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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람들(사도행전27:33-44)

 

42군사들은 죄수가 헤엄쳐서 도망할까 하여 저희를 죽이는 것이 좋다 하였으나 43 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려 하여 저희의 뜻을 막고 헤엄칠 줄 아는 사람들을 명하여 물에 뛰어내려 먼저 육지에 나가게 하고

 

바울사도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배부르게 먹고 배를 가볍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운송하고 있는 밀을 바다에 던졌습니다. 그리고 날이 새기를 기다렸습니다. 날이 새자 어느 땅인지 모르지만 육지가 보였습니다. 그 땅의 경사진 항만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선원들은 거기에 배를 접안하고자 의논한 후에 배를 그곳에 대고자 했습니다. 먼저 닻줄을 모두 끊어서 바다에 버렸습니다. 그리고 방향을 잡는 킷줄을 늦추었습니다. 돛을 달아서 해안으로 배를 이동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물이 합해지는 곳으로 들어가자 배가 더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배의 앞부분(이물)은 부딛혀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배의 뒷부분은 깨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바울사도의 말대로 한 섬에 걸린 것입니다.

죄수를 호송하는 군사들은 혹시 죄수가 헤엄쳐서 도망갈까봐 죄수들을 모조리 죽이자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죄수들이 도망가면 자신들이 불이익을 당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백부장율리오는 군사들을 제지했습니다. 그 이유는 바울사도도 죄수에 포함되었기 때문입니다. 죄수를 죽이려면 바울까지 죽여야 했기 때문에 백부장 율리오는 그들의 뜻을 제지하였습니다. 그래서 배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육지에 올랐습니다. 배가 부서졌기 때문에 널조각이나 배의 물건들을 이용해서 상륙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나쁜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상식으로나 어떤 것으로 생각해도 결코 아닌데 맞다고 하는 사람들, 참 나쁜 사람들입니다. 국민들이 마땅히 써야 할 세금을 운하공사에 꼴아박았던 사람들, 나쁜 사람들입니다. 마땅히 수사를 해야 할 사항을 상사라고 수사하지 못하게 한 사람들 나쁜 사람들입니다. 진리를 왜곡하여서 비진리가 진리라고 한 사람들 나쁜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이 세상에는 좋은 사람들도 많습니다. 백부장율리오는 어떻게든지 바울의 편리를 봐주고자 했습니다. 그가 누구를 만나든지 허락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자신의 이권을 얻기 위해서 그야말로 애국자들을 많이 죽였습니다. 그대로 두면 국익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었던 사람들을 중상모략을 해서 많이 죽였습니다. 이름을 거명하면 금방 알수 있는 많은 사람들을 사사케 했습니다. 그리고 간신들이 항상 왕주변에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나라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좋은 사람들은 이름없이 빛도 없이 하나님의 일을 대행하였습니다. 백부장 율리오는 어떡하든지 바울사도를 보호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국가에 많아져야 합니다. 특히 정치권에 이러한 사람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원칙을 지키는 정치인, 신뢰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나라가 잘 돌아갑니다. 좋은 사람들, 상식이 통하는 사람들, 그리고 사람들의 사랑을 주고 받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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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생각하는 소망(사도행전27:14)

 

13남풍이 순하게 불매 저희가 득의한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가까이 하고 행선하더니 14얼마 못되어 섬 가운데로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대작하니 15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 가다가 16가우다라는 작은 섬 아래로 지나 간신히 거루를 잡아 17끌어 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가더니 18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19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저희 손으로 내어 버리니라 20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

 

