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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1.1,2, 로마서9:25,26

 

 

Roma는 서양을 대표하는 제국이었습니다. 원래 Roma는 지금의 Roma 중심부에서 시작된 작은 도시국가(polis)였습니다. 하지만 차츰 주변 국가들을 정복하기 시작하면서 세력을 넓혔습니다. 서쪽으로는 영국, 동쪽으로는 Turkey를 넘어 중동 지역까지, 남쪽으로는 Africa Sahara 지역까지, 북쪽으로는 북유럽 대부분을 정복하여 대제국을 건설했습니다. 그래서 무적(invincibilit) Roma라고 했습니다. 그러한 Roma가 주전 326-284년까지 상당히 고전한 상대가 있었습니다. 산악지방의 Samnium 족입니다. 이들은 Italy 중부에서 남부에 걸친 산악지대에 거주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수도가 확실한 통일국가도 아니었습니다. 독자적인 문명도 없었습니다. 당시에도 그다지 이름도 알려지지 않았던 족속이었습니다.

326년 로마는 Samnium족과의 전쟁을 시작한지 5년 후에 Samnium족에게 패배했습니다. 새로 얻은 로마의 영토를 포기하고 Samnium족의 영향권을 존중한다는 내용의 강화조약을 맺습니다. 이 강화조약은 5년간 계속되다가 최종적으로는 306년에 Samnium족을 패배시키고 로마의 영향력 아래 두게 됩니다. Roma는 이런 상대쯤은 간단히 정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Roma는 뜻밖에 애를 먹었습니다. 그렇게 대치하다가 5년째 된 주전 321년에 로마는 Samnium족에게 패하여 항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굴욕을 로마는 철저하게 가슴 깊이 새겨두었다가 주전 284년에 설욕을 했습니다. 로마는 Samnium족에게 패할 때 자신들의 정체를 다시 한 번 돌아보았습니다. 왜 우리가 패했을까? 돌아본 다음에 철저한 대책을 세웠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정체를 알아야 합니다. 내가 누구냐? 현재 위치가 어디이며. 무엇을 하는 사람이며, 나는 어디에 속했는지를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아담이 범죄 함으로 사람은 영적인 죽음과 육체적으로 죽게 되었습니다. 영적 죽음은 아담이 반역하여 하나님과 단절되었을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육체적 생명은 930년간 지속되었지만, 그의 마음에 하나님을 상실하므로 영적 죽음은 이미 아담의 삶에서 실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박탈인 죽음을 죄에 대한 벌로 정하셨습니다. 사람의 죽음은 필연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 죽음에서 사람을 구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레위기1:1-2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생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찌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나올 때 완전히 들떠 있었습니다. 눈만 뜨면 강제노역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젠 그 힘든 노역을 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얼마 가지 않았습니다. 기쁨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불평으로 변했습니다. 그들의 탈출의 길은 마냥 영광의 길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홍해를 기적으로 건넌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이 무엇인가를 실감 나게 했습니다. 어려움은 홍해를 건넌 지 며칠 되지 않아 일어났습니다. 이들이 걸어가는 길은 태양이 이글거리는 광야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투덜거리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사랑으로 감싸 안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독수리 날개로 업어 시내산으로 인도하셨습니다(19:4).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끌어내신 것은 이스라엘의 조상에게 약속하셨던 그 언약의 성취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망나니 같은 이스라엘을 교육시키려 하셨습니다. 아직은 어리광을 부릴 나이지만, 하나님은 이들을 가나안 땅에 사는 대적들을 이길 수 있는 강한 군대로 키우려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가기 위해서 그들이 살아가야 할 율법을 수여 받습니다.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기 위한 각종 제사 규례도 받습니다. 제사 제도는 죄를 지은 인간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기 위해 제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기에 부정한 것이나 죄는 열납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수없이 백성들에게 성결의 삶을 요구하셨습니다. “나 여호와는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하라.” 거룩은 하나님의 속성이었습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trademark였습니다. 죄인인 인간이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희생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1-16)을 말씀하시고 거기에 따르는 하나님 앞에서의 거룩한 삶을(17-27) 명령하셨습니다. 우리는 희생 제사를 왜 하나님께서 말씀하실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짐승의 희생 제사는 모형(type)입니다. 원형(antitype)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입니다. 사람은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나아가려면 죄 없는 어떤 대상이 죽어야 했습니다. 그 대상은 모형인 짐승이었습니다. 모형인 짐승이 죄인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원형이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불러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할 장막을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장막 역시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죄 없는 어린양이 사람들을 위해서 죽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 땅에 세울 장막의 모형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늘에 있는 장막을 본뜬 것이었습니다. 이 지상의 장막이 모형임을 들어 하늘의 장막을 참 장막이라고 했습니다(8:2), 하늘의 장막이 원형antitype이라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지상의 장막에서 드려진 제사는 예표적이고 종말론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옛 언약 아래서 드려지는 제사로는 섬기는 자의 양심을 온전케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9:9). 그런데도 이 제사제도는 그리스도가 오셔서 구속사역을 완성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9:10).

성막은 이토록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교제하기 위한 장소입니다. 죄인인 백성이 이 성막을 통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아무나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백성을 대표할 제사장을 세우셨습니다. 오직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 차례 속죄일에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성막 제도를 통해서 점차 진정한 영적 예배가 무엇인가를 배워갔습니다.

