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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해야 할 이유(로마서8:18-25)
18 (왜냐하면)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왜냐하면(gavr)이란 앞 절을 확대해석하는 역할을 합니다. 즉 앞 절에서 언급된 영광에 대한 자세한 해석과 확대임을 말하는 접속사입니다. 사도바울은 ‘생각 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의 원뜻은 ‘나는 확신한다.’입니다. 이 단어 logivzomai/logîzomai는 일반 헬라어 문헌의 용법에서 ‘계산하다’라는 뜻입니다. William Hendriksen은 이 구절을 해석하면서 사도바울의 손에 저울이나 천칭을 들고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천칭은 가운데의 줄 사이로 양쪽에 접시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한쪽 접시에는 “현재의 고난”을 놓고 다른 쪽에는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을 놓았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받는 이유는 죄의 결과입니다. 죄가 없었다면 인간은 고난을 겪을 이유가 없습니다(창3:16-19). 그런데 저울의 다른 쪽은 은혜의 결과인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서 있어서 고난은 일시적이고 영광은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고난을 인내해야 할 당위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사실 우리들의 일상사가 고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사도가 생각하는 고난은 좀 다릅니다. 우리와 그리스도와 맺은 관계의 결과로서 겪게 되는 것들입니다. 19-23,28,38,39절처럼 다른 환란들이 포함되어 있기도 합니다. 바울사도는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을 일반적인 의미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당하는 고통으로 질병, 실망, 실업, 빈곤, 좌절 등을 포함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현재의 고난”, 즉 “현 세대”의 고난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연장되는 고난입니다. 사실 고난은 누구든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몸과 마음이 피폐(疲弊)되기 때문입니다.
현재 소형교회들의 목회자들은 엄청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건물 임대금, 공공요금 등도 제대로 낼 수 없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면 누가 목사를 하라고 했느냐고 비판합니다. 사실 메가 처치를 인수받은 사람들은 고통을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아버지가 이룬 교회를 물려받았기 때문입니다. 소위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신의 직장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어찌 소형교회의 목사를 알겠습니까? 그런데도 목사가 힘들다고 하면 뭣하러 목사를 했느냐고 빈정댑니다. 그러나 목사를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직장에 잘 다니고, 내 일에 열심인데 어느 날 갑자기 sign이 오면 잘나가는 사업, 괜찮은 직장을 정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셨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학교에 가야되고 교회를 개척해야 합니다. 교회를 개척하는데 좋다고 하는 자리들은 이미 다른 사람들이 모두 차지해버렸습니다. 가까스로 비집고 들어가 교회를 개척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하나 오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개척교회에 들어가면 힘이 든다는 것입니다. 상당히 많은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편하고 고생스럽지 않게 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소형교회의 목회자들은 당연히 힘이 듭니다. 어떤 사람을 전도하려고 3년을 그를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 이런 일 저런 일들을 하면서 그를 전도하려고 많은 애를 썼습니다. 거의 교회에 나오려고 할 때에 어떤 사람이 다른데서 살다가 이사를 오면서 전도한 그 사람을 그 교회에 나가지 말고 큰 교회로 나가자고 못나가게 한 것입니다. 작은 교회 가봤자 별 볼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소식을 들은 목사는 망연자실했습니다. 큰 교회는 예수님이 계시고, 작은 교회는 예수님이 안 계시는 것처럼 대접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이 고난입니다. 견딜 수 없는 고통입니다. 작은 교회의 목회자들 정말 큰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바울사도가 말하는 영광이란 어떤 것입니까? 사도바울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그리고 “우리 몸의 구속(영광스런 부활)의” 때 즉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에 나타날 일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바울사도가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이 아니라 “우리 안에 나타날 영광”(th;n mevllousan dovxan ajpokalufqh'nai eij" hJma'")이라고 했습니다. 즉 이 영광은 우리에게 와서, 우리에게 들어온 후, 우리를 가득 채우고 우리를 둘러쌈으로 우리 안에 나타날 영광입니다. 우리는 친히 이 영광의 일부가 될 것이며 구원받은 이들이 서로의 안에서 그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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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고난과 장래의 영광(로마서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Roma의 Nero황제로부터 시작된 박해는 향후 250년간 엄청난 성도들을 살해하거나 괴롭혔습니다. 갖은 방법으로 고문하고 이유없이 살해했습니다. Roma내에 전염병이 돈다든지, 지진이 일어난다든지, 어떤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모두 그리스도인들 때문이라고 죄를 뒤집어씌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널리널리 퍼져나갔습니다. Eusebius의 교회사를 보면 Tiberius는 빌라도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보고를 받았습니다. 고대 국가 통치자들의 관습에 따르면 어떤 일이든 기이한 일은 빠짐없이 황제에게 보고하게 되어있었습니다. 