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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ma인과 유대인(사도행전25:6-12)
로마인이야기를 쓴 Shiono Nanami 즉 불신자들이 보는 유대인과 Roma인과의 관계입니다. Roma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상과 그리스도인이나 유대인이 생각하는 사상은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생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Roma인들은 패자까지도 자신들과 동화하는데 있음을 자부했습니다. 그럼에도 패배한 여러 민족들 가운데 유독 유대인만이 동화하기를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승자인 Roma인만이 아니라 다른 어떤 민족과의 동화도 유대민족은 거부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제외한 어떤 신도 인정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많은 날들을 유대인들은 다른 신도 섬기기도 했습니다. 허나 웬만한 사람들은 Babylon의 포로로 있을 동안에도, Palestine에 돌아왔을 때도 여호와만의 신앙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고대의 유대인은 Greece인에 버금갈 만큼 이산(離散) 경향이 강해서 웬만한 도시에는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습니다. 같은 도시에 많은 사람들과 살면서도 유대인만은 다른 거주자와 동화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유대인들은 금융업이나 장사에 뛰어났습니다. 그러나 교류가 그 이상으로 진척되어, 동화나 융합으로는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Roma인과 유대인은 법률에 대한 사고방식도 달랐습니다. 유대인에게 ‘법’이란 모세의 율법이었습니다. Roma인이 생각한 ‘법’은 원로원이나 민회에서 인간이 결정한 것입니다. Roma가 제국 안에 사는 이민족을 Roma인과 동화시키기 위해 취한 구체적인 방책은 Roma시민권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Roma의 시민권은 속주세를 면제했습니다. 그럼에도 유대 민족들은 Roma에 동화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Roma군단에 지원하는 유대인도 극히 적었습니다. Roma 병사가 되면 최고사령관인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Roma도 이 ‘특수사정’을 인정했습니다. 유대인에 대해서만은 병역을 면제했습니다. 유대인은 언제나 Roma의 이방인이 되는 쪽을 택했습니다. 지배자인 Roma가 강요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이 선택했습니다. 오래 전에 Alexandros대왕이 Hellenism화한 이후 유대인의 사회적 지위가 그대로 지속되었습니다. 지배자는 Greece인에서 Roma인으로 바뀌었지만, 유대인의 지위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Roma인과 유대인이 직접 관계를 갖기 시작한 것은 주전63년에 Pompeius때부터였습니다. 이어서 Pompeius를 패배시킨 Caesar와 유대인의 협정은 유대인의 요망을 그대로 들어주었습니다. Caesar의 뒤를 이은 Augustus도 그대로였습니다. 그러나 Augustus는 다른 황제들과 달리 Agrippa의 조언에 힘입었습니다. Agrippa(Marcus Vipsanius Agrippa/주전62-주전12)는 Roma의 장군과 정치가로서 Augustus의 정계진출을 도왔습니다. Agrippa의 군사적/외교적인 것에 능했습니다.
Augustus에게는 Agrippa의 도움과 유대에서는 Herod이 도왔습니다. Herod은 순수한 유대인도 아니었습니다. 치열한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사람입니다. 유대의 주권을 장악한 Herod왕은 머리가 기민했습니다. 삶의 달인이었습니다. Pompeius가 Roma의 주권자일 때는 Pompeius에게, Caesar가 유대 왕국을 재건하자 당장 Caesar에게 달려가 Julius라는 가문 이름을 받고서, Caesar의 부하로 변신했습니다. Caesar가 암살되자 Brutus(Marcus Junius Brutus) 일파의 세력이 강하다는 소식을 듣고서 Caesar 암살 주모자인 Brutus와 Cassius(Caius Longinus Cassius) 편에 붙습니다. 그러나 Caesar파인 Antonius와 Octavianus가 반Caesar파인 그 두 사람과 대결했을 때는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Antonius와 Octavianus가 권력투쟁 시 Antonius의 세력이 강하다는 이유로 Antonius편에 붙습니다. 이를 고맙게 여긴 Antonius는 Cleopatra가 아무리 간청해도 유대 왕국만은 Cleopatra에게 선물로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Antonius가 패하였습니다. 이에 Herod은 Augustus로 이름을 바꾼 Octavianus에게 충성을 맹세합니다. 서둘러 Roma를 방문한 Herod을 Augustus는 Roma의 동맹자로 삼고, 유대 왕위를 인정했습니다. Augustus는 Herod의 이용가치를 냉철하게 파악하고 그같이 했습니다. 즉 Augustus가 볼 때 Herod은 전제군주였습니다. 유대에서 전제군주라는 것은 유대교 제사장들이 국정에 간섭하지 못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Roma인은 독립된 사제계급을 두지 않았던 만큼, 종교의 정치 개입에는 항상 불신했습니다. 또한 Herod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왕위를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려면 Orient에 주둔한 Roma군단의 후원이 적극 필요했습니다. Augustus에게는 Orient 일대에 평화와 질서를 확립하는 것이었습니다. Roma의 직할령인 Syria와 Egypt를 잇는 선상의 유대가 Roma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했습니다. Augustus는 현지에 밝은 Herod을 유대에 상주시켰습니다. Herod은 Augustus의 정책을 충분히 이해하였습니다. Augustus는 Orient 일대에 널리 퍼져 살면서 공동체 network를 형성하고 있는 유대민족을 다스리려면 그들에게 마음의 고향인 Jerusalem의 동향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유대는 어디에 살든 Jerusalem 성전에 일정한 헌금을 바칠 의무가 있었습니다. Jerusalem 성전에 돈이 모인다는 것은 그 돈을 틀어쥐고 있는 제사장들의 권력이 강해짐을 뜻했습니다. 