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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도에서 바울의 설교/겸손(사도행전20:17-35) 

바울은 요샛말로 말하면 엘리트입니다. 배울 만큼 배우고, 가질 만큼 가졌으며, 신분 또한 대단한 사림이었습니다. 유대사회에나 로마사회의 어디에 내놓아도 별로 빠지지 않는 사람입니다. 빌립보서3:4-6절을 보면

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유대인들은 선민사상이 투철해서 다른 사람들을 심히 무시했습니다. 그런 사회에서 바울의 이력을 내놓으면 그들은 입을 다물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교만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습니다. 누구도 지키지 못할 자기들만의 율법으로 사람들을 판단하고 예단하여 거의 죽여 놓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겸손했습니다. ‘곧 모든 겸손과…’.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겸손하게 주를 섬겼습니다. 바울 사도는 복음이 바르게 전파될 수 있는 길은 자신의 겸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바로 겸손해지기로 작정했습니다. 빌립보서2:3을 보면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했습니다. 바울사도는 그리스도의 본을 직접 보여준 것입니다.

성도들이 왜 겸손해야 합니까?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눅18:13-14). 그래서 우리는 죄인임을 느껴야 합니다(눅18:14). 자기의 죄를 느끼고, 자신의 무가치함을 느끼는 사람들은(눅15:17-21) 겸손합니다. 겸손한 사람들은 자신의 한계를 압니다(왕상3:6-14). 겸손한 사람들은 자신은 추하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느끼기 때문에 겸손합니다(사6:1-8). 하나님의 의를 느낍니다(빌3:4-7).

우리들을 겸손하게 하는 요인들이 있는데, 우리들을 고생하게 합니다(신8:3). 그리고 환난이 우리들을 겸손하게 합니다(대하12:2-12).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겸손하라고 합니다. 애굽 땅에서 종되었던 것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신15:15). 스스로 높은 체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잠25:6-7).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전5:2). 큰 일을 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렘45:5). 스스로 칭찬하지 말것입니다(잠27:2).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할 것이라고 했습니다(미6:8).

사람들은 심히 겸손하지 않습니다. 특히 정치인들 중에 교만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자신이 아니면 이 나라가 걱정이라는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이 없습니다. 하지만 겸손해야 합니다. 교만해서 얻어지는 것보다 겸손해서 얻어지는 것이 훨씬 많기 때문입니다. 겸손한다고 해서 비굴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만한 사람이 비굴해질 때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겸손은 교만의 회개를 낳습니다. 따라서 겸손은 온총이면서 동시에 은총을 담는 그릇이기도 합니다. 바울이 못나서 겸손했던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진보를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서 겸손했습니다. 겸손은 성도들이 가져할 기본적인 덕목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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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도의 바울(사도행전20:17-35)

바울은 밀레도에서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불렀습니다. 에베소와 밀레도는 약 56km 거리에 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교회에 가지 않은 이유는 에베소의 폭동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가 에베소에 들어갈 수 없어서 예루살렘에 가는 길에 밀레도에서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을 부른 것입니다. Mivlhto"/Mîllētos/는 동 지중해 해안에 위치한 소아시아의 고대도시입니다.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이오니아인 도시들 중 하나입니다. 밀레도는 Maeander강 하구 근처 에베소의 남쪽에 있습니다. 밀레도는 약 90개 식민지들의 모체였습니다. 밀레도는 지리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네 개의 좋은 항구를 가지고 있어 유력한 해양 도시로 흑해의 무역과 통상을 지배하는 중요한 상업 도시였습니다. 밀레도는 세상을 하나의 기초적인 물질인 물의 견지에서 이해하려 했던 Greece의 최초의 철학자 Thales의 고향이었습니다.

장로는 오늘날의 장로가 아니라 목사와 감독입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여 고별설교를 하였습니다. 바울은 세 번의 전도설교를 했습니다. 사도행전13:16-41(비시디아 안디옥), 14:15-17(루스드라), 17:22-31(아테네), 다섯 번의 기독교 변증(22-26장)을 했는데, 이것은 불신자들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밀레도에서의 설교는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하였습니다.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에게 한 설교는 고린도교회와 로마교회 그리고 디모데에게 한 말과 서로 상응합니다.