따라서 유대총독이었던 본디오 빌라도는 주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일과 그 후에 교회에서 일어났던 자세한 상황을 Tiberius황제에게 빠짐없이 보고했습니다. 빌라도는 이 보고서에서 그리스도에 관한 여러 기적들을 자신이 조사하여 확인하였으며, 또 그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였으므로 대다수의 백성들이 그를 하나님으로 믿고 있다고 보고했습니다. Tiberius는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까하고 일단 원로원에 맡겼습니다. 그러나 원로원은 표면적으로는 자기들이 그 문제를 먼저 심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로원의 투표와 포고에 의하지 않고는 어떤 사람도 신으로 추대될 수 없다는 고대 로마법에 따라 이 제안을 거부했다고 합니다. 사실 Roma인 중에서 그리스도 같은 인물이 나와도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벼락 천불나는 기적을 베풀면서 황제와 원로원을 위협하면 몰라도 속국인 유대인을 신으로 삼는다는 것은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는 문제였습니다. 그리하여 Roma원로원은 예수님을 배격하였습니다. 그러나 Tiberius황제는 예수그리스도의 교리를 대적하는 비합리적인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고 Tertulliān이 증언했습니다. Tertulliān은 로마법을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여러 면에서 탁월했습니다. 특히 로마의 저명인사들에게 잘 알려졌던 사람입니다. 따라서 Tiberius가 다스리던 시기에 그리스도의 이름은 전 세계에 퍼져나갔습니다. 팔레스틴으로부터 전파된 교리를 접한 Tiberius는 그 교리를 흡족히 여겼으므로 어떻게 할까하고 원로원과 의논했습니다. 그러나 원로원은 자기들이 그 법안을 제안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것을 거부해버렸습니다. 그러나 Tiberius는 그리스도인을 비난하는 사람을 죽이겠다고 제국의 모든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이처럼 거룩한 섭리로 인해 그의 마음에 복음이 주입되었기 때문에 복음은 처음부터 그다지 제한을 받지 않고 전 세계로 전파될 수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끊임없이 환난과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의 편지를 받는 교회도 그러한 환란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기꺼이 고난을 당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는 모든 교인 개개인이 스스로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받는 고난은 개개의 신자에게 있어서 매우 다양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체험이 꼭 초대교회의 순교자들이나 중세시대의 순교자들과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 있어서는 어떤 신자가 주일에 불필요한 일을 하지 않겠다고 해서 그의 직장을 잃는 수도 있습니다. 또는 부정한 사업상의 거래에 동참하도록 유혹을 받았을 때 안 된다고 말하면 직장에서 쫓겨납니다. 다에시(IS)의 치하에서는 지금도 순교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는 예가 많습니다. 이것이 고난입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그리스도와 더불어 우리가 새 이름(3:12)과 금 면류관( 4:4, 14:14)을 유업으로 얻는다고 했습니다. 그와 함께 우리는 왕 노릇할 것입니다(20:4). 우리가 장차 유업으로 얻을 이 미래의 복은 우리의 영혼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몸에도 관계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고난은 장차의 영광과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고난을 달게 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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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는 사하시며 육신은 치료하시고
마가복음2:1-12
정체성(identity)이란 변하지 않는 존재입니다. 다른 말로는 어떤 사람의 신분입니다. “저 사람은 이러이러한 사람이다.”입니다. 1세기경에 팔레스타인에 나타나신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서 사람들은 몹시 궁금해 했습니다.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간 극한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모으셨습니다. 그런 틈틈이 회당에서 사람들에게 가르치기도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별로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사렛에서 큰 인물이 날 일도 없거니와 설령 인물이라도 그게 뭐 어쩌냐는 태도였습니다. 정녕 큰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예루살렘에서 우리가 있는 한 청문회를 거쳐 우리가 인정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고위직들과 고위 레위인이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그들 틈에 끼인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예를 들면 대제사장, 군대제사장, 성전경비대장, 일직 제사장들, 성전감독, 창고책임자, 일반제사장, 레위인 등이 있는데 이 밑에 엄청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일 이유도 없었고, 받아들일 여유도 없었으며, 받아들여야 할 당위성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우선 긍휼에 풍성하셨습니다. 기적을 보았습니다. 말씀하시는 품격이 다른 사람들과 달랐습니다. 사람대하는 태도가 유대인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사람의 신분을 가리지 않고 만나주시고 소통하셨습니다. 세상에 이런 사람은 처음 보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소위 종교지도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간에 예수님께서도 “나는 아버지와 하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0:30).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마26:63-64). 그리스도는 자신이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 곧 아들이라고 증거 하셨습니다. 또 “내 아버지가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 한다.”