이에 Augustus는 민족주의의 온상이 될 수도 있는 유대교 제사장들을 강권으로 억누를 수 있는 사람이 Herod이라고 판단했습니다. Jerusalem만 안정되면 Orient 일대의 유대인 사회도 안정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주전4년에 Herod이 죽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Herod왕은 유대 왕국을 삼분하여 세 아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왕국의 북부는 philip에게, 남부는 Herod Antipas에게, 수도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중부는 Herod Archelaus에게 남겨주었습니다. 북부와 남부의 통치권은 두 왕자가 별 문제없이 계승했지만, 문제는 Jerusalem이었습니다. Jerusalem의 유대인들이 제사장들의 신권통치 부활을 요구하며 봉기했습니다. 이들은 Herod이 임명한 대제사장을 면직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자, 이번에는 비유대교도들을 Jerusalem에서 추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Jerusalem은 유혈이 낭자했습니다. 젊고 미숙한 Archelaus는 Syria 속주 총독에게 군대출동을 요청했습니다. 이 시기의 Syria 총독은 Varus였습니다. 총독은 즉각 군단을 출동시켜 진압하지 않았습니다. Varus는 봉기한 급진파 유대인의 대표가 Roma로 가서 왕정을 폐지하고 제사장의 신권정치를 부활시키고 싶다는 뜻을 황제에게 전달하는 것이 어떠냐고 권했습니다. 50명의 대표가 황제에게 호소하기 위해 Roma로 떠났습니다. 그러나 Palestine에서 Italy까지는 바닷길입니다. 왕복하는 데 걸리는 기간과 Roma에 체류하는 기간을 합하면 반년은 족히 걸립니다. 급진파는 이 기간을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자기네 요구를 기정사실로 만들기 위해서 비유대인들과 격렬하게 싸웠습니다. Varus도 Syria 주둔 4개 군단을 출동시켜 진압하였습니다. 결국 Herod왕의 상투 수단이었던 단호한 무력행사만이 Jerusalem의 질서를 회복시킬 수 있었습니다. 당시 Roma에서는 Augustus가 팔라티노 언덕에 서 있는 아폴로신전 앞에서 유대인 대표들을 만났습니다. Augustus는 신전으로 오르는 계단 밑의 50명의 유대인들의 호소를 듣고 있었습니다. 50명의 대표 뒤에는 Augustus의 허락을 받고 테베레 강 건너편 제14구에 공동체 유대인들이 8000명이나 몰려왔습니다. 그럼에도 Augustus는 유대인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Augustus는 왕정을 폐지해달라는 요구는 거부했지만, 대신 조세경감을 약속했습니다. 이 회답을 가지고 귀국한 대표들은 경과를 설명했지만 Jerusalem의 유대인들은 납득하지 못했습니다. 폭동이 다시 일어났습니다. Augustus도 수습능력이 없는 Archelaus를 바꿀 수밖에 없었습니다. 왕정이 폐지된 것입니다. 그러나 Augustus는 유대교 제사장들에게 통치를 맡길 생각이 추호도 없었습니다. 헤롯이 Archelaus에게 준 Jerusalem과 유대 중부를 직할통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이 지역의 행정은 Jerusalem의 유력자들로 구성된 장로회의에 맡겼습니다. 내정의 자치권은 유대인들에게 남겨준 것입니다. 주후6년부터 Jerusalem과 유대 중부는 Roma의 속주로 바뀌었습니다. 유대 담당 장관의 관저도 Jerusalem에 두지 않았습니다. Greece계 주민이 많은 교역도시 Caesarea에 두었습니다. 이 도시에 사는 유대인들도 거의 온건파였습니다. Roma는 군사력도 3000명 정도밖에 주둔시키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로마 시민인 군단병이 아니라, Syria에서 모집한 Greece계 지원병이었습니다. Roma는 유대인을 되도록 자극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사고방식의 차이 때문에 생기는 마찰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Roma는 어떤 지역을 속주화하면, 실정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인구나 재산을 조사했습니다. 이럴 때 유대인은 자신들을 노예로 삼기 위해 그런 조사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속주세를 내야 한다는 것도 유대인에게는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가까이에 있는 왕에게 세금을 낸다면 모르지만, 멀리 있는 황제에게 왜 세금을 내야 하는가? 다른 민족의 안전까지 지켜주기 위해 돈을 내야 할 필요가 어디 있는지, 유대인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속주화가 진행되는 어려운 시기에 봉기나 폭동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두 가지 요소가 로마에 유리하게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유대민족은 바윗돌처럼 단단히 단결되어 있지 않고,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항구도시의 유대인과 농민이나 예루살렘 하층민으로 구성된 급진적인 유대교도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전자에 속하는 유대인은 대부분 공업이나 금융이나 무역에 종사했기 때문에, Roma의 직할통치로 질서가 회복되는 것은 그들에게는 환영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인구조사와 속주세의 필요성도 이해하였습니다. Augustus는 유대를 속주화하기 위해 시리아 총독 Kurhvnio"/Kurêvios를 등용했습니다.
