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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역한 유대인들(사도행전21:27-36)

바울사도는 야고보의 중재에 의해서 유대의 결례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결례일이 끝나갈 무렵에 예루살렘성전 뜰에서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소아시아 특히 에베소지방에서 소동을 일으켰던 유대인들이 바울을 보자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을 선동했습니다. 에베소에서 바울사도가 3년간을 사역하면서 유대인들은 바울을 적으로 간주해서 살해하려고 무척이나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좋은 기회를 포착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에베소사람 드로비모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드로비모’Trovfimo"/trôphmos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드로비모는 에베소의 이방인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는 아시아에서 바울과 동행했습니다(행20:4), 그리고 예루살렘교회에 줄 선물을 가지고 예루살렘까지 동행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인 드로비모가 이스라엘의 뜰(Court of Israel)에 바울과 함께 있을거라고 지레짐작했습니다. 이방인으로서 ‘이스라엘의 뜰’에 들어가는 것은 사형을 당할만한 범죄였습니다. 하지만 성전의 바깥뜰에는 이방인들도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방인들이 성전의 안뜰에 들어갈 때는 죽음을 면치 못했습니다. 로마당국조차도 유대인의 종교적인 금기사항을 지킬 정도였습니다.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당시 로마의 총사령관인 디도(Titus)가 예루살렘성전 경비병들에게 절대로 들어가지 말라고 주지시켰다는 것입니다. 설령 로마시민이라고 할지라도 금지된 지역 안으로 들어갈 때는 사형선고가 내려지는 것을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에베소에서 뜻을 이루지 못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소동을 일으키며 그 뜻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이에 예루살렘성이 발칵 뒤집히다시피 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바울을 대적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갔습니다.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실체들이 있습니다. 천사들입니다. 그리고 마귀입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편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반면에 마귀는 사탄의 편에서 사탄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마귀의 사주를 받는 존재들이 또한 존재합니다. 교회의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을 끌고 간 유대인들이 사탄의 사주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겉으로는 명분을 가지고 일합니다. 자신들은 율법에 충실하고 유대인으로서 손색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성전을 더럽히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실은 성전을 심히 더럽히는 자들입니다.

사람이 의식화되고 정형화되면 다른 것들은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한번 박혀버린 사상이 그래서 무섭습니다.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자신의 정형화된 사상에 반하는 사람들은 틀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들을 제지할 어떤 근거가 없습니다. 유대인들의 정형화로 인해서 초대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심한 핍박을 받았습니다. 복음이 더디어졌습니다. 그러나 더욱 복음전파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복음을 받을 뻔 했던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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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사도행전21:1-6)  

바울사도는 밀레도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배를 타고 바로 출발하여 고스(Cos/헬리가니소스 근처 소아시아 남서쪽 해안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산이 많은 섬으로 주전5세기에 히포크라테스/Hippokratēs가 이곳에 의술학교를 세움)로 갔습니다. 다음날에 로도(Rhodes/크레테와 소아시아 서남단 사이에 위치한 큰섬으로 당시에 이곳은 여가를 즐기고 학식을 나누는 유흥지임)를 거쳐 바다라(Patara/소아시아 남부 루기아의 항구도시로 바람이 순조롭기 때문에 페니키아로 가는 배를 타기에 적절한 곳)로 갔습니다. Patara에서 페니키아(Phoenicia)로 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구브로(Cyprus/구약성경에서 ‘깃딤’(창10:4, 민24:24, 사23:1)으로 불렸던 구브로는 지중해의 매우 비옥하고 쾌적한 섬으로서 길리기아와 시리아 사이에 위치)를 바라보며 Syria(수리아는 북쪽으로 타우루스 및 아마누스 지역과 접하며 동으로 유브라데와 아라비아, 남으로 팔레스틴, 서로 페니키아 및 지중해와 접경을 이룬다. 시리아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언급되지 않고 주로 ‘아람’으로 언급됨)로 가다가 두로(Tyre)에서 상륙했습니다.

