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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절대주권/토기장이와 진흙(로마서 9:19-29)
이사야29:16과 45:9을 보면
이사야29:16 너희의 패리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 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자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자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
이사야45:9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자로 더불어 다툴찐대 화 있을찐저 진흙이 토기장이를 대하여 너는 무엇을 만드느뇨 할 수 있겠으며 너의 만든 것이 너를 가리켜 그는 손이 없다 할 수 있겠느뇨
예레미야18:1-10을 보면
1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에 가라사대 2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서 내 말을 네게 들리리라 하시기로 3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4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파상하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선한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5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6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의 하는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7 내가 언제든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파하거나 멸하리라 한다고 하자 8 만일 나의 말한 그 민족이 그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9 내가 언제든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건설하거나 심으리라 한다고 하자 10 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케 하리라 한 선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
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아하스는 유다의 15대 왕입니다. 아하스 왕때 북왕국 이스라엘 왕 베가와 아람왕 르신이 연합하여 유대를 침범했습니다. 그 이유는 북쪽의 앗수르가 영토를 확장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같이 동맹을 해서 앗수르를 막아보자는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서 아하스에게 높은데서 구하든지, 낮은데서 구하든지 구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하스는 여호와의 도움은 받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앗수르에게 사자를 보내어 도움을 받고자 했습니다. 아하스가 이사야 몰래 은밀히 앗수르의 도움을 받으려고 하였던 것처럼, 히스기야통치 초기에 친 애굽파들은 가능한 한 예언자에게 숨기고 애굽과 동맹을 체결할 계획을 꾸몄습니다. 친앗수르파, 친애굽파, 친바벨론파로 인해서 유대의 정국은 편안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친애굽파들은 여호와의 말씀으로 책망 받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여호와의 예연자로부터 숨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그들의 비밀을 아시고 예언자도 여호와의 빛을 통해 그 전체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습니다. 유대는 여호와의 피조물인데도 여호와를 불필요한 존재처럼 버리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마치 토기가 저를 만들어 놓은 토기장이에게 그는 총명이 없다(그는 나를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여호와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듯이 여기고 자신들이 지혜로운 체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백성들이 근본적으로 오해하고 무지하여 잘못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전능하시고 창조적인 영광과 온전한 지혜를 가지신 예언자의 하나님께서는 이 거만하고 사특한 나라를 완전히 멸망시키시고 가난하고 가련한 이들의 기쁨이 되도록 나타내신다는 것입니다.
이사야45:9을 보면 이미 유대는 기울어질대로 기울어졌었습니다. 여호와께서 힘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유대는 자꾸 패역의 길로 가고 있었습니다. 죄만 더하고 패역이 하늘에 닿았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 불평은 많았습니다. 하니님께 불평하는 인간은 질그릇에 지나지 않습니다. 질그릇 중에서도 깨지기 쉬운 질그릇입니다. 진흙자체가 그것을 만드는 이에게 절대로 불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18:1-10에서 토기장이와 진흙의 비유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예레미야는 가서 진흙을 취급하는 토기장이를 봅니다. 그 후에 그에 대한 하나님의 해명을 얻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그의 눈에서 사람과 진흙, 하나님과 토기장이의 비교를 암시하게 됩니다. 이것은 여러 번 히브리인들에게 있었던 비교입니다.
욥기10:9 기억하옵소서 주께서 내 몸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거늘 다시 나를 티끌로 돌려 보내려 하시나이까
욥기33:6 나와 네가 하나님 앞에서 일반이니 나도 흙으로 지으심을 입었은즉
토기장이와 진흙의 비유를 왜 드셨습니까? 여호와께서 상징으로 백성에게 열방에 대해 그의 뜻대로 행하실 수 있는 주의 권세를 보이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러한 것이 이스라엘에게도 해당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는 본 구절에서 하나님과 인간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설정에서 기억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인간은 동격(同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종속(從屬)된 관계입니다. 그것도 존재론적 위계의 관계로 창조하신 분과 피조물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어떤 것을 하시거나 만들기 위해서 사람의 동의(同意)를 얻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무한한 자율성(自律性)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버리심이냐? 은혜냐? 할 때에 불평등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원받는 자가 있는 것은 무한한 긍휼을 입음이요, 멸망당하는 자가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버리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죗값대로 받는 것입니다. 22절을 보면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관용하시는 하나님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자칫하면 하나님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0) | 2022.03.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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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상의 악 전쟁 (0) | 2022.03.13 |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조직의 힘은 천 명의 사람이 공동으로 일함으로써 천 명이 사용할 양만큼만 얻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많은 것을 생산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위하여 999명이 오직 한 사람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우크라이나를 침략한 러시아의 만행을 보며).
