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분류 전체보기 (1477)
교회소개 (1)
교회약도 (1)
후원계좌 (1)
대요리문답1 (2)
하이델베르그요리문답 (4)
소요리문답 (1)
좋은글들모음 (49)
설교자료 (10)
연관 블로그 (2)
성경의 공인 (1)
홍수까지의 연표 (1)
이스라엘 분열사 (1)
10대 박해 (1)
성경숫자의 상징 (1)
-------------------- (0)
창세기새벽강해 (142)
출애굽기 새벽강해 (262)
마태복음 새벽강해 (267)
사도행전 새벽강해 (366)
로마서새벽기도 (216)
빌립보서 (0)
- 에베소교회 (1)
- 서머나교회 (1)
- 버가모교회 (1)
- 두아디라교회 (1)
- 사데교회 (0)
- 빌라델비아교회 (0)
- 라오디게아교회 (1)
성경 개관 (0)
- 에스라, 느헤미야 (1)
- 학개 개관 (1)
- 스가랴 개관 (1)
- 사도행전 (1)
- 고린도전서 (2)
- 고린도후서 (2)
- 빌레몬서 (1)
- 야고보서 (1)
기도 (1)
성경 각 권의 주제 (1)
예배순서 (4)
예화 (2)
찬양 (1)
- 온전히 (1)
- 창세기 (4)
- 출애굽기 (1)
- 레위기 (2)
- 민수기 (1)
- 신명기 (1)
- 여호수아 (1)
- 사사기 (1)
- 룻기 (1)
- 사무엘상 (1)
- 사무엘하 (1)
- 열왕기상 (1)
- 열왕기하 (1)
- 역대상 (1)
- 역대하 (1)
- 에스라 (1)
- 느헤미야 (2)
- 에스더 (1)
- 욥기 (3)
- 시편 (1)
- 잠언 (1)
- 전도서 (1)
- 아가 (1)
- 이사야 (2)
- 예레미야 (1)
- 예레미야애가 (1)
에스겔 (1)
- 다니엘 (1)
- 호세아 (1)
- 요엘 (1)
- 아모스 (1)
- 오바댜 (1)
- 요나 (1)
- 미가 (1)
- 나훔 (1)
- 하박국 (3)
- 스바냐 (1)
- 학개 (2)
- 스가랴 (1)
- 말라기 (1)
- 마태복음 (3)
- 마가복음 (7)
- 누가복음 (1)
- 요한복음 (3)
- 사도행전2 (2)
- 로마서 (1)
고린도전서 (0)
고린도후서 (0)
- 갈라디아서 (1)
에베소서 (0)
빌립보서2 (0)
골로새서 (0)
데살로니가전서 (0)
데살로니가후서 (0)
디모데전서 (1)
디모데후서 (0)
디도서 (0)
빌레몬서 (0)
히브리서 (0)
야고보서 (0)
베드로전서 (0)
베드로후서 (0)
요한일서 (0)
- 요한이서 (1)
- 요한삼서 (1)
- 유다서 (1)
- 요한계시록 (1)
붓글씨 (9)
수채화 (1)
공지사항 (0)
- 게시판 (29)
철학.인문학 (8)

RECENT ARTICLE

RECENT COMMENT

ARCHIVE

LINK



  1. 2015.12.06
    에베소의 회당
  2. 2015.12.04
    요한의 세례와 성령세례
  3. 2015.11.29
    아볼로
  4. 2015.11.28
    성도를 강하게 하는 바울사도
  5. 2015.11.26
    바울의 3차전도 여행
  6. 2015.11.23
    에베소교회
  7. 2015.11.19
    바울의 서원
  8. 2015.11.16
    성도들에 대한 세상의 태도

에베소의 회당(사도행전19:8-9)

바울은 3차 전도여행 중에 에베소의 회당에서 3개월을 가르쳤습니다. 성경은 담대히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고 권면했다고 했습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임과는 달리 어떤 사람들은 싫어했습니다. 이 사람들의 상태를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았다고 했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사람들의 앞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고 권면한 것을 비방했습니다. 이에 바울은 이들을 떠났습니다. 즉 회당을 떠났습니다.

