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핍박당하는 복음의 사람들(사도행전17:1-9)

복음은 이미 핍박과 순교를 예상했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이나 성도들은 의연했습니다. 이미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누차 말씀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핍박하는 사람들의 인간성은 완전히 짐승 같았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괴악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케 하여 야손의 집에 달려들어 저희를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유대인들은 바울과 실라를 시기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시장에 나가서 괴악한 사람들을 데리고 무리를 지어 성을 송동케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야손의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괴악한(ponhrouv"/poneroûs/포네루스)는 ponhrov"(포네로스/사악한)의 남성, 복수형입니다. 아주 사악한 것입니다. 개인생활에서 ‘슬프거나, 불행하며, 근심으로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또한 ‘재난이나 재앙을 가져오는 것’이며 ‘초라한, 매력 없는, 부적당한, 쓸모없는’것입니다. ‘포네로스’는 ‘동물, 음식, 땅, 인격체’에 사용했습니다. 동물들에 대해 사용될 경우에는 ‘위험한’(창37:20)을, 또 인격체의 명예에 손상을 준다는 의미로(신22:14), 인간의 심령과 관련하여 ‘악한’이라는 의미로(삼상16:14), 아가서2:2에서는 슬픈기색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포네로스’가 윤리적 측면에서는 인격체이든(창13:13), 사물이든(사3:9) ‘악한’으로 표현했습니다. 종교적 의미까지도 함축하고 있는데, 하나님과의 분리, 하나님과 그의 뜻에 반대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전법은 소동케 하는 전법이었습니다. 유대인들끼리 모여서 마치 큰 난리나 난 것처럼 심하게 떠들어댔습니다. 이 사악한 유대인들은 바울과 실라가 야손의 집에 없자, 야손과 형제들을 읍장들 앞으로 끌고 갔습니다. 야손과 그의 형제들은 유대의 정치적인 메시야 선동가들에게 숙소를 제공하였다는 혐의를 받았습니다. 유대의 선동자들은 바울과 실라가 로마황제 외에 다른 왕을 섬기려 한다고 했습니다. 당연히 로마의 읍장들이 부화뇌동할 줄 알았습니다. 항상 사탄의 전법은 시끄럽게 하는 것이요, 파당을 지어서 훼방하는 것이며, 권력에 호소내지 압력을 넣는 것입니다. 어떻게든지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에서 떠나게 하려는 수작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핍박은 항상 예상하고 있어야 합니다. 특히 복음을 심히 훼방하는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복음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당시의 유대인이 그랬으며, 중세의 Roman Catholic이, 현재는 이들이 함께 mixer된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계속적으로 공격합니다. 다른 종교인들을 내세우기도 하며, 조상을 섬긴다는 명분 등 틈만 있으면 비집고 들어옵니다. 복음은 날 때부터 이런 것들을 감안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지금도 최일선에서 복음을 위해 싸우는 성도들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묵묵히 하나님의 복음, 예수님의 복음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분들에게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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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들을 테러하는 유대인들(사도행전17:1-9)

