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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적 예정견해(로마서 9:6-13)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우리는 현재 이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오는 세상을 맞이해야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습니다. 사람이라고 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두고 떠나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도 많지 않은 날에 그렇게 해야 합니다. 생명이 있는 것들은 반드시 이 세상에서 끝을 계산해야 합니다. 아무리 그 생명이 길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에서는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1년을 365.2422일로 정확하게 계산해서 50년을 살았다면, 1,8262일입니다. 100년을 산다고 가정했을 때는 3,6524일입니다. 많은 것 같아도 그리 많지 않은 것이 인생입니다. 길다고 생각하면 길고, 짧다고 생각하면 짧은 인생을,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살기도 하고, 뒤틀려 살기도 합니다. 옛 학창시절에 유명하다고 생각했던 문인들이 상당수 친일파라는 사실을 알고 경악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종교계에서도 적극적으로 친일파였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노래와 그림과 글 그리고 가르침들이 이어지고 있는 사회가 어이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가르침을 주어야 할 사료들이나 자료들을 없애버렷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들은 아무렇지 않은 일처럼 여기며 살아왔습니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 알기도 전에 친일했던 사람들을 위인으로, 또는 애국자로 바꾸어 가르침으로 인해서 그 피해가 크다는 것입니다. 제2차세계대전이 일어날 때 일본교회와 독일교회는 히틀러와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을 적극 지지했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들의 승리를 기원했습니다. 얼마나 잘못된 일입니까? 사람을 국가별로 살해하는 계획을 세운 사람들을 교회가 축복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영원한 상혼(傷魂)으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예정에 관한 예지적 견해와는 대조적으로 개혁주의적 견해에서는 구원에 대한 궁극적 결정권이 인간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 결정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천명합니다. 개혁주의적 견해에서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께서 일부 사람들의 생활가운데 개입하셔서 그들을 구원에 이르는 믿음으로 인도하시기로 하셨지만,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기로 하셨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행위를 미리 내다보시지 않고서도 영원 전부터 어떤 사람들은 선택하기로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유기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각 개인의 궁극적 운명은 태어나기도 전에 인간의 선택에 전혀 근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결정되었습니다. 물론 인간의 선택은 자유롭게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그러한 선택이 이루어지는 것은 먼저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로 하여금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영향을 미치시기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의 근거는 인간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기쁘신 뜻 가운데 있습니다. 예정에 대한 개혁주의적 견해에서는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의 선택보다 앞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각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 같이 생각되지만. 하나님의 예정이나 하나님의 내적 부르심이 없이는 아무도 그리스도를 선택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토록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히는 예정에 관한 하나의 견해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공정함에 관한 심각한 질문들을 일으키는 견해입니다. 이것은 그토록 많은 분노의 반응을 일으키고 숙명론의 도전 결정론의 도전 등을 유발시키는 견해입니다. 예정에 관한 개혁주의적 견해에서는 황금사슬을(롬8:29,30) 영원 전부터 하나님은 자신이 택하신 자들을 아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창조하시기도 전에 마음속에 그들의 정체에 대하여 생각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개인적 정체에 대하여 미리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먼저 사랑하셨다는 의미에서 그들을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안다”고 말할 때 이 표현이 종종 단순히 사람에 대한 정신적 인식과 깊고 밀접한 사랑 사이를 구별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냥 안면정도 알고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진보해서 단위별로 교제하는 정도의 앎이 아닙니다. 대단히 깊이 아는 앎의 정도를 말합니다. 개혁주의적 견해에서는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들을 모두 내적으로 부르시기로 예정하시고, 그들을 의롭다 하시며, 영화롭게 하시기로 예정하셨다고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그분의 택함 받은 자, 오직 택함 받은 자들만의 구원을 이루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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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창세 이래 아담 이후, 노아 이후부터 현재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태어났는지, 모릅니다.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있었더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말에는 이중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부정적인 요소와 긍정적인 요소가 다 들어있습니다. 그 안에는 참된 이스라엘이 있습니다. 구원은 이스라엘 전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안에 참된 이스라엘이 있다는 말입니다.