‘마음이 굳다’(sklhruvnw/skllerûino라는 말은 의학용어입니다. 어떤 것이 고착화되는 상태입니다. ‘스클레뤼노’는 본래 의학 용어로서 히포크라테스의 저작에서 최초로 발견되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3개월을 날마다 담대하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가르치고 권면했지만, 이들은 마음에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잘못된 데이터로 인해서 바울의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에 대해서 H. L. Ellison은

처음에 유대인과 이방인은 모두 그리스도인을 유대교의 한 분파로 간주하였다. 그로 인하여 유대교 당국이 교회를 반대하고 대적하였다. 유대교는 율법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방인의 입교와 교회의 교리를 반대하였다. 로마에 대항하는 유대인의 반란(66-73-132-135)이 있은 후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로부터 분리되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반란을 지지하기를 거절하였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그들을 민족의 적으로 간주하였다. 이때부터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은 극히 소수였다고 했다. 이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을 선을 미워하는 자로 간주하였다. 교회가 Constantinus에 의해 공인되었을 때, 유대인에 대한 법적인 차별은 증가하였다. 점진적으로 유대인들은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였다. 프랑스 혁명 때까지 유대인에 대한 교회와 국가의 태도 사이에는 아무 차이가 없었다. 암흑시대와 중세기에 유대인은 계속 괴롭힘과 거부를 받았고 때때로 학살을 당하였다. 비참한 예는 제1차 십자군 원정(1096-1099) 중에 발생하였다. 영국은 1290년에, 프랑스는 1306년과 1322년과 마지막으로 1394년에 유대인을 추방하였다. 점점 더 많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거나 추방 중에 하나를 택일하는 선택의 기회가 유대인에게 주어졌다. 1391년에 스페인에서는 유대인 대학살이 있었고 이로 인해 종종 명목상이기는 하지만 많은 “마라노들”(Marranos/추방과 폭동에 쫓겨 기독교를 받아들인 스페인계 유대인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종교재판은 그 공포와 함께 순수한 신앙을 조사하였다. 결국 모든 유대인들은 1492년에 스페인에서 추방당하였다. 이 시기에 유럽에서는 그리스도인과 유대인의 접촉이 극히 적었다. 유대인은 강제로 구별되는 옷을 입고 특별한 지역(ghettos) 에서 살도록 강요받았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통해서 소수의 학식 있고 보다 자유주의적인 사람들은 유대교와 유대인에 대한 견해를 수정하였다. 그러나 초기의 보다 우호적인 견해에도 불구하고 Martin Luther조차도 그들을 심하게 공격하고 경멸하였다. 유대인은 1598년 네덜란드에서, 1612년 함부르크에서, 1656년 비공식적으로 잉글랜드에서 정착이 허용되었다. 1354년부터 폴란드는 유럽의 유대 민족의 주요한 중심지였다. 그 나라가 약해지면서 유대인은 더욱더 Roman Catholic의 미움과 백성들의 적개심에 시달렸다. 1772년 이후 폴란드가 분할되었을 때 대개의 폴란드 유대인은 오스트리아의 Roman Catholic이나 러시아 정교회의 세력하에 있었다. 경제적 압박과 러시아의 대학살(1881-1914의 조직적인 유대인 학살(pogroms) 때문에 거의 2백만 명의 동유럽 유대인들이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18세기의 계몽주의에 의해서 사람들은 유대인에 대해 새로운 태도로 대하였다. 많은 사상가들은 전통적 기독교를 반대하면서 유대인에 대한 기독교적 관념들도 공격하였다. 이로 인해 프랑스 혁명 기간(1790) 중에 프랑스의 유대인들은 완전히 해방되었다. 1914년까지 전 유럽, 즉 러시아와 발칸반도의 국경 지방까지 해방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유대인에 대한 정치적 용납은 깊이 뿌리내린 보편적 편견을 제거하지 못했다. 1878년 반유대주의 운동에서 최악의 상태에 달하였는데 이 운동은 곧 모든 문명세계에 퍼져 나갔다. Hitler의 “최종적 해결책”이라는 표현에서 그 논리적 귀결을 보게 된다. 히틀러에 의해 전 세계 유대 민족의 3분의 1인 약 6백만 명이 희생당하였다. 유대인에 대한 차별대우가 없었던 미국에서도 유대인을 거의 모르는 지역에서조차도 반유대주의적 감정이 증가하였다.

