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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모르면(출애굽기5:10-14)
애굽의 간역자들과 패장들이 히브리백성에게 가서 바로의 왕명을 전합니다. “짚을 주지 않겠다. 그러므로 너희는 짚을 얻을 곳으로 가서 짚을 주우라. 그렇다고 일은 감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전역을 돌아다니며 짚을 주어서 벽돌을 만들었습니다. 당연히 벽돌의 수효가 줄어들었습니다. 이에 애굽의 간역자들이 이스라엘에서 뽑은 패장들을 불러서 때리고 박해를 했습니다. 그리고 목표한 정량을 채우지 못함을 힐문하였습니다(10-14절). 현재까지는 칼자루를 바로 왕이 쥐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아직까지 이렇다 할 하나님의 능력이 모세로부터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직 눈으로 보여지는 것이 없기 때문에 바로는 기고만장이었습니다. 이것이 사단의 심리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약한 자들이 살아 있지 못합니다. 우리나라강대국의 등살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미국을 비롯해서 바로 옆의 일본, 그리고 중국과 러시아가 우리 옆에 바로 있습니다. 우리가 한 순간이라도 방심하면 이들은 바로 우리에게 달려듭니다. 현재도 일본이 독도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바로나 자신들이 강하다고 생각하고 眼下無人인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창17:1) “네가 나가서 적군과 싸우려 할 때에 말과 병거와 백성이 너보다 많음을 볼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애굽 땅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신20:1).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무한하심의 속성이 있습니다. 무한하다는 것은 아무런 제한도 받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무한성은 공간적인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무한하심입니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광대하심(immensity)과 편재(omnipresence)라고 불러지는 개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공간적인 제약을 전혀 받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공간(과 시간)을 존재하게 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공간이 있기 전에 이미 계셨었습니다. 그분은 어떤 특정한 위치에 국한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內在性). 하나님은 어느 곳에도 계십니다(하나님의 超越性). 창조세계의 어느 곳에도 하나님은 계십니다. 이 위대하심을 바로에게 숨기시고 있었습니다. 바로가 모세의 말을 듣지 않을 때 애굽에는 심각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엄령을 내리신 상태이기 때문에 바로로서는 조심에 또 조심을 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바로는 하나님에 대해서 무뢰한이었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어려운 일이 있어도 전능하신분이 우리의 곁에 계심을 항상 잊지 않고 있어야 합니다. 전능자가 우리를 지키는 한 아무도 우리를 해할 수 없고 길을 막을 수 없습니다. 애굽의 바로를 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대적들을 일격에 쳐내버리십니다.
우리의 힘 (0) | 2010.11.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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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백성들조차 하나님을 모르면 (0) | 2010.11.18 |
어리석은 바로 (0) | 2010.11.14 |
예배를 드리겠다 (0) | 2010.11.12 |
모세와 아론과 바로 (0) | 2010.11.11 |
어리석은 바로(출애굽기5:6-9)
바로는 간역자와 패장들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명령하기를 벽돌 만들 때 쓰는 짚을 주지말라 하였습니다. 그들이 스스로 줍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벽돌의 수효를 줄이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바로의 생각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게으르기 때문에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자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고역을 무겁게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을 수고롭게 할 의도였습니다(6-9).
바로에게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자신의 능력만을 확신하는 교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노예로 잡아두었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거대한 건물들을 지음으로써 자기 나라의 영광을 들어내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광야에 나가겠다는 요청을 게으른 자들이 꾸며 낸 핑계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바로는 그 백성들의 숫적인 능력 때문에 그의 나라에 큰 위협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탄압을 가중시켰습니다. 그들의 노동을 더욱 중하게 함으로써 그와 같은 욕구와 시도를 미리 잘 근절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바로 같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신이 막강한 권력을 잡고 있으면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본의 극우파들의 생각이 그렇습니다. 바야흐로 일본이 경제발전을 하고 세계의 무대에서 잘 나가고 있으니까 옛날의 망상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미국을 침략하고 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던 시절이 그립던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에서 가장 힘이 되는 것은 경제입니다. 돈이 많으면 국방도 튼튼히 할 수 있고, 지구촌의 무대에서 큰소리를 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의 어리석음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을 만났다고 설명을 해도 도무지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모세와 아론을 거짓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몰아 부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나라들은 아무리 그 세력이 막강하고 부강하다고 하여도 망합니다. 이 세상이 모두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입니다. 바로의 어리석음이 바로 그거였습니다.