사도요한은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모습을 표현하기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임마누엘, 장막을 치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독자)의 영광이요 진리가 충만하더라(1:14).라고 했습니다. 구약의 성막은 곧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매년 드리는 속죄일의 희생 제사를 그리스도의 영원한 제사의 한 모형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레위기의 제사제도를 통해 죄인 된 인간이 하나님께 죄 용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죄를 지었을 때 혹은 감사할 이유가 있을 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각종 제사제도를 설정하셨습니다. 그 제사가 다섯 가지 제사 형태입니다. 왜 하나님은 제사 제도를 통해서만 그 길을 열어놓으셨습니까? 그것은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그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은 자만이 하나님께 열납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속된 것과 거룩한 것을 구별하여 가르치셨습니다. 거기에는 먹는 음식과 성생활까지도 적용되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이 레위기뿐만 아니라 성경 전반에 걸쳐 나타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세상)에서 구원받은 자들입니다. 구원을 위해 노력하며 사는 삶이 아니라 구원 이후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할 존재들입니다. 물론 신약 시대에도 같은 명령이 하달되었습니다. 레위기는 그 거룩함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책입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성막을 건축하라고 하셨습니다(25:8-9).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모양대로 장막을 짓고 기구들도 그 모양을 따라 지을지니라(25:8,9)

 

그들 중에 (그리고)내가거할 성소를 나를 위하여 (그리고)그들을 시켜 짓되

.!k;/tB] yTin]k'v;w] vD:q]mi yli Wc[;w]

성막은 모세가 고안해서 지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백성들 스스로 고안해서 지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을 이렇게 저렇게 짓도록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견본 대로 지었습니다. 그 지침이 아주 세밀하였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그 원래의 모습을 거의 비슷하게 재현할 수 있었습니다.

성소는 지극히 거룩한 장소입니다. 하나님께서 백성 중에 거하실 때 바로 이 성소에 임재하셨습니다(25:81). 그래서 그곳의 거룩함을 더럽히면 안 되었습니다.

성소로 들어가는 문이 있었습니다. 이 문은 오직 동쪽으로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길도 오직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할 문이요 길입니다.

문을 통과하면 놋제단이 있습니다(27:1-8). 성막 안뜰에 있는 놋으로 만든 단으로 제물을 태우는 곳입니다. 단 네 모퉁이에는 뿔을 만들었습니다. 희생동물의 네 다리를 묶기 위해서 만들었습니다. 이 번제단의 뿔을 잡으면 죽을 죄인이라도 살 수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물두멍입니다(30:18). 이곳은 손과 발을 씻는 곳입니다. 더러움을 씻어 정결하게 되어야 함을 상징합니다. 물두멍에 대한 규례는 유대인들이 행했던 손을 씻는 관습이 발달하게 된 기초가 되었습니다.

첫째 휘장을 지나서 진설병 상이 있습니다(25:23-30). 이 상위에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위하여 모두 열두 개의 떡 과자가 놓여있습니다. 매주 한 번씩 갈아놓았습니다. 이 상은 성도와 깊은 교제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상징합니다. 이 상의 위치는 천막 첫째 방의 북쪽 편이었습니다.

첫째 방에 금등대가 있었습니다(25:31-40). 이는 성막에서 가장 화려하게 꾸며진 성물입니다. 이 등대는 아침저녁으로 손질하고 또 전부를 한꺼번에 끄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정기적으로 순수한 감람유로 채웠습니다. 등대 전체를 34kg의 순금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등대는 성소의 남쪽에 있었습니다. 일곱 등불은 세상의 빛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성소의 서쪽 편에 분향단이 있습니다(30:1-10). 금향단은 기도의 상징이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향기로운 향을 이 단에서 살랐습니다(8:3,4). 매년 한 번씩 이 분향단의 뿔에 피를 발라 거룩하게 했습니다.

성막의 문을 지나. 첫째 휘장을 지나서 둘째 휘장을 지나면 그 안에 언약궤가 놓여있습니다(25:1-22). 이는 성막에서 가장 중요한 성물입니다. 언약궤 속에는 몇 가지가 들어 있었는데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십계명이 새겨진 두 돌판입니다. 이 언약궤의 뚜껑은 정금으로 만들어졌으며 속죄소라고 칭했습니다. 언약궤의 상단에는 금으로 된 두 그룹이 서 있었습니다. 유대력으로 매년 710(9-10)에 속죄일 동안에 대제사장이 언약궤가 놓여진 지성소에 들어가 이스라엘의 죄를 위하여 피를 뿌리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언약궤 위에는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이 머물러 있었습니다.

 

성막은 과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만나기 위한 장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성막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직접적으로 만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이 속죄일에 번제와 속죄제를 드림으로 이곳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성막의 목적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의 상징이요.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과 만나는 장소였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목적은 성도들인 하나님과 함께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과 교제하시기 위해서 성막이 존재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왜 사망으로부터 구원하셨습니까(6:7)?

 

하나님께서는 역적 짓을 한 인류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들이 반역하였지만 버리지 않기로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반역한 인류를 다시 자기의 백성으로 돌이키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해서 아담의 범죄를 없었던 일로 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구원 작정을 세우셨습니다. 그것을 첫 인류와 후손들에게 알리셨습니다. 곧 구원자와 구원의 방식을 미리 알리셨습니다. 이 방식으로 인류가 자포자기하여 범죄를 가중하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반역한 인류에게 구원자를 약속하심으로 범죄로 인해 멸망으로만 가지 않도록 밝히셨습니다. 또 하나님의 백성으로 돌아오도록 할 것을 밝히셨습니다. 그리하여 절망과 좌절 가운데서 자지러져서 인류가 소실되지 않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류를 심판하여 죄의 귀결이 죽음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형집행이 아니라 집행을 유예하여 사람들로 자녀들을 낳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구원할 구원자를 보내기로 약속하셨습니다. 구원자가 여인의 씨로 나고, 아브라함의 씨로 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사탄의 계교대로 인간이 사라지고 창조가 해체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타락한 인류지만 다시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셈의 후손 중 아브라함을 구원사역의 동역자로 부르셨습니다. 구원계획이 아브라함의 가정에 국한하여 시행되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구원자가 될 것임을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구속주의 조상으로 세우심으로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세상 구원의 방식이 속죄 제사의 방식에 의해서 이루어질 것임을 실물로 교훈하셨습니다. 아담에게는 인류의 구원이 사탄을 깨트림으로 될 것을 선포하셨는데, 아브라함에게는 속죄제사의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이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그들과 언약을 맺어 자기의 백성 삼으시고 그 백성에게서 구원이 구체화될 것임을 보이기로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음으로 모든 인류가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돌아갈 것을 예시하셨습니다. 이때 이스라엘은 세계의 모든 종족을 대표하였습니다. 이렇게 인류의 대표와 언약을 맺어 언약 당사자들을 자기의 백성 삼으심으로 모든 인류가 다시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될 것임을 보이신 것입니다.