초기 교회 이후 유대인을 위한 최초의 선교적 관심은 18세기 전반기에 모라비아교도들과 독일 경건주의자들에 의해서 나타났다. 그러나 1809년 영국 국교회와 1842년 자유교회 그리고 1840년 스코틀랜드에서 유대인 선교회가 출발하기까지는 중요한 진전이 없었다. 이 운동은 영국으로부터 다른 신교 국가들(특히 노르웨이)로 속히 퍼져 나갔다. 많은 유대인들이 동유럽에서 미국으로 이주하였기 때문에 미국에서 더 많은 선교 사업이 이루어졌다. 일부 Roman Catholic 교도들도 유대인에게 접근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대개의 개종자들은 유대민족의 이탈자들이었다. 그 이유는 한편으로는 과거에 대한 쓰라린 기억 때문이고 또 한편으로는 대개의 그리스도인들이 그 선교사들을 진정으로 지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유대인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939년과 Nazi의 유대인 대학살 이후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반유대주의가 사라지고 있다는 증거가 거의 없지만 직접적인 선교적 접근보다 이해와 편견의 제거 그리고 대화를 강조하는 경향을 보여 왔다(교회사핸드북, 1989, 50-51).

오늘날에 미국은 유대인들을 끔찍이도 대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미국으로 건너간 유대인들이 정치경제계를 장악했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Zionism으로 인해서 미국이라는 나라가 정책을 쓰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교회를 무척이나 핍박했던 자들입니다. 지금도 그들은 예수님을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사도행전 새벽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울에게 나타난 기적  (0) 2015.12.12
두란노서원에서  (0) 2015.12.08
요한의 세례와 성령세례  (0) 2015.12.04
아볼로  (0) 2015.11.29
성도를 강하게 하는 바울사도  (0) 2015.11.28
And

요한의 세례와 성령세례(사도행전19:1-7)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었을 때, 바울은 갈라디아와 브루기아(행18:23)를 순회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에 도착했습니다. 에베소에서 어떤 제자들을 만났습니다. 이들은 아직까지 바울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 역시 이들을 잘 몰랐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너희가 믿(었)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eij pneu'ma a{gion ejlavbete pisteuvsante" 묻는 말에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다시 질문합니다.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그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요한이 베푸는 세례는 회개의 세례라고 했습니다. 요한이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곧 그분이 예수그리스도라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셔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습니다. 그들이 열두 명 정도 되었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그들에 대한 질문은 그들이 그리스도예수를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에 대해서 알지 못했습니다.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했다’고 했습니다.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습니까? 에베소에는 아볼로의 영향을 받아 요한의 세례만 아는 자들이 많았습니다(18:24,25). 아볼로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제대로 가르쳐 복음을 확실히 깨닫고 고린도에 갔습니다. 그러나 에베소에는 아볼로의 가르침을 받았던 사람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것을 알고 있었던 바울이 주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으로 사역을 시작했습니다(Thompson).

요한의 세례만 안다는 것은 관용어입니다. 즉 물세례만 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세례인 성령세례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지식은 가지고 있었지만, 예수와의 인격적 만남과 신앙적 체험을 가지지 못했습니다(Gospel Serve). 따라서 요한의 세례는 물세례입니다(마3:11, 막1:8, 눅3:16, 행1:5). 구약에는 의식상의 씻음(ritual washings)이 있었습니다. 율법에는 의식상으로 부정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위한 정결의식이 있었습니다(레14:8-9,15).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제사장으로 세움을 받을 때 의식적으로 씻음을 받았습니다(레8:5-6). 이 같은 의식상의 씻음은 기도할 때 신령한 씻음을 위한 상징이 되었습니다()시51:1-2, 7-10/겔36:25-26). 메시아의 오심을 준비하는 요한의 회개의 세례는 그의 사역이 구약의 예비시대에 속해 있었다는 사실로 보아서(마11:13) 구약에 속하는 의식상의 씻음이라 여길 수 있습니다.

세례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날 밤에 주님께서 제정하셨습니다(마28:19). 세례는 신령한 사역으로서 자기백성에게 주는 그리스도의 사역입니다. 그리스도의 세례사역은 그가 택함 받은 자들을 그의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세례사역은 그가 택함 받은 자들을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새벽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두란노서원에서  (0) 2015.12.08
에베소의 회당  (0) 2015.12.06
아볼로  (0) 2015.11.29
성도를 강하게 하는 바울사도  (0) 2015.11.28
바울의 3차전도 여행  (0) 2015.11.26
And

아볼로(사도행전18:24-28)

누가는 아볼로의 이력에 대해서 말하기를 알렉산드리아태생이라고 말합니다. 아볼로는 디아스포라유대인입니다. 아볼로는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했습니다. 아볼로는 일찍 주의 말씀을 열심히 배웠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세례만 알뿐이었습니다. 아볼로가 에베소의 회당에서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에베소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아볼로의 가르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서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아볼로는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했습니다. 그와 같이 했던 형제들이 아볼로를 장려했습니다. 그리고 아가야의 제자들에게 편지를 아볼로를 영접하라고 했습니다. 아볼로는 교회에 많은 유익을 주었습니다. 아볼로는 성경으로 예수가 오실 메시아라고 가르치며 많은 유대인들을 공중 앞에서 압도를 했습니다.