Kurêvios는 온건파 유대인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항구도시의 자치권을 재확인했습니다. 유대 중부에서는 Jerusalem뿐 아니라 카이사레아를 비롯한 여러 도시가 내정 자치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정책의 목적은 ‘분할하여 통치하라’ 는 Roma의 통치 좌우명을 실천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Jerusalem의 영향력을 최대한 배제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Kurêvios총독은 Jerusalem의의 특수성을 배려하였습니다. Roma는 Jerusalem과 유대 중부를 직할 통치하더라도 Jerusalem에서는 제사장들이 사법권을 갖는 것을 인정해주었습니다. 다만 사형 판결이 난 경우에는 ‘황제의 대리인’인 유대 주재 ‘장관’이 허가해야만 사형을 집행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 예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Jerusalem의 제사장들로 구성된 법정에서 사형판결을 받고, 유대 장관인 Pontius Pilatus가 집행을 허락했기 때문에 처형을 당했습니다. 제사장들의 압력에 굴복한 Pilatus는 손을 씻는 상징적인 gesture를 보이면서 형을 집행했습니다.
Syria 총독 Kurêvios가 실시한 Augustus의 유대대책은 Tiberius에게 그대로 계승되었습니다. Tiberius는 더욱 철저하게 실시했습니다. 황제가 Tiberius로 바뀐 뒤에도 Kurêvios는 여전히 Syria총독이었습니다. Jerusalem성전에 바쳐진 Roma의 봉납품에는 황제를 상징하는 것이 없었지만, Tiberius는 이것조차도 신격이 된 선황 Augustus에게 바쳐진 Caesarea의 신전으로 옮기라고 했습니다. Jerusalem성전이 비유대교도의 봉납품으로 더럽혀졌다고 유대교도가 생각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배려였습니다. 또한 유대교 대제사장이 의식을 치를 때 입는 제의는 Roma측이 Jerusalem 궁전 안에 보관하고 있었지만, 이것도 유대 측에 돌려주라고 했습니다. 그때까지는 종교의식을 치를 때마다 제사장들이 그 제의를 빌려와야 했고, 이교도인 Roma인이 보관하고 있었다는 이유로 그 더러움을 없애기 위한 일주일의 ‘정화’ 간을 두어야했습니다. Kurêvios가 주후21년에 죽었을 때 Tiberius황제는 조국에 대한 공헌이 컸다는 이유로 국장을 치러주었습니다.
Kurêvios가 죽은 뒤에도, Tiberius는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혹 유대 장관들 중에는 유대민족의 특수성에 무지하여 그릇된 판단을 내린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Tiberius에게 알려지면 당장 해임될 뿐 아니라, 본국으로 소환되어 재판까지 받아야 했습니다. 주후26년부터 10년 동안이나 유대 장관을 지낸 Pontius Pilatus가 해임된 첫 번째 이유는 군기를 앞세운 부대를 예루살렘에 입성시켰다는 것, 두 번째 이유는 몇 차례에 걸쳐 일어난 주민의 소요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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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약중간사(사도행전25:6-12)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 가나안에서 범죄로 인해서 주전586년(북왕국/722)에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갑니다. 이후로부터 이들은 계속해서 타국의 통치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Persia의 고레스에 의해서 유다로 귀환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Persia의 지배를 받아야 했습니다. Persia(주전450-330)는 유대에 상당히 호의적이었습니다. 느헤미야 시대 이후 약200년 간 Persia는 유대를 지배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종교생활을 허용했습니다. 따라서 이 기간에는 유대의 행정을 책임 맡은 대제사장들이 유대를 다스렸습니다.
하지만 국가의 권력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주전333년에 Alexandros대제가 Macedonia에 주둔하고 있던 Persia군을 격퇴시켰습니다. 이로인해 Persia가 다스렸던 지역이 Greece영향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Alexandros는 Greece 문화가 세계를 통일시키는 유일한 힘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Alexandros는 유대인들에게는 유대법을 지키도록 했습니다. 안식년에는 공물이나 세금을 면제해 주었습니다. 이집트의 Alexandria라는 도시를 건설해서 유대인들이 이주해서 살도록 권유했습니다. 그리고 이주민들에게 Greece인들에게 부여된 몇 가지 특권을 베풀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와중에 구약의 헬라어 번역본인 70인역(Septuagint/주전250년)이 알렉산드리아에서 탄생했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더대제가 주전323년에 죽습니다. 그리고 그의 후계자들이 제국을 분할통치합니다. 이들은 Kasandros,1 Lysimachos,2 Ptolemy,3 Antigonus4입니다. 이들은 알렉산더대제처럼 단일체제냐, 집단체제로 갈 것인가 하다가 피차 싸웠습니다. 그러다가 안티고누스를 다른 3명이 제거합니다. 알렉산더 사후 후계자 전쟁(Diadochi War)이 주전323-주전301년까지 계속됩니다. 그러나 Antigonus가 주전301년 Ipsus전쟁에서 죽자 Diadochi시대가 끝나고 네 왕조로 분열되었습니다. 북부 Syria와 Mesopotamia지역을 다스리던 Seleucus, 애굽과 Palestine, 남부 Syria지역을 다스린 Ptolemy, 소아시아 지역을 다스리던 Lysimachus, 헬라(Macedonia/Greece) 지역을 다스리던 Cassander가 이들 네 지역을 대표했습니다. 이 네 왕국 중 성경역사와 관련되는 왕국이 Ptolemy왕조와 Seleucus왕조입니다.
