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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창2:4-6)

성경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여러 개가 나옵니다. 그리고 그 이름들은 각각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yhiOla(Elohim>EE)은 복수형으로서 하늘이나 물처럼 제한 없이 크고 능력이 무한한 것을 표시할 때 사용하는 장엄복수로 이해해야 합니다. hwhy(YHWH)는 이스라엘과 특별한 관계를 가진 고유명사입니다. 이스라엘을 자기백성으로 선택하시고, 언약을 맺으시며,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신입니다.

이름은 신이든 사람이든 그 인격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존재의 이름을 아는 자는 누구든지 그 이름에 관한 힘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이름은 그 이름을 가진 자와 매우 밀접히 결합되어 그의 본성을 나타내는 하나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이름은 중요합니다. 예로 가인이란 말은 “소유”였습니다. 그러나 아벨은 그 이름의 뜻이 “허무, 무상”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많은 무리의 아버지”이며, 다윗은 “사랑받는 자, 두목”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 호세아, 예수는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어느 지역이나 어느 나라에서도 이름의 의미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이름의 의미는 독특하며 그 뜻에 반드시 큰 의미가 있습니다.

1장에서는 주로 하나님의 이름이 엘로힘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나 2:4절에서 여호와로 나타납니다. 엘로힘은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능동적이고 스스로 계시는 분“이라는 점과 ”이스라엘의 구속자“라는 점을 강조하는 칭호입니다. 여호와는 성경에서 무려 6,800회나 등장합니다.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신 여호와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歷史에 대해서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계신 분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역사가 이러하다고 4절에 말씀하셨습니다. 당시에는 여호와께서 땅에 비를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아직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밭에 역시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습니다. 본절은 인간이 이 땅에 존재하기 전의 지구상태를 묘사한 것입니다. 당시의 땅은 식물이 살기에 적합한 상태를 갖추지 않은 상태입니다. 비가 없는 땅은 안개만 지면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시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땅은 혼돈상태에 있었다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좀 더 질서 있는 상태로 만드셨습니다.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 환경을 형성케 하셨습니다. 수증기가 지표면에서 올라와 땅을 적신다는 것은 뒤이어 식물이나 동물이 존재토록 환경을 조성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 외에는 영원한 것이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영원하신 분이 세계를 만들고 우주를 조성하셨습니다. 어떤 물질로부터 만드신 것이 아니고 오직 무로부터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창조교리는 하나님의 무한한 속성으로부터 흘러나옵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존재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만물의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의존에 대한 개념은 성경전체에 걸쳐 있는 사상입니다. 우리의 종교 의식 속에 포함되어 있는 사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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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을 제정하심(창2:1-3)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창조사역의 완성을 말하고 일곱째 날에 창조하시기를 중지하심으로써 그 날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케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놓지는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존하심이 계속된 것입니다.

안식일은 모세시대 아래에서의 의무를 다루는 것이 아니고 안식일은 영속적인 의무의 문제입니다. 안식일은 창조시에 제정되었습니다(창2:2,3).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사람을 위해 설정해 놓으신 사물의 질서입니다. 죄와 구속의 필요와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즉 노동(창2:15), 혼인(창2:24,25), 번성(창1:28)의 제도들과 유사합니다. 안식일 제도는 사람으로서의 사람의 복리를 위해 사람에게 주어졌습니다. 사람의 노동이 결국 하나님 자신의 안식과 유사한 안식일의 안식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확신과 약속이 사람에게 확장되었습니다. 안식일은 창조명령입니다. 그 타당성과 그 필요성과 그 인가는 죄로부터 생겨난 긴급 사태 또는 구속적 은혜의 규정들로부터 연유하지 않습니다. 죄가 들어오자 다른 제도들과 마찬가지로 안식일의 안식이 준수되어야 하는 상황이 변경되었습니다. 구속적 은혜의 힘들은 이제 그 제도들의 적절한 수행에 필수불가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죄의 유입이 노동, 혼인, 번성의 제도들을 폐기하지 않았듯이 안식일 제도를 폐기하지 않았습니다. 죄로부터 생겨난 부패는 이러한 하나님의 제도들로부터 나오는 의무들을 결코 부적절하거나 불필요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죄는 창조명령을 폐기하지 않았습니다. 구속은 창조명령의 의무와 성취를 불필요하게 하지 않습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모범에 의존합니다(창2:2). 안식일은 네 번째 계명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20:11). 이것은 사람에 있어서 엿새 동안의 노동과 하루의 안식의 질서가 하나님이 창조사역의 위대한 구도에서 따랐던 질서를 본 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엿새 동안 계속 창조하셨고, 제 칠일에 안식하셨습니다. 이것이 사람을 위한 모범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창조를 모두 마친 일곱째 날을 위하여 중요한 일을 하십니다. 창세기2:3이 그 내용을 소개하였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중요한 일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주셨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오늘 우리들이 주일을 지키는 근거를 제공합니다.