바울사도는 자기 자신과 아볼로를 광범위한 사도 속에 포함시켰습니다(고전4:4-9).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했던 알렉산드리아의 아볼로는 바울이 3차 전도여행 중 에베소에 들렸을 때 만납니다. 누가는 아볼로의 탁월한 성경해석 능력을 설명하면서 아볼로가 신앙심이 돈독함은 물론이거니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로부터 개인적인 가르침을 받고난 이후 유대인들 앞에서 담대히 예수의 메시야 됨을 증거 하였는지를 기술했습니다(사도행전 18:24-28). 바울은 아볼로의 웅변과 지혜에 대해 언급하면서 아볼로도 권위 있는 한 사도로서 나름대로의 지위를 가지고 있음을 변호하였습니다(고린도전서3:1-8, 22). 아볼로는 당시 그레데에서 전도여행 중이던 디도에게 교법사 세나와 함께 천거되었는데(디도서3:13), 이것이 아볼로에 관해 찾아 볼 수 있는 마지막 기록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에서 일어난 파벌싸움을 심히 책망합니다. 그들은 바울과 아볼로를 경쟁자로 내세웠습니다. 그러나 이 두 사역자의 마음은 그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는 밀착된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두 사도는 설교자들의 최대 유혹인 시기심을 견디어 냄으로써 우정을 경험하였습니다. 바울은많은 고린도 사람들이 아볼로의 유창한 설교를 듣기 위해 몰려들었다는 말을 듣고 기뻐했습니다. 두 사람은 에베소와 고린도에서 제각기 전도를 하다가 후에 에베소에서 합류하였습니다.

아볼로에게는 뭔가 참신한 점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아볼로를 물에 비유했을 때, 그 점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누가는 아볼로에 대하여 영적 성실성의 측면에서 “뜨겁게 끓는 사람”으로 생각했는데 이것이 ‘열렬한’이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아볼로의 설교를 메마른 정원에 흘러드는 시원한 물줄기에 비유하여 “아볼로는 물을 주었다”고 말했습니다(사도행전18:25/고린도전서3:6). 점점 시들해지고 영적으로도 고갈되어 있던 고린도의 개종자들은 아볼로의 설교를 듣고 다시 소생하게 되었을 때, 사도바울은 능력 있는 동역자를 얻게 된 것을 매우 기뻐했습니다.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인으로, 이방 문학과 유대 문학이 교류되는 헬라 문화권의 중심지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만큼 학문이 출중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볼로의 구약성경에 대한 정통한 지식과 뛰어난 변론술은 알렉산드리아적인 배경의 영향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에서는 '필로'를 배출하였으며, 70인역본도 번역하여 유대인들에게 제공해 주었습니다.

아볼로를 볼 때에 아볼로는 참으로 겸손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학문이 출중하고 성경에 능한 자로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가르침을 받은 것, 그리고 바울사도와 같이 일하면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것, 얼마든지 고린도에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는데, 그 파당에 휘말리지 않은 것 등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목회자들은 많은 학문이 있으면, 그것을 자꾸 드러내려 합니다. 그리고 교만해지려고 합니다. 목회자만 하면 됐지, 정치판에 뛰어들려고 하고, 온통 자기주관대로 세상을 휘둘러보고 싶어합니다. 그러는 사이에 이 세상은 교회를 싫어합니다. 이 세상이 교회를 공격하게 되면 그에 따라서 전도의 문도 막히고 교회에 이미지가 자연히 실추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교회가 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새벽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베소의 회당  (0) 2015.12.06
요한의 세례와 성령세례  (0) 2015.12.04
성도를 강하게 하는 바울사도  (0) 2015.11.28
바울의 3차전도 여행  (0) 2015.11.26
에베소교회  (0) 2015.11.23
And