먼저 이스라엘 지역을 점령하여 다스리던 왕조는 Ptolemy왕조였습니다. 이들은 이방종교에 관대해 유대인들을 Alexandria에 이주시켰습니다. Ptolemy2세 지원 하에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을 당시 세계적 공용어인 헬라어로 번역하였습니다(LXX). 헬라어가 당시 세계 공용어가 된 배경에는 Alexandros대제의 정책이었습니다. 그러나 주전198년, Seleucus왕 안티오쿠스3세가 Ptolemy5세와의 파내우스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Palestine 통치권은 Seleucus왕조로 넘어갔습니다. Ptolemy왕조는 유다관습과 전통에 관용적이었던 반면, Seleucus왕조는 Hellenism문화를 강압적으로 이식시키려 하고 많은 세금을 부과했습니다. 성전 보물을 약탈도 했습니다. Seleucus의 왕 Antiochus4세는 자신을 스스로 신의 현현(顯現)으로 자처하여 Epiphanes라 칭하였습니다. 그는 군대를 동원하여 ‘성소’를 더럽혔고(단11:31) 주전167년에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지하였으며 12월8일에는 성전의 제단에 ‘제우스 신상’을 세워 숭배하게 했습니다(단11:31). 심지어 율법을 지키는 자는 사형에 처하고, 왕의 생일을 기념케 하기 위해 매월25일마다 돼지를 잡아 제단에 바치도록 하였습니다. Antiochus Epiphanes에 대하여 “네 뿔 중에 한 뿔에서 나오는 작은 뿔”로 칭하고 그가 영화로운 예루살렘을 공격하고 하늘군대인 이스라엘 백성을 쳐서 별들을 떨어뜨리고 스스로 높아져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매일 드리는 제사를 제하고 성소를 헐어버린다고 기록했습니다(단8:8-11).
Seleucus왕조의 反유대인 정책은 유대인들의 강력한 저항과 분열을 가져왔습니다. 헬라문화의 同化정책에 강력하게 반발하며 신앙적 전통을 고수하려는 바리새파 유대인들과 헬라주의에 동조하는 사두개파 유대인들의 관계가 악화되어 갈 때 유대주의자들이 Antiochus4세가 애굽 원정길에서 죽었다는 헛소문을 내고 다수의 헬라주의자들을 죽였습니다(주전169). 급히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Antiochus4세는 유대주의자들을 무참히 학살하고 모든 종교행사를 금하는 종교박해를 감행했습니다. 당시 제사장 맛다디아는 제우스 신에게 제사하라는 왕명을 거절하고 제단을 파괴한 후 고프나 산지로 도망하여 경건한 유대인인 하시딤과 합류, 반란의 선봉에 섰습니다(주전167). 맛다디아의 아들 유다 마카비는 탁월한 지도력으로 주전164년에 예루살렘을 회복하여 율법의 규례대로 성전을 정화하고 8일간의 봉헌축제(‘하누카’, 또는 ‘수전절’)를 열었습니다. 마카비의 동생 요나단 때에는 이스라엘 북동 지역과 트랜스 요르단 지역을 점령하였으며 마침내 시몬의 지도하에 주전142년 유다는 Seleucus왕조를 완전히 몰아내어 독립을 쟁취하고 ‘하스몬 왕조’를 건립하였습니다(주전142). 하지만 하스몬 왕조는 내부분열과 갈등으로 인해 오래가지 못하고 주전63년 Roma의 Pompeius(Gnaeus Pompeius Magnus)장군에 의해 다시 예루살렘을 내주고 로마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Josephus에 의하면 Pompeius의 군대가 이무나 접근할 수 없고 볼 수도 없었던 성전을 마구 짓밟았다고 했습니다. Pompeius와 그의 부하들은 대제사장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볼 수 없는 것까지 보았습니다. 당시 성전 안에는 금상과 금등대와 그릇들과 다량의 향료들과 2000달란트나 되는 돈이 보관되어 있었지만, 손을 대지 않았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1 주전358-297/알렉산드로스대왕의 후계자 중 한 사람으로 안티고노스와 대립하였고 입소스 전투 이후로는 나라와 왕국경영에 전념하였다. 아버지 안티파트로스가 죽은 뒤 안티고노스의 후원을 얻어 그리스 본토 지배권을 획득하였으며, 이어 알렉산드로스제국(帝國)의 재상 폴류페르콘을 제거하고 마케도니아에 세력기반을 구축하였다. 주전305년부터 마케도니아 왕을 칭하였으며, 제국 재통일을 지향(志向)하는 안티고노스와 대립하였다.
2 Lysimachos/주전360~281 마케도니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계자이며, 대왕의 친위대의 한 사람. 대왕이 죽은 후 트라키아와 소아시아 북서부를 지배하였고 케르소네소스 반도의 기부(基部)에 수도를 건설하였다. 주전306년 트라키아왕이라 하였다. 주전301년 후계자 중 가장 유력한 안티고노스를 입소스전투에서 깨뜨리고, 그 영토 마케도니아를 병합하였으나, 전날의 동맹자 셀레우코스의 공격을 받아, 리디아의 쿠르페티온에서 전사하였다.
3 Ptolemy I 주전367-283 알렉산더 대왕의 부하로 동방 원정에 종군하였고, 주전323년 왕이 죽은 후 이집트의 관구를 통치하였다. 그의 치세에 이집트와 시리아의 전쟁이 벌어져, 그는 주전312년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많은 유대인을 식민 또는 상인으로 하여 이집트로 데려갔다. 주전301년 유대는 정식으로 톨레미의 판도에 가입되었다. 그의 치세 중에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유명한 박물관ㆍ도서관ㆍ세라피움의 성전이 세워졌다. 그는 미술ㆍ문학을 장려, 유클리드와 같은 그리스 학자를 후원하여 알렉산드리아를 학술의 중심지로 삼고 상업에도 힘써 나라를 크게 번영시켰다.