팔레스타인에서나 바울사도의 가는 곳에는 반드시 괴악한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도를 전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괴악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케 하여 야손의 집에 달려들어 저희를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유대인들은 바울과 실라의 전하는 복음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만의 사상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외세에 시달렸었습니다. 그 이유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마자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하나님을 잊자 선지자들이 그들을 책망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선지자들의 말을 전혀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깨닫도록 여러 나라로 하여금 유대인들을 괴롭히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회개할 때마다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신을 차리지 않았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더 깨닫게 하시고자 무자비한 나라로 하여금 포로로 끌려가게 하시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남은자로 하여금 은혜를 받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원히 사람들을 구원할 자를 약속하셨습니다. 메시야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사람들을 구원하실 하나님이 이 땅에 강림하심을 약속하셨습니다(창3:15, 시편22편, 이사야53장 등). 그리고 유대인들을 바벨론에 붙이셔서 70년을 포로생활을 하게 하셨습니다. 반드시 구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약속대로 70년후에 그들을 포로생활에서 풀려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포로에서 풀려났지만, 그대로 속주민이었습니다. 페르샤의 유대속주였습니다. 그들의 생각에 자신들을 멋지게 육신적으로 구원할거라고 믿고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매임이 페르시아에 이어서 그리스, 로마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갈릴리 나사렛에서 메시야가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약속도, 성경도 믿지 않았습니다. 다윗처럼 멋진 메시야가 나타나서 구원할 줄을 믿었는데, 유명하지도 않는 나사렛의 목수가 무슨 메시야냐고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죄악은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이사야는 유대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겼다고 했습니다(사1:4). 예레미야는 유대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신들을 섬겼다고 했습니다(렘5:19). 예수님께로부터 엄청난 책망을 받았습니다. 교회가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이 막았습니다. 복음이 지나가려면 태풍을 일으켰습니다. 구약시대 때도, 신약시대 때도, 초대교회시대에도 유대인들은 성도들을 핍박했습니다. 오늘날의 유대인들은 어떻습니까? 주님과는 관계도 없는 Zionism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어떤 목회자들은 유대인들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아직까지도 예수님을 부인하고 있는 유대인들, 문제가 많은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은 구약시대에도, 예수님에게도, 사도들에게도,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수많은 terror를 자행한 terrorist들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성도들을 terror한 사람들입니다. 누가는 그들을 괴악하다고 했습니다. 갖은 모략과 술수로 성도들을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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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 전도(사도행전17:1-9)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를 떠나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경유해서 데살로니가로 들어갔습니다. 암비볼리(!Amfivpoli"/Amphîpollis/암피폴리스)는 마케도니아 prima의 큰 도시입니다. ‘암비볼리’란 ‘도시를 둘러싼’이란 뜻인데, strymon 강이 거의 완전히 이 도시를 둘러싸고 흐르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습니다. 아볼로니아(!Apollwniva/Apollonîa)는 마케도냐의 해안 도시입니다.

데살로니가(Qessalonivkh/thessallonîke)는 주전315년에 Cassander 왕이 알렉산더 대왕의 이복누이요 카산다의 아내인 데살로니가의 이름을 따서 세운 도시인데 로마가 데살로니가를 주전146년에 자치적 영토로 만들었을 때 수도였습니다. 당시 데살로니가는 빌립보 다음가는 큰 도시였습니다. 데살로니가는 상업적으로 중요한 위치였습니다. 데살로니가도 항구도시로서 고린도와 에베소에 필적할만한 곳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다른 곳에서 하던 대로 그 지방의 회당을 방문했습니다. 세 번의 안식일을 지내며 성경을 강론했습니다(dielevxato/diellêxato). 즉 구약성경을 낭독했으며, 낭독한 그 말씀을 해석해주었습니다. 이때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예수의 죽음을 말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시 사신 것을 말했습니다. 그 예수께서 바로 내가 전하는 예수라고 강론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 부활, 승천은 복음입니다. 이러한 일은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했습니다. 메시야는 예언들에 따르면 고난을 당하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도록 예정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이 두 사건이 나사렛예수의 사건으로 메시야가 곧 예수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3:18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사 자기의 그리스도의 해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사도행전23:6 바울이 그 한 부분은 사두개인이요 한 부분은 바리새인인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

사람의 구원은 하나님말씀으로부터입니다. 하나님말씀은 하나님의 의도이시기 때문에 말씀을 듣고 믿으면 됩니다. 초대교회 사도들로부터 지금까지 전해진 구원의 메시지는 예수그리스도의 동정녀탄생,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예수그리스도의 부활, 예수그리스도의 승천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 사항을 믿으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And

함께하는 선교(사도행전16:35-40)