성도를 강하게 하는 바울사도(사도행전18:23)

초대교회에 있어서 안디옥교회는 예루살렘교회 못지않은 교회입니다. 바울사도의 1차에서 3차까지의 모든 여정을 안디옥에서 출발하고, 안디옥에서 끝냅니다. 바울사도는 2차전도가 끝나고 얼마간 안디옥교회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곧 안디옥교회에서 출발했습니다. 3차전도 여행이 시작된 것입니다.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강하게 했습니다. 안디옥교회는 전도여행의 기지입니다. 19:1에 나타난 실제거리는 2400km가 넘습니다. 바울은 실라와 함께 갔던 길을 따라서 육로로 소아시아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안디옥을 출발해서 에베소에 도착하기까지 약 6개월을 경과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때 처음에 방문했던 지역을 차례로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굳게 했다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온전한 진리의 지식을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그러나 처음으로 복음을 접한 사람들은 영적으로 나약해지려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교리적으로 약하고 신체적으로 나약해졌습니다. 이런 것이 습관적으로 찾아온다면 문제가 되는 것은 뻔한 이치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헌신적인 정신으로 거룩한 열의를 진작시켜주어야 합니다. 성도들은 예수그리스도를 계속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헌신해야 합니다. 바울사도는 교회들을 돌아보면서 이런 일들을 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성도들에게 교육만 시키면 강하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교육 저런 교육을 series로 교육시킵니다. 어떤 교회는 다른 교회성도들을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사회에서의 교회의 사정은 밝아지지 않습니다. 부패한 정치인들, 부패한 관료들, 부패한 사람들이 상당한 기독교인입니다. 교회가 이 사회를 선도해야 하는데 이 사회가 오히려 교회를 선도하려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회가 성도들을 강하게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강하다’는 것은 교육의 强度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진리를 말합니다. 현재의 많은 교회들이 세속화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마치 중세시대를 보는 듯합니다. 건물과 십자가는 많아지고 웅장한데 정작 신앙생활은 바닥입니다. 건물의 크기와 신앙생활은 반비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높이와 신앙생활이 반비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는 교회를 이 사회가 싫어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강하게 하는 것, 성도를 강하게 하는 것은 크기에 있지 않습니다. 조직에 있지 않습니다. 오직 말씀에 있습니다. 주위에서 칭찬을 받아야 좋은 교회이고 성도입니다. 레이디가가는 욕하면서도 그보다 더한 사람들은 덮고 못본체 하려는 교회는 결코 좋은 교회이고 성도일리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처럼 빛이요, 소금인 성도들이 그 말씀대로 변해가야 합니다. 성도들의 삶이 변화해야 사람들이 교회를 좋아합니다. 선교와 전도의 길이 막히지 않습니다. 교회가 세속화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진리에서 떠나면 세속화가 바로 코앞입니다.

'사도행전 새벽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한의 세례와 성령세례  (0) 2015.12.04
아볼로  (0) 2015.11.29
바울의 3차전도 여행  (0) 2015.11.26
에베소교회  (0) 2015.11.23
바울의 서원  (0) 2015.11.19
And

바울의 3차전도 여행(사도행전18:23-21:16)

3차전도 여행은 사도행전18:23-21:16까지입니다.

3차전도 여행은 마가로 인해서 바울과 바나바가 다투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1. 갈라디아와 브로기아에서18:23

2. 에베소에서 18:24-19:41

  a. 아볼로의 사역18:24-28

  b. 요한의 제자들이 성령을 받음19:1-7

  c. 두란노 서원에서 19:8-10

  d. 많은 기적 19:11-20

  e. 디모데와 에라스도의 파송 19:21,22

  f. 데메드리오가 큰 소동을 일으킴 19:23-41

3. 마게도냐에서 20:1-5

4. 드로아에서 20:6-12

5. 밀레도에서 20:13-38

6. 두로에서 21:1-6

7. 가이사랴에서 21:7-16

'사도행전 새벽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볼로  (0) 2015.11.29
성도를 강하게 하는 바울사도  (0) 2015.11.28
에베소교회  (0) 2015.11.23
바울의 서원  (0) 2015.11.19
성도들에 대한 세상의 태도  (0) 2015.11.16
And

