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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으로 가는 복음(사도행전16:11)
바울사도는 알렉산드리아 드로아에서 배로 떠났습니다. 마케도니아로 향했습니다. 드로아에서 배로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네압볼리로 갔습니다. 첫날에 사도바울 일행은 사모드라게에 닿았습니다.
‘드로아’(Trwav"/troâs/트로아스)는 트로아스는 ‘관통’이라는 의미입니다. 트로아스는 달다넬레스(Dardanelles)에서 남쪽으로 2마일 가량 떨어져 있습니다. 북서 소 아시아의 드로아 곶에 있는 에게해 연안의 주요 도시이자 항구입니다. 아시아의 로마속주였습니다. 오늘날의 이름은 에스키스탄불(Eskistanbul)입니다.
‘사모드라게’(Samoqrav/kh/Samothpâkē)는 소아시아에 있는 드로아와 마게도냐에 있는 네압볼리 사이에 위치한 작은 섬입니다. 사모드라게는 Cabiri숭배라는 비밀의식의 터전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여러 지방에서 밀교의식으로서 숭배되었던 것으로, 농경(農耕)을 다스리는 신으로 섬겼습니다.
네압볼리(Neavpoli"/Neâpollis)는 마케도냐의 해안도시입니다. 빌립보에서 10마일 떨어진 외항입니다. 아드리아해와 에게해를 연결하는 로마의 도로인 이그나티우스 대로(the great Egnatius Way)의 동부지역종착지점이었습니다. 서쪽 종착지는 아폴로니아와 두라키움이었는데 이 도로는 주전146년에 로마의 마케도니아 합병이후 건설되었습니다. 누가는 전도여행중에 들렀던 항구들을 언급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바다로 여행할 때 매일 그렇게 했습니다.
20:6-16 우리는 …빌립보에서 … 드로아에 …앗소에서 …미둘레네에 …기오 앞에 오고… 사모에 들리고 …밀레도에 이르니라 … 아시아에서 …에베소를 지나…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
21:1-8 우리가…고스로 가서… 로도에 이르러 …바다라로 …베니게로 …구브로를 …수리아로 …두로에서… 예루살렘에…두로로부터 …돌레마이에 …가이사랴에
27:2-44 아시아 해변 각처로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시돈에 …구브로 해안을…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를 건너 루기아의 무라성에 이달리야로 …니도 맞은편에 …살모네 앞을 … 그레데 해안을…미항이라는 곳에 …라새아성에서 …뵈닉스에 가서 …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가우다라는 …아드리아 바다에
누가의 자세한 기록으로 인하여 유럽의 전도 상황을 자세하게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유럽은 인문학이 더 발전하여 교회가 세상에 자리를 내어준 지 오래입니다. 바울사도는 복음으로 어두운 지역에 불을 밝히고자 무려 네 차례에 걸쳐 복음을 전해주었는데, 유럽은 복음을 헌신짝처럼 버렸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복음으로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푸대접해버린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들이 그럴 수 있습니다. 성도가 세상을 너무 좋아하면 교회가 세속화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그렇게 애를 썼지만 유지하지 못하니까 복음이 휴지조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정말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유럽에 복음이 전파된 지 2000년 후의 현실입니다.
