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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1:1-9 

 

2021Suez運河痲痹事故는 이집트 시간(UTC+2)으로 2021323일 오전 740분에 컨테이너선 에버기븐호(Ever Given)Suez運河에서 7일간이나 좌초된 사건입니다. 400m 길이의 배가 시속 74km의 모래폭풍을 맞고 넘어진 것이 좌초의 원인입니다. 그 결과 Suez運河의 통행을 가로막게 되었습니다. 좌초된 지 하루가 채 되지 않아 최소15척의 선박이 묘박지에 체류하였습니다. 이후에 237척의 선박이 운하를 통과하기 위해 줄을 서고 문제가 해결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좌초가 이 운하의 하부에서 발생한 까닭에 이를 우회할 방법도 현재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1869년 개통된 Suez運河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교통로입니다. Africa대륙을 우회하지 않고 AsiaEurope을 직접 연결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Suez運河는 세계 물동량의 12%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2020년 기준 통행선박은 1,8500척 이상으로 하루 평균 51.5 척입니다.

문제는 전 세계 물류의 약 10%Suez運河를 통과하는 까닭에, 이 사건으로 인해 유류, 일용품 등의 운송에 심각한 차질이 생길 것으로 내다보았습니다. 매 시간 4억 달러(4518억원)의 손해가 발생하고 있으며, 문제를 해결하기까지 추가로 매일 90억 달러(10조원) 상당의 상품운송이 지연될 것이라는 전망입니다. Suez運河를 주요 통로로 이용하고 있던 석유운송이 차질을 빚자 국제유가는 6% 이상 상승하였다고 합니다. 이집트에서는 매일 158억원의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했습니다.

 

더구나 코로나정국, 코로나사태, 코로나상황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들이 망가졌습니다. 이전에 잘 나가던 사업장이 송두리째 없어졌습니다. 이로 인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도미노처럼 무너졌습니다. 어떻게 해볼 래야 해볼 도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못살겠다고 합니다. 너무나 어렵다고 모두 말합니다.

 

이사야 1절을 보아도 그런 시기였습니다. 양상은 달라도 국가가 매우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국제적 상황으로 국내의 상황이 안정적이지 못했습니다.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이상이라

 

오늘 첫 번째로

 

I. 여호와의 선지자 이사야(1)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때는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왕 시대였습니다. 이때는 팔레스타인이 굉장히 암울했었습니다. 유다의 형제국인 북 왕국 이스라엘은 주전722년에 멸망했습니다. 그리고 유다도 앗수르의 침략을 받아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예루살렘만 외롭게 남아 있었습니다. 히스기야 왕 통치중간에는 유다도 점점 쇠퇴기에 접어들었습니다. 거기에 주변의 강대국이 부상함으로 인해서 유대의 입지는 점점 더 좁아졌습니다. 이사야는 주전791년부터 주전 681년까지 네 왕에 걸쳐 약 60년간 사역을 했습니다. 이미 망해버린 이스라엘을 바라보면서 유다는 이러한 전철을 밟지 말라고 준엄하게 유다에게 경고를 했습니다.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과 구원의 메시지를 동시에 선포했습니다.

 

이사야부터 선지서입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예레미야애가, 에스겔, 다니엘(5)은 대선지서라 하고,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12)를 소선지서라 부릅니다. 사람들이 위대해서 대선지서라 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분량이 많고 적음에 따라 대선지서, 소선지서로 구분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선지자를 aybin:(나비)라 불렀습니다. nabi대변인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정규적인 대변자로 그의 말에 신적 권위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선지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다음 그것을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직분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라는 직분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먼저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후에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전해야 합니다. 점치듯이 앞일을 훤히 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으면 선지자가 아닙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거짓 선지자이며 박수무당입니다. 귀신들의 조종을 받고 있는 아주 나쁜 사람들입니다.

 