에베소교회(사도행전18:19-21)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던 바울은 에베소에 왔습니다. 바울은 일행과 잠시 헤어져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했습니다. 에베소에서는 다행하게도 반대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여러 사람들이 더 있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에베소에 오래 있지 못했습니다. 바울사도가 에베소에 오래 있지 못할 이유에 대해 서방독본에 의하면(F.F.Bruce. 1986, 159), 바울사도가 유대의 명절인 유월절에 참석하기 위해 제 때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3월10일까지 항해가 금지되었기 때문에 에베소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명절 때까지 그를 팔레스타인에 갈 배가 에베소항구를 막 떠나려던 참이었기에 에베소에 작별을 고한 것입니다. 아마도 바울은 당시의 상황이 몹시도 아쉬웠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여러 지역에서는 유대인들의 반대로 애를 먹었는데, 에베소에서는 계속해서 말씀을 강론하라 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Efeso"/Êphesos)는 소아시아의 항구 도시입니다. 이오니아의 수도이며, 카이스터(cayster)강의 평원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복음전하는 중의 에베소가 중요한 것은 에베소는 시리아의 안디옥과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지중해 동쪽의 세 개의 큰 도시 중 하나입니다. 아시아의 로마 식민지의 중심지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에베소는 동쪽과 서쪽 사이의 바다 길과 간선도로 사이의 수송로를 잇는 연결 지점이었습니다(행19:21,20:1,17 딤전1:3 딤후4:12). 바울사도는 에베소와 고린도 사이의 일정한 교통로를 주로 이용하였습니다(고후12:14, 13:1). 주전6세기의 리디아의 크로에수스(Croesus of Lydia)와 페르시아의 키로스 2세(Cyrus of Persia)와 4세기의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은 원래 그 지역의 주민을 구성하고 있는 아시아 민족들과 이오니아 헬라인들(Ionian Greeks)에게 그들의 영향을 주었습니다. 주전190년경에 시작된 관대한 로마의 통치 하에서 에베소는 인종들이 녹아있는 항아리였습니다.

에베소는 제국의 국제적인 상업의 중심지였습니다. 또한 종교적인 싸움터였습니다. 주전560년 크로이소스(Croesus)의 시대로부터 페니키아의 아스타르테(Astarte/고대 셈족의 풍요와 생식의 여신)와 비슷하며 헬라인들에 의해 아르테미스(Artemis)로, 로마인들에 의해 다이아나(Diana)로 불리우는 리디아의(Lydian) 다산의 여신이 합법화된 매춘과, 상품화된 부속물들과 경이로운 신전들 등이 에베소의 생활을 지배하였습니다. ‘에베소의 도시’는 ‘예배자’일 뿐만 아니라 ‘신전을 지키는 자’ 또는 여신의 ‘관리인’이었습니다(행19:35). 에베소에는 마술의 추종자들과 마술을 상업적으로 장려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보수는 협의하에 협잡꾼들에 의해 청구되었습니다(행19:13-16,19). 성벽과 건축물들에 새겨진 글들은 미신이 널리 퍼져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들 지방의 상태들을 성도들에게 상기시켰습니다(엡4:19,5:3-12). 피온(Pion)산의 서쪽 비탈면에서 그 옛 도시를 내려다보면, 그 지방의 대표적인 은세공인으로 그의 다이아나 우상의 장사가 바울의 설교에 의해 손해를 입은 데메드리오가 규합한 군중의 무리가 바울에게 항의하여 모였던 곳에 대극장(Great Theater)이 서 있습니다. 그것은 직경이 150m로 25,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 극장을 항구와 이어주는 중심거리(Arkadiane)가 발굴되었습니다. 그 거리는 10m의 너비와 530m의 길이로, 대리석으로 포장되었습니다. 주랑을 갖춘 상점들이 줄지어 서 있었습니다. 그 거리는 항구의 화려한 아치형의 문에서 끝납니다. 이권과 성실이라는 엇갈린 풍조를 지닌, 엄청나게 부유한 에베소의 국제적인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바울의 도덕적 메시지가 분명한 생명의 길임을 인정하고(행19:9) 회당(행19:8)과 두란노서원(19:9)과 그들의 가정과 시장에서 그의 강론을 들었습니다. 비난과 정면적인 공격을 하지 않은 그의 메시지(행19:37)는 개종자를 얻었습니다. 적대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에베소가 그에게 전 소아시아로 가는 열린 문을 제공하였음을 깨달았습니다(행19:26 고전 16:9). 하나님께서는 어떤 곳에도 문을 여심을 알았습니다.

