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새벽강해'에 해당되는 글 26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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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박의 재앙⑦(출애굽기9:27-35)
바로는 숨통이 막히면 살길을 찾았습니다. 그러다가 숨이 트이면 즉시 원상으로 돌아가는 심리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망할 때까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최대한 살려서 막판까지 갑니다. 지금까지의 이적을 보면 충분히 하나님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함에도 즉시 돌아섰습니다. 불과 우박이 떨어지니까 공포스러워 모세와 아론을 불렀던 그는, 그 요인이 없어지자 즉시 원래의 마음으로 돌아섰습니다. 27절을 보면 바로가 짐짓 회개한 것 같이 보입니다. “이번은 내가 범죄하였노라 ··· 나와 나의 백성은 악하도다” 이렇게 말했지만 바로의 그 마음이 오래가지 못하였습니다. 즉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27:3을 보면 가룟유다가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뉘우쳤습니다. 그리고 은 30을 도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갖다 주었습니다. “뉘우쳤다” 할 때 헬라사람들은 metamevllomai(메타멜로마이/마음을 바꾸다)와 metanoevw(메타노에오)를 사용하여 대조하였습니다. metamevllomai는 단순하게 감정적인 변화만을 나타날 때 사용하였습니다. 일시적인 감정의 변화입니다. 그러나 곧 자신의 원래 자리로 돌아오는 변화입니다. 가롯유다의 뉘우침이 그랬습니다. 바로가 이러한 뉘우침입니다. 일시적인 뉘우침이었습니다. 따라서 고통과 감정의 변화가 평안해지면 원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뉘우침은 신앙에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聖化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위와 같은 뉘우침은 오히려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 외엔 없습니다.
이에 비해서 “회개하다”metanoevw는 선택의 변화입니다. 역전입니다. 내가 가고 있는 지금까지의 길이 틀렸습니다. 그런데 사는 길이 따로 있습니다. 그러면 바로 지금까지의 길이 잘못되었음을 뉘우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롭게 길을 선택합니다. 똑같이 죄를 지었음에도 베드로가 가룟 유다와 다른 점이 선택의 변화입니다. 베드로는 심히 통곡했습니다. 그리고 후에 예수님을 따릅니다. 선택한 변화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뉘우치기는 했지만 스스로 목을 매어서 자살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생을 마감합니다. 요샛말로 사무라이 같은 정신입니다. 남자다운 것 같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비굴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베드로는 칭찬하고 가룟 유다는 영원히 저주받은 삶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진심으로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로 같은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임기응변으로 하는 행위는 회개가 아닙니다. 오직 살려고 연기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회개를 하여야하지만 진심으로 회개를 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회개가 상달이 되지 않습니다. 많은 회개라고 하는 것들이 바로의 회개와 같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진실로 회개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회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회개를 우리가 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살길입니다. 진실 된 회개는 말뿐이지 않습니다. 행동이 뒤따릅니다. 바로는 재앙이 거두어지자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우박의 재앙⑦(출애굽기9:22-2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하늘을 향하여 손을 들라”하셨습니다. 모세가 손을 들면 우박이 애굽의 전국에 내리게 되었습니다.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지팡이를 들매 여호와께서 雷聲을 보내셨습니다. 우박을 내리셨습니다. 불을 내려 땅에 달리게 하셨습니다. 우박을 애굽의 전국에 내리게 하셨습니다. 애굽은 식물들과 나무들을 꺾어놓았던 우박과 함께 하늘로부터 내려온 불덩이들 때문에 공포심이 가중되었습니다. 번개가 불공의 모양이 되어 불타는 횃불들처럼 내려왔습니다. 카일·델리취에 의하면 애굽의 남부와 중부에서는 뇌성이 흔하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나 12월과 4월 사이에는 자주 나타납니다. 그리고 때때로 우박이 동반되지만 심하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뇌성과 번개 그리고 우박을 전혀 들어보지 못한 것들은 아니었습니다. 가축이 들에 있을 때인 1월부터 4월 사이에 나타났습니다(Hengstenberg Egypt and the Books of Moses). 하지만 이 재앙의 초자연적 성격은 그 재앙이 모세에 의해 예고되었던 일입니다. 그리고 고센 땅이 제외되었습니다. 이전의 모든 재앙들보다도 더욱 강한 인상을 바로에게 주었습니다. 무시무시하게 광폭했던 우박 폭풍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바로는 모세와 아론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고백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은 내가 범죄하였노라 여호와는 의로우시고 나와 내 백성은 악하도다”(27절)라고 고백하므로 진실한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고백은 단지 무서운 뇌성과 번개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위엄으로 인해 야기된 공포의 결과였습니다. 그의 죄에 대한 진실 된 고백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웠습니다.