4 Antigonus I 주전382~301 알렉산드로스 대왕 휘하의 마케도니아 장군으로서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노스 왕조를 창건해, 주전306년 왕이 되었으나, 5년 후인 주전301년의 입소스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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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의 테러(사도행전23:12-15)
산헤드린이 바울을 심문하다가 부활의 문제로 사두개인과 바리새파로 나뉘었습니다. 그들은 그 문제로 밤새 다투었습니다. 금방 죽이겠다고 하다가 교리문제가 터지자 잠시 나누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튿날 유대인들은 당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맹세했습니다. 그 맹세의 내용이 바울을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는 것입니다. 맹목적인 사람들입니다. 바울을 죽이려고 도사리고 있는 자들이 40여명이나 되었습니다. 이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유대인을 살리는 것이고 정의사회를 구현하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들은 대제사장들과 유대의 장로들에게 찾아가 자신들의 맹세한 것과 한 패거리 되었음을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산헤드린에서 다시금 천부장에게 바울을 데려오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자신들이 바울이 가까이 오기 전에 죽일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열심당원의 하는 짓을 채택했습니다. 열심당원들은 소란한 틈을 타서 단검으로 사람을 살해했습니다. 바울을 죽이겠다고 하는 사람들도 열심당원처럼 해서 바울을 없애겠다는 것입니다.
Terrorism은 정치, 종교, 사상적 목적을 위해 폭력적 방법을 쓰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수단을 통해 민간인이나 비무장의 개인, 단체, 국가를 상대로 죽이거나 신체적 상해를 입히는 행위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하여 이들에게 공포심을 불러일으켜 어떤 행동을 강요하거나 혹은 어떤 행동을 중단하게끔 강요하는 행위입니다. terror를 하는 자들을 terrorist라고 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믿는 이념의 큰 뜻을 이루기 위해 민간인이나 관련되지 않은 사람들의 희생이 어쩔 수 없다는 가치판단을 내림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그 자신 혹은 자신들의 동조자들의 생명 또한 희생되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유대인들의 문제는, 자신들이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헌신과 충성을 다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새롭게 약진하는 그리스도교에 일침을 가하여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려고 산헤드린과 유대인들은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호세아5:11을 보면 ‘에브라임은 사람의 명령 좇기를 좋아하므로…’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과거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망한 것처럼 사람의 소리를 듣기 좋아했는지도 모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의도는 전혀 고려치 않았습니다. 오직 세속과 현실에만 안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많은 선지자와 선견자들을 보내고 끝내는 아들이신 예수님까지 보내셨지만, 전혀 자신들의 고집을 꺾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완고하다’라는 말은 자신의 고집이 너무 세어서 다른 사람들의 말이나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도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전혀 길들여지지 않은 완강한 암소처럼 그들은 자신들의 고집을 내세웠습니다. 도저히 어떻게 고칠 수 없었습니다.
오늘도 마귀는 성도들을 노리고 있습니다. 어떻게든지 하나님의 뜻이 성도들에게 전해지지 않게 하려고 온갖 수단방법을 강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놀아나면 하나님에게 반역하게 됩니다. 역사적으로 이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자들이 교회 안에 있습니다. 각종문제를 일으키고 교회를 어지럽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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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시민권(사도행전22:24-29)
오늘날 우리나라는 주민등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민등록이란 우리나라의 모든 사람들은 반드시 가지고 있는 증명서입니다. 주민등록은 보호와 통제입니다. 따라서 주민등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헌법에 따라야 하고, 반면에 외국인과 달리 법의 적용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어떤 나라의 국민이 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피’와 ‘귀화’입니다. 그 나라 국민에게서 태어나면 태어나자마자 그 나라의 국민이 되는 것입니다. ‘귀화’는 외국이면서 한국의 국적을 갖고 싶을 때 귀화법에 적용된 사람들을 절차에 의해서 국민으로 받아들인 사람을 말합니다. 태어나기는 프랑스에서 태어났지만, 귀화를 했다면 한국민의 적용을 받는 것입니다.
성경시대의 시민은 주로 Greece와 Roma의 시민권에 대해서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Greece와 Roma의 시민권을 적용시키는데 달랐습니다. Greece의 도시국가인 Athens는 ‘피’가 시민권을 가늠했으며, 반면에 Roma는 ‘뜻을 같이하는 자’에게 시민권을 부여했습니다.
로마인이야기를 쓴 Shiono Nanami에 의하면 Athens인들은 Athens 영토 안에서 둘 다 Athens 태생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만 ‘아테네 시민’이었습니다. Athens의 황금시대를 쌓아올린 대정치가 페리클레스(Perikles/주전495-주전429)도 두 번째 배우자가 Miletus 태생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아들은 Athens시민이 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 Perikles가 세운 업적에 보답한다는 이유로 특별대우를 받아서 겨우 시민권을 얻었다고 합니다.