시내산 언약은 모세를 중보자로 하여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언약입니다. 율법과 할례를 언약 집행의 증표로 갖습니다. 이때 모세가 중보자로 세워졌어도 그는 참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예표(typus) 노릇을 하였습니다. 이 언약은 율법을 지켜 구원에 이를 것으로 선포했지만, 율법은 지킬 수 없었습니다. 구약의 제사는 속죄를 완전하게 이룰 수 없었습니다. 율법과 제사 제도의 설립은 율법의 완성자와 구속주를 바라게 하기 위해서 도입되었습니다. 죄의식을 증가시키고 율법 준수의 불가능을 더욱 고조시켜 그리스도를 열망하게 하기 위해서 언약체결로 율법을 세우셨습니다. 시내산 언약도 구원은 장차 오실 구속주를 믿음으로 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세워졌습니다. 그러므로 구약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모든 복들은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과 영생을 예표 함이었습니다.

 

Closing 하나님은 그리스도로 인류와 새 언약을 체결하심으로 구원협약을 완전히 구현하기로 하셨습니다. 이렇게 언약을 체결하심으로 세상을 완전히 구원하실 것을 모든 백성으로 알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로 의가 세워지고 죄과가 제거되므로 타락한 인류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됩니다. 이 언약으로 하나님이 저들의 하나님 되시므로 첫 언약 상태로 돌아갑니다. 이렇게 은혜로 세상을 구원하여 자기 백성으로 회복하시려고 하나님은 타락 이후 역사 내내 죄와 투쟁해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죄를 억제함으로 인류가 보존되어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조건은 제사였습니다. 구약에서는 주로 회중예배에 강조점을 두었습니다. 회중예배에서는 의식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예배란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길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예배를 드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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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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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재론實在論 realism 인간의 인식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재적 존재가 있다는 믿음. 실재론에는 여러 유형이 있는데, 이론의 범위 및 반실재론적 입장과 대조되는 범위에 따라서 그 유형이 달라진다. 반실재론의 한 유형으로는 관념론이 있다. 반실재론자들은 조지 버클리와 같이 “존재하는 것은 지각된 것이다”esse est percipi라고 주장할 것이다. 따라서 지각되지 않는다면 물리적 대상들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하지만 버클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는 점에서 실재론자의 한 유형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즉 버클리 는 주장하기를, 하나님은 언제나 대상들을 지각하며 현존하시기에, 인간에게 지각되지 않은 존재자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근거가 되신다). 현대 세계에서 인기 있는 반실재론의 한 형태는 다음과 같다. 세계 내 대상에 대해 참인 명제는 그 대상을 이해하기 위해 사용하는 인간의 개념에 의존한다. 따라서 세계에 대해 참인 것은 우리 인간이 세계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에 어느 정도 의존한다. 실재론(그리고 그 경쟁상대인 반실재론)은 구체적인 영역에 따라 제한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쿼크 입자와 같이 관찰 불가능한 과학상의 실체들에 대해서는 실재론자이면서, 집합이나 수(數)와 같은 실체 추상적인 논리상의 실체들에 대해서는 반실재론자일 수도 있다.

실재론 반실재론 Realism/Anti-Realism

실재론은 마음 바깥에 다양하게 있는 보편자들, 선함, 아름다움(원자와 같이) 과학에서 관측 불가능한 것들, 수, 혹은 세계 그 자체'의 존재에 대한 형이상학적 이론이다. 반실재론은 정신을 넘어서는 extramental 어떤 사물의 존재나 세계 그 자체의 존재를 부인하는 형이상학적 이론이다. 도덕적 실재론자는 선함이라는 것이 인간의 태도나 바람, 정서 또는 신념과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도덕적 반실재론자는 선함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하고, 선함이란 단순히 인간의 선호나 감정을 표현한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실재론/반실재론은 대개 주제에 따라 달라진다. 예로 과학에서 관측 불가능한 것에 대해서는 실재론자이지만, 선함에 대해서는 반 실재론자일 수 있다. 몇몇 소수의 저명한 포괄적 반실재론자들, 즉 인간의 신념과 독립적인 세계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다. 칸트의 추종자들은 인간의 개념이나 언어적 구조와 독립적인 세계를 생각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칸트의 주장들은 인식론적인 것이었기에 “반실재론자”라는 말은 칸트에게 적절하지 않다. 철학 외부에서는, 실재론과 반실재론이란 용어가 종종 부정확하게 사용된다. 정신 바깥에 무언가가 존재하느냐에 대한 형이상학적 주장이 아니라 오히려 정신 바깥에 존재하는 다양한 실재에 접근하는 것에 대한 인식론적 주장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 그러한 경우 실재론은 지나친 낙관주의, 즉 종종 소박실재론/naïve realism으로 묘사되는 고전적인 토대론자들의 인식 이론과 혼동된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실재론은 실재를 있는 그대로 (인간의 믿음과 독립적인) 물 자체로 볼 수 있는 신의 시점(인간의 개별성과 유한성을 초월하는 관점)에 도달하길 갈망한다. 그러나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은, 정신 외부의 존재에 대한 실재론의 주장은 어떤 특정한 인식 이론을 포함하지 않으며, 모든 실재론자가 소박 실재론자는 아니라는 점이다. 실제로 아주 소수의 현대 철학자들만이 비철학적 반실재론(인식론적 반실재론자들이 거부하는 인식 이론을 옹호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오히려 대부분은, 정신 외부의 실재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실재들에 우리가 접근하는 것은 어려우며, 문화적 특수성과 지각의 지평 등에 의해 조건 지어져 있음을 인정할 것이다. 신학은 실재론/반실재론 논쟁과 이해관계가 있다. 정통 기독교 신학이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초월을 주장한다고 가정할 때, 초월은 종종 형이상학적 측면에서 실재론과 관련된다. 그러나 정신 바깥에 있는 신적 실재의 구조에 접근하는 것과 관련하여 소박실재론적 설명이 반드시 수반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후기자유주의 신학은 초월적인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존재론적 주장을 계속 유지하겠지만, 하나님에 대한 인식론적 접근은 모두 공동체의 해석 구조communal constructions에 의해 매개된다고 주장한다. 또한 신학을 종교적인 실천으로 축소하여, 신학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제거하는(대개 비트겐슈타인에게서 영향을 받은) 더 급진적인 (즉, 형이상학적) 반 실재론 신학도 있다.