죄는 우리에게 사단과 귀신의 질서가 실재하며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죄 가운데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모든 것의 배후에는 보이지 않는 영적 세력이 있습니다. 사단은 이 세상의 신입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왕입니다.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입니다. 악의 顯示들 배후에는 마귀와 그의 하수인들이 있습니다. 바로를 조종하는 사단은 바로로 하여금 갈 때 까지 가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는 자꾸 자신의 마음을 완강케 하고 마음에 둑을 쌓습니다.
바로는 불순종의 한 가운데에 있습니다. 그로 인해서 그의 다스림을 받는 국민들만 엄청난 불이익을 당했습니다. 따라서 우리자신들의 불순종으로 인해 성화되는 길목에서 얼마든지 장애를 받고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길만이 복된 길입니다. 이 시대에도 바로 같은 인물이 많이 있습니다. 정치계에도, 경제계에도, 문화계에도 바로 같은 인물이 있습니다. 따라서 발전이 없습니다. 국격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내려갑니다. 한없이 내려갑니다. 바로 같은 인물이 있는 곳에는 발전이 없습니다.
우박의 재앙⑦(출애굽기9:22-2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하늘을 향하여 손을 들라”하셨습니다. 모세가 손을 들면 우박이 애굽의 전국에 내리게 되었습니다.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지팡이를 들매 여호와께서 雷聲을 보내셨습니다. 우박을 내리셨습니다. 불을 내려 땅에 달리게 하셨습니다. 우박을 애굽의 전국에 내리게 하셨습니다. 애굽은 식물들과 나무들을 꺾어놓았던 우박과 함께 하늘로부터 내려온 불덩이들 때문에 공포심이 가중되었습니다. 번개가 불공의 모양이 되어 불타는 횃불들처럼 내려왔습니다. 카일·델리취에 의하면 애굽의 남부와 중부에서는 뇌성이 흔하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나 12월과 4월 사이에는 자주 나타납니다. 그리고 때때로 우박이 동반되지만 심하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뇌성과 번개 그리고 우박을 전혀 들어보지 못한 것들은 아니었습니다. 가축이 들에 있을 때인 1월부터 4월 사이에 나타났습니다(Hengstenberg Egypt and the Books of Moses). 하지만 이 재앙의 초자연적 성격은 그 재앙이 모세에 의해 예고되었던 일입니다. 그리고 고센 땅이 제외되었습니다. 이전의 모든 재앙들보다도 더욱 강한 인상을 바로에게 주었습니다. 무시무시하게 광폭했던 우박 폭풍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바로는 모세와 아론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고백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은 내가 범죄하였노라 여호와는 의로우시고 나와 내 백성은 악하도다”(27절)라고 고백하므로 진실한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고백은 단지 무서운 뇌성과 번개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위엄으로 인해 야기된 공포의 결과였습니다. 그의 죄에 대한 진실 된 고백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웠습니다.
죄는 우리에게 사단과 귀신의 질서가 실재하며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죄 가운데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모든 것의 배후에는 보이지 않는 영적 세력이 있습니다. 사단은 이 세상의 신입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왕입니다.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입니다. 악의 顯示들 배후에는 마귀와 그의 하수인들이 있습니다. 바로를 조종하는 사단은 바로로 하여금 갈 때 까지 가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는 자꾸 자신의 마음을 완강케 하고 마음에 둑을 쌓습니다.