이사야는 Amos의 아들입니다. 선지자 Amos가 아닌 다른 Amos의 아들입니다. 이사야는 이름에서부터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hy:[]v'y](예샤야)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이사야는 가족적으로도 하나님의 뜻을 나타냈습니다. 그의 아내는 여선지자였습니다(8:3). 그의 큰 아들은 bWvy: ra;v](스알야숩)입니다. “남는 자가 돌아오리라입니다. 이스라엘이 앗수르를 통해 징벌을 받은 후에 남은 자가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암시한 이름입니다(10:21). 다른 아들 이름은 zB' vj' ll;v; rhem'(마헬살랄하스바스)입니다. “약탈에 날래고 포획에 신속하다입니다. 앗수르에 의해 유다가 약탈될 것을 예언한 이름입니다. 따라서 이사야는 철저하게 하나님중심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직접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사람을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를 세우든지, 선견자를 세우든지 그의 대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은 겨우 여호수아가 살아 있을 때만 제대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왕정시대의 다윗 왕 때 40년간만 제대로 신앙생활을 할 정도였습니다. 800년간에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내놓을 시간은 약 70년이 채 못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들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그러한 결과로 인해서 이스라엘은 큰 파란을 겪었습니다. 얼마 되지 않는 나라가 둘로 쪼개졌습니다. 북쪽의 나라 이스라엘은 이미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했습니다. 남쪽나라 유다 역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망해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유대에 하나님의 뜻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너희들이 계속적으로 잘못 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빨리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국가나 어떤 단체의 안녕을 위해서 여러 가지 안전장치를 만들어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전장치는 불안정한 안전장치입니다. 환경과 여건에 따라 사람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서 환경과 여건이 불리하게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것을 모르고 안전장치만 믿고 갑니다. 세상의 모든 여건을 쥐고 계시는 하나님을 의지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알량한 지식에 의존하여 사람들은 죽음으로 달려가고 있을 뿐입니다. 알량한 이상한 교리에 혹하여 자신의 영혼을 팔고 있습니다. 결국 그로 인해서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는데도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뛰쳐나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내 말대로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장 좋은 안전장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정국을 코로나정국이라고 합니다. 다들 못살겠다고 아우성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추후에 있을 세상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오직 현세(Only this life)만 신경을 쏟고 있습니다. 다가오는 세상은 필연적으로 오는데, 오직 숨이 붙어있을 동안의 삶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죽음이란 아예 생각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사람들이 경제경제 하는데 경제 즉 이 세상의 부만 좇다가 망한 사람의 예를 이스라엘의 오므리와 아합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16-28을 보면 오므리 왕은 근동문헌에 팔레스타인을 오므리의 집이라고 기록될 만큼 탁월했습니다. 모압과의 전쟁과 외교에 탁월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전쟁의 승리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의 사적도 13절의 기록으로 끝냈습니다. 아합도 시리아의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지만 성경은 침묵하고, 그가 이방종교를 섬겼던 배교에 많은 지면을 할애했습니다.

 

죽음이란 말은 창세기2:17에 나옵니다. tWmT; tWm/mût thâmût 죽고 죽으리라를 반복하심으로 반드시 죽을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음을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데 대한 결과라고 아담과 하와에게 경고하셨습니다. 죽음은 불순종에 대한 필연적인 결과였습니다. 구약성경의 주요주제는 하나님의 거룩 성입니다. 이 거룩 성이 그의 속성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모든 것에서부터 그를 떼어 놓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죽음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궁극적으로 분리되는 것’/ultimate separation from God due to sin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대한 반역이거나 그 뜻에 순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던 인간은 그 실재를 눈으로 보았습니다. 아벨이 형 가인에게 죽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이고자 철저하게 계획하였습니다. 창세기4:8을 보면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물은 받으심에 가인은 언젠가 아우 아벨을 죽이리라고 살해계획을 세웠습니다. 두 형제가 들에 있을 때에 형 가인은 아우 아벨을 쳐 죽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기 위해서 계획적으로 아벨을 들로 유인한 것인지, 아니면 우연한 기회에 두 사람이 들에 있을 때 가인이 아벨을 죽였는지에 대해서 성경은 아주 모호하게 기록했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은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무엇을 말했는지 그 목적어가 없습니다. 그래서 일부의 번역본들은 우리가 들로 가자는 말을 첨가하였습니다. 원문의 흐름을 유연하게 할 뿐만 아니라 가인의 범죄가 계획적인 것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개역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바른성경 가인이 그 동생 아벨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들로 가자 그들이 들에 있을 때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을 대적하여 일어나 그를 쳐죽였다.

 

공동번역 그러나 카인은 아우 아벨을 "들로 가자"고 꾀어 들에 데리고 나가서 달려들어 아우 아벨을 쳐죽였다.

 

개역개정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3)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3)고대 역본들에 의하면 '우리가 들로 나가자'가 있음

 

CEV(Contemporary English Version) Cain said to his brother Abel, "Let's go for a walk." And when they were out in a field, Cain killed him.

NIV Now Cain said to his brother Abel, "Let's go out to the field." And while they were in the field, Cain attacked his brother Abel and killed him.

 

이후 죽음은 사람들에게 묘하게 다가옵니다. 므두셀라가 얼마나 오래 살았습니까? 969년입니다. 고려의 11대왕 문종 왕 61052년에 태어났다고 가정하면 올해 2021년이 그의 죽는 년도입니다. 그래도 죽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광개토태왕은 북경까지 땅을 넓혔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있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죽었습니다. 세종대왕이나 이순신장군 같은 분들이 지금까지 살아서 국가를 위하여 고문역할을 해주시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오래 살지 못했습니다. 나쁜 사람들 즉 을사오적인 이완용 외 4명은 아예 태어나지 말아야 했습니다. 아베나 천황이라는 작자들은 아예 어렸을 때 죽어야 했습니다. 이승만이나 박정희, 전두환 이명박 등은 우리나라에서 없었어야 할 인물들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못살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습니다. 우리생각에 나쁜 자들은 일찍 죽거나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죽음은 신비입니다. 착한 사람도 죽고, 나쁜 사람도 죽습니다. 돈이 많아도 죽고, 돈이 없어도 죽습니다. 죽음은 나이순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왜 이렇게 죽음이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까? 죄 때문입니다.