두 사람이 옥에서 나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보고 위로하고 가니라

영어에 togethe라는 말이 있습니다. 같이 함께 한다는 말입니다. 헬라어로는 oJmou'/homoȗ입니다. 예루살렘교회가 기근으로 힘들었을 때, 이방의 교회들이 합심해서 도왔습니다. 이방의 교회들을 위해서 예루살렘교회에서는 적극 지원했습니다. 유대파, 헬라파 상관없이 교회를 하나로 보고 합심해서 선교를 했습니다. 그 결과 1세기도 지나지 않아서 로마의 상당한 지역이 복음화가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한국교회의 현상은 어떻습니까? 교회가 함께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세계 제2위선교국입니다.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스런 선교국입니다. 하지만 온 교회가 합심을 해서 한다고 하면 엄청난 파급력과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온 교회가 합심해서 조직한 국제선교센터가 없습니다. 각 교회마다 경쟁하듯이 내 교회만의 따로 선교입니다. 그러다보니 선교는 하더라도 비용이 많이 들면서 효과는 아무래도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함께’가는 길은 힘이 그만큼 반비례적으로 힘이 줄어듭니다. 그래서 우리의 선배들은 함께 일했습니다. 지금 빌립보에서 나올 때만 해도 바울혼자가 아닙니다. 실라와 누가와 함께였습니다. 왜 이렇게 하였습니까? 효과입니다. 함께 하는 효과 때문입니다. 이것 때문에 함께 다녔습니다. 바울사도 혼자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했을 때 복음이 폭발적으로 전해졌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하나님을 섬겼을 때, 큰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모세 혼자 일하지 않았고, 여호수아 혼자 일하지 않았으며, 다윗혼자 일하지 않았습니다. 함께 일했습니다. 함께 일함으로서 나라를 세웠고, 함께 일하면서 전도를 했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진일보한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는 교회끼리 함께 하지 않습니다. 몇 년 전에 한 불신자를 전도하려고 일 년을 그 사람을 위해서 헌신하다시피 했습니다. 일도 도와주었습니다. 자그마하게나마 선물까지 하면서 조심조심 전도를 하려고 다가셨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교회에 나온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러나 몇 주 지나서 찾아갔을 때 다른 교회에 간다는 것입니다. 나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 했습니다. 이유인즉 옆에 사람만 엄청 많은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 교회에서 이 사람에게 선물공세를 했습니다. 우리같이 작은 교회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돈을 쓴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작은 교회를 다녀봤자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 힘만 든다고 했더라는 것입니다. 사업을 하려면 큰 교회에 다녀야 하더라는 것입니다. 정말 핏대가 섰습니다. 작은 교회를 돕지는 못할망정 고춧가루를 뿌리는 그 교회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과연 모든 교회가 함께 한다는 생각을 이 교회가 했을까요? 같은 목적, 같은 길, 같은 노선을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함께 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어렵습니다. 왜 어렵습니까? 이권 때문입니다. 내가 혼자 다해야 한다는 야망 때문입니다. 이 야망으로 하여금 같이하지 못하게 하고 함께 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치 전매특허를 낸 것처럼.

And

복음전하는 자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사도행전16:35-40)

로마인들에게는 특권이 있었습니다. 로마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식민지인들과 다른 권리가 있었습니다. 로마시민이 로마인들을 때릴 권리가 없었습니다. 주전509년은 로마공화국 설립연대입니다. 이때로부터 주전195년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서 발레리아와 포르기아법전을 시행하였습니다. 이 법전에 따르면 로마시민들은 품위를 손상시키는 종류의 처벌로부터 면제를 받았습니다. 이 법과 관련해서 로마시민을 위해 어떤 특권을 제정하였습니다. 로마시민은 Ciuis Romanus sum 키우이스 로마누스 숨 으로 법적인 권리를 주장하였습니다.

초대교회때의 로마제국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잔인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부당한 대우를 한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로미시민으로서 빌립보성을 다스리는 집정관에게 탄원을 하기로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날이새자 상관들이 하급관리를 시켜서 바울과 실라를 석방하라고 했습니다. 간수는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풀어주었습니다. ‘평안히 가라’고 했습니다. 간수에게 있어서 바울과 실라는 영원한 생명의 은인이었습니다. 손님으로 떠나기를 바란 것이 아니라 죄수로서 떠나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에 이의제기를 합니다. 로마사람인 우리를 정식재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우리를 보내고자하는 것이냐고 했습니다. 저희들이 직접 와서 석방하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잘못을 시인하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최소한 이런 일이 이곳에서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로마의 시민을 학대한 것입니다. 행정장관들은 뒤늦게야 자신들이 잘못을 저질렀음을 인정했습니다. 그들은 재판도 하지 않고 때렸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에게 발언권도 주지 않았습니다. 최소한 감옥에 구금하려면 그에 상당한 죄가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고소인의 말만 믿고 무조건 때렸습니다. 로마사람이라는 것은 상상도 하지 않고 죄목을 조작하여 사도들을 감옥에 집어넣은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오히려 바울의 용서를 구했습니다. 로마정부에 보고하지 않기를 부탁했습니다.