'사도행전 새벽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도를 강하게 하는 바울사도  (0) 2015.11.28
바울의 3차전도 여행  (0) 2015.11.26
바울의 서원  (0) 2015.11.19
성도들에 대한 세상의 태도  (0) 2015.11.16
회당장 소스데네  (0) 2015.11.13
And

바울의 서원(사도행전18:18)

바울사도는 고린도에 오래 머물렀습니다. 최소한 수개월을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고린도교회와 헤어졌습니다. 바울사도는 배를 타고서 수리아로 돌아왔습니다. 이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함께 동행했습니다. 바울은 이전에 서원을 했기 때문에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습니다.

민수기6:2-21을 보면 나실인의 서원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나실인(ryzIn:/nāzîr)는 ‘봉헌된 자’입니다. ‘나실인’은 ‘특별히 하나님에게 성별된 자’입니다. 서원으로 나실인이 될 수 있습니다(민6:2). 출생하면서부터 나실인이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삿13:5,7). 부모의 서원으로 나실인이 됩니다(삼상 1:11). 그러나 아무나 나실인이 될 수 없습니다. 나실인은 지켜야 할 사항이 많았습니다. 자기 몸을 구별해야 했습니다(민6:2). 포도나무 소산 및 독주를 금해야 했습니다(민6:4). 머리를 깍지 말아야 합니다(민6:5). 시체를 가까이 하여 몸을 더럽히지 않아야 합니다(민6:6). 심지어 부모 형제자매가 죽은 때에라도 그로 인하여 몸을 더럽히지 않아야 합니다(민6:7).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민6:8). 나실인은 서원의 기간이 있었습니다. 일정 기간 동안의 서원기간이 있었습니다(민6:8,12). 영구적으로 서원하는 기간이 있었습니다(삿13:7,삼상1:11). 나실인이 더럽혔을 때 정결케 하는 의식이 있었습니다(민6:10,11). 자기 몸을 성별하는 날을 새로 정했습니다(민6:12). 나실인의 정한 기간이 완료되었을 때의 의식은 그 사람을 회막문으로 데리고 갔습니다(민6:13). 그리고 번제물로 일년 된 흠 없는 수양 하나와 속죄 제물로 일년 된 흠 없는 어린 암양 하나와 화목제물로 흠 없는 수양 하나를 드렸으며(민6:14). 무교병 한 광주리와 고운 가루에 기름 섞은 과자들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들과 그 소제물과 전제물을 드렸습니다(민 6:15). 제사장은 그것들을 여호와 앞에 가져다가 속죄제와 번제를 드렸습니다(민6:16). 화목 제물로 수양에 무교병 한 광주리를 아울러 여호와께 드리고 그 소제와 전제를 드렸습니다(민6:17). 자기 몸을 구별한 나실인은 회막 문에서 그 머리털을 밀고 그것을 화목제물 밑에 있는 불에 두었습니다(민6:18). 자기 몸을 구별한 나실인이 그 머리털을 민 후에 제사장이 삶은 수양의 어깨와 광주리 가운데 무교병 하나와 무교전병 하나를 취하여 나실인의 두 손에 두었습니다(민6:19). 여호와 앞에 요제로 흔들었습니다. 흔든 가슴과 든 넓적다리는 성물은 제사장에게 돌렸습니다. 그 후에 비로소 나실인이 포도주를 마실 수 있었습니다(민6:20).

삼손이 ‘나실인’이었습니다(삿13:5,7,17). 사무엘이 나실인이었습니다(삼상1:11). 레갑족속이 서원했습니다(렘35:6,7). 세례요한이 나실인이었습니다(눅1:15). 그리스도께서 나실인이었습니다(히7:26). 바울이 일찍 서원을 했습니다(행18:18).