부모가 둘 다 Athens 태생인 Socrates는 Athens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반면 Macedonia 태생인 Aristoteles는 뤼케이온이라는 학교를 창설하는 등 Athens 문화 창달에 크게 이바지했는데도 시민권이 없었습니다. Athens가 이렇게 폐쇄적인 이유는 Athens가 민주정체를 채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민주정체는 모든 유권자가 평등하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외국 출신에게도 평등한 권리를 주면 기존시민들의 반발을사서 언젠가는 사회불안의 원인이 될 게 뻔합니다. 그래도 민주정체를 시행하는 한. 시민은 모두 평등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따라서 Athens는 쇄국노선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Athens의 선착장에서 일하는 육체노동자도 시민이었는데, 서양 철학사의 거봉인 Aristoteles는 Athens에서는 이방인이었습니다. 모두 같은 Greece어를 사용하는데도 Sparta나 Corinth 태생에게는 시민권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Athens 태생은 Sparta나 Corinth 시민이 될 수 없었습니다.
Roma인의 정책은 동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Roma인은 정복한 족속들을 몰살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Roma인으로 동화시켰습니다.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씨저가 정복한 갈리아 부족장들을 원로원에 들여놓았습니다. 의료나 교육에 종사하는 자라면 피정복민족이든 피부색이 다르든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시민권을 주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의 속주민 병사들이 25년의 병역을 마치면 로마 시민권을 얻을 수 있도록 법을 제정했습니다. 황제들은 제국전역의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서 Roma시민권을 주는데 인색하지 않았습니다. 주후212년에 Caracalla 황제는 Roma제국에 살고 있는 모든 자유민에게 로마시민권을 준다는 법령을 발포했습니다. 그렇다고 아무나 Roma의 시민권이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Roma의 시민권을 가진 자들은 함부로 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인들은 십자가형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정죄 즉 재판을 받지 않고 함부로 할 수 없었습니다.
바울사도는 날 때부터 로마시민이었습니다. 천부장은 돈으로 Roma시민권을 샀습니다. Roma시민권이 없는 줄 알고 채찍질을 하다가 천부장에게 보고하고, 천부장은 곧 달려와서 결박을 풀었습니다. 그만큼 Roma시민권은 위력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Roma시민권은 부모가 Roma시민이면 그 자녀도 Roma시민이었습니다. 또한 Roma를 위해 크게 기여한 사람들에게 그 대가로 Roma시민권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돈을 주고서 Roma시민권을 샀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 사람들은 미국의 국적을 얻으려고 안달입니다. 우리나라의 많은 고위직과 돈 있는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미국의 국적을 얻으려고 야단법석입니다. 왜냐하면 미국의 시민권은 사람을 보호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곳에 붙잡혀있든지 최선을 다해서 보호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사도는 복음을 위해서 시민권을 사용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미국의 국적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영달과 안녕을 위해서입니다. 시민권을 가지되 사용처가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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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 받은 대로(사도행전22:4-16)
사도행전22:17-21 17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18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저희는 네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19 내가 말하기를 주여 내가 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20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의 피를 흘릴 적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줄 저희도 아나이다 21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바울사도는 회심하자마자 바로 전도를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3년간 아라비아사막에서 주님과 교제를 했습니다. 바울사도의 회심직후는 다음과 같습니다.
다메섹에서 복음을 전파함(9:19-22)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쌔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
아라비아에 3년간 머물렀다가 다메섹으로 돌아옴/ 갈라디아서1: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핍박으로 다메섹을 탈출함/사도행전9:23-25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저희가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그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내리니라
고린도후서11:32-33 다메섹에서 아레다왕의 방백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킬쌔 내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15일간 예루살렘을 방문함/사도행전9:26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갈라디아서1:18-19 그후 삼년만에 내가 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십오일을 유할쌔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바울사도는 회심 후에 예루살렘에 있는 헬라파 유대인들과 격렬한 논쟁을 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은 바울사도에게 많은 적의가 있었습니다. 바울사도가 유대인의 대표로서 전에는 그리스도인들을 열심히 박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바울을 변절자로 여기며 심히 공격했습니다. 바울에게 심한 적의를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사도는 예루살렘에 머물러있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렸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나가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도를 전한다고 해도 듣지 않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바울은 스데반의 일과 다메섹의 일을 주님께 말씀드렸지만 그래도 예루살렘사람들은 듣지 않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바울사도는 예루살렘의 전도를 접어야 했습니다.