기도처/회당을 찾는 바울 (0) | 2015.08.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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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한다는 것(사도행전16:6-10)
바울사도는 아시아로 가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막으셨습니다. 그러자 그 마음을 바로 접었습니다. 드로아에서 밤에 바울사도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 환상을 보고 바울사도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하고’ 마케도니아로 향했습니다. 즉 바울사도는 아시아로 가고자 계획을 했습니다. 그런데 못하게 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인데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바울사도는 그 마음을 바로 접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역사이래로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백성이면서도 대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는 희비가 엇갈렸습니다. 순종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불순종하는 사람들은 심판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빠져나왔습니다. 정확한 숫자는 모르지만 대략 250만-300만 명으로 추정합니다. 이들이 그야말로 척박하고 물도 없는 광야에 있었습니다. 아마 지금의 누구도 견디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가마솥 같은 애굽에서 건져내신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물을 주시지 않을 분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노예시절의 물먹던 때만 생각했습니다. 곧바로 하나님께 불평을 했습니다. 그 불평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땅을 무조건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창15:18-21/출3:8).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모세에게 스파이를 보내자고 제안했습니다. 마지못해 하나님께서 이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면 충분히 정탐한 것을 믿어야 했습니다. 정탐한 것을 참고하여 가나안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12명의 정탐군은 40일간의 정탐보고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정탐보고는 안하느니만 못했습니다. 12명중에서 10명이 가나안 정복자체를 부정했습니다. 가나안을 악평했습니다. 두 명만 하나님의 뜻에 맞게 보고했습니다. 12명중에서 10명(83.3%)이 못 간다고 했습니다. 나머지 두 명(16.7%)만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300만 명 중에서(정확한 숫자는 아님) 단 두 명만 가나안에 들어가고 나머지는 모두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2/300,0000입니다. 순종한 두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가나안에 갔습니다. 그러나 불순종한 사람들은 광야에서 40년간 지내다가 모두 죽었습니다. 광야에서뿐만 아니라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전장에서도, 삶에서도 제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신앙생활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순종입니다. 왜 순종이 중요합니까? 순종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베드로나 요한, 사도단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자신들의 뜻에 따라서 했다면, 과연 오늘날의 교회가 존재했을까요? 어림없습니다. 그래서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은 하나님의 보고에 눈을 뜨게 합니다. 순종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첩경입니다. 순종은 우리의 이성을 거스르는 것이지만, 우리보다 훨씬 앞서 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은 좋은 그리스도인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순종을 연기하는 것은 곧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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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께서 말리심(사도행전16:6-10)
하나님은 한분이십니다. 그러면서도 성경에는 세삼위 하나님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영이신 성부가 무한 영원불변하시고, 영이신 성자가 무한 영원불변하시며, 영이신 성령이 무한 영원불변하십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삼위로 계신다하여 세 하나님이 아니고 한 하나님이십니다. 한분이시면서 세위로 계시기 때문에 자칫하면 삼신론이나 양태론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셋의 방면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면 삼신론이요, 하나님이 하나이심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면 양태론(modalism)입니다. 삼신론은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각각 독립적으로 별개로 계시다는 것입니다. 니케아 공회의에서 이단으로 인정된 아리우스의 논증입니다. 아리우스는 아버지는 완전한 하나님이시고, 아들 하나님은 피조물의 신분을 가지고 있고, 성령 하나님은 아들보다도 더 열등한 위치라 했습니다. 양태론(삼위양식설)은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동시에 존재함을 믿지 아니하고, 환경에 따라서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하시는 한 분 하나님의 세 가지 나타남이라고 한 것입니다. 사벨리우스, 성부고난설을 주장한 프라케아스, 노에투스 등입니다. 오늘날에도 엄청 큰 대형교회에서 양태론의 하나님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삼신론이나 양태론 모두 잘못된 삼위일체관입니다.
성령하나님은 성경에서 많은 방식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영”(창1:2), “야웨의 영”(삿3:10), “주 하나님의 신”(사61:1), 하나님의 선한 신“(느9:20), 하나님의 ‘정신’(시51:11), 야웨의 ‘정신’(사63:10,11),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사11:2), 은혜와 간구의 성령(슥12:10)으로 호칭되었습니다. 신약에서는 여러 차례 “하나님의 영”(마3:16),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고후3:3), “하나님의 일곱 영”(계 1:4,3:1,4:5,5:6,사11:2), ‘너희 아버지의 성령(마10:20),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롬8:11), “하나님의 아들의 영”(갈4:6), “그리스도의 영” (롬8:9, 벧전1:11),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빌1:19), “성령”(눅11:13), “약속의 성령”(엡1:13), “영원하신 성령”(히9:14), ‘진리의 영’(요14:17,15:26,16:13), “양자의 영”(롬8:15), “생명의 성령”(계11:11), “은혜의 성령”(히10:29), ‘지혜와 계시의 성령(엡1:17),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벧전4:14), “보혜사’(요 14:16,26, 15:26, 16:7) 등으로 호칭되어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성부하나님이나 성자하나님에 비해서 조금도 차이가 나지 않으십니다. 성경은 성령의 완전한 신성을 확언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5:3-4을 보면 하나님으로 동일시되었습니다. 베드로에 의하면 아나니아가 ‘성령을 속인” 것은 “하나님을 속인” 것이었습니다. 성령은 구약의 여호와로 동일시되었습니다. 이사야6:9-10절에서 여호와가 말씀하셨다고 이사야는 말했는데, 바울은 성령이 말씀하신 것으로 말하였습니다(행28:25-27).
