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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의 약진(사도행전6: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잡히시자 모두 뿔뿔이 흩어졌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어떻게 되는지 전전긍긍했습니다. 제자들은 실제의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힘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수시로 죽었다가 다시 살 것을 말씀했지만,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처참하게 맞고, 가시면류관을 썼다는 것을 보고 듣고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는 골고다에서 결국은 죽으셨습니다. 제자들은 모든 꿈이 전부 사라져버렸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 수많은 이적과 기사를 보았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다 허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기대반, 실망반이었던 제자들에게 그 사흘이 지난 후에 예수님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갈릴리에서 다시 그리워하던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살 것 같았습니다. 죽으셨던 예수님이 다시 부활하셔서 자신들의 평생에 같이하리라는 생각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제 다시 이 땅에 있지 않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대신 자신과 같은 위로자(성령)를 보내주시겠다고 하시면서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셨습니다. 그 후로 제자들은 과연 주님의 말씀대로 엄청난 일들을 겪었습니다. 이전에는 예수님이나 하셨던 기적들이 제자들에게 일어났습니다. 교회가 갑자기 몇 천 명으로 증가하더니, 그것을 방해하는 세력들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옛날의 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제자들이었습니다. 오순절의 기적을 체험한 제자들이나 예루살렘의 지각 있는 사람들은 점점 교회로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사람들이 삼천이나 더하더니(2:41),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습니다(2:47). 점점 사람이 많아지기 시작하는데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4:4)이나 되었는데 우리들의 계산법으로 하면 이보다 몇 배의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성도들은 모든 물건을 통용하는가 하면(4:32), 자신의 재산을 팔아서 교회에 헌신하기도 했습니다(4:34-37). 공회에서 체포영장을 발부했어도 믿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며, 주께로 나왔습니다(5:14). 계속 제자의 수가 더 많아졌습니다(6:1). 말씀이 흥왕하여 제자들의 수가 점점 더해갔습니다. 이제는 예루살렘성전의 제사장의 무리들도 합세했습니다.
최근에 스티븐 호킹이 우주는 스스로 창조되었다고 했습니다. 그 많은 학문으로 하나님의 창조를 부인한 것입니다. 이토록 과거나 현재나 하나님의 교회에는 수많은 적들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려고 포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교회는 밖으로 나갑니다. 무엇으로도, 어떤 자도, 어떤 것으로도 막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예수님이 이루시고 성령께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의 변증 (0) | 2015.0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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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을 반대한 자들 (0) | 2015.02.22 |
초대교회의 일곱 집사 (0) | 2015.02.20 |
교회 일꾼의 조건 (0) | 2015.02.18 |
목회자가 전무해야 할 것 (0) | 2015.02.17 |
초대교회의 일곱 집사(사도행전6:1-6)
‘스데반, 빌립, 브로고로, 니가노르, 디몬, 바메나, 니골라’는 명실공이 초대교회의 일곱 집사로 추천되었습니다.
스데반(Stevfano"/스테파노스/Stephen)은 ‘면류관’을 의미하며, 헬라파 유대인이었습니다. 스데반은 예루살렘의 최초의 집사로서 첫 번째 순교자입니다. 스데반은 자신의 능력을 뛰어넘어 능력 있는 설교자이기도 했습니다. 스데반은 신앙이 돈독했으며, 은혜가 충만하고, 능력 또한 많았으며, 성경이 해박했습니다. 지혜가 풍부하고 용기가 넘쳤으며, 사랑이 많은 자였습니다.
빌립(Fivlippo"/필립포스/philip)은 ‘말(horse)을 사랑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빌립은 일곱 집사였지만 스데반이 순교한 후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효과적인 치유역사를 행했으며(행8:4-8), 마술사 시몬을 열심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만들었습니다. 유대교로 개종한 에디오피아 간다게 여왕의 국고를 맡은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행8:26-39). 그리하여 에디오피아인으로 인하여 북동 아프리카 지역에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빌립에게는 그리스도인 여선지자인 결혼하지 않은 네 딸이 있었습니다(행21:9).