 

참고문헌

철학의 즐거움/Fujisawa Konoske

100인의 철학자 사전/Philip Stokes

서양철학사/박해용

인물중심의 철학사/김흥호

3분 철학/Shinya Oshiro

철학․변증학 용어사전/C. Stephen Evans

101가지 철학개념/Kelly James Clark, Richard Lints, James K. A. Sm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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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1:1-9 

 

2021Suez運河痲痹事故는 이집트 시간(UTC+2)으로 2021323일 오전 740분에 컨테이너선 에버기븐호(Ever Given)Suez運河에서 7일간이나 좌초된 사건입니다. 400m 길이의 배가 시속 74km의 모래폭풍을 맞고 넘어진 것이 좌초의 원인입니다. 그 결과 Suez運河의 통행을 가로막게 되었습니다. 좌초된 지 하루가 채 되지 않아 최소15척의 선박이 묘박지에 체류하였습니다. 이후에 237척의 선박이 운하를 통과하기 위해 줄을 서고 문제가 해결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좌초가 이 운하의 하부에서 발생한 까닭에 이를 우회할 방법도 현재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1869년 개통된 Suez運河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교통로입니다. Africa대륙을 우회하지 않고 AsiaEurope을 직접 연결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Suez運河는 세계 물동량의 12%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2020년 기준 통행선박은 1,8500척 이상으로 하루 평균 51.5 척입니다.

문제는 전 세계 물류의 약 10%Suez運河를 통과하는 까닭에, 이 사건으로 인해 유류, 일용품 등의 운송에 심각한 차질이 생길 것으로 내다보았습니다. 매 시간 4억 달러(4518억원)의 손해가 발생하고 있으며, 문제를 해결하기까지 추가로 매일 90억 달러(10조원) 상당의 상품운송이 지연될 것이라는 전망입니다. Suez運河를 주요 통로로 이용하고 있던 석유운송이 차질을 빚자 국제유가는 6% 이상 상승하였다고 합니다. 이집트에서는 매일 158억원의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했습니다.

 

더구나 코로나정국, 코로나사태, 코로나상황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들이 망가졌습니다. 이전에 잘 나가던 사업장이 송두리째 없어졌습니다. 이로 인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도미노처럼 무너졌습니다. 어떻게 해볼 래야 해볼 도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못살겠다고 합니다. 너무나 어렵다고 모두 말합니다.

 

이사야 1절을 보아도 그런 시기였습니다. 양상은 달라도 국가가 매우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국제적 상황으로 국내의 상황이 안정적이지 못했습니다.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이상이라

 

오늘 첫 번째로

 

I. 여호와의 선지자 이사야(1)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때는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왕 시대였습니다. 이때는 팔레스타인이 굉장히 암울했었습니다. 유다의 형제국인 북 왕국 이스라엘은 주전722년에 멸망했습니다. 그리고 유다도 앗수르의 침략을 받아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예루살렘만 외롭게 남아 있었습니다. 히스기야 왕 통치중간에는 유다도 점점 쇠퇴기에 접어들었습니다. 거기에 주변의 강대국이 부상함으로 인해서 유대의 입지는 점점 더 좁아졌습니다. 이사야는 주전791년부터 주전 681년까지 네 왕에 걸쳐 약 60년간 사역을 했습니다. 이미 망해버린 이스라엘을 바라보면서 유다는 이러한 전철을 밟지 말라고 준엄하게 유다에게 경고를 했습니다.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과 구원의 메시지를 동시에 선포했습니다.

 

이사야부터 선지서입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예레미야애가, 에스겔, 다니엘(5)은 대선지서라 하고,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12)를 소선지서라 부릅니다. 사람들이 위대해서 대선지서라 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분량이 많고 적음에 따라 대선지서, 소선지서로 구분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선지자를 aybin:(나비)라 불렀습니다. nabi대변인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정규적인 대변자로 그의 말에 신적 권위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선지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다음 그것을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직분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라는 직분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먼저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후에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전해야 합니다. 점치듯이 앞일을 훤히 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으면 선지자가 아닙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거짓 선지자이며 박수무당입니다. 귀신들의 조종을 받고 있는 아주 나쁜 사람들입니다.