바로는 불순종의 한 가운데에 있습니다. 그로 인해서 그의 다스림을 받는 국민들만 엄청난 불이익을 당했습니다. 따라서 우리자신들의 불순종으로 인해 성화되는 길목에서 얼마든지 장애를 받고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길만이 복된 길입니다. 이 시대에도 바로 같은 인물이 많이 있습니다. 정치계에도, 경제계에도, 문화계에도 바로 같은 인물이 있습니다. 따라서 발전이 없습니다. 국격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내려갑니다. 한없이 내려갑니다. 바로 같은 인물이 있는 곳에는 발전이 없습니다.
우박의 재앙⑦(출애굽기 9:13-2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바로 앞에 서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하셨습니다.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하셨습니다(13절). 이번의 재앙은 바로의 마음에 네 신하와 온 백성에게 내려서 온 천하에 나와 같은 자가 없음을 알게 하리라 하셨습니다(14절). 여호와께서 온역으로 애굽을 쳤다하면 세상에서 애굽이 끊어졌을 것이나 바로를 세워서 살게 함은 하나님의 능력을 온 천하에 알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16절). 네가 여전히 자고해서(스스로 높여서) 그들을 보내지 않으냐? 좋다. 그러면 내일 이맘 때 애굽에 중한 우박을 내리는데 애굽의 개국이래로 이러한 우박은 없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미리 경고하셨습니다. 사람이나 생축은 들에 있으면 모두 죽을 것이니 반드시 집에 들이라 하셨습니다. 이에 바로의 신하 중에 그 말씀대로 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말씀대로 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17-21).
하나님께서 바로를 멸망시키지 않으신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바로 자신이 여호와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27절, 10:16,17, 12:31). 또 하나는 여호와의 이름이 온 땅에 선포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즉시 바로를 제거할 수 있지만, 바로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에 대한 소식은 삽시간에 주변의 나라로 퍼졌습니다(15:14). 애굽 뿐만 아니라 중동의 모든 나라에 퍼졌습니다. 후에는 그리이스, 로마에까지 퍼졌습니다(카일·델리취).
“자고하고”란 “자신을 둑(댐)으로 세우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바로는 자신의 마음을 둑으로 튼튼하게 막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셨습니다. “내일 이맘때”입니다. 생각할 시간을 주신 것은 은혜였습니다. 그리고 들에 사람이 있거나 짐승을 방치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비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얼마든지 재앙에서 피할 시간과 은혜는 충분히 베풀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위에 짓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은 不敬입니다. 창조주께서 말씀하신 것을 믿지 않는 것은 불이익을 당하게 되어있습니다. 더구나 아브라함의 자손을 볼모로 잡고 있는 것은 더욱 위험한 일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것은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이미 이루어진 경고가 있습니다. 앞으로 이루어질 경고가 있습니다.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경고가 있습니다. 바로의 어떤 신하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은혜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의 雨傘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독종의 재앙⑥(출애굽기9:8-12)
여호와께서 또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풀무의 재 두 웅큼을 가지고 바로 앞에 서서 하늘을 향해 날리라 하셨습니다. 그것이 독종이 되어서 사람과 짐승에게 독종을 발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모세가 그대로 행하였습니다. 술객들도 독종으로 인하여 바로 앞에 서지 못하였습니다. 독종은 애굽 사람들에게만 퍼졌습니다. 그러나 독종도 바로의 마음을 아직 돌리지는 못했습니다. “독종”(리쉬힌 아바부오트)은 살에 물집을 생기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사람과 짐승을 쳤습니다. 독종은 심한 염증으로 시작하여, 나중에는 농양 또는 종기로 발전했습니다(레13:18). 이 병은 주홍색 피부에 수많은 작은 종기들을 발생시켰습니다. 이것들은 잠간 사이에 조그맣고 둥글며 빽빽하게 밀집된 물집들로 변했다고 주석했습니다. 빌하르츠(Bilharz)박사에 의하면 여름에 나타나, 주로 나일강 범람이 끝날 즈음에 나타나는 땀띠인데 피부에 따갑고 쑤시는 감각을 일으킨다 하였습니다. 심한 경련을 일으키기도 하였고 따가운 통증을 동반하였습니다. 이 병은 자연재해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일으킨 재앙이었습니다.