사실 복음은 사람들을 영원한 삶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면 영원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 생에서 시작된 삶이 영원한 삶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에 대해서 이 세상에서 감사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전혀 그러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세상은 복음을 공격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아주 싫어합니다. 그 이유야 자명합니다. 사탄이 활동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활동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탄에게는 복음이 전해지는 것이 싫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반대가 심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심히 핍박합니다. 그러나 핍박이 심하면 심할수록 더 복음은 앞서갔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것이고, 복음은 천국에서 행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누가 막을 수 있습니까? 아무도 막을 수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일군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 복음을 전합니다. 이들의 passion을 막을 수 없습니다. 복음을 이렇게 전하는 이유는 사람을 살리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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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수와 그의 가족의 구원(사도행전16:25-34)

바울과 실라를 감옥에 가둔 사람은 빌립보간수였습니다. 간수는 상관의 명령에 따라야 했습니다. 상관들이 바울과 실라의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심히 쳤습니다. 그런 후에 든든히(ajsfalw'"/asphallȏs/아스팔로스/확실히) 지키라고 간수에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간수는 저희를 깊은 옥에 가두었습니다. 감옥은 外감옥과 內감옥 중에서 내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러다가 감옥 문이 열렸습니다. 착고까지 풀어졌습니다. 본인이 판단할 때 자결을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죄수가 한 명도 도망하지 않았습니다. 간수는 바울과 실라 뿐만 아니라 모든 죄수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렸습니다. 간수는 바울과 실라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바울은 즉시로 ‘주예수를 믿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너뿐만 아니라 네 집이 구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주의 말씀을 간수와 그 집 모든 사람에게 전했습니다. 희한하게도 모든 사람들이 복음을 잘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온 집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간수는 바울과 실라의 맞은 자리를 씻겼습니다. 뿐만 아니라 음식까지 차려주고 그 집사람들 모두 기뻐했습니다.

사실 바울과 실라는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혀 착고에 매어 있었기 때문에 몹시 아팠습니다. 정말 힘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간수가 구원의 질문을 했을 때 주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 결과 생각지도 않았던 결과가 나왔습니다. 간수한 사람이 아니라 온 집이 전체 구원을 받았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지진이 일어나게 하시고, 감옥문이 열리고, 간수의 자결을 말리게 하셔서 그의 온 집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항상 예나지금이나 구원받는 믿음은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는 것입니다. 오순절에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당부하셨습니다.

사도행전2:36 이 예수를 …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으니.

사도행전3:26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사도행전8:5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사도행전8:35 빌립이 …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사도행전9:34 베드로가 가로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사람들의 이성이란 항상 거의 사탄에 예속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되도록 듣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지 않으려 합니다. 구원보다 더 이 세상이 좋고, 구원보다 더 시급한 문제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빌립보간수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들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감옥의 문이 열렸으며, 어떻게 착고가 풀어졌는지를 들었을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 마음을 여신 것입니다. 간수에게 예수를 믿는 믿음을 주셨습니다.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사람들을 구원하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어떤 상황이든지 성령께서 역사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성령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And

구원의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변(사도행전16:25-34)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옛날 20대 때 서울에서 지낼 때입니다. 버스를 타고 출근 할 때마다 서소문근방의 한 교회에서 세로로 내려쓴 글씨가 사도행전16장31절입니다. ‘주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이 말은 사람을 영생하게 하는 명쾌한 답입니다.

Murray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하나님과의 화목제물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은 구속의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이 구속의 사실은 진행형이 아니고 완료된 사역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 어떤 행위를 인정받아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예수의 공효로 구속이 완성되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은 이 사실을 말하기 위해 부정과거 시제를 사용했습니다.

