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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혼잡(창세기11:6-9)
나라마다 말이 있습니다. 한국과 일본 중국은 가깝지만 언어가 다릅니다.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 영어, 라틴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 수없이 많습니다. 이들 나라들의 말을 알아들으려면 말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세계 통용어가 없습니다. 해외에 나가게 되면 반드시 말을 배워가지고 나가야 소통할 수 있습니다. 굉장히 불편한 일입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바벨탑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반란하는 모습을 보시려고 강림하셨습니다. 랍비 쉘로모(Schelomo)는 하나님께서 자비의 보좌에서 심판의 보좌로 내려오셨다고 주석했습니다. 인생들이란 문자적으로 “아담의 아들들”입니다. 따라서 죄성을 가진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강림하셨더라” 바벨사건의 경우에 하나님은 심판하시기 전에 인간의 악한 경영의 실상을 조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그들 모두는 한 백성이요 언어도 하나이다”입니다. 즉 구음과 언어가 하나이기 때문에 모든 일을 계획하는데 손쉽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니므롯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에 모두 일치단결했습니다. “경영하는(자암)”은 “꾀하다, 결심하다, 계획을 세우다”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주로 악한 나라에 대한 심판에서 그의 목적을 달성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혹은 하나님과 의인에 대항하여 음모를 꾸미는 악한 자에 대해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대로 놓아두면 계속해서 하나님을 대적할 것이고 뿐만 아니라 죄가 자꾸 확산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방관하시지 않았습니다. 죄의 확산을 막으셨습니다. 그 방법이 언어를 혼잡케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인생들의 언어구조가 혼잡되었습니다. 언어구조가 파괴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공통언어 구조를 파괴함으로 말미암아 동일한 언어를 말하는 자들끼리 함께 모여 일정한 지리적 구역으로 떠나갔습니다. 거기에서 그들은 서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사람들은 하나님이 원래 의도했던 대로 지면에 널리 흩어졌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누군가 다른 언어를 말하는 것을 들을 때마다 그것은, 인간의 반역에 대한 응대로서 하나님이 인류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인간은 지금까지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을 대적하려고 했습니다. 지금 우상을 섬기는 각종 종교들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쫓았습니다. 그리고 가인의 자손은 완전히 멸망시켰습니다. 그리고 홍수로 또 멸망을 시켰습니다. 이제는 언어의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 쉬지 않을 때 이러한 일은 계속해서 일어날 것입니다. 사람들은 선하지 않습니다. 선한 구석이 없습니다. 악한 구석은 많아도 선한 구석이라고는 조금도 없습니다. 죄를 기회가 오기가 무섭게 죄와 연합합니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죄의 역사입니다. 여간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합니다.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가지에 붙어있지 않으면 하루라도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이 죄를 아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 죄에서 떠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바벨탑의 목적(창세기11:1-5)
우리나라의 병폐는 삼국시대부터 서로 협력하지 않는 것입니다. 뚜렷하게 南北으로 갈라졌었으며, 東西로 갈라져 내려왔습니다. 우리들이 생각할 때에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하지 않고 고구려와 신라가 연합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나 하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까지 南北으로, 東西로 갈라져서 여간하여 마음이 합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협력이라는 것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굉장히 중요합니다. 모든 일에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죄를 짓는데 협력한다는 것입니다. 시날 땅에 멈춘 이들은 진흙(rm,jo)을 대신하여 역청(rm;je)을 사용하고 벽돌(hn:bel])로 돌(@b,a)을 대신하여 성(ry[i)과 대(lD;g]mi)를 쌓았습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이름 내기를 좋아합니다. 지구 가까운 달에 가서도 깃대를 꽂았고, 화성에 가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인간들은 꾸준히 계속 그러할 것입니다. 타락한 본성이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바벨탑의 목적은 창조주 하나님이 아닌 피조물들에게 제사 지내는 신전을 마련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벨론 폐허지에서 발굴한 바벨탑과 유사한 유형의 지구라트(zigurat)에 대한 연구는 바벨탑이 별들에 대한 예배에 전용되는 하나의 신전이었음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습니다. 신전들은 원형으로 된 것과 정사각형으로 된 것이 있는데 형태는 어떻든 모든 신전에는 대개 사람들이 꼭대기에 올라가서 해와 달과 별 같은 것에 제사 지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올라가는 통로나 계단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바벨탑의 목적은 사람들이 흩어지지 않도록 하는 집결지점으로서의 일반 종교 중심지를 마련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연설에서 한 문장(11:4)에서 ‘우리’라는 대명사가 4회나 등장합니다. 우리 이름을 내자는 이 말 속에서 우리는 인간의 오만한 야심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거대한 혁명을 일으켜 하나님의 통치를 떨쳐버리고 하나님 없이 단합과 평화를 이루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들의 단합의 상징은 바벨탑이었습니다.