 

결국 이사야를 통해서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실 것을 밝히셨습니다(59:16-18,20). 그리스도의 탄생과 통치를 말씀하셨습니다(7:14, 9:1,6,7, 11:1-9). 예수님 앞에 올 세례요한의 사명을 예언했습니다(40:3, 3:3). 그리스도의 임무를 말씀하셨습니다(61:1,2, 4:17-19). 예수님은 왕이 아니라 종으로서 오심을 말씀하셨습니다(42:1-4). 우리를 위해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구원하심을 말씀하셨습니다(53:7-8,10,12, 61:1-11). 사람들을 복음으로 초대하셨습니다(55:1-3, 13:34). 죄인들이 구원 얻는 길을 말씀하셨습니다(1:18-20).

 

오늘을 사는 이 시대에도 굉장히 암울합니다. 좋은 news는 하나도 없습니다. 100% 모두 암울한 news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없이 산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모두 다 못산다고 아우성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살 길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구원의 길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경은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뜻이 성경이고, 여호와의 섭리를 알려주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영혼은 구원되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육신은 그것을 전혀 모르지만, 사람의 영혼은 구원되기를 간절히 염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성경은 죄인들을 초대하는 하나님의 목소리이기 때문입니다. 영육 간에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지 않아야 합니다.

II. 회개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2-9)

 

2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3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4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5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 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6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 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7너희 땅은 황무하였고 너희 성읍들은 불에 탔고 너희 토지는 너희 목전에 이방인에게 삼키웠으며 이방인에게 파괴됨 같이 황무하였고 8딸 시온은 포도원의 망대 같이, 원두밭의 상직막 같이, 에워싸인 성읍 같이 겨우 남았도다 9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었으리로다

 

옛날에 자식들이 부모의 말을 듣지 않을 때 갑자기 문을 열어놓고 크게 외치면서 하는 소리가 있습니다. “동네사람들, 내 말 좀 들어보세요. 우리 자식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하며 동네방네 다 들으라고 외칩니다. 도시에서야 누가 들은 척도 하지 않지만, 시골에서는 그런 일이 있으면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는 모습들이 모두 동네사람들에게 open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일이 있으면 창피해서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해서 탄식을 하십니다. “들으라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땅이여왜냐하면(yKi) 이스라엘이 나를 배반하였다는 것입니다. 지금 속이 터진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전부 타버려 숯검정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죄가 하나님의 속을 터지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내가 자식들을 아주 귀하고 귀하게 키웠는데, 그 놈들이 나에게 역적 짓을 했다는 것입니다. 도저히 못 참겠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이라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땅과 하늘은 귀를 기울여 들어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죄를 낱낱이 지적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신했습니다(W[v]P;/2). 3절을 보면 이스라엘이 짐승만도 못하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여호와를 버렸습니다(Wbz][/4). 이스라엘은 심판을 자초했습니다(5). 하나도 빠짐없이 그들은 모두 하나님을 배신했습니다(6).

 

하나님이 왜 이스라엘에게 분노하셨습니까? 짐승만도 못하다는 말씀입니다. 소와 말은 제 주인을 알아보는데 이스라엘은 저희를 구원해 낸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어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핏덩이를 데려다 키웠는데 저희들 혼자 자란 것처럼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탄식하시고 분노하십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영역 안에서 사라지겠다는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특별히 대하셨습니다. 항상 국빈으로 그들을 대우하셨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많은 민족 중에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습니다. 신명기7:6-8을 봅시다.

 

6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8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하나님께서는 지상의 모든 민족들을 제치시고 오직 이스라엘만 사랑하셨습니다. 이스라엘보다 똑똑하고 잘난 민족들을 제쳐두시고 오직 이스라엘만 사랑하셨습니다. 로마서3:1,2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맡기셨습니다.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그 위에 엄청난 복들을 쏟으셨습니다(9:4,5).

 

저희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무엇보다 인류의 구원자이신 메시야가 그들 중에서 나게 하셨습니다(2:22-39).

 