용광로, 풀무의 재와 매연들은 애굽의 번영을 나타냈습니다. 바로와 그의 백성들이 누렸던 그들의 번영, 부귀 및 풍성한 땅의 소산들은 비옥한 나일강과 기름진 땅의 덕분이었습니다. 또한 바로들이 그들 왕권의 능력과 영광을 영원불멸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세웠던 그들의 장엄한 성읍과 피라밋들은 모두가 이 풀무들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처음 세 재앙에서는 그의 종 모세와 아론을 통해서 그 땅의 자연 자원들을 악의 자원으로 변화시켰습니다. 그러나 여섯째 재앙은 교만한 왕의 코를 꺾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장엄한 건축물들을 파멸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증명하였습니다. 바로는 그런 건축물들을 세우기 위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힘을 이용했습니다. 애굽의 과중한 고역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애굽은 마치 쇠풀무와 같았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신음하게 만들었던 풀무의 매연과 재로 독종을 일으켰습니다.
우리는 애굽의 재앙을 보면서 거듭 느끼는 것은 하나님이 이 땅의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권세도 그 앞에서 행세를 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권세를 누가 능가하겠습니까? 아무도 그 능력 앞에서 불순종할 수 없습니다. 마귀도, 세상도, 권세도 그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 앞에서 대적합니다. 그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그것이 죽는 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모르면 죽는 길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細微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천둥 같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복된 길입니다.
심한 악질⑤(출애굽기9:1-7)
여호와께서 또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한 단계씩 업그레이드 된 재앙임에도 불구하고 바로는 여전히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바로에게 모세가 또 나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역시 요구사항은 “내 백성을 보내라”였습니다. 만일에 억지로 잡아두고 보내지 않으면 가축에게 심한 악질이 있을 것이라 전하라 하였습니다. 심한 악질(데베르)은 역병입니다. 이 병은 하나님께서 심판으로 애굽에 내린 재앙으로서 생축에게만 발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전체를 죽이지 않으시고 들에 있는 생축으로 제한하셨습니다. 또한 이스라엘과 애굽과 구별하셨습니다. 바로가 이것을 확인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바로의 마음은 요지부동이었습니다.
사람에겐 자유행위(Free Agency)가 있습니다. 사람은 그가 창조되고 의존된 존재의 영역 안에서 특정한 행위들을 행할 능력이 부여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행위는 가공의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포괄하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행동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그래서 사람의 행위는 비난받거나 인정받을 가치가 있습니다. 의무의 법인 도덕법이 사람에게 적용됩니다. 사람의 행위는 當爲性이 있습니다. 또한 禁止의 영역 안에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행위는 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하나님의 형상에 합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사람의 행위가 따라야 할 방식입니다. 행위를 규정하거나 금지하는 법은 하나님의 속성을 묘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그에 합치하는 행동의 규제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바로는 갈수록 자신의 마음을 무겁게 하였습니다. 갈 때까지 가보자는 것입니다. 눈으로 직접 하나님의 재앙을 보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한계가 여기에 있습니다.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합니다. 말씀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붙습니다. 바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신이 당시에 중동에서 왕자라고 생각했겠지만, 이젠 하나님께 무조건 항복해야 합니다.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냥 순수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야 하는데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바로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빨리 바로의 병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생활이 나아지고 영적인 상승세를 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자신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자신의 말씀을 지지하는 사람에게 은혜를 더하십니다.
파리 재앙④(출애굽기8:25-32)
25절을 보면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 땅에서 희생을 드리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바로의 청을 거절하였습니다. 여호와께 짐승을 잡아 희생을 드리는 과정에서 애굽 사람들의 목전에서 희생(제바흐)을 드리면 애굽 사람들에 의하여 죽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집트 사람들은 생축을 신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애굽인들이 거룩하게 생각하는 짐승들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제물로 드렸습니다. 더구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제물로 드린 짐승들 중에서 애굽인들이 신성하게 여긴 것은 소였습니다. 거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애굽인들이 지키는 엄격한 규정들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사실상 애굽인들의 제사 예식들을 전혀 준수하지 않았습니다. 애굽인들은 이것을 그들의 종교와 그들의 신들에 대한 모욕으로 생각했습니다. “규정된 제사 방법을 어기는 것이 그들 자신과 그들의 신들에 대한 멸시의 표현으로 생각되었을 것이다”(Calvin). 그리고 이것이 그들의 분노를 일으켜 그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돌로 치려고 하였을 것입니다.