안식일을 하나님께서 복주셨습니다(창2:3).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능력을 지닌 자를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라고 불렀습니다(창 24:31). 특별히 이 날은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포옹하신 날입니다. 일곱째 날을 거룩케 하셨습니다(카도쉬). 다른 날과 구별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 날은 하나님과 교재하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이 날에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의 하신 일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정성을 쏟아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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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사람(창1:26-31)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Wnmel]x'B];베찰메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Wnte=Wmd]Ki; 키드무테누)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하나님이 자기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사람이 다른 생물과 다른 점은 “사람만이 하나님의 참된 형상이다”는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라는 말이 이미 삼위일체 되심이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초기의 신학자들 즉 이레네우스와 터툴리안은 앞 단어 형상(첼렘)은 신체적 특징을 이야기하고 모양은 사람의 영적인 본성이라 했고,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와 오리겐은 그러한 견해를 거부하였습니다. 모양이 사람의 사람됨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은 아니지만 수련되거나 상실될 수 있는 자질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아타나시우스, 암부로스, 어거스틴 역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중세의 스콜라학자들은 형상은 이성과 자유의 지성적 능력들을 함축하고 있고, 모양은 원시적 거룩과 의로움을 가리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두 단어를 구분하는 것을 거부하고 의로움이 인간의 참된 본성에 본래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Luther는 원시적 의로움의 관점에서 형상을 이해하여 아담이 타락하던 때에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상실되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Cavin은 하나님의 형상이 주로 마음 곧 영혼과 그것의 능력들에 있는 것으로 보면서도 사람의 어떤 부분도 심지어는 신체까지도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형상은 자연적 재능뿐만 아니라 원시적 의로움의 영적 자질들 곧 지식, 의로움과 거룩을 포함하였습니다.

개혁주의 견해는 하나님의 형상이 형식적으로는 인격의 관점(이성, 감정, 도적적책임성)에서 정의되고 실질적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의 관점에서 이해되는 것이 보편적입니다.

존 머레이는 창세기 5:3의 형상이 창세기 1:26을 반추하고 있으며, 창세기 9:6에서의 형상은 타락한 사람과의 관계가 있다고 했고, 고전11:7의 형상 역시 남자의 형상이나 여자의 형상이 같다고 전제했습니다. 또한 약 3:9의 형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이상으로 살펴볼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경건한 자들에 국한시키는 것은 무리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자의식적이며, 이성적이며, 자유로우며, 도덕적이며, 종교적인 행위주체가 있습니다. 사람은 타락에 의해 왜곡되긴 했어도 없어지지 않은 본래적인 유사성을 따라 그의 삶과 행위를 영위해 나가는 것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형상이 사람에게 속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책임의 근거가 되는 것인데 책임의 근거는 하나님에 대한 형이상학적 유사성이다. 그리고 책임의 완수는 하나님의 형상에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만 사람임을 발견할 수 있고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서만 우리 영혼의 갈망을 채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베소서 4;24과 골로새서 3:10은 진리의 지식, 의로움, 거룩함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들에서 규정하는 것은 참다운 하나님의 형상이려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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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적 인간관(창1:26-31)