통상 하나님의 백성을 약속의 자녀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란 그들 속에 내재하고 있는 어떤 요소(예를 들면 육신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약속의 자녀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의한 것입니다. 요한복음1:13절을 보면 애초에 하나님의 뜻은 ‘이스라엘만 내 자녀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후손이지만 하나님의 백성으로 치지 않은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스라엘’이라는 공식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스마엘=에서=유대인…’이라는 사람들이 끼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해서 100%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렇게 믿고 있다가 영원한 구원을 놓치고 말기 때문입니다.
예정에 관한 개혁주의적 견해를 거부하는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은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예정에 대하여 예지적 견해(선견, 앞선 지식)라는 입장을 받아들여버립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싶은 것입니다. 예지적 견해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지를 아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일지, 거절할지를 미리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선택하기도 전에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을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운명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은 우리가 선택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의 지식에 근거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것은 하나님을 선택하려는 사실을 미리 아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택받은 자들이란 자유롭게 그리스도를 선택할 것을 하나님께서 아신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만일에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이나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은 전혀 관계가 없게 됩니다. 이 견해에는 하나님의 결정에 관한 자의적 요소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명백히 어떤 잘못된 행위로부터도 벗어나 계십니다. 우리에 대한 궁극적 심판의 기초는 그리스도를 배척하느냐 아니면 받아들이느냐 하는 우리의 결정에 달려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로마서8:29-30절로 돌아가 보면 하나님의 豫知에서 시작하여 신자들의 영화에까지 이르는 일종의 순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지적 견해에서 볼 때 이 구절에서 하나님의 예지가 예정보다 앞서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이 구절에서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선택할 것을 미리 아신 그 지식에 근거하여 선택 하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상은 언급되어 있지도 않고 암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아시는 자들을 예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여기에서 하나님이 예지를 가지셨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전혀 모르고 계시는 사람들을 선택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선택하시기 위하여 먼저 야곱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지시기는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야곱의 선택을 근거로 야곱을 택하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로마서8장에 나오는 예지-예정의 순서에 대해서는 예지적 견해와 더불어 논쟁거리입니다. 그러나 나머지 구절에 나타나고 있는 사건들의 순서는 예지-예정-부르심-칭의-영화의 순서입니다. 바울사도가 여기에서 “부르심”이라는 표현을 통해 의미하고 있는 바는 무엇입니까?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한 가지 방법 이상으로 설명합니다.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외적 부르심과 내적 부르심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전파를 통하여 하나님의 외적 부르심을 발견합니다. 복음이 전파될 때 그것을 듣는 사람마다 부르심을 받거나 그리스도 앞으로 초청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긍정적으로 반응하지는 않습니다. 외적 부르심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신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들을 수 없는 귓가에 복음이 떨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따라서 복음의 외적 부르심에 믿음으로 반응한 사람들만이 의롭게 될 수 있습니다. 칭의(稱義/justification)는 믿음으로 연유합니다. 그러나 복음의 외적전파를 들었던 사람들이 모두 믿음으로 반응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외적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들이 의롭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사도는 로마서에서 하나님이 부르신 자들을 하나님께서 의롭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모든 자들을 의롭게 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여기에서 모두를 첨가한다면 이 구절에 있지도 않은 말을 덧붙이게 됩니다. 바울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들이 의롭게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부르심을 받은 자들 가운데 일부만 의롭게 된다는 말입니다.