아담이 에덴에서 무모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에덴에서 쫓겨났습니다. 현재까지 근접한 심판은 바벨탑심판입니다. 따라서 바벨을 떠나야만 새로운 삶이 있습니다. 아브람이 바벨론을 떠나 가나안에 온 것이나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제2의 출애굽도 같은 맥락입니다. 인간들은 예나 지금이나 자신의 이름을 내려고 하는 데는 대동소이합니다. 그래서 건축물을 크게 합니다. 그래서 한때 “동양에서 제일 큰”이란 말을 우리는 많이 들었습니다. 이러한 배후에는 반드시 사람의 이름을 내는데 있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있으면 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역시 이러한 마음을 배제해야 합니다. 인간의 죄성은 언제든지 토양만 있으면 발아하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일을 하는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바울의 고백대로 사나 죽으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야 합니다. 이것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우리 인생이 혼돈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 제대로 잘 되어 있으면 우리가 이 인생을 살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그러한 삶을 살았습니다. 따라서 날마다 죄의 탑을 쌓는 것이 아니라 영광의 탑을 쌓아야 할 것입니다.
인본주의(창세기11:3,4)
사람들은 죄를 짓는 데는 앞장을 섭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시날 땅에 머무른 이들은 곧바로 회의에 들어갔습니다. 회장은 니므롯이었습니다. 이 회의에 대해서 윌밍톤은 이렇게 말합니다. “역사상 최초의 초교파적 모임과 공식적인 종교의 시작을 알게 된다. 이 모든 일은 바벨론 시에서 발생했다.”
니므롯(d/rminI)은 “반역” 또는 “우리 반란을 일으킵시다”라는 뜻입니다. 니므롯은 함의 장자 구스의 아들입니다. 니므롯이 완력으로 천하를 장악한 후에 제일 먼저 한 일은 백성들의 기억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없애버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신앙의 자유를 선포하고 새로운 신화들을 만들어서 보급했습니다. 그는 사후의 화근을 없애기 위해서 셈 집안에 속하는 모든 성읍들을 점령했습니다. 니므롯의 배후에서 정권유지의 비책을 전수한 자는 그의 아내 세미라미스였습니다. 니므롯은 본래 사냥꾼이었습니다(창10:9). 무기를 만드는 기술자였기 때문에 지략에는 능하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니므롯에게 지략을 일러준 것은 세미라미스였습니다. 세미라미스는 니므롯에게 이원론을 가르쳐 주어서 새로운 신화의 기본 논리를 제공했습니다. 하나님을 없애기 위한 사악한 음녀였습니다. 세미라미스는 창세기의 1장1절을 없애버리기 위한 작업이었습니다.