교만(@wOaG;/gâ’ôwn/가온)은 ha;G;/gâ’âh/가아/높이다)에서 유래했습니다. 히브리어 랍비문헌에서 이 단어는 학식이 많은 자를 의미합니다. 가온은 바빌로니아에 있는 수사(Susa)와 품페디타(Pumpedita)의 랍비 아카데미의 우두머리였습니다. 사디아 가온(Saadiah Gaon)은 가장 특출한 사람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가온은 하나님께 쓰일 때는 “탁월, 위엄”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사람에게 쓰여질 때는 부정적으로 “교만”이란 뜻입니다. 신앙생활하면서 우리들이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교만입니다. 바로처럼 나만 아는 사람은 망하기 때문입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교만은 망하려고 작정한 것입니다. 교만은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생활 하는데 교만이 없어야 합니다. 교만이 오면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조차 하나님을 모르면 (0) | 2010.11.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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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모르면 (0) | 2010.11.15 |
예배를 드리겠다 (0) | 2010.11.12 |
모세와 아론과 바로 (0) | 2010.11.11 |
이집트로 (0) | 2010.11.10 |
예배를 드리겠다(출애굽기5:1-5)
하나님께서는 바로에게 모세를 통해서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하셨습니다. 그들(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절기를 지킬 것이라 하셨습니다. 절기 gg'j;(하가그)는 구약성경에서 16회 나옵니다. 이스라엘은 중요한 세 개의 순례절기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을 하면서 바로 절기를 지켜야 했습니다(출23:14, 레 23:39, 레 23:41, 신16:15, 슥 14:16, 슥 14:18, 슥 14:19). 바로에게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였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테니 이스라엘을 놓으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바로의 대답은 ‘아니오’였습니다. 교만한 대답이었습니다.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자세히 하나님을 알고자 했다면 바로는 첫 단추를 잘 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는 자신을 過信한 나머지 모세의 말을 웃기는 소리로 여겼습니다. “여호와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참으로 가관입니다. 우주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바로가 자신의 머리에서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혜를 칼빈은 “참되고 건전한 지혜는 대부분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우리자신에 대한 지식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이 두 지식이 많은 끈으로 서로 연결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思考의 방향을 하나님께로 돌려야 한다. 그 안에서 살며 起動하고 있는(행17:28) 하나님에 대해 명상하지 않는 한 누구도 자기 자신을 살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천부적으로 타고난 위대한 은사들은 우리들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은 거의 없으며, 사실상 우리의 존재 그 자체도 한분 하나님 안에서의 존재일 뿐이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만일에 우리를 내보내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노하셔서 “온역이나 칼”로 치실지도 모른다 하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를 내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에게 아무런 효과가 없었습니다. 즉 바로는 자기 자신을 너무나 믿었습니다. 스스로도 자신을 신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노예들의 지도자의 말 따위는 대수롭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모르면 그렇게 여길 수 있습니다.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모르면 얼마든지 그렇게 대적할 수 있습니다. 바로는 하나님을 너무도 몰랐습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몰라서 망한 사람이 바로입니다. 그는 모세와 아론이 정확하게 하나님을 계시하였는데도 그는 스스로를 강퍅하게 함으로서 망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바로와 같은 사람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것을 계시하셨음에도 스스로의 강퍅함으로 자기를 통제합니다. 이것이 인간을 심한 파멸로 몰고 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를 강퍅하게 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께는 오직 순종함입니다. 하나님께는 그 말씀대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누릴 수 있습니다.