인간의 소망이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것입니다. 대체적으로 소망이란 사람들 개개인이 동화 같은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망은 소망일 뿐 실제가 되지 않습니다. 소위 전설 같은 존재, 신화의 인물이라는 말에 속아(?)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들의 발자취를 쫓으려 하지만 어림없는 말입니다. 그대로 되지 않을뿐더러 모양도 내기가 어렵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의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소망처럼 ‘남풍이 순하게 불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넘쳐납니다. 즉 ‘득의한 줄 알고’입니다. 그리고 바라던 항구에 순하게 입항(入港)할 것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인생은 그렇게 순항을 하지 않습니다. 갑자기 광풍이 일어나는가 하면, 풍랑이 일기도 하고, 천둥번개가 난무하는 것 같은 날이 너무나 많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원하는 대로 하지 못하고 배가 가는대로 즉 세상의 풍파에 떠밀려 갈수밖에 없는 상황이 비일비재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소망의 항구에 다다르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어릴 때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삶의 잔이 너무나 써서 인생을 좋게 기술하지를 않습니다. 우리의 과거를 회상해보면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어릴적에 그렇게 가지고 싶었던 것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어떤 직위를 거의 획득한 상태에서 라이벌로 인해서 그 명단에 들지 못했습니다. 어떤 사람을 사랑했는데, 그 사람과 헤어져야만 했습니다. 어떤 어머니는 아이가 어렸을 때 잃기도 했습니다. 어떤 이는 일찍 부모를 여의기도 했습니다. 어떤 이는 아직 어린나이에 가장노릇을 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인생은 소망이 없습니다. 순한 남풍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지루한 유라굴로가 시작되는 것이 인생입니다.

인간이 생각하고 인간이 준다고 하는 소망은 항상 기대에 어긋납니다. 인간적인 소망은 씁쓸합니다. 인간적인 소망은 인생의 행로가 어둡습니다. 소망이 아니라 절망적입니다. 인생을 바꾸는 15분, 꿈은 이루어진다. 라는 슬로건은 있지만, 그것은 결코 모든 사람의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서도 소망은 인간 안에 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취될 것 같지 않은 소망을 품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과 세상적인 소망은 같이 가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긍정적인 것은 같이 가지 않습니다. 인간이 준다고 하고, 인간이 생각하는 소망은 우리의 영혼을 갉아먹을 뿐만 아니라 어떤 때는 아예 파멸시켜버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없는 소망, 성경적이지 않은 소망에 선뜻 발을 내딛지 말아야 합니다. 유라굴로가 언제 엄습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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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전문가인가? (사도행전27:9-11)

사람들은 흔히 전문가(professional)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전문가라는 말을 너무나 많이 사용하고 있어서 어떤 사람이 전문가인지, 어떤 사람이 비전문가인지 구별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이 사람도 전문가, 저 사람도 전문가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전문가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누가가 본문에서 묘사한 바울의 항해와 난파의 기록은 생생하게 고전적인 필치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단순하게 파선에 대한 기록만이 아닙니다. 본문은 “고대 항해에 대한 지식을 제공해 주는 매우 시사적인 문서 중의 하나라고 말했습니다. 9-11절을 보면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행선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저희를 권하여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행선이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 하되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고 누가는 기록했습니다. 바울은 죄수 아닌 죄수로 Roma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호송책임자는 역시 Roma의 백부장 율리오였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백부장들은 모두 괜찮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리오도 Roma로 가는 길에 바울사도가 성도들에게 대접받음을 허락한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이튿날 시돈에 대니 율리오가 바울을 친절히 하여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 받음을 허락하더니/3절). 바울일행은 바람의 거스림을 피하여 항해하였습니다(4절). 소아시아와 고대 시리아 지방의 지중해 연안지방에서는 여름에 서쪽에서 바람이 거세게 불어왔습니다. 이 바람을 맞으면 항해가 곤란했기에 바람을 피할 수 있는 면을 타고 항해를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순조롭게 소아시아의 한 동쪽지점에 도착해서 해안을 따라 서쪽으로 항해를 계속했습니다.