두로에는 이미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제자들을 찾아서 7일을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그 제자들이 성령에 감동되었습니다.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예루살렘에 갔습니다. 성도들이 성문 밖 바닷가에까지 나와서 전송할 때 역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가이사랴에 가기위하여 배에 올랐습니다. 바울사도는 성령에 감동된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사도는 갔습니다. 한 성령님이 어떤 사람에게는 가지 말라고 하고 바울사도는 가겠다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Calvin은 그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말했지만, 그들이 말하는 것을 그분께서 승인하셔서 바울로 하여금 자기들이 예언의 영에 의해 말하고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이 예루살렘 행을 중단할 경우 얼마든지 개인적인 안전을 스스로 깊이 꾀할 수 있었을 수도 있었는데 중단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Matthew Henry는 어떤 사건이 발생하려고 하면서 그 사건에 대하여 많은 논란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그 사건 전에 많은 예언을 함이 적합하다고 여기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하나님께서도 사람들의 신앙을 해치는 대신에 그 신앙을 더욱 굳건히 하고자 하셨다는 것입니다.

F. F. Bruce는 성령의 영감을 받아 예언을 하는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큰 위험이 바울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예견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굳게 결심한 바가 있어서 전혀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최순봉은 바울은 그들로부터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말라는 권고를 다시 한 번 받는다. 그러나 누가는 이에 대한 바울의 반응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바울 일행은 마치 아무 말도 들은 적이 없는 것과 같이 그 장소를 떠났다고 했습니다.

Thompson Bible은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극심한 고통을 당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안 제자들이 바울의 안위를 염려하는 뜨거운 사랑의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예루살렘 행은 Roma로 이어지는 길입니다. Roma에서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그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설령 그 길이 죽음의 길이라도, 복음을 사랑하고 전하고자 하는 passion이 있기 때문입니다.

And

유대인들의 견해(사도행전15:13-21)

유대인의 눈에는 우상숭배, 간음, 살인은 3대 죄악으로 간주했습니다. 야고보가 말한 ‘우상의 더러운 것’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정육점이 별도로 있어서 고기를 아무데서나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초대교회당시에는 로마제국 등 여러 지역에서 고기를 구입할 때, 우상에게 제사하고 난 후에 그 고기를 시장에서 팔았습니다. 따라서 온전한 고기가 거의 없었습니다. 부지불식간에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게 되었습니다.

간음은 방탕한 성행위였습니다. 당시 이방사람들은 우상에게 제사하는 과정에서 문란한 성행위를 가졌습니다. 이 성행위는 우상을 숭배하는 과정에서 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아무런 거리낌도 없었고, 부끄러움도 몰랐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순결이라는 관념이 없었습니다. 특히 비너스 등 소위 여신상들에게 제사하는 풍습은 잔인했고, 문란했으며, 더러웠습니다. 또한 간음은 부도덕한 성행위로서 당시에 만연했던 근친혼이나 축첩행위였습니다. 이런 것들은 최소한 교회에서는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는 것은, 짐승을 목맸을 때에 피가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에, 피의 식용을 금지하는 유대인들에게는 금지사항이었습니다.