고 하심으로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기셨습니다(요5:17).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아버지가 하는 것을 보고 아들로서 그것을 행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아들이므로 아버지가 행하시는 심판을 아들이 심판한다고 제시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말하면서 자기가 아버지와 완전히 동일한 한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도요한은 이사야가 바라본 여호와가 지금 자기들 가운데 와 있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증거했습니다(12:36-41). 이사야가 바라본 여호와의 영광이 바로 지금 성육신하여 자기들 가운데 와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 자신이 자기가 구약의 여호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은 그리스도를 향하여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란 고백함으로 자기들 가운데 사람으로 와 계신 주 예수님께서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이라고 확증했습니다. (이러한)
I.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에서 하나님 나라의 도를 전하셨습니다(1-2).
1 수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신 소문이 들린지라 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우리가 1장을 보면, 예수님의 사역결과로 예수님께서 인기인이 되셨습니다. 예나지금이나 인기인들은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습니다. 사람이 인기가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 만의 특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노래를 잘 한다든지, 강연을 잘 한다든지, 가르치기를 잘 한다든지,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한다든지, 잘 생겼다든지 등 사람들에게 필요한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1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신 후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심한 열병으로 앓아누운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셨습니다. 각색 병들을 고치셨습니다. 지금도 고치지 못하는 문둥병환자도 고치셨습니다. 갈릴리로 다니시면서 전도하시고 귀신들을 내어 쫓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소문은 삽시간에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습니다. 가버나움에도 예수님의 소문은 자자하게 퍼졌습니다. 며칠 후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셔서 어느 집에 계신다고 소문이 들렸습니다. 그러자 발 디딜 틈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주님이 계신 곳 문 앞에라도 갈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운집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때 모인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참 생명을 얻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15을 보면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이제 결정적인 순간이 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매우 가까웠으니 지금의 삶에서 돌이키고 복음을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선민이라고 자처하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구상에서 하나님을 제일 잘 믿고 아브라함의 후손들이기 때문에 천국가는 것은 당연하다고 자처하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잘못된 원칙, 나쁜 교리들을 바꿔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알량한 장로들의 전통과 말도 안 되는 것들을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리 곧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구원의 말씀을 듣고 믿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천국 곧 하나님의 나라와 지옥 곧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곳을 말해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태반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과 다른 의견을 내야 합니다. 인간은 영원히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과 의미는 우리가 이 땅에서 보내는 짧은 몇 년 동안에 요약될 수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스스로를 의식하고 인식하는 독특한 존재입니다. 사람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인간은 영원한 존재입니다. “당신은 어디에서 영원을 보내실 겁니까?”라는 질문은 사람들에게 심각한 의미를 전달해 줍니다. 모든 인간은 어떻게든 영원이라는 시간을 보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의 미래에 대한 것은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천국이나 지옥 둘 중 한곳에서 영원을 보내야 합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천국과 지옥에 대한 기독교적인 이미지들은 불확실하고 모호할 때가 많습니다. 천국은 복된 장소이자 가고 싶은 장소인 반면에, 지옥은 고통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에 대해서 명확한 개념을 갖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천국과 지옥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서 그 가르침을 연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신앙을 갖고 죽은 사람들이 가게 될 장소를 지적하기 위해서 “천국”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은 시간을 초월한 영원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이 물질적인 것들은 분해되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대체될 것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새로운 창조를 공유하게 될 것이라 했습니다.