브로고로(Provcoro" /프로코로스/Prochorus)는 ‘춤의 지도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니코메디아(Nicomedia)의 감독이 되었으며, 사도요한의 대필자이기도 했으며, 안디옥에서 순교했다고 전합니다.
니가노르(Nikavnwr/니카노르/Nicanor)는 ‘정복자’를 의미하며, 안디옥 출신입니다.
디몬(Tivmwn/티몬/Timon)은 ‘존경해야 함’을 '을 의미합니다.
바메나(Parmena'"/파르메나스/Parmenast) 역시 일곱 집사 중의 한 사람입니다.
니골라(Nikovlao"/니콜라오스)는 유대교로 개종했다가 마침내 기독교에 개종한 이방인이었습니다. 니골라는 교회 교부들에 의해서 니골라당으로 알려진 이단 종파의 창시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교부 이레네우스 시대부터 니골라가 니골라당의 창시자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니골라인지 동명이인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이상과 같이 초대교회의 집사들은 모두 헬라식의 이름을 가진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히브리파, 헬라파를 구분해서 분배를 할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이들을 ‘사도 앞에 세웠’습니다. 이들은 사도들을 돕는 자이지, 사도들의 대적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을 사도들이 기도하고 안수하여 세웠습니다. 이들은 모두 충성스러웠습니다. 이 중에서 스데반과 빌립의 행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통상 생각하는 것처럼 헌금(재정)만 분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이들을 세움으로써 불평은 사라졌고,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전하는 것을 전무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는 앞으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교회에 일꾼들이 잘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을 반대한 자들 (0) | 2015.02.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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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문제들 (0) | 2015.02.14 |
교회의 일꾼의 조건(사도행전6:1-6)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3절)
사도들은 식탁을 위한 구제로 일곱 사람을 택하라고 했습니다. 택함을 받는 일꾼들은 성령 충만해야 했습니다. 지혜가 충만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의 칭찬을 받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그래야 사도들이 했던 것을 맡길 수 있었습니다. 이들의 이러한 것들은 일꾼의 내적조건(지혜와 성령 충만)과 외적조건(칭찬 듣는 사람)을 충족시켜야 했습니다.
목회를 해보면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어려운 소형교회에서는 사람들이 도무지 일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냥 예배만 드려줘도 대견한 일처럼 여깁니다. 십 수 년을 목회하면서 느끼는 것이 일꾼의 부재현상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심리가 참으로 묘합니다. 소형교회에서는 일을 하지 않다가도 대형교회로 옮기면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신자들의 신앙부재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같은 교회인데 신자들이 제대로 믿음만 있다면 이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잘하면 저기에서도 잘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도의 도리요 일꾼 된 의무입니다. 오늘의 한국교회의 소형교회들은 어렵게 목회하고 있습니다. 생활이 말이 아닙니다. 어떤 교회는 새벽에 목회자의 가족만 나와서 흐느끼고 있습니다. 어떤 교회의 목회자는 당장 밀린 집세 때문에 어찌할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일을 하지 않는 신앙부재현상입니다. 대형교회에 가서는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헌신(?)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똑같은 교회에서 교회가 작다고 전혀 헌신하지 않는 모습들을 보면 신앙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왜 신자들이 두 얼굴의 신앙행태를 보입니까? 확실한 신앙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크거나 작거나 교회입니다. 대형교회는 하나님이 관장하시고, 작은 교회는 사도들이나 선지자들이 관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똑같이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관장하십니다. 문제는 사람들의 세속화입니다.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하였을 때부터 기독교는 세속화가 되어 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건물과 교세가 행세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의 교회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보다 인간들의 뜻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교회의 일꾼들이 성령이 충만하다면, 지혜가 충만하다면, 교회를 가릴 수 있을까요? 더구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고자 애쓰는 교회들을.