오늘의 우리들은 각자의 사명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해외선교사로, 어떤 사람은 국내의 목회자로, 어떤 사람들은 직장의 선교사 등으로 각각의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의 사정을 가장 잘 아시는 성령께서 우리들에게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사도행전22:4-16)
그가 또 가로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저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14절)
아나니아는 바울사도가 다메섹에서 제일먼저 만난 사람입니다. 이미 성령께로부터 사울에 대하여 들었기 때문에 사울에 대한 루머를 일축하고 사울에게 하나님의 사명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나니아는 하나님을 바울에게 그냥 하나님으로 말하지 아니하고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으로 묘사했습니다. 아나니아는 사울(바울)에게 우리조상들의 하나님으로 묘사함에 따라 그리스도의 도가 신흥종교가 아닌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새롭게 만들어진 종교가 아니고 구약시대부터 약속된 도(道)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그리스도의 도를 믿는 우리들을 유대인들은 심히 오해를 했습니다. 마치 신약시대에 처음으로 생긴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아브라함과 다윗과 선지자들을 말씀하셨어도 그들은 막무가내였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리스도를 배척했던 것입니다. 또한 ‘천주교는 큰 집이고 기독교는 작은 집이다’고 하는 말들을 하고 있습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로마 카톨릭은 오다가 잘못된 길로 들어선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과 질적으로 다른 사람들입니다. 로마 카톨릭은 온갖 미신들을 혼합시키고 살을 불렸던 자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멀리 갔었습니다. 따라서 로마 카톨릭 또는 로마교라고 불러야 맞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로마 카톨릭에 있었다가 종교개혁을 해서 마치 로마 카톨릭은 구교, 개신교는 신교로 그들(로마 카톨릭)이 조롱하는 말로 썼던 용어입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루터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심하게 오염되고 변질된 로마교를 떼어내고 홀로서기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큰집, 작은집 하고 운운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이후 모든 성도들은 ‘저 의인’을 보는 것입니다. 아나니아가 바울에게 말한 ‘저 의인’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저 의인입니다. 이 의인 때문에 예루살렘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예루살렘의 종교권자들이 난리법석을 떨었습니다. 관원들이 긴장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종교권자들은 그 이유를 몰랐습니다. 왜 스데반이 기쁨으로 그 의인을 위해서 순교를 당했는지를 몰랐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유대에서 막강하게 종교권을 행사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을 전혀 몰랐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들이 모세의 자리에 올라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교권주의자들은 모세의 자리에 많이 앉아있습니다. 분명히 다른 도를 전파하는 사람들에게 면책권을 주기도 하고, 자기마음대로 전횡을 휘두르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두렵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두렵지 않다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의 은혜에서 배제를 당할 것입니다. 유대인들처럼.
바울의 출생과 배경(사도행전22:2-4)
22:2-21은 3-4절은 바울의 출생과 배경, 5-16절은 바울의 회심, 17-21절은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경위를 변증하고 있습니다.
어떤 타국인이 우리와 별로 사이가 좋지 않은데 유창한 한국어로 말을 한다면 아마도 말할 동안에는 조용히 할 것입니다. 조금 전까지 바울을 죽이려 했던 폭도들이 잠시 조용해졌습니다. 바울사도의 말을 일단 들어보자는 것입니다.
바울은 ‘길리기아’Kilikiiva/Killikiîa ‘다소’tarsov"/tarsôs 출신이었습니다. 길리기아는 소아시아의 한 지역입니다. 다소는 길리기아의 수도입니다. 바울이 다소에서 출생했습니다. 다소는 유속이 빠른 키드누스 강변의 도시입니다. 지중해에서 16km, 타우루스 산맥에서 남쪽으로 48km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했습니다. 다소는 소아시아의 산맥의 녹은 눈으로 이루어진 차가운 강물이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평원 위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해수면 위로 21m되는 지점에 위치한 이 도시 아래에 항구호수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지중해 선박이 접근하기 용이하고 안전한 곳입니다. 이 독특한 수로 때문에 다소 내륙은 해상 무역이 번창하였습니다.
주전41년에 이 내륙 호수에서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를 만나 사랑에 빠진 장소입니다. 유브라테스로부터 시작되는 고대 무역로가 안디옥 및 다소에서 동쪽으로 80km 되는 동지중해의 대로와 결합하여 길리기아 중앙을 통과하여 북으로 돌아 다소산맥을 통과 소아시아의 고지에 이릅니다. 다소인들과 그 이웃들은 주전1,000년에 이 고지대로 가는 자연상태의 협소한 통로를 넓히기 위해 암벽을 깎아서 뚫는 위대한 공학적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이 성문은 고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산악 통로 중 하나입니다. 육지의 대로와 바다의 길로 인해 다소는 동과 서가 만나는 가장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페르시아 제국 아래서 다소는 총독의 지배권이었습니다. 크세노폰은 다소를 “위대하고 번영한 도시”라고 했습니다. 주전334년 알렉산더 대왕이 다소를 점령하고 헬라적 요소들을 더욱 가미시켰습니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가 소요를 진압하기 위해 주전171년 길리기아에 체류했습니다. 그는 동양적 영향보다 헬라적 요소를 고무하기 위해 다소를 헬라 자치도시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통치초기에 다소에 산업과 상업을 육성시키려고 유대 식민자들을 이주시키고 헬라인과 동등한 권리를 주었습니다.
폼페이가 주전64년에 길리기아 속주(Province)를 재편성하였을 때 다소는 로마 정부의 사령부였습니다. 안토니는 완전한 로마 시민권을 모든 다소 주민에게 하사하고 세금을 면제해주고 자치권을 주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러한 특권을 더욱 확실히 보장했습니다. 다소에서 화폐가 주조되었습니다. 이웃의 길리기아 성읍들은 이러한 면에서 동과 서의 혼합지역이었습니다.
다소에는 그 밖의 Greco-Roman 도시처럼 정부의 지원을 받는 대학이 있었습니다. 스트라보(주전63년)는 다소인들의 교육과 철학에 대한 열정은 아테네 사람과 알렉산드리아인들을 능가하였다고 했습니다. 또한 길리기아 생도들은 토착민이었지 위의 두 도시의 경우에서처럼 타지에서 온 자들이 아니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정치적 성향을 가진 스토아 철학자 아데노도루스(주전74년-주후7년)는 Augustus의 고문이자 교사로서 길리기아 태생이었는데, 그의 지도 아래 다소는 플라톤의 이상적인 정부의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주전15년 아데노도루스(Athenodorus)가 황제와의 오랜 관계를 유지한 명성을 지닌 채 다소로 내려왔을 때 다소의 몇몇 민주적 절차들을 복원하라는 임무가 이 유능한 철학자이자 지도자에게 떨어졌습니다.