이사야6:9-10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사도행전28:25-27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26 일렀으되 ㄱ)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사6:9,10 27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
시편95:7-11절에서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말씀으로 말하고 있는 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성령이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히3:7-9).
시편95:7-11 7 대저 저는 우리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 손의 양이라 너희가 오늘날 그 음성 듣기를 원하노라 8 이르시기를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 맛사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하게 말찌어다 9 그 때에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며 나를 탐지하고 나의 행사를 보았도다 10 내가 사십년을 그 세대로 인하여 근심하여 이르기를 저희는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도를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 11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히브리서3:7-9 7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8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9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레위기26:11-12절은 여호와가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실”것을 말씀하고 있는데, 바울은 이 레위기 구절을 인용하여 고린도후서6:16절에서 교회에 대하여 여호와가 거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말했습니다. 어떻게 여호와께서 자기의 교회 안에 거하시는가? 하나님의 영이시자 그리스도의 영이신 (롬8:9) 성령으로 거하십니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는 신적인 일들을 하십니다 창조하시고(창1:20), 중생케 하시며(겔37:1-14, 요3:5-6), 부활케 하시고(겔37:12-14, 롬8:11),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신적 권세를 행사하십니다(행13:2,4, 15:28, 16:6-7). 좀더 특별하게 말하자면, 성령께서 마리아가 동정녀 수태를 하게 하셨고(마1:18-20, 눅1:35), 그리스도의 지상사역 기간과 특별히 그의 죽음의 순간에 그를 기름 부으시고 능력 있게 하였으며(사11:1-2, 42:1-3, 61:1-2, 마12:28, 눅4:1-18, 요1:32-33, 3:34, 행10:38, 히9:14),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시고(요16:13-14), 성경을 감동케하시며(요14:26, 16:13-14, 엡6:17, 벧전1:11, 벧후 1:20-21),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정죄하고(요16:8-11),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오도록 초청하시며(계22:17), 교회를 세우시고(엡2:22), ‘인,’ ‘보증’ 그리고 성도들의 기업의 ‘첫 열매’로 성도들에게 오시어 내주하시며(욜2:28, 겔36:24-27, 요7:38, 행2:17, 8:15-17, 10:44-45, 11:15; 롬8:9-11, 23, 고후1:22, 엡1:13-14, 4:30), 세례를 베풀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얻게 하시고(요일5:1), 죄를 이기게 하시며(요일3:9, 5:18), 의의 일을 하게 하시며(요일2:29),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게 하며(요일4:7), 신자들로 하여금 예수를 주로 시인케 하고(고전12:3),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섬기게 하며(롬8:15-16, 갈4:6), 신자들을 강하게 하여 담대함과 사랑과 근신을 얻게 하고(행4:29, 딤후1:7), 성결케 하며(고전6:11, 롬15:16, 갈5:16-18), 신자 안에서 거룩한 열매를 맺게 하고(갈5:22-23), 은사’를 주며(고전12:1-11), 그들이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는 때 그들을 위하여 중보해 주시고(롬8:26-27),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려 영광에 이르게 하십니다(롬8:11). 이렇듯 성령님은 성경에서 완전히 신적인 분(곧 하나님)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성령과 삼위일체 교리와 관련된 논점은 성경이 성령을 인격적이실 뿐 아니라 성부와 성자의 위격들과 구별된 위격으로 묘사하고 있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을 인도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 항상 바울과 함께 하셨습니다. 바울은 더베, 루스드라, 이고니온 등의 지역을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로마의 대로를 따라 해안도시인 에베소 쪽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막고 제지하셨습니다. 방향을 바꾸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를 거쳐 비두니아로 가고자 했으나 역시 제지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밤에 마케도냐 사람이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환상을 봅니다. 성령께서 바울을 마케도냐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우리가 무엇을 하고 싶다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하고 싶지 않아서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도대로 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한다고 하고서는 우리의 뜻대로 합니다. 기독교인들이 정치, 경제, 사회전반에 걸쳐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사람의 영혼을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들은 성령께서 하시는대로 따라야 합니다.
