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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의 등장(사도행전7:58)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흔히 사울의 뜻은 위대하고 바울은 작은 자라고 해서, 그 근거를 그리스도를 만나기전에는 사울, 만난 후에는 바울이라고 하는데, 성경에 그런 근거는 없습니다. 사울(lWav;/Shâ’ûwl/간구된)이라는 이름은 유대식 이름입니다. 사울의 헬라어음역은 사울로스(Sau'lo")입니다. 그의 다른 이름은 바울입니다. Pau'lo"(파울로스)는 라틴어 파울루스(Paulus)에서 유래한 헬라어 음역입니다. 여기에서 ‘작은’이란 말이 유래했지만, 성경적인 근거는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리기아의 다소에서 났습니다(행9:11,21:39,22:3). 유대인 양친에게서 태어났습니다(빌3:5). 그의 부친은 바리새인이었습니다(행23:6). 로마의 시민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출생 때부터 로마시민이었습니다(행22:28,16:37). 그는 천막 만드는 일을 배웠습니다. 바울은 청년기 초에 예루살렘에 와 있었습니다. 바리새인인 가말리엘에게서 유대신학을 철저히 교수 받았습니다(행22:3 ,5:34). 바울사도는 스데반의 순교를 마땅하다고 생각할 만큼 유대신학에 미쳐있었습니다. 유대인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악하게 공격하고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으로 가는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그리스도께로 개종하였습니다. 이후 지칠 줄 모르고 굽힐 줄 모르는, 그리스도의 전파자요 많은 그리스도 교회의 설립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열심과 교리로 그는 스스로 유대인들의 불구대천적 증오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이로 인해 결국 되고 팔레스타인의 가이사랴로 호송되었다가, 2년 후에 로마로 보내졌습니다. 로마에서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바울사도의 등장은 악인으로 등장합니다. 기독교인들을 잔해하려고 날뛰는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유대인들이 그에게 거는 기대가 많았습니다. 수리아지방에 있는 기독교인들까지 잔해하려고 하는 선봉에 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사도의 등장은 기독교회사에 거대한 획을 긋게 됩니다. R. E. D. White는 바울사도를 가장 위대한 그리스도인, 가장 심오한 교사, 가장 충실한 친구, 가장 용맹스런 모험과 불굴의 수난자, 가장 눈길을 끄는 성자,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병사요, 종이요, 그를 사랑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바울사도의 개종은 급격하고, 극적이었습니다. 그의 업적은 기독교를 히브리사람들만의 종교가 아니라 세계종교로 변화시켰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 가장 위대한 사람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제외하고는 가장 위대한 사람입니다. 한 사람이 전 세계를 바꾸어놓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바로 바울사도가 전한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그 복음을 전하기 위해 유대인과 로마인과 환경들의 엄청난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죽는 날까지 복음을 위해서 살다가 순교했습니다. 후에 사울은 스데반의 죽음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 대열에 자신도 함께 하고 평생을 주님과 동행했던 그 결과 오늘날 전 세계에 복음이 가일층 순조롭게 전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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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의 변증(사도행전7:1-60)