모세와 아론과 바로(출애굽기5:-7:7)
모세와 아론은 바로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바로는 그들의 요구를 호되게 거절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에게 중노동을 더욱 가중시킵니다. 모세와 바로의 대결구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모세를 거절하는 바로와 이스라엘(5:1-21) 모세의 회의(5:22,23) 하나님의 거듭된 권면(6:1-8) 모세의 권면을 거절하는 이스라엘(6:9) 하나님의 재위임(6:10-27) 모세의 거절(6:28-30) 하나님의 거듭된 권면(7;1-7)
모세에게 여호와의 계시가 더 주어집니다. 그리고 모세와 아론의 족보가 나옵니다. 모세에 대한 여호와의 새로운 계시가 주어지는 것은 모세의 불평 때문입니다. 즉 그의 첫 시도가 그처럼 실패했다는 불평 때문에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 모세가 모든 준비를 마치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를 찾아간 것은 성격상 예비적인 것뿐입니다. 모세와 아론은 왕에게 그들이 믿는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었을 뿐입니다. 이적적인 표적들에 의해서 자기 자신들을 하나님의 사자로 증명한다든가 혹은 하나님의 요구에 대해 특별히 강조하지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첫 번째 단계는 오직 모세에게 바로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가 행하게 될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에 대해 알려주기 위한 의도였기 때문입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며칠 동안 광야로 내어보내 거기서 제사 축제를 가질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청에 대해서 그들에게 노동을 가중시킵니다. 이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의 좋은 이름이 왕과는 상극이 되어버렸고 그들의 사정도 전보다 더 악화되었다고 결국 불평하였습니다.
모세가 이런 것들 때문에 절망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고통을 여호와 앞에 가지고 나왔습니다. 이로서 여호와께서는 새롭고도 강력한 약속을 통해 모세의 낙담한 마음을 새로운 용기로 채워주십니다. 그런데 그 약속이란 하나님께서 최초로 그의 이름 여호와를 계시하신 것입니다. 그의 편 팔과 큰 심판으로 이스라엘 자손을 구원하실 계획이십니다. 또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습니다. 그로 애굽 땅에 많은 이적과 기사들을 행하여 애굽 사람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구원을 통해 그가 여호와 곧 무한한 자유를 갖고 일하시는 절대적인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마음속에 다시 한 번 더 생겨난 문제 즉 그가 말에 능하지 못하기 때문에 바로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라는 의혹에 대해서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라”(7:1)고 확신시켰습니다. 바로가 아무리 권세를 휘둘러도 이미 머리가 죽은 뱀의 꼬리였습니다. 애굽 전역에 하나님의 계엄령이 선포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두렵고 우리를 힘들게 하여도 우리를 함부로 하지 못합니다. 이미 하나님의 계엄령이 선포되었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항상 우리를 도우시고 있습니다.
이집트로(출애굽기4:27-31)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말씀하기를 광야로 가서 모세를 맞으라고 하셨습니다. 아론은 두 말없이 하나님의 지시대로 했습니다. 모세는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부탁하여 보내신 모든 말씀을 아론에게 말했습니다. 자신에게 사명을 주신 일들, 이적을 베푸신 일들을 말했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고센지방에 가서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들을 모았습니다. 아론이 백성의 장로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적을 행하였습니다. 이것을 백성이 믿었습니다. 장로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고난을 감찰하셨음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섭리 가운데 모세와 아론은 각각 하나님의 使者와 代言者로 이스라엘을 이끌어 내는 사람들입니다.
아론은 레위의 자손입니다. 아므람과 요게벳의 아들입니다(출6:16,18,20, 민26:59), 따라서 모세의 형입니다(출7:17), 미리암의 남동생입니다(출15:20), 엘리세바의 남편으로(출6:23), 나답, 아비후, 엘르아살, 이다말의 아버지입니다(출6:23). 아론은 모세의 조력자(출4:13-31)요 모세의 대언자(출7:1,2)입니다. 하나님의 영감을 받고(출12:1) 모세와 더불어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자로 위임받았습니다(출6:13,26,27). 아론은 모세와 함께 바로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특권을 받았습니다(출5:1-4), 이적을 행하였습니다(출7:9,10,19,20; 출8:5-7 출8:16-19). 훌과 더불어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림으로 아말렉에 대한 승리를 쟁취하기도 했습니다(출17:10-12), 시내산에 올라가 여호와를 경배하고(출19:24),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출24:9,10). 모세의 부재시 이스라엘을 다스리고(출24:14), 회막 안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받아 이스라엘 온 회중을 위하여 속죄하는 직무를 행했습니다(레16:17 ). 아론은 백성을 축복하고(레9:22 민6:23), 미리암을 위해 중보하였습니다(민12:10-12).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돕는 자들을 붙여주십니다. 절대로 혼자 일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은 430년간 호된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최근까지 사내아이들을 죽이는가하면 그 외에 할 수 있는 박해는 다 적용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이들을 구해내야 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이들과 같이 하셨습니다. 모세와 아론의 옆에서 서계셨습니다. 인간의 구원은 우리들로서는 할 수 없는 신비적인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다 이루신 일을 다만 우리는 전할 뿐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도록 전하는 것뿐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바로 앞에서 행하는 일들이 바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의 우리들도 구원을 얻도록 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전해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겠다 (0) | 2010.1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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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와 아론과 바로 (0) | 2010.11.11 |
할례의 중요성 (0) | 2010.11.09 |
이스라엘은 내 장자라 (0) | 2010.11.08 |
이적을 행하지만(1) (0) | 2010.11.05 |
할례의 중요성(출애굽기4:24-26)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내 장자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설득하시려고 많은 이적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보내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내 장자’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모세와 이스라엘에게 특권을 부여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24절을 보면 이 말씀에 찬물을 끼얹습니다. 여호와께서 길에서 모세를 죽이려 하시기 때문입니다. 왜 무엇 때문에 모세를 부르시고 모세를 죽이려 하십니까?