Henry George
전쟁은 젊은이가 인간이라는 고유의 품성을 하직하고 죽음을 연습하고 죽임을 배우는 병사로 교육한다. 따라서 병사는 관습적으로 사회로부터 격리된다. 병사들의 중요한 감정은 상관에 대한 봉사이다. 상관이라는 사람은 영내에서 전제주의를 교육하는데 전력을 다한다. 전제주의는 자기의 목적을 폭력으로 달성하기 위해 이웃의 권리를 노리개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병사들의 주된 만족은 모험이고 폭풍우 같은 위험이다. 결국 그들은 평화로운 노동에는 등을 돌리게 된다. 전쟁은 또 다른 전쟁을 낳고 전쟁은 끝없이 계속되어 간다. 전쟁에 이긴 국민은 승리에 도취되어 또 새로운 승리로 향하여 나가려 하며 패전의 고배를 마신 국민은 그들의 명예와 손실을 회복하려고 서두른다. 서로 물어뜯고 분노에 미친 국민은 서로 상대방의 멸망을 바라며 적국에 질병이나 기아사고나 내란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따라서 인간을 죽인다는 것은 이런 국민 사이에는 괴로운 고뇌가 아니라 승리의 기쁨일 뿐이다. 그래서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일이 거리거리에 전광 등불로 번쩍이게 하고 방방곡곡에서 큰 잔치가 벌이는 축제가 되기도 한다. 때문에 인간의 마음은 거칠어질 대로 거칠어지고 사악한 욕심을 길러낸다. 결국은 동정이나 인도적 감정을 잃어버리게 한다.
전쟁을 하겠다는 사람들은 사람을 한꺼번에 죽이는 무서운 살인마들이다. 폭탄 한 개마다 수십 명 내지 수천 명의 목숨이 죽는다. 한 명의 전쟁광 때문이다. 저들은 전쟁을 하기 위해서 그럴싸한 명분을 만들지만, 그 전쟁이 참혹하여 자기의 자녀들은 절대로 전쟁터에 보내지 않을 비겁한 자들이기도 하다.
-찬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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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악 중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악이 가장 크다. 대개의 젊은이들은 고귀함과 위대함은 한 인간이 자신의 의욕을 차버리고 타인의 의로운 욕망을 위한 도구의 역할이 되어 그 때문에 죽음을 당하든지 굶주림과 목마름과 비바람이나 한서 때문에 고초를 당하며 불구가 되어도 그 연유를 초연할 수 있는 사람에게 부여한다. 또 죽은 뒤의 불멸이나 신문이 제멋대로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영광 따위와 덧없는 찬사에 웃고 웃지 않는다.
총소리가 난다. 그는 부상당해 쓰러진다. 전우들은 그를 군화로 짓밟고 전진하므로 그대로 죽어간다. 아직 숨이 붙어있던 그 병사는 그 자리에서 불멸의 죽음이라는 고마운 찬사를 받는다. 그러나 전우들도 친척들도 그의 죽음 따위는 잊어버린다. 그리고 그 병사가 자신의 행복과 고뇌와 인생과 모든 것을 바쳤던 그 죽음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2, 3년 지나서 누가 그의 백골이라도 찾아내면 그 백골로 영국식 구두약이 만들어져 그가 소속했던 군대의 장군이 구두를 그것으로 닦게 되는 것이다.