基督敎的 人間觀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합니다(창 1:26). 이는 첫째로 인간은 우연한 進化의 과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적인 행위로 말미암아 창조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존재하게 된 데는 하나님께서 의도하심입니다. 둘째 인간에게 있어 하나님의 형상은 본질적인 것입니다.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없다면 인간은 인간일 수 없습니다. 모든 피조물들 가운데 오직 인간만이 창조주 하나님과 인간적인 관계를 가질 수 있으며 하나님께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인간은 또한 영원의 차원이 있습니다. 그에게는 시간상 분명한 출발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영원하신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영원한 미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인간에게 선한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일시적인 복락이나 육체적 안위와 관련해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에게는 충족되어야 할 또 다른 차원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인간도 육체를 가진 피조물로 동물 세계의 한 부류이기 때문에 동물들과 똑같은 필요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육체적인 복락도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시기 때문에 우리역시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에 자신이나 자기의 행복을 최고의 가치로 여길 때에는 결코 자신의 참된 의미를 발견할 수 없으며, 그것을 찾아 나선다 할지라도 행복이나 성취감 또는 만족감 같은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인간의 가치는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에 그분을 섬기고 사랑할 때만 인간은 만족을 얻게 됩니다.

현대문화가 직접적 간접적으로 제기하고 있는 많은 질문들은 기독교 인간관에 의해 해결됩니다. 이 인간관은 개인에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심어줍니다. 성경은 인간을 단순한 기계로 보지 않습니다. 성경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 보시기에 귀한 존재이며 하나님께서 다 아신바 된 존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까지 다 헤아려 아십니다(마10:28-31). 더 나아가 인간에 대한 기독교의 견해가 다른 여타 견해보다 인간 현상의 모든 것을 더욱 완전하게 그리고 훨씬 왜곡되지 않은 해석을 하게 합니다. 이는 삶에 대한 다른 어떤 접근보다 궁극적인 면에서 인간을 가장 만족시키는 방법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역할을 다할 수 있게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 그 하나님은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역사가 그의 손안에 있습니다. 모든 우주사가 그의 손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궤변에 지나지 않는 초등학문의 인간관을 믿어선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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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대한 그릇된 생각들(창1:26-31)

인간에 대해서 많은 상이한 견해들이 존재하는데 비기독교적인 인간관 중에서 세 가지의 견해가 있습니다.

인간은 기계이다. 인간에 대해 널리 팽배해 있는 관점은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예로 고용주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체력과 에너지 그리고 기술이나 능력에 관심이 있습니다. 이를 근거로 어떤 고용주들은 고용인들을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고 그들의 삶의 거의 모든 영역을 자신들이 다스린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인간관을 가진 사람들의 관심은 자신이 고용한 인간(機械)이 계속해서 효과적으로 일하도록 필요한 조치를 취해주는 것입니다. 오직 작업능률을 위해서 모든 것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이같은 인간관은 사람들을 근본적으로 물건처럼 취급하며 목적 자체라기보다는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여길 뿐입니다. 그들은 쓸모가 있을 때에만 가치가 있습니다. 인간을 기계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수단으로 보는 자들의 생각입니다.