이사야65:17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이사야66:22 나의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을 것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구약성경은 역사를 초월하여 확장되는 삶, 영원히 지속될 삶을 제시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지옥(hell)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시적인 용어로 무덤(grave)과 같은 말입니다. 따라서 구약성경의 지옥에 대한 언급은 무덤 또는 죽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다루어져야 합니다. 예로 시편86:13과 같은 구절은 음부(sheol)로부터의 구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것은 영원한 형벌이 아니라 맹렬한 진노로부터의 구출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들과 비림 받은 자들의 부활을 예언했습니다. 다니엘12:2절을 보면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처럼, 창조된 우주를 의미하는 “하늘들”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하늘”은 물질적인 영역과 마찬가지로, 시간이 없는 영적인 영역입니다. 우리의 보화가 있는 곳은 바로 이러한 영적인 영역입니다(마6:20). 또한 우리가 상급을 받게 될 곳도 영적인 영역입니다(마5:12). 우리의 이름은 그곳에 새겨져 있습니다(눅10:20). 우리의 진정한 집이 그곳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다시 한 번 모든 장벽을 파하실 것입니다(살전4:17/살후1:7).
신약성경은 지옥을 언급하기 위해서 세 가지의 서로 다른 헬라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gevenna는 새 국제역(NIV)에서 언제나 “지옥”(hell)으로 번역되었습니다. 베드로후서2:4은 지옥을 tavrtaro" 라 했습니다. 이 단어는 반항하는 신들이 감금되는 신화 속의 심연을 의미하는 헬라어 단어입니다. 반면에 a{/dh" 는 때때로 죽음(death) 또는 무덤(grave)으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구절들과 지옥과 관련된 서로 다른 단어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a{/dh"는 일시적인 상태 즉 마지막 심판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거처로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에 대해 말씀하고 계시는 누가복음16장에서 적나라하게 지옥을 볼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죽었을 때 부자는 “음부에서 고통 중에”(눅16:23)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반면에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이야기에서 심판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상태를 묘사하시기 위해 강력한 단어들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들은 “불꽃 가운데서”, “고통 중에” 있습니다. 긍휼이 절대로 없는 곳입니다. 그리고 하데스와 복된 자들의 거처 사이에는 건너갈 수 없는 깊고 넓게 갈라진 큰 구렁이 있습니다. 마지막 심판에 대한 요한계시록의 묘사에 따르면 하데스에 있는 자들에게는 정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습니다.
gevenna는 신약 시대의 랍비들과 예수님 모두가 사용한 말로 마지막 형벌의 장소입니다. 예수님의 묘사에 따르면 gevenna는 종종 불과 연관되어 있습니다(마5:22,18:9/막 9:43). 또한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불”의 장소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그곳은 “마귀와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곳으로서 인간들이 그들과 함께 형벌을 반아야 할 장소입니다(마25:41). 영원한 심판에 대한 가장 강력한 묘사는 요한계시록입니다. 버림받은 자들은 “유황불 붙는 못”(계19:20)에 던져집니다. 그곳에서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습니다(계20:10,14). 그리스도인들이 천국과 지옥을 어떻게 보아왔든 간에, 각 사람이 앞으로 끝없이 존재하리라는 것은 성경에서 볼 때 명백한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따른 사람들에게는 천국 처소가 예비 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계속해서 믿음을 갖지 않고 복음뿐 아니라 피조물 가운데 제공되어 있는 하나님께 대한 증거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지옥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어떤 상태에 들어가야 합니까? 현재는 천국과 지옥에 가야 할 사람들이 함께 공존하고 있습니다. 함께 한 공간에 있습니다. 전혀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확연히 구분될 때가 옵니다. 1차로 우리가 죽었을 때입니다. 죽음이 천국과 지옥을 구분합니다. 다음으로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종말심판 때입니다. 이왕 태어난 우리들은 지옥보다 천국을 가야합니다. 지옥은 영원한 고통의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형벌로 부활한 자들은 마지막까지 주 예수를 믿기를 거부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모든 범죄를 용서하고 영생에 이르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마지막까지 거부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용서받을 수 없는 악을 행한 것입니다.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된 자들은 다시는 돌이킬 기회를 가질 수 없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주 예수를 믿으라는 권고를 수없이 들었지만 그런 권유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으로 무시하고 배척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창조주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거부하였는데, 이는 하나님의 인격과 위엄을 무시하고 짓밟는 일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음 제시 이후 오래 참고 기다리셨습니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복음을 웃음거리로 여겨 무시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끝까지 배척한 사람들은 영원한 형벌이 합당한 것입니다. 그들은 영원한 불 못에서 후회하고 탄식하고 절망할 뿐이고 다른 길은 전혀 없습니다. 오직 돌이킬 수 없는 결정 때문에 그들은 영원한 고통과 형벌만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들은 앞으로 어떤 상태에 들어가야 합니까? 예수님의 도가 무엇입니까? 사람을 살리는 말씀입니다. 모든 인류는 죽을 때 정해진 대로 부활합니다. 모든 인류가 부활할 때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형벌로 결정되어 부활합니다. 심판을 받아서 상급과 벌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죽을 때 주 예수를 믿었거나 믿지 않았거나의 상태로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부활할 때는 상급과 형벌이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영생이나 영벌은 죽을 때 이미 결정되었으므로 배정된 대로 부활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류가 행함을 정밀하게 검사받고 그 결과에 따라 영생과 영벌이 다시 판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는 것은 살아 있을 때 한 마지막 결정대로 부활하여 그 신분으로 영원한 세계를 살게 됩니다. 모든 인류가 다 부활하므로 인류역사가 마감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사람이 심판을 받지 않고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II. 예수님께서 불치병을 치료하셨습니다(3-12).