예지적 견해를 살펴보면 하나님의 예정이 사람들의 외적 부르심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할지를 미리 아시는 하나님의 예지에 근거하신다면 어떻게 예정된 자들 가운데 오직 일부만이 부르심을 받을 수 있습니까? 정확하게 아시는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자들만 부르시는데. 부르심을 받지도 않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예정하셔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예정 받은 자들 가운데 일부가 부르심을 받지도 않고 예정 받았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부르심에 반응할 것을 미리 아신 지식에 근거하여 예정하시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부르심이 없는 데에 대하여 아무도 응답하는 사람이 없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예지하실 수는 없으실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사도는 결코 일부라는 말을 내포하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황금사슬은(롬8:29,30) 필연적으로 모두라는 말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 황금사슬에 일부라는 말을 첨가시킨다면 그 결과는 예정에 관한 예지적 견해에 치명적이 되어버립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부르시지도 않은 자들을 예정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즉 예지적 견해는 하나님의 예정이 복음의 부르심에 대한 사람들의 적극적인 반응을 아시는 하나님의 예지에 근거하고 있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일부 사람들이 부르심 없이도 예정되었다면 그 견해는 명백히 잘못된 것이 됩니다. 모두라는 말을 덧붙여도 역시 예지적 견해에 치명적 결과입니다. 이러한 난제는 칭의에 대한 부르심의 관계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만일 부르심을 입은 모든 사람들이 의롭게 된다면 그 구절은 아래의 두 가지 중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a. 복음을 들은 모든 사람들은 의롭게 된다. b 하나님의 내적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모두 의롭게 된다. a를 취한다면 복음을 들은 적이 있는 각 사람은 모두 구원받기로 예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정에 관한 예지적 견해를 견지하고 있는 거의 대다수의 사람들은 복음을 들은 사람마다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만인 구원론자 들입니다. 그들은 복음을 들었든지 안 들었든지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복음주의자들 사이에 벌어지는 예정에 관한 주된 논쟁이 만인 구원론(universalism)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정에 관한 개혁주의적 견해를 옹호하는 사람들이나 예지적 견해를 옹호하는 사람들이나 모두 다 만인이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실상 외부적으로 복음(하나님의 외적 부르심)을 듣는 사람들 중에도 믿음으로 반응하지 않아서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a의 입장은 예지적 견해를 옹호하는 사람들이나 개혁주의적 견해의 옹호자들에게나 모두 마찬가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입장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내적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의롭게 된다는 b의 입장입니다. 하나님의 내적 부르심이란 무엇입니까? 외적 부르심은 복음전파입니다. 복음전파는 인간인 우리가 하는 어떤 일입니다. 외적 부르심은 성경을 읽음으로 “들을 수도”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인간이 기록한 하나의 문서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것은 외적입니다. 어떤 인간도 다른 인간 속에서 내적으로 역사할 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우리가 사람의 마음에 즉각적인 영향력을 일으키기 위하여 다른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나는 단지 외적으로 말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 말들이 마음속에 파고들 수 있을지는 모르나 나의 능력으로 그렇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을 내적으로 부르실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믿음의 적극적인 반응을 일으키기 위하여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서 즉시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b의 입장이 사도의 의도였다면 그 의미는 명백합니다. 하나님께서 내적으로 부르신 모든 자들이 의롭게 되고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모든 자들이 내적 부르심을 받는다면 하나님의 예지에는 인간이 택하는 자유로운 결정에 대한 단순한 선지식(先知識) 이상의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누가 복음에 반응할 것이며 누가 반응하지 않을 것인지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은 단순한 수동적인 방관자의 지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누구를 내적으로 부르셔야 할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분이 내적으로 부르신 모든 자들을 또한 하나님은 의롭게 하실 것입니다. 즉 황금사슬은 하나님께서 내적 부르심을 예정하셨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적 부르심을 주시기로 예정하신 모든 자들은 의롭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적극적인 반응을 보장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내적 부르심을 통하여 택한 자들의 마음속에서 무언가를 행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b의 입장이 황금사슬을 올바로 이해한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에게는 주시지 않으신 어떤 종류의 부르심을 일부 사람들에게만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의롭게 되는 것이지, 모든 사람들이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므로, 부르심이란 어떤 사람들은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 깊은 행위라는 것입니다.