야고보는 아무리 이방사람들이지만 성도라면, 이런 것들은 지켜줘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당시의 이방교회에 guideline을 그어놓은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이중에서도 지키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즉 이런 것들은 구원을 받는데 필요한 사항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리스도인에게는 지켜야 할 최소한의 윤리적인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운다고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성도라면 술을 마신다거나 담배를 피운다면 당장 성도로 인정을 하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술파티를 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는 사교파티를 하지 않습니다. 왜입니까?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나라마다문화가 다르고, 민족마다 풍습이 다르지만, 한 성경을 쓰기 때문에 성도는 어느 나라 성도이든 간에 성도입니다. 윤리와 도덕은 어느 종교보다 우수해야 하며, 어느 종교보다 인간다워야 합니다. 교회는 우익도 아니고 좌익도 아닙니다. 보수도 아니고 진보도 아닙니다.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백성일 뿐입니다. 그래서 어디나라 사람이든 같으며, 세상 사람들과는 성별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유대라는 특정한 나라에서 출발했습니다. 율법(토라)을 중시했던 나라였기 때문에 복음이 이방에 전해지는 것도 싫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그들의 의견과 달랐습니다. 이방에 복음이 반드시 전해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방에 대한 태도를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누구도 거스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교회는 최저의 guideline을 그어서 원만하게 이방교회에 부탁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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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설교/그리스도를 예비함(사도행전13:16-22)

왕은 좋은 것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한 국가를 좌지우지 할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백성들의 머리요, 한 국가의 최고통치자이기 때문에 왕을 하려고 과거에도 부단히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임기가 매우 짧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왕을 선호하다보니까 궁중에서 암투가 심했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왕자들은 왕의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자리는 하나고, 왕을 하기는 해야겠고, 해서 쿠데타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대체적으로 왕의 임기가 짧았습니다. 왕을 한번 하면 죽을 때까지 하는 자리인데 그렇게 주변에서 놓아두지 않았습니다. 물론 오래 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오래 하지 못했습니다. 국가조차 오래 버티지 못했습니다. 전란과 변란으로 인해서 오래 버티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사도는 하나님의 역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어떻게 하셨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16절을 보면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당에 두 부류의 사람이 모여 있었습니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입니다. 그들을 향해서 사도는 설교를 합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내용을 다윗 왕까지 말합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 오랜 세월을 섭리하셨는가를 말합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습니다. 그 많은 나라 중에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선택하실 때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을 선택해서 이 세상을 치료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에덴에서 파괴된 이 세상을 이스라엘을 선택해서 치료하고자 계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애굽에서 양육하셨습니다. 250만-300만 명의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키우셨습니다. 애굽에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큰 권능(meta; bracivono" uJyhlou'/메타 브라키오노스 휩셀루)으로 빼내셨습니다. 문제는 광야에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으로 보내주신다고 해도 이스라엘은 믿지 않았습니다. 돌다리도 두드려서 건너야한다고 하면서 스파이를 보내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나안의 스파이보고를 받고 좌절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40년을 방황하다가 광야에서 죽어갔습니다(18).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인내하셨습니다. 결국 믿음의 사람들을 동원하여 가나안의 강한 족속들을 멸하시고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셨습니다(약450년간). 사무엘 선지자때까지 사사를 주셨습니다. 그들이 왕을 구하자 하나님께서 기스의 아들 사울을 왕으로 40년간 세우셨다가 폐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새의 아들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며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삼상13:14, 시89:20)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은 이스라엘의 선택에서 다윗의 선택까지의 요지를 보면 예수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요약을 말하고자 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이 땅에 오셔서 역사하셨음을 말하고자 회당장이 읽은 성경에 답을 한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전하는 것이 곧 예수그리스도요, 복음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예수를 전하고자 말한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복음이요, 복음이신 예수님은 이 세상의 구원자요, 사람을 살리는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만 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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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의 주역들(사도행전13:13:15)