유럽으로 가는 복음 (0) | 2015.08.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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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한다는 것 (0) | 2015.08.04 |
마케도냐 전도/디모데 합류 (0) | 2015.08.01 |
마가문제 (0) | 2015.07.29 |
바울의 2차전도 여행 (0) | 2015.07.27 |
마케도냐 전도/디모데 합류(사도행전16:1-5)
바울과 실라가 더베와 루스드라에 들어갔습니다. 거기에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디모데의 모친은 예수를 믿는 유대여인이었지만, 부친은 헬라인이었습니다(1절).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성도들에게 칭찬을 받고 있었습니다(2절). 바울은 이미 디모데와 함께 가기로 작정했습니다. 하지만 디모데와 같이 가려면 문제가 있었습니다. 부모가 둘 다 유대인이었다면 이미 할례를 받았을 것인데, 부친이 이방인이라 할레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전도여행에 걸림이 될 것 같아서 할례를 시행했습니다. 틀림없이 유대인들이 시비를 걸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Timovqeo"/Timôtheds/티모쎄오스)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동료이자 조력자가 됩니다. 디모데에 관한 내용은 사도행전,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빌레몬서, 히브리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사랑하는 영적인 아들"이며(고전4:17 딤전1:2-18 딤후1:2), "복음의 동료 일꾼"입니다(살전3:2). 바울이 제1차전도 여행기간 중 그곳을 방문하였을 때 개종하였습니다. 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시 조력자로 삼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정식으로 임명을 받았습니다(딤후1:6). 바울은 디모데가 보다 더 유대인들의 마음에 들도록 하기 위해 할례를 행했습니다. 디모데에 대한 바울의 애정과 신뢰는 곧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졌습니다(고전 4:17 딤후3:10). 바울이 베뢰아에서 도피할 때 디모데와 실라는 그곳에 남아있었습니다(행17:14). 바울은 아덴에서 디모데와 실라를 그와 합류하도록 불렀으며(행17:15), 고린도에서 바울과 두 사람이 만나게 되었습니다(행18:1,5) 이때 고린도교회가 디모데를 알게 되었습니다(고후1:19). 또 에베소에서 체재한 후 바울은 디모데를 마게도냐로 보냈습니다(살전3:6).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교회의 소요를 진정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행19:22, 고전4:17,16:11). 그러나 상황이 디모데에게 너무 불리하여 디도가 대신하였습니다(고후7:6,13, 8:6,16, 23,12:18). 하지만 디도가 디모데를 대신하는 것으로 기록하는 서신에서 조차도 바울은 인사말과 본문 중에서 디모데를 언급했습니다(고후1:1). 디모데는 데살로니가전서1:1과 데살로니가후서1:1에서 그랬던 것처럼. 디모데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연보를 마련하는 일을 도왔고, 드로아까지 바울과 동행하였습니다. 디모데는 바울과 함께 있었으며, 빌립보교인과 골로새교인과 빌레몬에게 보낸 편지에 참여하였습니다.
디모데는 항상 신실한 사람으로 묘사했습니다. 바울이 과장된 표현으로 하지 않은 것을 볼 때, 항상 복음에 자신을 헌신하기로 작정된 사람이었습니다. 디모데가 바울과 합류함은 교회역사상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바울의 의중을 알고, 바울이 하지 못한 일들을 했었습니다. 즉 바울을 배척하는 지역에 디모데가 갔었고, 그 일들을 바울의 생각처럼 신실하게 처리했습니다. 교회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들도 초대교회의 성도들과 사역자들처럼 신실하게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마가문제(사도행전15:36-41)
안디옥교회에서 염려했던 일들은 원만하게 해결되었습니다. ‘율법이냐? 은헤냐?’를 놓고서 사도들과 야고보의 중재로 잘 해결되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바나바에게 제안했습니다. 지난번에 도를 전한 지역에 다시 한 번 가서 그들의 신앙상태를 점검하자고 했습니다. 바나바도 그렇게 하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나바는 마가요한도 데려가자고 했습니다. 바나바의 말에 바울은 그럴 수 없노라고 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사이에 이견이 발생한 것입니다. 바울은 마가를 데려갈 수 없다고 했고, 바나바는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가요한은 1차전도 여행 때 중도에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13:13/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마가]은 저희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바울은 그로 인해서 마가에 대해서 신뢰를 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개인적으로 마가요한과 친했습니다. 마가의 성품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복음사역자로 생각하고 천거를 한 것입니다. 비록 과거에 그랬지만, 실수로 인정하고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도저히 같이 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일이 일어난 곳은 밤빌리아였습니다.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갔고,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갔습니다. 후에 바울은 마가의 숨은 자질을 인정했습니다.