이스라엘 사람들아 ····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복음이 그들에게 먼저 전파되게 하셨습니다(3:18-26).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 복된 것들을 모두 버렸습니다. 2005년도에 피카소의 파이프를 든 소년”(Carcon a la pipe by Pablo Picasso))이란 작품이 14백만 달러에 팔렸습니다. 11746800만원입니다. 이 그림을 보면 별로 볼 것이 없습니다. 한 소년이 파이프를 들고 앉아 있는 그림입니다. 이 그림을 아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이 그림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그림보다 수 억 배보다 더 귀하신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아주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버렸습니까? 자신들은 하나님을 절대로 버리지 않았다고 우겼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절대로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을 섬기면서 우상숭배를 철저하게 했습니다. 남편인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서 우상과 갖은 짓을 했습니다(13:1-4). 그러면서 하나님께 희생은 더 드렸습니다. 무수한 제물을 드렸습니다(1:11-14). 하나님께서 제물만 원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무수한 제물로 자신들의 죄를 덮으려고 했습니다. 위선적인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또한 철저하게 불순종했습니다(7:22-28). 청개구리와 같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예 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일단 배척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11:1-11). 홍해를 가르신 것도, 요단강을 건넌 것도, 광야에서 먹이신 신앙을 몽땅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믿지 않았습니다. 듣지를 않으니까 믿을 수도 없었습니다. 괜히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가지고 우리만 귀찮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우리 방식대로 살 테니 상관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이스라엘에 대해서 매우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우리 같으면 당장 우주 밖으로 보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무척 사랑하셨습니다. 5절을 보면 너희가 어찌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더욱 패역하느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너무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잘못될까봐 노심초사하셨습니다. 그들이 죄를 지으면 즉시 심판하시지 않았습니다. 오래 참다가 겨우 매를 준비하셨습니다. 블레셋의 매, 아멜렉의 매, 미디안의 매, 애굽의 매, 앗수르의 매들로 그들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듣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또 다른 매를 준비하셨는데, 그 매는 기상이변입니다. 비를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메뚜기로 온갖 식물을 다 먹게 하셨습니다. 그들의 산업은 잘못되고 소출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도무지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치시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천둥치고 번개가 번쩍번쩍하는 매를 준비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바벨론의 매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들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서 빨리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오늘 우리들도 믿는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미흡한 점이 많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난 것이 죄라고 했을 때 우리 역시 하나님의 백성이니까, 하나님을 떠나면 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면 죄가 됩니다. 우상에게 마음을 빼앗기면 죄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역시 죄가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면 엄청난 복들을 쏟으시고, 쏟으실 텐데, 이것을 받고, 못 받고는 모두 우리들에게 달려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만일에 위와 같은 것들의 죄를 우리가 회개하지 않을 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혜택이 제한을 받습니다. 이스라엘처럼 예배는 열심히 드리고, 기도는 열심히 하면서도 하나님을 떠날 수는 얼마든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수시로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함을 철저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움직이지 못함을 회개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회개는 은혜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회개(bWv/suûwb/슈브/metavnoia/메타노이아/repentance)란 마음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며, 행동을 완전히 바꾸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말하는 회개란 쉽게 나오는 말이 아닙니다.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전에 했던 것들을 끊어버리고, 잘못된 것으로부터 180도 돌아서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마음과 행동을 바꾸어야 합니다. 행동만 바꾸어서도 안 되고, 생각만 바꾸어서도 안 됩니다. 둘 다 바꾸어야 합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회개란 죄에 대한 확신과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는 깨달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결정적으로 돌이키는 것이 회개입니다. 회개는 죄를 향한 변화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회개는 동시에 죄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는 거룩한 생활을 가능케 하는 성령의 역사를 수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일을 계획할지라도 내일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내일 믿어야지, 내일 믿게 해야지 하는데 시간과 기회는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믿어야하고, 지금 믿게 해야 합니다.

 

청교도인 토마스 왓슨은 회개를 미루면 미룰수록 그만큼 죄는 더 강력해지고, 마음은 더 강퍅해진다고 했습니다. 진실한 회개는 범죄를 그치게 하고,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끕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복이 오는 통로를 마련케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많은 것이 약속되어 있는데도 회개하지 못해서 그 통로가 막혀 있습니다. 우리는 그 통로를 회개함으로 뚫을 수 있습니다. 내가 잘못되었다고 하나님께 고백할 때 그 통로가 뚫어집니다. 하나님 살려주십시오. 하고 나갈 때 막혔던 복의 통로가 뚫어집니다. 삭개오가 회개할 때 삭개오의 주변이 변한 것처럼, 우리가 회개할 때 우리의 주위가 변하고, 우리의 가정이 변하며, 우리가 있는 곳이 변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혜택을 받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가 회개하기를 원하십니다. 밝지 않은 인간의 미래에 밝은 미래를 약속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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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의 자녀(로마서 9:6-13)

 

7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8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9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10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유대인들은 자기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였습니다. 배척한 것을 넘어서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목적이 좌절되고, 하나님의 계획이 차질을 가져온 것이라는 말인가?(William Barclay) 바울의 대답은 아니오입니다. 바울의 논증은 . 사실상 유대인 모두가 예수님을 배척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중 얼마는 예수를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초기 신자들은 다 유대인이었습니다. 초기란 복음이 이방으로 나가기 전입니다. 그리고 바울 자신도 유대인이었습니다. 사도들도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만약 우리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선택의 과정이 되풀이 하여 작용하고 있는 것을 볼 것이라는 것입니다. 반복하여 하나님의 목적과 설계 안에 들어 있는 사람은 유대인 모두가 아니라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중 일부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일부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하나님의 계획을 집행해 나가신 민족의 계보는 절대로 아브라함의 肉的後裔육적후예라고 주장하는 모든 사람으로 구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전체계획의 배후에는 순전한 혈통적 후예만이 아니고 하나님의 택하심의 꼭 있었습니다. 자기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바울은 유대역사에서 두 경우를 예를 들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여종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의 처 사라의 아들 이삭입니다. 이스마엘과 이삭 두 사람은 틀림없이 다 아브라함의 혈육입니다. 육체적으로 그들은 둘 다 그의 아들입니다. 사라가 아들을 낳은 것은 너무 늙어서 인간적으로 말할 때 불가능하다고 할 정도로 나이 많아서였습니다. 이삭이 나서 자랄 때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는 날이 왔던 것입니다. 사라는 매우 언짢게 생각했습니다.그리하여 하갈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을 내어 쫓았습니다. 이삭 흔자서 상속할 수 있게 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어 쫓기가 그랬습니다.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사라가 싫어해도 차마 그럴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내오 쫓으라고 명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자손이 그의 이름을 유지할 것이 이삭 안에서였기 때문입니다.

