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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와 아론의 족보(출애굽기6:14-27)
성경은 이스라엘이 애굽을 출발하기 전 모세와 아론이 족보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족보를 기록하는 목적은 언약관계의 연속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 족보는 출애굽사건과 관련하여 족장들과 맺은 언약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 가운데서 모세와 아론의 조상인 레위의 족보적 위치를 보여주기 위하여, 족보는 야곱의 첫째 아들이었던 르우벤부터 시작합니다. 다음으로 시므온의 아들들이 나오고 레위가 나옵니다. 레위의 세 아들의 이름이 나타날 뿐 아니라 그가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도 언급되었습니다(16절). 그의 아들 고핫과 그의 후손 아므람의 연수도 언급되었는데 그들이 모세와 아론의 지파 조상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20절에서 모세의 아버지로 언급된 아므람이 고핫의 아들이었던 아므람(18절)과 동일인물은 아닙니다. 본문의 족보와 민수기3:27,28을 비교하면 알 수 있습니다.
레위. 고핫, 아므람, 모세 등 네 세대만을 열거한 것은 네 번째 代가 가나안에 돌아갈 것이라고 설명했던 창세기15:16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아므람의 아내 “요게벳”이 2:1과 민수기26:59에서는 일반적인 용어로 레위의 딸(레위 족속의 여자)이라고만 언급되었는데 여기서는 아므람의 “고모”(아버지의 누이)라고 불리우고 있습니다. 이 결혼은 모세법에서는 금지된 결혼이었으나 율법이 부여되기 이전에는 허용되었습니다.
21절 이하에서는 아론의 아들들이 언급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23절) 아므람의 형제들 중 두 사람의 이름 즉 이스할과 웃시엘 (21,22절), 그리고 아론의 아들이었던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도 언급되고 있는데 그것은 이 족보의 의도가 주요 제사장의 가족들의 후손을 밝히는 것이기 때문인데 그 중에서도 특히 아론과 엘르아살의 아내들이 소개됨으로써 그 두 사람이 특히 눈에 뜨이게 부각되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모세의 아들들은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는데 그것은 모세의 위엄이 그 자신에게만 한정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출애굽하기 전에 마치 전열을 다듬는 것과 같습니다. 아직 이들은 몰랐지만 하나님의 계획속에는 이미 출애굽의 여정이 세밀하게 기록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잘 모르지만 하나님의 계획속에는 우리들의 미래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항상 우리는 그분 곁에 있어야 합니다. 어떠한 환경이라도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어떠한 상황이라도 하나님만 의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모든 것을 알고계시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과 관계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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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하시는 주체(출애굽기6:13)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과 애굽의 바로왕에게 명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기필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셨습니다(13절). 13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십니다. 즉 출애굽 사건의 주권자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모세나 아론, 바로가 모르는 것이 있는데 사람을 지으신 이가 여호와라는 것입니다. 바로가 어마어마한 권세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들을 지으신 이가 여호와이십니다. 아담이 죄를 지어서 노아까지 이르러 홍수로 멸하셨지만 남은 자를 남겨놓으셔서 셈과 함과 야벳으로부터 증가된 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창세기10:1-6을 보면 홍수 후에 인간의 증가에 대해서 나옵니다. “1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홍수 후에 그들이 아들들을 낳았으니 2야벳의 아들은 고멜과 마곡과 마대와 야완과 두발과 메섹과 디라스요 3고멜의 아들은 아스그나스와 리밧과 도갈마요 4야완의 아들은 엘리사와 달시스와 깃딤과 도다님이라 5이들로부터 여러 나라 백성으로 나뉘어서 각기 방언과 종족과 나라대로 바닷가의 땅에 머물렀더라 6함의 아들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이요” 여기에서 미스라임이 나오는데 이들이 바로 애굽의 조상들입니다.
