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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회복(창세기13:1-4)

아브람은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남방(네게브)으로 올라갔습니다. 9절의 반대입니다.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는 것입니다. 전에 장막을 치고 예배를 드렸던 곳에 이르러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흉년과 기근을 피하여 애굽으로 내려갔던 아브람은 하나님의 간섭을 받았습니다. 아브람은 애굽에서 벧엘로 돌아가서 새 출발할 것을 결심합니다. 사람은 어떤 충격적인 위험을 당하기까지는 그 유혹의 자리에서 좀처럼 떠나지 않습니다. 아브람은 애굽에서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았습니다. 그는 애굽에서 불신앙의 모습이었습니다. 애굽은 그에게 있어서 유혹과 위험과 파멸의 장소였습니다. 그는 처음 예배 장소에서 그의 신앙과 경건을 회복시키려는 강한 욕망을 느꼈습니다.

아브람이 애굽으로 간 것은 신앙의 실패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가나안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그 땅을 떠나라고 명령할 때까지(기근이든 아니든 간에)그 땅에 머물렀어야 했습니다. 믿음은 안전과 행복망입니다. 비록 기근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나안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애굽에 산물이 풍부할지라도 그곳으로 내려가는 것은 언제나 죄이며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애굽으로 내려간 것은 믿음의 실패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신앙을 회복했습니다. 처음으로 장막을 치고 단을 쌓은 곳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벧엘의 제단으로 되돌아오면서 하나님을 의지하여 기근을 겪을지라도 거기 머물러 있어야 했다는 것을 인식하였습니다. 자기 수완과 의지를 사용한 것을 회개하며 벧엘로 갔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하나님의 도움으로 찾은 것을 감사하며 벧엘로 갔습니다. 그는 겸손과 순진과 고백과 감사로 벧엘을 향해 올라갔습니다. 아브람은 벧엘에서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비로소 제 궤도에 올라섰습니다.

우리에게 교회가 있다는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루이스 뻘콥은 “예수그리스도는 교회를 설립하셨을 뿐만 아니라 필수적인 권세와 권위를 부여하셨다.”고 하였습니다. 교회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 건물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보다 무형적인 교회 즉 보이지 않는 교회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사는 방법을 변경해야 합니다. 하나님중심주의로 나아가야 합니다. 아무리 우리가 머리가 좋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빨리 애굽에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회복이 빠를수록 우리에게 좋습니다. 아브람이 벧엘로 간 것 같이 우리역시 빨리 벧엘로 가야 합니다. 벧엘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거기에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인도하십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곳입니다. 곧 여호와께서 모든 것을 책임지시는 구별된 지역입니다. 그곳은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적당하게 내리는 곳입니다. 때마다 만나가 내리는 곳입니다. 이슬 같은 은혜가 끝없이 내리는 곳이 벧엘입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오늘의 벧엘이 어디입니까? 물론 온 세상이 하나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하지만 특별히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이 바로 벧엘입니다. 즉 오늘의 벧엘은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에베소서 1:22-23을 보면 하나님은 그리스도가 만물을 지배하도록 하기 위해 예수님을 교회의 머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 말은 온 우주의 통치권이 예수님에게 있다는 말씀입니다. 칼빈은 우리가 그러므로 예수님께 철저하게 예속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교회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벧엘 즉 교회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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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개입(창세기12:17-20)