사도행전20:19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고린도후서2:4 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사도행전20:20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고린도전서10: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사도행전20:24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디모데후서4: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사도행전20:33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고린도후서7:2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우리가 아무에게도 불의를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

사도행전20:35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찌니라

로마서15:1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바울사도의 밀레도 설교는 신약성경에 기록된 내용 중 가장 심금을 울리는 설교입니다. 바울의 에베소교회 사역에 관한 생생한 모습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아무런 사심 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만 헌신하였습니다(19절). 그는 대중의 인기나 인간적 영예를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의 신실한 파수꾼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는 데에 온 몸과 마음을 바친 것입니다(겔3.:17). 본문을 보면 성도들에 대한 바울의 애틋한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31절). 바울사도는 입으로만 심판을 경고하는 냉담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형제의 곤궁을 자신의 ‘것인 양‘ 아파하고 함께 그 해결책을 모색하려 하였습니다(롬l2:15).

참다운 제자, 참다운 목자, 참 성도를 찾기가 그다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이 사람들을 힘들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성도들은 달라져야 합니다. 세상과 짝하고 교회가 세속화되면서 세상과 교회의 구분이 없어진 것 같습니다. 세상의 학문과 짝하고, 세상의 물질과 짝하고 세상의 정치와 짝을 하는 사이에 교회는 점점 세속화되었습니다. 배금사상이 철저한 바알사상이 교회에 찌들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참 목자는 찾기가 어려워졌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주님을 닮아가고 주님의 명령을 시행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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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예루살렘 행(사도행전20:13-16)

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치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지나 행선하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

바울사도는 아시아에서 더는 지체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될 수 있는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려고 급히 떠났습니다. 왜 그랬을까? 바울사도는 원래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지키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그로 인해서 길을 돌아갔습니다(3). 따라서 유월절로부터 7주후인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도달하고자 했습니다(16절). 바울이 예루살렘 행로를 급하게 한 이유를

Thompson은 바울이 절기를 지키려고 노력한 것은 바울사도가 비록 유대교를 떠나긴 했지만, 구약의 전통들을 무작정 무시하지는 않았음을 보여준다고 했고 (Thompson Bible, 224), Calvin은 바울사도가 예루살렘에 급히 갈 중요한 이유는 그 축제일들을 위해서 도처에서 이방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떼 지어 몰려드는 습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그와 같이 큰 무리 앞에서 어떤 효과적인 사업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에 그 기회를 놓치고 싶지가 않았다. 그가 마음에 품었던 것은, 그리스도의 왕국이 확장되었다는 것을 그 신자들에게 보고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와 아직도 친숙하지 못했던 자들을 얻어 들이고, 또 다른 편으로는 못마땅한 자들의 비방을 물리침으로써 교회를 세우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동시에 교회에 소속된 자들에게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고 했습니다(Calvin, 1995. 233). Matthew Henry는 그는 “가능한 한 서둘러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고자 하였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간 것은 약 4,5년 전이었다(18:21,22). 그러기에 이제 그곳에 가서 다시 그곳 교회에 대한 그의 일관된 존경을 표시하고자 했으며 이로써 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배려에서였다. 그러고 그는 이방인들 가운데 전도하는 그의 사명 때문에 그가 예루살렘 교회를 소홀히 한다는 평을 듣지 않고자 하였다고 했습니다(Matthew Henry, 1981. 281).