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로 예정되었는데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예정되지 않았는가? 그 해답은 인간 속에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목적 가운데 있는가? 예지적 견해의 옹호자들은, 하나님이 오직 일부의 사람들만을 내적으로 부르신 이유는 누가 내적 부르심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누가 반응하지 않을지를 하나님이 미리 아셨기 때문이라고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내적 부르심을 낭비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오직 그 부르심에 호의를 가지고 반응할 것을 미리 아신 자들에게만 내적소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내적 부르심 가운데는 얼마나 큰 능력이 있는가? 그것을 받아들이는데 어떤 특권이라도 있는가? 내적 부르심이 자신의 힘으로 거기에 반응할 것을 아신 자들에게만 주어진 것이라면 그것은 실질적 능력이 없는 내부적 영향력에 불과한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내적 부르심이 외적 부르심을 들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준다면,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에게 주시지 않는 어떤 특권을 일부 사람들에게만 예정하셨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내적 부르심이 인간의 결정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그것은 전혀 영향력이 아닐 것입니다. 만일 내적 부르심이 전혀 영향을 미치는 능력이 아니라면 구원을 위하여 아무런 의미도 없고 황금사슬의 무의미한 부분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내적 부르심이 사람들이 믿기 전 곧 믿음으로 반응하기 전에 그들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적 부르심이 어떤 방법으로든지 그 반응에 영향을 미친다면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에게 어떤 특권을 예정하셨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내적 부르심이 인간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슨 역할을 합니까? 이러한 dilemma는 예지적 견해에 있어서는 결코 달랠 수 없는 큰 고통이 될 것입니다(R.C.Sproul, 1998, 126-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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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근심과 고통(로마서 9:1-5)
로마서는 크게 네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a. 서문 1:1~17
b. 구원과 교리 1:18~1l:36
c. 그리스도인의 삶 12:1~15:13
d. 결론 15:14~16:27
바울사도는 1:18~32에서 이방인의 죄를 지적했습니다. 2:1~3:2에서는 유대인의 죄,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방인-유대인)의 죄의 심각성과 심판의 불가피성을 3:3~20까지 부각(浮刻)시켰습니다. 다음으로 믿음으로 인한 구원을 3:21~5:11에서, 5:12~8:39에서는 은혜로 인한 구원을 강조했습니다. 9장에서 11장까지는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김상훈 2006, 143).
특권(privilege)이란 어떤 개인이나 집단 또는 국가기관에 대하여 인정하는 특별한 권리나 이익 또는 의무의 면제입니다. 그래서 특권은 일부에게만 해당됩니다. 모든 사람이 다 가질 수는 없습니다. 특권이란 한정된 권리입니다. 그래서 자칫 특권을 가진 자들은 자신의 마음대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고는 합니다. 이스라엘은 창조주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었습니다. 수천 년을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지키심과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사는 것이 일상화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을 버리고, 이방사람들을 버리면서까지 이스라엘만을 위하셨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순종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바라심대로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은 특권이 있기 때문에 괜찮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특권은 위선적인 특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어디를 가든지 일차로 유대인의 회당을 찾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무척이나 고통스러웠습니다. ‘저주를 받아’에서 저주/ajnavqema 는 고전 헬라어문헌에서 신들의 진노에 바쳐지는 것, (파멸에) 저주의 힘 아래로 떨어진 것‘이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70인역본에서는 ‘ 헌신, 금지, 저주’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사도의 논증에 의하면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동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면 마다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어디에 나타나 있습니까?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만큼 유대인의 구원을 바라고 있음이 간절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위한 바울의 심정은 정말 간절합니다(1-3절). 그것은 바울사도의 근심과 고통으로 이어집니다(3절).
어쩌면 특권이 그들을 이상하게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특권이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저희들은 자신들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에도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이 엄청 많습니다. ‘우리교회는…, 우리교단은…, 우리목사는…, 우리들은…, 우리들의 공동체는…’라는 특권의식에 사로잡혀서 전혀 엉뚱한 곳으로 가고 있는 교회와 성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늘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스라엘과 같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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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은 평생에 한 번 타기도 어려운 상입니다. 우리나라는 김대중 대통령이 탄 노벨평화상(2000년)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한 집에서 두 번이나 노벨상을 탄 사람이 있습니다. 퀴리부부(Maria Skłodowska-Curie/폴란드 바르샤바/1867.11.7.-1934.7.4.)입니다. 이들이 1895년 결혼식을 올렸을 때 독일의 빌헬름 렌트겐이 X선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1896년에는 프랑스 물리학자 앙리 베크렐이 방사능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방사능이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는 밝히지 못했습니다. Curie부인은 이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를 했습니다. 그리하여 우라늄보다 더 활동적인 다른 물질이 있어 거기에서 에너지가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1898년 6월 말에 두 사람은 우라늄보다 방사능 강도가 330배나 높은 새 원소를 발견했습니다. 마리아는 자기의 조국 폴란드의 이름을 따서 Polonium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런데 Polonium을 제거했는데도 또 강한 방사능이 남아 있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두 사람은 다시 실험을 거듭하여 마침내 우라늄의 900 배에 달하는 방사능을 함유한 원소의 결정을 추출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우리는 방사능을 지닌 물질에는 새 원소가 함유되어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 그 새 원소에 Radium이란 이름을 붙일 것을 제안하는 바이다.”라고 학회에 제출했습니다. Curie 부부가 제출한 보고서를 받은 학회는 발각 뒤집혔습니다. 두 사람은 Radium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4년간 우라늄 광석을 20킬로그램씩 꺼내어 체질을 해서 불순물을 제거한 다음 분쇄하였습니다. 진한 황산으로 졸여서 침전시켜 결정을 만드는 일을 수십 수백 번 반복했습니다. 그리하여 1902년 두 사람은 순수한 Radium 결정을 추출해냈습니다. 4년의 세월을 바쳐 8톤의 광석에서 추출한 Radium의 양은 0.1g이었습니다. 그의 34세 때였습니다.