하나님은 바로에게 큰 재앙을 내리심으로 아브람에 대하여 개입하셨습니다. 이 재앙의 종류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큰 재앙”으로만 나타납니다. 바로는 사라를 후궁으로 맞아들이려다가 하나님으로부터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됩니다. 역병인지 아니면 바로의 궁에서 일어난 질병인지 모르지만 바로로서 해결하지 못할 큰일 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재앙이 사라의 연고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시점에 바로로서는 사라를 후궁으로 맞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바로는 사건의 원인을 제거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을 불러서 사라를 데려가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사건의 전말입니다. 아브람으로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아브람으로서는 오직 희망사항이었던 일이 현실로 돌아온 것입니다. 아브람은 이일로 인해서 비로소 하나님의 능하심을 목격한 것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첫 응답으로서 놀랄만한 독립심과 강한 개성을 보였습니다. 그는 자기 혼자 가졌던 종교적 신앙 때문에 본토와 친척을 버렸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믿는 것보다 자기 자신을 더욱 신뢰하는 사람의 행위요, 확신과 용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인간사에 큰 부분을 맡아 수행할 이 능력과 자격을 아브람은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도 역시 그의 자질의 결점이 있었습니다. 연약한 사람 같았으면 애굽으로 감히 들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험적인 행보를 취하기보다는 차라리 그의 가축 떼가 죽어가는 것을 택했을 것입니다. 어떠한 문제도 아브람의 진행을 방해하거나 막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애굽에서 벽에 부딪힌 것입니다. 하지만 그 벽을 자신이 허물지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허무신 것입니다.

죤 칼빈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말하기를

하나님의 섭리는 모든 것을 주관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진실로 자신의 전능을 주장하시고 우리가 이것을 받아들이길 원하신다. 그리고 그 전능이란 궤변가들(스콜라 철학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공허하고 나태하고 의식이 없는 전능이 아니라 부단히 활동에 참여하는 감시적이고 효능있고 활동적인 전능이다.

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사라는 바로의 후궁이 되어서는 안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바로사이에 개입하신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일에 개입하십니다. 약하고 강한 자 사이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의 일에 개입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에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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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사람들의 관심(창세기12:11-16)

아브람이 애굽에 내려가자 식량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식솔들의 먹을 것과 짐승들의 먹을 것이 모두 해결되었습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대두되었습니다. 애굽 사람들이 사라를 칭찬한 것입니다. 사라의 미색에 반한 것입니다. 심히 아리따운(hp;y daom] awh)이 나옵니다. 순전히 애굽사람의 눈으로 본 미학적인 외모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람에게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한 방편을 생각했는데 자신들의 관계를 오누이라고 하자고 입을 맞춥니다. 이렇게 되면 거기에서 끝날 줄 알았습니다. 목숨도 보존하고 가정도 지키고 일석이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바로의 신하들이 사라를 본 것입니다. 그들은 아브람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눈은 사라의 아름다움에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바라볼 때 뱀같이 지혜로워야 합니다. 아브람의 생각은 안전한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사단은 우리보다 훨씬 지혜롭습니다. 아브람의 일행은 애굽의 바로에게 끌려갔습니다. 바로(h[or]P';파르오)는 애굽어(페르 아오(pera'o;큰 집; The Great House)의 표기와 발음을 옮겨온 것입니다. 이 애굽어 칭호는 원래 애굽왕을 칭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왕의 궁전을 가리켰습니다. 제18왕조(B. C. 1575-1308)의 중반까지도 이 표현은 왕의 통칭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애굽왕의 공식 명칭이 되었습니다. 마치 “아말렉”이나 “씨저”와 같습니다. 아브람은 애굽의 최고 통치자에게 불려갔습니다.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온 것이, 안전하다는 생각이 산산조각 났습니다. 염려가 현실이 되었습니다. 아브람은 사라를 바로에게 빼앗겼습니다. 대신 바로는 아브람을 후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목적은 가장 위험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아브람은 약속의 땅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약속된 씨의 사라는 어떤 힘도 그녀를 보호하지 못했습니다. 경호원들이 사라를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아브람은 절망의 상태였습니다. 그때서야 가나안을 떠난 것이 어리석은 행동이라 생각했습니다. 굶어죽어도 좋으니 벧엘의 언덕으로 돌아갔으면 했습니다. 그러나 때늦은 후회였습니다. 가슴을 치고 통곡해도 아브람으로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결국 믿음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세상에서 살지만 믿음에서 떠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애초부터 노선을 정확하게 잡아야 합니다. 어차피 돌아와야 하는데 무엇 때문에 낭비를 하느냐는 것입니다. 시간을 낭비합니다. 재물을 낭비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뺏기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세상에 내려가지 않습니다. 아브람은 긴 여행으로 세상을 갔지만 우리는 문만 열면 세상입니다. 바로 세상이 들어옵니다. 항상 하나님과의 긴밀한 교제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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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근의 때 아브람의 영적 상태(창세기12:10)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도착한 곳은 그 땅의 심장부인 풍요로운 세겜이었습니다. 세겜의 모레 상수리나무는 당시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던 경계 표시물이요 회합의 장소였습니다. 여기는 에발과 그리심 사이의 계곡입니다. 주님은 아브람에게 이 땅이 그를 위해 계획한 땅이라고 알려주십니다. 이 말씀을 듣고 아브람은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습니다. 이 땅을 하나님과 자기 자신을 위하여 공동으로 소유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그 땅에 기근이 임하자 매우 당황했습니다. 아브람은 지금까지 그의 생활 주변에서 흔히 일어났던 어려운 일을 그가 섬기는 하나님께서 당하지 않도록 면해주실 것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말씀대로 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기근이 임하자 여느 사람처럼 당황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해서 일반적인 재난까지 100% 면제받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같이 환란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입증을 받을 때도 있고, 우리의 욕심에 이끌려서 환란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헛된 것이라고 결코 믿어서는 안 됩니다.