인간은 동물이다. 또 다른 견해는 인간을 근본적으로 동물 세계의 한 구성원이요 고등 동물에서 파생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봅니다. 인간은 다른 모든 동물들과 같은 종류의 과정을 거쳐 존재하게 되었으며 인간과 다른 동물들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전혀 없습니다. 유일한 차이점은 정도의 차이일 뿐입니다. 이러한 인간관은 아마도 행동심리학에서 가장 잘 발달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는 인간의 동기부여가 주로 생물학적 충동에 의해 일어난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지식은 인간의 자기성찰을 통해서가 아니라 동물들에 대한 실험을 통해서 얻어집니다. 인간의 행동은 동물에게 사용된 실험과정들과 유사한 것들에 의해서 영향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인간은 우주의 卒이다. 이 이론은 인간의 운명을 지배하되 인간에 대해서는 전혀 참된 관심을 갖고 있지 않는 세상을 다스리는 힘에 의해 인간이 좌지우지 된다는 사상입니다. 이러한 힘은 우연의 힘으로 보입니다. 때때로 그것들은 인격적인 힘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정치적 초강대국의 경우처럼 인간이 전혀 규제할 수도 없고 비관적인 견해입니다. 까뮈의 시지프스 신화를 개작하는 가운데 이 사상을 이끌어냈습니다. 여기에서 시지프스는 전혀 무력한 인간으로 한없는 과정만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우주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는 졸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꽃입니다. 창조물 중의 꽃입니다. 어떤 우주에도 인간만큼 우수한 피조물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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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만드심(창1:26-31)

그리고 엘로힘이 우리가 사람(아담)을 만들자고(아사)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형상을(첼렘) 따라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모양대로(데무트) 만들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사람)로 다스리게 하자는 것입니다. 다스림의 대상은 바다의 고기였습니다. 공중의 새였습니다. 땅의 육축이었습니다. 온 땅이었습니다. 땅에 기어다니는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구에 있는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습니다.

사람은 창조의 면류관입니다. 하나님의 특별배려의 대상입니다. 또한 성경에서의 하나님의 계시는 사람에게 주어진 제시일 뿐만 아니라 사람이 매우 중요하게 관련된 계시입니다. 막연하게 추상적인 계시가 아니라 그의 피조물들과 관련된 계시입니다. 특별히 사람과 관련된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취급하는 계시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류를 취급하시는 기록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준비하셨고, 또한 그가 준비하시려고 하는 救贖의 계시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성경에서 중심적인 중요성의 위치를 차지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의 기원에 대한 성경은 이중의 기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창세기 1:26,27에 그 다른 하나는 창세기 2:7, 21-23에 있습니다. 고등비평은 창세기의 저자가 두 개의 창조 설화, 즉 창세기1:1-2:3에 있는 첫 번째 설화와 창세기 2:4-25에 있는 두 번째 설화를 종합하였으며, 그리고 이 두개의 설화는 독립적이고 모순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Laidlaw는 창세기의 저자가 두 자료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상이한 창조기사를 찾으려하지 않았습니다. 2:4의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는 구절은 기원이나 시작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족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설화는 만물들의 창조기사를 그것이 발생한 순서대로 담고 있지만 두 번째 설화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에서 다른 사물들과 사람과의 관계를 통합하고 있습니다. 즉 창조의 왕인 사람을 위해 적절한 거주지를 준비하는데 기여하였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피조물 가운데 처하여 채소나 동물 세계에 의해 옹위를 받으며 또한 어떻게 그의 역사를 시작했는가를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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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생물을 만드심(창1:24,25)

그리고 엘로힘이 말씀하셨습니다. 땅(하,에레츠)은 살아있는 존재(하이 네페쉬)를 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자 땅위의 생물이 존재하였습니다. 땅위에 종류대로 살아 움직이는 생물이 존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땅위의 생물을 종류대로 만드셨습니다. 육축이 종류대로였습니다. 땅위에서 기는 것들이 종류대로였습니다. 땅위의 짐승이 종류대로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믿지 않고 생명이 어떻게 존재하였는가를 세 가지 학설로 假定하였습니다. 이원론(二元論), 유출론(流出論), 진화론(進化論)입니다.