모세와 아론은 여호와의 명령을 받아서 출애굽을 시키는 使臣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불러서 사신의 의무를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사신이 된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면 됩니다. 大使의 직무는 본국의 訓令을 받아서 그대로 그 나라에 전하는 것입니다. 大使는 자신의 생각을 그 나라에 전하지 않습니다. 본국의 訓令대로 전합니다. 모세와 아론은 여호와의 명령을 받아서 받은 대로만 전하면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출애굽의 대상은 이스라엘입니다. 이들은 반드시 구원을 받아야 할 대상들입니다. 이들을 그대로 두면 애굽의 학정에 시달릴 뿐입니다. 이들의 사정은 오직 하나님께서만 아십니다. 성경이 없으면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가장 잘 아시는 분입니다. 오늘의 인간들도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이미 심판의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수천 년을 세상의 학정에 시달려 왔습니다. 인간들은 세상으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바로가 나옵니다. 바로는 자기가 애굽의 주인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입니다. 애굽의 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모세와 아론이 와서 하나님의 명령을 전할 때 一笑에 붙였습니다. 할일이 없으니까 공연히 와서 쓸데없는 일을 저지르려고 한다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로가 진정 그 땅의 주인이 자신이 아니고 여호와라는 것을 철저하게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으로 하여금 바로에게서 이스라엘을 찾겠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찾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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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변명/저는 할 수 없습니다(출애굽기6:10-12)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바로의 왕궁에 들어가서 바로에게 내 백성을 애굽 땅에서 내어보내라”고 전달하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여호와께 대답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도 나를 듣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가 과연 내 말을 듣겠습니까? 나는 입이 둔한 사람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모세가 하나님의 엄숙한 언약의 말씀을 들려주었을 때 이스라엘이 그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j"Wr rx,Qomi “숨이 짧아서”(9절;마음의 상함과)인데 사람으로 하여금 정상적으로 호흡하지 못하게 만드는 고민입니다. 즉 바로의 혹독한 명령이 오히려 그들을 힘들게 했다는 것입니다. 내적인 심한 압력을 그들이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초기신앙은 그들의 학대가 증가함에 따라 여호와를 믿는 것보다 현실이 더 가까워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했습니다. 현실의 상태가 어려워짐에 따라 그들이 철저하게 불신앙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이러한 결과가 모세로 하여금 낙담하게 하였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자신의 입술이 둔하다고 했습니다(12절). “입술이 할례를 받지 못했다”는 문자적인 말입니다. 할례제도는 창세기17장에서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맺은 언약의 표시로서 하나님께서 노아와 맺은 언약에서의 무지개와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할례제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인정함을 받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아직도 모세는 자신이 도저히 이 미션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을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도 모세는 헤매고 있다는 뜻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는 성경의 궁극성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히브리말로 기록된 구약 성서 ··· 헬라말로 기록된 신약 성서는 하나님의 감동을 직접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단독적인 보호와 섭리로써 세세토록 순결하게 보존되어 왔으므로 신뢰할 만한 것이다(마 5:18). 그러므로 그것은 종교에 관한 모든 논쟁에 있어서 교회가 최종적으로 의거할 수 있는 것이다(사 8:20; 행 I5:15; 요 5:39, 46)” “최고 심판자는 성경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 이외에는 아무도 있을 수 없다(마 22:29, 31; 엡 2:20: 행 28:25). 이로 말미암아 모든 종교적 논쟁은 결정되어야 하고, 교회 회의의 모든 명령과 고대 학자들의 의견과 인간론과 개인의 정신 문제도 이 심판자의 감독을 받아야 하며, 그의 판결에 순응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능력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말씀대로 하면 됩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세우신 계획이 있습니다. 그대로 움직이면 일이 되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인 우리들은 이럴 때에 곧 환경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두려워하게 됩니다. 이러한 것을 우리는 빨리 없애야 합니다. 그리고 신앙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말씀대로 이루어집니다. 기도하고, 믿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내 백성을 삼고(출애굽기6:6-9.9)