골로새서4:10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디모데후서4: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빌레몬서24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바울과 바나바가 서로 화를 낸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인이상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 분쟁을 하나님께서는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하나의 전도단이 두 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 총회와 노회, 그리고 당회나 제직회에서 심히 다툽니다. 바울과 바나바도 다투었습니다. 그러나 양상이 다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전도를 위해서 다투고서도 그 일을 계속했지만, 오늘날의 교회 안에서의 다툼은 질적으로 다릅니다. 이권 때문에 다투고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전하는 교회에서, 십자가는 멀리 가있고, 이권만 남은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도 건물로 부풀리고, 예산도 확장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권 때문입니다. 점점 교회가 중세시대로 가고 있습니다. 교권시대, 맘모스교회, 교회의 세속화 등이 그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선을 이루실 근거가 희박한 시대입니다. 마가의 문제는 곧 우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내내 십자가의 예수님만 전하기 위해서 다투는 거룩한 다툼이어야 할 것입니다.
성령께서 말리심 (0) | 2015.08.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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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도냐 전도/디모데 합류 (0) | 2015.08.01 |
바울의 2차전도 여행 (0) | 2015.07.27 |
교회의 속성 (0) | 2015.07.25 |
교회와 교회와의 관계 (0) | 2015.07.23 |
바울의 2차전도 여행(사도행전15:36-18:22)
2차전도 여행은 사도행전15:36-18:28까지입니다.
2차전도 여행은 마가로 인해서 바울과 바나바가 다투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1. 마가로 인한 논쟁/ 15 :36-41
2. 더베와 루스드라에서/16:1-5
3. 드로아에서/16:6-10
4. 빌립보에서/ 16:11-40
- 루디아의 회심/16:11-15’
- 귀신을 쫓아내심/16:16-24
- 간수의 회심/16 :25-34
- 바울이 옥에서 석방/16:35-40
5. 데살로니가에서/ 17:1-9
6. 베뢰아에서/17:10-15
7. 아덴에서/ 17:16-34
8. 고린도에서/18:1-17
9. 안디옥으로 돌아옴/ 18: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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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속성(사도행전15:30-35)
교회는 오순절에 기원된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오순절보다 앞서 존재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영원 전부터 존재했고, 그리스도를 기초로 하여 존재해왔습니다.1 교회는 그리스도를 그 머리로 하여 하나로 모였으며, 지금도 그렇게 모이고 앞으로도 그렇게 모일 선택된 자들의 전체입니다.2
교회의 통일성 대한예수교장로회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라고 말하는 것은 타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는 로마-카톨릭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3 교회는 어디서나 같은 부류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나 미국장로교회, 스위스장로교회, 대한예수교장로교회나같은 부류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신약성경이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묘사합니다. 따라서 교회가 같은 이유는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어 있기 때문에 통일이 되어 있습니다.4 그런데 카톨릭은 다르게 말합니다. 모든 교회가 교황에게 복종하기 때문에 통일성이 있다고 궤변을 늘어놓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지 않으면 전 세계적인 조직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교회일 수 없습니다. 모든 신자들은 한 성령에 의하여 한 세례를 받아 한 머리와 한 주(主)를 가진 한 몸으로 접붙여졌습니다.
교회의 보편성 교회는 특별한 교회가 없습니다. 막 개척한 교회나, 100년이 넘은 교회나 천년이 넘은 교회라도 모두 똑같은 보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교회의 보편성은 마태복음 28장18-20의 지상명령에 따른 복음의 민족적인 보편성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카톨릭은 교황의 세력이 미쳤던 곳으로 보편성을 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보편성은 피조물인 교황 따위의 세력이 아니라 지리적으로뿐 아니라 사회적이고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속성으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분리주의나 배타주의를 추구하는 교회는 보편성을 결여합니다. 더욱이 로마카톨릭은 보편성의 교회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일 수가 없습니다.
교회의 사도성 로마카톨릭은 교황이 사도권을 계속 계승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현재 요셉 라칭거가 제265대사도라고 칭합니다. 궤변입니다. 칼 바르트는 “사도적”이란 “사도들의 가르침과 지시를 따르며 그들의 규범적 권위 아래에 있는 것이며, 그들을 따르는 제자가 되는 것이며, 그들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를 듣기 때문이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사도성은 사도들의 교리를 충실하게 따르는 것과 연관됩니다. 사도적인 교회는 연속되는 승계가 아니라 사도들의 믿음의 자취를 좇는 교회입니다.