사도행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누가, 데오빌로, 사도들, 예수그리스도, 갈릴리 사람들,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 바돌로매,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 예수의 모친 마리아, 예수의 아우들, 백이십 명의 성도들, 가룟 유다, 요셉(바사바/유스도), 맛디아, 경건한 유대인들(바대인/메대인/엘림인/메소보다미아/유대/가바도기아/ 본도/아시아/브루기아/밤빌리아/애굽/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로마인/그레데인/아라비아인들), 바나바, 헬라파 유대인들, 히브리파 사람들, 스데반, 빌립, 브로고로, 니가노르, 디몬, 바메나, 니골라, 사울(바울), 아나니아(다메섹), 고넬료, 시몬(피장이), 스데반의 박해로 흩어진 자들, 아가보, 마가요한, 로데, 시몬(니게르), 구레네 사람 루기오,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 야고보(주의 형제), 유다, 실라,디모데, 루디아, 야손,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디도 유스도, 회당장 그리스보, 회당장 소스데네, 아볼로, 에라스도, 부로의 아들 소바더, 아리스다고, 세군도, 가이오, 두기고, 드로비모, 바울의 생질 등입니다. 물론 이러한 사람들은 복움과 관계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중에 사도행전1장에서 12장에서는 거의 베드로가 많이 지면을 차지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1장에서 12장까지는 복음이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에 한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13,15, 2:14,37,38, 3:1,3,4,6,11,12, 4:8,13,19, 5:3,8,9,1015,29, 8:14,20, 9:32,34,38,39,40,41,43, 10:5,9,13,14,17,18,19,21,23,25,26,32,34,44,45,47,48, 11:2,4,7

13, 12:3,5,6,7,8,9,11,13,14,16,17,18,

그래서 12장까지는 바울의 예수 믿기 전의 상태와 바울의 소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사도행전 7:58, 8:1,3, 9:1,3,4,8,11,17,18,19,22,23,24,25,28, 11:25,30, 12:25

그러다가 개종 후에 안디옥에서 사역을 했을 때는 바나바가 바울보다 먼저 거론됩니다.

사도행전 11:25,30, 12:25, 13:1,2,7,

13:9부터는 바울이 먼저 등장합니다. ‘바나바와 사울’이 ‘사울과 바나바’로 바뀝니다.

이들의 도움으로 복음이 빠른 속도로 이방에 전해졌습니다. 어쩌면 이름도 없이 기록된 사람들도 있지만, 이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복음이 아직도 우리나라까지 오는데 시간이 더 걸렸을지 모릅니다. 이들은 복음 때문에 순교를 당한 사람들도 있고, 사회와 국가에서 많은 불이익을 당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복음을 전하는 일이라면 반드시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정말 본받아야 할 일들입니다. 나라가 부강해지고, 살기가 편안해지니까 복음에는 안중에도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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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에서 총독에게 복음전함(사도행전13:6-12

사울과 바나바는 살라미의 중심부로 이동했습니다. 거기에는 로마의 총독부가자리 잡고 있는 ‘바보’(Pavfo"/Pâphos)에 이르렀습니다. 바보는 구바보(Old Pâphos)와 신바보(New Pâphos)가 있었습니다. 구바보는 페니키아인이 건설했고, 신바보는 그리이스인이 건설했습니다. 살라미에는 바보가 중심지이며, 로마의 총독부가 있을 만큼 번화한 지역이었습니다. 구바보나 신바보는 종교적으로 ‘파비안느’라는 여신을 숭배했습니다. 파비안느는 시리아에서 기원한 신입니다. 파비안느는 그리이스의 아프로디테(Aphrosite)이며, 로마의 Venus(비너스)입니다. 바보는 Venus를 깊게 숭배하는 본거지였습니다. Venus의 신봉자들은 Venus가 바다에서 태어났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원뿔형의 운석을 중심에 두는 감각적인 의식으로 그녀를 숭배했습니다. Venus 신전은 많은 순례자들이 방문하였습니다. 사울과 바나바는 이곳에서 총독을 만났습니다. 구브로의 총독은 세르기우스 파울루스(Sergius Paullus/서기오 바울)였습니다. 총독은 사울과 바나바를 초대하였습니다. 총독은 사울과 바나바가 전하는 말을 듣기를 원했습니다. 복음에 대해서 관심까지 가졌습니다. 누가는 서기오 바울에 대해서 ‘지혜있는 자’라고 했습니다(7). 그런데 항상 총독의 옆에서 마술을 부리던 무당 ‘바예수’가 적극적으로 방해를 했습니다. 이 자는 총독의 마음이 사도들의 교훈에 이끌리지 않도록 하기위해 방해하고 반대하였습니다. 만일에 경우 총독이 사도들의 말을 들으면 자신의 궁중마술사직이 위태롭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사도바울이 그를 제지하면서 궤계(기만)와 악행(분별력이 없는 행동)이 가득한자라고 했습니다. 마귀의 자식이며, 의의 원수이고, 주의 바른 길을 왜곡시키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10). 그리고 얼마동안 네가 소경이 될 것이라고 하자마자 곧 바로 소경이 되었습니다. 총독은 그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총독이 믿었습니다(ejpivsteusen /epîsteusen). 또한 주의 가르치심을 기이히 여겼습니다( ejkplhssovmeno"/ekpllēssômenos).