변증이란 변호하는 것입니다. 변증하려는 개념을 논리적으로 분석하여 변론으로써 증명하는 것이 변증입니다. 기독교를 변증하려면 기독교의 전반에 대해서 소상히 알아야 합니다. 어느 한부분만 가지고는 변증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건을 법정에서 변호하려면 변호사는 그 사건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알아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스데반은 성경에 該博(해박)했습니다. 스데반의 변증에 어떤 사람도 당하지 못했습니다. 과거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의 때에 이르기까지 소상하게 변증을 해갔습니다. 스데반의 변증은 이후로 교회사에 수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스데반의 변증은 장장 50절에 걸쳐서 막힘없이 대적들의 입을 막았습니다. 먼저 2-16절까지는 족장시대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을 메소포타미아에서 불러내신 것을 비롯해서 이삭과 야곱이 장사됨에 이르기까지를 자세하게 변증해갔습니다. 다음으로 17-43절까지는 모세와 율법에 대해서 변증을 했는데, 애굽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의 박해부터 시작해서 모세가 소명받는 장면과 애굽에서 백성들을 이끌어내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는 모습들을 소상하게 설명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부각시킨 것입니다. 44-50절까지는 장막과 성전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모세 때부터 증거의 장막이 광야에 있다가 여호수아가 가나안에 입성할 때 들어갔는데, 그 장막이 항상 밖에 있음을 안타까워 하면서 다윗이 성전을 세우겠노라고 했지만, 거절하시고 대신 아들인 솔로몬 때에 세우게 하셨지만, 과연 하나님이 계실 처소가 어디이겠느냐고, 성전중심의 사람들에게 변증을 했습니다. 51-53에는 스데반을 고소한 사람들에게 반격하는 말입니다. 스데반을 공회에 세우고 그를 제거하려는 사람들에게 스데반은 목이 곧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도무지 듣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을 항상 거스르고 있는 그들을 꾸짖었습니다. 너희들은 잘한다고, 하나님의 뜻에 따른다고 하지만 늘 성령을 거슬러 왔다는 것입니다. 모세 때부터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짓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이고, 의인들을 죽였으며,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을 죽인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 바른 설교를 하려고 지향하는 목사들은 항상 외롭습니다. 너무나 세속화되어 교회인지, 세상인지를 구분할 수 없는 상황에서 바른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그 자신 순교한다는 각오로 설교를 해야 합니다. 소위 크다고 하는 대형교회들의 설교를 모니터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상당히 많은 교회들이 죄를 지적하는 설교가 없습니다. 윤리와 잘사는 법, 복을 많이 받는 법의 설교들은 넘치는데, 너희들이 죄인들이다. 그러므로 죄를 회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고 과감하게 설교하는 목사들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변증은 갈수록 힘이 들것입니다. 세속화된 시대에서 바른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순교의 정신이 없으면 할 수 없습니다. 교회에서 더 반대할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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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에 대한 변명(사도행전2:14-21)

지구는 5대양 6대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어떤 쪽은 낮이고 어떤 쪽은 밤입니다. 또한 인종이 각각 다릅니다. 민족도 다릅니다. 문화역시 각각 다릅니다. 동양과 서양으로 나누어져 있고, 그 안에 여러 문화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복음은 동양에서 시작되었지만 서양으로 먼저 전해졌습니다. 그 당시에는 로마가 유럽과 아프리카 일부, 그리고 동양에까지 세력을 넓혔습니다. 당시에 복음을 전하면 받아들일만한 나라가 로마제국 말고는 없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전 722년과 주전 586년에 포로가 된 유대인들이 본국에 모두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로마제국 전역에 Diaspora(디아스포라)로 퍼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유럽으로부터 전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후로 복음이 유럽에서 아시아로 오는 시간은 무려 19세기나 흘러야 했습니다. 17세기(1620)에 복음은 미국으로 건너갑니다. 그리고 미국에서 아시아로 왔는데 19세기에 들어왔습니다. 물론 러시아를 통해서 들어오기는 했습니다. 왜 서양에서 동양으로 오는데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까? 사단의 방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여러모로 공격을 받았습니다. 직접적인 공격도 받았고, 간접적인 공격도 받았습니다. 칼의 공격도 있었습니다. 철학의 공격도 받았습니다. 르네상스의 공격도 받았습니다. 과학의 공격도 받았습니다. 그 외에 수많은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오늘까지 쌩쌩합니다. 생생합니다.

14절을 보면 베드로가 새 술에 취했다고 폄하하는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때가 제 3시다(오전 9) 그런데 술에 취해 있는 사람이 있겠는가? 그리고 자신에게 귀를 기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베드로는 요엘 선지자의 말을 인용합니다. 요엘2:28-32절을 인용하여 그들의 어리석음을 반박합니다. 즉 제자들이 갈릴리 말로 말을 했을 때, 해당 각 나라말로 알아듣는 것은 성령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이 일을 감히 함부로 예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이름을 부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죄 가운데 있어서 반드시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갓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마치 자신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을 예수님 없이도 구원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기독교는 상당히 세속화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과 교회를 구분하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이런 갈등 속에서도 복음은 건재합니다. 그래서 복음에 대한 변명을 언제나 그리스도인이라면 해야 합니다. 복음을 지키기 위해서 복음을 변명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결코 인간을 구원하는데 있어서, 영생하게 하는데 있어서 복음을 제외하고는 없음을 인식시켜야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일에 복음의 적용을 받지 않는 나라는 없습니다. 복음의 적용을 받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복음은 개인을 구원시킬 뿐만 아니라 사회를 구원합니다. 복음은 좋은 것이고, 기쁜 것이며, 반갑고 즐거운 소식입니다. 듣는 사람들을 황홀케 하고, 노래하게 하며, 춤추고 뛰놀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변호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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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사도행전2:5-13)