신앙을 위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원형경기장에서, 또는 화형으로 순교한 성도들, 예배를 드리겠다고 신앙의 자유를 부르짖다가 종교재판으로 순교한 성도들,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도 오직 하나님만 믿었던 성도들이 오늘날에는 그리운 시대입니다. Postmodernism의 시대이면서 modernism이 같이 공존하는 시대. 교회의 세속화가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이 시대, 과연 참다운 일꾼들은 어디에 있을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초대교회의 약진 (0) | 2015.02.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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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의 일곱 집사 (0) | 2015.02.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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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가 전무해야 할 것(사도행전6:1-6)
출애굽기18장을 보면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를 찾아갑니다. 모세에게서 하나님이 어떻게 애굽에서 인도해냈음을 듣고 기뻐하고 여호와를 찬양했습니다. 그리고는 모세가 일일이 이스라엘의 전 백성을 상대해서 재판하는 것을 봤습니다. 모세는 계속하는데도 사람들은 엄청 밀려있었습니다. 백성들도 힘들고, 모세도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드로는 모세에게 제안을 합니다. 재판의 輕重(경중)을 따라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을 삼아서 맡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천부장이 하지 못할 일을 모세가 재판하라고 했습니다(출18:13-26).
사도들은 교회의 모든 일을 하느라고 지금까지 바빴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망을 들었습니다. 일은 일대로 했는데도, 많은 효과가 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구제와 경제, 교회의 일들을 할 사람을 천거하라고 했습니다. 자신들은 기도하는 것과 말씀전하는 것을 전무하겠다고 했습니다. proskarterevw/프로스카르테레오‘전무하다’는 사람에 관하여는 충성하는 것이고, 목적들과 관계해서는 ‘어떤 일에 열중하다’입니다. 사도행전1:14에서 오순절 전에 약속된 성령의 충만을 받기 위해 ‘계속하여 기도하였습니다.’ 2:42에서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습니다. 2:46에서도 마음을 합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즉 말씀전하는 것과 기도하는 일에 전적으로 헌신하겠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th'/ proseuch/테 프로슈케'/)과 말씀전하는 것(th'/ diakoniva/ tou' lovgou/테 디아코니아 투 로구)을 전무하겠다고 했습니다. 목회에서 성경말씀을 전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요사이는 목사가 찬양목사가 따로 있는데, 무엇보다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가장 큰 의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의 말씀뿐만 아니라 성경말씀을 적용시키는 것, 모범, 경고, 위로 등을 포함합니다. 그래서 목사들은 성경교사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말씀을 청중에게 전하는 것은 목사가 평생을 해야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설교의 어리석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십니다. 그래서 목사들은 말씀전하는 일에 최선을 쏟아야 합니다. 시간과 재능과 힘 전체의 헌신을 필요로 합니다. 특히 이 시대는 분주합니다. 불안한 시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목사들이 말씀전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회가 극도로 세속화되었기 때문에 영적인 능력과 예언자 같은 끈기가 훨씬 많이 약화되었습니다. 목회자자신의 영혼의 수양이 약화되어 교회에서 많은 사고들이 나기도 합니다. 목사들은 개인적인 경건과 영적인 수양을 끊임없이 함으로서 목회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등한히 함으로써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등한히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에서 중심적인 직분은 교사입니다. 이것이 약해지거나 등한히 되거나 속박되어진다면 교회의 생명과 회중의 생명은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기도를 함으로서 목회자는 진리의 샘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길어낼 수 있습니다. 설교는 목사자신의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제아무리 엄청난 지식을 소유했다고 하더라도 목회자는 하나님과의 내적인 교통 없이는 사람들의 마음을 정복할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의 일곱 집사 (0) | 2015.02.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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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문제들(사도행전6:1-6)
초대교회는 지금까지 여러 가지를 겪었습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이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자신도 모르게 외국어로 말했습니다. 때마침 예루살렘에 모여든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도대체 이 무슨 일이냐? 라고 생각하기도 전에 베드로의 설교가 이어졌습니다.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수, 너희들이 시시하게 생각했던 예수, 너희들이 그를 하나의 선지자로 간주했던 예수가 지금 너희들이 보이는 이적을 행하게 하신 분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갑자기 예루살렘교회가 성도들이 많아졌습니다. 성도들이 많아지는 것을 본 예루살렘의 실권자들은 몹시 배가 아팠습니다. 자신들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수의 道(도)가 퍼져나가는 것이 눈에 가시 같았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을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죽일 수도 없었고, 그대로 둘 수도 없었습니다. 거기에 가말리엘의 권고를 듣고 보니 더더욱 사도들을 없앨 수 없었습니다. 초대교회는 그 문제를 겪고 난 후에 아나니아와 삽비라로 인하여 공격을 받았습니다. 종교권자들의 박해는 외적인 것에 비하여 내적인 공격이었습니다. 어떻게든 교회의 전진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문제도 성령의 은혜로 잘 해결되었습니다. 그러자 또 종교권자들이 교회에 도전을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붉어졌습니다. 내적인 문제였습니다.