톨스토이 인생독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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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차이코프스키와 문필가 도스토옙스키를 배출한 나라, 국기 하단의 노랑색이 곡창지대를 뜻할 정도로 비옥한 흑토 덕분에 '유럽의 빵 바구니'로도 불리는 나라 우크라이나의 대통령이 지금 국제 사회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습니다. 최근에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젤렌스키 대통령이 어떻게 우크라이나를 지켜내고 세계를 단합시켰나' 라는 제목의 특집 기사를 내고 그의 지도력을 조명했습니다. 타임은 러시아의 침공 5일째인 지난 3월 1일, 젤렌스키 대통령이 유럽의회에서 “삶이 죽음을 이길 것이며 빛이 어둠을 이길 것”이라면서 유럽 각국의 협력을 촉구하는 연설을 두고 “찰리 채플린이 윈스턴 처칠로 변모한 것 같았다.”고 평가했습니다. 코미디언 출신인 그를 희극 배우 '찰리 채플린'으로 표현했다가,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에 견준 것입니다. 지난 달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 때만 해도 하루나 이틀 만에 수도인 키에프가 함락될 것이라고 전 세계는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미국이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항공편을 제공할테니 망명할 것을 권했을 때 그의 태도는 단호했습니다. 군복을 입고 나와서 “나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도망갈 항공편이 아니라 더 많은 탄약입니다.” 라면서 각료들과 함께 수도에 남아 끝까지 싸우겠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지도자의 결기에 찬 말 한마디에 전 세계는 감동했고, 우크라이나 국민 13만 명이 자원입대했으며, 세계 각처에 흩어져 살던 우크라이나 젊은이들이 속속 귀국하고 있습니다. 용감한 지도자에겐 용감한 국민이 있는 법인가 봅니다. 한 시민은 러시아 탱크 앞에서 온몸으로 탱크를 막아 세웠습니다. 소셜미디어에선 “러시아가 침공하기 전에는 그가 누군지도 몰랐지만, 이제는 내가 응원하는 최고의 인물이다.”
“캡틴 우크라이나” 이런 칭송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키예프의 한 신문은 “국민들은 그를 ‘우크라이나의 진정한 초대 대통령’이라고 부른다"고 전했습니다. 얼마 전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이 철수한 직후 가족과 함께 이웃 나라로 도주한 아프간 대통령의 모습. 그 결과 미국이 20년 동안 도와준 나라가 단 이틀 만에 탈레반의 손에 넘어가는 비참한 모습과 너무나 대조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번에 우크라이나 사태를 보면서 나라다운 나라를 보았고, 지도자다운 지도자를 보았고, 국민다운 국민을 보았습니다.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 같은 대통령을
대한민국은 언제쯤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아마도 국민 모두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일 것입니다. 이 말이 틀렸다면 '아마도'라는 말 때문일 것입니다. '우크라이나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미콜라 리센코가 작곡하고, 민족주의 작가 콘니스키가 가사를 쓴 ”우크라이나를 위한 기도“(몰리뜨바 자 우크라이누)라는 곡이 있습니다. 제2의 국가 같은 노래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기도하나니 우크라이나를 지켜주소서. 그들에게 자유를, 그들에게 행복을, 그들에게 선량한 세상을 주소서.” 우크라이나의 4인조 팝그룹의 보컬 미하일로 코마가 부르는 이 곡을 들으시면서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를 위하여, 그리고 새로운 지도자를 맞이하는
대한민국을 위하여 잠시나마 하던 일을 멈추고 기도해주시지 않겠습니까?
꼭 이래야 했나? (0) | 2022.11.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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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만 공정을 말하고, 말로만 정의를 외치며, 말로만 미래를 말한다고 그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말뒤에 바로 따라붙어야 하는 것이 행동이며,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과거의 행동이 그러해야 한다.