따라서 다소는 많은 시민들이 소중하게 여겼던 높은 수준의 시민의식을 발전시켰습니다(행 21:39). 바울은 다소에서 태어나서 성장하였습니다. 개종 후 약 10년간을 그곳에서 지냈습니다(행9:30/갈1:21). 다소의 복합적인 문화는 바울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엄격한 교육방침 때문에 바울은 다소의 대학에 다닐 수 없었습니다. 청년기 바울에게 바리새적 교육이 영향을 주었다는 것입니다(행22:3).
사도바울은 ‘가말리엘’Gamalihvl/Gamalliêl은 그들의 미쉬나(Mishnah)에 인용되어 있는 탁월한 타니임, 즉 교사들의 대가족 우두머리였습니다. 사도행전에 언급된 한 사람은 가말리엘 하자켄(Gamaliel ha-saqen)입니다. “장로 가말리엘”로 알려져 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그의 조부는 원로원 의원 힐렐(Hillel)이었다고 합니다. 장로 가말리엘은 Torah에 관한 랍비의 주석서 미쉬나의 많은 구절에 인용되었습니다. 가말리엘은 교사에게 주어지는 모든 유대식 칭호 중에서 가장 높은 Rabba/on이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요20:16). 그에 대한 기억은 랍비의 전승에서 가장 큰 찬사와 존경의 하나가 되어왔습니다. 초기 기독교 교회에 관하여 말한 그의 정확한 의견은 교계에서 많은 토론의 주제가 되어왔습니다. 사도행전에서 가말리엘은 사로잡힌 사도들에 관하여 온건한 실용주의자의 입장을 주장하였습니다. 가말리엘은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의 군중들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면서 가말리엘이 자기의 선생이라고 주장할 때에 언급했습니다. 바울은 그의 이름을 자기 자신의 경우 가말리엘의 방침이 군중에게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은근한 암시로서 언급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바울사도는 출신이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유대인으로서 최고의 교육을 받은 사람입니다. 앞길이 푸르렀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복음보다 못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바울과 야고보(사도행전21:17-20)
신약성경에는 5명의 야고보/!Iavkwbo"가 등장합니다. 세배대의 아들이자 요한의 형제인 게네사렛 호수의 어부인 야고보(막1:19,29, 마4:21, 눅5:10).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막3:18, 마10:3, 눅6:15, 행1:13). 더 어린(막15:40). 사도 유다(가롯 유다가 아님)의 아버지 야고보입니다.
바울사도가 예루살렘에서 만났던 사람이 “주의 형제”야고보입니다(갈1:19). 야고보는 예수님의 네 형제 중 맨 첫째입니다(막6:3, 마13:55). 사실 야고보는 예수님의 생애동안 예수님을 가족으로만 알았습니다(막3:21,31). 그러다가 을 보면 야고보는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을 목격했습니다(고전15:7). 야고보는 비로소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하고서야 예수님을 믿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주님이 형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로는 주의 종으로 자신을 여겼습니다. 야고보는 초기공동체에서 특별한 권위를 소유했습니다(행12:17). 바울이 예루살렘에 있었을 때(35년경) 베드로와 야고보를 방문했습니다(갈1:18).
야고보는“세 기둥”가운데 하나였습니다(갈2:9/야고보, 요한, 베드로). 야고보는 이방인 선교와 관련한 예루살렘회의에서 바울 및 바나바와 의견을 같이했습니다(갈2:1-10, 행15:13). 야고보와 예루살렘의 장로들은 “유대주의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야고보는 회의에서 이방인선교에 어떤 조건을 부과하지 않았습니다. 이방인 기독교인들에게 할례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갈2:3-6). 이방인기독교인들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은 반면, 야고보는 유대기독교인들에게는 율법의 의식적명령의 준수를 요구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유대기독교인과 이방인기독교인간의 식탁친교를 거부하기도 했습니다(갈2:12). 예루살렘교회의 지도권은 베드로가 떠난 후 야고보에게 맡겨졌습니다. 갈라디아서2:12은 예루살렘 밖에까지 야고보의 광범위한 영향력이 미쳤음을 말합니다. 바울은 세 번째 여행에서 이방인교회의 연보를 전달하기 위해 예루살렘의 야고보를 방문했습니다(행21:18). 유대기독교 전승에 따르면 야고보는 “의로운 자”라는 칭호를 지녔습니다(Hegesippus; Clement of Alexandria). 요세푸스는 야고보가 대제사장 안나스의 예루살렘교회 핍박시 희생되었다고 기록했습니다. 안나스는 야고보를(예루살렘 교회의 다른 몇몇 교인들과 함께) 베스도가 사망하고 아비누스(62년)가 도착하기 전에 돌로 쳐 죽였다고 했습니다. Hegesippus는 야고보의 순교를, 바로 뒤이은 예루살렘 함락과 연관시켰습니다.
바울사도는 야고보에게 그간에 이방인에게 어떻게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는지를 자세하게 말했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사실 바울사도는 3차까지 여행을 하면서 성령에 이끌렸습니다. 자신의 고난과 고통은 잊다시피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보류하다시피했습니다. 오직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해지는 것만 생각했습니다. 바울사도가 그렇게 해서 오늘의 우리까지 복음이 빨리 전해졌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사도들과 우리 이전의 전도자들에게 복음의 빚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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