바울의 서원에 대해서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 F. F. Bruce는 고린도에서의 선교사역과 관련된 어떤 목적을 위해서 한 것으로 여겼습니다(F. F. Bruce, 1986. 157). Thompson은 바울이 유대인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작정한 서원을 중히 여겼기 때문에 서원의 규례를 지켰다고 했습니다. Open Bible은 바울이 다가올 유월절을 예루살렘에서 지키기 위해서와 하나님을 의뢰하는 믿음의 새로운 각오를 통해서 시련과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서원했다고 했습니다. Matthew Henry는 유대인과의 조화를 위해서일 뿐만 아니라 도덕적이며 경건한 의미를 지속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Matthew Henry, 1981. 206). Calvin은 예루살렘에 찾아가 만나려고 했던 유대인들에게 적응하려고 하는 것 같이 보인다고 했습니다(John Calvin, 1979, 193). 유승원도 바울사도가 경건한 유대인으로서 율법의 의무를 다하려 머리를 깎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사도가 서원해서 머리를 깎았던 것은 1,2차 전도여행 중에 못 볼 것을 보았고, 여러 더러운 것들을 보는 가운데 혹 마음이 더러워지지 않았을까 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2000년 전이지만 사람의 타락은 지금과 같았을 것입니다. 특히 그리스지방 같은 곳은 소돔과 고모라이상이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런 것들을 본 바울사도는 머리를 깎고서 서원을 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새벽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울의 3차전도 여행  (0) 2015.11.26
에베소교회  (0) 2015.11.23
성도들에 대한 세상의 태도  (0) 2015.11.16
회당장 소스데네  (0) 2015.11.13
갈리오 총독  (0) 2015.11.10
And

성도들에 대한 세상의 태도(사도행전18:12-17)

성도들에 대한 재판은 항상 불법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재판부터 시작해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정의로운 재판은 별로 없습니다. 모두 불법재판입니다. 특히 여론재판이 먼저 공격합니다. 예수님의 불법재판, 스데반의 불법재판, 야고보의 불법재판, 초대교회시대 때 로마와 유대인들의 불법재판, 암흑시대에 불법재판 등 수없이 많습니다. 교회는 그 모든 일들을 모두 견뎌왔습니다.

로마황제 중에 기독교를 박해한 Diocletianus(Gaius Aurelius Valerius Diocletianus)는 284년부터 305년까지 로마 황제였습니다. 하층민 출신이었던 그는 전임황제 누메리아누스의 경호대장이었습니다. 284년 사산조 페르시아 원정 중 누메리아누스 황제가 니코메디아에서 살해되었습니다. 그러자 휘하의 군단이 디오클레스를 황제로 옹립했습니다. 284년 Diocletianus는 장군 막시미아누스를 부제(Caesar)로 임명하고 285년 6월 카리누스 황제를 모이시아 지방에서 전사시키고 정식 황제에 올랐습니다. 286년 4월 1일 막시미아누스를 다시 정제(Augustus)로 승격시키고 공동으로 제국을 통치했습니다. Diocletianus는 사두정치체제를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제국을 동서로 양분하여 두 명의 정제(Augustus)가 맡고 각각의 정제는 부제(Caesar)를 하나씩 두어 방위분담을 나누어 통치하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Diocletianus는 로마제국에서 마지막이자 가장 강력하게 기독교를 박해한 황제였습니다. 303년 2월 그는 기독교 탄압을 위한 칙령을 발표했습니다. 교회들을 기초까지 파괴했습니다. 성경을 불에 태웠습니다.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일지라도 기독교이이면 박탈했습니다. 제국동방에서 저항이 일어나고 소아시아에서는 기독교인의 봉기가 일어나자 Diocletianus는 군대를 보내 진압했습니다. 사제들과 주교들을 체포하여 감옥에 넣고 그들이 로마 신의 제의에 참석하면 풀어 주었습니다. 304년의 마지막 칙령에는 기독교인은 고발이 없어도 추적하여 고문할 수 있도록 하였고 모든 사람이 로마신의 제의를 수행하여야 한다고 명령했습니다. 이를 어기면 사형이나 강제노역에 처했습니다. 이러한 기독교 박해는 대략 309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성도들에 대한 세상의 태도는 항상 강력했고, 잔인했습니다. 세상은 교회에 대해서 항상 비우호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주님의 명령으로 인해서 우상과 함께 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2세기경의 어떤 성도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항상 여러 곳에서 여러 지역에서 핍박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이런 것을 이미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감안을 해야 합니다. 세상이 우리를 미워해도 세상을 우리가 미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자칫 우리들은 세상을 미워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교권화가 되기 쉽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모르나 우리들은 그들을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는 우리들이 대처를 해야 할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세상을 사랑하지는 않았으나 사람들은 불쌍히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그들에게 전한 이유입니다

'사도행전 새벽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베소교회  (0) 2015.11.23
바울의 서원  (0) 2015.11.19
회당장 소스데네  (0) 2015.11.13
갈리오 총독  (0) 2015.11.10
바울을 위로하시는 주님  (0) 2015.11.07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