종합해보면 Calvin과 Matthew Henry의 견해가 타당하다고 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때에 주님의 복음을 전하고자 했을 것이며, 또한 이방에 복음을 전한 것들을 이 게제에 예루살렘교회에 보고하리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박형용은 바울의 모든 활동은 교회를 위한 활동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서신을 쓰는 것, 설교를 하는 것도 교회를 위한 활동이라 했습니다. 왜 교회를 위한 활동입니까?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래로 세상은 교회가 정복했습니다. 어느 나라든지, 어느 민족이든지, 어느 종교가 있을지라도 교회가 세상을 정복했습니다. 교회는 특이한 무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종교와도, 어떤 나라와도 어떤 사상과도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세상을 교회가 정복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강력한 말씀과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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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과 복음(사도행전20:13-16)

복음(eujaggevlion/유앙겔리온)은 기쁜 소식입니다. 통상 기쁘다고 하면, 좋은 일이 있을 때 표현되는 감정입니다. 대체적으로 기쁜 일은 육신적인 것들이 충족될 때, 기뻐합니다. 그런데 복음은 육신의 것들을 뛰어넘습니다. 현세와 오는 세상을 초월하는 기쁨입니다. 즉 복음을 받아들이면 내세 즉 영원까지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위해서 헌신했고, 복음을 위해서 목숨을 걸었으며, 그 복음을 동서고금의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였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복음은 사도행전1:1을 참고한다면 “예수님이 행하시며 가르치신 것” 즉 누가복음의 모든 내용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예수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이고(롬1:2), 복음은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입니다(요17:7,8,14/살후2:13,14). 복음은 사람의 뜻에 따라 된 것이 아닙니다(갈1:11). 복음은 새 언약입니다(렘31:31-34/히7:22,8:6-13,9:8-15/10:9/12:22-24). 복음은 율법과 대조되는 것으로서(눅16:16/(요1:16-17,행12:24/19:20/고후3:6-11). 복음은 성도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롬1:16,17/고전15:1,2/엡1:13,14/약1:21/벧전1:23). 복음은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냅니다(딤후1:10). 복음을 성경은 은혜의 경륜이라 했습니다(엡3:2).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사41:27). 복음은 좋은 소식입니다(사52:7). 복음은 비밀의 경륜이라고 했습니다(엡3:9).

사람을 살리는 복음은 영원한 복음입니다(계14:6). 복음은 믿음의 말씀입니다(유1:3). 바른말이며(딤후1:13),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이고(딤전 1:11),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입니다(고후4:4). 그래서 복음은 아름다운 소식이고(사40:9), 약속입니다(행13:32-33). 그리스도의 복음이고(고전9:12/고후2:12/갈1:7/빌1:27/살전3:2), 하나님의 복음이기 때문에(롬1:1,15:16/살전2:8/벧전4:17) 사람들을 살리는 복음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은혜로운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며(행20:24),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막1:1). 천국복음이며(마4:23, 24:14), 평안의 복음(엡6:15), 구원의 복음입니다(엡1:13).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눅16:16), 복음은 자유하게 하는 율법이고(약1:25), 화평의 복음입니다(행10:36-38).

복음은 겨자씨같이 확장적이며 보편적입니다(마13:31-32). 복음은 좋은 씨입니다(마13:24-43). 복음은 누룩같이 퍼집니다(마13:33). 복음은 귀한 진주같습니다(마13:46). 밭에 감추인 보화입니다(마13:44).

복음은 구원이며(엡1:13), 평안이고(엡6:15), 소망이며(골1:23), 생명입니다(고전4:15). 왜냐하면 썩지 아니할 것이기 때문입니다(딤후1:10).

초대교회는 이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는 과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어려움을 당하든지, 죽음이 엄습 해와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오직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복음은 사람을 살리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살리되 영원히 살리기 때문에 성령께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쓰신 것입니다. 복음은 사람을 살리는 가장 강력한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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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강론(사도행전20:7-12)

7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쌔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8 우리의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9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앉았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 누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 10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 하고 11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래 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12 사람들이 살아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더라