이것을 볼 때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음을 우리는 인지할 수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복음이 전해지는 것을 철저하게 막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잔하는 것에는 양면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일이라고 해서 순탄하게 전해지지 않는 것을 인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대사도인 바울사도가 전하는데도 그러니 우리들은 당연히 더 인식하여야 합니다. 지상에는 두 무리가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측과 그 반대 측이 있다는 것을. 그러나 결국은 마귀와 그 일당들은 손을 들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9절에 ‘성령이 충만하여…’라고 했습니다. 복음은 사울과 바나바와 마가요한만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신 것입니다. 전폭적인 지지와 지원을 아끼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신 성령께서 함께 하십니다. 비록 우리들이 부족하고 연약해도 성령께서 함께 하심을 우리는 늘 인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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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에게(사도행전10:34-43)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무척이나 증오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 인측으로 볼 때 이방인보다는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사마리아 사람들을 죄인 취급하듯 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에서 갈릴리를 가려면 사마리아를 거쳐야 합니다. 그래야 가깝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이 보기 싫어서 일부러 먼 곳으로 돌아갔습니다. 아무리 가까워도 사마리아는 통과하기 싫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rm]vo/Shômerowm쇼므론)의 뜻은 ‘감시산’이라는 뜻입니다. 사마리아는 이스라엘의 오므리 왕에 의해 동일 이름의 산(암6:1) 위에 건설된 도시입니다(왕상16:24). 에브라임 지파에 위치해 있습니다. 사마리아는 북왕국의 수도였으며 이스라엘의 왕들의 거처였습니다. 사마리아는 앗수르왕 살만에셀Ⅳ에 의해 3년 동안 포위되었었습니다. 그 후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사르곤(Sargon)이 사마리아를 주전722년에 탈취하여 유린하였습니다. 이때 사르곤은 이스라엘의 10지파를 국외로 추방하고 그 자리를 다른 이주자들로 채웠습니다(왕하 17:5,24, 18:9). 따라서 사마리아는 순수한 유대인 혈통이 아니었습니다. 혼혈인 것입니다. 이러다보니 정통유대인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무척이나 혐오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대하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러한 때에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계시하신 것입니다.

이방인 고넬료에게 간 베드로가 ‘입을 열었습니다.’ 이 말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이방인들과 유대인들과의 막힌 담을 허무는 말입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접근하는 것은 파격이었습니다. 사실 누가도 이방인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34). 어떤 나라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신다고 했습니다(35). 주님으로 인하여 화평의 복음을 전한다고 했습니다(36). 갈릴리에서 시작된 복음이 유대에 퍼져나간 것을 봐서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일하실 때 성령을 기름 붓듯이 부으셔서 마귀에게 눌린 자를 고쳤습니다. 이 일에 우리가 증인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결국 부활하신 예수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모두 죄를 용서받는다고 했습니다.