창세기21:10-12 10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매 11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위하여 그 일이 깊이 근심이 되었더니 12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사실 이스마엘이 하갈의 소생이라 해도 누가 보거나 누가 말해도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사도의 논증은 자연적이고 인간적인 방법과 욕망으로 낳은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아브라함과 하갈은 충분히 생리적으로 아들을 낳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인간적인 입장에서 볼 때 아들을 낳는다는 것조차 불가능한 때에 낳았습니다. 즉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아들이었습니다.

창세기18:10-14 10 그가 가라사대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11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는 끊어졌는지라 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1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14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진정한 후계권이 주어진 것은 약속의 아들이어야만 했습니다. 따라서 모든 아브라함의 육적인 후손이 다 유대인 즉 선택된 자로서 인정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민족 안에서 하나님의 선별과 택함은 계속되었습니다. 선택의 다른 예로서 바울사도는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잉태했을 때 하나님이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즉 그의 태속에는 두 민족의 조상이 될 두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때가 이르면 형이 아우를 섬기고 그에게 종이 되리라는 것입니다(25: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이런 상황에서 쌍둥이 에서와 야곱이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사실은 에서가 형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택은 야곱이었습니다. 그 야곱의 계통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변론의 결론을 내리기 위해 바울은 말라기1:2-3을 인용했습니다. 그 곳에는 하나님이 그 선지자에게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바울의 논증은 유대인 됨에는 아브라함의 후손됨보다 무엇인가가 더 있고, 택함 받은 백성은 단순히 아브라함의 육적인 후손의 전체가 아니고, 그 종족 자체 내에서 역사 이래 선택의 과정이 계속 되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면 지금까지의 변론을 완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입니다. 아랍인은 아브라함의 순수한 육적인 아들 이스마엘의 후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유대인은 아랍인이 택함 받은 백성에 속한다고 말하는 것은 꿈도 꾸지 않습니다. 에돔인은 에서의 자손이었습니다. 이것이 말라기가 의미하는 바로서 이삭의 참 아들 아니 야곱의 쌍둥이 형인데도 불구하고 유대인이라면 어느 누구도 에돔 사람이 택함 받은 백성 중에 한 몫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의 관점에서 자기의 주장을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육적 자손의 가족 내에서도 선택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더 나아가 그 선택은 행위와 공로와 그것을 얻으려는 인간적인 노력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말합니다. 그 증거로서는 야곱과 에서는 그들이 낳기도 전에 야곱은 택함을 받았고, 에서는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 선택은 그들이 아직 모태에 있어 낳기도 전에 이루어졌습니다. 불가피하게 우리의 생각은 이 논리에 주저하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명백하게 마음대로 한 사람은 택하고 다른 한 사람은 버리는 분으로 보이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논리가 터무니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에게는 윤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행동에 대하여 책임을 지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에게는 이상하게 보이고 우리가 받아들이기 어렵게 생각이 되지만, 유대인에게는 적중한 논리입니다. 우리에게도 이 논리의 핵심에는 하나의 큰 진리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기인되었고 모든 것 배후에는 하나님의 행위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독단적이고 우연하게 보이는 것 까지도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목적 없이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고 어떤 사람은 거절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의하여 인간에 대한 선택과 유기는 결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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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살아 있을 동안 마음은 죽어 있는 것이며, 육체 속에 파묻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죽을 때 마음은 살아난다.