7절을 보면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의 계약체결 때문에 이스라엘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계약과 상치(相馳)되는 이스라엘의 속박상태 때문에 이스라엘을 그 고통으로부터 구원해 내셔서 그들을 그의 나라 백성으로 만드시려는 것입니다. 이런 확신을 하나님께서는 “여호와”라는 그의 이름 가운데 표현된 그의 본성을 나타내심으로써 밝히셨습니다. 거기에는 세 가지의 독특한 요소들이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을 애굽의 속박으로부터 구원한 사실인데, 이스라엘을 애굽인들의 무거운 짐 밑에서 끌어냈다는 것, 이스라엘을 그들의 속박으로부터 구원했다는 것, 또한 편 팔과 큰 심판으로 그들을 구속했다는 표현들입니다. 하나님은 족장들과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이 약속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기 위해 주권적으로 모세 시대에 역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셨습니다. 계약에 속한 약속을 말씀하셨습니다(창12:1). 그러나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공식적으로 계약을 세운 것은 그 후의 일이었습니다(창15:18). 다윗의 경우 계약 관계가 수립되는 공식적인 인가가 이루어지기 훨씬 전에, 하나님은 그를 이스라엘의 기름 부은 왕으로 지명하셨습니다(삼상16:12;삼하7:1).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공중사역은 새 계약에 관한 약속이 실현된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음으로써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신다”는 것은 임마누엘 원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아버지가 되시기 원하셨습니다. 자기백성을 삼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의도는 사랑의 발로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굳이 죄인들을 구원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랑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셨습니다. 힘없는 이스라엘을 택하셨습니다. 그들을 구원하시려고.
오늘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자기백성을 삼으시려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정말 힘이 없고 연약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만일에 힘의 원리대로 삼으신다면 우리는 자격이 없습니다. 동물같이 자기새끼가 약하고 힘이 없으면 과감히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힘의 원리가 아니고 사랑의 원리를 적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에서 빼어내신 분이십니다. 그의 나라로 우리를 위해서 빼어내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영원히 어두운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원리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아무리 이 세상이 우리를 얽어매려고 하여도, 사단이 우리를 넘어지게 하려 하여도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한 절대로 세상과 세상의 힘이 우리를 어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손안에 세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호와로라(출애굽기6:2-5)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여호와이다” 여호와라는 말씀에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능동적으로 스스로 계시는 완전자라는 뜻입니다. 또 하나는 선택한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을 변함없이 성취하시는 이스라엘의 유일무이한 구속자라는 뜻입니다(2절). 모세와 아론이 맨 처음 바로를 방문한 것은 탐색이었습니다. 즉 바로가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입니다. 여호와의 목적을 위한 바로의 태도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바로를 치기 위한 사전의 탐색전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심판의 필요함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제 너는 내가 바로에게 행할 일들을 보게 되리라”는 말들에서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심판이 시작되기 전에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2절), 그리고 그를 통해서 백성들에게 이제부터는 그가 자기 자신을 족장들에게 계시했던 것보다는 더 영광스런 방법으로, 즉 “여호와”로 그들에게 나타내 보이실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는 하나님이 오직 “엘 샤다이”(전능하신 하나님)로만 나타났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다”는 말이 족장들은 여호와란 이름을 전혀 모르고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본성을 실제로 표현해주는 그 이름이 의미 있게 사용된 사실입니다. 또한 하나님 자신이 여기서와 창17:1에서 주신 설명들간의 명백한 연관성으로부터 알 수 있습니다. 창15장에 설명되어 있는 바와 같이 계약체결이 계약의 표적인 할례를 제정하는 일과 이삭의 탄생을 허락한 약속으로 시작되었을 때,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는 엘 샤다이, 곧 전능의 하나님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때로부터 아브람과 그의 아내에게는 초자연적인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삭이 초자연적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그의 후손을 보존하셨습니다. 인도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셔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전능자로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빼내시기 위하여 수천 년 전에 계획하셨습니다. 400년 전에는 발표를 하셨습니다. 이제 그것을 시행하시는 것입니다. 400년 전의 언약을 기억하셨습니다. 애굽의 처절한 박해 속에서 학대당하는 그들의 신음을 들으셨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신다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모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하나님과 우리사이는 믿음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신실하게 대하시고 우리는 그를 믿는 것입니다. 이 관계만 제대로 이루어지면 살만합니다.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기 때문에 이것같이 믿을만한 일들은 없습니다. 이래서 우리는 어떠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오직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는 이미 우리를 위해서 창세전에 계획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애에 그것을 이루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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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하신다(출애굽기6:1)