아브람은 약속의 땅에 와 있습니다. 그런데 기근을 당하였습니다. 거기서 그 많은 식솔과 가축 떼를 먹일 양식과 목초를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이런 경우 약속의 땅은 과연 취할 가치가 있는가? 하란에서 옛 친구들과 같이 살았으면 훨씬 더 낫지 않았겠는가? 라고 갈등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일시적인 구조를 위해서 그의 옛 고향을 향하여 북쪽으로 향하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애굽으로 내려가서 잠시 체류하다가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오리라 작정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과 협동하는 것은 천산의 가축보다 더욱 한 사람을 위하여 사는 것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기근이 아브람에게 끼친 공은 적지 않았습니다. 기근으로 인해 내적 각성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은 안락과 부유나 땅의 소유와 가축 사육을 위한 것이 아니라 땅 위에서 원대한 목적의 성취를 위해 일하는 하나님의 사자되기 위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의 생애는 보통 인생의 생활수준보다 내려가는 것같이 보였습니다. 목초지는 황무지가 되고 그의 잘 쳐놓은 장막은 보잘것없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계시하신 미래는 그의 마음에서 사라질 수가 없었습니다. 전에는 자기 이름을 한 부족의 시조로 남기고 한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는 자로 기억되려는 야심이 있었지만 이제 그 야심은 전 세계를 위한 참된 목적의 성취를 위하여 한걸음, 한걸음씩 나아가려는 그의 욕망으로 말미암아 무색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불러 하나님의 사역을 맡기셨다는 믿음은 그로 하여금 개인적 관심사를 초월하게 했습니다. 영원한 하나님과 관계를 맺음으로 인생에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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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으로 보내시는 하나님(창세기12:4-9)

많은 주석들이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즉시 떠났다고 말합니다. Matthew Henry도그의 순종은 지체함이 없는 신속한 것이었다고 했고, Keil and Delitsch도 아브람은 주님의 부르심을 기꺼이 따랐으며 말씀하신대로 떠났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아브람이 갔느냐? 하나님이 보내셨냐?’에서 갈등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본문을 설교할 때 아브람의 믿음을 말합니다. 믿음이 좋아서 즉시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들도 아브라함처럼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의 아브라함을 이해할 때 아브라함이 두 단계에 걸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한번은 갈대아 우르에서(11:31, 15:7, 행7:3), 그리고 하란에서(11:32, 12:12)였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가나안으로 하나님이 보내셨는가? 아니면 말씀 한 마디에 즉시 떠났는가?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합니다. 즉 아브라함이 모든 것을 정리하고 바로 떠났다면 “아브람이 점점 남방(네게브)로 옮겨 갔더라”라는 구절에서 부딪히게 됩니다. 네게브만 넘으면 애굽입니다. 믿음이 충만했다면 사실 가나안에 도착한 후 네게브로 방향을 잡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실패하는 원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에서 인물들을 설교할 때에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어린아이들에게 주입식인 인물설교에 주의해야 합니다. 그 말을 믿고 나갔는데 안 되기 때문입니다. 즉 성경에서 믿음의 사람들을 세울 때 그 사람을 기준시키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하심이 어떠한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세와 아브라함이기 때문에 그 일들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 손에 붙잡혀 있었기 때문에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자칫 아브라함이기 때문에 한다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Calvin은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을 다시 격려하여 나아가게 하셨다고 주석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창세기12:4-9절의 아브라함을 주시해야 합니다. 마치 사무엘상 6장에 나오는 벧세메스의 소처럼 되라는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초점을 하나님께 맞추어야 합니다. 채널을 성경의 위인들에게 고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맞추어서 고정해야 합니다. 노아라든지, 에녹이라든지, 모세라든지, 아브라함 등등은 오직 하나님의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시대에 유명하다고 하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도구에 불과합니다. 우리역시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이나 우리역시 같은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우리의 노력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뢰일뿐입니다. 성경을 볼때 이면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자칫하면 주객이 전도될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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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명령(창세기12:1-3)