주일에 바울사도 일행은 밥을 먹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이 모임 후에 바울사도는 드로아를 떠날 계획이었습니다. 바울사도는 밥을 먹고 난 후에 드로아에 있는 성도들에게 강론했습니다. 바울의 강론은 계속되었습니다. 밤을 꼬박 세웠습니다. 바울일행이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유두고라는 청년이 창에 걸터앉았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바울의 강론은 그치지 않고 계속되다보니 졸음을 이기지 못해서 떨어졌습니다. 심각한 상황은 3층에서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유두고는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내려가서 사람들에게 떠들지 말라고 했습니다. 바울사도는 유두고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서 그를 살려냈습니다. 아침밥을 먹고 난 후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바울사도는 그 자리를 떴고, 유두고가 살아남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받았습니다. 여기에서 초점은 무엇으로 잡아야 하겠습니까? 아마도 신유은사를 부각시키는 사람들은 유두고의 살아남일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은 그것을 말하지 않고 바울의 강론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7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쌔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9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11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강론하다 dialevgomai/diallêgomai 는 고전 헬라문헌에서 Homer 이래 diav(함께)와 levgw(말하다)에서 유래했습니다. ‘강론하다’는 플라톤, 투키디데스, 크세노폰, 엘리안 등에 있어서 두 사람 이상이 참여하는 토론과 논의를 말하는 것으로 쓰였습니다. 그러나 70인 역본에서는 교섭하다(출6:27). 다투다(삿8:1)의 번역어로 쓰였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는 히브리서12:5에서 하나님의 격려의 ‘말씀’으로. 사도행전에서는 바울의 강연에 대해(행17-24장/17:2,17/18:4, 19/19:8/20:7,9/24:12,25). 사용되었는데, 이 단어는 회당에서 가르치는 바울의 가르침을 나타내는 전문용어가 되었습니다. 그 의미도 ‘설교하다’에 가깝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강론이 왜 중요하며, 강론은 어떤 특질이 있습니까? 성경은 하나님께서 성경저자들을 유기적으로 영감시켜 정확무오하게 그의 뜻을 언어로 전해주신 것입니다. 특히 바울사도는 조직적인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별계시는 구속사건과 말씀으로 되어있다고 증거 했습니다. 구속사건은 신약의 경우 성육신, 수난, 죽음, 부활, 승천 모두를 포함하고 있습니다(박형용). 그래서 바울의 강론은 목숨을 건 강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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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 후 첫날에(사도행전20:7)

유대인들은 토요일에 예배를 합니다. 제칠일 안식일교회도 토요일에 예배를 합니다. 이들은 유대인의 안식일제도에 따라서 예배를 드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토요일에 예배를 드려야 된다고 말합니다. 간혹 가다가 유대인의 안식일과 신약시대의 안식일을 혼동해서 토요일에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늘날처럼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사상이 맞다면 오늘날 한국의 여타교회들이 틀렸단 말인가? 그러면 왜 오늘날 온 교회가 주일에 예배를 드립니까? 그 근거가 여기에서 최초로 나옵니다.

개역성경은 ‘안식 후 첫날에’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지만 헬라어성경은 jEn de; th'/ mia'/ tw'n sabbavtwn‘엔 데 테 미아 톤 삽바톤’으로 기록되었습니다. savbbaton 식일은 유대 달력에 있어서 안식과 여호와를 예배하는 날로 지정된 한 주간의 일곱째 날입니다. 즉 ‘안식 후 첫날’이라는 말은 안식일이 지난 첫 날이라는 것입니다. 즉 ‘주간의 첫날’입니다. 이로써 교회는 한 주간의 첫날인 주일을 예배일로 정했습니다. 주일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날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의 안식일과 구분된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유대인의 안식일인 토요일에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교회로서는 용납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주간의 첫날인 主日에 모이는 관습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안식 후 첫날인 주일에 모였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를 위해서 그날에 모이는 관습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예입니다.

‘떡을 뗀다’는 것은 예배와 관련된 말입니다. 예수께서 제정하신 성만찬 의식을 거행한 것입니다(고전11:23-29). 초대교회당시 성만찬의식은 특정한 날을 정하여 진행된 것이 아니라 예배일로 모일 때마다 행하여졌습니다. 성만찬의식은 간단히 먹고 마신다는 것을 초월합니다.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기억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기념하는 일입니다. 안식 후 첫날이란 예수께서 사망권세를 깨트린 날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입니다. 오늘날의 주일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초기에는 안식일과 주일을 겸하여 예배를 드리다가 점차 주일로 정착되었습니다.