세미라미스는 바로 이것을 하기 위해서 그녀와 가나안 세력이 먼저 시작한 것은 바로 니므롯의 신분격상이었습니다. 세미라미스는 니므롯의 신분을 그들의 조상인 노아보다 상위(上位)에 놓기 위하여 그를 홍수 이전의 인물인 가인의 환생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가인을 아담의 후손이라고 하면 그 위에서 다시 하나님과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세미라미스는 창세기의 이야기에 태양의 신을 삽입하고 그 빛의 신이 하와와 동침해서 낳은 아들이 가인이라는 거짓말을 꾸며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천사장이었던 사탄은 하나님과 대적 하는 빛의 신으로 화려한 변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 단계에서 세미라미스가 한 일은 바로 창조론을 없애고 ‘시작과 끝’을 없애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천지가 늘 그대로 있다 하는 윤회설입니다. 이것은 힌두교와 불교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세미라미스에 의해 영적인 진화론이 만들어졌는데 사람은 죽은 다음에도 계속해서 환생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에 의해 점점 더 훌륭한 존재로 진화되어 신이 되기까지 진화한다는 논리입니다. 처음과 끝을 부정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와 심판을 부인하고 하나님 자체를 없애버리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창출했습니다.
환생설은 백성들을 속이는 데 안성맞춤의 논리였습니다. 하나님을 떠나게 된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의 하나가 바로 '죽음' 이후의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을 섬길 때에는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하나님께로 간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장차 자신에게 닥쳐올 일이 심판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세미라미스의 환생설은 그러한 불안을 달래주고 대안을 제시해주는데 아주 적합했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이 세미라미스의 거짓말에 속고 있습니다. 인도의 인구 중 약 90%가 거지입니다. 그런데도 불평이 없습니다. 모두 힌두교의 윤회설 때문입니다. “전생에 죄가 많아서”입니다. 전생에 죄가 많으니 그렇게 사는 것도 어쩔 수 없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어려운 현실을 개선해보려고 노력하지도 않습니다. “내세에는 더 좋아질 테니까” 사탄이 거짓말로 속인 결과가 얼마나 참혹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인간을 그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사탄은 그들을 깔고 앉아서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미라미스의 영적인 진화론입니다.
니므롯이 죽자 세미라미스는 권력의 유지를 위해서 바로 이 환생설을 써먹었습니다. 그녀는 아이 하나를 낳아서 그 이름을 ‘담무스’라 했는데 이 담무스가 곧 니므롯의 환생이라고 거짓말 한 것입니다. 세미라미스는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그리스도를(창3:15)훼방하기 위해 미리 담무스를 니므롯의 환생인 신의 아들로 만들어놓고 그래서 담무스는 곧 신 그 자체라는 논리를 전개하면서 자신은 신의 어머니, 즉 '하늘 황후'의 자리에 앉았습니다(렘7:18). 세미라미스는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미리 혼란시키기 위해 담무스를 여름에 죽고 봄에 부활하는 신으로 만들어서. 담무스 월(태양력으로는 6-7월)의 둘째 날에 모든 여인들이 애곡하게 하였는데 어이없게도 예루살렘의 여인들이 이 애곡에 참가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샀습니다(겔8:14).
세미라미스는 이렇게 환생설을 이용하여 자신의 권좌를 유지하고 하나님에 관한 백성들의 기억을 지워버렸으며 장차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교란작전까지 성공함으로써 회심의 미소를 지었습니다. 새 시대의 지도자를 기다리는 루시퍼의 추종자들은 지금도 그들의 집회에서 모이고 헤어질 때에 언제 죽더라도 다시 환생하여 만나자고 다짐하는 ‘작별의 노래’를 합창하고 있습니다. 이 환생설은 세미라미스가 기대했던 대로 하나님을 내버린 현대인들에게 상당한 위로가 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심령과학이라는 것이 환생설을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최면을 걸어놓고 영매가 그 사람의 영에게 질문을 하면 자신은 15세기에 어느 나라 어디에 살던 누구라고 대답합니다.
세미라미스의 이 환생설은 고대의 가나안과 바벨론 그리고 애굽 등 모든 우상종교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그리스와 로마에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세미라미스는 ‘아스다롯과 담무스’로 페니키아에 전파되었습니다. 페니키아에서 소아시아 버가모로 전파되었습니다. 이집트에서 모자숭배의식은 ‘이시스와 호루스’로 변했습니다. 헬라에서 이것은 ‘아프로디테와 에로스’로 나타났습니다. 로마에서는 ‘비너스와 큐피드’로서 경배를 받았습니다.