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너는 가라”(레크 레카) “너는 너의 본토를 떠나라” “너는 친척집을 떠나라” “너는 아비 집을 떠나라”입니다. 어디로 가야 하느냐 “내가 지시할 땅”입니다. “너는 가라”는 것은 이미 지시된 곳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브람에게는 이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음성이 들리는데 목적지가 없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명령과 약속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 명령은 아브람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미지의 땅으로 가기 위해 그가 소유한 가장 소중한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큰 결단을 요구하는 믿음의 시험이었습니다.지금까지 살았던 배경(울타리)을 떠나서 아무도 의지할 곳 없는 땅으로 가라는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는 아브람의 신앙을 증거 하는 다른 시험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아브람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아브람은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히11:4은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강권이 아브람을 떠나게 한 것입니다. 지구상에 역사를 새롭게 쓰기 위해서 아브람이 하란을 떠나야 했습니다.

2절을 보면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했습니다. 여호와의 ‘복’은 주께 신실한, 즉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자들에게 머무릅니다(신11:27). 아브람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복을 받고 또한 복을 나누어 주는 자가 된 것입니다. ‘너는 하나의 복이 되라’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대략 7가지의 귀중한 약속을 하십니다. 󰊱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리라. 󰊲 내가 네게 복을 주리라. 󰊳 내가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 󰊴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 내가 너를 축복하는 자를 축복하리라. 󰊶 내가 너를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리라. 󰊷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의 일부가 이 아브람 언약의 말씀입니다. 이 언약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내가 하리라”(I will)입니다. 이 언약은 무조건적이며 하나님께만 의존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행하시고 현재에 계속하여 행하시며 미래에 행하실 모든 것입니다. 그 말씀은 결코 완전하게는 아직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이 언약에서 약속된 복은 세 가지 측면입니다. ❶ 국가적-이것이 팔레스틴의 언약(Palestinian Covenant)으로 확대됩니다(신 30:1-9). ❷ 개인적-이것이 다윗 언약(Davidic Covenant)으로 확대됩니다(삼하 7:10-17). ❸ 세계적-이것이 새 언약(New Covenant)으로 확대됩니다(렘 31:31-34).

아브라함으로부터 나오게 될 민족인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복종하는 민족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이 단지 이스라엘에게만 아니라 모든 민족들에게 베풀어집니다. 아브라함의 가계를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되십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사람들과 모든 민족이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질 수 있으며 헤아릴 수없는 은혜를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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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라의 후예(창세기11:27-30)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습니다.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하란은 아버지 데라보다 먼저 갈대아 우르에서 죽었습니다. “데라”(테라흐)는 나홀의 아들이며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의 아버지입니다. 그는 205세까지 살았습니다(11:26). 여호수아24:2에 의하면 데라는 우상숭배자였습니다. 난나르(Nannar, 셈어로 ‘죄’라는 의미)는 데라 시대에 우르와 하란에서 숭배한 주신(主神)이었습니다. 우르는 국제 무역로였습니다. 따라서 경제적으로 풍요했습니다. 그럼으로 해서 우상이 극심했습니다.. 이런 지역에서 지구를 구원할 자로 한 가족을 선택하였습니다. 성경은 한 가족의 이야기를 합니다. 그와 관련된 사람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데라의 이야기를 왜 꺼냅니까? 아브라함을 꺼내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구원을 이루어내는 족보를 만들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에서 이스라엘로 이어지는 족보는 우주적입니다. 그들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것입니다.