1903년 퀴리 부인은 지금까지의 연구를 총괄하여〈방사성 물질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의 박사학위 논문을 파리 대학에 제출했습니다. 파리 대학은 그에게 이학박사 학위를 수여했습니다. 그해 11월 스웨덴에서 퀴리 부부와 베크렐에게 노벨 물리학상을 수여했습니다. 노벨상이 생긴 지 3년째 되는 해였습니다. 퀴리 부인은 여성으로서 노벨상을 받은 최초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퀴리 부부는 수상식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906년에 피에르 퀴리가 마차에 치여 사망하였습니다. 그러나 퀴리부인은 남편 대신 파리 대학 이학부 물리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여성으로서 이 학교 강단에 선 사람은 그녀가 처음이었고 그의 나이 39세 때의 일이었습니다. 방사성 원소 Radium의 발견으로 원자력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퀴리 부인은 1911년에 또 노벨 화학상을 받았습니다.
퀴리부부는 8000㎏의 광석에서 0.1g의 라듐을 추출했습니다. 1/8000만의 확률입니다. 일반인으로서는 전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보통 1차원 2차원 3차원이라고 말합니다. 1차원은 점으로 이어진 선의 세계입니다. 2차원은 선과 선이 만나는 면의 세계입니다. 3차원은 면과 면이 만나 높이가 등장하는 입체의 세계입니다. 여기에 차원을 하나 더 높인 4차원이 되면 시간 속을 유영하는 세계가 됩니다. 수학에서 사용하는 좌표식으로 표현하면 1차원은 [X], 2차원은 [X, Y], 3차원은 [X, Y, Z], 4차원은 [X, Y, Z, T]입니다. [X]는 가로, [Y]는 세로, [Z]는 높이, [T]는 시간입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그것이 소속되어 있는 차원이 따로 있습니다. 모든 무생물, 물체, 식물 등 의식작용을 하지 못하는 것은 일차원적 존재입니다. 동물 등은 이차원적 존재입니다. 단지 동물적인 충동에서만 사는 사람들은 이차원적 존재입니다. 삼차원적 존재는 주체의식을 가지고 자유와 도덕을 알고 어떤 이상을 가지고 그것을 추구하는 삶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하는 세계는 이 모든 차원을 넘는 고차원적 세계입니다.
하나님의 차원이란 앞서 말한 모든 차원을 초월해 있는 차원입니다. 모든 차원을 포함하고 그것을 지배하고 그것의 가능성의 근거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인간은 1차원에서부터 고차원의 세계까지는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차원에는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차원에는 하나님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 그 신비를 알 수 있습니다.
하루아침에 엄청난 상황으로 떨어진 욥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 황금률로 생각했던 “선한 사람은 흥하고 악한 사람은 망한다”는 것이 그대로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욥은 고민했습니다. 죄를 범하지 않았는데 왜 내가 이러한 처참한 고난을 당해야 하느냐? 도무지 그 뜻을 알 수 없었습니다.
욥기1:1-5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2 그 소생은 남자가 일곱이요 여자가 셋이며 3 그 소유물은 양이 칠천이요 약대가 삼천이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 4 그 아들들이 자기 생일이면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 누이 셋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므로 5 그 잔치 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욥 b/Yai/’iyhôb 은 “괴롭힘을 받는, 고통당하는”이란 뜻입니다. 욥은 아람의 자손, 셈의 아들로 우스 땅에 거주하였습니다. 아마도 아브라함과 동시대인이었으며, 240세의 나이로 죽었습니다.