세미라미스는 자신이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늘의 여황”으로 그녀만이 성수(聖水)의 뿌림으로 죄인들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시대 때 이 모자숭배는 로마인들의 생활에 영향을 미쳤는데 로마황제들은 황제 외에 폰티펙스 막시무스(Pontifex M aximus)라는 칭호를 받았는데 이는 “대사제장”이란 뜻입니다. 담무스를 섬기던 로마의 제사장들은 약간 변형하여 자신들의 종교를 버리지 않고 기독교에 들어왔습니다. 결국 모자숭배는 “마돈나와 어린아이”로 로마카톨릭이 되었습니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과학의 발전과 철학의 빈곤으로 그리스와 로마의 밀교의식이 빛을 잃게 되자 그들은 아직도 신비한 베일에 쌓여 있고 무언가 심오한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힌두교를 이용하였습니다. 힌두교도 본래는 바벨론의 밀교에서 파생되어 세미라미스의 환생설과 아스다롯의 에로티즘을 바탕으로 성장한 것입니다. 거기에 인도 특유의 잔혹한 고행 방법과 명상에서 얻어지는 신비한 황홀감등은 물질문명에 지친 서구인들을 매료하기엔 안성맞춤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종교의 다원화를 부르짖습니다. 종교간 화합을 부르짖습니다. 어리석은 일입니다. 기독교는 유일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습니다. 오직 구원은 하나님 한분뿐이십니다.
구음과 언어가 하나였던 인간들(창11:1-2)
성경은 세상이 구음과 언어가 하나라고 말했습니다. 구음(tj;=a, hp;c;)은 “한 입술”로 하나로 형성된 언어로서 발음이 한 결 같이 동일하다는 뜻입니다. 언어 !ydIj;a} !yrIb;d]W는 언어의 형태나 내용이 같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음과 언어가 하나라는 사실은 에덴동산에서 아담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셋으로부터 시작해서 노아에게까지 이어져온 말은 언어로서 어디를 가나 공통적인 언어였습니다.
지구상에는 수많은 언어와 구음이 있습니다. 약 2500-3000개의 언어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노아 이후에는 한 언어와 구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의사소통이 항상 원활했습니다. 언어가 막히지 않으면 하나의 문화일수밖에 없습니다. 생활의 모습이 같아집니다. 따라서 원래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생육하고 번성하기 위해 동방으로 옮겨갔습니다. 즉 그들이 거한 아라랏 지방에서 떠나 바벨론 평지로 나갔습니다. 옮기다가 시날평지를 만났습니다. 시날 땅은 유브라데스강과 티그리스강 사이에 메소포타미아 계곡 하류의 평원지대입니다. 이 지역은 수메르인들에 의하여 수메르와 아카드로 알려졌습니다. 후에는 바벨로니아로 알려졌습니다. 니므롯은 여기서부터 북쪽으로 앗수르까지 밀고 나아갔습니다(창 10:10). 패역한 인간이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반항하여 그 유명한 바벨탑을 세운 곳이 바로 이곳 시날이었습니다(창 11:2). 다니엘 1:2에 의하면 느부갓네살은 시날 땅으로 하나님의 전의 기구들을 옮겼습니다. 이사야 11:11에서는 천년 시대가 세워질 때 이스라엘 백성이 시날 땅에서부터 모여들 것이라고 합니다. 스가랴 5:11에서 악의 덩어리를 나타내는 에바 속에 던져진 여인(8절)은 그녀를 위하여 전이 세워질 시날 땅으로 옮겨집니다.