사도들은 지상에서 최상의 상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상품은 전할 때 받기만 하면 됩니다. 물론 그 선물을 거절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거절은 자유지만, 그 결과는 옵션이 아닙니다. 그 선물은 성령과 함께 주어집니다. 성령괴 함께 갑니다. 이미 유대에서 많은 사람들이 선물을 받았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도 받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도 받았습니다. 에디오피아 사람도 받았습니다. 다메섹사람들도 받았습니다. 이제 고넬료 같은 이방인들도 받았습니다. 이제 복음은 범세계적이었습니다. 거침없이 복음은 전해졌습니다. 마치 바람이 불듯 복음은 전해졌습니다. 그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지옥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가정이 건짐을 받고 지역이 건짐을 받았습니다. 국가가 건짐을 받았습니다. 하늘에서 땅으로 전해졌습니다. 다시 하늘로 가서 살아야 할 놀라운 상품이었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사도들이 이방에 그 선물은 전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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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바에서 베드로를 통한 복음(사도행전9:36-43)

베드로가 룻다에 있었을 때, 욥바에서 두 사람을 보내 급히 와달라고 기별을 했습니다. 다비다(도르가)라는 성도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다비다(Tabiqav/tabithâ)는 ‘사슴’이라는 뜻입니다. 그녀의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Dorkav")/dorkâs/영양)였습니다. 도르가는 헬라식 이름입니다. 그녀가 살던 지역의 성도들은 그의 죽음을 무척이나 애통해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의 자비로운 행위 때문이었습니다. 룻다에서 베드로로 인해서 애니아가 고침을 받았다는 소문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낸 것입니다. 베드로를 속히 오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다비다는 병들어서 일어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녀를 씻겨서 다락에 뉘어놓고 베드로를 불렀습니다. 욥바 사람들은 능히 그녀가 살 것을 믿었기 때문에 베드로에게 사람을 보낸 것입니다. 그녀의 선행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 지역에 있는 모든 과부가 다락으로 올라와 그녀가 만들어준 옷들을 다 내어서 보여주었습니다.

베드로는 사람을 다 내어 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시체를 향하여 ‘다비다야 일어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다비다가 일어났습니다.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았습니다. 베드로는 다비다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리고 밖에 있는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렀습니다. 다비다의 살아난 것을 보였습니다. 베드로의 이러한 일은 금방 욥바에 소문이 퍼졌습니다. 욥바의 많은 사람들이 이로 인해서 주를 믿게 되었습니다. 누가 이일을 했습니까? ‘베드로’입니까? ‘다비다의 선행’입니까? 바로 이 일을 하신 분은 성령입니다. 베드로가 했고, 다비다의 선행으로 인해서 이러한 기적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면 큰 잘못입니다. 성령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 거침없이 성도들의 하는 일에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2:41절을 보면 복음으로 인해서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했더라고 했습니다. 42절을 보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고 기도했습니다.’ 47절에도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고쳐준 것을 사람들이 기이히 여겼습니다(3:10). 4:4을 보면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사람이 남자만 5000명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4:21). 4:32-37절을 보면 믿는 무리들이 한 마음 한 뜻이 되었습니다. 이 말은 마치 가족과 같아서 물건을 서로 통용할 정도였습니다. 5:14을 보면 믿고 주께로 나오는 남녀의 수가 큰 무리라고 했습니다. 추상같은 박해에도 불구하고 어디에 있든지 복음을 쉬지 않고 전했습니다(5:42). 6:7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했다’고 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 후에도 사마리아와 유대에 흩어져 복음을 전했습니다(8:4). 사마리아 성에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8:4). 복음이 에디오피아, 사마리아, 아소도에 두루 전해졌습니다. 다메섹에서는 유대인들을 복음이 굴복시켰습니다.유대와 갈릴리, 사마리아에 성도들이 많아졌습니다. 복음은 사론, 룻다, 욥바에 계속 전해졌습니다.

복음이 전해짐은 사람들을 통하되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이 과정에 병도 고쳐지고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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