 

이사야는 Amos의 아들입니다. 선지자 Amos가 아닌 다른 Amos의 아들입니다. 이사야는 이름에서부터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hy:[]v'y](예샤야)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이사야는 가족적으로도 하나님의 뜻을 나타냈습니다. 그의 아내는 여선지자였습니다(8:3). 그의 큰 아들은 bWvy: ra;v](스알야숩)입니다. “남는 자가 돌아오리라입니다. 이스라엘이 앗수르를 통해 징벌을 받은 후에 남은 자가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암시한 이름입니다(10:21). 다른 아들 이름은 zB' vj' ll;v; rhem'(마헬살랄하스바스)입니다. “약탈에 날래고 포획에 신속하다입니다. 앗수르에 의해 유다가 약탈될 것을 예언한 이름입니다. 따라서 이사야는 철저하게 하나님중심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직접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사람을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를 세우든지, 선견자를 세우든지 그의 대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은 겨우 여호수아가 살아 있을 때만 제대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왕정시대의 다윗 왕 때 40년간만 제대로 신앙생활을 할 정도였습니다. 800년간에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내놓을 시간은 약 70년이 채 못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들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그러한 결과로 인해서 이스라엘은 큰 파란을 겪었습니다. 얼마 되지 않는 나라가 둘로 쪼개졌습니다. 북쪽의 나라 이스라엘은 이미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했습니다. 남쪽나라 유다 역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망해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유대에 하나님의 뜻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너희들이 계속적으로 잘못 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빨리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국가나 어떤 단체의 안녕을 위해서 여러 가지 안전장치를 만들어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전장치는 불안정한 안전장치입니다. 환경과 여건에 따라 사람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서 환경과 여건이 불리하게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것을 모르고 안전장치만 믿고 갑니다. 세상의 모든 여건을 쥐고 계시는 하나님을 의지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알량한 지식에 의존하여 사람들은 죽음으로 달려가고 있을 뿐입니다. 알량한 이상한 교리에 혹하여 자신의 영혼을 팔고 있습니다. 결국 그로 인해서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는데도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뛰쳐나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내 말대로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장 좋은 안전장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정국을 코로나정국이라고 합니다. 다들 못살겠다고 아우성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추후에 있을 세상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오직 현세(Only this life)만 신경을 쏟고 있습니다. 다가오는 세상은 필연적으로 오는데, 오직 숨이 붙어있을 동안의 삶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죽음이란 아예 생각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사람들이 경제경제 하는데 경제 즉 이 세상의 부만 좇다가 망한 사람의 예를 이스라엘의 오므리와 아합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16-28을 보면 오므리 왕은 근동문헌에 팔레스타인을 오므리의 집이라고 기록될 만큼 탁월했습니다. 모압과의 전쟁과 외교에 탁월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전쟁의 승리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의 사적도 13절의 기록으로 끝냈습니다. 아합도 시리아의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지만 성경은 침묵하고, 그가 이방종교를 섬겼던 배교에 많은 지면을 할애했습니다.

 

죽음이란 말은 창세기2:17에 나옵니다. tWmT; tWm/mût thâmût 죽고 죽으리라를 반복하심으로 반드시 죽을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음을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데 대한 결과라고 아담과 하와에게 경고하셨습니다. 죽음은 불순종에 대한 필연적인 결과였습니다. 구약성경의 주요주제는 하나님의 거룩 성입니다. 이 거룩 성이 그의 속성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모든 것에서부터 그를 떼어 놓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죽음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궁극적으로 분리되는 것’/ultimate separation from God due to sin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대한 반역이거나 그 뜻에 순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던 인간은 그 실재를 눈으로 보았습니다. 아벨이 형 가인에게 죽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이고자 철저하게 계획하였습니다. 창세기4:8을 보면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물은 받으심에 가인은 언젠가 아우 아벨을 죽이리라고 살해계획을 세웠습니다. 두 형제가 들에 있을 때에 형 가인은 아우 아벨을 쳐 죽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기 위해서 계획적으로 아벨을 들로 유인한 것인지, 아니면 우연한 기회에 두 사람이 들에 있을 때 가인이 아벨을 죽였는지에 대해서 성경은 아주 모호하게 기록했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은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무엇을 말했는지 그 목적어가 없습니다. 그래서 일부의 번역본들은 우리가 들로 가자는 말을 첨가하였습니다. 원문의 흐름을 유연하게 할 뿐만 아니라 가인의 범죄가 계획적인 것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개역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바른성경 가인이 그 동생 아벨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들로 가자 그들이 들에 있을 때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을 대적하여 일어나 그를 쳐죽였다.

 

공동번역 그러나 카인은 아우 아벨을 "들로 가자"고 꾀어 들에 데리고 나가서 달려들어 아우 아벨을 쳐죽였다.

 

개역개정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3)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3)고대 역본들에 의하면 '우리가 들로 나가자'가 있음

 

CEV(Contemporary English Version) Cain said to his brother Abel, "Let's go for a walk." And when they were out in a field, Cain killed him.

NIV Now Cain said to his brother Abel, "Let's go out to the field." And while they were in the field, Cain attacked his brother Abel and killed him.

 

이후 죽음은 사람들에게 묘하게 다가옵니다. 므두셀라가 얼마나 오래 살았습니까? 969년입니다. 고려의 11대왕 문종 왕 61052년에 태어났다고 가정하면 올해 2021년이 그의 죽는 년도입니다. 그래도 죽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광개토태왕은 북경까지 땅을 넓혔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있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죽었습니다. 세종대왕이나 이순신장군 같은 분들이 지금까지 살아서 국가를 위하여 고문역할을 해주시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오래 살지 못했습니다. 나쁜 사람들 즉 을사오적인 이완용 외 4명은 아예 태어나지 말아야 했습니다. 아베나 천황이라는 작자들은 아예 어렸을 때 죽어야 했습니다. 이승만이나 박정희, 전두환 이명박 등은 우리나라에서 없었어야 할 인물들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못살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습니다. 우리생각에 나쁜 자들은 일찍 죽거나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죽음은 신비입니다. 착한 사람도 죽고, 나쁜 사람도 죽습니다. 돈이 많아도 죽고, 돈이 없어도 죽습니다. 죽음은 나이순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왜 이렇게 죽음이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까? 죄 때문입니다.