교회의 거룩성 교회는 거룩합니다. 교회가 거룩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공동체의 관점에서 확정적으로 거룩합니다. 그런데 로마카톨릭은 미사와 카톨릭의 성례와 행위로 인해서 교회가 거룩하다고 궤변을 늘어놓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그 성화가 사람의 내면에서 시작되어 점진적으로 삶 전체에 표현된다는 상대적인 관점에서 거룩해져 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사람이 거룩한 것은 사람 스스로에 의해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아무리해도 거룩해질 수 없다. 단지 그리스도로 인해서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 곧 교회는 확정적인 성화 안에서 점진적으로 영화에 이르기까지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예루살렘교회나 안디옥교회나 모두 이와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통일되어있고, 또한 유기체적인 상태였습니다. 안디옥교회가 고난을 받으면 예루살렘교회도 아팠고, 예루살렘교회가 고통을 받으면 안디옥교회도 아팠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회는 주님의 은혜로 묶여졌기 때문입니다.
1 허버트 로키어,『성경연구“올”씨리즈; 교리II』이상식 역 (로고스, 1983), 610.
2 코넬리우스 반틸,『변증학』신국원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9), 35.
3 존 머레이,『조직신학I』박문재 옮김 (경기: 크리스찬다이제스트, 2000), 241.
4 G.C.베르까우어,『개혁주의교회론』나용화·이승구 옮김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06),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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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교회와의 관계(사도행전15:22-29)
예루살렘교회는 공의회가 끝나자 즉시로 이방교회에 가결된 내용을 통보하기로 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만 보내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을 더 천거해서 보냈습니다. 유다(바사바)와 실라였습니다. 이들 편에 편지를 보내어 안디옥과 수리아, 길리기아에 있는 여러 이방교회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우리(예루살렘교회)가 전혀 시키지도 않았는데, 너희교회들을 말로 괴롭게 하여 이방교회들이 마음이 편치 않았을거라는 내용까지 적어서 이방의 교회에 보냈습니다. 이것은 명령이 아니고 권고였습니다. 예루살렘교회가 이방교회들이 이렇게 해주었으면 하는 바램이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가 안디옥교회에 명령을 할 권한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지시를 받는 교회들은 예루살렘교회나 이방의 교회들이나 모두 같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했습니다.
교회는 보편적입니다. 예루살렘교회나 이방의 교회들이 모두 같습니다. 누가 크고 작고가 없습니다. 누가 명령하고 명령을 받고가 없습니다. 다만 교회의 질서를 위해서 교단을 만들어 서로간의 친교를 위해서 만든 것뿐입니다. 어떤 교회들은 크고, 어떤 교회들은 작고가 없습니다. 즉 특별한 교회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교회는 ○○○교회뿐입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많은 교회중의 우리교회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지, 우리교회만 교회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고넬료 사건을 통하여 모든 민족적인 울타리가 허물어졌습니다. 교회는 한 민족(유대)만의 교회가 아니고, 초민족적이고 다인종적인 신자들의 공동체여야 했습니다(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교회여야지, 다른 교회를 다스리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통일성이 있습니다. 교회의 통일성은 교회건물에 십자가를 달아서 통일이 아니라 교회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입니다. Reymond는 모든 신자들은 한 성령에 의해 세례를 받아 한 머리와 한 주를 가진 한 몸 안으로 접붙여지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의 건물을 크게 하여 자신을 과시하려는 것은(교회가 커야 일할 수 있다) 아무래도 성경적이지 않을 것 같습니다. 대체적으로 교회가 크면 목사가 목사로 보이지 않고 총재로 보이며, 일반 회사의 CEO같은 인상을 받습니다. 기업경영이 교회 안으로 들어와 교회를 세속화시키는 주범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와 교호와의 관계는 수평관계이지, 수직적 관계는 아닙니다. 교회위에 교회 없고, 교회 밑에 교회없습니다. 모두 주님을 머리로 한 하나님의 교회들입니다. 지상에 교회의 대표도 없습니다. ‘내가 교회의 대표다’라고 할 수 없습니다. 즉 교회와 교회와의 관계는 上命下服式상명하복식의 군대와 같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수평적인 교회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런 관계가 깨져 있어서 문제입니다. 주님께서나 사도들은 그렇게 만들지 않았는데, 좀 더 큰 교회들이 문제를 야기 시킨 것입니다. 교회와 교회의 관계는 수평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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