모세는 사흘 길쯤 광야로 떠나서 여호와께 희생을 드린다고 바로에게 말했습니다. 바로는 모세의 제안을 수락했습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수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너무 멀리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다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를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을 괴롭히는 파리들이 모두 달아났습니다. 그러나 바로가 이때에도 마음을 완강케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나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바로는 스스로 그 마음을 완강케 하였습니다. 원문에는 “그 마음을 스스로 무겁게 하였다”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臨在를 모를 때는 굳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면 달라집니다. 죽음의 공포에 의해 전율하고 경악하여 비참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압도되어 혼비백산이 됩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위엄과 자신들을 비교하기 전에는 자신의 비천함을 자각하지 못합니다.
인간들은 오만함을 죽여야 합니다. 교만함을 꺾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꺾어버립니다. 많은 우리의 일들이 자신의 교만이나 오만에서 멈추어버리고 앞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숨을 쉴만하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우선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주변정리부터 합니다. 이럴 때 하나님 앞에 겸비하면 좋은데 그러지를 못합니다. 한번 잘못된 것을 알아야 하는데, 인간의 고집은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만 나갑니다. 자신이 정한 어떠한 위치에 올라가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따름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할 바입니다. 신자고 불신자고 간에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따라서 재앙을 받고 안 받고는 본인들에게 달린 것입니다.
파리 재앙④(출애굽기8:20-24)
첫 번째 그룹의 세 재앙은 나일강이 피로 변한 것, 개구리 재앙, 각다귀 재앙이었습니다. 두 번째 그룹의 세 재앙들을 애굽의 술객들은 그들이 모방할 수 없는 이적 가운데서 하나님의 손가락, 즉 어떤 하나님의 활동을 보았습니다. 아마도 애굽 신들 중 어느 하나일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해방을 요구했던 히브리인의 하나님 여호와의 손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뒤이어 일어난 재앙들에서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애굽인들이 명확히 구별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재앙들로부터 면제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누구에게나 그런 재앙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부터 임하는 것임을 증명하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이 점을 좀 더 분명히 하기 위해서, 모세는 바로에게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재앙들을 예고하였습니다. 그 재앙들은 모세 자신이나 아론의 중개를 통해 일어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해진 때에 여호와께서 보내셨습니다.
모세가 이미 바로에게 첫 번째 재앙처럼 아침에 그리고 물가에서 예고했습니다. 네 번째 재앙은 “독한 해충” 파리 떼를 보냈습니다. 아로브는 문자적으로는 “무리”로서 심마커스(Symmachus)는 모든 종류의 파리들의 혼합물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이 해충들은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합니다(Hengsterlberg). 이 해충들은 수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일단 화가 나면 사람의 몸에, 특히 눈까풀 끝에 붙어서 무서운 재앙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떼거리들이 애굽 사람의 집집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애굽 사람들)이 거하는 땅에 가득하였습니다. 더구나 이 재앙은 이스라엘이 거하는 고센지방과 애굽사람들과 구별을 두었습니다. 애굽 사람들이 거하는 곳에는 있었는데 이스라엘에는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가 이것을 보고 하나님의 이적임을 알아야 했습니다. 모세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알아야 했습니다. 이 재앙으로 인하여 그 땅이 몹시 피해를 받았습니다. 파리 떼들이 사람들을 몹시 괴롭혔습니다. 그들을 삼켰습니다(시78:45). 쏘아서 붓게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의 모양을 흉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나무들에 알을 낳음으로서 나무들을 죽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재앙을 내리시면서 바로에게 요구하는 것은 내 백성을 놓으라는 것입니다(20절).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히는 사람들을 방관하시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응징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전능의 주 하나님께서 바로보다 이스라엘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바로는 이스라엘을 내놓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언약의 자손들입니다. 언약의 자손들이기 때문에 누구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구상에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습니다. 그의 후손들은 당연히 선택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아브라함의 언약이 살아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