Pearl Kim
이렇게 말이 통하지 않은 민족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입니다. 주전 7세기에 시행된 요시야의 종교 개혁에 의하면 합법적인 희생 제사는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전 예배에 참석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다른 예배 중심지를 찾아야 했습니다. 바벨론 포로기간에 성전이 제거됨에 따라 구약 종교를 유대교로 수정하는 일이 불가피해졌습니다. 이때부터 모세가 받은 율법이 삶의 규칙을 제시하는 핵심적인 규범이 되었습니다. 에스라의 정책도 주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다가 주전 2세기경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은 헬라화 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제사장들도 헬라화 되었습니다. 이러다보니 성전예배는 기쁨의 예배가 아니라 하나의 의무감에서 드렸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회당을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오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방편으로 격상시켰습니다. 그리스도가 계시던 당시에는 예루살렘에만 하더라도 수백 개의 회당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 곧 유대교의 교리는 철벽이었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민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강조만 했습니다. 바리새인에게 있어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완전하고도 최종적으로 계시한다고 여겼습니다. 선지서들을 법에 대한 해석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이스라엘은 그 존재의의를 가졌습니다. 이들에게 모세오경은 성문화된 율법일 뿐이었습니다. 율법의 원칙들을 매일의 삶에 적용할 필요에 따라 구두 율법을 발전시켰습니다. 성문 율법에는 적극적인 명령 248개와 소극적인 명령 365개 등 모두 613개의 계명이 있었습니다. 이 계명들을 일일이 준수하는 것이 바로 기본적인 계명들을 준수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율법주의를 추구하는 경향은 올바른 마음가짐곧 윤리를 강조함으로 완화되었습니다. 유대교는 원죄에 관한 기독교 교리와는 무관합니다. 바리새인들은 기독교에 비해 하나님의 절대적 거룩성을 덜 강조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 임할 세계에 대한 유대교의 소망은 영원한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속죄에 관한 문제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고 성육신의 개념도 배제되었습니다.
이러한 말도 안 되는 구원관과 율법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Messiah는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기다리는 Messiah는 한정적이었습니다. 현재 유다가 로마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그들이 기다리는 Messiah는 점령군의 사령관이고 강력한 왕이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씨저보다 더 강력한 Messiah여야 했습니다. 그야말로 백마를 탄 강력한 왕이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로마군을 일시에 격파하고 자신들을 신하로 삼는 power-king Messiah를 기다렸습니다.
요한복음1:1절에서 18절까지 narration이 청중에게 이야기하듯이 사도요한은 예수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다. 그 말씀이 태초에 함께 계셨다. 만물 곧 우주가 그 말씀으로 인하여 지어졌다. 어떤 것도 안 만드신 것이 없었다. 그 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다.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다. 그런데 빛이 어두움에 비쳤는데, 어두움이 왜 빛이 오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갑자기 인물이 바뀝니다.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다. 그 이름은 세례요한이다. 저는 이 땅에 증거 하러 왔다. 하나님께로서 온 빛에 대하여 증거 한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으로 자기의 증거로 인하여 사람들로 믿게 하기 위함이었다. 사실 세례요한은 그 빛이 아니었다. 오직 그 빛에 대하여 증거 하러 온 것뿐이다.
다시 그 빛에 대하여 조명합니다. 그 빛은 참 빛이라 했습니다. 참 빛을 말했을 때엔 거짓 빛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거짓 빛은 사람들이 만든 빛입니다. 그러나 참 빛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빛이 죄인들에게 비취었다. 그 빛이 애초에는 하늘에 계셨다. 그런데 지금은 이 세상에 계셨다. 세상은 그 빛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졌다. 그러나 세상 곧 사람들이 그를 알지 못하였다. 더구나 자기 땅 곧 유대 땅에 왔으나 자기 백성들이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 빛을 영접하는 자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그런데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 계셨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셨다. 그러나 율법으로는 의롭다 할 사람이 없다. 그러니 대속하신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뿐이다. 그리고 여태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실제로 하나도 없다. 그런데 예수님을 이 땅에 오게 하셔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나타내셨다고 했습니다. 사도요한은 자기 복음서를 기록함에 있어서 예수는 인간의 모양을 입으시고 이 땅에 내려오신 하나님의 정신이요 하나님의 이성이며 하나님의 말씀이심을 나타내려고 했습니다.
19절을 보면 갑자기 세례요한이 유대인들로부터 주목을 받습니다. 이에 대한 배경이 마태복음3:1-12입니다.