따라서 주일은 교회의 예배일로 쭉 지켜졌습니다. 7절은 그 주일 밤에 드로아에서 모인 것입니다. 이 주일은 바울일행이 드로아에 머물렀던 마지막시기로서 다음날에는 다시 떠나야했습니다. 주일저녁에 신자들은 낮에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에 모이기 편리한 밤에 모여 시간을 제한받지 않으려 했습니다. 드로아에서 바울의 강론을 듣는다는 것은 흔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밤중까지 강론을 계속한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심령이 갈급했습니다. 요새처럼 느슨하지 않았습니다. 요새는 예배에 대한 감격도 없습니다. 구원에 대한 감격도 없습니다. 오히려 봉사에 대한 감격만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를 위해서 봉사하는 것만 부각되어 있습니다.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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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게도냐와 아가야 재방문(사도행전20:1-6)

에베소에서 아데미로 재미를 보던 데메드리오가 일으킨 소요는 에베소의 서기장의 지혜로운 처리로 잘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폭동을 일으킨 무리들을 모두 흩어지게 했습니다(19:41). 소요가 그치자 바울은 제자들을 불러서 격려한 후에 마케도냐로 갔습니다. 마케도냐는 소아시아 맞은편 지역입니다. 오늘날 유럽에 속한 지역입니다. 빌립보와 데살로니가, 베뢰아 등의 도시가 있는 곳입니다. 그 지역들을 다시 한 번 순행한 후에 그 지역의 제자들에게 여러 말로 가르치고 권했습니다. 그리고는 헬라로 가서 3개월을 머물렀습니다. 헬라는 고린도와 아테네 등이 있는 아가야 지방입니다. 거기에서 배를 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 당시 예루살렘에서는 로마군들의 무모한 행동으로 인해서 유대인들은 로마인들에 심한 반발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폭발직전에 있던 유대인들은 로마인들만 보면 죽이려고 애를 썼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로마 제국내에 있는 유대인들에게도 전해져서 로마인들을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울사도가 로마시민임을 자처했습니다(16:37). 그리고 유대인에게만 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심히 미워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바울사도가 위험인물로 간주되어 어떻게든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마게도냐로 돌아서 가기로 작정했습니다.

아시아까지 바울과 함께 갔던 사람들은 베뢰아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 데살로니가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 더베사람 가이오와 디모데, 아시아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였습니다. 이들은 드로아에 먼저 가서 우리를 기다렸습니다. 우리는(누가포함)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5일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을 만나서 7일을 머물렀다고 했습니다.

1절에서 6절은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재차 방문한 사실을 기록한 것입니다. 에베소를 떠나 드로아까지 10개월이 걸렸습니다. 이 기록 안에는 고린도후서 및 로마서와 관련된 사람들이 기록되었습니다. 역사적인 사건들이 암시되어있습니다. 이때 사도바울은 매우 괴로운 심정으로 에베소를 떠나 드로아로 향했습니다. 고린도후서1:8-2:12을 보면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 16 너희를 지나 마게도냐에 갔다가 다시 마게도냐에서 너희에게 가서 너희가 보내줌으로 유대로 가기를 경영하였으니… 2:4 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그 후에 빌립보에서 약속한 디도를 만났습니다. 디도는 바울에게 고린도교회로부터 위로의 소식을 가져왔습니다.