                                                 소크라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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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구약성경을 보면 어디에도 회당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회당/sunagwghv/suinagogê은 지방 유대인공동체 사회의 모임 장소 또는 유대인들의 집회나 회중 자체입니다. 성전은 예루살렘에 하나 뿐입니다. 법에 의하면 열 가정이 사는 곳에는 회당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촌락마다 회당이 있어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렇게 각처에 회당이 있었고 회중 가운데 유능한 자는 회당장의 청으로 강의할 수 있었으므로, 갈릴리 사람들로부터 한 선생이나 선지자로 인정받은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는 기회를 쉽게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 회당 제도는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회당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습니다. 주전 6세기 바벨론에 포로 된 유대인들이 그들의 성전과 분리되었을 때 율법을 이행하려는 노력으로서 모세오경을 연구, 토의하기 위하여 지역적 모임을 가진 것을 그 기원으로 봅니다. 회당은 제사의 장소가 아니고 기도와 교육의 장소로서 생겼습니다. 다른 기관보다 유대인의 신앙의 특성을 보여주는 이곳에서 백성들과 지도자들이 만났으며 율법을 배웠습니다. 예배와 기도를 드리는 장소였을 뿐만 아니라, 회당은 공동체 생활의 중심역할을 했습니다. 회당의 발전사는 알려지지 않지만, AD 1세기경에는 유대인들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회당이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최소한 10명의 성인 남자들이 필요했습니다. 큰 도시에는 수 많은 회당이 있었습니다. AD 70년에 예루살렘이 파괴될 무렵에는 회당이 394개나 있었다고 합니다. 복음서는 회당을 예수님이 사역하셨던 곳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사도들은 회당을 복음 전도의 출발점으로 활용했습니다. 회당의 건물 형태는 예루살렘 성전을 본 땄다고 합니다. 율법서와 선지서 두루마리를 담고 있는 하나의 언약궤가 출구 맞은편 한쪽 끝에 있었습니다. 언약궤 앞과 출구와 회중 맞은편에는 종교 지도자들이 앉는 최고의(혹은 주요한) 자리들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다른 구획에 앉도록 했습니다. 회당은 그 회원들을 훈육하고 징계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장로들이 다스렸습니다. 회당장은 예배를 감독했으며, 시중드는 사람 들은 두루마리를 나르고 율법에 어긋난 일을 한 사람들에게 징계를 내렸습니다. 그런 다음 통역자는 구약 말씀을 고유 언어인 아람어로 풀어 읽었습니다. 적법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누구나 발언할 수 있었습니다. 안식일 예배는 다섯 부분으로 행해졌습니다. 1. 쉐마를 읽었습니다(신6:49; 11:13-21; 민15:37-41). 2. 18개 간구문과 축도문을 포함한 기도문들을 암 송하였습니다, 3. 율법서 중 한 부분을 원래는 3년 주기로 읽었습니다. 4. 읽는 자가 임의로 선택한(눅4:16이하) 선지서 중 한 부분을 읽었습니다. 5. 성경을 상세히 설명하였으며, 마지막으로 예배를 마치는 축도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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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주는 교훈을 보면 인간의 끝없는 욕망의 결 과는 언제나 그 욕망의 결과로 얻은 어떤 가치와 어 떤 존재로도 스스로의 이상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결국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을 섬겼거나 그 헛된 이상이 불러오는 오만과 악으로 어두워진 이성의 눈 으로 섬길 필요조차 없는 것에 대한 막연한 희구였음을 알게 될 뿐이다. 인류가 한 덩어리가 되어 죄 속에 살고 있으며 또 각자가 그 속에 살고 있는 무서운 거짓을 떠나 밝게 살자면 솔직하고 담대하게 예수님의 가 르침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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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적 예정견해(로마서 9:6-13)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우리는 현재 이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오는 세상을 맞이해야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습니다. 사람이라고 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두고 떠나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도 많지 않은 날에 그렇게 해야 합니다. 생명이 있는 것들은 반드시 이 세상에서 끝을 계산해야 합니다. 아무리 그 생명이 길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에서는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1년을 365.2422일로 정확하게 계산해서 50년을 살았다면, 1,8262일입니다. 100년을 산다고 가정했을 때는 3,6524일입니다. 많은 것 같아도 그리 많지 않은 것이 인생입니다. 길다고 생각하면 길고, 짧다고 생각하면 짧은 인생을,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살기도 하고, 뒤틀려 살기도 합니다. 옛 학창시절에 유명하다고 생각했던 문인들이 상당수 친일파라는 사실을 알고 경악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종교계에서도 적극적으로 친일파였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노래와 그림과 글 그리고 가르침들이 이어지고 있는 사회가 어이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가르침을 주어야 할 사료들이나 자료들을 없애버렷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들은 아무렇지 않은 일처럼 여기며 살아왔습니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 알기도 전에 친일했던 사람들을 위인으로, 또는 애국자로 바꾸어 가르침으로 인해서 그 피해가 크다는 것입니다. 제2차세계대전이 일어날 때 일본교회와 독일교회는 히틀러와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을 적극 지지했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들의 승리를 기원했습니다. 얼마나 잘못된 일입니까? 사람을 국가별로 살해하는 계획을 세운 사람들을 교회가 축복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영원한 상혼(傷魂)으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예정에 관한 예지적 견해와는 대조적으로 개혁주의적 견해에서는 구원에 대한 궁극적 결정권이 인간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 결정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천명합니다. 개혁주의적 견해에서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께서 일부 사람들의 생활가운데 개입하셔서 그들을 구원에 이르는 믿음으로 인도하시기로 하셨지만,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기로 하셨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행위를 미리 내다보시지 않고서도 영원 전부터 어떤 사람들은 선택하기로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유기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각 개인의 궁극적 운명은 태어나기도 전에 인간의 선택에 전혀 근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결정되었습니다. 물론 인간의 선택은 자유롭게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그러한 선택이 이루어지는 것은 먼저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로 하여금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영향을 미치시기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의 근거는 인간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기쁘신 뜻 가운데 있습니다. 예정에 대한 개혁주의적 견해에서는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의 선택보다 앞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각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 같이 생각되지만. 하나님의 예정이나 하나님의 내적 부르심이 없이는 아무도 그리스도를 선택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토록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히는 예정에 관한 하나의 견해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공정함에 관한 심각한 질문들을 일으키는 견해입니다. 이것은 그토록 많은 분노의 반응을 일으키고 숙명론의 도전 결정론의 도전 등을 유발시키는 견해입니다. 예정에 관한 개혁주의적 견해에서는 황금사슬을(롬8:29,30) 영원 전부터 하나님은 자신이 택하신 자들을 아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창조하시기도 전에 마음속에 그들의 정체에 대하여 생각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개인적 정체에 대하여 미리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먼저 사랑하셨다는 의미에서 그들을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안다”고 말할 때 이 표현이 종종 단순히 사람에 대한 정신적 인식과 깊고 밀접한 사랑 사이를 구별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냥 안면정도 알고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진보해서 단위별로 교제하는 정도의 앎이 아닙니다. 대단히 깊이 아는 앎의 정도를 말합니다. 개혁주의적 견해에서는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들을 모두 내적으로 부르시기로 예정하시고, 그들을 의롭다 하시며, 영화롭게 하시기로 예정하셨다고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그분의 택함 받은 자, 오직 택함 받은 자들만의 구원을 이루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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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로마서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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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예지와 예정(로마서 9:6-13)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창세 이래 아담 이후, 노아 이후부터 현재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태어났는지, 모릅니다.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있었더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기때문입니다. 이 말에는 이중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부정적인 요소와 긍정적인 요소가 다 들어있습니다. 그 안에는 참된 이스라엘이 있습니다. 구원은 이스라엘 전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안에 참된 이스라엘이 있다는 말입니다.