무라는 애굽과 로마사이를 왕래하는 곡물선단의 주요항구입니다. 거기에서 율리오는 아드라뭇데노라는 배를 만났습니다. 그 곡물선단은 Roma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Ramsay는 ‘그 배는 정규항로로 운행하여 아마도 빨리 Roma로 가기위해 빨리 달렸을 것이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가을에는 바람의 방향이 북풍으로 바뀔 위험이 항상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항해하기가 점점 어려웠습니다. 7절을 보면 무라에서부터는 강한 북서풍이 불어와서 천천히 그리고 어려운 항해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니도에 도착한 배는 잠깐 생각할 시간을 가졌습니다. 니도항은 애굽으로부터의 상선이 자주 드나들기 때문에 백부장은 니도항에서 알렉산드리아호에 올라타고서 순항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때 바울이 말합니다. 금식하는 절기가 지났으므로 항해하기가 어렵다고 했습니다. 보통 금식하는 절기는 9-10월 10경이었습니다. 금식하는 절기는 9월 중순경이었습니다. 9월 중순경이후에는 지중해를 항해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11월11일 이후에는 아예 항해가 불가능했습니다. 이것을 바울사도는 여행을 하면서 익히 알고 있었기에 백부장에게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의견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었습니다. 앞으로 일어날 위험한 일을 결국 자초한 것입니다. 소위말해서 자격들을 많이 따지는데, 자격이 꼭 능사는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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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항해(사도행전27:1-8)

 

1 우리의 배 타고 이달리야로 갈 일이 작정되매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을 아구사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에게 맡기니 2 아시아 해변 각처로 가려 하는 아드라뭇데노 배에 우리가 올라 행선할쌔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하니라 3 이튿날 시돈에 대니 율리오가 바울을 친절히 하여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 받음을 허락하더니 4 또 거기서 우리가 떠나가다가 바람의 거스림을 피하여 구브로 해안을 의지하고 행선하여 5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를 건너 루기아의 무라성에 이르러 6 거기서 백부장이 이달리야로 가려하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나 우리를 오르게 하니 7 배가 더디 가 여러 날만에 간신히 니도 맞은편에 이르러 풍세가 더 허락지 아니하므로 살모네 앞을 지나 그레데 해안을 의지하고 행선하여 8 간신히 그 연안을 지나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니 라새아성에서 가깝더라

 

바울일행은 가이사랴를 떠나 시돈으로, 구브로 해안을 지나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를 건너서 루기아의 무라성에 이르렀습니다. 무라에서 이달리야로 가려하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배는 더디 갔습니다. 여러 날 만에 간신히 니도 맞은편에 이르렀습니다. 그리하여 간신히 살모네 앞을 지나 그레데 해안에 , 그리고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사실 이 배에는 바울일행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전혀 예측하지 못한 항해를 이들은 하고 있습니다. 물론 바울은 대충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은 자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이 과거에 여행을 할 때 되도록 이 시기는 피했기 때문입니다. 예측할 수 없는 바람이 몰아쳐 항해를 할 수 없었던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동행한다는 것은 함께 걷는 것입니다. 어떤 목적지까지 함께 걷는 것이 동행입니다. 사람이 누구와 동행하느냐에 따라서 가치관이 달라지고, 인생관이 달라지며, 가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세상과 동행하느냐, 하나님과 동행하느냐에 따라서 인생의 행로가 달라집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자꾸 한계를 주고, 한계를 정합니다. 세상은 우리가 한계에 부딪히면 포기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앙을 요구합니다.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이 계시기에 괜찮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들의 인생행로는 정해져 있을지라도 우리들은 모릅니다. 오직 하나님만 아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도들은 필히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들은 성경에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했습니다. 그 시대에 유독이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은 에녹이었습니다. 그 결과 에녹은 하나님께서 데려가셨습니다. 어느 날 사람들은 에녹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70인역에는 에녹이 하나님께 기쁘시게 했다고 번역되었습니다. 그는 죽지 않고 천국으로 올려 진 것입니다. 따라서 긴 인생의 항로라도 하나님과 동행한다면 별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고통과 환란이 있을 수 있으나 주님께서 건져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직 주님을 믿는다면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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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무죄를 선언한 Roma 행정관들(사도행전26:30-32)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바울과 Roma의 행정관들이 생각하는 바울의 죄에 대한 관점은 달랐습니다. 유대의 법에 통달한 아그립바도 바울의 죄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베스도도 어느 누구도 바울에게서 죄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죄가 있다고 없는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했지만, 바울에게서는 전혀 죄만한 것들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아그립바는 황제에게 상소하지 않았다면 충분히 석방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제 베스도는 황제에게 보낼 바울의 건에 대해서 충분하게 납득했습니다. 죄는 없지만 황제에게 호소했기 때문에 문서를 작성해야 했습니다.