시날은 거짓된 종교의 장소입니다. 하나님과 그의 계시된 말씀을 거스리는 패역 위에 세워진 문화와 문명의 주요한 발달 중심지입니다. 제국적 압제의 요람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대적의 장소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악의 축도(화신)인 시날의 사악성이 있는 곳입니다. 시날땅에 건설된 바벨론의 명성은 바벨론의 벽에 관한 예레미야의 언급(렘 51:12, 58)을 포함하여 므로닥과(혹은) 벨을 이 도시의 신으로 섬기던 바벨론의 종교제도에 관한 성경의 자료들(사 13장; 미4:10)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 두신의 이름은 성서에 나타나 있습니다(사 79:11; 렘 50:2). 주후 1세기에 이르러서도 요한은 이 종교제도를 언급하여 바벨론을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고 칭하였습니다(계 17:5). 바벨론에는 현재 53개의 신전(神殿)과 1,300개의 제단이 부서진 채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죄는 끊임없이 우리 인간들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홍수에서 건짐 받은 지 얼마 아니 되어 죄에 또 노출이 되어 있습니다. 죄의 사악성은 그 끝이 없습니다. 이들이 시날 땅에서 계속 움직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시날 땅에 거했다는 것이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땅에 편만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도전을 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도전하고 거부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모두 죄 때문에 그렇습니다.
셈의 후손(창세기10:21-32)
셈은 셈민족, 곧 후에 이스라엘이 된 히브리 민족을 포함하여 모든 히브리 민족인 에벨 자손의 조상입니다. 이 히브리 민족은 B.C. 1500-1200년 동안 아람(시리아, 23절), 에돔, 암몬, 이스라엘 같은 나라들을 이루었습니다. 25절을 보면 벨렉 때에 세상이 나뉘었습니다. 벨렉의 시대에 언어 혼란이 발생하여 세상이 나누어진 것입니다. 11:10-16과 10:25을 비교하여 포함된 햇수를 합계하면 벨렉이 홍수 100년 후에 살았음을 산정할 수 있습니다. 벨렉의 이름은 인간 언어의 분열을 기념하기 위해 붙여졌으며 그 언어 혼잡은 그의 탄생 직전이나 그의 유년기 중에 발생했습니다.
셈은 장자지만 맨 나중에 나옵니다. 모세의 기록법입니다. 이스라엘과 약간 관계가 있는 족속 야벳을 기록하였고, 이스라엘과 첨예한 대립을 이루고 있는 함과 가나안 족을 기록한 다음에 본격적인 이스라엘에 대한 기록은 뒤에 남겨서 기록한 것입니다. 10장a와 25절의 주석에서 Calvin은 에벨에 대해서 언급하고 나누어짐에 대한 거룩한 분리를 모세가 언급했다는 것입니다. 즉 이후에 선택의 족속에 대해서 언급했다는 것입니다.
셈족의 지리적 배경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입니다. 에벨에게서 난 벨렉 (Peleg)과 욕단(Joktan)을 통하여 두 족속 아브라함족과 욕단계의 아라비아족이 나왔습니다. 엘람(Elam)은 파사만에서 카스피아 바다에까지 퍼져 있었던 엘리메안(Elymoeans)입니다. 앗수르(Asshur)는 티그리스의 동편 앗수르인들입니다. 아르박삿(Arphaxad)은 북 앗수르에 있는 아라라파키 티스의 주민들입니다. 룻(Lud)은 소아시아의 리더아인(Lydians)이며, 아람(Aram)은 수리아와 메소포타미아의 아람인(Aramoeans)의 조상입니다. 아람자손들, 우스(Uz)는 나홀족(22:21)과 호리족(36:28) 사이에서 생긴 이름이며, 바벨론 즉 아라비아 사막(Arabia deserta)에 있는 톨레미 (Ptolemy)의 아이시타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욥의 땅인 우스가 70인에 의해 아우스티스 마을이라고 불리워진다는 사실에 의합니다. 훌(Hul)에 대하여 델리취는 이것과 수리아의 옛 애굽 이름인 켈리(Cheli, Cheri)와 에메세네스 근처에 살았던 힐라테(Hylatoe)와 연결시켰습니다.게델(Cether)은 아라비안 전설에서 테무드(Themud)와 가디스(Chadis)족속들의 조상에게 붙여진 이름과 연관시켰습니다.