통상 하나님의 백성을 약속의 자녀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란 그들 속에 내재하고 있는 어떤 요소(예를 들면 육신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약속의 자녀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의한 것입니다. 요한복음1:13절을 보면 애초에 하나님의 뜻은 이스라엘만 내 자녀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후손이지만 하나님의 백성으로 치지 않은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스라엘이라는 공식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스마엘=에서=유대인이라는 사람들이 끼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해서 100%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렇게 믿고 있다가 영원한 구원을 놓치고 말기 때문입니다.

예정에 관한 개혁주의적 견해를 거부하는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은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예정에 대하여 예지적 견해(선견, 앞선 지식)라는 입장을 받아들여버립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싶은 것입니다. 예지적 견해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지를 아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일지, 거절할지를 미리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선택하기도 전에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을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운명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은 우리가 선택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의 지식에 근거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것은 하나님을 선택하려는 사실을 미리 아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택받은 자들이란 자유롭게 그리스도를 선택할 것을 하나님께서 아신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만일에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이나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은 전혀 관계가 없게 됩니다. 이 견해에는 하나님의 결정에 관한 자의적 요소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명백히 어떤 잘못된 행위로부터도 벗어나 계십니다. 우리에 대한 궁극적 심판의 기초는 그리스도를 배척하느냐 아니면 받아들이느냐 하는 우리의 결정에 달려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로마서8:29-30절로 돌아가 보면 하나님의 豫知에서 시작하여 신자들의 영화에까지 이르는 일종의 순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지적 견해에서 볼 때 이 구절에서 하나님의 예지가 예정보다 앞서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이 구절에서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선택할 것을 미리 아신 그 지식에 근거하여 선택 하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상은 언급되어 있지도 않고 암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아시는 자들을 예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여기에서 하나님이 예지를 가지셨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전혀 모르고 계시는 사람들을 선택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선택하시기 위하여 먼저 야곱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지시기는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야곱의 선택을 근거로 야곱을 택하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로마서8장에 나오는 예지-예정의 순서에 대해서는 예지적 견해와 더불어 논쟁거리입니다. 그러나 나머지 구절에 나타나고 있는 사건들의 순서는 예지-예정-부르심-칭의-영화의 순서입니다. 바울사도가 여기에서 부르심이라는 표현을 통해 의미하고 있는 바는 무엇입니까?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한 가지 방법 이상으로 설명합니다.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외적 부르심과 내적 부르심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전파를 통하여 하나님의 외적 부르심을 발견합니다. 복음이 전파될 때 그것을 듣는 사람마다 부르심을 받거나 그리스도 앞으로 초청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긍정적으로 반응하지는 않습니다. 외적 부르심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신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들을 수 없는 귓가에 복음이 떨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따라서 복음의 외적 부르심에 믿음으로 반응한 사람들만이 의롭게 될 수 있습니다. 칭의(稱義/justification)는 믿음으로 연유합니다. 그러나 복음의 외적전파를 들었던 사람들이 모두 믿음으로 반응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외적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들이 의롭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사도는 로마서에서 하나님이 부르신 자들을 하나님께서 의롭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모든 자들을 의롭게 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여기에서 모두를 첨가한다면 이 구절에 있지도 않은 말을 덧붙이게 됩니다. 바울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들이 의롭게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부르심을 받은 자들 가운데 일부만 의롭게 된다는 말입니다.