복음은 흔히 말하기를 기쁜 소식이라고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원래 헬라어 문헌에서 복음(eujaggevlion/유앙겔리온)유앙겔로스’(eujavggelo")에서 유래했습니다. ‘유앙겔로스는 전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전쟁의 승리소식이나 기쁨을 일으키는 정치적 또는 개인적 소식을 가져오는 자를 유앙겔로스라 했습니다. 헬라 시대에 이 단어는 신탁을 전하는 자를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유앙겔리온은 황제 숭배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황제숭배 지역에서 신적 통치자의 탄생 소식, 통치 시대의 도래, 또는 즉위, 그리고 또한 그의 말들, 포고령, 행동들은 행복과 평화에 대한 세상을 기다리며 오랫동안 소망하여온 바의 성취를 가져오는 유앙겔리온이었습니다. 사실 유앙겔리온이 원래는 기쁜 소식이 아니었습니다. 황제의 유앙겔리온이 도착했을 때 받는 입장에서는 매우 나쁜 소식이었습니다. 세금을 올린다든지, 황제의 아기가 태어났으니 특별세를 내라든지 해서 황제의 복음(유앙겔리온)은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유앙겔리온을 기쁜 소식으로 바꾸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1:15, 8:35, 10:29, 13:10, 14:9, 16:15 4:23, 9:35, 24:14, 26:13 등을 보면 유앙겔리온을 차용해서 유앙겔리온을 기쁜 소식으로 바꾼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을 사람들은 달갑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11절과 12절을 보면 제자들의 복음전함을 기이하게 생각합니다. 도대체 이 무슨 일이냐? 하면서 듣는 사람들이 놀라고 있습니다. 그들은 몹시 당황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전하는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이 복음을 받아들여야 할지 말지 심히 갈등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3절을 보면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조롱했습니다.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달콤한 새 술에 취해서 한 말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현상은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러하며 미래에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세상은 그렇게 달갑지 않게 여깁니다.

기독교만 내세가 있느냐? 우리도 내세를 믿는다.’하면서 교묘한 말로 사람들의 영혼을 지옥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진리라는 것은 오직 기독교이외에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천국과 지옥을 명쾌하게 말하는 종교가 기독교 말고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말고는 정말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전도하고 선교하니까 자기들이 영생을 얻는 것이지, 스스로 영생을 획득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 사람이라도 더 영생을 얻게 하고자 선교회를 조직하고, 이른 아침에 기도회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전함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현재 그대로 있으면 지옥에 갑니다. 그러므로 제가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하면 , 감사합니다.’하고 믿어야 하는데 웃기지 마하고 거절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죽을 때까지 해야 할 일이 복음 전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복음전하는 일이 힘들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복음은 항상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전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복음의 진원지가 하나님이심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청교도 리챠드 백스터는

우리는 우리 자신의 구원을 보증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할 일이 있다. 우리는 교회에 속해 있음과 동시에 세상에도 속해 있다. 따라서 우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선을 베풀 책임이 있다. 우리는 우리가 처해 있는 각처에서 주께서 허락하신 은사를 가지고 주님께 봉사해야 하고, 주의 진리와 은총을 전파해야 하고, 세상에 있는 영혼들을 인도하여 주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고, 주의 교회를 세우도록 하며, 나아가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많은 심령들에게 구원을 전파해야 한다. 이러한 모든 일은 천국에서 그 상급을 보장받는 일로서 이 땅 위에서 이루어져야하는 일이다.

라고 했습니다. 결코 우리의 의무이자 사명인 복음을 전하는 일이 작은 일이 아님을 항상 명심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해야 합니다. 이 일은 우리 말고는 할 사람이 없습니다. 국가가 하지 못하고, 사회가 하지 못하며, 어떤 단체가하지 못하는 일이 우리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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