아르박삿의 후손들 가운데서 에벨의 장자가 벨렉이라 명칭을 얻었습니다. 그 당시에 땅의 인구는 바벨탑의 건설 때문에 나누어졌기 때문입니다(11:8). 그의 형제 욕단(Joktan)은 아라비아인들에 의해 칵탄(Kachtan)이라고 불렸으며 아라비아의 모든 초창기 족속들의 아버지로 간주되었습니다. 하살마웻(Hazarmaveth, 즉 죽음의 앞마당)은 인도양에 있는 남동 아라비아에 있는 아라비아 하드라마우트(Hadhramaut)이며, 그 이름 자우하리(Jauhari)는 기후의 불순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하도람(Hadoram)은 아라비아의 남쪽 해안에 있는 톨레미 6, 7의 아드라미타이, 플리니 6, 28의 아트라미테(Atramitoe)입니다. 우살(Uzal)은 마렙(Mareb) 남서쪽에 있는 예멘의 가장 중요한 성읍들 중의 하나입니다. 스바(Sheba)는 마리아바 왕조(Plin.) 수도인 사바(Saba)나 마렙(Mareb)을 가진 사베아인(Sabaerans)인입니다. 오빌(OPhir)은 아직까지 아라비아에서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하월라(Havilar)는 산나(Sanaa)와 멕카(Mecca)사이에 있는 지역인 에드리시(Edrisi)의 카우로우(Chaulaw)에 대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로써 야벳족속이 14, 함이 31, 셈이 25로써 70지족이 노아로부터 나왔습니다. 홍수 후에 이들이 열국백성이 나뉘었다고 함으로서 한 족속에 의해 인류가 파생되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진화론자들의 말을 믿는 사람들은 원숭이로 다시 돌아갈 것입니다.
카일·델리취,『카일·델리취구약성경주석/창세기1』, 186-188.
가나안의 후손(창10:15-20)
가나안은 별도로 모세가 기록했습니다. 가나안은 시돈, 헷, 여부스족속, 아모리족속, 기브가스족속, 히위족속, 알가족속, 신족속, 아르왓족속, 스말족속, 하맛족속(헷족속이 지배) 의 조상을 낳았습니다. 가나안의 지역은 시돈에서부터 그랄을 지나 가사까지이며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을 지나서 라사까지였습니다. 가나안을 이렇게 자세하게 묘사함은 이스라엘과 깊은 관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n"K]은 대개 수리아와 팔레스틴의 해변 지역 특히 가나안족이 거주하던땅 본래의 페니키아를 말합니다. 가나안 사람들의 독특한 직업이 무역이었기 때문에 가나안족이란 말은 때때로 ‘상인’의 의미로 사용되곤 하였습니다(겔 17:4의 ‘장사하는 땅’). 이 용어는 창 10:15, 16의 가나안에 포함된 ‘아모리 족속’에게도 중복되어 사용되었습니다. 민 13:17-21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위해 준비하지만 수 24:15, 18에서 그들이 정복한 그 땅은 ‘아모리 사람의 땅’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언제 가나안 족속이 팔레스틴에 나타났는가하는 것은 논쟁거리입니다. 가나안 족속과 아모리 족속 모두 확실히 BC 2000년경까지 수리아 팔레스틴에 정착하였으며 그 후 천 년 동안 그 땅은 가나안과 아모리 도시 국가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이 도시 국가들은 BC 1500년과 BC 1380년사이에는 이집트의 아시아족 왕국 권한에 속하였으나, BC 14세기에 북쪽지역이 히타이트족속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가나안은 처음부터 저주를 받은 족속입니다.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똑같이 한 배 속에서 구원을 받았지만 셈, 함, 야벳의 형제는 달랐습니다. 죄의 輕重이라고 할 수 없지만 가나안은 홍수 후부터 성경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모세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결국 가나안은 일찍 세상에 등장하지만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미우신바 되어 역사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죄란 이렇게도 무서운 것입니다. 같은 사람인데도 죄의 영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역사 속에 주변국들이나 국민들에게 많은 피해를 입힌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습니다. 니므롯을 비롯해서 바로들, 앗수르의 왕들, 바벨론의 왕들, 페르샤의 왕들, 알렉산더, 로마의 황제들, 교황들, 일본의 군국주의자들, 파시즘, 나치즘, 스탈린, 김일성 등 수없이 많습니다. 이들이 가나안 사람들입니다. 저주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오직 평생에 죄를 위해서 산 사람들 같았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미움을 받았습니다. 대심판 때 심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죄의 삯은 멸망입니다.