선교라고 하는 것, 전도라고 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 등은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사항입니다. 누구나 공동적으로 받은 사명입니다. 특별히 선교에 열정을 가진 성도들은 자신의 모든 것들을 접어버립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참 이상한 일입니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장래가 촉망되는 사람이, 또 실력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모든 것을 접어버리고 오지의 선교지로 훌쩍 떠나는 뒤에 혀를 끌끌하고 찹니다. 이것이 세상과 교회와 다른 점입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교회의 가치관은 다릅니다. 성도의 가치관과 불신자들의 가치관은 다릅니다.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도 다릅니다. 생각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추구하는 것도 다르고 실천이 다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색다른 사람들입니다. 2세기경의 저자미상의 작품으로 Diognetus에게 보내는 서신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색다른 사람들

그리스도인들은 나라와 언어 혹은 풍습에 의해서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의 도시에 살거나 어떤 이상한 방언을 말하거나 혹은 어떤 독특한 생활양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의 이 가르침은 호기심이 강한 사람들의 재능이나 사색에 의해 고안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 하듯이 단순히 인간적인 가르침을 전파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에게 기회가 주어지는 곳이면 헬라의 도시와 외국의 도시, 어디에나 살았다. 그들은 의복과 음식 그리고 삶의 다른 면들에 있어서 지방의 풍습을 따랐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그들 자신의 시민권의 놀랍고 유별난 형태를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

그들은 고국에 살고 있으나 이방인이다. 시민으로서 그들은 모든 것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눈다. 그러나 이방인처럼 모든 어려움을 겪는다. 모든 외국은 그들에게 고국과 같고, 또한 모든 고국은 외국과 같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결혼하고 자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원치 않은 아기를 죽이지 않는다. 그들은 식탁에 앉아 함께 식사하지만 잠자리를 함께 하지는 않는다(성적문란이 없음을 가리킴). 그들은 “육신”으로 존재하지만 “육신을 따라” 살지 않는다. 그들은 지상에서 그들의 생애를 보내고 있으나 하늘의 시민들이다. 그들은 제정된 법을 준수하고 또한 그들 자신의 삶에 있어서는 그 법보다 탁월하다.

그들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나 모든 사람은 그들을 박해한다. 그들은 무명하나 비난받는다. 그들은 사형을 당하나 생명을 얻는다. 그들은 가난하지만 부요해지고 있다. 그들은 모든 것이 모자라지만 모든 것이 풍족하다. 그들은 굴욕을 당하나 그 굴욕을 통해서 영광을 얻는다.

그들의 이름에 누명을 씌우나 그들은 깨끗하다. 그들은 조롱당하나 대신 축복한다. 그들은 부당하게 다루어지나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행동한다. 그들이 선을 행할 때 그들은 악행자처럼 처벌받는다. 처벌을 받을 때 그들은 새 생명을 얻은 자처럼 기뻐한다. 그들은 외국인으로서 유대인의 공격을 받으며, 헬라인의 박해를 받는다. 그러나 그들을 미워하는 자들은 그들의 적의의 어떤 이유도 제시할 수 없다.

간단히 말해서 몸에 대한 영혼의 관계는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영혼은 몸의 모든 지체를 통하여 퍼져 있고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모든 도시들에 걸쳐서 존재한다. 영혼은 몸 안에 있으나 몸에 속하여 있지 않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안에 있으나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다.