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쌔 4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5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6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의논하기를 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8 저희가 속으로 이렇게 의논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1)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의논하느냐 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12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가로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질병의 종류에는 약 3,0000가지 정도가 있다고 합니다. 질병은 치료할 수 있는 병과 치료할 수 없는 난치병이나 불치병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치유와 축사 사건으로 인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곧 온 갈릴리에 전파되었습니다. 소문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치기 위해서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많아졌습니다. 하나님의 도의 이야기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에 침상 위에 누운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메고 주님을 찾아왔습니다(3). 네 사람이 메고 온 것을 보면 이 환자는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환자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들이 문밖에까지 가득 찼기 때문에 그 중풍병자를 주님께 데려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할 수 없이 계단을 통해서 그 환자를 평평한 지붕으로 데리고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지붕을 뜯었습니다. “여기쯤 될 거 같다.”하고 환자를 달아 내리기 위해 구멍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중풍병자가 누운 침상을 주님 앞으로 매달아 내렸습니다(4). 주님은 그들에게 믿음이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쳐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에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믿음은 큰 기적을 보았습니다. 주님은 우리 믿음을 보시고 역사를 일으켜 주십니다.
저희의 믿음을 보셨다고 했습니다. 저희의 믿음은 중풍병자를 메고 온 네 사람과 같이 온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믿음이 중풍병자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게 하였습니다. 고쳐주실 예수님께서 저희들의 믿음을 보셨다는 것은 우리들도 그 대열에 끼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믿고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지붕을 뜯어내는 믿음, 그리고 예수님 앞에 환자를 달아 내리는 믿음, 그리고 예수님께서 고쳐주시리라는 믿음, 그 믿음들을 주님께서 보시고 그를 고쳐주셨습니다. 여기에서 믿음이라는 것은 약정입니다. 주님께서 귀신도 쫓아내시고 문둥병도 고치셨으며 각종 병들을 고치셨는데 이제 이 사람도 고쳐주십시오. 그들과 주님사이의 약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칭찬하시고 갑자기 “소자야 네 죄를 용서하노라”라고 하십니다. 이에 같이 있었던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발끈했습니다. “아니 이 사람이 매우 참람한데 하나님께서만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데”. 그들이 속으로 의논하는 것까지 아시고 왜 의논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왜 마가요한이 이 사건을 자세하게 기록했습니까? 이 치료사건이 중요한 점은 예수님께서 모든 예언자들이 증언하던 바로, 그 메시야로서 모든 사람의 영혼의 죄를 사죄할 권세가 있음을 보여주는 데에 있습니다. 중풍병자의 치료사건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로서 사죄권이 있느냐 없느냐는 신학적 문제로 비화되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메시야를 기대하기는 하였으나 메시아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적존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병을 치유하기 전에 먼저 죄의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9절을 보면 역시 의아한 말씀이 있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질문입니다. 죄를 용서하는 것은 눈에 당장 보이지 않습니다. 또한 사죄권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는 유대인들의 법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상을 들고 가라는 것은 그 능력의 출처문제였습니다. 당시 타락한 유대인들은 죄를 용서하는 것은 불가, 사람들 치료하는 것도 예언자, 마술사 등도 행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둘 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10) 먼저 죄의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주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일어나 침상을 들고 나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중풍병자는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침상을 메고 밖으로 걸어 나갔습니다.