1절을 보면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교회가 헬라파 유대인과 히브리파 사람들로 구성되었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는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내놓은 재산으로 구제를 했습니다. 이때 헬라파 과부들이 구제에서 소외되었습니다. 사람들보기에 히브리파 과부들은 더 가져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불평(goggusmov")이 잦아졌습니다. 교회의 재산은 어떤 개인의 재산이 아니었습니다. 공동재산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쪽에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매우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원망을 한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한쪽으로 잔뜩 기울어져 있습니다. 성도라고 부르기는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멈추어 있습니다. 더 나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 숲에 숨어 있으려고 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신자’라는 이름만 있을 뿐입니다. 큰 교회에서는 서로 직분을 받으려고 합니다. 작은 교회에서는 직분을 주려고 해도 줄 사람이 없습니다. 큰 교회에서는 남아도는 신자들이 작은 교회에는 없습니다. 매우 한 쪽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교회의 양극화, 기울어져 있는 교회의 문제들, 누구도 해결하지 못합니다. 노회도, 총회도 절대로 해결하지 못합니다. 성도들 스스로 해결해야 합니다. 교회가 각성해야 합니다. 요새 서울의 ○○교회가 와해될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그런 교회에는 사람들이 미어터집니다. 그러다 일이 터지면 홍수 난 것처럼 초토화되어버립니다. 성도들이 각성해야 합니다. 목회자들이 각성해야 합니다. 그래야 문제들을 줄일 수 있습니다.
교회 일꾼의 조건 (0) | 2015.02.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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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가 전무해야 할 것 (0) | 2015.02.17 |
멈추지 않는 사도들 (0) | 2015.02.11 |
가말리엘의 충고 (0) | 2015.02.10 |
도전받는 교회 (0) | 2015.02.08 |
멈추지 않는 사도들(사도행전5:33-42)
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42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사람들은 재판정 앞에 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법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재판정이 법을 수호하지는 않습니다. 종교재판이라든지, 군사재판정이라든지, 독재재판정들은 형식만 갖추었을 뿐, 사람을 죽이기 위한 재판정이기 때문에 오히려 법정에 서는 사람들이 떳떳한 사람들입니다. 네로의 재판정에 서는 것 떳떳한 것입니다. 따라서 어느 재판정에 서느냐에 따라서 입장이 다른 것입니다. 사도들은 산헤드린의 재판정에서 떳떳하게 여겼습니다. 조금도 창피하거나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것을 합당하게 여겼고, 기쁘게 여겼습니다. 말이 그렇지 40에서 하나 감한 매를 맞는다는 것은 육체적인 고통이었습니다. 잡힌 사람들 모두 그렇게 맞았을 것입니다. 얼마나 육체적으로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고통과 기쁨 중에서 갈등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고통을 당할 때마다 그 이름을 위한 마음이 優位(우위)를 차지했을 것입니다. 성도들은 복음을 위하여 핍박을 받을 때마다 두 가지로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Calvin). 형벌의 아픔보다 영적인 기쁨, 그 이름을 위한 기쁨이 그 고통을 타고 넘었을 것입니다.