 

결국 이사야를 통해서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실 것을 밝히셨습니다(59:16-18,20). 그리스도의 탄생과 통치를 말씀하셨습니다(7:14, 9:1,6,7, 11:1-9). 예수님 앞에 올 세례요한의 사명을 예언했습니다(40:3, 3:3). 그리스도의 임무를 말씀하셨습니다(61:1,2, 4:17-19). 예수님은 왕이 아니라 종으로서 오심을 말씀하셨습니다(42:1-4). 우리를 위해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구원하심을 말씀하셨습니다(53:7-8,10,12, 61:1-11). 사람들을 복음으로 초대하셨습니다(55:1-3, 13:34). 죄인들이 구원 얻는 길을 말씀하셨습니다(1:18-20).

 

오늘을 사는 이 시대에도 굉장히 암울합니다. 좋은 news는 하나도 없습니다. 100% 모두 암울한 news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없이 산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모두 다 못산다고 아우성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살 길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구원의 길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경은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뜻이 성경이고, 여호와의 섭리를 알려주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영혼은 구원되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육신은 그것을 전혀 모르지만, 사람의 영혼은 구원되기를 간절히 염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성경은 죄인들을 초대하는 하나님의 목소리이기 때문입니다. 영육 간에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지 않아야 합니다.

II. 회개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2-9)

 

2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3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4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5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 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6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 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7너희 땅은 황무하였고 너희 성읍들은 불에 탔고 너희 토지는 너희 목전에 이방인에게 삼키웠으며 이방인에게 파괴됨 같이 황무하였고 8딸 시온은 포도원의 망대 같이, 원두밭의 상직막 같이, 에워싸인 성읍 같이 겨우 남았도다 9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었으리로다

 

옛날에 자식들이 부모의 말을 듣지 않을 때 갑자기 문을 열어놓고 크게 외치면서 하는 소리가 있습니다. “동네사람들, 내 말 좀 들어보세요. 우리 자식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하며 동네방네 다 들으라고 외칩니다. 도시에서야 누가 들은 척도 하지 않지만, 시골에서는 그런 일이 있으면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는 모습들이 모두 동네사람들에게 open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일이 있으면 창피해서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해서 탄식을 하십니다. “들으라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땅이여왜냐하면(yKi) 이스라엘이 나를 배반하였다는 것입니다. 지금 속이 터진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전부 타버려 숯검정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죄가 하나님의 속을 터지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내가 자식들을 아주 귀하고 귀하게 키웠는데, 그 놈들이 나에게 역적 짓을 했다는 것입니다. 도저히 못 참겠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이라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땅과 하늘은 귀를 기울여 들어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죄를 낱낱이 지적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신했습니다(W[v]P;/2). 3절을 보면 이스라엘이 짐승만도 못하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여호와를 버렸습니다(Wbz][/4). 이스라엘은 심판을 자초했습니다(5). 하나도 빠짐없이 그들은 모두 하나님을 배신했습니다(6).

 

하나님이 왜 이스라엘에게 분노하셨습니까? 짐승만도 못하다는 말씀입니다. 소와 말은 제 주인을 알아보는데 이스라엘은 저희를 구원해 낸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어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핏덩이를 데려다 키웠는데 저희들 혼자 자란 것처럼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탄식하시고 분노하십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영역 안에서 사라지겠다는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특별히 대하셨습니다. 항상 국빈으로 그들을 대우하셨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많은 민족 중에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습니다. 신명기7:6-8을 봅시다.

 

6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8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하나님께서는 지상의 모든 민족들을 제치시고 오직 이스라엘만 사랑하셨습니다. 이스라엘보다 똑똑하고 잘난 민족들을 제쳐두시고 오직 이스라엘만 사랑하셨습니다. 로마서3:1,2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맡기셨습니다.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그 위에 엄청난 복들을 쏟으셨습니다(9:4,5).

 

저희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무엇보다 인류의 구원자이신 메시야가 그들 중에서 나게 하셨습니다(2:22-39).

 

이스라엘 사람들아 ····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복음이 그들에게 먼저 전파되게 하셨습니다(3:18-26).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 복된 것들을 모두 버렸습니다. 2005년도에 피카소의 파이프를 든 소년”(Carcon a la pipe by Pablo Picasso))이란 작품이 14백만 달러에 팔렸습니다. 11746800만원입니다. 이 그림을 보면 별로 볼 것이 없습니다. 한 소년이 파이프를 들고 앉아 있는 그림입니다. 이 그림을 아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이 그림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그림보다 수 억 배보다 더 귀하신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아주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버렸습니까? 자신들은 하나님을 절대로 버리지 않았다고 우겼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절대로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을 섬기면서 우상숭배를 철저하게 했습니다. 남편인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서 우상과 갖은 짓을 했습니다(13:1-4). 그러면서 하나님께 희생은 더 드렸습니다. 무수한 제물을 드렸습니다(1:11-14). 하나님께서 제물만 원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무수한 제물로 자신들의 죄를 덮으려고 했습니다. 위선적인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또한 철저하게 불순종했습니다(7:22-28). 청개구리와 같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예 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일단 배척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11:1-11). 홍해를 가르신 것도, 요단강을 건넌 것도, 광야에서 먹이신 신앙을 몽땅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믿지 않았습니다. 듣지를 않으니까 믿을 수도 없었습니다. 괜히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가지고 우리만 귀찮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우리 방식대로 살 테니 상관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이스라엘에 대해서 매우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우리 같으면 당장 우주 밖으로 보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무척 사랑하셨습니다. 5절을 보면 너희가 어찌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더욱 패역하느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너무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잘못될까봐 노심초사하셨습니다. 그들이 죄를 지으면 즉시 심판하시지 않았습니다. 오래 참다가 겨우 매를 준비하셨습니다. 블레셋의 매, 아멜렉의 매, 미디안의 매, 애굽의 매, 앗수르의 매들로 그들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듣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또 다른 매를 준비하셨는데, 그 매는 기상이변입니다. 비를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메뚜기로 온갖 식물을 다 먹게 하셨습니다. 그들의 산업은 잘못되고 소출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도무지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치시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천둥치고 번개가 번쩍번쩍하는 매를 준비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바벨론의 매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들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서 빨리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오늘 우리들도 믿는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미흡한 점이 많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난 것이 죄라고 했을 때 우리 역시 하나님의 백성이니까, 하나님을 떠나면 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면 죄가 됩니다. 우상에게 마음을 빼앗기면 죄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역시 죄가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면 엄청난 복들을 쏟으시고, 쏟으실 텐데, 이것을 받고, 못 받고는 모두 우리들에게 달려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만일에 위와 같은 것들의 죄를 우리가 회개하지 않을 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혜택이 제한을 받습니다. 이스라엘처럼 예배는 열심히 드리고, 기도는 열심히 하면서도 하나님을 떠날 수는 얼마든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수시로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함을 철저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움직이지 못함을 회개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회개는 은혜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회개(bWv/suûwb/슈브/metavnoia/메타노이아/repentance)란 마음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며, 행동을 완전히 바꾸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말하는 회개란 쉽게 나오는 말이 아닙니다.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전에 했던 것들을 끊어버리고, 잘못된 것으로부터 180도 돌아서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마음과 행동을 바꾸어야 합니다. 행동만 바꾸어서도 안 되고, 생각만 바꾸어서도 안 됩니다. 둘 다 바꾸어야 합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회개란 죄에 대한 확신과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는 깨달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결정적으로 돌이키는 것이 회개입니다. 회개는 죄를 향한 변화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회개는 동시에 죄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는 거룩한 생활을 가능케 하는 성령의 역사를 수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일을 계획할지라도 내일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내일 믿어야지, 내일 믿게 해야지 하는데 시간과 기회는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믿어야하고, 지금 믿게 해야 합니다.