성도여러분! 회개는 죄 사함의 근거가 됩니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죄를 용서받습니다. 따라서 죄에 대한 회개가 없이는 죄를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죄의 용서와 병의 나음은 중풍병자가 보여 준 것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의 죄를 무조건 용서해 주신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그들에게서 믿음을 보셨습니다.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주님은 중풍병자와 그를 데리고 온 그의 친구들로부터 믿음을 보신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신 믿음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같이 온 일행들은 예수님께서 오실 메시야이심을 믿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는 믿음은 올바른 신앙고백에 있습니다. 그들이 한 결 같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은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능히 이 중풍병자를 고치실 줄을 믿었습니다. 이들의 마음에 움직이는 뜨거운 믿음은 주님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중풍병자는 주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마음으로 통회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 병자는 언어의 장애까지로 말을 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주님을 바라보고 믿었을 때 그의 마음에 회개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아마 이 중풍병자는 자신의 죄로 인하여 이 같은 질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으로 마음 아프게 뉘우치면서 통회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의 마음을 감찰하시고 그의 중심을 보신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만나는 일에 간절함을 보여 주었습니다. 사람이 너무 많아 문으로는 들어갈 수 없으므로 지붕에 올라가 지붕을 뜯어내고 아래로 달아 내리기까지 한 것입니다(눅5:18-20). 간절히 찾는 자가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간절한 기도가 주님께 상달됩니다.
이 사건이 갖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가 왜 이 말씀을 읽고 말씀의 해석을 듣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백성은 이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긍휼의 문을 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라는 이름자체가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지고 있는 짐들을 모두 예수님 앞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마태복음11:28을 보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소가 일을 할 때 멍에하나에 소 한 마리입니다. 그러나 유대에서는 멍에 하나에 소 두 마리가 끌었습니다. 종종 힘이 약한 소들은 힘센 소의 덕을 봤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무거운 짐을 같이 지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너희들은 힘이 들면 지는 척만 하라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내가 지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스러운 엄위는 천국에 계시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엄격한 공의는 가장 비참한 지옥에 계시하십니다. 자신이 지혜롭고 권능 있는 섭리는 온 세상에 두루 미치게 하십니다. 그러나 자신의 은혜로운 사랑은 지금 이 땅위에 있는 교회 즉 우리들에게 쏟으십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도, 우리에게 쏟으시고, 우리가 믿을 때에 기도할 때에 부어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는 가능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굽은 막대기로도 정확히 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것들을 주님 앞에 갖다 놓으십시다. 그래야 치료받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부지런히 갖다놓는 일에 최선을 다하십시다. 그리하여 중풍병자처럼 죄도 용서받고 치료도 받으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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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고난과 장래의 영광(로마서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청교도인 William Bridge는 만약 위에서 빛이 비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어둠에 휩싸이게 된다면 그때 그것은 밤이 되어 찾아온 어둠이 아니라 구름으로 말미암은 어둠일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것들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항상 엄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결코 고통과 시험과 버려둠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궁극적인 구원을 얻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곧 고난이 따르는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은 잠시 구름을 걷히게 하고 빛을 비취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은 모든 고난 중에서도 나의 이 어둠은 밤의 어둠이 아니라 구름으로 인한 어둠이라고 확고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들에게 절망은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들에게는 구름이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문제는 구름일 뿐이고, 그 구름은 곧 사라질 것이다”라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는 올해에도 신년벽두에 서있습니다. 지난해는 영원히 사라져버렸습니다. 지나간 날들이 너무나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해의 시작과 더불어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시리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패배를 당할 때에 승리하게 하시고, 우리가 연약할 때에 강하게 하시며, 우리가 두려움을 당할 때에 희망을 주시고, 우리가 죄 중에 있을 때 거룩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토록 우리에게 매일 매일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위하신다면, 우리가 누구를 두려워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해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결심을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앞길을 모릅니다. 기쁜 일이 있을 지, 슬픈 일이 있을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망 중에 알지 못하는 내일을 믿으면서 기다립니다. 우리는 또한 먼 것도 보지 못합니다. 한 해의 한순간 한순간을 성실히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사랑과 지혜로 이미 우리의 장래를 계획해 놓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전혀 다른 곳으로 순례의 길을 떠날 때에 우리는 확실하게 약속의 땅에 소망의 수레를 붙들어 맬 것입니다. 이사야는 당시에 앞으로 다가올 어둡고 위기에 찬 날에 대한 놀라운 약속을 받았습니다. 