여호와께서는 모세의 불평어린 질의에 대답하는 가운데서 그에게 강한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강한 손 때문에 바로가 이스라엘을 보내게 될 것이라 하셨습니다. “내가 아노니 강한 손으로 치기 전에는 애굽 왕이 너희의 가기를 허락지 아니하다가”(출3:19) 하나님의 강한 손의 맛을 봐야 비로소 이스라엘을 내놓는다는 것입니다. 모세는“어찌하여 당신께서는 이 백성으로 하여금 그토록 학대당하게 하시나이까”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 대답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그가 당했던 경험으로부터 얻어냈습니다.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요13:7)한 말씀이 여기에 글자 그대로 잘 적용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으로부터 기적적으로 구원받아 광야를 통해 영광스러운 행진을 했습니다. 그 도중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권능과 자비에 대한 많은 증거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계속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해 반역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만나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애굽에서 먹던 생선, 부추 및 양파 등을 먹기 원했었습니다(민11장). 그들의 정신 상태가 이 정도였습니다. 아마도 그들이 애굽에서 더욱 가중된 학대를 받지 않았다면, 애굽을 떠나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여호와와 계약을 맺으려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사람들은 되도록 여호와와의 계약을 맺지 않으려 합니다. 간섭을 받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웬만한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서는 감동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아셨습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그 답은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강한(하자크)는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 쓰여질 때는 전능하심으로 나옵니다.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모자랄 때 예수님께서 베푸신 기적을 보면 희한합니다. 종들은 항아리에 물을 채우기만 했습니다. “물을 채우라”는 말에 그대로 했습니다. 물이 항아리에 가득차자 예수님은 “떠서 연회장에게 주라”하셨습니다. 종들은 그대로 했습니다. 종이 이렇게 할 때는 목숨을 내놓아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물을 떠다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물로 된 포도주의 맛을 보고는 그 집을 대단히 칭찬했습니다. 최고급 포도주를 내놓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은 강한 손입니다. 그 손이 임하는대로 성도들에게는 복이 됩니다. 그러나 원수에게는 심판의 손입니다. 따라서 심판의 손이 닿지 않으려면 아예 미리 항복해야 합니다. 미리 항복하지 않으면 심판의 손길이 그를 파멸시킵니다. 그러므로 바로처럼 우리는 어리석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이유를 달지 않아야 합니다. 그대로 해야 합니다. 우주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이유를 달 資格이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해룰 주관하시고 별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무슨 이유를 달겠습니까? 오직 우리는 그대로 행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힘(출애굽기5:22,23)
모세가 자기 장막으로 돌아와서 하나님께 고하였습니다. 그의 기도내용은 “어찌하여”입니다. “어찌하여 이 백성으로 학대를 당하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바로에게 나를 보내셨습니까? 어찌하여 이 백성으로 학대를 더 당하게 하십니까? 여호와께서도 이 백성을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모세의 이 기도는 하나님의 경륜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 듯 했습니다. 호렙산에서 召命을 받고 고센에 왔습니다. 엄청난 꿈을 안고 왔습니다. 기적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막상 와보니 자신이 너무나 무능력했습니다. 도저히 바로의 적수가 되지 못할 것 같이 여겼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의 計劃은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계획이기 때문에 틀림없는 계획입니다. 그 계획은 모든 단계의 실행이전에 존재합니다. 그 모든 실행과 실현의 모든 측면들은 하늘의 계획에 따라 이루어집니다(엡1:11).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구원계획을 예비하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영역에서 즉 현세의 역사적 영역에서 효력을 발생하는 구원입니다. 시간 속에서 성취되는 구원은 많은 요소와 요인과 측면들을 갖고 있습니다. 구원은 죄와 비참과 죽음에 있어서 우리의 다양한 필요들을 참작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의 필요 또는 경향의 어떠한 면이 看過된다면, 구원은 완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모든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구원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은 죄와 그 결과들로부터의 最小限의 구원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선하심, 지혜, 능력, 은총, 사랑의 부요를 나타내며 그것과 일치하는 최대한의 구원입니다. 그것은 천사들과 사람들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것 중 최고의 것(a destiny)으로서의 구원입니다.