사실 사도들은 제대로 죽은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 순교를 당했습니다. 어떤 사도들은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습니다. 짐승에게 찢겨 죽임을 당하기도 했으며, 참수 또는 기름 가마에 넣어서 죽이기도 했습니다. 교회의 적들은 잔인하게 성도들을 죽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죽임당하는 것에 개의치 않았습니다. 삶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나고 힘이 났으며, 그 일들을 기쁨으로 여겼습니까? 더 나은 것을 소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는 것은 만용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무모함이 아니며, 그렇다고 계산된 것도 아닙니다. 십자가는 성령과 같이 지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의 십자가를 지고서 그 많은 사람들이 순교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무거운 일입니다.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끝이 예상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졌습니다. 고통의 멍에를 메고서 걸어갔습니다. 왜 입니까? ‘그 이름을 위하여’입니다. 그 이름 예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전혀 박해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어디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즉 ‘예수는 메시아’라는 말을 쉬지 않고 전했습니다. 이들의 이러한 passion이 없었다면 오늘까지 교회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도들 속에, 교회들 속에, 교회사의 모든 일 속에 성령께서 늘 함께 하셨기 때문에 교회의 질주는 멈추지 않습니다. 지금까지만 해도 사도들은 박해가 많았습니다. 그러면 얼마든지 그만두어야 할 형편이었지만 그 이름을 위하여 이탈자가 없었습니다. 우리들은 이들에 비해 얼마나 행복하게 신앙생활을 합니까? 그러나 불평은 사도들보다 엄청 많습니다. 빨리 십자가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려 하고 있습니다.
목회자가 전무해야 할 것 (0) | 2015.02.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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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문제들 (0) | 2015.02.14 |
가말리엘의 충고 (0) | 2015.02.10 |
도전받는 교회 (0) | 2015.02.08 |
적진 속에서 주님의 제자들 (0) | 2015.02.06 |
가말리엘의 충고(사도행전5:33-42)
바리새인인 가말리엘(Gamalihvl)은 교법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가말리엘은 사도행전5:34과 22:3에 나오는데 바울사도가 유대인들에게 자신이 가말리엘에게 가르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가말리엘은 Mishnah(미쉬나)에 인용되어 있는 탁월한 교사들의 대가족 우두머리였습니다. 본문에 언급된 가말리엘은 가말리엘 하자켄(Gamaliel ha-saqen)으로 “장로 가말리엘”입니다. 그는 교사에게 주어지는 모든 유대식 칭호 중에서 가장 높은 랍바/온(Rabba/on)이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가말리엘은 유대인의 율법학자요, 사도바울의 율법스승이며, 바리새파의 양대산맥인 샴마이학파에 대립되는 힐렐학파를 창시했던 힐렐의 손자이자 시므온의 아들로서 당대 최고의 랍비라는 명성과 함께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가말리엘은 정통 바리새인이자 위대한 율법학자로서 유대사회의 정신적인 지주였습니다. 가말리엘의 죽음으로 인해 율법의 영광도 끝났다 할 정도로 그에 대한 찬사는 유대사회에서 대단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실권자들이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 때에 가말리엘이 그들에게 경고를 했습니다. 사도들에 대해서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전에 드다가 일어났을 때 봤지 않느냐? 그를 따르던 400명이 드다가 죽자 흩어졌지 않느냐? 그 후에 갈릴리에서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유혹하다가 망하니까 흩어졌지 않느냐? 고로 너희들은 이 사람들을 상관 말라고 했습니다. 만일에 저희들의 행하는 일들이 사람들에게서 났으면, 스스로 무너질 것이며,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들은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어보니 옳게 느껴졌습니다. 그리하여 사도들을 불러들여서 사도들에게 채찍질을 하고 복음을 전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실 ‘두고 보자’는 가말리엘의 말은 맞지 않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현재 이단들이 극성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들 중의 어떤 목사가 나와서 가말리엘처럼 가만두라고 했을 때, 이단들은 그 사이에 엄청난 일들을 할 것입니다. 따라서 가말리엘의 가만두라는 말은 맞지 않는 말입니다. 하지만 사도들이 위기에 처해있을 때에 살기등등한 패거리들을 잠잠케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적진에도 하나님의 사람들을 돕는 사람들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마치 기드온의 상황을 비교해보면 절대로 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미디안의 보초들이 이야기하는 상황에서 이 전쟁이 이스라엘의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의 전쟁인 것을 알았습니다(삿7:13-14). 결국 사도들은 죽음의 위기에서 가말리엘의 말로 인해서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매를 맞았습니다. 이 매는 40에서 하나 감한 매(39)입니다.