나홀은 그의 할아버지의 이름을 땄습니다(22절). 데라의 아들이며 아브람과 하란의 형제이며, 그의 아내는 하란의 딸 밀가로서 질녀와 결혼하였습니다(29절). 하란은 데라의 아들이며, 아브람과 나홀의 형제이고, 롯과 이스가와 밀가의 아버지입니다. 그는 그 아버지 데라보다 먼저 갈대아 우르에서 죽었습니다.

30절을 보면 사래가 잉태하지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즉 교회를 다니는데 복을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었는데 일이 잘 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것을 부각시켜 놓았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야기가 성경의 모든 책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임신하지 못하는 사라의 이야기는 오늘의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성공하기까지의 이야기를 성경은 세밀하게 기록하였습니다. 그들은 엎어지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로 영광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으므로. 아브라함과 사라는 자신들 마음대로 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꼭두각시 같은 삶은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 헌신한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위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지구를 구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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셈의 후예들(창세기11:10-26)

셈은 일백 세 곧 홍수 후 이 년에 아르박삿을 낳았습니다. 아르박삿을 낳은 후에 오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습니다. 따라서 셈은 600세까지 살았습니다. 아르박삿은 삼십 오세에 셀라를 낳았습니다. 셀라를 낳은 후에 사백 삼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습니다(438년). 셀라는 삼십 세에 에벨을 낳았습니다. 에벨을 낳은 후에 사백 삼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습니다(433). 에벨은 삼십 사세에 벨렉을 낳았습니다. 벨렉을 낳은 후에 사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습니다(464). 벨렉은 삼십 세에 르우를 낳았습니다. 르우를 낳은 후에 이백 구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습니다(320). 르우는 삼십 이 세에 스룩을 낳았습니다. 스룩을 낳은 후에 이백 칠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습니다(239). 스룩은 삼십 세에 나홀을 낳았습니다. 나홀을 낳은 후에 이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습니다(230). 나홀은 이십 구세에 데라를 낳았습니다. 데라를 낳은 후에 일백 십구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습니다(148). 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습니다. 셈의 후예(톨레도트)라는 것은 셈의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자손들과 그들과 관련 있는 사건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셈은 수명이 600 세입니다. 이것은 홍수 전 평균수명 912세와 비교하면 홍수 후에 인간 수명이 거의 2/3로 떨어졌습니다. 그런가하면 르우는 239세입니다. 여기에서 놀라운 사실이 입증되고 있습니다. 벨렉의 시대에 인간의 수명이 셈의 절반으로 떨어졌다는 점입니다. 인간의 언어 혼란이 벨렉의 시대에 발생했습니다(창10:25). 따라서 인간수명의 급락은 바벨탑으로 인하여 더 짧아졌습니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심각성을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의 형벌에 대래서 루이스 뻘콥은 “죄에 대한 형벌에 적용되는 보다 일반적인 구별은 자연적 형벌과 적극적 형벌이다. 죄의 자연적 결과인 형벌이 있는데 사람은 이 형벌을 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죄의 결과들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죄는 점점 인간을 옥죄고 있습니다. 인간의 복지와 생명을 자꾸만 단축하고 있습니다. 912세의 생명이 600 세로 줄었습니다. 그러다가 239세입니다. 점점 줄어서 지금은 100세 이하입니다. 죄 값이 인생을 얽어매고 있습니다. 우리 조상 아담이 우리들에게 남긴 것이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마음대로 살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969세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1000세가 아니라 영원한 천국의 삶을 살게 하려고 골고다에서 우리가 져야 할 짐을 지고 가신 것입니다. 채찍과 가시관, 그리고 창과 못에 찔려 돌아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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