구음과 언어가 하나였던 인간들 (0) | 2012.05.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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셈의 후손 (0) | 2012.05.17 |
함의 후손 (0) | 2012.05.14 |
야벳의 후손 (0) | 2012.05.12 |
저쪽과 이쪽을 연결한 사람 (0) | 2012.05.09 |
함의 후손(창세기10:6-14)
고대 근동족보와 창세기의 족보를 비교해보면, 근동의 족보(일반사 족보)는 왕의 족보와 인물들이 갖는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 기록됩니다. 그러나 창세기의 족보는 족장의 공적을 기리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족보 마지막에는 저주 대상 인물들이 나타납니다. 여기 10장의 계보는 족속과 방언과 지방과 나라를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이 계보표가 인류전체의 계보를 빠짐없이 기록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과 관련이 있고, 이스라엘 주변에 알려진 민족이나 나라를 기록했을 것입니다. 즉 성경은 취사선택의 원칙에 의해서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함의 족보는 애굽과 남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중심으로 분포된 종족들로 구성됩니다. (1)구스(에디오피아). (2)미스라임(이집트). (3)붓(아프리카). (4)가나안(팔레스틴의 가나안족속; 창 10:19; 13:12-13; 18:20-21; 19:1-11; 왕상14:24). (5)니므롯(바벨론과 앗수르:창 10:8-10). (6)시돈(페니키아). (7)헷(힛타이트). (8)여부스(여부스 족속, 다윗 통치 이전의 예루살렘 거주자들:삼하 5:6-9). (9)가슬루힘(블레셋 족속: 창 10:14). (10)신 등입니다.
이스라엘은 야벳족속보다도 거리나 문화면에서 함족과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400년간 애굽에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계보는 읽기에 무미건조합니다. 그러나 놀라운 보석이 계보의 중간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10:25과 같은 것입니다. 창세기 10장이 만일 없었다면 우리는 인류의 단일성에 관한 신빙성의 확실한 기록이나 노아의 세 아들로부터 인류가 발전된 것에 관한 기록을 가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10장에 실린 톨레도트의 주요 목적은 노아의 세 자손 모두의 기원과 일반적 정착지를 제시해주는데 있습니다.
니므롯은 두 개의 대제국 앗수르와 바벨론의 창설자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제국들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알았을 것입니다. 이 정보는 고대의 기록들 중 기타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습니다. 나중에 이스라엘은 이 두 제국으로부터 위협을 받았습니다. B.C. 722년에 앗수르는 북쪽 10지파를 포로로 잡아갔으며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B. C. 606년, 베벨론은 유다를 잡아가 70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하게 하였습니다. 소선지나 대선지서 양자가 모두 예언에 있어서 이 두 제국의 일어남과 위협에 관계하고 있습니다. 앗수르와 바벨론은 자신들의 노아-셈 혈통적 기원을 잊고 자신들이 신들로부터 나왔다고 생각하면서 거짓신들을 섬겼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노아-셈 혈통적 기원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그 많은 고통을 안겨 준 이 강대국들의 진정한 기원도 알았습니다.
성경은 니므롯에 대해서 ‘특이한 사냥군’이라 하였습니다. 즉 ‘강한 사냥군’이라는 말입니다. 그에 대해서 성경은 상당히 할애하였습니다. 그는 네도시로 구성된 큰 도시를 건설하였습니다. 그는 왕국의 주요한 요새를 만들기 위하여 다른 세 장소를 니느웨와 연결하였다고 카일·델리취는 주석하였습니다. 니므롯은 벌써부터 하나님께 반역하였던 것입니다. 니므롯은 구스인이었으며, 강한 사냥꾼으로 사람도 가차 없이 죽이는 사람이었으며, 그는 야망과 야심을 가진 사람이었고, 바벨에서 시작하여 앗수르까지 나갔던 사람이었습니다. 이후로 강력하고 난폭한 사람을 니므롯 같다는 속담이 생겼습니다.