성도들은 분명히 색다른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 살고 있으나 이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그렇고, 사도들이 그러하며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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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인이었던 바울(사도행전26:4-8)

 

4 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 중에와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태를 유대인이 다 아는바라 5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저희가 증거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좇아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6 이제도 여기 서서 신문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7 이 약속은 우리 열 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왕이여 이 소망을 인하여 내가 유대인들에게 송사를 받는 것이니이다 8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사람들은 흔히 말하기를 ‘나만 깨끗하면 돼, 하나님이 아실 테니까 사람에게는 인정을 못 받아도 돼’라고 생각하며 말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적대감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교회는 일부 서울의 대형교회 몇 교회 때문에 교회전체가 욕을 먹는 것은 물론이고 그 여파로 인해서 정체상태로 있습니다. 따라서 바울사도는 유대인들의 증오심 때문에 죄도 없는데도 죄인을 만들려고 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바리새인들은 부활도 있고, 천국에 대한 소망도 믿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도를 전하는데 유대인들이 태클을 걸었다는 것입니다. 과거 에는 바울자신도 바리새인으로서 그 도를 아는데 바리새인들이 태클을 걸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예가 많습니다. 죄는 다른 사람이 졌는데 오히려 죄인취급을 받거나 오해를 받는 예가 많습니다. 이럴 경우에 교회는 타격을 입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우리나라는 장로 대통령이 세 사람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도 성도답게 행동하지 못했습니다. 이 장로들이 교회에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그리고 여러 목사들이 교회에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이로 인해서 성도들이 줄고, 교회에 대한 인식이 점점 나빠지게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은 Roma에 가기 위해서 황제에게 호소한 것이지, 죄목이 마땅치 않아서 황제에게 호소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사도는 !Agrivppa"/Agrîppas에게 자신이 유대인들에게 전체적인 신앙의 핵심 때문에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점을 밝혔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바리새인이었다는 점을 말했습니다. 제대로 된 바리새인이라면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Roma의 황제 중에 소위 오현제라고 하는 Marcus Aurelius Antoninus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stoa철학자이기도 합니다. 冥想錄을 저술한 황제입니다. 그러한 그가 그리스도인들을 엄청 박해했습니다. 한 면만 보면 괜찮은 사람인데, 엄청나게 사람을 괴롭히고 죽인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세상은 모순이 많습니다. 인간들의 죄 때문에 정의가 사라지고 불의가 판을 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가장 적게 알고 있는 자들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자들을 가르치려 하는 세대입니다. 사실 뒤집어보면 유대인들이 죄 값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역으로 아무 죄도 없는 바울사도가 어이없게도 피고인으로 심문을 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진실한 성도는 거꾸로 된 세상에 바르게 서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영원의 행선지를 위해서 달려가기 때문에 이 세상의 어떤 사람들하고는 확연하게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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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이미’와 ‘아직’의 구속적 긴장(사도행전26:1-3)

 

박형용 교수는 바울과 오늘날 신학자들은 바울과 똑같은 구속역사의 긴장 속에 처해있다고 했습니다. 바울사도는 예수님의 구속사역 즉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되돌아보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바라보는 형편에 있었고, 오늘날의 성도들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되돌아보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바라보는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이 무려 2000이란 간격이 있지만 아직도 똑같습니다. 따라서 바울사도와 우리는 같은 긴장 속에 있습니다. 바울사도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성취된 구원사건이 어떻게 인간과 세상에 적용되느냐에 관심을 기울여 서신을 기록했습니다. 오늘날도 같습니다. 바울사도와 함께 ‘말세를 만난’(고전10:11) 사람들로서 그리스도의 사건을 되돌아보고, 다른 한편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리는’(살전1:10) 사람들로서 미래를 내다보는 입장에 있습니다. 이처럼 바울사도와 우리는 ‘이미’와 ‘아직’/already-not yet 이라는 구속역사적 긴장 속에 처해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바울사도는 현실만의 말을 하지 않고, 미래적인 요소를 반드시 말했습니다. 우리 역시 구속의 성취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효과가 있느냐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만 미래적인 요소를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점에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순례자(pilgrim)로 살아가야 합니다. pilgrim은 짐이 가벼워야 합니다. 짐이 가벼워야 빨리 옮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재의 성도들은 그러지를 못하게 됐습니다. 이 땅에 너무나 많은 미련을 두고 있습니다. 이 땅에 좋은 것들이 너무나 많이 있어서 천국으로 떠나기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mammoth 교회당, 상아궁전과 같은 집들, 화려한 agit, 최고급 승용차 등이 너무나 좋아서 쉽게 떠나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마치 절대로 천국이 없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입니다.