1 그때에 세례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 3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 4 이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5 이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6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10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세례요한은 어떤 기적도 베풀지 않았습니다. 요단강에 나타나서 사람들에게 외쳤습니다. 그의 외침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그의 외침에 사람들이 나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외침에 사람들이 나가서 죄를 자복했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당연히 유대인들이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요한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요한은 사가랴의 아들이요. 사가랴는 제사장이었기 때문입니다(눅1:5). 유대교에 있어서 제사장을 위한 유일한 자격은 혈통이었습니다. 누구든지 아론의 자손이 아니고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제사장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론의 자손은 제사장이 되는 것을 누가 막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당국자들의 안목으로 볼 때 세례요한은 사실상 제사장이었습니다. 제사장이 왜 이런 비정상적인 처신을 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고자 찾아 왔습니다.유대인 곧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다르게 표현하면 당시 종교문제에 실권을 잡은 자들은 실태조사를 하러 사람을 파견했습니다. 그리고 세례요한에게 묻습니다. 네가 Messiah냐? 아니면 네가 Elijah냐? 혹은 그 선지자냐? 이들이 말한 사람들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예언들입니다. 모두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입니다.
이사야63:1-6 1 에돔에서 오며 홍의를 입고 보스라에서 오는 자가 누구뇨 그 화려한 의복 큰 능력으로 걷는 자가 누구뇨 그는 내니 의를 말하는 자요 구원하기에 능한 자니라 2 어찌하여 네 의복이 붉으며 네 옷이 포도즙 틀을 밟는 자 같으뇨 3 만민 중에 나와 함께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을 인하여 무리를 밟았고 분함을 인하여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뛰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 4 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 구속할 해가 왔으나 5 내가 본즉 도와주는 자도 없고 붙들어 주는 자도 없으므로 이상히 여겨 내 팔이 나를 구원하며 내 분이 나를 붙들었음이라 6 내가 노함을 인하여 만민을 밟았으며 내가 분함을 인하여 그들을 취케 하고 그들의 선혈로 땅에 쏟아지게 하였느니라
산헤드린 곧 예루살렘 공회의 여러 기능 중의 하나는 거짓 예언자로 혐의를 받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든지 다루었습니다. 그래서 산헤드린은 세례요한이 거짓 선지자인지 아닌지 그 사람을 살펴보는 것이 그들의 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세례요한은 제사장의 통념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설교자의 통념에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조사를 해보자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세례요한에게 네가 Messiah냐?고 물었습니다. 유대인들은 Messiah를 학수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까지도 고대하고 있습니다. 이미 오신 Messiah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유다와 예루살렘은 로마의 속국이었습니다. 사로잡힌 바 된 사람들이기에 그들을 구해 줄 구원자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만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조만간에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하시기 위해 개입하시리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세례요한을 Messiah냐고 물은 것입니다. Messiah에 대한 관념을 그들은 여러 각도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온 땅에 평화를 가져오실 분을 기다렸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공의로 다스릴 분이 오시리라고 기대하였습니다. 대부분 사람은 백마 탄 구원자를 기다렸습니다. 유대인의 군대를 이끌고 전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민족적 위대한 戰士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씨저보다 더 위대한 분이 오실 것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파송된 어떤 초자연적인 인물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다윗의 계열에서 한 군왕이 일어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종종 자칭 Messiah라고 하는 자들이 일어나서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는 격동의 시대였습니다. 요한에게 와서 그가 Messiah인지 아닌지를 물어보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그 주장을 완전히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떤 암시를 제시하면서 그것을 부인했습니다. 헬라어로 나 ejgw;(egô)란 말은 그것이 놓여지는 바에 따라 그 뜻이 강조됩니다. “Messiah는 내가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돌려서 말하지 않고 바로 직설적으로 나는 절대로 Messiah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유대인은 세례요한에게 네가 Elijah냐?고 물었습니다. 말라기4:5-6을 보면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유대인들은 세례요한에게 Elijah가 아닌지를 물었습니다. Messiah가 오시기 전에 그의 오심을 전하고 세상이 그를 영접하도록 준비하기 위하여 Elijah가 오리라는 것이 유대인의 신념이었습니다. 