성경은 욥을 소개할 때 먼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라고 소개합니다. 순전!T;/thâm하다는 말은 완벽하다는 말입니다. 정직rv;y:/yâshâr하다는 것은 올바른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악에서 떠나 빗나가지 않는 사람으로 욥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욥은 자녀가 열 명이었습니다. 아들 일곱에 딸 셋. 양이 7000마리. 낙타가 3000마리. 소가 1000마리. 암나귀가 500마리. 그를 섬기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이러한 巨富가 겸손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지 죄에서 피하려고 했습니다. 평소에도 그랬지만, 잔치가 끝나면 반드시 하나님께 자녀들 숫자대로 번제를 드렸습니다. 혹 잔치 중에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실수하지나 않았을까? 하고 꼭 예배를 드렸습니다. 욥은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전무후무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루아침에 날 거지가 되었습니다. 일곱 자녀가 몽땅 죽었습니다. 거기에 욥마저 살아있으나 죽은 것 같았습니다. 죽을병까지 들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힘이 들고 괴롭겠습니까? 순간에 전 재산과 아들을 잃고 급기야 몸에 악창으로 인하여 재에 앉아서 깨진 기왓장으로 몸을 긁고 있는 참상이었습니다. 이것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냥 그런가보다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중에서 어떤 한 가지라도 당하면 욥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욥이 거의 죽게 생겼다고 소문을 듣자 친구들이 찾아왔습니다. 죽기 전에 얼굴이라도 한번 봐야겠다고 친구들이 서로 약속하고 찾아왔습니다. 데만 사람 엘리바스, 수아 사람 빌닷, 나아마 사람 소발, 부스 사람 엘리후가 문병 차 찾아왔습니다. 막상 욥을 만나니 소문보다 아주 심각했습니다. 어쩌다가 이 지경을 당했을까? 아마도 우리와 욥이 모르는 어떤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차례차례 욥의 처지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그중에 나아마 사람 소발이 욥에게 말했습니다. 네가 이렇게 된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했습니다. 아무래도 하나님께 네가 잘못한 점이 있지 않을까? 라고 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어찌하겠으며 음부보다 깊으시나 네가 어찌 알겠느냐 그 도량은 땅보다 크고 바다보다 넓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욥이 품었던 생각을 완전히 깨우쳐 주는 말입니다. 물론, 소발은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함께 좋은 인물로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극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욥의 상황을 모르고 비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욥에게 한 이 말이 중요한 말입니다. 욥이 미처 몰라서 고민 하고 있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이에 욥은 무슨 말이냐고 했습니다. 나도 그런 것쯤은 다 알고 있다고 합니다(12:13-13:2).
13 지혜와 권능이 하나님께 있고 모략과 명철도 그에게 속하였나니 14 그가 헐으신즉 다시 세울 수 없고 사람을 가두신즉 놓이지 못하느니라 15 그가 물을 그치게 하신즉 곧 마르고 물을 내신즉 곧 땅을 뒤집나니 16 능력과 지혜가 그에게 있고 속은 자와 속이는 자가 다 그에게 속하였으므로 17 모사를 벌거벗겨 끌어가시며 재판장으로 어리석은 자가 되게 하시며 18 열왕의 맨 것을 풀어 그들의 허리를 동이시며 19 제사장들을 벌거벗겨 끌어가시고 권력이 있는 자를 넘어뜨리시며 20 충성된 자의 말을 없이 하시며 늙은 자의 지식을 빼앗으시며 21 방백들에게 멸시를 쏟으시며 강한 자의 띠를 푸시며 22 어두운 가운데서 은밀한 것을 드러내시며 죽음의 그늘을 광명한데로 나오게 하시며 23 만국을 커지게도 하시고 다시 멸하기도 하시며 열국으로 광대하게도 하시고 다시 사로잡히게도 하시며 24 만민의 두목들의 총명을 빼앗으시고 그들을 길 없는 거친 들로 유리하게 하시며 25 빛 없이 캄캄한데를 더듬게 하시며 취한 사람 같이 비틀거리게 하시느니라 13:1 나의 눈이 이것을 다 보았고 나의 귀가 이것을 듣고 통달하였느니라 2 너희 아는 것을 나도 아노니 너희만 못한 내가 아니니라
욥은 이렇게 알고 있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왜 여호와께서 나에게 얼굴을 돌이키시지 않는가(13:24,25) 하는 것입니다. 욥이 무엇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까? 욥이 잘못 생각한 것이 무엇입니까? 욥의 잘못은 인간의 차원으로 하나님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것을 판단하려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오묘를 인간의 지혜로 측량하려 한 것입니다. 오묘란 말은 “하나님의 깊은 일”입니다. 깊은 곳에 있는 하나님의 진리는 사람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1ℓ짜리 계량컵으로 바닷물을 측량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의 조그만 망원경으로 온 우주를 측량했다고 발표를 하고 있는데 웃기는 말입니다. 제임스 웹 우주망원경지름6.5m이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우주에서는 점 하나도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우주창조의 비밀을 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니들이 천체를 측량한들 정확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이런 어리석은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전능자를 어찌 알 수 있으랴?” 