마태복음20:28, 마가복음10:45 주려(dou'nai/doȗnai/동사 부정사 과거 능동)

베드로전서1:18 구속된(ejlutrwvqhte/ellutrôtheted/동사 직설 과거 수동)

히브리서9:12 들어가셨느니라(eijsh'lqen/동사 직설 과거 능동)

히브리서9:15 죽으사(genomevnou/genomênou/동사 분사 과거 중간디포)

디모데전서2:6 주셨으니(dou;"doûs/동사 분사 과거 능동)

디도서2:14 주심은(e[dwken/êdoken/동사 직설 과거 능동)

로마서3:25 세우셨으니(proevqeto/proêtheto/동사 직설 과거 중간)

고린도전서6:20,7:23, 갈라디아서3:13,4:5, 요한계시록5:9,14;3, 사도행전20:28 값으로 산(hjgoravsqhte/egorâsthete/동사 직설 과거 수동)

우리의 큰 구원은 어떤 사람들의 생각처럼 우리자신을 갈고 닦은 결국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이루어놓으신 구원의 영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서 그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하며 그를 신뢰해야 합니까? 사람들은 누구나 죽으면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형벌을 면제받는 길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합니다. 천국을 보았느냐? 갔다 왔느냐? 어떻게 그것을 알겠는가? 라고 많은 질문들을 합니다. 그러나 믿는다는 것은 복음서에 제시된 대로 단순히 그리스도를 나의 주, 나의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행위는 나의 의지행위입니다. 즉 사람이 복음서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리스도예수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즉 그분이 나를 구원하시고, 앞으로 인도하실 것을 또한 나를 대속하시고 다스리신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 나는 믿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를 영원히 구원하시는 분은 예수그리스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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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질문사항(사도행전16:25-34)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이제 간수에게 바울과 실라는 죄수가 아니었습니다. 자기를 살릴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실라를 감옥 밖으로 데리고 나갔습니다. 서방사본에 의하면 다른 죄수들을 단속한 후에 그들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진지하게 질문합니다.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간수의 이 말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자신을 육신으로부터 구원한 이 사람들에게 영적인 문제까지 질문한 것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기적이 일어났다고 하지만, 죄수에게 간수가 자신의 구원의 문제를 의뢰하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간수는 구원의 문제를 질문할 사람을 제대로 짚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로마의 관원에게 복음의 혜택을 주시고자 함이었습니다.

흔히 사람들이 알기를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속전을 사단에게 지불했다고 말합니다. 이레네우스(Irenaeus),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오리겐(Origenes), 바실(Basilius), 그레고리오스 나지안제노스(Gregorios Nazianzenos), 그레고리오스 뉘쎄노스(Gregorios Nyssenos), 알렉산드리아의 시릴(Cyril of Alexandria), 다마스커스의 존(John of Damascus), 힐라리(Hilarius), 루피누스(Tyrannius Rufinus), 제롬(Eusebius Hieronymus/Jerome), 어거스틴(Augustinus), 레오 대제(Leo大帝), 버나드, 루터와 같은 사람들이 주장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죽으시자 비로소 사단이 풀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견해는 안셈(Anselm)이 오류를 발견하고 바로잡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마귀에게 형벌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빚을 지지 않은 만큼…인간이 갚아야 할 모든 것은 하나님께 빚을 진 것이지 마귀에게 진 것이 아니었다

마귀와 사람들 간에는 어떤 협상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마귀는 사람들을 절대로 놓아주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마귀는 어쩔 수 없이 내어주어야 할 때가 있는데,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죽음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사람을 구원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만인을 위한 죽음은 아닙니다. 그를 의뢰하고 믿는 자를 위한 구원입니다.

뿐만 아니라 구원은 예수그리스도 외에는 절대로 구원이 없습니다. 수많은 종교는 있을지언정, 구원은 결코 그리스도예수를 믿는 믿음 외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으리이까?’에 대한 답을 줄 수 있는 곳은 교회밖에 없습니다. 교회라고 해서 모두는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아닌 교회 역시 구원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종교도, 어떤 사람에게도 사람이 구원 얻을 길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이 땅에 오셔서 구원 얻는 길을 내셨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구원 얻는 길을 주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인생의 영혼을 담보로 한 최대의 사단의 노름입니다. 거짓이고 사기입니다. 따라서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으리이까’는 그리스도예수님께 질문을 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가장 지혜롭고 명철한 사람입니다. 예수그리스도 외에는 결코 구원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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