 

청교도인 토마스 왓슨은 회개를 미루면 미룰수록 그만큼 죄는 더 강력해지고, 마음은 더 강퍅해진다고 했습니다. 진실한 회개는 범죄를 그치게 하고,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끕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복이 오는 통로를 마련케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많은 것이 약속되어 있는데도 회개하지 못해서 그 통로가 막혀 있습니다. 우리는 그 통로를 회개함으로 뚫을 수 있습니다. 내가 잘못되었다고 하나님께 고백할 때 그 통로가 뚫어집니다. 하나님 살려주십시오. 하고 나갈 때 막혔던 복의 통로가 뚫어집니다. 삭개오가 회개할 때 삭개오의 주변이 변한 것처럼, 우리가 회개할 때 우리의 주위가 변하고, 우리의 가정이 변하며, 우리가 있는 곳이 변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혜택을 받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가 회개하기를 원하십니다. 밝지 않은 인간의 미래에 밝은 미래를 약속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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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의 자녀(로마서 9:6-13)

 

7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8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9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10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유대인들은 자기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였습니다. 배척한 것을 넘어서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목적이 좌절되고, 하나님의 계획이 차질을 가져온 것이라는 말인가?(William Barclay) 바울의 대답은 아니오입니다. 바울의 논증은 . 사실상 유대인 모두가 예수님을 배척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중 얼마는 예수를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초기 신자들은 다 유대인이었습니다. 초기란 복음이 이방으로 나가기 전입니다. 그리고 바울 자신도 유대인이었습니다. 사도들도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만약 우리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선택의 과정이 되풀이 하여 작용하고 있는 것을 볼 것이라는 것입니다. 반복하여 하나님의 목적과 설계 안에 들어 있는 사람은 유대인 모두가 아니라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중 일부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일부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하나님의 계획을 집행해 나가신 민족의 계보는 절대로 아브라함의 肉的後裔육적후예라고 주장하는 모든 사람으로 구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전체계획의 배후에는 순전한 혈통적 후예만이 아니고 하나님의 택하심의 꼭 있었습니다. 자기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바울은 유대역사에서 두 경우를 예를 들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여종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의 처 사라의 아들 이삭입니다. 이스마엘과 이삭 두 사람은 틀림없이 다 아브라함의 혈육입니다. 육체적으로 그들은 둘 다 그의 아들입니다. 사라가 아들을 낳은 것은 너무 늙어서 인간적으로 말할 때 불가능하다고 할 정도로 나이 많아서였습니다. 이삭이 나서 자랄 때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는 날이 왔던 것입니다. 사라는 매우 언짢게 생각했습니다.그리하여 하갈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을 내어 쫓았습니다. 이삭 흔자서 상속할 수 있게 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어 쫓기가 그랬습니다.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사라가 싫어해도 차마 그럴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내오 쫓으라고 명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자손이 그의 이름을 유지할 것이 이삭 안에서였기 때문입니다.

창세기21:10-12 10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매 11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위하여 그 일이 깊이 근심이 되었더니 12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사실 이스마엘이 하갈의 소생이라 해도 누가 보거나 누가 말해도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사도의 논증은 자연적이고 인간적인 방법과 욕망으로 낳은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아브라함과 하갈은 충분히 생리적으로 아들을 낳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인간적인 입장에서 볼 때 아들을 낳는다는 것조차 불가능한 때에 낳았습니다. 즉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아들이었습니다.