특별히 Elijah는 반대자를 처리하기 위해 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그것이 물건이건 사람들이건 간에 깨끗한 것과 불결한 것을 가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Elijah가 갈멜산에서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 제사장을 죽인 것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생각에는 유대인과 유대인이 아닌 자들을 가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흩어져 있던 가족들을 다시 한 데 모으리라는 것입니다. 전통적인 율법이 소유자가 분명치 않아 서로 다투고 있는 금전이나 재산 혹은 소유자가 밝혀지지 않은 재산은 어떤 것이든지 “Elijah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했을 정도로 유대인들은 이 일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Messiah가 오시기 전에 Elijah가 오리라는 신앙은 말라기4:절에 근거한 것입니다. 모든 왕이 다 그러했듯이 Elijah가 Messiah의 즉위 때에 기름을 부을 것이라고 믿기까지 했습니다. Elijah는 죽은 자들을 일으켜 그 새 왕국에 참여하게 할 것이라고 믿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나는 Elijah가 아니라고 부인했습니다. 요한은 Elijah의 정신과 능력으로 나아갔습니다(눅1:17).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Elijah라고 일컬으셨습니다(마17:12). 그러나 문자 그대로의 Elijah는 아니었습니다. 단연코 나는 Elijah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유대인은 세례요한에게 네가 그 선지자냐?고 물었습니다. 신명기18:15-18을 보면
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찌니라 16 이것이 곧 네가 총회의 날에 호렙산에서 너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한 것이라 곧 네가 말하기를 나로 다시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않게 하시고 다시는 이 큰 불을 보지 않게 하소서 두렵건대 내가 죽을까 하나이다 하매 17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의 말이 옳도다 18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
유대인들은 세례요한에게 기다리고 있던 약속된 선지자냐고 물었습니다. 때때로 Messiah가 오실 때는 Isaiah나 Jeremiah가 다시 오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로 모세가 신명기18:15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는 말씀을 백성들에게 준 보증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유대인이라면 그 누구도 결코 잊을 수 없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예언자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자가 나타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보다 뛰어난(par excellence) 예언자가 오실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이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밝히 계시해 줄 한 선지자 곧 Messiah를 말합니다. 이 선지자는 모세와의 연관성 속에 율법해석의 권위와 정통성을 지니게 될 Messiah입니다. 모세를 통해서 말해진 이 선지자는 궁극적으로는 온 인류의 대속자로 오실 Messiah였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루신 Messiah입니다. 모세는 선지자로서 여호와와 직접 대면한 자입니다. 애굽에서 이적을 베푼 자입니다. 권능과 위엄을 백성 앞에서 나타냈습니다. 백성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했던 자입니다. 계시의 완성자요 인류 구속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이 모세에 필적할 만한 선지자가 곧 Messiah입니다.
유대인들이 세례요한에게 그 선지자냐고 물었을 때 그러한 영광은 자기의 것이 아니라고 부인했습니다. 자기는 오직 예수님 앞서서 오실 길을 다지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고 말했습니다.
자기는 사람들로 하여금 왕이 오실 길을 예비하라고 외치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인용절은 이사야40:3절에서 온 것입니다. 복음서 전체가 세례요한에 대하여 이 귀절을 인용했습니다. 이 말씀의 배후에 들어있는 관념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시 동방의 도로들은 평평하지 않았습니다. 자갈이 깔려있지도 않았습니다. 그 길은 단지 밟아서 다져진 길들이었습니다. 왕이 어느 지방에 순시하러 갈 때나, 정복자가 자기의 영토를 지나가려고 할 때 그 길을 미리 다지고 곧게 정리하였었습니다. 요한은 그들에게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다만 왕이 오실 길을 예비하라고 말하는 소리일 뿐이다. 세례요한은 또 “왕이 방금 오시고 있으니 스스로 예비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당시에 세례요한은 인기가 어마어마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세례요한에게는 수십만의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개척교회 수준인데, 세례요한은 대형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 자신은 자신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바라보는 일을 전혀 원치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를 망각하고 오직 왕이신 예수님만을 바라보기를 원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조사해보니 세례요한을 두려워해야 할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세례요한이 무슨 권세로 세례를 베풀까? 이상히 여겼습니다. 만일 그가 Messiah이든가, Elijah이든가 혹은 선지자라면 세례를 베풀 수도 있었습니다. Isaiah는 “그가 열방을 놀랠 것이며”(사52:15)라고 말했습니다. 에스겔은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겔36:25) 라고 말했습니다. 스가랴는 “그 날의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슥13:1)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왜 요한이 세례를 베풀어야 하나? 그들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검증을 해보니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왜 세례를 줄까?