사람이 전능자의 지혜의 영역에 도달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전능자가 소유하고 사용하는 지혜의 범위를 인간은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지혜를 자꾸 알려고 합니다. 상대적 존재요 무능자인 인간은 전능자인 하나님의 지혜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욥은 이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려고 하다가 안 되니까 불평을 했습니다. 하늘보다 높은 하나님에게 인간의 지혜가 어떻게 도달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소발도 여기에서 하나님의 존재 위치를 잘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보다 높은 곳에 계십니다. 그런데 하늘은 끝이 없습니다. 하늘보다 높은 곳에 계십니다. 하늘이 얼마나 높고 방대한가? 명왕성 탐사가 주목적인 뉴호라이즌스호는 2006년 1월에 발사했습니다. 13년 뒤인 2019년 1월에 명왕성보다 16억km 먼 '울티마 툴레'라는 소행성 3500km를 근접 비행했다고 합니다. 이 거리는 지구에서 약 65억km의 거리라고 합니다. 이 거리를 13년이나 걸렸습니다. 명왕성은 겨우 태양계 끝에 있는 별입니다. 우주의 끝에 겨우 점 하나를 찍는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가도 끝이 없는 것이 하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주가 그의 손안에 있습니다.
욥은 그러한 먼 곳에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고 불평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음부보다 더 깊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인들은 음부를 이 지상에서 제일 깊은 곳으로 생각했습니다. 산사람은 결코 들어갈 수 없는 거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지혜는 그러한 음부보다도 더 깊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욥은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곳에 못 간다고 불평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량은 땅보다 크고 바다보다 넓습니다. 도량이란 하나님의 지혜의 범위라는 뜻입니다. 땅과 바다로 비교한 것은 도저히 측량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점에 있어서도 욥은 자기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것까지도 받아내려고 했습니다. 그것이 잘 안 된다고 불평을 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욥의 잘못은 자기 능력의 한계선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차원에 속하는 일을 인간의 차원에서 풀어보려고 한데 있습니다. 그 결과는 철저하게 실패였습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L'existence précède l'essence)고 한 실존주의자 Jean-Paul Charles Aymard Sartre(1905.6.21.-1980.4.15.)은 인간은 늘 예상하지 못한 일이 발생해서 계획이 망가진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계획적으로 살아가야 하는데 오늘도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다. 친구한테서 갑자기 전화가 오거나 손님이 불쑥 찾아왔다. 아니면 급한 볼일이 생겼다, 가족 혹은 내가 병에 걸리거나 다쳤다.” 살다 보면 이렇듯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늘 발생해서 열심히 세워둔 인생의 계획표를 무참하게 망가뜨립니다. 이런 식이라면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정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인생의 계획을 세울 수 없습니다. 이렇게 초조해하는 사람이 분명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계획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정말로 좋은 인생일까요? 계획적으로 살지 못하는 자신을 못난 인간이라고 생각하기 전에 계획대로 살아가는 것이 본디 가능한 일인가,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이 좋은 인생인가를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내일을 알 수 없는 지금을 확신하며 살고 있는 아이러니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중국의 내지 선교사인 Hudson Taylor는 우여곡절 끝에 중국으로 들어갑니다. 중국으로 떠나기 전 선교를 위해 병원의 의과대학 실습생으로 들어가 의학을 공부하고서 21살 때 상하이로 가는 배에 타고 중국으로 떠납니다. 도착한 상하이는 전쟁으로 인해 위험한 도시였습니다. 방도 구하지 못한 채 한참을 지나야 했습니다. 겨우 방을 얻었지만 전쟁으로 인해 전도는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2년 정도가 지나자 상하이 주변을 순회하며 전도하기 시작합니다. 파송한 중국선교회가 재정적으로 거의 도움이 되지 못해 상하이를 떠나야 할 처지였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인과 완전히 동일한 옷차림을 하고 내륙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내륙선교를 하면서 허드슨 테일러의 생애는 한 번도 평온한 적이 없었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 큰 딸을 잃었습니다. 광저우 사건으로 선교지로 활용하던 집들이 불에 탑니다. 또 얼마 후에 갓 태어난 아들과 아내를 잃었습니다. 