고린도후서7:5-16 5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치 못하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 6 그러나 비천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의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7 저의 온 것뿐 아니요 오직 저가 너희에게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고함으로 나로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 8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9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11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12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그 불의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라 13 이로 인하여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 우리의 받은 위로 위에 디도의 기쁨으로 우리가 더욱 많이 기뻐함은 그의 마음이 너희 무리를 인하여 안심함을 얻었음이니라 14 내가 그에게 너희를 위하여 자랑한 것이 있더라도 부끄럽지 아니하니 우리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다 참된것 같이 디도 앞에서 우리의 자랑한 것도 참되게 되었도다 15 저가 너희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떪으로 자기를 영접하여 순종한 것을 생각하고 너희를 향하여 그의 심정이 더욱 깊었으니 16 내가 너희를 인하여 범사에 담대한 고로 기뻐하노라

바울은 디도가 가져온 소식을 받고나서야 큰 위안을 얻습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를 써서 디도 편으로 보냈습니다. 얼마 후에 바울은 디모데와 함께 예전 계획대로 고린도로 내려갔습니다(고전16:5,6). 거기에서 3개월을 가이오의 집에 거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를 기록했습니다(롬16:23).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것뿐이 아니었습니다. 교회를 굳게 세우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들을 위해서 꾸준히 기도하고, 격려와 가르치는 것과 훈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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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서기장(사도행전19:23-41)

三權分立이란 권력의 남용을 막기 위한 제도적인 장치입니다. 권력을 입법, 사법, 행정의 상호 독립된 세 기관에 분산하는 원리입니다. 입법부는 정부나 사법부로부터 압력을 받을 수 없고, 사법부도 정부나 입법부로부터 어떠한 압력을 받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정부도 입법부나 사법부로부터 압력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현재 死文化(사문화)되었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 공공연하게 정부가 입법부나 사법부에 말할 수 없는 압력을 행사하는 통에 바른 재판을 받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정부나 여당 쪽 사람들이 재판을 받을 때는 무혐의, 공소권 없음, 해당사항 없음으로 풀려납니다. 하지만 야당의 인사들이나 일반국민들은 추상같은 법의 적용을 받습니다. 철저하게 적용을 받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加重處罰까지 받습니다. 그래서 야당이나 일반인들은 기획수사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검찰에서 어떤 사항을 언론에 흘리면서 여론의 재판이 무르익을 무렵에 서서히 수사를 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삼권분립이 되지 않으면 억울한 국민들이 계속 늘어날 뿐입니다. 사법부에서 대통령의 눈치를 보는 수사나 재판, 또한 대통령의 의도를 미리 알아서 수사하는 것이나 재판 등은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삼권분립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으면 억울한 사람들은 어떤 방법으로도 구제를 받지 못합니다. 1심의 심판기구인 지방법원에서 구제를 받지 못합니다. 2심의 심판기구인 고등법원에서도 역시 구제를 받지 못합니다. 3심인 대법원에서도 구제를 받지 못합니다. 헌법재판소에 소원을 내봤자입니다. 모두 대통령의 눈치를 보기 때문에 구제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권력이 한 곳에 집중되어 있으면 그 국가는 불쌍한 국가일 수밖에 없습니다.

에베소의 우상숭배자들의 소요는 어쩌면 에베소 시에 유익일 수 있습니다. 즉 에베소의 서기장이 소요를 일으킨 사람들의 편을 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서기장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서기장은 시의 관리였고, 시의회의 포고문을 발표하는 집행 관료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에베소에 본부를 두고 있는 로마의 주 행정당국 사이의 연락책이었습니다. 에베소의 폭동에 대한 로마의 행정당국에 보고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서기장은 말하기를 바울이 전각의 물건을 도적질도 하지 아니했고, 여신을 훼방하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에베소가 아데미와 제우스의 전각지기인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느냐? 그런데 무슨 근거로 소요를 일으키며, 무엇 때문에 소동을 피우느냐는 것입니다. 만일 데메드리오와 함께 하는 사람들이 고소할 일이 있으면 고소를 할 일이지, 공연히 소요를 일으켜 너희들은 소요죄로 우리는 불법집회로 로마에 의해서 큰 해를 받을 것이라 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조용히 해산해야 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려다가 자칫하면 로마의 무력이 에베소를 덮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의 서기장은 냉철하게 소요를 풀어갔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야비한 비난을 합리적으로 반박을 해서 성난 군중들을 안돈시켰습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에베소의 서기장은 지혜롭게 변증을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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