바리새인들은 요한이 무슨 권세로 세례를 베푸느냐고 물었습니다. 왜 요한이 세례를 베풀고 있는가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손으로 받는 세례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세례를 받는 사람은 다른 신앙에서 돌아온 개종자였습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교회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세례를 받는 일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씻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방 종교에서 개종한 이방인들은 세례를 받음으로써 씻음을 받아야 했습니다. 요한은 단지 이방인들만 받아야 할 세례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베풀고 있었습니다. 그는 선택받은 백성도 정결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믿었던 것은 이스라엘의 회개였습니다. 그러나 직접적으로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서있다.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고 말했습니다. 요한은 자기 자신에게 노예 이상 천한 직업을 부과했습니다. 신들메를 푸는 일은 아주 천한 노예가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일은 너무나도 천한 일이어서 제자들로서도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은 “나는 오실 그 분의 노예가 되기에도 합당치 못하다.”요한은 여기에서 다시 한 번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 하고 있습니다. “왕은 오시고 있다. 그러므로 왕의 오심을 위하여 너희는 이방인이 정결하게 해야 하는 만큼 정결하게 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그 왕이 역사에 개입하심을 위하여 준비하라”고 그는 말하였습니다. 요한의 역할은 다만 그 길을 예비하는 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소유하고 있는 어떤 위대함도 그가 오시리라고 예언한 그 분의 위대함에서 온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나게 하기 위하여 자신을 말살했습니다. 그는 자기 스스로가 그렇게 알고 있었듯이 그리스도를 지시하는 이정표였습니다.
Gerald Moore제랄드 무어(1899.7.30.-1987.3.13.)는 영국에서 태어나서 카나다로 가족이 이주했습니다. 본격적으로 피아노를 배웁니다. 하지만 독주자로는 각광을 받지 못했습니다. 교회오르간 연주, 무성영화반주자 등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1921년부터 본격적으로 반주자로 나갑니다. 당대에 유명한 성악가들의 반주를 맡아 연주회와 녹음을 했습니다. 평생 한 번도 독주무대를 갖지 않았습니다. 유명한 성악가들의 반주만 했습니다. 그는 항상 자기 반주가 유명한 성악가들의 노래에 폐를 끼치지 않는지 조심했습니다. 한번은 자신의 피아노소리로 인하여 성악가들의 목소리를 눌러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위대한 반주자를 위해 특별히 마련된 연주회가 1967년2월20일 런던의 로열 페스티벌홀에서 있었습니다. 이 연주회에서도 무어는 여전히 성악가들의 노래를 돕는 반주자였습니다.
closing 이스라엘이 그대하고 바라고 있었던 것은 Messiah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선지자를 보내면 그것을 믿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왜일까? 자기들이 잘났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똑똑하고 잘나서 하나님께서 보낸 자들이라도 검증을 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아들 Messiah가 왔어도 검증을 하다가 십자가에서 죽이는 오류를 범했습니다.
spotlight는 조명 기구 중 하나입니다. spotlight는 콘서트, 뮤지컬과 같이 특정한 인물을 집중적으로 비치기 위해 사용됩니다. 우리는 자칫 spotlight가 우리를 비취게 할 수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오류를 범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spotlight는 예수님만 비취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예수님의 종으로서 낮은 위치에서 주님을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각 사람에게 비취는 참 빛 (1) | 2023.09.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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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신분 (0) | 2011.08.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