그녀의 나이 겨우 33세였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 허드슨 테일러는 다리가 마비되고 결국 다시 영국으로 되돌아갑니다. 그러나 비록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보내지만 그곳에서도 중국 선교를 위해 기도하고 후원자를 모집합니다. 몸이 회복되자 다시 중국으로 되돌아갑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실존주의자 Sartre나 신앙의 사람 Hudson Taylor가 같은 세상에서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해서 고난이 비껴가거나 하나님께서 정하신 결과를 뒤집을 수는 없습니다. 물론 기도와 믿음으로 은혜를 바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이 도깨비 방망이를 휘두르며 살지는 않았습니다.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나는 양탄자를 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위기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응하면서 위기를 타개하며 살았습니다.
오늘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욥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 않나 생각해봐야 합니다. 우리가 범하고 있는 과오가 무엇입니까? 왜 나만 이 세상에서 어려움을 당해야 하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모르면 수시로 범할 수 있는 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끝이 없으신 무한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요새 같은 때 200살을 살았다고 하면 big-News입니다. 그런데 눈 씻고 볼 래야 없습니다. 무한하다는 것은 이것을 훨씬 뛰어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 섭리나 개개인에 대한 지배에 대하여 선의 뜻을 추구하기보다 자기가 느끼고 생각하는 대로 해놓고는,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라고 억지로 해석합니다. 많은 사람이 자기가 시키는 대로 하면 전능자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그들에 의하면 전능자는 신비적인 체험을 통해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비적인 체험이라는 것은 매우 주관적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자기의 마음에서 그려보는 환상까지도 예수님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우리가 전능자를 알 수 있는 유일의 길은 전능자의 차원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차원은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비로소 그것이 가능합니다. 성서해석에 있어서 주관적 해석은 제이계명을 범하게 됩니다. 우리가 올바른 성도가 되려면 자기 스스로를 좀 더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를 지배하도록 합시다. 하나님의 차원에 속한 것은 하나님의 것으로써 풀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풀립니다. 욥의 고난은 왜 일어났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욥을 자랑하고자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의인 욥을 보았느냐? 얼마나 신실하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한 사람이 욥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다. 이에 사단이 자기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욥을 밟아버리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욥을 믿고 계셨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고난도 욥과 같은 고난일 수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시험해도 내 사람은 절대 견딜걸. 하시는 하나님의 부응하심에서 떠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Closing 욥기는 다음을 증명하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사람을 어렵게 하실 수 있다는 것; 선은 비이기적이고 공평무사할 것이라는 것, 의인은 아무런 대가없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으며, 심지어 그가 원수가 될지라도 그 분을 신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삶의 고통스런 수수께끼는 복된 해결이 가능하다는 것, 의인의 고난은 반드시 그 자신의 죄 때문인 것은 아니라는 것, 이생의 불평등은 다가올 생에서 시정될 것이라는 것, 정의는 어떤 식으로든, 언젠가, 어디선가 실현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에 관한 책이며, 욥기의 위대한 주제는 십자가의 신비입니다. 의인의 고난이 어떻게 하나님의 공의와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욥은 의인, 나라, 교회, 그리스도자신에 대한 표상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욥에게서 고통당하는 의인의 모습을 보게 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현명한 목적을 위해 그를 상하게 하면서까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욥을 그를 죄인으로 간주하는 자들의 판결을 뒤집어엎으셨습니다.
욥이 모르는 욥에 대한 천상회의 (0) | 2021.10.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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