모세는 하나님의 소명대로 애굽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모세가 사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자신이 여호와의 신실한 종임을 증명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신 이유는 모세가 그의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보라가 돌을 취하여 그 아들의 양피를 베어내자마자 여호와께서는 모세를 놓아주셨습니다. “그 아들(베나)”이란 말로 보아 십보라는 모세의 두 아들 중 한 아들에게만 할례를 행했습니다(20절). 따라서 다른 아들, 즉 장자는 이미 율법에 따라 할례를 받았을 것입니다. 할례는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모든 후손들을 위한 언약의 표식으로 명령하였었습니다. 그리고 할례를 무시한 자에게는 계약을 어긴 자에게처럼 사형 선고가 내려졌었습니다(창17:14). 물론 이 본문에서 죽음의 위협을 당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무할례자들이지만, 자녀들의 경우에는 형벌이 부모에게 주어졌습니다.
아마도 모세는 할례를 좋아하지 않았던 미디안 아내 때문에 할례를 행하지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모세는 사형받을 죄를 범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의 계약을 수립하기 위해 그가 그의 사자로 선택한 자의 경우에는 결코 그냥 넘길 수없는 죄였습니다. 그래서 여호와는 그를 죽음으로 위협하여 그로 하여금 양심의 소리에 의해서나 아니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공격하실 때 수반되었던 어떤 말씀에 의해서 죄의 식을 갖게 했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그의 명령들을 지키라고 얼마나 간절히 요구하시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모세를 죽이지 않으셨습니다. 할례를 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일로 인해서 역사가들은 모세가 이 사건을 통해서 그의 아내와 그의 아들들을 애굽으로 데려가지 않고 그의 장인에게로 돌려보낸 것이라고 합니다.
구약에는 할례를 받음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되었습니다. 신약에는 세례가 할례를 대신합니다. 세례는 신적권위에 의하여 恩惠言約(은혜언약)의 교회인 표호와 印號(인호)입니다. 세례는 죄를 씻습니다(행2:33). 영적인 갱신을 합니다(롬 6:4). 그리스도의 할례는 세례에 의하여 즉 세례의 의미하는 바에 의하여 성취되었다고 말합니다. 세례를 받지 않으면(구원받은 상태)영원히 멸망을 당합니다. 세례는 물세례와 성령세례가 있습니다. 두 가지 모두 중요합니다.
모세와 아론과 바로 (0) | 2010.1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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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로 (0) | 2010.11.10 |
이스라엘은 내 장자라 (0) | 2010.11.08 |
이적을 행하지만(1) (0) | 2010.11.05 |
전능자의 말씀 (0) | 2010.11.03 |
이스라엘은 내 장자라(출애굽기 4:22-23)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말하기를 바로에게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하라”하셨습니다. 예레미야31:9에도 “…이스라엘의 아비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하셨고 호 11:1에도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거늘”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부자관계로 묘사했습니다. 이 관계를 바로에게 필히 전하라 하셨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을 놓지 않으면 바로의 장자들이 죽는다는 것입니다.