야벳의 후손(창세기10:1-5)
노아의 아들들의 후손들의 목록에는 다양성이 있습니다. 어떤 것은 둘째 세대로 계승되고, 어떤 것은 셋째 또는 넷째 세대로, 또 어떤 것은 더 먼 세대로 계승되고 있습니다. 또한 종족의 설립자의 이름이 있지만 어떤 곳에서는 종족만 나와 있습니다. 셈, 함, 야벳 순서로 기록해야 되는데 모세의 기록특징은 지리적인 이유 때문에 야벳을 먼저 기록했습니다. 즉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 적은 영향을 끼친 사람들부터 간략하게 족보를 기록했습니다.
10:1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홍수 후에 그들이 아들들을 낳았으니 2 야벳의 아들은 고멜과 마곡과 마대와 야완과 두발과 메섹과 디라스요 3 고멜의 아들은 아스그나스와 리밧과 도갈마요 4 야완의 아들은 엘리사와 달시스와 깃딤과 도다님이라 5 이들로부터 여러나라 백성으로 나뉘어서 각기 방언과 종족과 나라대로 바닷가의 땅에 머물렀더라
야벳의 자손들은 북쪽으로 가서 흑해와 카스피해에 정착하여 지금 유럽과 아시아에 거주하는 코카서스 사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야벳으로 부터 인도 유럽어족이라고 부르는 민족들이 나왔습니다. 이들은 직선상으로 동에서 서, 소아시아로부터 스페인에 걸쳐 아주 많이 정착하였으며 북방으로 확대해 나갔습니다. 야벳의 후손 및 그들이 이룬 민족은 (1)고멜(독일; 겔 38:6). (2)마곡, 두발, 메섹(러시아; 겔 38:1-3). (3)야완(그리스; 창 10:2). (4)마데(페르시아). (5)디라스(이태리). (6)도갈마(아르메니아). (7)달시스(스페인). (8)깃딤(키프로스:역주-터키 남쪽의 지중해에 있는 섬)입니다. 요세푸스는 야벳의 자손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노아의 아들 야벳에게 일곱 아들이 있었다(주: 고멜, 마곡, 마대, 야완, 두발, 메섹, 디라스). 그들은 타우루스와 아마누스 산맥으로부터 시작해서 아시아를 거쳐 타나이스 강까지, 그리고 유럽을 거쳐 카디즈까지 걸쳐서 전에 사람이 살지 않던 땅을 차지하고 자기들의 이름을 따서 국명을 지었다.
고멜은 헬라인들이 지금 갈라디아인(갈스)이라고 부르나 그 당시에는 고멜족이라고 부르던 나라를 이루었다. 마곡은 자기 이름을 본떠 마곡족이라고 불렀으나 헬라인들은 스구디아라고 부르는 나라를 이루었다. 마대에서 마대라는 이름이 나왔고 헬라인들은 메데라고 부르고 있다. 야완에게서는 이오니아와 모든 헬라인들이 나왔다. 두발은 지금 이베레스라고 부르는 두발을 이루었으며 메섹은 지금 갑바도기아라고 부르는 메섹을 이루었다. 디라스는 자기가 통치하는 나라를 디라스라고 불렀는데 헬라인들은 이 국명을 트라키아라고 고쳤다.
야벳은 노아의 세 아들 중에 제일적은 족속이지만 문명의 발달이 가장 우선한 민족들로 주로 유라시아(Eurasia) 지역에 속한 족속들입니다. 이들이 전 세계에 흩어져서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세상에 편만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의 사역은 가장 거룩하고 지혜롭고 강력하게 자신의 모든 피조물들과 그것들의 모든 행동을 보존하고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섭리란 보존과 통치를 포함합니다.’. 인간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지 않으시면 생육하고 번성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세상에 사람들이 편만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셈과 함과 야벳을 방주에 두심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이제는 노아의 아들들을 통해서 새로운 번성의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매사에 우리들을 섭리하십니다. 보존하십니다. 그리고 합력해서 선을 이루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도 달게 받아야 합니다.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반드시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