우리의 無力은 기적을 일으키는 요소입니다. 우리의 무력은 하나님의 介入을 촉구하는 요소입니다.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보았지만 모세는 자신이 애굽의 바로왕 보다 얼마나 무력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철저하게 숨기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아마도 모세의 이 기도를 들으시고 바로를 철저하게 응징하실 계획을 이미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그리고 무한하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무도 하나님께 도전할 수 없습니다. 누구도 하나님을 멸시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 앞에 부복을 하든지 항복을 하든지 해야 합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또한 그의 백성의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십니다. 그 백성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의 힘없음은 우리의 힘입니다. 하나님께서 힘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조차 하나님을 모르면(출애굽기5:15-21)
이스라엘 패장들이 바로를 직접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바로에게 호소하였습니다. 아마도 이들은 바로가 자신들의 사정을 정확히 잘 모르고 지시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찌하여 우리들에게 이렇게 대하느냐고 따졌습니다. 그리고 간역자들이 자신을 호되게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는 오히려 패장들을 나무랐습니다(15-18). 바로가 화를 낸 이유는 감히 자신한테 노예들이 신을 찾아서 여호와께 예배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는 히브리사람들을 호되게 대하였습니다. 이로써 바로는 여호와의 기적을 생생하게 체험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히브리 사람들이 하나님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바로를 만나고 나오는 중에 모세와 아론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모세와 아론 때문에 바로와 그 신하들의 칼에 죽임을 당해야 할 처지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몰랐던 것입니다. 물론 기적을 베푼 지가 오래이기 때문에 그렇다고는 하지만 그들에게 여호와에 대한 믿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때마다 언제나 충격을 받고 압도를 당했습니다. 그 두려움과 놀람은 바로 여기서부터 온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이 하나님의 임재를 모를 때는 굳건히 그리고 꿋꿋하게 서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면 죽음의 공포에 의해 전율하고 경악합니다. 비참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영광에 압도되어 혼비백산이 됩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위엄과 자신들을 비교해 보기 전에는 결코 자신의 비천함을 자각하고 깊이 감동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 깜짝 놀랄만한 실례가 사사기와 예언서에 무수히 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라”라는 표현이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욥기에는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과 순수성을 묘사하기 위해 항상 인간들로 하여금 자신의 어리석음과 무능함과 부패를 깨닫게 됨이 기록되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위하여 가까이 나갔을 때 자신이 흙덩이요, 먼지에 불과함을 분명히 인식하였습니다. 엘리야도 얼굴을 가리지 않고는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서는 것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불신자들은 하나님을 알 때 기적적인 요소가 있어야 믿습니다. 그들은 특별계시인 성경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특별계시인 성경을 믿어야 합니다. 그 계시에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나타나있습니다. 그대로 믿으면 됩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자비가 있습니다. 그대로 믿으면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대도 하나님을 모르면 대책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반드시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믿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