흉악한 세력이 지축을 뒤흔든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어떤 고난보다 슬픔과 고통이 밀어닥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럴 때 우리 마음을 사로잡을 감동적인 message가 필요합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약속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약속을 통해서 우리는 거룩하고 복된 새해의 비밀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습관적으로 매해 복된 새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친구로서 우리에게 항상 친절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나날이 진정한 번영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것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 있을지라도,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즐겨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믿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이름을 알 때만 가능합니다. 우리를 격려하시기 위하여, 주님은 그의 사람들을 통해서 여러 가지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한 해의 평화가 깨지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두 가지 점을 주의해야 합니다. “두려워 말라…놀라지 말라.” 두려워하고 놀라는 것 이 두 낱말은 우리에게서 신뢰와 확신을 빼앗으려는 복병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평하시기 때문에, 최고의 권한을 가지시고 우리에게 두려움이나 절망이 없는 한 해를 맞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명하신 바를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올해에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고난과 장래의 영광(로마서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사람들의 마음은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본인만 자신의 마음을 압니다. 그것도 제한적으로만 압니다. 따라서 타인이 내 마음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이중인격자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예를 들면 하나님을 내심(內心)으로 섬기지 않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信賴)해야 하는데 그렇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을 전심(全心)으로 섬겨야 하는데 자기들 마음대로입니다. 신앙생활을 하고 싶으면 하고, 하지 않고 싶으면 바로 그만 둡니다. 그러면서도 외적으로는 누구못지 않게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철저하게 위장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고난이 오면 바로 변해버립니다.
그러하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 수 있습니까? 무엇으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고난 당 할 때입니다. 그리스도를 인해서 고난 당 할 때 성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고 하셨습니다. 고난 없는 신앙생활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무엇을 느낍니까? 그리스도예수님께서 당한 고통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10:22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요한복음15:18–21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20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21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니라
사도행전9:4-5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고린도후서1:5,10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갈라디아서 6: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빌립보서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베드로전서4:1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사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무엇도 할 수 없습니다. 어떤 것도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덧붙일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를 위해 기꺼이 고난당함으로 우리는 구주에게 가까이 나아가게 됩니다. 따라서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사람들이나 신약시대의 성도들이나 모든 시대의 성도들이 극히 심한 고난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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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고난과 장래의 영광(로마서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사도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면 하나님의 후사라 했습니다. 후사klhronovmo"/kllēronômos란 상속자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상속자라는 뜻입니다. 어떤 후사입니까? 유명한 왕이나 권력자가 준 상속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sugklhronovmo"/suingkllēronômos 입니다. 함께한 후사라는 것은 공동상속자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인데 그리스도와 공동상속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아야 할 상속자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와 공동후사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유산을 받았다면, 반드시 그에게 유산을 증여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이 언약자가 누구인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 언약자는 하나님이시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주된 후사라는 것입니다. 이 언약자께서 우리를 그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통상 유산을 받음에 있어서 많은 것이 유언자의 성격에 따라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유언자가 누구인가를 먼저 파악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상속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나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이렇게 유언자에 대해서 질문합니다. 유언자는 어떤 사람인가? 그 유언자는 언제 죽었는가? 그 유언자는 부자였는가? 아니면 가난했는가? 그 유언자는 괜찮은 사람이었는가? 아니면 좋지 않은 사람이었는가? 왜 이렇게 질문합니까? 나에게 어떤 유산이 남겨졌는가를 알아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빚만 잔뜩 상속한 경우라면 유산을 받은 사람이 힘들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 세상에서의 유언자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유언을 받는 자도 죽습니다. 따라서 세상적인 유산은 심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가지고 있는 것이 다 소모되면 상속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말하는 언약자는 “영원에서 영원까지의 언약자”이십니다. 