창세기18:10-14 10 그가 가라사대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11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는 끊어졌는지라 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1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14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진정한 후계권이 주어진 것은 약속의 아들이어야만 했습니다. 따라서 모든 아브라함의 육적인 후손이 다 유대인 즉 선택된 자로서 인정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민족 안에서 하나님의 선별과 택함은 계속되었습니다. 선택의 다른 예로서 바울사도는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잉태했을 때 하나님이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즉 그의 태속에는 두 민족의 조상이 될 두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때가 이르면 형이 아우를 섬기고 그에게 종이 되리라는 것입니다(25: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이런 상황에서 쌍둥이 에서와 야곱이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사실은 에서가 형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택은 야곱이었습니다. 그 야곱의 계통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변론의 결론을 내리기 위해 바울은 말라기1:2-3을 인용했습니다. 그 곳에는 하나님이 그 선지자에게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바울의 논증은 유대인 됨에는 아브라함의 후손됨보다 무엇인가가 더 있고, 택함 받은 백성은 단순히 아브라함의 육적인 후손의 전체가 아니고, 그 종족 자체 내에서 역사 이래 선택의 과정이 계속 되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면 지금까지의 변론을 완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입니다. 아랍인은 아브라함의 순수한 육적인 아들 이스마엘의 후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유대인은 아랍인이 택함 받은 백성에 속한다고 말하는 것은 꿈도 꾸지 않습니다. 에돔인은 에서의 자손이었습니다. 이것이 말라기가 의미하는 바로서 이삭의 참 아들 아니 야곱의 쌍둥이 형인데도 불구하고 유대인이라면 어느 누구도 에돔 사람이 택함 받은 백성 중에 한 몫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의 관점에서 자기의 주장을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육적 자손의 가족 내에서도 선택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더 나아가 그 선택은 행위와 공로와 그것을 얻으려는 인간적인 노력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말합니다. 그 증거로서는 야곱과 에서는 그들이 낳기도 전에 야곱은 택함을 받았고, 에서는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 선택은 그들이 아직 모태에 있어 낳기도 전에 이루어졌습니다. 불가피하게 우리의 생각은 이 논리에 주저하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명백하게 마음대로 한 사람은 택하고 다른 한 사람은 버리는 분으로 보이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논리가 터무니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에게는 윤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행동에 대하여 책임을 지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에게는 이상하게 보이고 우리가 받아들이기 어렵게 생각이 되지만, 유대인에게는 적중한 논리입니다. 우리에게도 이 논리의 핵심에는 하나의 큰 진리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기인되었고 모든 것 배후에는 하나님의 행위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독단적이고 우연하게 보이는 것 까지도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목적 없이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고 어떤 사람은 거절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의하여 인간에 대한 선택과 유기는 결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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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살아 있을 동안 마음은 죽어 있는 것이며, 육체 속에 파묻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죽을 때 마음은 살아난다.

                                                 소크라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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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구약성경을 보면 어디에도 회당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회당/sunagwghv/suinagogê은 지방 유대인공동체 사회의 모임 장소 또는 유대인들의 집회나 회중 자체입니다. 성전은 예루살렘에 하나 뿐입니다. 법에 의하면 열 가정이 사는 곳에는 회당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촌락마다 회당이 있어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렇게 각처에 회당이 있었고 회중 가운데 유능한 자는 회당장의 청으로 강의할 수 있었으므로, 갈릴리 사람들로부터 한 선생이나 선지자로 인정받은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는 기회를 쉽게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 회당 제도는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회당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습니다. 주전 6세기 바벨론에 포로 된 유대인들이 그들의 성전과 분리되었을 때 율법을 이행하려는 노력으로서 모세오경을 연구, 토의하기 위하여 지역적 모임을 가진 것을 그 기원으로 봅니다. 회당은 제사의 장소가 아니고 기도와 교육의 장소로서 생겼습니다. 다른 기관보다 유대인의 신앙의 특성을 보여주는 이곳에서 백성들과 지도자들이 만났으며 율법을 배웠습니다. 예배와 기도를 드리는 장소였을 뿐만 아니라, 회당은 공동체 생활의 중심역할을 했습니다. 회당의 발전사는 알려지지 않지만, AD 1세기경에는 유대인들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회당이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최소한 10명의 성인 남자들이 필요했습니다. 큰 도시에는 수 많은 회당이 있었습니다. AD 70년에 예루살렘이 파괴될 무렵에는 회당이 394개나 있었다고 합니다. 복음서는 회당을 예수님이 사역하셨던 곳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사도들은 회당을 복음 전도의 출발점으로 활용했습니다. 회당의 건물 형태는 예루살렘 성전을 본 땄다고 합니다. 율법서와 선지서 두루마리를 담고 있는 하나의 언약궤가 출구 맞은편 한쪽 끝에 있었습니다. 언약궤 앞과 출구와 회중 맞은편에는 종교 지도자들이 앉는 최고의(혹은 주요한) 자리들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다른 구획에 앉도록 했습니다. 회당은 그 회원들을 훈육하고 징계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장로들이 다스렸습니다. 회당장은 예배를 감독했으며, 시중드는 사람 들은 두루마리를 나르고 율법에 어긋난 일을 한 사람들에게 징계를 내렸습니다. 그런 다음 통역자는 구약 말씀을 고유 언어인 아람어로 풀어 읽었습니다. 적법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누구나 발언할 수 있었습니다. 안식일 예배는 다섯 부분으로 행해졌습니다. 1. 쉐마를 읽었습니다(신6:49; 11:13-21; 민15:37-41). 2. 18개 간구문과 축도문을 포함한 기도문들을 암 송하였습니다, 3. 율법서 중 한 부분을 원래는 3년 주기로 읽었습니다. 4. 읽는 자가 임의로 선택한(눅4:16이하) 선지서 중 한 부분을 읽었습니다. 5. 성경을 상세히 설명하였으며, 마지막으로 예배를 마치는 축도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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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주는 교훈을 보면 인간의 끝없는 욕망의 결 과는 언제나 그 욕망의 결과로 얻은 어떤 가치와 어 떤 존재로도 스스로의 이상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결국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을 섬겼거나 그 헛된 이상이 불러오는 오만과 악으로 어두워진 이성의 눈 으로 섬길 필요조차 없는 것에 대한 막연한 희구였음을 알게 될 뿐이다. 인류가 한 덩어리가 되어 죄 속에 살고 있으며 또 각자가 그 속에 살고 있는 무서운 거짓을 떠나 밝게 살자면 솔직하고 담대하게 예수님의 가 르침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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