오늘의 우리들은 천국과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을 항상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과 천국이 불연속선에 있다고 생각하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뒤돌아보고 재림을 기다리는 구속역사의 입장으로 볼 때 긴장이 되지 않습니다. 즉 바울시대보다 현시대는 많이 세속화되었습니다. 성도들은 현실을 무시해서도 안 됩니다. 뿐만 아니라 미래지향적임을 무시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이세상과 오는 세상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도가 현실에 너무나 미련을 두고 이 세상을 천국처럼 여긴다고 하면 큰 문제입니다. ‘이미’와 ‘아직’사이를 모르고 현실에만 안주하고 있다면 더는 성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바울사도는 어떻게든지 당시 세계의 중심이라고 하는 Roma에 가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말한 죄수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의 사정에 밝은 Agrîppa왕 앞에서 변명을 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그의 원수들이 격렬하게 비난을 퍼부었을 때도 담대하게 조용히 변명했고, 지혜와 능력으로 그들의 고소내용을 반증했으며, 그들에게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습니다. 분노를 터뜨리지 않고 깨끗한 양심으로 그들을 대하였습니다. 아직 그의 사명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사명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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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ece인과 유대인(사도행전25:6-12)

 

Greece에서 조국을 떠나 의국으로 이주하는 것을 의미하는 diaspora는 오늘날에는 유대인만의 전용어처럼 여기고 있지만, 조국을 떠나 외국으로 이주하는 일에서는 Greece족이 유대인들보다 먼저였습니다. 하지만 Greece인의 이주와 db대인의 이주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습니다. Greece인은 아무것도 없는 땅에 도시를 건설하고, 그곳을 기지로 하여 수공업이나 무역업으로 부를 축적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미 존재하거나 번영하고 있는 도시로 이주하여 수공업이나 무역업, 금융업으로 부를 축적했습니다. 주전1000년에 시작된 그리스인들의 이주로 지중해 세계는 서방과 동방을 막론하고 곳곳에 Greece인 도시가 건설되었지만, 유대인이 건설한 도시는 전혀 없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통일왕국이었기 때문에 굳이 가나안을 떠나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주전주후를 아우르는 시대에도 지중해의 동방에 있는 여러 도시에는 대규모 유태인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지만, Roma를 비롯한 서방도시에는 동방만큼 규모 가 큰 유태인 사회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Pax Romana의 확립과 사회간접자본의 보급은 서방의 경제력을 향상시켰습니다. 그때까지는 불균형했던 동방과 서방의 경제력이 균형을 이루었습니다. 지배자인 로마로 부가 집중되지 않을까 우려했지만, 실제로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로마 제정시대에 제국의 3대 도시는 Roma와 Alexandria와 그리고 Antioch이었습니다. 그러나 서방은 Roma였고, Alexandria와 Antioch은 동방이었습니다. 지배자인 Roma인 자신이 제국전역의 부의 흐름은 중요시했지만, Roma에만 부가 집중되는 것은 원하지 않았습니다. 속주세도 피지배자가 지배자 Roma에 바치는 상납금이 아니라 그들의 거주지역을 포함한 제국전역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안전보장비였습니다. Augustus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서방의 경제력향상은 유대인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대민족의 이주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수 있는 조건이 서방에도 갖추어진 것입니다. 이 시기에 황제에 즉위한 사람이 Tiberius였습니다.

불신자들 편에서 보면 유대인들이 편협하게 보였습니다. 물론 당시의 그리스도인과 유대인들을 비교할 때도 역시 그랬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우상을 섬겼고, 돈을 좋아했으며, 하나님을 수시로 떠난 사람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결여되었기 때문입니다.

헬라인과 유대인들은 서방에서 양대 산맥처럼 행세하였습니다. 유대인은 유대인대로, 헬라인은 헬라인대로 서로 자신들이 잘났다고 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Roma내에서 많은 충돌이 있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지식이나 권력, 그리고 재물들은 바람 앞에 겨와 같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Roma의 영광, 헬라의 영광, 유대의 영광은 지금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만 영원한 것을 사람들이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러하며, 미래에도 그럴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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