따라서 그의 자녀 된 우리의 유업은 부족하지 않습니다. 절대로 줄어들지도 않는 유업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부유하신 분입니다. 모든 금과 은이 그의 것이고(학2:8), 삼림의 짐승들과 모든 언덕에서 자라고 있는 생축이 다 그의 것입니다(시50:10). 그의 부요하심은 측량할 수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매우 관대하십니다. 그가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모든 것을 기꺼이 우리에게 주시기도 하십니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은 유언장의 약정에 대해 만족하지 않습니다. 유언장에 적혀있는 자신의 분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매우 공명정대하십니다. 철저하게 규약에 공정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후사(유업)를 매우 흡족하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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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특수사역/심판하심(로마서8:12-17)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여러 번 크게 심판하셨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을 때, 인간과 사탄을 함께 심판했습니다. 인간은 이로써 죽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탄은 여인의 후손이 오셔서 아주 영원히 멸망시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후로 인간은 계속 죄가 넘쳐나서 노아시대 때 온 세상을 물로 심판하셨습니다. 온 세상에 노아의 가족 여덟 명만 남기고 물로 세상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또 my-way를 외쳤습니다. 바벨탑을 쌓으면서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천체를 관찰하고 일월성신을 섬기며 얼마든지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권자를 세우고 하나님 배반의 공사를 착수했습니다. 착착 계획대로 탑을 세웠습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때가지 그 일은 계속되었습니다. 강력한 주권자로 인해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도 잘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언어를 혼잡케 하시는 심판으로 말미암아 그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얼마 지나서 다시 사람들은 패괴와 패역 쪽으로 기울어졌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아드마와 스보임이 그런 성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저히 눈뜨고 볼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유황과 불을 비 같이 퍼부으셨습니다.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습니다. 그 후에는 여러 곳에서 부분적인 심판의 경고를 부여하시고 계십니다. 4년경에 유대 땅 베들레헴에 다윗의 후손이자 여인의 후손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사탄을 심판하셨습니다. 사탄의 나라를 뿌리 채 드러내셨습니다.
죄악으로 온통 범벅이 된 인간이 성령에 의해 책망 받는 것 중에 심판이 있습니다. 예수님에 의하면 “이 세상의 왕이 심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언급되는 심판은 미래의 종말론적 대 심판이 아닙니다. 십자가 위에서 사탄의 역사적인 패배입니다. 사탄의 칭호들이 아무리 과장되어 있고, 그의 사악한 계획이 아무리 지독하다 하더라도 사탄의 권세는 이미 무너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귀신의 두목인 사탄의 나라를 완전히 파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사역에 대해 말씀하실 때 십자가가 아직 미래의 일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이미 이루어진 사실로 받아들이셨습니다(말씀하셨다). 성령님은 사탄의 심판에 관한 사실에 대해서 뿐 아니라 그들이 계속 사탄의 권세 아래 있을 것을 선택할 경우 그들이 처할 운명에 대해서도 사람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이 책망을 듣지 않는 사람은 영원한 죽음을 죽습니다. 확실히. 그가 누구이건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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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특수사역/의인되게 하심(로마서8:12-17)
고린도후서5:21을 보면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 못하신 자(예수)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셨다. 왜 그랬을까? 우리로 하여금 저(예수)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다. 사도 바울은 이 구절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칭의를 위하여 하신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께서 죄가 없다고 여기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주님으로 죄를 삼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에 죄인 취급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죄가 있었다면 죄인들을 대신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없었기 때문에 주님에게 죄를 전가시키신 것입니다. 율법시대에 흠 없는 희생이 요구되었던 것은 시사 하는 바가 큽니다. 항상 죄를 담당하실 자는 죄가 없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흠 없는 짐승을 죄 많은 인간을 대신하여 죽인 것입니다.
히브리서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 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성령이 인간에게 책망하시는 것이 있는데 의에 대한 것입니다. 의롭지 못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께 인간을 화목 시키기 위해서 늘 염려하시며 사람들에게 길을 열어놓고 활동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에 “내가 아버지께로 간다”고 하셨습니다. 이후에는 보혜사이신 성령님께서 구원의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승천과 성령의 책망하시는 message는 뚜렷하게 연결됩니다. “선을 행하는 것”, “용인된 표준에 일치하는 것” 등으로 표현되는 의에 대한 세속적 관점과는 대조적으로 의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은 그리스도입니다. 의는 사람들 가운데서 티 없이 사셨던 그리스도 안에 구현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죄의 유전이나 세상에 물든 오욕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비스런 구원의 섭리 가운데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로 가시는 것이 의에 대한 성령의 책망하시는 사역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것으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에 자신의 인을 치셨습니다. 이것을 확증하시면서 성령께서는 두 가지 일을 하러 오셨습니다. 한편으로는 그는 인간의 의를 죽은 것으로 폭로하시면서 다른 한편으로 참된 의가 발견될 수 있는 곳을 나타내 보이십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의로써 세상을 책망하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그것을 누릴 수 있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이라면 성령의 책망을 들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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