예지적 견해를 살펴보면 하나님의 예정이 사람들의 외적 부르심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할지를 미리 아시는 하나님의 예지에 근거하신다면 어떻게 예정된 자들 가운데 오직 일부만이 부르심을 받을 수 있습니까? 정확하게 아시는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자들만 부르시는데. 부르심을 받지도 않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예정하셔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예정 받은 자들 가운데 일부가 부르심을 받지도 않고 예정 받았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부르심에 반응할 것을 미리 아신 지식에 근거하여 예정하시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부르심이 없는 데에 대하여 아무도 응답하는 사람이 없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예지하실 수는 없으실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사도는 결코 일부라는 말을 내포하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황금사슬은(8:29,30) 필연적으로 모두라는 말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 황금사슬에 일부라는 말을 첨가시킨다면 그 결과는 예정에 관한 예지적 견해에 치명적이 되어버립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부르시지도 않은 자들을 예정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즉 예지적 견해는 하나님의 예정이 복음의 부르심에 대한 사람들의 적극적인 반응을 아시는 하나님의 예지에 근거하고 있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일부 사람들이 부르심 없이도 예정되었다면 그 견해는 명백히 잘못된 것이 됩니다. 모두라는 말을 덧붙여도 역시 예지적 견해에 치명적 결과입니다. 이러한 난제는 칭의에 대한 부르심의 관계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만일 부르심을 입은 모든 사람들이 의롭게 된다면 그 구절은 아래의 두 가지 중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a. 복음을 들은 모든 사람들은 의롭게 된다. b 하나님의 내적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모두 의롭게 된다. a를 취한다면 복음을 들은 적이 있는 각 사람은 모두 구원받기로 예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정에 관한 예지적 견해를 견지하고 있는 거의 대다수의 사람들은 복음을 들은 사람마다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만인 구원론자 들입니다. 그들은 복음을 들었든지 안 들었든지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복음주의자들 사이에 벌어지는 예정에 관한 주된 논쟁이 만인 구원론(universalism)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정에 관한 개혁주의적 견해를 옹호하는 사람들이나 예지적 견해를 옹호하는 사람들이나 모두 다 만인이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실상 외부적으로 복음(하나님의 외적 부르심)을 듣는 사람들 중에도 믿음으로 반응하지 않아서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a의 입장은 예지적 견해를 옹호하는 사람들이나 개혁주의적 견해의 옹호자들에게나 모두 마찬가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입장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내적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의롭게 된다는 b의 입장입니다. 하나님의 내적 부르심이란 무엇입니까? 외적 부르심은 복음전파입니다. 복음전파는 인간인 우리가 하는 어떤 일입니다. 외적 부르심은 성경을 읽음으로 들을 수도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인간이 기록한 하나의 문서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것은 외적입니다. 어떤 인간도 다른 인간 속에서 내적으로 역사할 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우리가 사람의 마음에 즉각적인 영향력을 일으키기 위하여 다른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나는 단지 외적으로 말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 말들이 마음속에 파고들 수 있을지는 모르나 나의 능력으로 그렇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을 내적으로 부르실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믿음의 적극적인 반응을 일으키기 위하여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서 즉시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b의 입장이 사도의 의도였다면 그 의미는 명백합니다. 하나님께서 내적으로 부르신 모든 자들이 의롭게 되고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모든 자들이 내적 부르심을 받는다면 하나님의 예지에는 인간이 택하는 자유로운 결정에 대한 단순한 선지식(先知識) 이상의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누가 복음에 반응할 것이며 누가 반응하지 않을 것인지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은 단순한 수동적인 방관자의 지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누구를 내적으로 부르셔야 할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분이 내적으로 부르신 모든 자들을 또한 하나님은 의롭게 하실 것입니다. 즉 황금사슬은 하나님께서 내적 부르심을 예정하셨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적 부르심을 주시기로 예정하신 모든 자들은 의롭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적극적인 반응을 보장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내적 부르심을 통하여 택한 자들의 마음속에서 무언가를 행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b의 입장이 황금사슬을 올바로 이해한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에게는 주시지 않으신 어떤 종류의 부르심을 일부 사람들에게만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의롭게 되는 것이지, 모든 사람들이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므로, 부르심이란 어떤 사람들은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 깊은 행위라는 것입니다.

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로 예정되었는데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예정되지 않았는가? 그 해답은 인간 속에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목적 가운데 있는가? 예지적 견해의 옹호자들은, 하나님이 오직 일부의 사람들만을 내적으로 부르신 이유는 누가 내적 부르심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누가 반응하지 않을지를 하나님이 미리 아셨기 때문이라고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내적 부르심을 낭비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오직 그 부르심에 호의를 가지고 반응할 것을 미리 아신 자들에게만 내적소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내적 부르심 가운데는 얼마나 큰 능력이 있는가? 그것을 받아들이는데 어떤 특권이라도 있는가? 내적 부르심이 자신의 힘으로 거기에 반응할 것을 아신 자들에게만 주어진 것이라면 그것은 실질적 능력이 없는 내부적 영향력에 불과한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내적 부르심이 외적 부르심을 들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준다면,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에게 주시지 않는 어떤 특권을 일부 사람들에게만 예정하셨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내적 부르심이 인간의 결정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그것은 전혀 영향력이 아닐 것입니다. 만일 내적 부르심이 전혀 영향을 미치는 능력이 아니라면 구원을 위하여 아무런 의미도 없고 황금사슬의 무의미한 부분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내적 부르심이 사람들이 믿기 전 곧 믿음으로 반응하기 전에 그들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적 부르심이 어떤 방법으로든지 그 반응에 영향을 미친다면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에게 어떤 특권을 예정하셨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내적 부르심이 인간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슨 역할을 합니까? 이러한 dilemma는 예지적 견해에 있어서는 결코 달랠 수 없는 큰 고통이 될 것입니다(R.C.Sproul, 1998, 126-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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