부자 관계는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관계를 묘사하는 중요한 은유가운데 하나입니다.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관계는 부자관계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그의 아들로 입양하시고, 그들에게 아들로서의 특권인 이름을 주시며, 상속자에게 돌아갈 땅을 주십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아들로서 아들 된 사명을 다해야 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출애굽 때에 처음으로 이스라엘을 아들로 부르십니다(출 4:22-23). 애굽에서 노예생활 하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내 아들 내 장자”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노예생활 하는 이스라엘을 주권적으로 그의 아들로 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아들로 부르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자신을 “나의 아버지”로 부르라고 말씀하십니다(렘 3:19). 왜 이스라엘을 아들 삼으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이름과 땅을 주시려고 아들로 삼았습니다. 여호와와 이스라엘 사이의 입양관계는 양부와 양자사이에 어떤 합의가 없습니다. 입양의 과정에서 양자는 거의 수동적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양자 삼는데 있어서 이스라엘로부터 어떤 동의나 승낙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예고없이 이스라엘을 “나의 아들”이라고 부르시고 그들에게 자신을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합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창조주의 특별한 보호하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바로는 강퍅해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대로 대답만 해야 했습니다. 그러면 신상이 편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고집으로 바로는 망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피해야 할 것이 자기고집입니다. 자기고집을 세우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자기고집을 피울 이유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양자 삼으셨습니다. 우리역시 하나님께서 양자를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무조건 양자를 삼으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양자들에게는 특권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보호하심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마귀가 우리를 건드리지 못합니다. 우리가 유혹을 받지 않는 한 누구도 우리를 해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의 장자이기 때문입니다.
이적을 행하지만(1)(출애굽기 4:20,21)
모세는 그의 아내(십보라)와 아들들을 데리고 애굽으로 돌아갔습니다. 그가 가진 것은 하나님의 지팡이였습니다. 그의 행색은 초라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어깨에 이스라엘의 안위가 걸려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적들을 그의 지팡이로 행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팡이로 불리운 지팡이를 가지고 애굽으로 돌아갔습니다. 그가 애굽에 갔다는 것은 애굽에 波瀾(파란)이 일었습니다(20절).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손에 준 이적을 바로 앞에서 모두 행하라”하셨습니다. 그러나 바로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강퍅하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즉 바로가 이적들을 보고도 스스로 그 마음을 돌이키지 않고 오히려 더 완악해진다는 것입니다. 문자적으로는 “내가 그의 마음을 굳게 해서 움직이지 않게, 이스라엘에 대한 그의 감정과 태도가 변하지 않게 할 것이다”란 뜻입니다. 7:3에서는hv,q]a ynIa}w"'/아니 아크세 14:4에서는 yTiq]Z"jiw]/베히자크티 14:17에서는 q~ZEj'm] ynIn]hi ynIa}w"/아니 힌니 메하제크란 표현을 사용하여,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팍케 또는 무감각하게 만들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10:1에서는 아니 히케바데티로 “내가 그의 마음을 완강케 하였다”고, 즉 둔감하게 또는 인상이나 하나님의 영향들에 무감각하게 만들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세 가지 단어들이 마음의 완악함을 나타내는 말들입니다.
“바로의 강팍함"은 하나님에 의한 것으로 설명되고 있는데 방금 인용된 본문들과 9:12, 10:20, 27, 11:10, 14:8에서 즉 모두 열 번에 걸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에 의해 예지되고 예언되었을 뿐만 아니라 여호와에 의해 의도되었고 야기되었습니다. 마지막 다섯 본문에서는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팍케 하셨다”는 표현이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가 그 자신의 마음을 강팍하게, 또는 무겁거나 완강하게 했다는 표현도 열 번이나 사용되었습니다.
7:13. 22, 8:15, 9:35에서는 바예하자크 레브 란 표현으로 “바로의 마음이 강팍해지니”라고 했고, 7:14에서는 카베드 레브 라는 표현으로 “바로의 마음이 완강하여지니”라고 되었으며. 9:7에선 바크바드 레브 8:11, 28, 9:34에선 바야크베드 리보, 8:15에선 바예헤자크 레브로 “바로가 마음이 강팍하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에 의한다면 바로의 마음이 강팍해진 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기도 하며 또한 그 자신의 행동에 의한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의해서 살펴보면 처음 다섯 가지의 형벌적 재앙들이 있은 후까지도 “그 자신 스스로 강팍해졌다”는 표현이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런 이적들이 하나씩 행해질 때마다 바로의 마음이 굳어졌거나 둔감해졌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대해 무감각해졌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민감하지 못하면 바로와 같은 현상들이 일어납니다. 자신이 제일인양 생각하며,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을 떼죽음으로 몰고가게 합니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사람들이 엄청많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에 항상 민감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