창조라는 것은 이미 있던 것의 발견이 아닙니다. 전혀 없는 것에서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상에서 사람들이 창조적이다 했을 때 그 말은 틀린 말입니다. 창조는 하나님이 아니면 아무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창조는 이미 있던 것의 결합도 아닙니다. 전혀 없었던 상태인데 만드는 것이 창조입니다. 그래서 창조는 하나님의 산물입니다. 사람도 아니고 어떤 신들도 아닙니다. 창조할만한 역량이 하나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창조하시는 하나님께서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hm;heB)] ‘짐승, 야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대로 되었습니다. 이것이 창조입니다.

창조는 세상을 만든 어떤 선재적 물질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즉 성경에 주어진 창조사역에 관한 묘사들은 유출이나 조립의 관념을 배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만물의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의존속에, 그리고 그분의 그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주(ta; pavnta)는 하나님으로부터(ejk qeou') 나오는 것이지 어떤 미지의 대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알아야 할 것은 우리의 하나님은 창조주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믿는 도덕군자나 위인이 아니고 그 사람들조차도 있게 하신 창조주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은 우리가 더욱 그에 대한 신앙을 하자는 공식이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것을 만드신 분으로서 우주의 주인이시고 관리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국내외적으로도 어수선한 분위기입니다. 무엇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 없는 것 같은 때입니다. 그러나 창조주하나님은 결코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어려울 때도 함께 하시고, 좋을 때도 함께 하십니다. 그 분은 땅의 모든 생물을 만드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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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와 물고기를 만드심(창1:20-23)

20절을 보면 물들(하샤마임)이 하나님으로부터 명령을 받습니다. 번성케하라(이쉬르추)“계속 번성케하라”고 명령을 받습니다. 이것은 [충만하다,가득차다. 우글거리다]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실 때 이미 물들은 생명력이 있는 것입니다. 물고기가 살 수 있도록 물속에는 산소가 있게 되었습니다. 물고기가 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여 놓으신 것입니다.

공중에는 새가 날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새가 계속 날도록 하셨습니다. 역시 공중은 새가 살도록 환경을 조성하셨습니다. 이후로 공중에는 새가 살고 물속에는 물고기가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물고기를 종류대로 만드셨습니다. 새를 각 종류대로 만드셨습니다.

다. 창세기1:21에서 “민”은 물속의 생물들과 공중의 새들과 같은 광범위한 군(群)을 구별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창 1:24-25에서 역시 가축과 기는 것들과 같은 광범위한 군(群)에 대해, 겔 47:10에서 고기(fish)에 대해 사용되었습니다. 이와 달리 “민”은 레 11:13-19과 신 14:12-18에서 매 종류와 새매 종류, 레 11:29-30에서 모든 도마뱀 종류, 레 11:23에서 메뚜기 종류 같은 보다 좁은 범위의 군(群)에 대해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민”은 생물학자들의 분류법인 종(種)은 아닙니다. 때로는 속(屬; genus), 때로는 과(科; r,family)나 목(目;order)으로 분류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 기본 종류 안에서 다양성을 창조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각 생물은 그 종류의 범위를 넘을 수 없습니다. 다만 그 안에서 다양성 곧 많은 변종들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생물이 종(種)의 변이로 말미암아 하등 생물이 고등 생물로 발전했다는 것, 곧 계(界), 문(門), 강(綱)을 넘어서 발전했다고 보는 진화론자들의 견해를 정면으로 반대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든 것들을 복되게 하셨습니다. 계속 복(바라크)을 그것들에게 주셨습니다. 그것들은 생육할 복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습니다. 그것들은 계속해서 생육합니다. 그치지 아니하고 생육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계속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다섯 째 날까지의 창조역사입니다.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물을 나누셨습니다. 식물군을 만드셨습니다. 해와 달 별들을 만드셨습니다. 동물군을 만드셨습니다. 점점 인간이 살기에 적합하도록 만드셨습니다. 또한 만드신 것들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다(토브)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들을 위한 하나님의 창조하심입니다. 우리들이 살기에 어느 행성보다 좋게 환경을 조성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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