우리들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일들을 만납니다. 그 일들은 악한 상황일수도 있고, 선한 상황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인내해야 합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은 어제도 있었고, 오늘도 있으며, 내일도 있을 것입니다. 창조주하나님은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의 백성들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십니다.
교회의 문제들 (0) | 2015.02.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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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지 않는 사도들 (0) | 2015.02.11 |
도전받는 교회 (0) | 2015.02.08 |
적진 속에서 주님의 제자들 (0) | 2015.02.06 |
재판정 앞에 사도들을 세운 제사장들 (0) | 2015.02.05 |
도전받는 교회(사도행전5:33-42)
저희가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쌔
기독교는 발생되면서부터 많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이미 구약에서부터 엄청난 도전을 받았습니다. 안과 밖으로 엄청난 도전을 받았습니다. 안으로는 죄로 도전을 받았고, 밖으로는 힘으로 도전을 받았습니다. 애굽에서 나올 때에 수많은 나라들이 이스라엘을 경계했습니다. 아예 애굽의 바로는 영원히 못나가게 하려고 했습니다(출7:13,22,8:15,19,32,9:7,12,9:35,10:20,14:5-6). 왜냐하면 그만한 인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대대로 씨종 같았던 그들을 내보낸다는 것은 국가적으로 큰 손실이었기 때문입니다. 애굽을 출발해서 나올 때 주변국들은 이 기회를 이용해서 이스라엘을 없애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길을 막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동맹하고 연합하여 힘을 합해서 막으려했지만, 결코 막지 못했습니다. 강대국이었던 애굽, 아람,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로마가 막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막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막으려했던 나라들이 막혔습니다. 그들 나라가 역사의 뒤 안으로 사라졌습니다. 로마는 그야말로 엄청난 나라였습니다. 일찍이 공화정을 시작한 나라로 지중해주변의 모든 나라가 로마였습니다. 지금의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에 이르기까지 영역을 뻗친 나라였습니다. 어느 나라보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극히 미워했던 로마도 결국에는 기독교에 항복하였습니다. 서구에서 한참 꽃을 피우던 기독교는 오히려 로마가 기독교를 승인하여 국교를 삼을 때부터 도전을 받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했는데 반하여 이제는 정치종교가 되어버렸습니다. 교회의 건물은 커졌습니다. 그리고 말씀보다 의전을 더 중시했습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로마카톨릭, 이름 하여 암흑시대라고 한 중세1000년 간 기독교는 그 어느 때보다 앞을 분간할 수 없었습니다. 이때는 힘으로 기독교에 도전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역시 버텨나갔습니다. 그러다가 1517년 종교개혁으로 인해서 도전이 멈추는 듯 했는데, 이때부터는 인본주의가 기독교에 도전을 했습니다.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도는 것이라고 발표된 이후로 사정없이 하나님의 영역에 도전했습니다.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 또한 교회를 사정없이 도전하는 것은 正道(정도)를 떠난 신학들입니다. 영지주의, 자연신학, 자유주의신학, 신정통주의, 세속화신학, 흑인신학, 해방신학, 여성신학 등 현대신학들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교묘하게 하나님의 복음과 말씀을 갉아먹습니다. 변질시켜버립니다. 도덕이 무너지려할 때 윤리론, 사람들이 힘들게 살 때 사회구원 등은 정말 사람들에게 매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진리를 갉아먹는지, 변질시키는지를 우리들은 눈을 부릅뜨고 보아야 합니다. 자칫 우리들이나 현대인들이 이러한 것에 대해서 많이 약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사탄과 이 세상은 어떻게 하든지 교회를 분쇄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들에게 이러한 것들이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늘 감시의 눈초리를 쉬지 않아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의 질시를 받는 기관입니다. 그러나 옴츠러들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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