%로 하락했다. 반면 천주교와 불교는 소폭 증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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